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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신용목 愼鏞穆

시인.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가 있음. 97889788@hanmail.net

 

정홍수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 『흔들리는 사이 언뜻 보이는 푸른빛』이 있음. myosu02@hanmail.net

 

황정아黃靜雅

문학평론가. 최근 평론으로 「리얼리즘과 함께 사라진 것들」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문학」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정홍수(사회) 오늘 이야기를 나눌 대상작은 정찬(鄭贊) 장편 『길, 저쪽』(창비 2015), 김중혁(金重赫) 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문학동네 2015), 김종옥(金鍾沃) 소설집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문학동네 2015), 마종기(馬鍾基) 시집 『마흔두 개의 초록』(문학과지성사 2015), 고형렬(高炯烈) 시집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창비 2015), 고영 시집 『딸꾹질의 사이학』(실천문학사 2015)입니다. 황정아 선생님, 인사말씀 부탁드립니다.

 

황정아 문학초점란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도 그렇지만 특히 시는 축적된 독서량이 많이 부족한데도 두분 선생님들께서 원체 든든한 분들이시라 묻어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새로운 사람들과 문학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설레는 일인데요, 즐거운 시간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찬 『길, 저쪽』

 

길, 저쪽_fmt정홍수 정찬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존재론적, 윤리적, 형이상학적 물음을 간직한 채, 그 인간다움을 저해하는 세상의 이야기를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인간다움의 이야기는 그것의 해체나 파괴 같은 부정적 양상을 통해, 혹은 탈승화의 차원에서 소설화되는 게 대세가 된 것 같은데, 언제나 도달점이나 회복해야 할 지점을 상정하고 정공법으로 전개되는 정찬 문학은 그런 점에서도 더욱 주목을 요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번 장편의 모태가 된 작품은 2007년 발표된 단편 「희생」인데, 이 무렵 작가는 악순환되는 폭력의 구조, 만연한 폭력의 세상에서 고통의 공감 가능성 등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희생」은 폭력을 끊어낼 수 있는 가능성, 특히 야만적 폭력의 희생자로부터 모색되는 인간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품고 있는 작품입니다. 장편으로 다시 쓰면서 70~80년대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디테일이 대폭 살아났고, 서사를 끌고 가는 인물의 축도 늘어났습니다. 민청학련 사건 때 구속되기도 한 학생운동권의 리더 김준일이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민주화운동,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흐름이 5월 광주, 87년 시민항쟁 등을 경유하고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관련해서 제시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 변혁운동의 이야기는 김준일의 삶이 94년 모스크바에서 자살로 끝나는 것처럼(그는 운동가-시인의 캐릭터로 나옵니다) 다소 이상화되어 제시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이 작품의 핵심이 상징적 의미에서 ‘여성적 존재’의 희생과 슬픔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있다고 보면, 차라리 정형화된 역사적 배경에 그친 듯한 김준일보다는 그의 숨은 연인으로 나오는 차혜림의 이야기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강희우와 대비되는 의미있는 소설적 탐구가 진행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차혜림의 자리는 상처를 품어 안는 자연이나 ‘모성-여성’의 품으로 그려지면서, 그 질문을 좀더 두텁고 복합적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떻게들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황정아 70~80년대 역사에서 고통을 겪은 개인들의 이야기이고 전체적으로 일종의 후일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과 역사의 두 차원이 거의 대등한 비중으로 들어오면서 진행되는데, 우선 역사의 희생자라 할 수 있는 강희우의 고통을 드러내지만 그 고통이 준 슬픔을 통해 희생자 서사를 넘어서려는 구도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 역사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전반적으로 폐허로 그려지잖아요. 역사적 변혁운동의 폐허기도 하고 화자가 생각했던 역사가 성취되지 못한 세계, 꿈을 잃은 역사인 거죠. 이 폐허 역시 고통에서 온 슬픔으로 감싸안으려 하는 작품인 것 같아요. 제목 ‘길, 저쪽’ 과도 연결되는데, ‘길, 저쪽’이 여기서는 어떤 유토피아가 아니라 죽음에 가까운, 그렇지만 슬픔으로 세계와 개인의 고통을 보듬는 죽음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후일담소설이란 형식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후일담이 왜 어려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70~80년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여전히 살아 있는 질문이라 생각하고, 개인과 역사의 차원을 다 같이, 어느 한쪽도 놓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하는 게 절실하다고 보지만 상처나 치유, 화해 같은 프레임으로는 이 질문을 감당하기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역사소설과 후일담소설의 공통점과 차이가 뭘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체험했건 아니건 역사를 어떻게 객관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양자가 공유하는 점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후일담소설은 역사소설만큼이나 역사적 시각을 확보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출발하는 장르인데, 역사소설에 비해 그 점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할 위험이 크다고 봅니다. 역사적 시야라는 건 어떻게 보면 소설이 다루는 역사가 어떤 현재성을 갖는지 조명하고 설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럽게 겪은 역사를 이야기한다고 곧장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아닐 테니까요. 절실하게 전하려 할수록 더욱 객관화가 필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그만큼의 역사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정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실은 ‘작가의 말’에도 나와 있는데, 70~80년대 역사가 배경이나 풍경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과도 닿아 있지 싶습니다.

 

신용목 70~80년대의 어떤 진지함? 그 시대를 거쳐왔던 분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강직함일 수도 있고, 역사에 대한 숭고한 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래서 정선생님이 말씀하신 구원이나 승화의 측면으로 볼 때, 신학적인 질문과 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비극성을 지상의 방식으로 극복하는 과정 같은 것? 그래서일까요, 한편으로 제 입장에서는 많은 부분이 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어요. 김준일이라는 인물을 묘사하는 대목도 그렇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의 신념을 성숙하게 실천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인간이 어떻게 이 정도로 자기를 단련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정치적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누군가 나서서 그 핵심을 진단하고 설명하는 방식이 조금 교조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역사를 대하는 태도의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소설에서 기대하는 개인과 일상의 문제로 바꿔놓는 측면에서 보자면 좀 아쉬웠습니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일베’(웹사이트 ‘일간베스트’)의 활동에 대한 책임이 독재나 모순에 맞서 헌신적으로 싸웠던 분들에게도 어느정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분들이 가진 윤리적 염결성이 나머지 사람들, 이를테면 중도적이거나 우편향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양심을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은 아닐까 해서요. 사실 예전엔 ‘내가 이 독재정권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정당했고, 그래서 상대적인 도덕적 우월감과 체제 거절의 제스처로서 낭만성을 표출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찍지 않았다고 해서 이 부정한 정권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하기 힘든 시대잖아요. 그것이 제가 최근의 시를 읽을 때 그 낭만성을 의심하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소설에서도 역사를 다룰 때, 이제는 중심 서사와 그를 둘러싼 핵심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주변까지 아우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순전히 정찬 선생님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감 때문이기도 할 텐데요. 가령, 광주항쟁 때도 열심히 싸운 사람들이 아니라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며 도망쳤던 사람들의 고통을 아우르는 것, 꼭 윤리적 인식을 곁들이지 않더라도, 소박한 개인의 욕망이 한없이 처참해지고 비루해지고 그래서 더없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장면을 생산할 수 있는 소설가가 많지는 않다고 생각되거든요.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그 때문에 제 독후감이 상당부분 바뀌기도 했는데요. 죽음을 건너가는 인물들의 묘사가 아주 시적으로 느껴졌거든요. 물론 그 역시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어차피 우리에겐 죽음 자체가 비현실적인 일이니까요. 그래서 마지막 부분을 읽고 나서 앞의 서사들을 반추해보니 비현실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느정도 납득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우리의 경우, 유물론적 역사관을 바탕에 두고 거기에 특이한 방식으로 동양사상을 결합하는 사례가 많은데요. 앞서 자연과 모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듯이 생명의 본원을 끌어와서 어떻게든 슬픔을 딛고 새롭게 출현한 시대를 증언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송곳

