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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핵무기의 문학’으로 회고록 읽기
구갑우 具甲祐
북한대학원대 교수. 저서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 『국제관계학 비판』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공저) 등이 있음. kwkoo@kyungna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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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정보처리과정에 비유되곤 한다. 정보를 부호화하고 저장하며 검색하는 두뇌의 능력이 기억의 일반적인 정의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가 작동하는 과정은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처럼 기계적이지 않다. 인간도 컴퓨터처럼 내외장 하드디스크에 기억을 저장할 수 있지만, 인간의 기억‘하기’는 선택적이고 해석적인 과정이다.1) 인간은 자신에게 핵심적이고 유용한 것만을 기억하려는 능동적 경향이 있다. 핵무기에 관한 네권의 회고록2) 읽기를 시작하며, 기억과 기억하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회고록이 저자의 기억을 재현한 것이라는 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하기가 주체의 필요에 따른 개입인 정치과정을 수반한다면, 회고록이라는 형태의 재(再)-현(現)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언어를 매개로 한 재현의 원초적 불가능성과 더불어 회고록의 저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기억의 편파와 편리 때문이다. 기억하기 자체가 걸러짐이라면, 기억을 글로 재현하는 과정은 다시 한번의 걸러짐이다. 기억한다고 해도 반드시 글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하고는 있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것과,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말하고 싶은 것이 회고록이라는 기록에는 공존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과소화와 기억의 과대화는, 기억할 때는 물론 기억을 쓸 때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3) 회고록을 읽을 때, 이 ‘이중의 걸러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정치인의 회고록을 정치사나 외교사 연구자들이 사료로 쓰기 위해서는 교차검증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회고록은 본질상 재구성된 기억을 편파적으로 기록한 자기재현의 ‘문학’으로 읽혀야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발견하는 회고록 쓰기는 정직과 참회가 아니라 불가피하게 동상을 세우려는 작업이다. 따라서 회고록은 재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형식이지만, 재현 ‘여부’를 둘러싼 불가피한 논쟁을 야기함으로써 현실의 재현에 근접해가는 문학이다. 회고록의 ‘문학 되기’가 회고록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회고록의 문학 되기는, 자위적 회고록이 아니라면, 회고록을 쓰는 이유가 과거의 기억 ‘불러오기’를 통해 미래의 기억 ‘만들기’를 하는 것이라 할 때, 회고록의 본질에 좀더 부합하는 일일 수 있다. 핵무기의 국제정치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담은 문학이 없는 시대에 네권의 회고록을 ‘핵무기의 문학’으로 읽어보려 한다. 특히, 냉전의 전사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한 활동가로 전향한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선별적 회고록”이라 이름붙인,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의 『핵 벼랑을 걷다』(My Journey at the Nuclear Brink, 이하 『벼랑』)를 축으로, 2차대전부터 시작된 국제정치의 핵심 의제인 핵 문제와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상상력에 대한 진술의 교차검증적 읽기를 시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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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가 『벼랑』에서 선택한 경구 가운데 하나는, “고삐 풀린 원자의 힘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뺀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그래서 우리는 유례없는 재앙을 향해 떠내려간다”(37면)라는 아인슈타인(A. Einstein)의 말이다. 페리는 일본에서 군인으로서 핵참사를 목격한 후 아인슈타인의 이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사고방식을 뺀”이라는 구절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스스로의 생각은 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40면). 그러나 과연 인간의 사고방식이 바뀌었을까. 페리는, “오늘날 핵으로 인한 참사의 위험은 냉전시대보다도 더욱 크다”(5면)고 말한다.
핵무기의 출현이 국제정치에 미친 결과는 체제전복적이었다. 인류역사상 어떤 무기도 국제정치의 구조를 결정하는 변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핵무기는 예외였다. 그 파괴력 때문이다. 2차대전 이후 핵국가는 냉전체제하에서 강대국과 동의어였다. 핵무기의 파괴력은 핵국가에 비핵국가의 마음과 행동을 통제하는 권력을 부여했다. 미국의 핵독점체제에서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 이후 핵복점체제로 이행했고, 영국(1952) 프랑스(1960) 중국(1964)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핵과점체제가 형성되었다. 핵독점체제에서 핵복점체제로 이행한 후에는, 핵국가들의 관계에서 공멸의 핵전쟁을 예방하고자 하는 핵억제의 개념이 등장했다. 핵무기는 한편으로 매력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포이기 때문이다.
