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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민주적 사회주의자의 길

『김학철전집』 발간에 부쳐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명예교수. 저서로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근대소설사론』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문학의 귀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연변에서 부쳐온 『김학철전집』 여덟권1)을 받아들고 새삼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 가이없다. 식민지시대에는 중국에서 일제와 투쟁했고, 해방 직후에는 서울에서 미군정에 저항했고, 월북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불화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을 비판한 고매한 사회주의 전사 김학철(金學鐵, 1916~2001) 선생! 태극기와 붉은기, 애국애족과 사회주의국제주의가 걸림없는 자유의 경지에서 따듯하게 제휴한 경우는 일찍이 없었거늘, 이 깨끗한 마음이사 일체의 전제(專制)에 저항하는 신비로운 원천일지도 모른다. 민주적 사회주의의 길 위에서 일생을 불굴의 혁명적 낙관주의를 품성대로 견지해오신 선생은, 아, 최후의 순간, “희망이 없어”라고 뇌시며 운명하셨다. 노혁명가의 탄식 앞에서 모든 말길이 끊어진다.

 

 

1. 김학철 귀국기

 

『격정시대』가 한국에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은 현재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작가 김학철의 자전적 장편소설이다”2)로 시작되는 서문을 읽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가 연변에 생존하고 있다니! 해방 직후에 나타났다 홀연 사라진 김학철을 남한으로 불러낸 6월항쟁(1987)의 마술에 감사하는 한편, 중국공산당의 국제전사인 그가 바로 그 중국에서 ‘반동작가’로 지목, 4인방 몰락(1976) 이후에야 해금, 그 결실이 1986년 중국료녕민족출판사에서 간행된 『격정시대』라는 대목(격정시대① 7면)에 이르러 당혹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서문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앞선 소개들이 없지 않았다. 선편(先鞭)은 이정식(李庭植)·한홍구(韓洪九) 엮음 『항전별곡』이다.3) ‘조선독립동맹 자료Ⅰ’이란 부제가 보여주듯 1942년 중국공산당과 연계, 화북(華北)에서 민족해방단체로 결성된 조선독립동맹과 그 군사조직 조선의용군(조선의용대의 후신)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소개인데, 6·25 이후 한국에서 철저히 봉인된 사회주의민족해방투쟁사의 뚜껑을 여는 역사적인 문헌이 아닐 수 없다. 이 책 속에 김학철이 껴묻어 한국에 상륙한바, 그 실질적 편집자 한홍구는 말한다.

 

여기에 수록된 김학철의 『항전별곡』(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1983) (…) 등은 바로 오랜 침묵 끝에 나온 의용군 자신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귀중한 것이다. 주목할 사실은 이와 같은 역사기록이 1980년대에 가서야 간행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독립동맹과 의용군 출신들은 북한에서뿐 아니라 중공에서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문화혁명은 이들에게 큰 시련이었다. 문화혁명의 성격은 (…) 중국 내의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한족에 대한 동화정책이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는 없다. (…) 특히 독립동맹 출신들은 이 정책에서 두드러진 표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독립동맹 출신 중 상당수가 이 기간 중에 투옥되기도 했고 독립동맹 당시의 사료들이 상당히 훼멸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의 역사는 70년대 후반 4인방 축출 이후에야 빛을 보게 되었다.4)

 

조선독립동맹이 남에서는 좌익으로, 북에서는 연안파로, 그리고 중국에서는 ‘지방민족주의’로 몰린 맥락이 드러나거니와, 1935년 중국 망명-의열단-1938년 조선의용대-1941년 호가장(胡家莊)전투에서 부상으로 포로-나가사끼(長崎)감옥-왼쪽 다리 절단-해방 직후 서울로 귀환한 김학철의 “소설적인 삶”이 파노라마로 제시되던 것이다.(항전별곡 328~29면)

그후 김희민(김재용金在湧의 가명)이 엮은 『해방3년의 소설문학』(세계 1987)에 김학철의 단편 「균열(裂)(1946)과 「밤에 잡은 부로(俘虜)(1946)가 선보인다. 아마도 당시에는 편자가 연변 김학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듯싶은데, 해방 직후의 진보적 문학전통을 새로이 발굴한 이 소설집에 껴묻어 김학철의 단편이 40여년 만에 햇빛을 봤으니 이 또한 80년대 젊은 운동의 성과다.

이처럼 한홍구와 김재용에 의해 슬그머니 한국으로 스며든 김학철의 귀환을 결정적 사건으로 매긴 것은 물론 『격정시대』다. 풀빛은 『격정시대』에 이어 『해란강아 말하라』를 출간함으로써 김학철 붐을 확정한다. 그 경위가 흥미롭다.

 

이 소설은 원래 1954년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의 연변교육출판사에서 3권으로 출간된 것인데 편의상 (…) 상하 두권으로 재편집하여 발간하게 되었다. (…) 30년이 넘어 구하기 힘든 (…) 원본을 (…) 흔쾌히 제공해주시고 옥고까지 보내주신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大村益夫) 교수님과, 일본여행중 바쁜 여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수소문하여 찾아 전달해주신 황석영 선생의 애정어린 도움이 없었으면 이 책의 발간은 불가능했다는 것을 밝혀둔다.5)

 

오오무라 마스오와 황석영(黃晳暎)의 주선이 빛난다. 오오무라는 이 책에 부친 「김학철 선생의 발자취」를 통해 작가의 생애, 특히 월북 이후를 개관함으로써 퍼즐을 완성했다. 1946년 월북-1951년 북경(北京) 이주-1952년 이래 연길(延吉) 정착을 밝힌 위에 그 고초의 내막을 구체적으로 알린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서 비판받고 (…) 24년간 (…)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반혁명스파이’로 몰려 10년간(1967~77)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0년에 와서야 비로소 사회활동에의 복귀를 허락받아 (…) 창작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1985년에 중국국적을 획득한 이래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에 가입 (…) 연변분회의 부주석의 한 사람으로서 선출되었다.”(해란강 하 293면)

 

“외발의 항일영웅”(해란강 하 292면)이라는 애칭을 헌정한 오오무라의 국제적 우정으로 김학철의 한국 귀환이 획을 그었다는 것은 시사적인데, 이를 김정한(金廷漢, 1908~96)의 복귀에 비긴 황석영의 지적은6) 정곡을 찌른 것이다. 김정한이 오랜 침묵을 깨고 「모래톱이야기」(1966)로 서울문단에 돌아왔을 때 일본 맑스주의와 연계된 식민지시대 프로문학의 봉인이 따진 것이라면, 김학철의 귀환은 중국혁명과 직결된 좌익무장투쟁에 혀를 단 것이다. 두 거인의 등장은 과거에서 온 현재였다. 전자가 70년대 민족문학으로 진전될 60년대 참여문학에 기름을 부은 것이라면, 후자는 70년대를 다시 급진화한 80년대 문학운동에 날개를 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20년을 격하여 차례로 돌아온 두 문학은 당대 한국문학을 추동한 살아 있는 역사로 되었던 것이다.