 

정홍수 이상하게도 저는 이 작품이 후일담소설의 틀이나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의 측면에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운동이나 역사의 문제가 서사의 배경이나 밑그림 이상으로 특별한 소설적 질문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고 제가 느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주안점 역시 거기에 있진 않다고 보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이런 측면들이 분리되어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이 소설은 야만의 시대에 저질러진 폭력의 역사적 의미를 증언하거나 탐구하는 차원보다는, 거기서 생겨난 고통과 상처로부터 헤어나오는 길을 정찬 소설 특유의 방식으로 질문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희생의 자리에서 모색되는 구원론 같은 거죠. 끔찍한 성고문의 희생자 강희우의 쉽지 않은 삶의 궤적에 그 질문과 답이 들어 있는 것 같은데, 강희우가 마지막에 남긴 편지에는 좀더 직접적인 언술로 희생자로서 여성적 존재가 갖는 힘, 슬픔으로 고통을 정화하고 폭력을 끊어내는 가능성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길, 저쪽’은 반복되는 폐사지 이미지가 말해주는 것처럼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배태된 질문이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차원의 함의를 더 많이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 소설에서 가장 논쟁적인 지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강희우는 80년대 중반 수배 중이었던 연인인 소설 화자 ‘나’의 행방과 관련해서 공안기관에 끌려가 참혹한 성고문 강간까지 당합니다. 자살을 기도하지만 뱃속의 생명을 의식하게 되면서 삶 쪽으로 돌아옵니다. 그러곤 아기를 낳아 기르기로 결심합니다. 사실 이 결단은 소설의 핵심 테마, 작가가 설정한 문제의식의 구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어서 쉽게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긴 합니다. 야만의 세상, 폭력의 시대에 무언가 다른 보조선을 만들어보려는, 다른 사랑의 길, 구원의 길을 찾아보려는 작가의 상상적 결단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이게 통상적으로 떠올리고 받아들이기 힘든 결단이라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황정아 그 결단이 중요한 전환점으로 나오기는 하는데요, 실제 소설을 읽으면서 그 부분이 그렇게까지 강렬하거나 극적인 매듭으로 다가오진 않았어요. 생각해보면 무척 힘든 결정인데, 왜 특별히 그런 느낌으로 남지 않는지를 생각해보면, 지금 말씀하신 대로 고통과 슬픔과 죽음, 이런 것들로 세상과 인간의 폐허나 고통을 끌어안으려는 의식이 이미 설정된 구도로 먼저 잡혀 있는 탓이 아닐까 싶었어요.

 

정홍수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만, 그만큼 지금의 소설적 구도에 대한 작가의 절실함이 있었던 거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옮겨서 ‘여성적 존재’의 슬픔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 구도가 정말 의미있는 것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도 같습니다.

 

황정아 의식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우리가 읽은 작품이 다 남성작가의 작품이었어요.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그렇구나 하면서 약간 ‘에잇!’ 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웃음) 그걸 의식해서인지는 몰라도 모든 작품에서 상당히 강한 남성적 시선이 감지되더군요. 남성적이라서 편협하다는 판단 이전에, 그냥 남성적인 시선이다, 하고 깨닫는 순간이 있는데, 말씀하신 여성적 존재를 둘러싼 구도도 다분히 그렇게 읽힙니다. 물론 고통이라든가, 희우가 딸을 낳는 과정이 다 납득은 돼요. 납득이 안돼서 걸린다는 게 아니라 너무 납득이 가게 ‘초기설정’된 느낌이랄까요. 하나의 추상으로서의 여성적인 길처럼 보이는 것이죠. 차혜림이 내려가서 품어 안는 지리산이라는 공간도 상당히 익숙한 느낌? 그래서 장면들이 만들어내는 파장이 덜했던 것 같고요. 인물들도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인상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윤하 그렇고 윤하가 프랑스에서 만나는 동성애자 커플도 마찬가지요. 사진, 건축, 고비사막, 종묘, 폐사지 등의 묘사가 그 자체로 흥미롭고 또 아름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의 관념화된 구도에서 진정성을 강화하는 장치로 기능하지 않나 하는 의혹이 남더군요.

 

정홍수 저는 차혜림이 작품 전체의 구도를 내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라고 봤습니다. 지배적 폭력의 왜곡된 남성권력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부정적인 남성성이 분명 있었고, 차혜림의 사랑은 어느 만큼은 그 남성성의 희생인 측면도 있습니다. 이 부분의 이야기가 부각되면서 김준일의 시대에 대한 고뇌와 맞물려 들어갔으면 소설이 훨씬 두터워지고, 강희우의 삶의 궤적도 좀더 복합적인 맥락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자인 제 눈에도 차혜림의 자리는 너무 정형화되고 오래된 여성성의 환상에 머물러버린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소설의 인물이 시대의 한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점은 그것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한계를 객관화하고 부정하는 지점을 찾아내고 드러내주는 것 또한 소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긴 해도 전체적으로 폭력과 야만의 시대사를 배경으로 쉽지 않은 치유와 구원의 길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평가에 인색할 이유는 없으리라고 봅니다.

 

신용목 시대를 극복해가려 한다기보다는 개인이 시대를 어떻게 초극해가는가에 초점을 둔 것 같기도 했어요.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밀한 갈등의 국면보다는 시대적 상황을 초월적으로 통과해가는 과정만 기록되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작가적 시선으로 볼 때, 중심 인물의 염결성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주변 인물과 사건을 배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초반부에 “우리의 육신은 세월과 함께 늙어가지만 우리의 꿈은 조금도 늙지 않는”(27면)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 말이 소설 후반부까지를 관통하면서 그 비상한 정신을 지켜가는 과정을 소설화한 것은 아닌지……

 

황정아 지적하신 문제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역사를 배경으로만 다뤘기 때문에 발생 면이 있다고 봅니다. 이 소설에 역사적인 사건을 둘러싼 설명도 있고 논평도 있고 주장도 있는데, 한두 대목을 제외하면 대체로 표준적인 층위에 머물러 있다고 느껴져요. 익히 아는 정도의 내용인 것이죠. 역사를 배경으로라도 배치한 작품이라면 해당 역사를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의식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평균적인 역사 이해에 질문을 던지고 균열을 낸다면 오히려 문제적이고 살아 있는 인물들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일담 계열의 소설이 개인이 역사보다 크다는 안티테제로 기울기보다 역사적이고 지적인 자의식을 더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됐어요.

 

김중혁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가짜 팔로 하는 포옹_fmt정홍수 이전의 김중혁 작품과 많이 달라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물에 대한 마니아적 열정에 이어지는 취향 공동체, 유희적 감각으로 미끄러지는 세계의 표면 같은 게 김중혁 소설 하면 떠오르는데 그런 요소들이 많이 탈각된 것 같습니다. 알레고리적 장치도 덜하고요. 김중혁 특유의 매력적인 가벼움이 없는 것 아닌데, 그게 세계에 대한 작가의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기보다는, 무언가 규범화된 소설의 틀에 대한 권태나 거부 같은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어깨에 힘을 빼고 쓴 느낌 말입니다. 그러면서 알레고리적이기보다는 훨씬 직설적인 어법에 의존하고 있고요. 비관적이고 음울한 어조도 눈에 띕니다.