억제란, 일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이 행동하지 않는다면 보복이나 처벌을 가하겠다는 조건부 약속이다. 국제정치에서 상대방의 군사적 공격을 예방하기 위한 억제는 효과적인 군사적 능력에 기초한다. 억제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결의로 표현되는 처벌의 위협을 상대방이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억제는 상대방의 ‘인정’을 포함하는 소통과 약속의 협력게임이다. 핵무기에 의한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에 대한 인식공유라 할 수 있는 냉전시대 미소 간 공포의 균형은 핵억제가 만들어진 대표적 사례다. 『벼랑』은 이 균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핵 아마겟돈을 막기 위한 것으로는 MAD의 원칙이라는 암울한 실용주의밖에는 없었다. 서로가 갖고 있는 이 공포가 제 역할을 하려면 언제나 합리적이고 상황에 정통한 주자들이 양편 모두에 있어야 했다. 더불어 한없는 행운 역시 필요했다.(45면)
한국의 국제정치비평가 리영희(李泳禧)도 “‘MAD’(광증, 미친 상태)”가 “쌍방 세계의 전체 비전투원을 볼모로 잡고 있는 까닭에 군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것으로 자주 비난받았다”라고 적은 바 있다.4) 암울한 실용주의가 불가피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벼랑』이 공포의 균형을 정상상태로 보는 국제정치이론과 구분되는 첫번째 지점은 ‘행운’에 대한 강조다. 꾸바 미사일 위기(1962) 시 미국이 설정한 꾸바 봉쇄선에 대응해 소련의 잠수함에는 핵어뢰가 장착되어 있었고, 함장은 모스끄바의 승인 없이도 핵어뢰를 발사할 수 있었지만 다른 장교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페리가 국방차관으로 재직할 때는, 북미대륙방공군사령부의 당직 장교가 자신의 컴퓨터에 지금 소련에서 미국의 목표물을 향해 비행 중인 200대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나타났다고 보고해오기도 했다. 훈련용 테이프를 실수로 컴퓨터에 설치해서 발생한 문제였지만, 페리에게는 핵전쟁이 우연찮은 사고로 발발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106면). 그는 “대통령이 전후사정을 알지 못한 채로 몇분 안에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핵경보 결정과정에 심각한 결함이 있”고, “그러나 우리의 결정과정은 당시 그런 방식이었고, 지금도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임을 강조한다(108면).
두번째 지점은, 페리가 “무기통제와 핵무기 감축이 핵참사의 위험을 줄이고, 고삐 풀린 ‘공포를 통한 균형상태’를 깨고 역전시키는 데 핵심이라고 믿었다”(67면)는 것이다. 재래식 병기에서 소련의 양적 우세를 상쇄하여 다시 대등한 군사력을 갖추고 핵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반적 계획인 이른바 ‘상쇄전략’을 추구하면서도 핵공격에 대한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무용한 일임을 페리는 깨닫고 있었다.
핵공격에 대한 방어체계의 타당성을 알아보기 위해 진행된 계산은 오히려 핵공격의 파괴력에 맞설 이렇다 할 방어책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의미있는 방어라면 오직 공격이 벌어지기 전에 막는 것뿐이었다.
난 우리의 최우선과제는 핵공격에 대한 무가치한 방어체계에 자원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그 공격을 방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근본적인 깨달음이 국방분야에서 일하는 내내 내 삶의 지침이 되었다.(48면)
페리는, 핵억제력 확보를 위한 육·해·공군의 세가지 무기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전략폭격기의 혁신을 추구하면서도, 예를 들어 전략폭격기 B2의 개발을 승인했지만, 미사일방어체계(MD) 구축에는 반대했다. 그는 레이건 행정부가 이른바 전략방위구상(SDI)이라는 이름하에 강력한 현대기술에 기초한 미사일방어체계라는 새로운 구상을 제시했을 때 “망연자실”했다고 썼다(127면). 미사일방어체계는 “표적이 대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는 가정”이 성립할 때 가능한 방어라는 것이다(128면). 예를 들어, 만약 상대방이 핵무기를 탑재한 다탄두각개유도미사일(MIRV)을 발사할 경우 방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페리는 핵군축은 탄도미사일방어의 금지와 함께 가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미사일방어체계의 도입이 핵경쟁을 심화시킬 것이 명확함에도 2002년 6월 미국 부시(G. W. Bush) 대통령은 탄도미사일방어 금지협정에서 탈퇴했다. 힘의 균형이 아니라 힘의 절대적 우위를 추구하기 위해 미사일방어체계를 도입하겠다는 결정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공포의 균형을 가능하게 했던 상대국의 2차공격능력을 무력화하겠다는 사고의 전환이었다. 미국이 탈퇴를 발표한 다음날 러시아는 전략무기감축협정인 STARTII의 무효를 선언했다. 2007년부터 미국이 유럽에 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하자, 러시아는 이를 “자신들의 미사일에 대항한 것이라고 보았고 그것이 확장됨에 따라 그들의 억제력이 약화되리라고 믿었”(275면)다고 페리는 해석한다. “핵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는 끈질긴 망상의 역사”(131면)가 현실이 되면서, 냉전시대보다 위험한 핵경쟁시대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제2핵시대라고도 부르는, 또한 그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투사된 미사일방어체계(『빙하』 496~502면)를 포함한 새로운 핵경쟁의 시대를 바라보며 페리는 자신이 걸어왔던 ‘벼랑의 길’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핵무기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그때까지의 여정에서 위험요인 축소라는 절대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해왔다. 일본에서 핵의 파괴력을 목격했고, 소련이 비밀리에 늘리는 핵무기를 감시하고 그 규모를 알아내는 데 핵심적인 정찰기술을 개발하는 기업가이자 정찰요원이었다. 또한 물리적 충돌에서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소련의 시도를 봉쇄하기 위해 미국의 전쟁수행 능력을 강화하는 전략가이자 ‘무기설계자’였다.(122면)
페리는 이제 핵전쟁의 예방을 위해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길을 가려 한다. 그 대안은, ‘놀랍게도’ 냉전시대 상호확증파괴와 경쟁했던 오래된 미래인 “경제적인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Economic Destruction, MAED)다. 경제교류가 심화할수록 전쟁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전형적인 기능주의적 사고로의 전환이다. 김대중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을 연상하게 하는 대안이다. 중국과 대만, 인도와 파키스탄의 군사적 충돌을 예방할 수 있는 원천은 경제적 파괴에 대한 우려라는 것이다(282~93면).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네트워크가 ‘태평양수지균형’으로 불릴 정도로 조밀하지만, 페리도 인정하는 것처럼, 미국은 미사일방어체계를 도입하고 있고 중국은 이에 맞서 다탄두각개유도미사일을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 즉 경제적인 상호확증파괴로 핵경쟁을 막는 것은 한계적이다.