귀환의 절정은 『20세기의 신화』(창작과비평사 1996)다. 내 책 갈피에서 발견된 출판기념회(프레스센터 20층, 1996.12.12) 초대장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 문안에 가로되, “중국 문화대혁명 때 필화사건을 불러일으킨 김학철 선생의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가 탈고한 지 319개월 만에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김학철 선생이 부상당한 날이자 태항산() 항일전투 55주년이 되는 1212일 출판기념회를 마련하오니 꼭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초대장에 식순과 메모가 합철된 걸 보니 그때 주간으로 사회를 본 기억이 아슴푸레 떠오른다. 여러 필적의 수정이 가해진 이 문헌에 의거, 실제 식순을 복원하는바, “인사말(백낙청)-김학철 선생 약력 소개(이시영)-축사(이수성·고은·강만길)-김학철 선생 답사-축전 소개-꽃다발 증정(사원 신수진)-케이크 커팅-소연-건배 제의(이호철)-폐회.” 중국이 아니라 결국 한국에서 초판이 간행되는 운명을 맞은 이 소설 출판기념회는 시종일관 긴장이었다. 특히 이후 혹 작가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겠다는 선생의 담담한 답사는 감히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문학적 위엄 그 자체였다.

 

 

2. 전사/작가의 역정

 

문학적 원점: 해방 직후의 단편들

건준(建準,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시모노세끼(下關) 지부의 주선으로 귀국, 조공(朝共, 기사 원문에는 남로당으로 나오나 이때는 조선공산당) 부위원장의 안내로 194510월 서울에 자리잡은(동아일보 1989.11.24) 그는 드디어 그해 12월 첫 단편 「지네」7)를 발표함으로써 서울문단에 데뷔, 「야맹증」(1947)에 이르기까지 무려 9편을 발표한다. 194611월에 월북한 것을 상기하면 1년 남짓에 이만한 규모면 거의 폭발에 가깝다. 우선 주목할 바는 호가장전투에서 부상으로 피로(被虜)됨으로써 그의 육체적 혁명투쟁이 일단 굴절되었다는 점이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외발이라는 실존이 그에게 문학이라는 기억의 전쟁 또는 언어투쟁에 더 경사케 한바, 죄송스럽게도 그를 소설로 인도한 태항산은 우리 문학에는 축복이었다.

이번 전집에는 4권 『태항산록』(2011)에 그의 단편들이 수습되었는데, 웬일인지 서울 발표작들은 겨우 두편, 「균열」과 「담배국」(1946)만 실렸다. 다행히 연세국학총서 중국조선족문학대계 13권 『김학철·김광주 외』(보고사 2007)에 아홉편이 모두 거두어져 편리하다. 그런데 그는 평양(平壤) 시절(1946~50)에도 중편 『범람』(1947)을 비롯한 단편들을 발표했거니와, 바라건대 전집 완간 때에는 평양 작품들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문학적 원점에 해당하는 서울 단편들은 모두가 자신이 복무한 중국항일혁명의 경험에서 취재하였다. 살아온 이력을 써내면 소설이 된다고 부러움을 산 최서해(崔曙海, 1901~32)에 비길 예거니와, 조선의용대에 대한 오마주임에도 불구하고 이상주의로 질주하지 않은 점도 흥미롭다. 닭 잡는 장면을 외면할 정도로 소심한 김분대장을 주인공으로 한 「지네」로부터 밤만 되면 움츠러드는 전사 이지성을 주인공으로 한 「야맹증」까지 도처에 해학이 반짝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이원조(李源朝, 1909~55)의 지적(「창작합평회」,『신문학』 1946.6)이 맞춤할 것이다. “전번 간담회 때 (…) 작가가 문학하는 이유를 일장 연설했으나 그때 나는 (…) 작가라기보다 의용군의 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지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읽어보니 작가가 확실히 작가로서의 역량을 가지려고 노력한 흔적이 뵈입디다.”8) 의용대에서 작가로 이월하는 도정, 즉 뒤늦은 습작기였던 것이다.

 

조선족 서사시: 『해란강아 말하라』(1954)

만주사변(1931) 전후(前後) ‘간도’ 농민들의 투쟁을 묘파한 이 작품은 그의 첫 장편일 뿐 아니라 “중국 조선족 문학사에서 최초로 되는 장편소설”9)이다. 초판 서문이 간명하다. “이 소설은 나 한 사람의 창작이 아닙니다. 내가 한 일이란 오직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심지어는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귀중한 생명까지를 내버린 선열들에 의하여 이미 엮어진 역사 사실을, 그도 극히 적은 일부분을 추려내어 정리하여 알기 쉽게 하였음에 불과합니다.”(상 6면) 농민투쟁의 역사가 주체고 작가는 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겸사가 꼭 겸사만은 아니다. “옹근 두달 동안, 자기의 바쁜 농삿일을 제껴놓아가며 나의 생활을 돌”본 김신숙,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와 “나의 물음에 밤을 새워가며 대답”한 김치옥, “당시의 삐오넬10)이던 이삼달, 황사길, 그때 벌써 적의 주목을 받아 숨어서 다”닌 진원묵, “적의 감옥에서 억울한 노역에 종사한” 경험을 지닌 김덕순, 그리고 초고를 놓고 “수십차의 토론”을 벌인 최채 등등,(상 7면) 집단창작에 가깝다. 이미 지적했듯이 그는 1952년 연길시에 정착하였다. 관내(關內)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연변은 낯선 관외(關外)니, 작가 개인적으로 이 장편은 새로이 살아갈 연변, 그 ‘장소의 혼’(genius loci)에 대한 첫 입맞춤이요, 해란강 인민의 투쟁에 경배하는 입사식이다. 그 통과의례를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연변조선족 자치구의 탄생을 기리는 서사시적 소설이 탄생한 점이 흥미롭거니와, 그럼에도 민족적 지평에 갇혀 있지 않다. “간도 인민의 투쟁의 역사는 즉 중국 공산당의 투쟁의 역사인 것입니다.”(상 6면) 사회주의국제주의에 투철하다. 지주연합에 중국인과 조선인이 함께하듯 그 투쟁에도 민족의 구분은 없다. 뜻을 같이하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동지적으로 협동한다. 중국공산당의 영도(領)에 대한 신뢰가 확고한 것이다. 알다시피 195293일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었다. 자치구란 격이 높은 단위인데, 항일투쟁을 비롯해서 이후 국공내전과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에서 조선족이 맡은 공헌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높은 평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1955년 조선족 비율이 낮은 돈화(敦化)11)이 편입되면서 자치주로 격하한 데서 이미 짐작되듯이 전후 조선족의 지위는 벌써 상대화하기 시작한다. 이 장편이 출간된 1954년은 작가와 중국공산당과 조선족이 행복하게 제휴한 그 절정의 해였다.