 

황정아 저도 힘을 많이 뺐다는 느낌과 함께, 군더더기 없고 거의 미완처럼 보이는 담백함이 느껴졌습니다. 「상황과 비율」에서 포르노배우 송미가 ‘기름기 거의 없는 목소리’의 화자한테 끌리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 작품집 전체가 기름기 없는 목소리가 주는 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어떤 소재나 상황이든 인물의 이야기를 얹을 수 있는 기제로 가공하고 변모시키는 솜씨가 좋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정홍수 방금 ‘미완’이란 말씀도 하셨는데, 몇몇 작품은 한참을 대화만으로 이어가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꼼꼼한 묘사는 배제되어 있고, 대신 건조한 진술이나 대화로 소설을 이어갑니다. 김중혁 소설이 원래부터 전통적인 묘사체 위주의 소설과는 거리가 있기도 하지만, 이번 소설집은 의식적으로 좀더 나간 것 같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은 거기서 비롯된 효과일 테죠. 그런데 제 판단으로는 너무 많이 덜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심리적 영역이든 객관적 세계든 묘사가 소설에 기여하는 부분은 분명히 있는데, 그걸 지나치게 배제하는 게 과연 좋은가. 사실 이런 측면은 이즈음 다른 작가들의 소설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양상입니다. 단문이나, 수식적 묘사 없는 문장들 말입니다. 이게 한때 묘사체 위주 소설에 대한 반발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나름의 문학적 효과도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지금쯤은 되짚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묘사는 복잡하고 모호한 현실의 창조적 재현에서 기억과 감성의 회로를 통과해낸 흔적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레토릭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여기에는 대상을 바닥까지 장악하는 힘의 문제도 있고요. 흔히 많이들 오해하는 듯한데, 묘사를 과잉된 자의식의 문제와 구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편편마다 포인트를 살려내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면서도, 전체적인 울림은 좀 약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황정아 설정을 만들고 거기에 인물을 얹어가는 솜씨가 있다고는 했지만, 그 결과가 저도 양가적이라고 생각해요. 한편에서는 설정과 인물의 결합 자체가 기계적이 되기도 하고, 주어진 상황이 갖는 물리성이나 현실성이 약화되면서 인물의 이야기가 전경화되는 경우에, 물론 전경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심심해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건 인물들을 그 자체로 생기있게 살려내거나 철저히 문제적으로 그려내는 힘이 달려서가 아닐까 싶었어요. 저는 김중혁 소설은 역시 격물(格物)의 느낌이 더 많은 게 좋지 않나, 좀더 사물의 이야기로 가는 쪽, 물질성이 살아 있는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정홍수 이 소설집에서 보자면 「요요」가 그러한 작가의 특장을 잘 살린 작품이겠죠. 기계식 시계라는 견고한 사물의 세계가 소설의 중심을 받치면서 엇갈리는 사랑과 관련된 시간의 이야기가 큰 울림을 줍니다. 「상황과 비율」은 김중혁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소재를 이렇게 재미있게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런데 ‘상황과 비율’이라는 상징적인 제목에 기대서 말한다면, 이번 소설집은 전체적으로 상황 설정을 통해 끌어낸 이야기가 두드러진 만큼 디테일한 지점에서 소설을 다시 읽게 만드는 힘은 그만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용목 저도 「요요」가 제일 좋았지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상황과 비율」에서 오형수가 아랫입술을 혀로 핥는 장면같이 인물들의 내면을 단문으로 간결하게 처리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런 묘사들에 여러번 밑줄을 쳤는데요. 방금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면, 만약 한 인물의 행동에 인과성과 개연성을 다 부여했다면 김중혁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B급 정서가 허물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왜 이야기를 하다 말았지? 왜 인물들을 그리다 말았지?’ 하는 생각도 있지만, 그 앞뒤가 다 채워졌을 때에는 김중혁이 포착하고 싶었던 지점, 이를테면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약간 삐딱하게 조망함으로써 드러나는, 적당히 기이하고 적당히 불쾌한 그리고 느닷없고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정곡을 찌르는 순간을 끄집어내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정홍수 알코올중독자 이야기인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을 정말 좋게 읽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서로 실없이 딴소리를 주고받는 듯 엇갈리며 나아가는, 그러면서도 상대의 의중을 정확하게 받아내는 대화나 행동의 묘미는 알코올중독자인 규호라는 인물의 처지와 잘 맞물려 있습니다.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피존’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법도 상당히 재미있고요. 진짜 이야기는 ‘피존’의 목소리로 들어야 된다며 ‘습니다’ 투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중간중간 자신의 목소리로 돌아와 술을 마시는 방식 말이죠. 소설이라는 양식에 대한 메타적 환기로 보아도 흥미로운 대목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알코올중독자의 고통을 그 자신 알코올중독자인 화자가 전하면서 동시에 술에 취해간다는 이중적이고 아이러니한 상황이 적절한 화법과 맞물리는데, 술자리에 마주 앉아 있는 전 여자친구는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은 마음과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죠. 술 마시는 걸 제지하려고도 하고요. 이게 어느 면에서 우리 시대 독자의 자리 같기도 하고,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대화라는 것도 결국 반쯤은 혼잣말인 이런 식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이 소설은 어떻게 해도 다 전달될 수 없는 고통의 바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피존이 포장마차 난동 후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으며 “고통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그 얘길 해줬습니다”(116면)라고 답변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말고도 이번 소설집 곳곳에 ‘고통’이란 테마가 등장합니다. 「뱀들이 있어」도 바로 그 타인의 슬픔, 고통이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고요.

 

황정아 작품들의 계열을 따진다면 두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을 좋게 읽었고, 「뱀들이 있어」도 그 계열에 속할 테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않았다고 봅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끈끈하고 무거울 수 있을 소재를 그렇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중독상태가 갖고 있는, ‘증상’의 차원이 아닌 어떤 어둠을 잘 전달한 것 같아요. 그리고 두 연인의 대화가 실없기도 한데 또 상당히 현실적이에요. 어둠은 그것대로 절실하지만 여자 쪽에서는 또 수용의 한계가 있는 거죠. 그런 일상적인 리얼리티가 있기 때문에 불능과 통찰이 섞인 중독의 심리적 특성이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일차적으로 꿈 얘기잖아요. 그러면서 중독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로서도 잘 처리된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종이 위의 욕조」도 꽤 재미있게 읽었어요. 앞의 두 작품과는 계열이 좀 다르고 물질성이 더 살아 있는 편인데, 인물보다는 전시 얘기 자체가 흥미로웠어요. 예술비평이나 실제 전시 구상과 유사한 대목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요」와 「힘과 가속도의 법칙」도 앞서 언급한 두 계열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신용목 「가짜 팔로 하는 포옹」과 「종이 위의 욕조」의 차이는 ‘찌질함’에 있지 않나 합니다.(웃음) 아무래도 ‘찌질이’를 더 생동감있게 잘 그리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일상에 가려진 비범함을 보여주거나 평범함의 세부를 복원하는 것도 좋지만 ‘찌질함’을 통해서만 건드릴 수 있는, ‘고통’의 본질을 환기시키는 뜬금없는 대사에 대해 말씀하셨듯이, 체면과 염치가 걷힌 맨얼굴의 바닥에서 툭 치고 올라오는 순간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요. 「보트가 가는 곳」은 어떻게 읽으셨어요? 저는 이 소설에서 욕망이 처리되는 방식 등을 보면서 작가가 너무 많은 고민을 해서 오히려 소설이 평범해진 것 같아 아쉽더라고요.

 

정홍수 「보트가 가는 곳」 「뱀들이 있어」 이 두 작품을 읽으면서, 최근 우리 사회가 겪은 재난들 앞에서 작가가 느꼈던 무력감, 분노, 자신의 문학에 대한 질문 같은 게 배면에 깔려 있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트가 가는 곳」은 피난길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 여성을 지켜주지 못한 기록이고, 그 기록 자체도 죽음을 앞둔 화자의 마지막 일기라는 점에서 무력감이 도드라집니다. 「뱀들이 있어」는 지진의 한복판에서 다시 다가올 지진을 예감하는 공포와 함께 끝납니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 지나갔다는 말을, 지나갔으니 괜찮다는 말을, 더이상 할 수 없었다.”(158면) 지나갔다는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 어떤 답을 찾기 이전에 세상이 기다려주지 않으리라는 비관이 너무 무겁고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김중혁 소설 특유의 유희적 상상력이 개입될 자리가 여기에는 없는 것이죠.