다른 대안은, 페리의 이력을 보면 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는’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상상력이다. 2007년 1월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에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요구하는 글이 실렸다. 필자의 무게 때문에 몽상가의 기고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글이었다. 공화당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키신저(H. Kissinger)와 슐츠(G. Shultz), 민주당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한 페리, 그리고 전 민주당 상원의원 넌(S. Nunn)이 그들이었다. 『벼랑』은 “‘냉전 전사들’이 ‘평화주의자들’의 대열에 함께”(327~28면)한 사건으로 그 논설에 가치를 부여했다. 페리는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의 제거를 논의했던,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정상회담 20주년을 기념하는 회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특별히 유리한 지위에 있었던 탓에 나는 몇십년 동안 핵무기의 위험에 깊은 우려를 해왔지만, 완전한 핵폐기는 현실성이 없다는, 이미 발명된 핵무기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대신 핵무기로 인한 위험을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조치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렇게 몇십년이 지났는데 이루어낸 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26면)
이 자기반성의 결과가 바로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구호였다. 마치 순간적인 도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북한 같은 잠재적 핵국가가 출현하는 시대에, 비국가적 행위자가 핵무기를 소유하고 사용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 팽배한 시기에, 핵무기가 억제력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현실인식의 소산이기도 했다. 그들의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은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한 지 약 3개월이 지난 후 게재되었다. 2009년 취임한 오바마(B. Obama) 대통령이 그해 4월 체코 프라하에서, 핵전쟁의 위협은 감소하고 있지만 핵공격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핵무기 없는 세상’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한 날, 북한은 핵운반체가 될 수도 있는 로켓실험을 했다.
2009년 9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창설 이후 다섯번째 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핵무기 철폐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을 작성했던 네명의 과거 ‘냉전 전사들’도 함께한 자리였다. 페리는 2009년을 “기적의 해”로 묘사한다. 뉴턴이 만유인력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1666년과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1905년에 비견될 해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2010년을 기적의 해에 버금가는 “행동의 해”로 정리한다. 핵물질 같은 무생물의 안보를 지켜내야만 핵참화를 예방할 수 있다는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린 해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페리가 “절대명령”이라고 생각했던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의 비준을 요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북한은 2009년 ‘기적의 해’에 제2차 핵실험을 한 바 있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분쟁에 사용할 수 있는 전술적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억제용이 아니라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이 유럽에서 미사일방어체계를 확대하자 미·소의 전략무기감축협상은 더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다탄두각개유도미사일을 장착한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배치하고 있고, 핵무기의 ‘선제사용금지’ 같은 원칙도 거부하고 있다. 모두 ‘기적의 해’와 ‘행동의 해’ 이후에 발생한 사건들이다. 『벼랑』이 인용했던, “인간의 정신을 가진 늑대”5)의 강박적 사고방식은 변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일들의 전개였다.
