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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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소연 金素延

시인.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이 있음. catjuice@empas.com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등이 있음. cyndi89@naver.com

 

장이지 張怡志

시인.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라플란드 우체국』, 평론집 『환대의 공간』 등이 있음. poem-k@hanmail.net

 

 

 

백지연 이번호 문학초점에서는 시와 비평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장이지 시인을 모셨습니다. 장르서사 및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서도 관심이 깊으신 걸로 아는데요. 오늘 다양하고 흥미로운 대화가 기대됩니다.

 

장이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동업자들의 작품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여러 의미에서 어려운 일이지만, 오늘은 좀 극성스러운 독자가 되어, 읽은 느낌을 솔직히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김소연 반갑습니다. 장이지 시인의 적극적인 태도에 값하는 자리가 되기 위해 더더욱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러나 오늘은 두분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만으로도 저에겐 귀한 자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있습니다. 이제 시작해볼까요.

 

 

은희경 『중국식 룰렛』(창비)

 

백지연 『중국식 룰렛』은 은희경(殷熙耕)의 여섯번째 소설집입니다. 이번 책도 도시공간을 배경으로 현대인의 내밀한 고독과 감수성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은희경 소설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어요. 우선 술, 옷, 가방, 책과 사진, 음악 등 표제로 내세운 사물들이 눈에 띄는데요, 이 사물들은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 소설 깊숙이 스며들어 작동하는 모티프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기점으로 돌아보니 그동안 은희경 소설이 고유의 색채를 간직하면서도 시대적 흐름을 민감하게 반영하며 변화해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환멸과 냉소, 나르시시즘, 자기연기술 등 은희경 소설을 두고 다양한 비평적 명명이 있어왔지요. 최근 장편 『태연한 인생』(창비 2012) 이후에는 지식인소설이나 메타소설의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듯합니다.

 

장이지 사물과 이야기를 봉합하는 솜씨가 능수능란하면서도 또 성실하다고나 할까, 그런 면이 있습니다. 은희경 소설은 인물 유형이나 이야기 구조가 매우 전통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인공들이 모두 자기를 상실한 사람들이고요. 이들은 불치의 병을 거나 큰 수술을 앞두고 있기도 하고 자살에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내와 파경 위기에 놓인데다 의료사고로 인해 직장인 병원에서도 곤경에 처해 있다든지(「중국식 룰렛」), “나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라고 선언한다든지(「장미의 왕자」), 그도 아니면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의 가장 오래된 대용품”이라고 고백하는 식입니다(「대용품」). 인물들이 삶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내 모습의 원형은 무엇인지,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지 탐색하는 이야기 구조인데요.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진실이나 진상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세계는 모호한 상태로 반쯤은 열려 있고 반쯤은 닫혀 있습니다. 이처럼 진실을 탐색하는 과정이나 결말에 이르는 전개방식이 매우 고전적인 소설같이 다가와요.

 

왼쪽부터 김소연, 장이지, 백지연. Ⓒ 신나라

 

김소연 언제부턴가 새 은희경 소설 앞에서, 무엇을 이야기했을까보다는 이번에는 어떻게 썼을까에 더 관심이 가는 편입니다. 은희경 소설에서 제가 특히 매혹적으로 느끼는 지점은 플롯을 짜내는 힘입니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작은 모티들이 확장되고 심화되는 흐름에 감탄을 많이 했습니다. 은희경 소설의 설득력은 이야기를 가장 잘 짜내는 방식에서 나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지연 다양한 이야기 구조와 대화방식, 논평의 삽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죠. 클래식한 소설 같지만 자세히 보면 치밀하게 고안된 다양하고 실험적인 서술방식을 품고 있어요. 「중국식 룰렛」이 좋은 예인데요, 묘사와 대화, 독백, 논평 등 단편 하나에 많은 형식이 녹아 있어요. 상충할 것 같은 서술형식들이 정교하게 한편의 소설로 꿰어지는 과정 자체가 놀랍죠. 물론 이렇듯 섬세하게 교차하는 이야기들의 구조가 부각되면서 상대적으로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극적인 사건이나 주제의 직접성은 두드러지지 않는 편이에요. 읽는 사람에 따라 뭔가 이야기가 불투명하다고 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장이지

장이지

장이지 이 작품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실과 거짓이 고정되지 않으면서, 1에서 9까지의 숫자 중에 자꾸 흔들리는 거죠. 그런 불안 속에서 독자들 역시 ‘확률적인 세계’가 주는 불안감을 함께 경험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점이 은희경 소설을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것으로 느끼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 과정을 소설 쓰기의 알레고리처럼 만들어놓았다는 겁니다. 「중국식 룰렛」에서 진실과 거짓 어느 쪽이든 선택하게 되면 K가 상처를 받든지 ‘나’가 상처를 받잖아요. 선택을 안 할 수도 있는데 게임에 다 참여 판돈을 단 말이에요. 어쩌면 이 소설은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상처를 받더라도 결국에는 뭔가를 선택해가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백지연 말씀대로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이 대체로 넓은 범주의 메타소설로 읽히죠. 가령 「중국식 룰렛」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1965)이 보여준 익명적 개인들의 만남을 소설 쓰기의 플롯으로 다시 가공하고 있습니다. 그런 메타소설적 구조를 관장하는 인물로 K가 설정되고요. 나름대로 미학적 감각을 갖춘 공간에서 게임을 고안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 자체가 ‘자기연기술’의 진화된 형태인데요. 물론 이렇듯 원하는 삶을 허구 속에서 디자인하는 방식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며 삶의 민낯을 보여주게 되죠.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별의 동굴」은 그 과정을 가장 압축적으로 아름답게 드러내는 듯합니다.