 

신용목 기존의 김중혁 작품하고는 가장 먼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황정아 저는 그 두 작품이 내적인 논리에서도 어색하고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었어요. 이질적인 차원을 불쑥 결합시키는 것이야 이제 꽤 익숙한 방식이지만 여기서는 재앙서사와 인물 간의 관계 사이의 결합이 씨너지를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자꾸 어긋나는 것 같았습니다.

 

신용목 작가의 의도가 너무 쉽게 드러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뱀들이 있어」를 보면서 드디어 작가가 자신의 근원을 바라보기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힘과 가속도의 법칙」이 더 좋았는데, 고통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고 놀아?’ 하고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고, 인물들이 앞뒤를 고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이나 무언가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를 거는 방식이 모두 생경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평범한 저에게도 묘하게 절실하게 와닿았거든요.

 

황정아 고통을 불러 자신을 해체하고 싶다는 현수라는 인물의 마음 상태와 교통사고 사기수법에 상동성이 있잖아요. 그렇게 맞아떨어지게 쓴 대목이 다가오는 것 같아요. 현수의 마음 상태 자체가 얼마 현실성을 갖고 있느냐는 문제는 다르게 이야기해야 될 것 지만요.

 

신용목 이 인물들에게는 사회정의나 세계의 이치 같은 게 다 불필요잖아요. 그러니 현실을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을 테고 그래서 현실성이라는 것도 다른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황정아 그렇지요. 저도 그런 의미의 현실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걸 ‘사기’라는 상관물과 적절한 거리로 결합달까, 그래서 망가지는 것 말고 출구가 안 보이는 상황이 잘 전달된 것 같습니다.

 

정홍수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작가의 말’이 정말 재미있더군요. 「뱀들이 있어」에서 ‘정민철과 데이트했던 여자 1, 2’라든지 「요요」의 시계평론가처럼 스치듯 언급된 인물들, 배경으로만 잠깐 나온 인물들까지 꼼꼼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이게 바로 김중혁이 소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아닌가 싶네요.

 

김종옥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_fmt정홍수 김종옥 소설을 읽으면서 독특한 작가가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장이나 소설을 끌고 나가는 방식이 실험적이거나 난해한 것은 아닌데,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을 줍니다. 작품집 전체를 보면 대개 회고적인 시선을 배치하고, 지나간 시간을 무력하게, 뒤늦게 돌아보는 실패한 연애담인데, 그 방식이 독특합니다. 소설이란 게 원래 회고적인 시선에서 씌어지는 것이긴 합니다만, 김종옥 소설에서는 그 돌아봄이 조화로운 결말의 지점을 향해 순차적으로 행해지지 않습니다. 돌이키는 행위 안에서 사유 같은 게 우연적으로 발생하고, 또 기억 속으로 이상한 틈새가 열리면서 뭔가 우발적으로 들어오는데, 그런 것들을 방관하면서 내버려두는 듯한 태도가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뭔가가 엮이고 맥락화되면서 의미나 감정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양상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작가는 전체를 장악하고 통제하면서 쓰는 것이겠지만, 우리가 읽어나갈 때는 그런 느낌을 받도록 소설이 조직되어 있는 거죠. 일종의 위장술일 수도 있는데, 그 방식이 상당히 세련되고 지적인 아이러니로 채워져 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게도 되고, 작은 단위의 사유의 묶음이 주는 통찰도 신선합니다. 지적인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읽는 즐거움, 생각의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황정아 독특한 페이소스가 모든 작품에 배어 있는데, 말하자면 작품을 자기 색깔로 만들어내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삭막하거나 건조하게 가지는 않으면서도 어떤 무기력과 체념 같은 정서를 잘 조성하는 게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위장이기 때문에 작가가 더 치밀하게 통제했을 거란 말씀에도 공감합니다.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아는 작가이고, 화자 역시 그걸 잘 알고 있는 화자인 것 같아요.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보고요, 그런 점에서 지적인 작가라는 의견에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제가 주목했던 점은, 어떤 장면 하나에 문득 시선을 고정시켜서 세세하게 묘사하는 식의 기법이었어요. 그런 묘사를 통해서 소설 전체의 분위기가 완성되는 느낌인데, 저는 그런 대목들을 보면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W. Wordsworth)의 『서곡』(The Prelude)에 나오는 ‘시간의 점’(spots of time)이란 얘기가 떠올랐어요. 그건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어떤 지점인데 마음을 고양시키고 정화해주는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시간의 점인 것이죠. 그런데 김종옥의 작품에서 그렇게 하나의 장면이 되어 세심하게 묘사되는 시간의 점은, 워즈워스가 말한 의미와는 다른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 장면에 오래 머물고 있지만 그게 다른 장면보다 특별히 더 의미심장해서가 아니라, 머물러 있음으로써 오히려 다른 장면들과의 차이를 소거하는 느낌을 주는 거죠. 그런 효과가 상당히 흥미로웠요. 작품집 전체의 주제와도 연관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신용목 저도 작가가 마치 시에서 분위기를 만들듯이 서사가 아니라 문장과 거기 배어 있는 정서를 통해 뭔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뿐 아니라 소설집 앞에 실린 두세편을 읽으면서는 마치 시의 구조를 짜듯이 소설의 구조를 짜고 있는 것 같아 무척 흥미로웠는데요. 그것이 말씀하신 ‘이상한 틈새’나 ‘시간의 점’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신호대기」에서도 특수한 곳에서만 보이는 골목길 통해 연애 이야기를 끌고 오고, 「먼 산에 내리는 눈」에서도 먼 산에 내리는 눈과 자기가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결부시키잖아요. 그렇지만 그렇게 공간이나 특정한 대상에 전제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좀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겁니다. 너무 시를 읽듯이 읽은 것은 아닐까 싶지만, 미리 기획된 정서적 대상물이 개연성을 가지고 인물들과 얽혀드는 게 아니라 하나의 장치로 작용하고 마는 것은 아닌가. 왠지 꿰매놓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반면에 「거리의 마술사」 같은 작품은 상황이나 정서 묘사,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비슷하지만 그것들이 전체 서사의 장에서 각각 유효한 위치를 점하고 있어서 어떤 바느질 자국도 느낄 수 없어서 좋았습니다.

 

황정아 아까 말씀드린 ‘시간의 점’을 중심에 놓은 작품이 「먼 산에 내리는 눈」인데, 이 작품은 저도 약간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간빙기의 밤」은 비슷한 방식이면서도 그보다는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가 화자의 의식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군대라는 배경과 그날 밤 두 사람이 했던 대화와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잘 맞물렸기 때문에 좀더 살아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간빙기’나 ‘빙하기’가 따지고 보면 어처구니없는 비유잖아요. 한 사람의 일생을 빙하기니 간빙기니 하는 시간대로 뻥튀기를 했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정서를 만들어냈어요. 저는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과 「추석 전야」가 특히 인상적이었고 「거리의 마술사」 같은 작품도 비교적 좋게 읽었습니다.

 

정홍수 공간 얘기가 나왔는데, 서울이라는 도시가 단순한 풍경이나 배경 이상으로 구석구석 이렇게 소설의 서사 속에 깊이 안착된 느낌을 주는 경우도 드물지 않나 싶어요. 작가가 거의 자기 몸에 붙여서 묘사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신호대기」나 「추석 전야 」의 경우는 그런 밀착된 장소성의 구현이 소설의 서사와 분위기를 밀고 가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추석 전야」를 보면, 바로 그 익숙한 도시가 불안하고 낯선 장소로 바뀌는 흐름이 인물들의 불길한 떠돎과 묘하게 섞여 있는데, 그 도시의 한쪽에서 바라보는 달이나 어둠에 잠긴 한강다리가 낯설어지는 순간이 별로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인물과 서울이라는 장소의 결속이 그만큼 생래적인 느낌 위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김종옥 소설의 독특한 시정(詩情)과 페이소스는 도시를 자연화할 수 있는 감각과도 무연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이때 도시는 현대라는 시간-역사이기도 할 테고, 그 외부 없는 상태로부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데 김종욱 소설의 한 특징이 있다고도 보입니다.