이 장편은 총 60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조선농민들이 집단거주하는, “해란강 동안에 위치한”(상 28면) 버드나뭇골(중국명 유수툰)이 주무대다. 일본 영사관 경찰서가 소재한 국자가(局子街) 곧 연길이 “25리 떨어”(상 28면)져 있고, 마반산에는 “청천백일기 그린 회색 벽돌 담장”을 두른 중국 공안국 분주소(상 83면)가, 또 “버드나뭇골에서 십리 떨어진 산골 동네” 화련에는 중국공산당 동만 특위 해란구 구위원회(상 100면)가 잠복한바, 더구나 “쏘련서는 농민이 밭구실 단련을 받지 않게 된” 소문(상 96면)이 “아랫강동”으로 불린 연해주(상 97면)에서 솔솔 들려오고 있으니, 그곳은 일종의 화점(火點)이다. 만주사변(1931.9.18)이 도화선이다(상 144면). 사변으로 장작림(張作霖, 1873~1928)·학량(學良, 1898~2001) 부자로 이어지는 ‘만주’군벌의 지배에 마침표가 찍혔다. “9·18의 시퍼런 도끼날이 농민들의 보수와 주저의 갑문을 단대에 찍어 갈라, 오랜 동안 거기 고여서 충충하던 그들의 새 소작제도삼칠제에 대한 욕망의 분류를 터뜨려놓았다.”(상 147면) 옛 권력은 무너졌으나 새 권력은 도착하지 않은 그 공백에서 농민투쟁의 발화(發火)를 파악한 작가의 리얼리즘이 빛난다. 일본군이 곳곳에 밀고 들어온 “32년 늦은 봄에서 겨울에 걸”친 “반동의 고조기”(하 132면)에 제한된 승리를 뒤로하고 농민지도부가 당과 함께 정든 마을을 떠나 유격근거지로 이동하는 데서 작품은 끝나니, 전형적 운동소설이다.

1931년 가을 추수투쟁으로 점화, 1932년 봄의 춘황(春荒)투쟁까지 이어진 ‘간도’ 농민들의 대규모 운동을 반영한 『해란강』은 집단적 주인공, 더 나아가 (중국)공산당이 그대로 주인공이 되는 정통 사회주의사실주의다. 계급 따라 인물을 요소요소에 배치하는 틀인지라 과도한 데가 없지 않다. 가령 중농(中農) 김행석의 아들이지만 진보적인 달삼이 소시민적 한계로 끝내 배신자로 전락하는 대목(하 209면)이라든가, 나루터 사공 출신의 최원갑을 전형적 룸펜프로로 설정, 마침내 적위대장 임장검으로 하여금 처단하게 하는 대목(하 265면) 등은 구소설적이다. 특히 후자는 처벌의 교육적 효과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악이 지나치게 비범하다. 당의 무오류성이란 명제가 우뚝한 머리에 당의 안팎이 칼처럼 갈라선 것이다.

그럼에도 그 공식성을 받치는 토대는 생동한다. 빈농 출신의 노총각 한영수와 젊은 과부 허연하가 밭갈이하는 장면에 아들 친구인 영수를 질투하는 달삼의 아버지 김행석이 등장하는 기묘한 조합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쑥덕공론으로 열리는 1장 ‘소결이’12)부터 느낌의 현재가 생생하다. 구어로부터 풍속에 이르기까지 연변의 속내를 속속들이 조사한 작가의 노고로 이 장편은 하나의 민족지(民族誌)로서도 손색이 없다. 운동법칙이 아니라 생활세계로부터 버드나뭇골을 파악해간 시각이 그만큼 민중적인 것이다. 인민과 함께 투쟁하던 시기의 공산당 전사가 지닌 높은 도덕성을 건국 이후에도 여전히 견지한 작가의 자세가 첫 장편에 우련하다.

그뿐인가, 관점이 살아 있다. 가령 한영수는 부농 박승화만이 아니고 중농 김행석과도 투쟁함으로써 “중립은 세울 가능성이 있던 사람을, (…) 아주 저 편으로 넘겨 보내고”(상 167면) 만 점을 자책할 정도로 깊다. 군중심리가 자칫 야기할 좌편향에 대한 경계가 인상적이거니와, ‘부이데기’(중국군)와 일본군을 구분하여 농민들이 전자와 충돌하는 것을 만류하는 중국인 공산당원 장극민의 지도(상 187면) 또한 맥락을 같이한다. 19286월 일본군의 공작에 의해 폭사한 장작림에 이어 간신히 후계자로 된 학량은 그해 12월 북양(北洋)정부의 오색기 대신에 국민당의 청천백일기를 게양하는 ‘역치(易幟)’를 단행했으니, 비록 자신의 동북지배를 위한달지라도 서안사변(1936)의 씨앗이다. 부이데기의 갈래인 ‘삼림둥이’에 대한 독자적 파악 또한 종요롭다. 9·18 이후 괴뢰군으로 재편된 오른쪽의 보안대에서 갈라져 나와 ‘녹림형제’ 즉 의적으로 행세하는 그들은 왼쪽은 왼쪽이되 기본적으로는 이익 따라 움직이는 룸펜프로집단이다. 장극민이, “장작림의 부대에서 오랜 동안 퇀(연대)부관을 하다가 9·18의 패배와 함께 관내로 이동하는 주력에서 탈리하여 독립의 기치를”(하 172면) 든 등충의 부대를 설득하여 중국인 대지주 호가와 투쟁하는 전말을 다룬 장들(하 47~49장)은 삼림둥이의 조직과 행태가 아마도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중국현대사의 일각을 비추는 희귀한 등불로 되고 있다.