 

김소연 저는 「대용품」을 읽으면서, 아까 장이지 시인이 언급하신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의 가장 오래된 대용품”이라는 명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특히나 강렬한 물음표가 생겼습니다. ‘작가의 말’에는 이 작품을 쓰는 중에 “2014416일의 날벼락이 닥쳤다. 어쩌면 내가 조금쯤 변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 작가의 말 때문에 더더욱 「대용품」은 다른 작품들과 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작가가 인물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더 조심스러워하는 게 느껴진달까요. 확률적인 세계를 조심스럽게 가늠하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문장들 강렬한 소설적 자의식 섞이는 게 느껴졌습니다. ‘신발’이라는 모티프를 조금은 버거워하는 느낌도 받았고요. 장이지 시인은 「대용품」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장이지 저는 좋았어요. 제가 소년 취향인지도 모르겠는데 성장기를 회상하는 아련한 느낌이 좋았어요. 「중국식 룰렛」과 「불연속선」도 좋게 읽었습니다. 「불연속선」에 의하면 ‘습식촬영’을 한 사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탈색되면서 달라진다고 하잖아요. 삶의 진실이나 우리 자신의 정체성도 고정된 게 아니라는 세계관이 무게감 있게 다가왔어요. 이번 소설집에서 명확하게 해피엔딩은 찾기 어렵지만, 그래도 저는 작가가 세계를 긍정하려는 작은 가능성을 열어두는 점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중국식 룰렛」도 ‘나’가 K에게 냉담하지만은 않거든요. 2퍼센트 정도의 걱정이나 우정 같은 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엔딩이었어요.

 

김소연

김소연

김소연 세계를 긍정하려는 작은 가능성과 관련 「대용품」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보면요, 소년 시절에 경험한 비극과 인물들이 결혼식장에서 재회하는 이야기가 서로 맞물려 있는데요. 군데군데 회고의 장면들에 아련함이 얼비칩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사고로 친구를 잃었을 때 생존자로서의 상실감이 아이의 인생에 끼쳤을 어떤 것들이 잘 작동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소설가에게 기대하는 역량이 유독 크게 작용해서 생각이겠지만요.

 

백지연 「대용품」에서는 애도와 죄의식의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 속에 녹이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요. 그 속에서 서술자의 위치도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고요. 섬세한 이야기들이 교차하는 방식이라서 잘 느껴지지 않지만 은희경 소설은 논평과 고백의 면모가 강하죠. 인물을 관장하고 해석하는 서술자의 위치가 정확할수록 이야기의 형식이 갖는 힘도 강해지는데요. 「대용품」과 비교한다면 「별의 동굴」은 책과 죽음의 문제가 같은 무게를 지닌 흥미로운 플롯으로 엮이면서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으로 기능했다는 느낌이고요.

 

김소연 저도 그런 점에서 「별의 동굴」이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보통 우리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자꾸 허무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 때 창작자로서 많은 에너지를 쓰는데요, 은희경 소설은 처음부터 아예 허무를 전제하고 쓰는 느낌입니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 2014)에서도 허무를 전제하면서 그 토대 위에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아기자기하게 만드는 힘이 굉장하죠. 그 디테일이 은희경에 대한 신뢰감으로 작용니다. 허무의 토대 위에서의 우리 진짜 세계와 마주하는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백지연

백지연

백지연 무엇보다도 저는 은희경 소설의 인물들에 많은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는데요. 소심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다루지만 그들의 숨겨둔 고민과 욕망이 얼마나 다채롭고 무한한가를 쉴새없이 설명해줍니다. 소설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한다면 은희경은 그 임무에 가장 충실한 작가죠. 작품을 읽고 나면 인간의 복잡한 마음을 잠시나마 이해 듯한 위무와 기쁨이 느껴져요. 더불어 장르적 변형에 능하고 그 자체로 많은 장르를 품은 은희경 작가가 쓸 다음 작품이 벌써 궁금해집니다. 고요하고 정갈한 단편들을 읽다보니 유쾌하고 활기찬 긴 이야기들도 기다려지고요.

 

 

백수린 『참담한 빛』(창비)

 

장이지 저는 백수린(白秀麟)의 작품을 처음 읽었는데요, 잘 읽히고 익숙한 화법을 지닌 소설이라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면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들통나서는 안 되는 비밀”(「시차」)을 들려주겠다든지 “그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길 위의 친구들」)다든지 하는 설정들이 흥미로웠어요. 소설을 읽다보면 ‘육친의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것’(「북서쪽 항구」)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그때 내가 결혼을 재촉하지 않았다면, 한국에 같이 가자고 조르지 않았다면”(「스트로베리 필드」)이라거나 “내가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러시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첫사랑」) 하는 식의 ‘가정법’에 기대는 방식도 낯설지 않습니다. 일이 끝나고 나서 과거를 돌아보면 모두 운명이나 필연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소설에 있어서 해석학적 태도라고 부를 만한 것이 백수린에게는 있는 것 같아요.

 

백지연 백수린 소설에서 우선 두드러지는 것은 공간적 이동입니다. 소설 무대로 한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가 등장합니다. 이에 따라 언어 차이에 따른 소통의 문제, 장소적 정체성의 사유가 꾸준히 다루어져요. 첫 소설집인 『폴링 인 폴』(문학동네 2014)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잘 드러나는데 이번 소설집은 이야기의 극적 구조가 훨씬 밀도 높고 집중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백수린뿐만 아니라 최근 작가들의 소설에서도 공간 이동의 문제가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다루어져요. 가까운 곳을 오가는 것처럼 시차도 별로 느껴지지 않고요.

 

김소연 특히 올해 출간된 소설에 그런 경향이 많은 것 같아요. 여행 모티프가 아니라 일상화된 삶으로 해외체험이 그려지죠. 좋은 현상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가령 이전의 소설에서 외래어나 외국지명이 등장하면 소설과 잘 섞이지 않는 전시적인 느낌이었는데 최근 젊은 소설들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국경이라는 경계가 아예 해체되어 있어요.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의 소설들과 비교해본다면 최근 소설의 인물들은 그야말로 코즈모폴리턴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드는 거죠.

 

장이지 코즈모폴리턴과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1980년대에 하스미 시게히꼬(實重彦)가 당시 일본소설에 만연한 탐정소설 구조를 비판한 적이 있어요. 주인공이 진짜 떠나야 하는 이유,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데, 주인공 스스로가 탐정처럼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거죠. 백수린 소설도 그렇게 볼 여지가 있어요. 정말 훌쩍 떠난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있는데, 그 추진력은 좀 부럽기도 해요.