페리는 결국 인간의 정신을 바꾸는 ‘반핵운동’을 최후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는 국제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글로벌 제로” 같은 대중적인 반핵운동과 연대하지 못한 단계론자로서의 후회도 있다. 핵파멸에 대한 대중적 방관 그리고 핵의 위험과 관련해서는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고민과 함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대개 ‘상상도 할 수 없이 무지막지한 일’을 대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라고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핵공격을 막는 무난한 미사일 방어씨스템이 있거나 아니면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기꺼이 믿고자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한다.(344면)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정부들이 핵무기 없는 세상으로 가지 못하는 이유가, 그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압력이 대중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페리의 생각이다. 그는 핵참화가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대중이 깨닫게 하는 데 진력하려 한다. 사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배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반핵·평화운동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벼랑』은 “핵무기가 다시는 사용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목표를 어쩌다 나의 삶에서 최우선으로 삼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15면)이다. 냉전시대의 치명적인 핵유산과 맞서야 할 이후 세대에게 주는 소망의 미래 만들기는 그의 탈핵을 향한 기획이 담긴 홈페이지(www.wjperryproject.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계 그 어느 지역보다 반핵·평화운동을 필요로 하는 우리에게도 긴요한 운동의 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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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로 보자면 아마 이것이 미국 역사에서 가장 실패한 외교가 아닐까 싶다”.(『벼랑』 312면) 미국의 대북정책에 관여했던 페리의 평가다. 미국 중앙정보부(CIA) 출신으로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가 “미국 첩보활동의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실패”로 불렀던 나라(『역사의 파편들』 409면, 이하 『파편』)는 북한이다.
2015년에 우리가 마주하게 된 것은, 6개에서 10개의 핵무기로 무장한 채 더 많은 핵폭탄을 위한 핵분열성 물질을 생산하며 장거리미사일을 실험하는 도전적이고 분노로 가득한 북한이다.(『벼랑』 311~12면)
페리는 북한의 핵개발을 “도전”과 “분노”로 묘사한다. ‘비합리적’ 대응이라는 의미로 선택된 단어들일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지구적 수준에서의 공포의 균형과 같이, 한반도에서도 세력균형이 유지되었다. 페리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예로 들며 냉전시대 한반도의 균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매해 미국은 팀스피릿이라는 훈련을 벌였는데, 훈련 중 병력을 한반도 쪽으로 이동시켜 동맹국 남한과 합동훈련도 했다. 전쟁 씨뮬레이션을 해보면 북한이 상대편의 도발이 없는데 또다시 남한을 공격할 경우 단연코 패배할 것이었다. 내 생각에 북한군 지도자들 역시 이 점을 잘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지난 수십년간 한반도에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벼랑』 188면)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냉전해체는 이 균형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냉전의 해체는 비대칭적으로 이루어졌다. 1990년 9월 한국은 냉전시대의 적이자 북한의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수교했다. 북한은 한소수교에 반발하여 핵무장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한소수교 발표 직전인 그달 초에는 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냉전해체에 즈음하여 새로운 남북관계의 설정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정부에서 통일부장관과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임동원(林東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이하 『피스』)에서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 당시 북한이 느끼던 “안보불안”을 “경제·문화 등의 교류는 비본질적이며 부차적인 것으로 정치·군사적 대결상태가 해소되면 저절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는 북측의 발언을 통해 읽어낸다(141면).
북한은 냉전시대의 상호확증파괴를 대체할 제도적 장치로 ‘남북불가침협정’과 ‘북미평화협정’을 의제화했다. 경제적인 상호확증파괴는 북한에 부차적 대안이었다. 1960년대 북한이 남북한의 경제적인 상호확증파괴를 만들기 위한 경제교류를 제시한 것을 생각해보면, 화해협력정책이 힘의 우위에 있는 행위자의 선택임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북한이 긴급한 과제로 제시한 것이 유엔 가입 문제, 한미 팀스피릿 훈련 중지 문제, 방북구속자 석방 문제였다. 특히 힘의 균형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한미합동군사훈련은 북한에 안보와 관련된 핵심 의제였다.
1991년은 한반도 냉전해체의 원년으로 기록될 수도 있는 해였다. 남북한은 그해 9월 유엔에 동시가입했다. 그리고 같은 달, 미국은 전세계에 배치되어 있는 전술핵무기의 철수 및 폐기를 선언했다. 북한이 1950년대 중후반부터 한반도 핵 문제의 근원이라고 주장해왔던 남한 내 핵무기의 철수가 이루어진 것이다. 11월에는 1976년부터 이어져온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중단이 선언되었다. 임동원은 “핵확산 방지를 중시하는 미국도 ‘북한의 국제핵사찰 수용 및 남북대화 진전과 관련하여 한국 측 의사에 따르겠다’는 긍정적 입장”(168면)을 피력했다고 적고 있다. 정상적인 한미 외교채널은 물론 외교안보수석 김종휘(金宗輝)와 주한미국대사 도널드 그레그의 긴밀한 협조가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12월 중순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 내에 핵무기가 없다고 선언했고, 그달 말에는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남북한이 합의했다. 임동원의 언급처럼, 남한 내 미국 핵무기의 철수와 1992년도 팀스피릿 훈련의 중지를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그리고 북한의 국제핵사찰 수용과 교환한 것이다(184면).
『피스』의 개정증보판에는,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결정에 대한 그레그의 회고가 추가되어 있다.
그레그 대사는 “대사 재임기간 중 가장 자랑스러운 일 중의 하나가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시킨 것이다. 그러나 딕 체니 국방장관이 이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로 인해 그동안 남북관계와 미북관계에서 이룩한 모든 긍정적 성과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168면)
그레그는 『파편』에서, 북한이 “극도로 싫어”한 이 훈련을 중단시키기 위해 “엄청나게 밀고 당기기를 계속한 끝에” “펜타곤과 한국 국방부를 설득”했다고 적었다(356면).