 

신용목 관계의 일상성 내면의 유일한 움직임을 통해서 포착하는데, 그게 대체로 무료한 일상에서 이뤄지고, 또 무료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무료하게 써내려가고 있고, 그렇게 해서 무료한 표정을 만들어서 소설을 가득 채우는 점은 역시 시적인 느낌이 들었고 놀라웠어요. 다만 제가 느낀 문제는, “우리가 하지 않은 일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다”라거나 “커피 맛에 관심을 가져야 된다”는 문장들이, 스쳐 지나가며 읽을 때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감싸안으면서도 소소한 의미를 실어 나르는 좋은 문장이라고 느꼈는데, 어느 순간 이것들이 소설의 전면으로 부각되면서 자꾸 갸우뚱거리게 되더라요. 이를테면 평면적인 구성으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마치 이 소설이 도달한 인식의 깊이라는 듯 재차 환기되는 순간 ‘어, 이건 뭐지?’ 하게 되는 것이죠. 단순히 그 문장의 매력만 반감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이거야?’라고 반문하게 만드는 겁니다.

 

황정아 저도 비슷한 의심이 들었어요. 물론 그 과정에서의 발화는 흥미롭습니다. 말씀하신 구절들은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에 나오는 얘기인데, 이 작품이 자기가 사귄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한명이 아니고 여러명의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그녀들 사이의 차이가 사라져버리는 느낌을 받아요. “길이 많아서 길을 잃을 수 없다”라는 구절과 회상의 구체적인 내용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자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앞서 말한 대로 회상 전체의 기조가 되는 방식에 양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그 과거에 어느정도의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의미없음을 정서화하는 두가지 기제가 같이 있요. 회상하는 시절이 회상할 만하고 회상해야 마땅한 시절임을 보여주지만, 결국 거기에는 겨우 하지 않은 것만 있을 뿐이라는 식이죠. 거기서 독특함이 나오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게 회피의 방식이라는 의심을 게 만들어요. 전형적인 ‘남성적 회피’라는 생각도 드는데 기억함으로써 상실을 강화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거죠. 애틋하면서도 언제나 이미 체념이 들어가 있어서 만들어지는 정서, 이게 매력적이잖아요. 하지만 이렇게 하려는 바가 분명해지면 오히려 공감이 떨어지는 이유가, 제 생각에는 직면하지 않으려고 계속 물러나는 정서 때문인 것 같아요.

 

정홍수 비슷한 느낌을 가졌는데요, 그게 일종의 허무주의를 강화해나가는 방식으로 가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키는 행위 안에서 삶을 개방시킴으로써 비록 지나간 일이라 하더라도 삶이 그 자체로 살아나서 발화하는 지점을 찾아내는 게 지금 김종옥 소설의 구도에서는 중요한 지점으로 보이는데, 그건 또 언제든 지적인 기억의 유희에 머물 위험도 내포하고 있죠. 그랬을 땐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요.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에서 화자는 우리의 과거가 무수히 많은 하지 않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소설에 대한 작가의 생각으로 넘겨짚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번 소설집에서는 회상 행위를 통한 과거의 되짚음 이후에도 인물들에게 그다지 여지를 남겨주지는 않습니다.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에서 일종의 후일담처럼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려주며 근사한 부잣집 친구의 별세계로 자신을 데려다준 차, “나는 지금 그 차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라고 묻지만, 그 어조에는 사실 별 기대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호대기」에서 옛 여자의 앞길을 축복하는 마지막 인사가 주는 울림은 소박하지만 깊습니다. 이건 결국 앞의 회상 행위가 만든 힘이겠죠. 그리고 이런 미세한 흔들림이야말로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결말을 알고 있는 책읽기’(「리와인드」)의 역설을 어떻게 감당해가는가 하는 데 김종옥 소설의 갈림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용목 그런 점이 다 드러나는 곳이 「리와인드」의 첫 대목 같아요. 대화를 써놓고서는 사실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존재하지 않은 순간, 없었던 순간, 의미없는 순간을 점유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홍수 등단작 「거리의 마술사」나 「방학식」 같은 작품을 보면 소설적 테마나 화법에서 이 작가가 앞으로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이 많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왕따’라는 널리 알려진 사회적 고통의 이야기를 간절한 마음의 움직임을 밑에 두고 삶의 비의적 국면으로 감싸는 방식이나, 일상과 환상을 표 안 나게 겹쳐내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의 활동이 많이 기대됩니다.

 

마종기 『마흔두 개의 초록』

 

마흔두개의 초록_fmt신용목 마종기 시인이 등단 55주년인데, 그 연배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시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게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것 같아요. 이 시집에서도 ‘이슬’에 관한 시가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버티고 있는데, 「이슬의 애인」 류의 시들이 마종기 시심의 본류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시풍이랄까요? 그런 풍이 비평적 언사로부터는 배제되기 쉽지만 반대로 이 연배에도 시가 쉽게 도()나 깨달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젊고 순수한 감성을 유지하는 비결인 것도 같습니다. 「헤밍웨이를 꿈꾸며」라는 시를 보면 그것이 낭만성을 근원으로 삼고 있다는 게 드러나지만, 전체적으로 어떤 소외와 유랑의 역사를 회한으로 이어가는 정서가 시집을 채우고 있습니다.

 

정홍수 저는 1997년에 나온 마종기 선생의 『이슬의 눈』(문학과지성사 펴냄)이라는 시집을 좋아하고, 그 첫번째 시 「방문객」은 외워보려고 여러번 시도했어요. 이번 시집에 들어 있는 「국적 회복」은 시에도 사연이 얼마간 나오지만, 타의에 의해 조국을 떠나야 했던 시인의 쓰라린 세월이 담담하게 들어가 있는데 특별히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시집 전반적으로 ‘견고한 슬픔이나 회한’을 시적 기교에 의존하지 않고 곡진하게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시간을 통과해야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텐데, 앞서 신용목 시인이 말한 것처럼 깨달음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그조차 하나의 단계라는 겸허함이 시의 긴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절제된 회한이나 서러움이 그 긴장의 다른 한 축에 있고요. 시집을 여는 「봄날의 심장」을 보면 “어느 해였지?”라는 물음을 앞뒤로 두고, “그래도 오너라, 속상하게 지나간 날들아,/어리석고 투명한 저녁이 비에 젖는다”라든지 “우리의 생은 어차피 변형된 기적의 연속들,”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툭툭 던지는 듯하지만 시적 긴장이 살아 있는 가운데 회한이나 자기연민을 넘어서는 생의 긍정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삶의 시간을 통해서 형성되는 시의 언어를 접할 기회가 줄어드는 느낌인데, 그런 의미에서도 마종기 시인의 시는 각별한 자리에 있는 듯합니다.

 

황정아 저 역시 만년의 시집이란 느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당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시들이었어요. 가령 「봄날의 심장」에서 “제발 꽃이 잠든 저녁처럼 침착하여라”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구절은 오히려 왜 이런 발언을 하는가를 곱씹게 만드는, 뭔가 들끓는 내면을 환기합니다. 바로 그런 잦아들지 않은 상태의 에너지로 시를 쓴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는데요, 한편으론 시적 자아가 전면에 드러나는 부분은 어딘지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어요.

 

신용목 역시, 남성적인 시선 때문이겠죠?