이 장편에 여성주의도 숨쉬는 것이야말로 놀랍다. 1932년 춘황투쟁을 “3·8부녀절(국제 여성의 날인용자)을 계기로 거사”(하 256면)할 것을 결의한 동만 특위의 지침에 따라 벌어진 부녀절의 마을 풍경을 그려낸 30장 ‘여성천하’는 걸작이다. “해란강의 어름이 쩍쩍 갈라져”(상 260면)나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찾아온 부녀절 아침은 여성들의 밥짓기 거부로부터 열리던 것인데, 남편의 태업에 애태우다 아이들 우는 소리에 남몰래 아궁이 앞에 앉은 유서방댁부터 “옹근 사흘 동안 3·8절 밥 안 짓기 내기를 견지한 독한 여성”에 이르기까지 천태만상이다(상 263면). 작은 마누라를 거느린 남자들에게 여성들이 몰려가 투쟁하는 일들도 새삼스럽거니와, 박좌수댁 작은 마누라가 오히려 늙은 남편을 옹호하는 데 부녀회가 경악하는 삽화 또한 리얼하다. 작가는 넌지시 “버드나뭇골 부녀회는, 자기의 ‘좌’적 편향을 바로잡음에 따라 차츰 넓고 평탄한 길로 나서게 되었다”(상 263면)는 논평을 잊지 않음으로써 그 대두 즈음의 해학적 소란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해란강』은 김동환(金東煥, 1901~58)과 이용악(李庸岳, 1914~71)에 의해 개척된 두만강문학의 계보를 잇되, 제목이 가리키듯 두만강에서 해란강으로 이동했다. 두만강문학이 조선 유이민의 문학이라면 해란강문학은 중국 조선족의 문학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거듭난 역사에 헌정된 『해란강』은 이후 연변에서 서사시적 장편들을 불러왔거니와, 흥미롭게도 70년대에 각광받은, 『피바다』를 비롯한 북의 항일혁명문학에 끈을 닿는다. 『해란강』은 또한 ‘간도’를 다룬 남한 작품들의 선구다. 안수길(安壽吉, 1911~77)의 『북간도』(1959~67)가 대표적인데, 함경도와 두만강과 연변의 연속성 위에 구축된 『북간도』는 손자 이창윤을 중심에 둔 가족사소설에 가깝거니와, 그나마 4부 이후 급격히 수척해져 5부는 그냥 겉핥기 강사(講史)로 종결된지라 손색이 없지 않다. 요컨대 중국·한국·북조선 세 나라 문학에 두루 걸친 『해란강』이야말로 효시답게 그 한계까지 포함하여13) 연변이야기의 한 표준인 것이다.

 

수용소문학: 『20세기의 신화』(1965)

1957년 반우파투쟁의 시작과 함께,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한다는 명분 아래 “소수민족에 대한 강압적인 동화정책이 노골화”14)한 정풍(整風)운동마저 겹쳐, 작가와 당의 밀월은 끝났다. 백화제방(百花齊放)을 지식인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여 약 55만명을 우파로 도장 찍은 반우파투쟁, 자력갱생의 깃발 아래 무려 2~3천만이 아사에 몰린 대약진운동, 그리고 50만에서 300만까지 막대한 희생자를 낸 문화대혁명, 이 비극적인 사건들은, 작가의 용어를 빌리건대 “사회주의식 서낭당”15) 즉 일인숭배의 조화였다. 모택동(毛澤東)의 죽음(1976)으로 긴 ‘혁명’이 끝나고 이듬해 겨울 작가는 출옥한다. 어찌 이런 사태들이 접종(接踵)했는지 참으로 난해한 국면이다. 여기서 우리는 핵개발에 대한 시모또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의 지적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소련은 전후 1946~47년에 기근이 발생하여, 약 1~2백만인 규모의 아사자가 나왔다. 이 기아와 핵개발의 관련을 최초로 지적한 것은 러시아 역사가 V. F. 지마다. 중국의 50년대말의 핵개발과 대약진기의 2~3천만인으로 상정되는 대량의 기아, 그리고 90년대 북조선에서의 핵문제와, 아사자가 2백만에 이르는 기아와의 관계”16)를 상기컨대, 이 극단적 선택이 자본의 포위라는 기본조건에 중소분쟁까지 교차하면서 이루어진 필사의 생존술에서 말미암았음을 요해하게 된다.

이 장편은 무엇보다도 기나긴 ‘혁명’의 기점인 반우파투쟁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불씨는 헝가리에서 날아왔다. “작가들의 회관인 페퇴피 구락부에서 항가리폭동(1956.10인용자)의 첫 불집이 터진 것을 보시고 모교(毛敎인용자)의 교조(敎祖)이신 위대한 모택동 태양께서는”17)김지하(金芝河) 담시의 선구라고 해도 좋을 풍자적 수사가 일품이다. “항가리 지식인들 특히 항가리작가동맹과 대학생들의 토론조직인 페퇴피서클”, 민주화와 자주화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그들의 활동이 봉기의 시발이었던 것이다.18) 스물여섯의 나이로 혁명전쟁에서 전사한 헝가리 국민시인 뻬뙤피(S. Petöfi, 1823~49)가 봉기의 영혼인 점이야말로 주목할 일이거니와, 그는 김학철을 매혹했다. 내 서가에는 1957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행된 『뻬떼삐 시선집』 복사본이 한권 있다. 서지를 살피건대, 모스끄바에서 1955년에 발간된 본을 이듬해 평양에서 홍종린(洪鍾麟)이 번역, 조선국립출판사에서 내고 그 평양본을 연변에서 다시 출판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판권란 위 여백에 김학철의 필적으로 추정되는 감격의 시 「어이 이 책을 사랑하지 않으랴!」가 보인다. “나의 충실한 벗이/희망의 고지로 돌진하라고/보내준 이 책을/뜨거운 마음으로/고이 두손에 받았을 때/어이 이 책을/사랑하지 않으랴/그대의 기대 굳게 지켜/인민을 노래하는/시인으로 되리라!”