그러나 1992년 10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팀스피릿 훈련의 재개가 선언되었다. 임동원은 1992년 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다양한 북풍이 동원되기도 했지만, 이 재개선언을 남북관계가 파탄으로 가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보고 있다.
이때의 팀스피릿 훈련재개 문제는 정부에서 진지한 논의도 없이 한미국방장관회의에서 합의 발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게다가 이 회의에서 “남북상호사찰이 실시되지 않는 한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주장하고 이런 내용을 담은 공동선언문 초안을 제시한 것은 한국 측이었다고 한다. (233면. 필자가 강조한 부분은 2008년에 출간된 『피스』 초판에만 담겨 있는 내용이다.)
팀스피릿 훈련재개에 대해 한미의 군부강경파는 북한의 핵의혹에 대한 압력을 내세웠지만, 이 재개도 안보불안을 동원하는 북풍 가운데 하나였다. 『피스』의 개정증보판에서 임동원은 (그레그와 마찬가지로) 이 재개에 적극적 역할을 한 인물로 네오콘인 딕 체니(Dick Cheney) 국방장관을 지목한다.
『파편』은 팀스피릿 훈련재개를 북한이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다고 선언한 것과 직접 연결시킨다(358면). 남북한 교차승인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남북한의 군사적 균형이 남쪽으로 기울게 되면서 발생한 북한 핵 문제였다. 한편 송민순(宋旻淳)이 “표면에 나타난 것은 핵 문제이지만 그 밑에는 냉전의 잔재가 거대한 빙하처럼 도사리고 있다”(『빙하는 움직인다』 14면, 이하 『빙하』)고 묘사한바, 한반도 냉전의 비대칭적 해체로 말미암아 북한은 핵개발이라는 내적 세력균형정책에 근접하게 된 것이다. 페리는 『벼랑』에서 이 길을 마치 합리성이 담긴 필연인 듯 서술하고 있다.
북한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야심을 버린 적이 없었지만,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로부터 원조가 끊긴 지금의 상황에서 그러한 야심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재래식 무기 면에서는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한 북한이 비밀리에 핵도발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은 이러한 냉전 이후의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상당한 위험을 감수했다.(188~89면)
페리에게는 북한 핵이 러시아가 재래식 군사력에서 미국에 뒤지게 되자 핵개발에 투자를 늘렸던 것과 비슷하게 읽혔을 것이다. 그는 1994년 봄 국방장관으로서 북한 핵 문제와 직접 마주하게 된다. 그에게는 “북한이 핵무장을 하도록 내버려두거나 한국전쟁이 다시 발발할 위기를 감수하거나 하는, 끔찍한 양자택일을 앞에 둔 것처럼 보였다”(187면)고 한다. 북한의 영변 핵재처리시설에 대해 크루즈미사일로 ‘도려내기’ 타격을 할 작전을 세우면서도 그 타격으로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도려내기’라고 보기 힘든 결과가 초래될 것”(191면)이기 때문에 페리의 선택은 최후수단으로 타격작전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고전적인 강압외교를 하는 것이었다. 1994년 6월 16일 페리가 대통령, 국무장관과 제재 및 병력증강을 논의할 때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Jimmy Carter) 전 대통령은 북한이 재처리과정을 ‘전면’ 중단한다면 협상을 재개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북한은 이 제안을 수용했다. 1994년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페리는 카터의 방북과 전화라는 “기괴할 정도로 놀라운 어떤 계기”(193면)를 통해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것을 저지했다고 평가한다.
페리는 1998년 민간인 신분으로 미국의 대북정책을 심사하게 되면서 다시금 북한 핵 문제와 조우한다. 그해 북한이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실험을 하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는 북한 핵 문제에 다시 개입하게 되면서 “북한에서 어떤 일이든 오랫동안 탈없이 진행되는 법은 없다”(295면)라는 오리엔탈리즘적 발언을 남겼다. 페리가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김대중정부의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었던 임동원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임동원은 페리를 1994년 위기 당시 “전면전쟁을 준비하면서 영변핵시설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임동원은 페리 자신의 평가와는 달리 그를 강경파로 생각했다. 1994년 전쟁 직전의 악몽을 떠올린 임동원은 당시 ‘페리 팀’을 설득하기 위해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포괄적 접근 전략”을 김대중 대통령에 보고했다고 썼다(『피스』 307면).