 

백지연 공간이동과 탐정소설 형식 이야기가 재미있네요. 『꾿빠이, 이상』(문학동네 2001) 이후 김연수 소설이 보여준 경향들이 떠오릅니다. 최근 소설로는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에 실린 작품들이나 정지돈의 「창백한 말」(『내가 싸우듯이』, 문학과지성사 2016)도 생각나고요.

 

김소연 추리 형식은 소설의 완성도를 위해서도 안정적인 방법일 것 같아요. 주인공이 의문을 품고 길을 나서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작가도 흥미진진할 테고 독자 역시 흥미의 끈을 지속하며 탐독할 수 있으니까요. 이야기의 반전이나 깨달음, 완결성도 전형적으로 깔끔한 매듭이 가능할 테니까 많이 기댈 수 있는 플롯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궁금한 것은 최근 소설들에서 이렇게 장소성이나 그 장소마다에 누적되어온 역사들의 차이를 표백하고자 하는 욕망이 분명히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백지연 최근 젊은 소설들에 드러난 공간의 이동은 이전의 소설들이 드러내는 시대적 감각과 확실히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역사적·사회적 공동체의 기억을 직접 환기하기보다는 일상적 삶 속에서 공간의 이동을 그리죠. 시대적 상처가 있다 하더라도 배경으로 희미하게 드러납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세계 속에 살아가는 보편적인 ‘개인’으로 체험하는 일상적 감정들과 공통 욕구를 그려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요. 백수린 소설에서는 그 공통적인 감각의 실마리로 ‘연애’가 등장합니다. 공간 이동은 대범하게 다루어지지만 인물들이 서로에게 품는 감정의 설렘이나 기억의 애틋함에 묘사와 감각이 집중되죠. 장이지 시인이 부럽다고 하신 그 ‘추진력’이 사실 그 감정적 소통에 몰두한 모습의 예라고 할 수도 있는데요. 이야기의 외양은 세련되고 감각적인데 그것을 끌고 가는 실존적 주체는 감성적이고 낭만적으로 다가옵니다.

 

김소연 전체적으로 낯설지 않은,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가 분명 있습니다. 더불어 김금희나 최은영 등 근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보여주는 선량함의 덕목이 백수린의 소설에도 있어요.

 

백지연 강석경과 김승희, 최윤의 소설이 보여준 바 있는 인문주의자의 면모나 에세이적 특성들도 있고요. 소설들의 자료나 배경으로 다양한 예술 텍스트가 거론되죠. 그래서 고전적인 느낌도 게 됩니다. 저는 세대적인 정체성이나 공간적 시차가 드러난 「첫사랑」과 「중국인 할머니」가 흥미로웠습니다. 「첫사랑」의 경우에는 자기 세대의 이야기가 더 풀려나와도 좋겠다 생각했어요. 언뜻 보면 김애란 소설이 이야기한 바 있던 세대적 좌절감과 소외를 하는 듯하면서도 그 물질적 세계에 완전히 압도되지는 않는 발랄함과 생기가 느껴졌어요.

 

장이지 완성도에서는 「스트로베리 필드」 「시차」 「여름의 정오」가 뛰어나죠. 막힘없이 유려하게 읽힙니다. 예를 들면 오옴진리교 사건이나 9·11 같은 사건을 계기로 그 전과 후가 달라져버린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을 이야기하는 방식인데요, 환멸의 형식으로 부를 만한 것이지요. 왠지 저는 이런 유형의 소설을 학교 교육에서 많이 접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지 이런 유형의 소설에 끌리는 편이에요.

 

백지연 말씀하신 세 작품이 백수린 소설의 장기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죠. 세련되고 아름답고 매끄럽게 읽혀요. 특히 「스트로베리 필드」는 정말 감성적인 연애소설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에 비하면 표제작인 「참담한 빛」은 주제에 대한 부담이 이야기의 형식과 잘 맞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타인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터널 공포증’의 공유로 애써 연결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높은 물때」에서도 악몽과 환상의 형식으로 인물이 겪는 내적 갈등이 표면화되는데 외국 공간에 놓 인물들의 고통과 불안이 충분히 형상화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유려한 이야기 형식과 관념적인 주제가 부딪칠 때 겪는 서사적 뒤틀림이 느껴져요.

 

김소연 그런데 저는 「참담한 빛」처럼 뭔가를 더 해내려는 의도가 있는 작품에 마음이 더 갑니다. 이 작품을 읽을 때는 뭔가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는 느낌이 있었어요. ‘조금만 더 힘을 으면, 좀더 정교하게 안 됐을까’ 같은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고요. ‘나라면 이 작품을 어떻게 썼을까’를 상상해보기도 했고, 모티의 무게에 짓눌렸을 소설가의 어깨가 실감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 표제작만으로도 제게는 버거운 이야기를 다루려는 태도 자체에 대한 신뢰감을 갖게 습니다.

 

장이지 왠지 이 대목에서 제가 칭찬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될 것 같은데요.(웃음) 어쨌든 개인적으로 근래 읽은 신들의 소설 중에서 제일 좋았습니다. 익숙한 방식이라는 것이 관점에 따라서는 안 좋 수도 있지만, 백수린의 소설은 형식적으로 안정감이 있어요. 게다가 세상이 결정적으로 바뀌어버렸을 때, 우리는 모두 세계에 던져진 이방인이 된다고 하는 메시지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정이현 『상냥한 폭력의 시대』(문학과지성사)

 

 장이지 독자로서 오랜만에 만나는 정이현(鄭梨賢) 소설집이 매우 궁금했는데요. 사실 정이현의 단편은 남성이 읽기에 적합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남성들은 가족에 무관심하고 한결같이 일중독으로 그려져 있거든요. 수전노인데 여성편력까지 있. 그리고 여성이 이 못난 남성들을 대신 가족과 일상을 지킨다고나 할까, 언뜻 일본 서브컬처의 ‘전투미소녀’가 떠오를 정도로 어떤 면에서는 비현실적이에요, 고군분투의 연속이지요.(웃음) 정이현 소설의 주인공들은 ‘불길한 징조’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매뉴얼에도 나오지 않는 돌발적인 ‘사고’에 대응합니다. 대개의 판타지들이 그렇듯 정이현의 소설이 ‘일상-혼돈-일상’의 구조를 취하는 것은 주목됩니다. 결국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지요. ‘파국’이 없습니다.