 

황정아 네.(웃음) 내밀하기보다는 사회적인 발언으로 느껴지는 시들이 있는데, 그 발언이 삶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느껴져 약간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시집에서 저한테 다가오는 작품은 그런 방향보다는 오히려 「고속도로변 노을」같이 담담하면서도 감각적인 시들, 「더블린의 며칠」이나 「폭풍 속의 화가」처럼 여행지의 묘사가 담긴 작품이었어요. 지금-여기에 관한 시들은 좀 관념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삶에 밀착하는 면은 좀 덜한 것 같습니다.

 

신용목 방금 말씀하신 시들은 서정시의 정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보통 이런 류의 시들은 저기에 대상이 있고, 자아가 대상으로 다가가고, 대상과 자아가 만난 다음, 그 대상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취하잖아요. 그게 동일성의 원리를 가진 시의 흔한 구조일 텐데, 「봄날의 심장」만 봐도 그 합일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마종기만의 특수성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 대상을 바로 호명하든지 그 대상으로부터 호명되는 세계를 직접 그리는 방식을 취할 때 범하는 오류가 쉽게 전지적 시점을 차용해서 세계를 관장하는 것인데요. 대체로 마종기 시인은 그 대상으로부터 환기되는 인식의 폭을 한정하고 오히려 섬세한 감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듯합니다. 한편, 「어머니, 자유, 9월의 긴 여행」에서 “자유가 무엇을 주었느냐 하면 몸 떨리는 외로움이라고 말할밖에 없다” 같은 대목을 보면, 앞서 황선생님이 불편해하신 이유가 잘 드러납니다.(웃음) 좋게 말하자면, 세계에 대해 순수하고 순진한 시각을 드러낼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잡담 길들이기 14」에서 여성 자살 테러범을 묘사한 구절도 그렇지만, 후반부에 한국전쟁으로 죽은 사촌형을 그리는 부분을 보면 개인의 정서가 사회적·역사적 필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우주적으로 승화된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전반적으로 그 정서의 순도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정홍수 저로서는 이번 시집의 경우 좋은 쪽으로만 읽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국적 회복」의 첫 연에서 군의관 친구들이 면회 와서 “내게 다시는 시원한 날이 안 올 듯/한여름에 겨울옷을 놓고 갔다”고 하는 대목은 사실의 담담한 진술만으로도 당시의 아픔과 벗들에 대한 고마움을 너무도 투명하게 응축해서 전합니다. “내가 미워했던 고국이여,/잘못했다. 긴 햇수가 지나도/계속 억울하고 서러웠다” 같은 서러움과 원망의 시간에 대한 정직한 토로를 거쳐 “정말이다, 너무 늦었다는 말까지/나를 그냥 가볍고 푸근하게 해주었다”로 긴 시가 끝납니다. 이런 시는 한 시인이 단 한번 쓰는 시일 테고, 그만큼 넘치기도 쉬울 텐데 그런 느낌이 없습니다. 「옛집 근처」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시죠. 마지막 연의 “남은 저녁들이 조용히 문을 두드린다”에서 옛집으로 돌아오는, 혹은 옛집이 시인을 받아주는 자리가 열리는 느낌을 받는데, ‘남은’이라는 표현에 새겨진 지나온 저녁들의 쓰라린 시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어머니, 자유, 9월의 긴 여행」에서 “저기 가볍게 출발하시는 어머니”가 시 처음의 “자유가 무엇을 주었느냐 하면 몸 떨리는 외로움이라고 말할밖에 없다”는 구절과 대비되면서 그 사이로 착잡하고 복합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번 시집이 보여준 곡진한 시간의 풍경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황정아 「옛집 근처」나 「정화된 골목」 같은 작품은 회환의 애잔함이 앞서 말씀하신 낭만적 경향이랄지 자아의 관념을 늦춰주는 효과가 있는데, 이런 쪽이 오히려 현실성도 있다고 느껴져요. 외국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몇몇 시도 대체로 그런 편이었어요.

 

정홍수 물론 평이하게 씌어져서 시적 긴장을 감지하기 어려운 시들도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마종기 시인의 시에는 확실히 좋은 의미의 대중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장악하고 책임지는 태도에서 비롯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시의 형식과 관련해서는 ‘잡담 길들이기’ 연작이 흥미로웠습니다. 앞에서는 산문적으로 풀어놓고, 뒤에 가서는 어조를 바꾸어 시적으로 조여 붙이는 방식 말이죠. 「잡담 길들이기 17」의 하와이 교포 삽화가 돌연 시인 자신의 이야기와 겹쳐지는 전환의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디서 오셨수?”로 시작되는 마지막 연의 대화가 주는 이중의 울림 같은 것.

 

황정아 마종기 시에 두드러진 ‘이슬’의 이미지에 관해서는 저로선 좀 애매하게 보였어요. 어떻게 보면 종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중심이 잘 안 모아지는 느낌이 있고. 그런데 그 때문에 뻔한 상징으로 떨어지지 않는 점이 미덕일 수는 있겠지요.

 

신용목 뻔하고 모호한데도 이 정도의 정서적 전달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젊은 시인들 입장에서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겠지만, 시인에게 ‘이슬’이 거창한 의미를 투영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비극적 처지를 반추하는, 작은 풀잎 위에 맺혀 있기도 하고 금방 사라지기도 하는,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놓여 있어서 여전히 생동감을 주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말씀하신 회한의 정서가 깊이 깔려 있고, 또 그것이 연시풍을 만들어내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도 같요. 아무튼 다음 시집도 머지않아 겠구나 하는 믿음이 가는 원로시인이에요.

 

정홍수 외국에서 생활하고 계시다는 게 한국어에 대한 긴장을 더 많이 갖게 하지 않았을까요.

 

고형렬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정홍수 고형렬 시집의 초반부는 정말 강렬하고 좋았습니다. 압도당하는 느낌을 주더군요.

 

신용목 네. 앞부분이 너무 좋아서, 뒤의 좋은 시들조차 소품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시집 구성상의 아쉬움이었던 것 같아요.

 

황정아 마종기 시집은 뒤로 갈수록 적응이 됐는데 이 시집은 반대였던 것 같아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_fmt정홍수 저도 비슷한 느낌이긴 했습니다만 중반부터는 시의 자리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대한 회한이나 분노 같은 것이 이어지다가 ‘통어(通語)’에 대한 간구로 끝나는 시집의 맺음은 나름대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다양한 시적 방법이나 사유를 아우르고 녹여내면서 시의 자리에 대한 회의와 물음을 멈추지 않는 한국 시의 뜨거운 전선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풀과 아파트」는 “이방인 가족 아파트는 없다”는 사실로 시작되다가, 2연의 “풀의 하늘엔 이슬이 내려와 별처럼 산다”부터 시선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이를 통해 “우울한 얼음구름이 불어오는 싸우스코리아/북위 37도쯤 수도권 어딘가 살고 있을 것”이란 낯선 시적 제시가 가능해지는 거죠. 이런 시선의 역전이 직접적인 언술 없이도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지금 우리가 도착해 있는 세상을 다른 눈으로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이 시에 펼쳐진 풍경은 “베짱이와 사마귀가 세 들어 사는” 이상한 평화 같은데 이 지점에서 이 시를 다시 읽어보면 뭔가 오싹하고 묵시록적인 느낌도 듭니다. 아마 지금 세상에 대한 시인의 관점, 근심 같은 게 이 기이한 풍경 속에 녹아 있는 것이겠죠. 「화곡동의 빨간 벽돌 속에는」은 ‘시간의 역전’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상력이 강렬합니다. 시간을 거슬러 간 곳은 화곡본동 뒷산인데, 거기서 아내는 알을 부화 중입니다. 그런데 이 알의 정체는 무얼까요. 태열이라는 말도 나오는 걸 보면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어야 할 아이들인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그 부화와 우화(羽化)가 아직도 진행중이고, “빨간 벽돌과 벚나무 속에 갇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완이거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일로 보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여기에 도래해 있어야 할 그 과거는 오늘의 시간에 대한 강렬한 부정의 자리로 남습니다. 추방된 어느 도시의 변두리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할 ‘부화와 우화’의 시간을 생각하는 일이 누구나 쉽게 말을 얹는 현실 비판, 문명 비판의 차원이 아니라, 뭔가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느낌의 강한 부정성이 되는 거죠. 그게 이 시의 힘인 듯합니다. 배수진이라고 해야 할까, 이 두 시를 앞에 놓은 시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용목 그래서 나머지 시들이 정말 ‘죽음 속의 기척’(「죽음 속의 기척을 위하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홍수 한편으로 시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시에 대한 회의와 반성, 시가 사라지는 시대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었어요.