페리는 일본의 카또오 료오조오(加藤良三, 당시 일본 외무부 총합정책국장), 한국의 임동원과 협의하면서 각국 정부가 “근본적으로 다른 두개의 전략을 저울질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북한이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핵시설을 해체하는 동안 포괄적 정상화와 평화협정을 위해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강력한 제재를 가하는 강압전략”이었다(『벼랑』 298~99면). 강압전략에는 병력증강과 미사일방어체계 배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페리는 두번째 전략은 비용도 많이 들고 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컸으므로 첫번째 전략에 집중하기로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임동원이 제시한,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통한 한반도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담은 포괄적 접근전략의 선택이었다. 임동원에 따르면 페리는 임동원의 주장을 처음 듣고는 자신의 생각과 달라 “어안이 벙벙”해했다(『피스』 316면). 그런가 하면 후일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교환을 정식화하는 송민순은 당시 임동원과 함께 ‘페리 프로세스’를 구상했다(『빙하』 61~66면).
페리는 민간인 신분이었으나 북한을 방문해 정책결정자들과 대화를 했고, 결국 북한은 페리의 협상안을 받았다. 6·15 이후인 2000년 10월에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조명록(趙明綠)이 미국을 방문하는 사건이 있었다. 페리 프로세스의 성과였다. 그러나 관계정상화 일보직전까지 갔던 북미관계는 미국의 정권교체로 다시금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임기말의 클린턴(B. Clinton) 대통령이 중동 평화협정에 집중하기로 함에 따라 북한을 방문할 수 없었다는 것이 『벼랑』의 해석이다(306면). 2000년 11월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한 이후 미국 내 한국통들의 국무부 만찬회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했다고 한다. 그레그는 그 만찬에 참석한 30명 중 단 두명만이 대통령이 꼭 북한을 방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기억한다(『파편』 412면).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북미대화는 단절되었다. 페리는 “우리가 오랫동안 공들여온 외교가 그렇게 한순간에 내동댕이쳐지는 걸 본 나는 너무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벼랑』 307면)라고, 그레그는 “클린턴의 대북정책을 단두대에 올려버린” “악명 높은 사건이었다”(『파편』 414면)라고 기록한다. 이후 미국 내 대북강경파는 고농축우라늄에 의한 북한의 핵개발 의혹에 대한 문제제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페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지만, 2002년에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초기단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벼랑』 307면)는 모호한 입장이다. 송민순도 비슷하게, “2002년 9월 초 미국은 북한이 우라늄농축 시설을 거의 완성해가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빙하』 81면)고 기술했다.
반면, 당시 김대중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임동원은 이 사건의 전말을 직접 추적한다. 2002년 8월 28일 미국 국무부는 대북특사의 방북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네오콘의 대북강경파인 존 볼턴( John Bolton) 국무부차관은 8월 26일 북한이 주민을 기아로 내몰면서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판매하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임동원에 따르면, 볼턴은 강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8월 29일 “북한이 1997년부터 추진해온 고농축우라늄(HEU) 개발이 우려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이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장애요인이 될 것”이라 주장했고, 같은 날 총리의 북한방문을 추진하고 있던 일본정부에도 동일한 내용이 통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동원은 확증이 제시되지 않았고 양국 정보기관 사이에 정보평가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동판단이 있을 때까지 남북관계를 계속 추진하기로 결정했다고 기록한다(『피스』 498~99면). 곧이은 9월 6일과 16일 럼스펠드(D. Rumsfeld) 미 국방부장관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확산을 도모하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미국의 대북 강경파가 북한에 대해 공세적 발언을 하고 있던 시점에 한반도에는 분단체체의 평화적 지각변동을 나타내는 신호들이 나오고 있었다. 북한은 7월에 ‘경제관리개선조치’를 선택했다. 9월 17일 일본의 코이즈미 준이찌로오(小泉純一郞)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양자관계의 정상화 및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 건설에 대한 합의를 담은 ‘평양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날 금강산에서는 남북의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합의서가 체결되었고, 18일에는 착공식이 진행되었다. 24일에는 남북이 군사 당국자들의 직통전화를 개통했고, 29일 부산아시안게임에 북한의 응원단이 참여했다. 10월 1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북한이 신의주특별행정구를 설립한 것을 환영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 맥락에서, 미국특사의 방북이 한반도 분단체제의 해체 및 한반도에서의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국무부차관보인 제임스 켈리( James Kelly)는 부시 행정부에서 북한을 방문하는 최고위급이었다. 9월 25일 부시 대통령의 전화를 통해 특사방북 소식을 접한 김대중 대통령도 “나는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를 적극 모색하는 것으로 믿었다”6)고 회고한 바 있다. 북한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10월 3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켈리 특사의 방북을 보도하면서,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M. Albright) 국무부장관의 방북 이후 켈리가 최고위급 특사임을 밝혔다.