 

백지연 『낭만적 사랑과 사회』(문학과지성사 2003)를 포함한 초창기 소설에서는 젊은 여성들을 압박하는 물질적 욕망과 그것을 는 속물화의 과정이 ‘악녀’ 캐릭터로 부각됐죠. 이번 책은 중산층의 속물욕망과 더불어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 단단한 일상의 틈에 어떻게 개입되는가를 하나하나 살피는 듯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파국을 저지하는 일상의 회귀 구조가 두드러져 보입니다.

 

장이지 은희경이나 백수린 소설과 비교하자면 ‘미시적인 세계’를 잘 파헤친다는 느낌이에요. 제목의 ‘상냥한 폭력’이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방한 느낌을 줍니다.

 

김소연 정이현 소설의 인물들은 구체적인 일상의 물질성을 잘 알죠. 예술가적인 기질의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김애란 소설과 닮은 면도 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삶의 핍진성을 포착하면서도 김애란 소설 거기에 문학적인 아포리즘을 부여함으로써 인물을 숭고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는 반면 정이현 소설은 그런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이현이 돋보이는 지점이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백지연 정이현 소설 특유의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이 있어요. 세태비판을 담은 많은 소설들이 거리를 두고 판단해야 할 삶의 세목들에 대해서 치기나 감상성으로 귀환시켜 허약해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에 비해 정이현 소설은 냉혹할 정도로 삶의 속물성이나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그대로 포착합니다. 소설가가 지녀야 할 ‘거리화’의 감각을 생래적으로 터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정이현 소설에서도 서정적 주체의 아련한 슬픔이나 감상성을 부각할 때가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오늘의 거짓말』, 문학과지성사 2007)이나 『안녕, 내 모든 것』(창비 2013)이 그 예인데요. 그런 시도보다는 건조하게 감상성을 제거하고 돌파하는 방식이 정이현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이지 문득 든 의문입니다만, 독자들은 정이현 소설의 어떤 지점에 끌리는 걸까요? 현실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많이 읽히는 건지, 대중이 원하는 이른바 잘 읽히는 소설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미디어와 연관된 팬덤의 영향인지…… 저는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외국 잡지나 포털에 실리는 짧은 소설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파국 없이 잔잔하고, 아무한테도 상처 주기 싫으니까 선택하지 않는 구조라고나 할까. 이 이야기가 가장 현실적인 것 같지만 오히려 진짜 현실과는 단절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세트 위에서 펼쳐지는 드라마 같기도 고요.

 

김소연 세트 같다는 느낌은 어쩌면 다른 시선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소설가의 매정함 때문은 아닐까요. 폭력이든 속물이든 욕망하는 주체와 그 욕망을 응시하는 시선 자체가 모두 정교해지고 은폐되어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소설에서만큼은 좀더 진화된 인물과 소설가의 기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정이현 소설이 다루는 중산층의 계급적 욕망이나 이기심은 다소 소박한 면이 있고 평면화된 것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백지연 이번 책에서는 청소년 임신 문제부터 양로원, 유치원, 학교 등 다양한 공간을 배경으로 흥미로운 사건들이 다루어지는데요, 이런 다양한 사회적 사건들이 좀더 많은 디테일과 치밀한 이야기의 전개를 가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긴 했습니다. 사실 정이현 소설이 보여주는 강점은 세속적 욕망의 이동과 흐름에 대해 친화적이기까지 한 솔직한 탐구의 시선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시선이 충분한 디테일들을 바탕으로 더 펼쳐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예를 들면 이전에 『너는 모른다』(문학동네 2009)에서 보여준 장르적 시도도 흥미로웠거든요. 일본문학에서 소위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하는 장르처럼 정이현 소설이 주목하는 사회적 악과 욕망의 세계가 넓은 이야기로 나아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장이지 일본에서 사회파 미스터리는 굉장히 무거운 거거든요. 정이현 소설과 다른 결이라는 느낌은 듭니다. 저는 「안나」 같은 소설에서 정이현의 장점을 찾고 싶어요. ‘경’이 ‘안나’를 만나는 이유도 그녀의 힘든 삶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위안을 받아서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안나’가 ‘경’의 삶을 위로하려고 드니까 위계를 깨는 것 같아서 당장 거리를 두죠. 여기까지가 정이현 소설의 구도가 아닐까요. 이것을 깨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정이현 소설의 색깔이 아니에요. 더 까다로운 길을 가지 않는 점이 안전하고 친숙한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백지연 물론 ‘안나’며 ‘미스조’ ‘메이’ 등 소외된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런 안전성의 희구가 느껴지죠. 손을 내밀어야 할 상대이지만 선을 긋고 관계를 보류하는 방식으로 소설이 끝납니다. 그런데 미묘하게 보면 그 결말들이 고정된 패턴이라기보다는 균열과 여운을 남겨요. 그런 점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목해볼 수 있는데요. 발표 당시는 ‘뚜껑’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저는 이 제목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아무튼 이 소설은 일상 회귀가 불가능해지는 혼돈의 국면을 고스란히 보여줘요. 안정적인 삶을 흔드는 돌발적 사건 앞에서 기만과 은폐가 과연 가능할까를 묻는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김소연 저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인물들이 우왕좌왕하는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장이지 세계를 매뉴얼로 파악하는 세계관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 매뉴얼에도 없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혼란이 생기죠. 거기에 대응하는 방식을 그린 소설 같습니다. ‘징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뚜껑이 깨지니까 불길한 ‘징조’라고 하는…… 그런 예감은 여성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기도 한데요. 이런 것도 감수성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소연 정이현 소설의 여성들이 느끼는 본능적 예감은 컵이라도 하나 깨면 아지는 잔소리를 듣고 자란, ‘여성’으로서의 삶 속에서 키워진 생활감각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은데요. 그런 점에서 제 세대의 여성들이 자라온 삶의 환경을 내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속물성에 대한 자기풍자나 자의식도 같은 맥락인데요, 정이현 소설의 인물들은 스스로의 속물성을 응시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뒤틀림이나 자학의 정서를 잘 드러내지 않죠. 때로는 천진하고 오히려 더 순수한 느낌으로 치환될 때도 많은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장이지 시인이 얘기한 정이현 소설의 변하지 않는 스타일이라는 것이 있겠죠. 다만 내용을 더 전개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좀더 적나라하게 현실에, 생활에 밀착하면 그것만으로도 통쾌함을 주었을 것 같아요.