더 깊은 불씨는 19562월에 열린 “소련 공산당의 역사적인 제20차대회”(23면)다. 평화공존론을 제창한 흐루시초프(N. S. Khrushchyov, 1894~1971)는 대회 마지막날 비공개회의에서 스딸린(I. V. Stalin, 1878~1953)을 비판함으로써 민주주의가 거의 실종된 ‘현존사회주의’를 구할 가능성을 열었다. 그 파장 속에 발생한 헝가리봉기를 진압함으로써 그 한계가 뻔하게 드러났음에도 이후 소련사회는 일종의 해빙기에 접어들었다. 당연히 중국공산당은 그 영향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수용소 안에서 “61년 겨울부터는 (…) 반소문건의 학습이 제철을 만났다”(115면)는 데서 보이듯, 두 사회주의 대국 소련과 중국의 갈등이 노골화했으니, 이 일이 『신화』의 국제정치적 배경이다.

이런 안팎의 요인이 중첩, 지식인과 인민을 빈사로 모는 사태들이 엄습한바, 투쟁하는 태항산의 공동체를 생생한 현실로 기억하는 작가에게 이 기막힌 반전이 혁명에 대한 배신으로 비치리라는 점 또한 이해될 터다. 그리하여 “나는 밤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신들린 듯이 볼펜을 달렸다. 꼭 1년 걸려 전·후편 도합 1350매를 탈고했다.”(359면) 19653월, 양심이 공포를 이기고 이렇게 “분노에 찬 정치소설”(356면)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전편 ‘강제노동수용소’, 후편 ‘수용소 이후’로 구성된 『신화』는 임일평(林一平)을 비롯한 연변자치주 문인/지식인들의 수용소 생활과 출소한 뒤의 후일담을 그린, 세계적으로도 드문 수용소문학이다. 알다시피 수용소는 ‘현존사회주의’ 사회들 속에서 부재의 존재다. 없는 것을 있다고 말만 해도 문제인데, 그 실상을 그린다는 것은 역린(逆鱗)이다. 스딸린은 죽었으니 그렇다 쳐도 살아있는 권력 모택동과 김일성(金日成, 1912~94)을 겁없이 비판하는 그 무서운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김학철의 분신 심조광(沈朝光)을 빌려 작가는 외친다.

 

이제부터는 객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합시다. 진실을 씁시다. 날조도 하지 말고 조작도 하지 맙시다. 제가 저를 속이지 맙시다. 20세기의 신화를 꾸며내지 맙시다. (…) 문학작품이 다 선전물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선전물이 죄다 문학작품으루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선전물을 쓰지 말고 문학작품을 씁시다. 진실을 씁시다.(132면)

 

중국에서마저도 인민독재가 인민에 대한 독재로 전락하는 위기 속에서 혁명 이후를 기리는 신화가 아니라 혁명기의 진실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절박하다. 김학철은 이미 뻬뙤피의 명령에만 복종하기로 다짐한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 정치논평이 과잉인 이 작품에는 생활이 모자란다. 솔제니찐(A. Solzhenitsyn, 1918~2008)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와 대비된다.19) 주인공 슈호프의 기상에서 취침까지 수용소의 하루, 그 굴종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놀라운 소설에서는 풍자조차 극히 절제되거니와, 마무리에 붙인 짤막한 서술이 압권이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년을, 그러니까 날수를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20) 솔제니찐의 능청스런 시치미에 대해 김학철은 위험한 풍자로 내디딘 터인데, 이 점에서 스페인내전(1936~39)을 겪고 『동물농장』(1945)과 『1984(1949)의 우화로 나아간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50)과 유사한 듯도 하다. 그의 말이 떠오른다. “1936(스페인내전인용자) 이후 내가 진지하게 쓴 작품들은 그 한줄 한줄이 모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씌어졌다.”21) 오웰이 1937년 아나키즘계 공화파 의용군으로 바르셀로나전선에서 부상(負傷)한 뒤 좌익 내부투쟁의 와중에서 간신히 귀국, 『까딸로니아 찬가』(Homage to Catalonia, 1938)를 출판할 무렵, 중국공산당원으로서 태항산에서 항일전쟁을 수행한 김학철은 한점의 회의도 없었다. 해방 이후 혁명이 체제로 변신하는 과정 속에서 환멸이 뒤늦게 엄습한바, 『신화』는 그 첫 기록이다. 수용소를 “공산주의농장”(25면)으로 지칭하는 대목이 곳곳에 나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신화』가 중국판 『동물농장』, 중국판 『1984』일지도 모르겠다.

 

태항산공동체의 기억: 『항전별곡』(1983)

복권 뒤 첫 작업이 『항전별곡』임은 각별하다. 서울시절의 단편작업을 계승하고 있지만 ‘작가-되기’가 더 움직인 그때와 달라졌다. 조선의용대/군 동지들의 기억을 보존하는 일을 살아남은 자의 다급한 책무로 수락한바, 다시 그는 서기를 자임한 것이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래서 소설이 아니라 전기, 그것도 집단전기 즉 열전(列)이다. 서른넷의 나이로 태항산에서 전사한, 의용군의 숨은 일꾼 김학무(金學武)에게 헌정된 「무명용사」, 상해(上海) 후지모리 자동차부 노동자 강병한에서 공산당 전사로 진화한 장중광을 초상한 「두름길」, 여성적 용모 아래 혁명적 낙관주의의 불꽃을 조용히 간직한 강진세에게 바쳐진 「작은 아씨」, 다들 어려워하는 그 “김선생(한글학자 출신의 혁명가 김두봉金枓奉인용자)하고 농담을 할 수 있는”(233면) 유일한 인물 문정일을 불러낸 「맹진나루」, 그리고 서울 의사집안의 아들로 항일전쟁에 복무한 김원으로부터 해방구로 탈출 직전 배반 도주한 황기봉에 이르기까지 기억의 조각들을 가능한 한 수집한 「항전별곡」, 망각의 강을 건너려는 작가의 뜻이 행간에 자욱하다.

압권은 대홍산 홍군 종대사령부에 도착한 이튿날 저녁의 집회다. “내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은 개회벽두에 전체가 기립하여 ‘인터내셔널’을 부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생후 처음 공개적인 집회에서 마음껏 큰소리로 불러본 ‘인터내셔널’이었다.”(217~18면) 국민당 지역을 탈출하여 팔로군 해방구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조선의용대를 환영한 팽덕회(彭德懷, 1898~1974)의 연설은 또 어떠한가? 빈농의 아들로 “밤낮 무거운 짐을 지고메고 하다보니”(223면) 등이 굽은 이 병사/장군은 말한다. “우리의 전사들은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반드시 이길 힘의 원천입니다!”(222면) 민중의 자기조직화에 기초한 인민군대의 영혼이 정확히 지적되고 있으니, “태항산의 자유로운 공기가, 해방구의 친절한 분위기가 샴페인처럼 상쾌한 향미”(221면)로 감각되는 것이다.