10월 3일 켈리 특사는 북한을 방문하여,7) 외무성부상 김계관(金桂冠)과 강석주(姜錫柱)를 차례로 만났다.8) 10월 5일 켈리는 한국으로 돌아와 정부관계자들에게, 10월 4일 4시 북한의 강석주 부상이 “어젯밤 군부 등 고위관계자들이 모여 미국 측 주장을 검토한 결과를” “반항적인 어투로” 통보하면서 고농축우라늄의 실체를 시인했다는 결과보고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보고는 공개되지 않았고, 한국정부의 북미대화록 사본 공유 요구는 묵살되었다(『피스』 515~16면). 켈리의 한국방문 이후 남·북·미 모두 10월 5일과 6일 침묵했다. 북한도 켈리의 출국을 특별한 언급 없이 보도했다. 미국의 『넬슨리포트』(Nelson Report)라는 매체가 북한이 비밀리에 핵개발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도한 시점이 10월 12일이었는데, 임동원은 10월 11일에 미국에서 이라크 침공과 관련한 권한이 의회를 통과하자 강경파가 북한 우라늄고농축 문제를 12일에 언론에 흘린 것으로 보고 있다(523면). 켈리가 방북하고 2주 정도가 지난 10월 16일에서야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켈리가 방북 당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위해 우라늄을 농축하고 있다는 데 대한 우려사항을 전달했고, 북한이 이를 인정했다는(acknowledged)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북한은 우라늄농축에 의한 핵개발 의혹을 부정했다. 북한은 10월 25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북미 불가침조약의 체결을 요구하며, “미국 대통령특사에게 미국의 가중되는 핵압살 위협에 대처하여 우리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주었다”고 켈리와 강석주의 대화내용을 밝혔다. 그리고 “가지게 되어 있다”를 ‘was entitled to possess’로 번역하여, ‘가질 자격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은 “아무런 근거자료도” 제시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이후 북한은, 이 “더한 것”이 “인민대중의 일치단결된 힘”이라고 주장했다.
페리가 『벼랑』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은 고농축우라늄에 의한 북한 핵개발 의혹을 제기했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다. 2002년 10월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2010년 미국의 핵물리학자 씨그프리드 헤커(Siegfried Hecker)가 북한의 초청을 받아 농축우라늄을 생산하는 산업시설을 둘러보았는데, 그 시설의 상태를 볼 때 오랫동안 우라늄농축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전했음을 밝히며, 당시 우라늄농축에 의한 북한의 핵개발 의혹에 대한 문제제기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나 외교협상을 통해 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9)고 한다. 그러나 증거자료는 없었으며, 그후 제네바합의가 파기되었고, 이른바 제2차 북핵위기가 시작되었다.
제2차 북핵위기 이후 핵 문제는 북미 양자대화가 아니라 한·미·일과 북·중·러가 참여하는 6자회담으로 변모했다. 페리는 이 6자회담을 부상하는 대국 중국이 성사시킨 것으로 보는데, 이와 관련해 송민순은 “부시 행정부는 정치적 투자가치나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은 북핵 문제의 해결을 중국에 발주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빙하』 85면)고 했다. 페리는 예상외로 6자회담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 회담은 좋은 방안처럼 보이긴 했지만 확실히 ‘실제상황’과는 동떨어진 채 이루어졌으므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사실 회담이 진행되는 중에 북한은 영변의 재처리과정을 끝내고 2006년 10월 9일 첫번째 핵폭탄 실험을 했던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영변의 모든 과정을 잠정중단할 것을 주장하지 않은 것은 심각한 잘못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1994년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과 회담을 시작하기 전에 요구했던 핵심조건이었던 것이다.(『벼랑』 308면)
페리의 6자회담 비판은 북한의 핵능력 제고에 고삐를 채우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임동원은 제2차 북핵위기가 발생할 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당시 나는 북한이 이라크 침공에 전념해야 할 상황에 처한 미국을 압박하여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거나, 아니면 이 기회를 활용하여 본격적으로 핵개발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피스』 516면)
실제로 북한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직후인 2003년 4월 6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핵개발을 암시하는 “전쟁의 억제력”을 언급했다. 2003년 9월, 북한은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폐연료봉의 재처리를 6월 말에 완료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6자회담의 시작은, 2003년 8월이었다. 임동원의 지적처럼,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제네바합의를 파기함으로써, 북한의 플루토늄 계획을 재가동시키는 잘못을 저지른 셈이다(546~47면).
송민순은 2003년 4월 25일, 베이징에서 열린 북·중·미 회담에서 북한대표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고 썼다(『빙하』 88면). 2014년 9월 북한이 발간한 『조선인권연구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이 “핵에는 핵으로” 맞서기로 한 시점은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한 직후였다. 이 보고서는 북한만이 유일한 핵공백지대였지만 다른 국가들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거나 핵우산을 제공받기 때문에, 북한이 핵보유를 하게 되면서 핵불균형상태가 해소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페리의 지적처럼, 북한이 회고하는 6자회담은 핵개발과 함께 가는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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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빙하』에서 읽을 수 있듯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그리고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에 대한 원칙을 담은 2005년 6자회담에서 합의한 9·19공동성명은, “남이 써주던 우리 역사를 우리 손으로”(12면) 쓴 것이었다. 송민순은 핵 문제를 기회로 삼아, 페리가 『벼랑』에서 언급한, 세력균형에 의한 평화를 넘어서는 적극적 평화를 한반도에서 모색한다.