 

백지연 정이현 소설은 대중이 갈망하고 매혹되는 물질적 감각, 혹은 오랜 세월 친숙해져온 삶의 관습성들을 세련되게 담아내는 장점을 갖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중산층의 계급적 감각과 속물적 욕망을 포착하는 디테일을 지금보다 더 밀어붙일 필요가 있죠. 속물적 인간에 대한 과도한 자의식으로부터 균형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은 정이현 소설의 중요한 가능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속물적 삶을 소설화할 때 선배세대인 정미경, 서하진의 소설과는 차별되는 정이현만의 고유한 대중적 감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이후로도 적극적으로 많이 풀려나왔으면 좋겠어요.

 

 

안미린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민음사)

 

김소연 안미린 시집은 최근 출간된 첫 시집들 중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저는 사실 이 시인이 등단할 때 심사를 맡기도 했는데요, 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력한다면 나도 쓸 수 있는 시, 노력해도 도저히 나는 쓸 수 없는 시’라는 두가지 관점으로 신인을 바라본다면 자의 시인을 신인으로 선택하고 싶다,라고요. 그런데 좀 아쉬운 건 그때 몹시 좋게 읽었던 데뷔작들이 이 시집 안에서 대표작에 해당된다는 거예요. 시편들 사이에 격차가 꽤 있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집을 다 읽고 났을 때 느낀 안미린만의 발랄한 감각에 대한 경이로움은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장이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시인인데, 여성적이면서도, 어쩌면 매우 능동적이고 활달한 성격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어요. 거울, 인형, 기계, 가구 같은 소품을 즐겨 쓰는 것 같더군요. 인형놀이하는 소녀가 떠올랐어요.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사실 소극적인 아이가 아니라 적극적인 성격이라고 하던데, 왜 그런가 하면 인형의 ‘엄마’가 되어 인형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어하는 면이 있다는 거예요. 일리가 있는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세계, 미래, 신, 천사, 악마 같은 시어를 애호하더라고요. 상당히 거창한 것들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용케 거대서사를 불러오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도 허구 세계를 창출하는 소녀의 능동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스무살의 신()”(「반투명」)은 ‘언어’라는 기계를 조작 세계를 발명합니다. ‘알’이나 ‘태아’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데, 이런 것도 시적 세계 창조하는 메타시적인 발상과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니다.

 

백지연 이미지를 불연속적으로 배치한다는 점에서 쉽게 의미가 와닿는 시들은 아니었습니다. 추상적인 관념들을 동원하는데 동시에 서툴러 보이는 실험들이 함께하는 점이 특이했요. 제가 이 시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미래’에 대한 인식입니다. 백은선이나 박희수의 시에서 드러났던 절망의 감각과 달리 안미린 시에는 ‘오지 않은 미래’를 조형하는 고유한 상상력이 있어요. 읽으면서 김성중과 윤이형 소설이 보여주는 미래적 상상력도 연결되었고요. 시집 도처에서 ‘멀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요, 먼 미래, 알 것 같지만 모르는 미래. 그래서 미래를 상상할 때 한껏 허구적이고 가상적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세계에 대한 절망을 선언하는 방식과 대극적이어서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세계의 끝에 종말이 아니라 먼 미래가 있는 거죠.

 

김소연 그 먼 미래를 불러들이지도 않고 예상하지도 않으면서 그 세계를 의식하는 것에서 안미린의 시가 다른 젊은 시인들의 시보다 깊이를 획득한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미래를 앞당겨 현재로 끌고 들어와서 그 이상한 공간에서 지내는 페르소나가 느껴져서요. 어떨 때는 기도하는 자세와 비슷한 거룩한 뒷모습 같은 게 감각됩니다. 저도 이 시인을 스치듯 만나본 게 전부라서 그런지,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음성이 어떤지, 표정이 어떤지도 짐작되지 않는데요, 시를 읽고 있으면 궁금해집니다. 어떤 사람일지, 십대일지 삼십대일지, 어떤 표정으로 어떤 태도로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모든 것이 전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서투른 실험’이라는 언급도 하셨지만, 이 시집에서 성취가 높은 작품들만 취해서 읽었을 때는 또 어떨까 싶어집니다. 저는 1부나 3부의 시들이 비교적 성취가 높은 작품으로 읽습니다.

 

장이지 제 생각에는 시가 전반적으로 관념이 너무 뚱뚱한 것 아닌가 싶어요.(웃음) 어떤 점에서는 독아론적(獨我論的)이기도 한데요. 세계랑 ‘나’랑 아무 매개 없이 연결되고 있거든요.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다분히 소녀적인 감수성이에요.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봐. 세계는 나랑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라는 식이죠.

 

김소연 관념이 뚱뚱하다는 것에 대해 좀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장이지 그건 ‘나’가 너무 커서 시적 세계를 ‘나’만으로 가득 채운다는 거죠. 타자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고나 할까.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보다 내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보는지가 안미린에게는 더 중요해 보여요. 가령 비유 현란하기는 하지만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지 않아요. 그것을 재미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불친절해 보일 수도 있고 폐쇄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백지연 이렇게 시를 향한 평가가 갈리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안미린 시들은 개별로 볼 때 무척 유니크한데요. 한권의 시집으로 묶이면서 이 시적 세계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평이 달라지는 듯합니다. 숙성되지 않은 형식적 실험이나 의미의 난해함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거침없이 가공하는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신인다운 패기도 보여주죠. 제가 비교적 친숙하게 읽은 작품은 「버팔로의 가르마 가르마」나 「서서히 너희」인데요, 새로운 세대를 선언하는 의지가 뚜렷하게 보여서 구체적으로 와닿았어요. 「반투명」과 「라의 경우」는 이미지를 병치하는 감각이 새로웠고요.

