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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준태 金準泰
1948년 전남 해남 출생. 1969년 『시인』으로 등단. 시집 『참깨를 털면서』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국밥과 희망』 『불이냐 꽃이냐』 『지평선에 서서』 등이 있음. kjt487@hanmail.net
모란봉(북한기행・29)
모란봉에 올라
그렇지, 을밀대에 올라
나그네여 바라보라 더욱 멀리—
그대 가슴에 손 얹어 귀기울여보라
산, 산, 산이 에워싸는 평양은
온통 고구려 백성들의 함성이었다
후퇴하는 중공군 군홧발소리가 아니었다
美 B29가 떨어뜨리는 포탄소리도 아니었다
포탄소리 속에서도 쌀 항아리처럼 태어나는
고구려 어린 아가들의 하얀 첫울음소리뿐이었다.
노래, 팔남잽이
둥기 둥당 둥다앙—
시퍼런 작두(斫刀) 위에
홀연히 뛰어올라 춤추는
강화도 태생 저 잽이 보소
저 팔남잽이 노는 것 좀 보소
꽃나비가 사뿐히 내려앉듯
칼날 쳐든 작두에 맨발로 올라
세상천지 사방천지 사람들 불러
휜 두루마기 살〔肉〕바람 일으키는
저 팔남잽이 좀 보소
산이라면 넘어넘어 산길을 가고
물이라면 철썩철썩 물길을 가듯
저 팔남잽이 춤추는 것 좀 보소
—작두춤을 추어야 하는 전날 밤에는
제아무리 어여쁜 춘향이가 다가온다 해도
몸을 멀리하는 게 팔남잽이의 법도(法道)라!
(합방할 경우 칼날에 꼭 발바닥 벤다 했지?)
둥기 둥당 둥다앙—
마침내는 가솔(家率)들 모다 등에 업고
천리만리 시방육계(十方六界) 밟고 가는
아흐, 시퍼런 작둣날 위에 팔남잽이 아범!
얼씨구절씨구 훨훨 꽃나비로 날으네
작둣날도 봄날 밭고랑인 양 내려앉아
여문 씨앗처럼 연둣빛 웃음 자아내고
진도(珍島)라 다시라기 씻김굿이 따로 있나
발림춤 놀림춤 상여놀이로 한바탕 놀아보면
이놈의 시퍼런 칼날도 눈부신 극락(極樂)이네
미움도 증오도 온통 태평천지에 흥타령 되네
우하! 모질고 모진 삶 이 비장한 칼날도
새색시 족두리 벗기는 첫날밤 신랑이네
황촛불에 활활 타는 새색시 젖가슴이네
산 넘고 물을 건너 쌍무지개 다리일세라
둥기 둥당 둥다앙—
길을 닦으세 길 속의 길도 닦아보세
저승길도 닦고 닦아보면 눈부신 꽃밭
황천길도 닦고 닦으면 오방색 비단길
북녘 길도 춘하추동 논밭으로 갈면〔耕〕 지평선
남녘 길도 노(櫓)를 저어 가면 뭉게구름 수평선
목을 베는 망나니 칼날도 마음먹기 따라 고향길
삼팔선 휴전선 비무장지대 DMZ도 하늘길이라
둥기 둥당 둥다앙—
시퍼런 작두 위에
홀연히 뛰어올라 춤추는
강화도 태생 저 잽이 보소
저 팔남잽이 노는 것 좀 보소
산이라면 넘어넘어 산길을 가고
물이라면 철썩철썩 물길을 가듯
저 팔남잽이 춤추는 것 좀 보소
칼날에 우뚝 서서 태평소 불어대는
팔도 조선명물 저 팔남잽이 좀 보소
몽달귀신도 분단귀신들도 쩔쩔매는
첫날밤 꽃각시 달래듯 칼날에 올라
첫날밤 꽃각시 달래듯 철조망 타고
어험, 남이(南怡)장군처럼 말달려 가는
우와! 백두산 정상 빙벽의 칼날 위엔 듯
우뚝 서서 호령하는 강화도 저 팔남잽이!
바야흐로 작두 위에서 씨를 뿌린다
바야흐로 평양땅 천년의 벽화(壁畵) 속에서
뛰쳐나온 고구려왕비도 보듬어 올려 춤춘다
학(鶴)춤을 춘다 하이얀 고깔 바라춤을 춘다
작둣날 위에 줄레줄레 아들딸 씨앗 뿌린다
둥기 둥당 둥다앙—
봐라, 이불 속에다 아들딸 씨앗을 뿌리더니
작둣날 위에도 아들딸 세워 올리는 팔남잽이!
우리네 송골매 띄워 왼갖 잡새놈들 쫓아버리고
저 봐라, 이 수상한 시절에
동산에 달 떠오르듯 얼굴도 둥그러운 팔남잽이!
작둣날 칼날 철조망을 지평선으로 수평선으로 밟으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