곳곳에 뿌려진 일화들이 보석이다. 김학무의 윤봉길(尹奉吉, 1908~32)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프랑스 조계 아파트 뒷방에서 “김학무가 낮은 목소리로 ‘인터내셔널’을 부를 때면 윤봉길은 격앙하게 ‘애국가’를 부르곤 하였다.”(132면) 이처럼 항일의 길에서 좌우로 갈림에도 불구하고 김학무는 윤봉길을 존경했으니, 1932429일 “윤봉길의 사형을 보도한 그 『마이니찌신문』을 펼쳐든 채 사나이 울음을”(133면) 울던 것이다. 그는 또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 1898~1958)에 대해서도 각근하다. 김학무가 밀정 이웅에게 속아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을 암살하려 한 데 대한 약산(若山)의 충고는 역전의 노장답다. 장개석을 제거해 항일전선을 파탄시키려는 일제의 간계를 지적함으로써 김학무의 좌경적 오류를 교정한바, 약산과 후일 갈라진 뒤에도 그 일에 대하여는 죽는 날까지 감사해 마지않았다.(136면) 장개석의 일화도 인상적이다. 윤봉길사건 이후 일본의 항의에 대처하는 그의 눙침은 얼마나 해학적인가. “중앙육군군관학교(즉 원래의 황포군관학교)에 재학중인 (…) 조선학생 전부를 출학처분”하고는 “다음날 다 뒷문으로 불러들”이는데,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편법을 베푼 것이다.(135면) 뭐라고 해도 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개석은 역시 장개석이다. 얼핏 스치는 일본인도 반짝인다. “데라모도 아사꼬(조선의용대에서 활약한 일본여성으로서 조선 이름은 권혁).”(252면) 반도가 숨죽인 그 시절 태항산은 동아시아 혁명의 빛나는 회통처였던 것이다.

이번 전집의 『항전별곡』(2012)은 결정판이다. 애초 중국에서 출판이 거부된 이 전기는 우여곡절 끝에 ‘김두봉, 김원봉’에서 한 글자씩을 가리고야 간행되었다는데(한겨레 1989.11.18) 전집에서 완벽히 복원되었다. 본문 안에 빼곡한 백화(白話)로 단 주와 인물사진들이 귀중하다. 조선의용대/군의 살아 있는 백과사전으로 장엄한 전집 최고의 성과다.

 

사회주의교양소설: 『격정시대』(1986)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엮어놓은 전기문학”(③ 305~306면)이라고 작가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장편 역시 태항산에 바쳐진 것이다. 작품은 과연, 김학철의 영구혁명이 도달한 절정일 호가장전투에서 갑자기 마무리된바, 이 중단은 조선의용군의 기억을 삭제하려는 기도에 맞서 외로운 투쟁을 지속한 김학철 문학의 총화적 상징이다. 그런데 이 장편에는 다른 층위가 숨쉰다. ‘인물의 초점’이 살아 있다. 물론 원산(元山)의 노동자들, 상해의 테러리스트들, 그리고 태항산 전사들이 집단적 주인공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모두를 꿰뚫는 ‘서선장’의 이야기인 것이다. ‘문제아적 주인공’이 축으로 되는 고전적 장편으로 복귀한 폭이다.

65장으로 구성된 『격정시대』는 주인공의 가출을 다룬 30장을 고비로 전후반으로 나뉜다. 원산과 경성(京城)을 배경으로 한 전반이 천방지축 선장이의 소년기와 유학시절을 다뤘다면, 중국을 배경으로 한 후반은 망명 이후 무정부주의를 거쳐 공산주의 전사로 진화한 청년기를 서사한바, 『격정시대』를 “혁명성장소설”로 소개한 풀빛 서문(① 7면)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의 전반이 이른바 ‘가족사소설’로 통용되는 장편들과 혹사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김남천(金南天)의 『대하(大河)(1939)로부터 한설야(韓雪野)의 『탑』(1940~41), 이기영(李箕永)의 『봄』(1940~41), 그리고 좀 넓히면 이태준(李泰俊)의 『사상(思想)의 월야(月夜)(1941)까지 포괄될 터인데, 이 용어가 실은 적절하지 않다. 아마도 유래는 이 장르의 창안자 남천에서 온 것 같다. 그는 『대하』에 대해, “연대기를 가족사의 가운데 현현시킨다”22)고 밝힌바, 최재서(崔載瑞)가 이어 「토마스 만 <붓덴부로-크일가>」(1940)에서 가족사소설론을 진전시켰다.22) “가족제도를 옹호한다든가 배격한다든가 하는 사회학적 관심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한 크로니클(연대기)로서 어떤 한 가족의 역사를 삼세대 내지 사세대에 걸쳐 취급하려는 것”23)으로 규정한 그는 『대하』에 대해 스치듯 언급하였다. “이 작품은 아직도 제1부가 발표되었을 뿐이므로 논평하기를 삼가지만 그 의도나 수법에 있어서 가족사연대기소설이라는 것은 거지반 틀림없다.”24) 그후 언제부터인지 가족사소설론이 ‘조자룡 헌 창 쓰듯’ 휘둘려 염상섭(廉想涉)의 『삼대』(1931)와 채만식(蔡萬植)의 『태평천하』(1938)까지 싸잡아 논하는 일이 횡행하기도 한 터다.25)