 

신용목 지난번 좌담에서 송승언(宋昇彦) 시집을 살피면서 젊은 시인들이 쓰는 메타시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와 연결하여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황정아 거의 모든 시가 메타시라고 해도 좋다는 느낌이었어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전편에 진하게 묻어 있는 것 같았고요.

 

신용목 우선, 강렬한 인상을 준 전반부의 몇몇 시 다음에 이어진 시들은, 앞서 말한 ‘죽음 속의 기척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의미가 쭉 관통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 시 바로 앞에 놓인 「장미처럼 발화하는 것 같다」라는 시를 보면, “원고 청탁이 오면 작품을 만들려고 골몰한다/경험만이 아니기에 어느날 시가 어려워졌다”로 시작해서 “색깔과 모양에 상관하지 않는 시선만이/그 꽃이 뜻밖의 사랑임을 알게 할 뿐이다”라는 마무리까지 언어와의 고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시를 철저히 현실의 기반 위에서 사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근 젊은 시인들이 시를 낭만적으로 인식하거나 언어를 절대화하는 태도와 구별되는데요. 고형렬 시인은 “모든 말은 죽음 속에 모인다”(「시()는 죽었다」)라고 말하면서 시에 대한 절망과 부정을 드러내지만, 오히려 부정의 형식으로 시를 옹호하고, 절망의 형식으로 시와, 그것도 굳건하게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정말 ‘기척’처럼 드러냅니다. “이 시대의 시인은 없지만 시인끼리만 시인이다”라고 말하지만 다음 구절에서 “시인들이 말을 다 잃어버리고 있지만/우리만은 말을 물고 있어/오지 않는 것들은 기다리지 않는다”(「사양(斜陽)의 가족사진을 찍다」)라고 말할 때 결연한 의지 같은 게 감지되는 것이 그런 이유는 아닐는지.

 

정홍수 시를 철저하게 현실 속에서 사유한다는 말이 와닿네요. 그런데 고형렬 시에서 그 현실은 삶의 현실이면서, 동시에 시가 아니면 포착되지 않는 현실이라는 차원이 항상 겹쳐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가 어려워지는, 혹은 두터워지는 대목도 그것과 관련있는 것 같고요. 메타시의 지점에서는 「위조지폐」의 상상력이 재미있기도 하고 통렬했습니다. “시간의 위증”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위조지폐는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다/어떤 희망적 예후이며 기이한 상징이며 의미라고/자신을 오해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안이한 시의 자리에 대한 통렬한 질타며 반성이겠죠. 그런데 그 위조지폐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시선이지만, 위조지폐를 폐기하려면 위조지폐 안의 위조지폐에까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결국 거기에 ‘나’가 있다는 것은 결국 표제 시의 문제의식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와 연결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황정아 전체적인 느낌은 무척 어렵게 씌어진 시 같다는 거였어요. 대상과 언어와 사유와 자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끌고 가려 한달까요. 이를테면 말의 유희라는 것이 정해진 문법 안에서 그 문법대로 유희하든지 아니면 문법과 어긋나면서 계속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라면, 이 시들은 그 어느 쪽에도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의식적으로 하나하나 적어나갔다는 느낌. 그래서 한편 한편이 분명한 변별점이 있습니다. 시쓰기에 관한 시나 시쓰기의 어려움에 대한 시가 많은데 이 시편들 자체가 그런 면을 증언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마다 시적 문법을 찾는 문제가 언제나 함축되어 있어요. 그와 관련해서 앞서 언급된 「장미처럼 발화하는 것 같다」를 보면 ‘파적(破滴)’ 얘기가 나오는데 그 비유가 와닿았습니다. 큰 덩어리나 마디가 아니라 물방울을 부수는 작은 규모의 문제로 가지고 가려는 느낌? 아무튼 다른 누가 아닌 시인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 사물이 그려진 작품들이었어요. 그런데 뒷부분의 수록작은 좀 아쉬웠습니다. 부화하지 못한 알의 태열을 같이 앓는 듯이 갇혀서 뒤얽힌 에너지를 발산하는 「화곡동의 빨간 벽돌 속에는」 같은 시에 비하면 뒤의 시들은 긴장이 풀린 느낌이었습니다.

 

정홍수 저는 「황무지 모래톱」을 읽으며 시집에 ‘절창’이라고 메모를 하기도 했어요. 절창이라는 말도 요즘 잘 안 쓰이긴 하지만, 정말 요즘 누가 이런 시를 쓸까요. 시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너무 강렬하게, 뭔가 산화해버리겠다는, 거의 시에 순교하겠다는 비장함이 있잖아요. 정말 고형렬 시인에게는 시라는 게 대단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신용목 그래서 저는 상대적으로 좀 불편했어요.(웃음) 같은 맥락에서,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는 정말 실존을 통해서 확인되지 않는, 어떤 생의 신비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어요. 시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데는 죽음 너머 시간까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것은 뒤에 “아직도 하나의 언어가 되지 못했다”는 구절에서 보이듯이, 말을 통해서 존재의 신비를 확인하려는 노력이 바로 시쓰기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계속 시가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시를 부정하고 죽음과 시를 맞세워놓는 이유가, 사실은 시를 다른 방식으로 혹은 다른 방식의 시를 강렬하게 갈망하기 때문임을 방증하는 것이겠죠.

 

정홍수 시집 전체에서 한국 시에 대한 회의나 반성, 비판이 반복되는데, 그중에서 가장 깊고 통렬한 자기반성의 시가 이 작품이라고 봐도 되는 것이겠죠. “죽음 너머 시간”이라는 거의 불가능한 자리로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느낌입니다. 마지막 연에서 “물속에 공기가 없는 것은 유동성의 비밀이다”고 말하고는 수중경이 물속에서 “말이 오는 쪽으로 혼자 뻗어”가는데 이거야말로 죽음 이후의 풍경 아닙니까.

 

신용목 빈번하게 ‘죽음’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때 ‘죽음’의 의미가 특별히 조작되지도 않지만 상투적으로 소비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시인이 확고한 자기 언어를 사용하고 있잖아요. 한 문장 한 문장을 아주 공들여서 의식적으로 쓰는데, 보통 그런 화법을 구사하는 시들은 그 때문에 의미가 행간을 넘어서지 못하고 갇혀 있거나 답답한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요. ‘죽음’도 그 절대성 때문에 무한한 미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시에서 사용될 경우 대개 세계와 인식의 깊은 곳까지 짚어내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지점에 ‘죽음’을 세워놓고 말았다는 느낌을 주곤 하거든요. 결국은 우주나 죽음으로 귀결되는 시들은 것처럼. 그런데 고형렬 시인의 시는 오히려 죽음을 목적지로 설정하지 않고 경유지로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를테면 시인이 구사하는 모든 신념 어린 문장들이 출발지와 도착지를 드러내지 않고 끝없이 경유지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죠.

 

황정아 그래서 사실은 죽음 자체가 강렬하게 남지는 않았어요.