 

장이지 사용하는 색채감각도 특이해요. 원색이 거의 없어요. 연보라, 청회색, 은록색, 은색…… 이런 색들이 여러번의 덧칠을 통해 만들어지듯이 안미린 시에서 쓰는 이미지들도 여러번의 ‘낯설게 하기’로 자꾸 굴절시킨 것이 아닌가 싶어요.

 

김소연 어쩌면 관념이나 철학의 의미에 기대고 있다기보다는 순수한 추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어요. 도저히 감각할 수 없는 추상의 세계를 감각으로 붙잡으려는 시도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추상을 감각적으로 포착한다는 시도가 저에겐 굉장히 재미있는 대목이었어요. 예를 들면, 시집 제목인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도 ‘빛’ ‘결론’ 이런 명사를 보면 추상성이지만, 이 제목에서 그 핵심은 ‘아닌’과 ‘찢는’이라고 느껴지거든요. 추상화되어 있는 것들을 감각하지 않고서는 ‘찢고’ 말할 수 없으리라 판단돼요. 그런 점에서 선언적인 구석도 있고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시인의 목소리 중 하나가 될 거라고 기대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두분이 이야기한 것처럼 불친절함이나 폐쇄성도 언급될 수 있겠지만, 저의 경우 불친절함과 폐쇄성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시인들의 중요한 선택지 중 하나라고 받아들여집니다.

 

장이지 동일성의 시학이라고나 할까, 은유의 세계라고나 할까, 그런 것들을 더 자유로운 연상을 통해 허물고자 하는 여성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안미린의 한계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안미린만의 개성으로도 볼 수 있을 거예요. 안미린의 소품들은 얼마간 왕년의 초현실주의를 떠올리게 할 만큼 매혹적인 면이 있어요.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다른 신인들이 공유하는 세대의식에서 보면, 조금 다른 지점에 서 있는데, 이런 것이 그녀에게는 유리한 면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싶어요. 이런저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세계에 충실할 수 있는 신인이라는 느낌입니다.

 

 

박기영 『맹산식당 옻순비빔밥』(모악)

 

백지연 박기영 시집은 ‘음식’과 ‘고향’의 기억을 중심으로 한권의 책이 기획되었다는 점에서 눈에 띕니다. 장정일과 함께 낸 공동시집 『·아침』(청하 1985)과 첫 시집 『숨은 사내』(민음사 1991) 이후 정말 오랜만에 출간한 시집인데요. “평안남도 맹산군 수정리를 원적지로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바칩니다”라는 ‘시인의 말’이 눈에 띕니다. 우선 시편들에서 거론되는 각종 음식 이야기가 북방정서와 관련되어 짙은 향토성을 띠고 다가옵니다. 이용악, 백석 시를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고요.

 

장이지 시집 뒷면의 추천글에도 나오지만, 저도 이 시집을 읽으며 백석 시가 먼저 떠올랐어요. 그러나 유년 화자가 전면에 나선 백석의 어떤 시적 국면과는 다른 것이 박기영에게는 있다고 생각해요. 1, 2부의 시들은 아버지의 경험을 아버지의 음성으로 듣는 구조를 취하는데, 상실해버린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환기는 면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시를 돋보이게도 하지만, 반대로 독자의 접근을 가로막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의 투박하고 고집스런 말투는 고향이나 옛날의 경험을 절대화하는 폐쇄적인 경향과 맞닿아 있거든요.

 

백지연 아버지의 말투가 극적인 발화방식을 강조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삽자루 콱 잡으라우”(「오소리술」) “사내새끼들이 지대로 된 비빔밥을 먹어야지”(「맹산식당 옻순비빔밥」) “에미나이들은 이 맛을 몰라”(청국장 반대기) 같은 대목 그렇요. 시집 전반부에서 아버지가 핵심적인 표상으로 강하게 부각되는데 이런 것이 북방정서인가, 전형적인 남성 가부장의 세계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장이지 우리 시에서 북방정서라고 하는 게 남성적인 것만은 아닐 거예요. 미당(未堂)이 이용악이나 백석과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남방정서는 밝고 환한 것으로, 북방정서는 허무하고 춥고 쓸쓸한 것으로 신인 추천평 같은 데서 자주 말했던 것인데, 요즘 들어 북방정서를 이상하게 긍정적인 의미로 쓰는 경향이 많아진 것 같아요. 아무튼 이 시집은 남성적인 카리스마를 환기하는 힘이 크죠. 그게 일단 눈에 잘 들어온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거예요.

 

김소연 지난호에 다루었던 유진목 시집(연애의 책)처럼 박기영의 이 시집은 모두 미발표작을 묶었다는 점에서 우선 환영할 만니다. 시집 도입부부터 강렬한 느낌이었고, 이야기시를 지향하는 데서 오는 흡력도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집 ‘음식’을 매개로 시상을 펼쳐나갔다고 여겨지는데, 미각이라는 가장 강렬한 감각이 관념화되는 느낌이 매번 반복되는 걸 체험했습니다. 제목만 음식일 뿐, 음식과 결부된 추억의 편집술을 마주한다고 느껴졌습니다.

 

장이지 요즘 요리 프로그램이 참 많잖아요. 요리 프로그램의 핵심은 레시피입니다. 그런데 레시피에 치중할 때 놓치게 되는 게 음식에 결부된 기억, 경험이 아닌가 싶어요. 가령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은 레시피를 강조한 시라고 할 수 있고요. 그에 비하면 박기영 시는 음식과 관련된 기억을 드러내는 방식이죠. 그런 점에서 백석 시와 연결되고요. 근대적인 방식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박기영 시집의 좋은 점은 그런 곳보다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이 시집은 일단 강인한 아버지의 이미지가 시선을 사로잡지만, 오히려 홀아비의 궁상맞음에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음식을 얻어 온다든지 요리법을 묻는 홀아비의 처진 어깨야말로 이 시집의 정수(精髓)라고 봐요.