과연 이 장편들은 가족사소설일까? 기중 애비 유춘화에 대한 아들 석림의 비순종성이 약한 『봄』은 가족사소설에 근사(近似)한데, 바로 이 근대주의적 혐의 때문에 작가가 북에서 다시 쓰기를 시도했거니와, 『봄』에 혁명을 더한 것이 『두만강』(1954~61)이다. 그러나 1부의 뛰어남이 2,3부의 공식성으로 퇴행하였으니, 성공적이라고 보기 어렵다.26) 이 유형의 소설을 대표하는 『대하』와 『탑』은 애초에 중립적인 가족사소설이 아니다. 식민지 부르주아 가문의 기원으로 거스르되, 실제는 이단아 형걸(『대하』)과 우길(『탑』)이 주인공이다. 그들의 가출로 1부가 끝난 채 미완이라 그렇지 만약 이어졌다면 사회주의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그렸을 것으로 짐작되는 점에서 사회주의교양소설이 용어로서 더 맞춤할 것이다. 한편 상상의 아버지에게 투항한 『사상의 월야』는 타락한 가계를 부정하고 새 세상으로 달려간 『대하』·『탑』과 동렬에 놓기 어렵다. 보통 성장소설인 것이다. 성천(成川)을 배경으로 한 『대하』와 함흥(咸興)을 배경으로 한 『탑』에 이어, 원산을 배경으로 한 『격정시대』는 가출 이후 사회주의전사로 진화하는 도정을 서사한 점에서 미완으로 끝난 『대하』·『탑』을 완성한 것이다. 또한 『격정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씨동이가 『두만강』의 주인공 이름과 같다는 점에 단적으로 드러나듯, 『격정시대』는 『두만강』을 다시 쓴 작품이기도 하다. 요컨대 『격정시대』야말로 모두를 아우른 우리 사회주의교양소설의 회통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윤봉길의 의거에 망명을 결심할(① 76~77면) 만큼 순수한 민족주의 소년에서 무정부주의테러리스트 청년으로, 다시 국제공산주의전사로 발전해간 선장이의 각별한 성숙과정을 다룬 이 장편의 절정은 마지막 단계를 기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첫째와 둘째 단계가 종언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각 단계는 충일한 시간으로 각기 자립한다. 첫 단계에 드러난 원산과 경성은 선장이의 육체와 영혼을 숙성할 마술적 공간으로 축성되었거니와, 특히 덕원부(德源府)에 딸린 포구에서 자본의 교두보로 일거에 근대로 호출된 개항장 원산이 비로소 한국의 문학지리로 편입되었다. 일본인거리와 조선인거리의 경계, 그리고 조선인거리 안의 계급적 경계조차 깊숙이 파악한 눈매가 촉촉한데, 무정부주의자와 맑스주의자 사이의 내부모순을 축으로 한 원산총파업(1929)에 대한 서사는 정채(精彩)다. 더욱 생생한 것은 원산의 생활세계다. 특히 유학생들의 경로에 등장하는 경원선(京元線)과 그 철도를 따라 출현한 경성의 풍경은 각별하다. 광주학생운동(1929) 즈음 경성의 조선학생들 생태도 생동하려니와, 선장이가 기식하고 있는 변호사 집안의 안팎 또한 새롭다. 식민지 부르주아의 공허한 내면을 묘파한 이 대목은 그래도 민족적 양심을 잃지 않은 원산의 한진사와 함께 이 시기 식민지 부르주아의 초상으로 모자람이 없다. “20톤급 발동선의 선장”(① 11면)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은 이렇게 조선의 축도라고 할 원산을 매개로 식민지 상하층을 아울러 경험할 위치의 이로움을 획득했으니, 중도적 주인공에 가깝다. 바로 그 때문에 이 장편의 민중성이 더 빛나던 것이다.

테러리스트로, 중앙군관학교 생도로, 국민당 군대의 장교로, 그리고 마침내 태항산 해방구로 집단탈출하여 최고의 자유를 누리던 시절에도 공간감은 충만한다. 아마도 상해를 비롯한 중국 관내 곳곳을 이처럼 생생히 그린 작품은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처럼 많은 테러리스트와 그처럼 많은 혁명가의 황홀한 출현 또한 매혹적이다. 연애소설로도 일급이다. 테러리스트들을 방조할 때는 성()조차 미끼로 사용하는 상해 메트로폴리탄의 도도한 댄서 송일엽이 첫 임무를 수행한 어린 선장이를 가비얍게 꿰차고 연애로 비등하는 대목(② 184~85면)은 혁명적 낭만주의의 압권이다. 미인에게만 여성주의가 작동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박색이라 “전방으루 전방으루 밀려나온”(③ 244면) 조선인 위안부들에 대한 여성대원들의 충고에 선장이를 비롯한 전사들이 “인간수업에서 한 과를 더 배운 것 같아서 숙연해졌다”(③ 245면)는 대목은 뭉클하다.

『격정시대』 또한 사회주의국제주의가 도저하다. 원산총파업 때 항구에 정박한 일본화물선 쯔루가마루(敦賀丸) 일본선원들의 파업을 응원하는 함성(① 191면)으로부터 중국 망명의 단계단계마다 작동한 국제주의는 태항산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의용군의 깃발을 정하는 장면은 각별하다. “혁명의 길은 직선이 아니구 곡선”(③ 240면)이라고 다독이며 나라 망하기 전 국기인 태극기를 붉은기 대신 채택하기를 충고하는 팽덕회는 이 장편에서도 여전히 혁명의 아이콘이다. 홍위병에게 모욕당한 채 죽어간 라오펑(老)에 대한 김학철의 추모를 묻어둔 것인데, 투쟁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애의 공동체, 모든 차이가 홀연히 사라지는 요술 속에 출현하는 유토피아가 바로 태항산이라는 ‘장소의 혼’이다.

태항산 공동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감동적인 삽화가 있다.

 

조선의용군에서는 조직부성원이건 선전부성원이건 할 것 없이 다 전투에는 일반 대원들과 같이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돌격으로 넘어갈 때에는 반드시 지도원이 전투서열 앞에 나서서 “공산당원은 두 발자국 앞으루!” 명령하여 공산당원들을 앞장세우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③ 239면)

 

‘공산당원 2보 앞으로’대중의 전위로서 인민을 철두철미 옹호하는 투쟁기 공산당의 높은 도덕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대목이 그가 꿈꾸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모태일 것이다.

그러나 병사의 눈으로, 그것도 조선인의 눈으로 중국혁명의 극적 과정들을 파악해간 그 특장은 한편 한계로도 작동했다. 다시 작가후기를 보자.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당시 조선의용군에서 나의 직위가 워낙 낮았던 탓으로 아는 면이 넓지 못한데다가”(③ 305면). 이 솔직한 고백이 드러내듯, 거대한 중국혁명의 총체성을 파지하기에는 위치에너지가 넉넉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작품은 이미 지적했듯이 호가장에서 멈춘다. 그런데 서선장이 포로로 되지 않고 살아남아서 죽은 동지들을 애도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으니, 작가는 항상 포로이야기를 괄호친다. “태항산에서의 이와 같은 전투의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아무도 몰랐다.”(③ 304면) 이 장편 전체를 마감하는 마지막 문장으로는 허술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호가장에서 시간이 정지된 이 장편의 공백에는 경험주의도 거들었거니와, “통일의 전제조건은 김일성이 죽는 것”(『한겨레211994.4.14, 90면)이라는 선생의 신념 또한 이와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격정시대』도 미완이다. 누가 완성할 것인가?