힘의 균형에 의해 간신히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을 통해 함께 잘살 수 있는 적극적인 평화로 전환시켜야 한다. 적대적 상태에서도 서로에 이익이 되면 협상을 개시한다.(『빙하』 523면)
페리도 일관되게 강조하는바, 공동의 이해관계가 구성되면 협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공동의 이해관계는 미래의 기억을 공유하게끔 한다. 페리의 지적처럼,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으며, 따라서 “외교의 가능성은 10년이나 20년 전에 비해 훨씬 제한적”이다(『벼랑』 6~7면). 이 작은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페리가 제안하는 것처럼, “북한정부를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다루어야지, 우리가 바라는 모습을 가정하며 대해서는 안 된다.”10)
송민순이 지적하듯, 철지난 냉전체제가 “거대한 빙하처럼”(『빙하』 14면) 한반도를 덮고 있다. 빙하의 속도가 느리기에 우리는 빙하를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특히 2017년 현재 북한이 핵탄두 실험을 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예고한 상태에서, 한미동맹에 의해 한국 내 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가 결정된 상황에서, 군비경쟁과 그에 따른 안보딜레마를 정상상태로 생각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냉전시대의 평화가 상호확증파괴(MAD)에 동의하는 ‘미친’ 짓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다시금 반복하는 몽유병적 증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송민순은 “북한이 줄기차게 원하고 중국도 일관되게 희망하는 북·미수교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한반도의 빙하인 “‘분단과 핵’을 움직일 지렛대”로 쓸 것을 제안한다(529면). 북한은,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중단을 결정한 1991년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소환하며 2015년부터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과 핵실험 임시중지의 교환을 제안하고 있다. 2016년 7월에는 한반도 비핵화를 ‘핵사용권을 쥐고 있는 미군의 철수 선포’와 교환하는 방식으로 다시금 한반도 비핵화를 의제화했다. 북한과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구성한 상태는 아니지만, 송민순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이 주도적으로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두개의 기차를 하나의 선로 위에 올”릴(530면) 수 있다면, 한반도를 덮고 있는 거대한 빙하를 녹일 기회를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핵무기의 문학’인 네권의 회고록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상상하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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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nathan K. Foster, Memory: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6~7면.
2) 본고에서 논하는 회고록은 다음과 같다. 윌리엄 페리 『핵 벼랑을 걷다』, 정소영 옮김, 창비 2016; 송민순 『빙하는 움직인다』, 창비 2016; 임동원 『피스메이커』(개정증보판), 창비 2015; 도널드 P. 그레그 『역사의 파편들』, 차미례 옮김, 창비 2015. 본문에 인용될 때에는 제목과 면수만 표기.
3)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는 회고록에서 ‘포토맥 열병’(Potomac fever)이라는 질병을 언급한다. “주목을 받는 이유가 자신의 지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잘나서 그런 거라고 믿게 만드는, 그래서 때로 수중에 있는 엄청난 권력을 균형감 있게 행사하지 못하게 만드는 질병 말이다.”(『핵 벼랑을 걷다』 265~66면) 이 질병은 회고록 쓰기에도 해당된다. 페리는 전적으로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고(같은 책 21면), 노무현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송민순은 “절반의 진실은 완전한 거짓보다 못하다”(『빙하는 움직인다』 6면)고 되뇌어야 했다.
4) 리영희 『80년대 국제정세와 한반도』, 한길사 2006, 299면.
5) C. P. Snow, Science and Government, Harvard University Press 2013, 『벼랑』 49면에서 재인용.
6) 『김대중 자서전 2』, 삼인 2010, 499면.
7) 켈리와 함께 잭 프리처드 국무부 대북협상대사, 데이비드 스트로브 한국과장, 마이클 그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 합동참모본부 마이클 던 정책담당차장, 메리 타이 국방부 아시아태평양과장, 줄리 정 한국과 과원, 통 킴 국무부 통역관 등이 방북했다. 데이비드 스트로브, 줄리 정, 통 킴이 한국어 가능자였다. 북한 측 통역은 6자회담에 참여했던 최선희였다.
8) 켈리는 평양에 가기 전인 10월 2일 서울을 방문하여 임동원에게 북한의 고농축우라늄에 의한 핵개발 계획을 문제제기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우리 모두는 부시 대통령의 통화내용과는 달리 ‘협의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러 간다’는 말에 놀라움과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즉 켈리 일행의 평양방문은 ‘고농축우라늄계획을 폐기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이를 시인하고 폐기하기 전에는 상대할 수 없다’는 고압적 자세로 북한을 굴복시키려는 네오콘 강경파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피스』 511~13면) 송민순은 켈리가 “우편배달부와 같았다”고 했다(『빙하』 81면).
9) 콘돌리자 라이스 『최고의 영예』, 정윤미 옮김, 진성북스 2012, 918면.
10) 클린턴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오부찌 케이조 수상에게 1999년 제출된 대북정책 심사. 『벼랑』 294면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