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정현곤 엮음 『변혁적 중도론』, 창비 2016
우리는 성찰할 수 있을까
황준호 黃俊皓
기자, 한반도평화포럼 기획운영위원 workaroundtheclock@gmail.com
199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녔던 나는 ‘변혁’이란 말을 매우 조심스럽게 썼다. 식은땀이 살짝 나는 단어였다. ‘혁명’과 유사한 뉘앙스의 급진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겠으나, 그렇다고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저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어떤 분위기에 눌렸다. 그 영향은 꽤 긴 시간 이어졌다. 기자가 되어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백낙청 지음, 창비 2009) 출판간담회에 취재를 갔는데, 당시 일터였던 외교부 기자실로 돌아와 기사를 쓰면서 혹시 누가 볼까 두리번거렸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지하철 안에서 『변혁적 중도론』을 읽는데 남들이 제목을 볼 수 없도록 가리는 행동이 본능적으로(?) 나왔다. 2009년의 그 소심함을 버리지 못한 탓일 것이다. 그와 더불어 ‘변혁적 중도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주는 생경함도 한몫했다고 본다. 변혁과 중도가 어떻게 한 묶음이 될 수 있는가. 2016년 대명천지에 운동노선이라니. 단기적인 정치전략이나 정치공학, 정책대안을 따라가기도 벅찬 시절 아닌가. 이런 복잡한 생각들이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아무리 봐도 변혁적 중도론의 이론적 기반인 분단체제론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론이다. 그만큼 오해도 많다. 『변혁적 중도론』 서문에서는 분단체제론을 자세히 설명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흔히 ‘분단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말이냐?’라거나 ‘분단문제만 해결되면 다른 문제도 해결된다는 얘기냐?’라는 식의 분단환원론적 문제제기는 분단체제론 논의에서 적확한 논점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다.”(정현곤 「변혁적 중도의 실현을 위하여」 15면)
그러나 상당수 사람들은 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분단체제론을 분단환원론으로 잘못 알고 있다. 이른바 ‘민족해방’(NL) 이론의 변종 정도로 크게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나 같은 경우는 분단체제론에 관한 설명을 여러번 듣고 읽으며 이해했고, 지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남들도 쉽게 알아듣도록 설명할 수 있는 구조화된 지식이 생겼다고 말하기는 여전히 힘들다. 간단치 않은 요소들이 촘촘하게 짜여 있고, 상황이 변함에 따라 새로운 내용이 업데이트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도 필자들이 분단체제론을 여러 층위로 설명하고 있지만, 나 나름대로 소화해 다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세계체제분석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는 개별 국가가 아니라 세계체제라는 한 덩어리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한반도에서 작동하는 국지적인 양상을 분단체제라고 부른다. 이 분단체제는 남과 북에 각각 세워진 체제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규정력이 미치도록 한다. 세계체제에 있는 계급갈등과 성차별, 인종주의 같은 문제들이 분단체제를 매개로 남과 북에 각각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분단체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일각을 허무는 일이다. 그래서 변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현실에 맞지 않는 급진적인 노선은 변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중도를 강조한다. 중도는 어떤 노선을 특정하는 방식 대신, 함께할 수 없는 노선을 배제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구성된다. 1) 변혁이 빠진 개혁이나 중도, 2) 전쟁에 의한 변혁, 3) 북한만 변화하면 된다는 노선, 4) 남한만의 독자적 혁명에만 치중하는 노선, 5) ‘민족해방’으로 단순화한 변혁, 6) 분단체제 극복운동에 대한 인식이 없는 노선 등 6가지를 뺀 나머지가 힘을 합치는 것을 뜻한다. 백낙청은 2006년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정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백낙청 「6·15시대의 대한민국」, 창비 홈페이지, 2006.1.1)을 목표로 NL과 PD(민중민주)로 대표되던 급진운동권과 온건개혁세력의 연합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변혁적 중도론의 요지와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에는 이 책에 나온 몇몇 대목이 큰 도움을 줬다. “분단체제의 극복은 단순히 분단된 민족의 재결합이 아니라 남북 각기의 분단체제가 만든 기득권 구조의 청산을 포함한 개혁이 함께 이루어지는 과정이어야 한다. (…) 그런데 PD와 NL 모두 통일과 남(북)한사회 개혁 사이의 연관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일면만을 강조한 결과, 한국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변혁과제를 설정했다. 그럼으로써 변혁운동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분열을 초래했다. 변혁적 중도는 바로 변혁의 목표를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지평에서 재구성함으로써 계급문제건 민족문제건 적절한 해결방안을 찾고 이들 세력의 협력을 이루려는 시도이다.”(이남주 「87년체제 극복과 변혁적 중도의 정치」 257~58면)
“변혁적 중도주의는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변혁적 과제’를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극단적 방식이 아니라 광범한 시민이 참여하는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과정 속에서 추진해나가려는 전략적 태도를 말한다.”(이승환 「분단체제 변혁의 전략적 설계를 위하여」 203면)
이 책을 통해 분단체제론을 다시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만족스러우면서도, 돌덩어리 하나가 마음 한구석을 누른다. 정치권의 제 세력이나 시민사회의 각종 그룹들이 변혁적 중도론적인 자각을 통해 과연 힘을 합칠 수 있을까? 이론이나 노선을 제시하는 측에서 실현 가능성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분단체제론에 동의 못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 그룹들 사이의 반목과 분열의 긴 역사를 봤을 때, 변혁적 중도론은 어쩌면 하나의 이상향에 그칠 수도 있다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한국사회의 본격적인 역주행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어떻게 이러한 역주행이 출현했는가에 대한 성찰이 뒤따랐고, 분단체제와 한국사회 개혁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인식에도 다소 진전이 있었다. 민주, 민생, 한반도 평화 등이 민주개혁세력의 핵심과제로 제기되었고 이를 완수하기 위해 한국의 여러 개혁세력들의 연합도 적극적으로 모색되었다.”(이남주, 같은 글 264면)
이런 진단이 부디 현실이 되고 그 결실이 맺어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분단체제론에 대한 일각의 오해나 편견도 해소되길 바란다. 그리되기 위해서는 변혁적 중도주의 안에 묶일 수 있는 사람들의 철저한 자기성찰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각자 자기들의 노선만 옳다는 독선을 버리고 ‘이웃 노선’을 존중하면서 적극적으로 협력·연대해야 한다. 개별적인 목소리만으로는 저 막강한 수구·보수동맹을 절대 당해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