 

 

3. 김학철 문학의 귀속

 

김학철 문학의 소속은 어딜까? 그의 최종국적을 상기하면 중국문학이다. 그가 의거한 언어문자에 유의해, 더 정확히 말하면, 중국 소수민족문학의 하나인 조선족문학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으로 마감인가? 의식적으로 조선족문학을 지향한 『해란강』조차도 확장적인데, 『신화』와 『격정시대』는 중국의 지방문학을 넘어선다. 현존사회주의를 통렬히 비판한 『신화』는 오웰과 솔제니찐을 잇는 정치우화/수용소문학이요, 식민지시대와 북조선의 ‘가족사소설’을 사회주의교양소설로 들어올린 『격정시대』는 한반도 민족문학의 명예로운 상속자다. 더구나 다시 중국으로 가기 전 서울에서 데뷔한 그는 80년대에 한국문학으로 복귀했으니, 애초부터 중한에 양속(兩)적이다. 북조선과도 단순치 않다. 평양에서 작품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세 장편 모두 북의 문학어에 빚진 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원산 출신인데다, 연변은 한중수교(1992) 이전 북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으니, 세 장편 모두에 북이 껴묻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학철 문학은 중국과 한반도 남북에 걸터앉은 셈이다. 더구나 일본조차 아울렀으니 그의 진짜 소속은 도래할 동아시아일지도 모른다. 전집 완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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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변인민출판사에서 2010년 간행을 시작해 총 12권으로 완간 예정인 이 전집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권 『격정시대』 상, 2권 『격정시대』 하, 3권 『사또님 말씀이야 늘 옳습지』, 4권 『태항산록』, 5권 『나의 길』, 6권 『천당과 지옥 사이』, 7권 『항전별곡』, 8권 『해란강아, 말하라!』(이상 기간행), 9권 『범람』, 10권 『추리구의 겨울』, 11권 『최후의 분대장』, 12권 『20세기의 신화』. 이하 전집으로 약칭.

2) 풀빛 편집부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격정시대』 1권(전3권), 풀빛 1988, 7면. 이 글의 필자는 아마도 김명인(金明仁)일 것이다.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따로 주를 달지 않고 본문에 각권의 면수만 표시함.

3) 한홍구에 의하면 모리까와 노부아끼(森川展昭)로부터 김학철의 『항전별곡』을 비롯한 자료들을 받아 1986년 거름에서 출판했다고 하는데, 모리까와는 이 책에 「조선독립동맹의 성립과 활동에 관하여」를 기고했다.

4) 한홍구 「『항전별곡』을 엮고나서」, 『항전별곡』 328면.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따로 주를 달지 않고 본문에 이 책의 면수만 표시함.

5) 풀빛 편집부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해란강아 말하라』 상(전2권), 풀빛 1988, 5면. 이 글의 필자 역시 김명인일 것이다.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따로 주를 달지 않고 본문에 ‘해란강’으로 약칭해 각권 면수만 표시함.

6) 황석영 「이제 우리는 김학철을 만날 차례입니다: 항쟁 이후의 문학」, 『김학철 2: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연변인민출판사 2005, 128면.

7) 이 작품의 출전은 연보마다 혼란이다. 이번에 전집 4권에 실린 「나의 처녀작」(연변일보 1986.1.30)에 정확한 정보가 나온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반월간지 『건설』(주필 조벽암)에 실린 나의 단편소설 「지네」”(362면).

8) 『김학철·김광주 외』 164면.

9) 서령 「중국 조선족문학의 ‘중국화’문제: 김학철과 윤일산의 전쟁제재 장편소설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33집,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2014, 179면.

10) 삐오넬은 러시아어로 적색소년단 또는 노동소년단을 지칭함. 1922년 소련에서 공산당의 지도 아래 8~17세의 소년소녀를 조직한 데서 기원함. 유영우(劉永祐)·장계춘(張桂春) 엮음 『사회과학사전』, 노농사 1947, 113면.

11) 연길과 장춘(長春) 사이에 위치한 돈화는 생활권이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

12) 소겨리란 논밭을 갈기 위해 쟁기에 두마리의 소를 짝을 지어 묶는 일.

13) 작가조차 스스로 “선전부에서 임무를 맡겨 쓴” 것이라고 그 가치를 부정한(서령, 앞의 글 184면) 탓인지, 비판적인 평가가 일반적인데, 그렇게만 볼 작품은 결코 아니다.

14) 서령, 앞의 글 192면.

15) 김학철 『최후의 분대장』, 문학과지성사 1995, 393면.

16) 下斗米伸夫 『アジア冷戰史』, 中央公論新社 2004, 180~81면.

17) 김학철 『20세기의 신화』, 창작과비평사 1996, 20면.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따로 주를 달지 아니하고 본문에 ‘신화’로 약칭해 면수만 표시함.

18) 이상협(相協) 『헝가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6, 263면.

19) 실제 『신화』에는 이 중편이 직접 언급된다.(104면)

20)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이영의 옮김, 민음사 2014, 208면.

21) 정영목 「옮긴이의 말」,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1, 305면에서 재인용. 원문은 George Orwell, “Why I write”(1946) Why I Write, Penguin Books 1984, 8면.

22) 김남천 「작품의 제작과정」(1939), 『김남천전집』Ⅰ, 정호웅·손정수 엮음, 박이정 2000, 498면.

23) 『최재서평론집』, 청운출판사 1961, 236면.

24) 같은 책 237면.

25) 기중 『대하』 『탑』 『봄』을 교양소설에 미달한 것으로 파악한 서경석의 논의가 재미있다. 「자전적 소설의 한 유형: 이기영의 『봄』론」, 정호웅 외 『장편소설로 보는 새로운 민족문학사』, 열음사 1993, 295면. 그러나 미완의 소설을 두고 미달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지나치다.

26) 졸고 「소설과 역사적 법칙성: 이기영의 『두만강』을 읽고」, 『한국근대문학을 찾아서』, 인하대출판부 1999, 338~4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