 

백지연 말씀대로 홀아비를 포함한 나이든 남성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많이 강조됩니다. 「어육계장」에는 장정들이 모여서 짐승을 잡고 가마솥을 걸고 불을 때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지죠.

 

장이지 백석의 「적경(寂境)」을 보면 부인 없이 사는 시아버지가 해산한 며느리를 위해 부엌에 들어가서 미역국을 끓여주는 장면이 있거든요. 박기영 시를 읽고 있으면 그런 궁상스럽고 애잔한 장면들도 많이 떠올라요.

 

김소연 그런데 백석은 어쨌든 음식을 다룰 때 음식의 전설에 가까운 아득함까지 잡고 있으면서도 혀끝의 감각을 서정적으로 환기하는 면이 있습니다. 「적경」 같은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장면만을 제시하면서 시인은 독자에게 이 음식과 연루된 각자의 정서를 환기할 자리를 내어줍니다. 박기영의 시를 읽으며 저는 이런 자극을 받지는 못한 것 같아요.

 

백지연 박기영 시에서 강조되는 음식은 감각적인 특징보다는 생존과 관련된 ‘먹거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여러 시편에서 드러나는 ‘홀아비’의 모습도 그렇고 어떻게든 자식과 함께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야만 하는 전투적 의지가 있다고 할까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수하려는 음식은 결국 ‘난민’의 체험과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고향의 기억이죠. 그런 점에서 이 시에서 강조하는 ‘피난살이’의 의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상상적인 ‘북방정서’를 환기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대구’라는 공간성이 굉장히 중요한 듯합니다.

 

장이지 북방에 포커스를 맞추면 이 시집을 좋게 보기 힘들죠. 북방을 절대화하잖아요. 백석은 소년이기 때문에 절대화해도 밉지 않아요. 박기영의 시에서는 다 큰 어른이 북방을 절대화하니까 독자로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데요. 말씀대로 ‘대구’라는 공간을 강조할 때 ‘홀아비’가 어렵게 남에 내려와서 아이를 기르는 난민의 삶이 핍진하게 드러나죠. 저는 이 홀아비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롭기도 하고 굉장히 재미있게 읽혔어요.

 

김소연 50편에 달하는 시편들이 음식을 매개로 펼쳐가는 서사적인 상상력에 압도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한권의 시집 이상으로 나아가려면 지금 이곳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왜 이런 옛날 기억과 고향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지를 우리가 감지하려면요. 더불어 시적 발화방법이나 서술방식에서도 긴장을 지닐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예를 들면 「감자수제비」의 “마침내 밥상 위에서 남을 위해 자기 살을 저며내고 나서야 삶이 완성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대목은 좀 직설적이지 않나요. 우리 상상력을 진두지휘하려는 것 같아 불편했습니다.

 

백지연 개인적 기억의 구현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기억과 연결되는 새로운 의미 부여가 필요하겠죠. 이 시집에서 난민적 정체성이 현재적 삶과 연동되는 지점을 더 캐고 들어간다면 좋을 것 같은데요. 똑같은 아버지 이야기라도 「동지팥죽」이나 「꿩냉면」은 생생하게 와닿는 좋은 시였어요. 반면에 간간이 여성화자 내세우는 시들은 대체로 관습적이고 평면적인 이미지들을 보여줘서 많이 아쉬웠고요.

 

장이지 시집 후반부에 힘 빠지는 시들이 꽤 있죠. 아쉬운 지점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저는 박기영 시가 갖는 고유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대형출판사에서 나오는 시집들이 젊은 시인들을 상품화하는 경향이 있고 실험을 내세워서 지나치게 개인적인 언어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그런 주류적인 경향과 달리 이런 소규모 출판사에서 뭔가 다른 이야기, 다른 상상력을 펼쳐보려는 시도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난해한 젊은 시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의 흡력을 보여주면서 의미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도 좋고요.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

 

장이지 허수경(許秀卿) 시인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비 2001)를 기점으로 시세계가 많이 변화했지요. 그전에는 취생몽사의 술주정이라든지 고백파의 처절함 같은 것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더 의젓한 세계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시집에는 오히려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화법도 간간이 보여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달, 병, 울음, 술, 연인, 악기, 노래,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19세기 낭만주의의 코드들을 자연과 잘 얽어매고 있어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지극히 비소(卑小)하지만, 그것이 자연과 어우러질 때 조금 더 위대해 보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과일이나 꽃을 제목에 등장시키는 방식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구나 감탄했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없는 2인칭의 사람에게 말을 걸듯이, 혹은 편지를 쓰듯이 쓴 시들의 내밀한 톤이 허수경 시의 ‘순금부()’라고나 할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소연 허수경은 어느 순간부터는 어떤 종류의 형식에도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쓰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정해진 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사람처럼 시를 쓴다는 느낌이요. 허수경 시에는 언어를 통제할 필요가 없는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에스쁘리(esprit)가 있어요. 세세한 분석들이 필요없는, 느낌 그대로 즐길 수 있는 시. 그런 점이 허수경 시의 가장 좋은 부분이죠.

 

백지연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이후로 드문드문 허수경 시를 읽어온 편인데요. 한동안은 이국 공간이 등장하는 데 따르는 낭만성과 추상성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시집을 보면서 초창기 시집의 세계가 현재화되어 나타나서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아까 최근 소설에 나타난 해외공간 이야기도 했지만 이방인적 주체에 대한 이야기가 실감을 띠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허수경 시는 대담한 방식으로 이 난제를 뚫고 들어갑니다. 시집 전반에 누벼진 산책자적 시선이랄까 고고학적 시선이 관념과 현실을 자유롭게 관통한다고 할까요. 도서관을 나와 산책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테러가 휩쓸고 간 거리가 있는 식이죠.

