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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진호 『게놈 익스프레스』, 위즈덤하우스 2016
고뇌하고 회의하는 과학
전치형 全致亨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cjeon@kaist.edu
『게놈 익스프레스: 유전자의 실체를 벗기는 가장 지적인 탐험』은 무겁고 진지한 분위기의 그래픽노블이다. “유전자의 실체를 벗기는 가장 지적인 탐험”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좀처럼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많이 웃지 않고 대체로 심각하다. 대단한 발견의 기쁨도 잠시, 곧 더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리고 종종 방향을 잃는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장치로 도입된 열차는 유전자를 찾는 과학자들을 태우고 열심히 달리지만, 여정을 마치지 못한 채 힘을 다하고 멈춰 선다. 과학자들은 내려서 걷기 시작한다. 얼어붙은 땅에서는 개썰매를 타기도 하고, 사막에서는 힘겹게 지프 한대를 나눠 탄다. 그러나 이들이 찾던 유전과 생명의 비밀은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과학을 시종일관 험난한 여정으로 묘사하는 저자는 백여년의 유전자 연구 역사를 따라가면서 각 시점의 과학자들이 무엇을 알고 싶어했는지, 당시 안다고 믿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 지식의 많은 부분이 어떻게 다시 의심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유전학과 생물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은 답을 찾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문제를 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398면)라는 에필로그 한 구절이 저자의 메시지다.
혼자서 글과 그림을 모두 담당한 저자가 택한 그래픽노블 형식은 과학의 내용을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해준다. ‘게놈 익스프레스’ 열차를 타고 과학자들과 함께 여행하는 화자는 분자, 염색체, 단백질, 세포, 인체 조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림을 통해 차분하게 설명한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교양과학서의 일반적인 목적을 달성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효과가 있는 것은 실존인물인 과학자들을 살아 숨쉬는 캐릭터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과학자들은 자신이 밝혀낸 지식을 직접 설명하는 역할만 맡는 것이 아니라, 당시까지 쌓인 유전자에 대한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 실망과 회의를 표출한다. 그들은 그래픽노블의 공간 속에서 세대를 초월해 만나고 토론을 벌인다. 19세기에 활동한 그레고어 멘델(Gregor Mendel)이 20세기 후반의 여정에도 등장해서 대화에 끼어드는 식이다.
과학연구의 과정을 과학자들의 고민과 대화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과학의 역사와 현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교과서나 미디어에 나오는 과학지식은 특정한 시공간의 구체적 인물과 결부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최신 과학연구의 결과가 검증을 거치면서 점차 일반화되면, 특정 과학자의 ‘주장’이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가 인정하고 공유하는 ‘사실’의 지위를 획득한다. 비과학자들이 접하는 과학지식은 대체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채 항상 보편적으로 참인 사실들의 집합이다.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가지는 힘의 근원이자 결과다. 그러나 이는 과학지식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과학지식도 누군가 처음 생각하고, 실험하고, 발견하고, 논쟁하면서 만들어낸 지식이라는 점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과학을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현재 옳다고 판명된 이론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에 처음 발화되고 토론에 부쳐진 과학적 주장들이 어떤 질문으로부터 나왔고, 그 이전 것들을 어떻게 넘어서려 했고, 어떤 회의와 반대에 부딪혔는가를 서술하는 것이다. 고뇌하는 과학자들을 등장시키는 그래픽노블은 이러한 흐름을 과학자들의 표정과 대사를 통해 직접 전달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픽노블 형식은 유전자 연구의 역사가 어떤 의미에서는 비유의 역사라는 점을 설명할 때에도 빛을 발한다. 유전자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학자들은 자연스럽게 당대의 익숙한 것들에서 여러가지 비유를 만들어냈다. 『게놈 익스프레스』는 유전자를 이해하기 위한 비유들을 그림과 함께 자세하게 보여준다. “수정란의 유전물질은 컴퓨터의 자기테이프와 같다.”(238면) “유전프로그램은 오케스트라 연주와 같다. (…) DNA는 악보이자, 지휘자이며, 연주자다.”(243면) “컴퓨터라는 은유를 쓰면서부터 소프트웨어는 DNA, 하드웨어가 DNA를 제외한 나머지라는 이미지를 자연스레 갖게 되었다.”(276면) 이 비유들은 대상이 불확실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연구 결과를 나중에 전해 듣는 비과학자들의 이해를 도와주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이 비유들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것이었고 때로는 과학자들의 시야를 흐리기도 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기계와 같은 이미지로 생물체의 발생 과정을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실체에 다가서지 못했던 것이다.”(325면) 이들 비유의 매력과 한계가 모두 그림을 통해 잘 드러난다.
『게놈 익스프레스』는 출간과 동시에 큰 호평을 받으며 한국 과학출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앞으로 판을 거듭하면서 널리 읽힐 책이다. 그러므로 한번 더 검토하고 수정할 만한 부분을 적어둘 필요도 있겠다. “대부분의 질병 유전자, 비만, 동성애, 언어 장애 등과 같은 형질들은 보통은 비정상을 뜻한다. 압도적으로 많은 다수의 형질, 평균적인 형질과 비교했을 때 나타나는 두드러지는 차이를 뜻하며, 대개는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하는 좋지 못한 형질들이다.”(395면) 긴 여정을 마치면서 유전자 연구의 의의를 정리하는 에필로그의 일부 구절이다. 과학계에 통용되는 생각을 옮긴 것일 수도, 저자의 시각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비만·동성애·언어 장애가 “비정상을 뜻한다”거나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한다고 서술하는 것은 부정확하고 또 위험하다. 책 전체를 통해 단순한 종류의 유전자결정론을 경계하는 세심한 접근을 보여준 저자가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는 일에도 비슷한 정도의 주의를 기울여주면 좋겠다. 다른 한가지는 DNA의 엑스선 사진을 찍은 화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의 이름 표기 문제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과학자 중 프랭클린만 성이 아닌 이름(“로절린드” 혹은 “로절린드 씨”)으로 지칭되고 있다. 우연한 실수겠으나, 공교롭게도 단지 세명만 등장하는 여성 과학자 중 한명이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불리는 모양이 되었다. DNA 구조를 규명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 James Watson)이 자신의 책 『이중나선』 본문에서 다른 과학자들은 공식적인 성이나 본인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이름으로 지칭하면서 프랭클린은 (본인이 선택하지 않았던) ‘로지’라는 별칭으로 적은 사실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저자가 그런 맥락에 대한 설명을 따로 제시하지는 않아서 독자가 오해할 소지가 있다. 과학책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가는 저자의 다음 책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