 

김소연 백수린 같은 젊은 소설가들이 코즈모폴리턴적 시야로 장소를 보여준다면 허수경은 디아스포라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핍진한 삶을 살아가며 얻은 시선의 힘이 좋았습니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부터 디아스포라적 감수성이 폭발한 것 같은데요. 허수경이야말로 한국사회에서 글 쓰는 사람 중에서 진짜 경계인적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거기에 대해 우리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장이지 관광의 시선과는 다른 깊이가 있지요.

 

백지연 「발이 부은 가을 저녁」을 읽으며 뭉클했습니다. 쉼없이 거리를 걸으면서 마주치는 자연 풍경, 사물과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시 속에 들어와 있어요. 낡은 구두, 별빛, 늙은 호박을 가로지르는 시인의 시선이 “아직도 걷고 있는 이 세계의 많은 발들”을 떠올리는 대목에서 깊은 감정의 파동이 느껴집니다. 길을 걸으며 사유하고 또 타인의 고통도 깊게 느끼고 있는 화자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거죠. “이 노래는 수십 년 전부터 불렀는데도/부를 때마다 아프다/아파서 그만두고 싶은데/모르는 이가 자꾸 시킨다/불러, 그 노래를”(「언제나 그러했듯 잠 속에서」) 같은 구절은 정말 간명하고 쉬운 표현인데 깊은 위로로 와닿습니다.

 

김소연 기술적으로 봤을 때는 못 쓴 것 같아 보이는 시들도 있는데요, 그런 시들이 도리어 독자와 맨손으로 악수하고 싶어서 벌거벗은 언어로 쓴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은 공감대를 만듭니다. 플롯을 짜면서 시공을 옮겨다니는 것도 무척이나 활달합니다. 시적 에너지와 동선이 정말 유연하고 압도적으로 다가옵니다.

 

백지연 2부의 시들은 딸기, 레몬, 포도, 수박 등 과일 이름이 그대로 제목이 되는데요. 어, 이렇게 해도 되나 싶었는데, 시들이 모두 좋은 거예요.(웃음) 모든 글에서 제목 짓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어요. 레몬에서 상상되는 온갖 기억과 감각이 일깨워지니까 그냥 제목이 ‘레몬’인 거죠. 걸치고 있는 옷에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자유로움이 느껴졌습니다.

 

김소연 외국에 거주하는 작가들이 한국어로 작품을 보내올 때 우리 입장에서 읽어보면 뭔가 동떨어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없지 않거든요. 실존적 탐구에만 치우치는 경우가 꽤 있요. 허수경 시인은 여기서 우리와 한이불 덮고 같이 동시대의 공기를 호흡하는 사람 입장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오전에는 독일로 출근했다가 중동에서 점심 먹고 한국에 와서 잠자리에 들 것 같은 그런 느낌이요.

 

장이지 저는 개인적으로 허수경 시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시의 사상 쪽도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허수경의 시는 불교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는 광활한 철학적 탐색을 보여주죠. 저는 그걸 인류학적 상상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보면 영혼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동물이 죽으면 그 영혼이 하늘로 날아가고, 날아갔던 것이 다시 사람들한테 섞여드는,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는 세계가 본격적으로 드러나지요. 그것이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우뚝 서 있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관념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죠. 전쟁이나 테러의 현장에서, 또 이민과 대량 실업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그 인류학적 상상력이 작동다는 점에서 허수경 시의 의의가 크다고 생각해요.

 

김소연 말씀대로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탐색에 더 기울어져 있으니까 기술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는 거죠.

 

백지연 이동하는 경계인의 삶, 영원한 이방인의 정체성은 문학이 주목하는 중요한 주제지만 개인적 고통을 넘어서 보편적인 고민, 갈등과 만나기 쉽지 않죠. 기형도 시와 더불어 90년대의 새로운 시적 흐름을 형성했던 허수경의 시가 이런 방식으로 오래된 기억을 새롭게 일구며 현재를 타격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 스스로 말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빙하기의 역」)라는 구절이 실감납니다. 「루마니아어로 욕 얻어먹는 날」나 ‘카프카 날씨’ 연작에서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 개인으로서 경험하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핍진하게 잘 드러나 있어요.

 

김소연 『혼자 가는 먼 집』이 연민의 정으로부터 발현되는 화자의 목소리라면, 이번 시집에서는 자비 쪽으로 좀더 가까워졌어요. 웅숭깊다는 것이 바로 이런 세계를 말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웅숭깊은 한국문학 만난 지 너무 오래됐잖아요. 한 시인이 아니라 한 인간이 점차 성숙해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배움이 이 시집에는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사회 속에서만 살아가면서 만연된 환멸 같은 것들이 우리에 있는데, 이 환멸에 갇혀서는 불가능한 문학적 역량을 허수경 시인은 발휘했다고 여겨집니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 쉽진 않았을 거거든요.

 

장이지 좋은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네요. 저는 늘 문학매체의 리뷰가 적당히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끝나는 것에 불만을 느껴왔거든요. 그것은 오히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작품의 한계에 비추어보지 않은 상찬은 그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어요. 오늘 거론한 여섯 작품집의 미덕은 어떤 한계가 ‘있음에도’ 아름답다는 것이에요. 두분과의 대화, 즐거웠습니다.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소연 한해 동안 두루두루 편식하지 않고 좋은 작품을 읽게 되었습니다. 작품들이 제게 남겨준 다양한 인상을 받아안고 한국문학의 앞날에 대해 많은 상상을 해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정된 작품들을 두고서 무례한 감상평을 한해 동안 꼬박꼬박 남긴 셈인데, 이 무례함을 두고두고 책임져야 할 일이 이제 남아 있네요. 죄송했고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비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네요.(웃음)

 

백지연 제주도에서 먼 길 오셔서 흥미진진한 이야기 나누어주신 장이지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한해 동안 함께 책을 고르고 깊은 토론을 이끌어주신 김소연 선생님 덕분에 저도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6.10.28.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