 

신용목 그 죽음이 그 죽음이 아니랄까요. 「시()는 죽었다」도 재밌는 시인데요. “그들은 시의 종말이 없다고 믿는다/종언만 있을 뿐//모든 말은 죽음 속에 모인다”, 그리고 뒷부분에서 “모든 시가 죽기 전에 나의 시가 죽는다”라고 했을 때, 앞서 말한 ‘거울’의 이미지도 그렇지만, 외부에서 원인을 찾고 외부에 갱신을 호소하는 방식이 아니라,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어요. 철저한 자기갱신, 이를테면 죽음으로 호명된 극도의 존재론적 전환을 통과할 때에만 새로운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 시 「통어」의 첫 문장이 “너와 말이 통하는 순간 아픔이 왔다”가 되는 거겠죠. 그때 ‘말’은 너와 나를 연결하는 수단이지만, 이전의 너와 나를 도륙하는 칼날이기도 할 겁니다.

 

정홍수 아까 「황무지 모래톱」 이야기를 하면서 시에 대한 순교의 느낌 같은 것을 언급했는데, 어떻게 보면 무섭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상징적이든 어떻든 죽음이라는 것은 쉽게 발화되기 힘든 자리인데요. 그런데 신용목 시인에게는 시가 이 정도의 자리에 있습니까?(웃음)

 

신용목 죄송합니다.(웃음) 비겁한 변명입니다만, 저희 세대만 하더라도, 물론 문학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신념을 신비화하기를 좀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같요. 그렇지만, 아무튼 저는 반성부터……

 

황정아 난데없지만, 저는 「로봇 싸이버나이프 다빈치의 고백」 「소형(小型) 플래시」 같은 시도 의외로 괜찮았어요.

 

정홍수 「저 98층에서 무엇이 내려오나」에 나오는 이야기도 정말 이해가 되더군요. 워낙 전체적으로 시들의 밀도가 높아서 그런지 “크윽, 머리 위에 하늘 2층만 짊어지고”의 마음이 그대로 와닿았습니다.

 

신용목 좀 으스스하기도 합니다. “슬픈 것들을 모두 이긴 다음, 혼자 남아서/모든 피투성이의 죽음을 안고 죽는다는 가을”(「거울 속 상하이 귀뚜라미」) 같은 비장한 구절들을 보면요.

 

정홍수 「날개/옷걸이」를 보면 옷걸이 같은 걸 보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황정아 그러니까요. 항상 모든 걸 ‘시인의 눈’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정홍수 마종기 시인의 경우도 시와 삶은 동궤이고 분리되기 힘든 것 같지만, 고형렬 시인은 거기서 좀더 나가, 시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어떤 이데아, 절대적인 자리로 다시 한번 올라서고 있지 않나 생각될 정도입니다.

 

신용목 그것도 좀 아이러니컬하죠. 물론 시의 역할과 형식이 시대에 따라 변모해왔기 때문이겠지만, 마종기 선생은 늘 문학주의자로 호명되었던 분인데 자기 회한과 자기 삶 더 천착하는 면이 있고, 반면 고형렬 선생은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시인으로 언급되는데 오히려 시 자체를 꽉 붙잡고 있으니까요.

 

정홍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하여튼 고형렬 시인은 거울로 있을 것 같아요. 시의 거울로. 신용목 시인이 시심이 좀 떨어진 것 같으니 반성을 좀 하시라고.(일동 웃음)

 

고영 『딸꾹질의 사이학』

 

딸꾹질의 사이학_fmt신용목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쓰기를 굳이 나눠보자면 경험을 중심에 둔 부류와 언어를 중심에 둔 부류가 있을 텐데, 고영 시인은 압도적으로 경험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는 시인입니다. 제가 느꼈던 점은, 일상의 소박한 생각을 아포리즘적으로 구성해놓고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요. 「서둘러 문을 닫는 사람은 문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에 보면, “함께 나눠야 할 행복이 있어서 벽은 문이 되었다”라는 구절을 시 전체의 전제로 깔아두고 시작한 뒤, “세상 모든 문들이 모두 두개였으면 좋겠다” 같은 소박한 바람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정홍수 저는 그게 아포리즘이라기보다는, 고영 시인이 천상 시인이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 같아요. 앞의 두 시인도 그런 느낌인데, 고영 시인도 하루 24시간을 시로 사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 데서 오는 소박하지만 쉽지 않은 시적인 발견의 순간들이 있잖아요. 「태양의 방식」에서 “당신은 어제의 태양 아래서 웃고/나는 오늘의 태양 아래서 웃고 있었다”, 또 「악수」에서 “외출을 두려워하는 자의 손바닥에선/꽃이 피지 않는다”라거나 “농담뿐인 에게 저녁은 참 빨리도 오고/그런 날은 악수도 축복이다.” 이런 구절들은 시적 재기로 가능하다기보다는 그만큼의 시간을 치러야 도착하는 언어가 아닌가 싶어요. 또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물어뜯어보는 혼자 사는 집에서의 저녁은/아직 오지 않은 슬픔에 닿아 있다”(「저녁의 공복」) 같은 구절이 좀 상투적인 아포리즘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고영 시의 자기 맥락 안에서는 절실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낙관」에서 화가가 보내준 홍시에서 지문을 발견하는 구절처럼 시적인 것들을 발견해가고 그것들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는 모습이 좋게 읽혔어요. 서정적 동일성의 세계가 너무 강하고, 시적 타자와의 싸움이 충분한지 조금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그게 너무 순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만. 「달걀」에도 나오지만 고영 시인의 경우는 그 싸움이 일단은 자기 내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 듯합니다. “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창을 닫았다” 같은 식이죠. ‘조금 더 착한 새’라는 것은 정말 소박하고 순정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냥 그 안에서 자기의 아픔을 충실히 앓고 단단해져서 나가겠다는 것이고, 세상에 대해서 분노한다든지 비판한다든지 하는 차원은 시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시에 전위가 있다면 이렇게 뒤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시인도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용목 시인의 삶의 자세를 말씀하실 때마다 저는 왠지 계속 꾸지람을 듣는 기분인데요.(웃음)

 

황정아 시가 만들어지는 기제가 투명하게 보이고, 정직함이랄지 순진함이랄지가 느껴지는 시들이었어요. 고형렬 시를 읽은 다음 이 시집을 읽었는데 정말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위, 후위 얘기를 하셨는데, 대개는 시가 일상적인 삶에 균열을 일으키거나 낯선 틈을 새긴다는 식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이 시들은 일상적인 정서를 좀더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반추하는 쪽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필요하다면 필요하고, 단선적이라면 단선적이겠지요. 대체로 비슷한 정서가 유지되는 느낌은 있습니다. 저는 앞쪽에 있는 「달걀」이나 「뱀의 입속을 걸었다」처럼 다소라도 이질성을 내포하는 시들이 인상적이었고, 「태양의 방식」과 「패」도 다성적인 면이 엿보였습니다. 어쨌거나 전반적으로는 비슷한 조성이었는데, 그러다보니 ‘병점행’ 연작같이 시적 화자의 내면보다 소박하게 바깥 세태를 바라보는 시가 신선하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신용목 아포리즘 이야기를 마무리짓자면, 아포리즘은 보통 시적 인식을 철학적으로 전시하는 차원에서 사용되는지라, 시의 의미를 적당히 갈무리함으로써 독서자의 해석 폭을 오히려 좁혀놓곤 하는데요. 속된 말로 고영이 사용하는 아포리즘에는 잘난 체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말씀하신 것처럼 생활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세계로는 좀처럼 가지 않고, 피부에 닿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해 그 범위 안에서 아포리즘을 완성하기 때문이기도 할 텐데요. 그보다도 앞서 예로 든 시에서처럼 아포리즘을 시적 인식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과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이치를 확인하는 이야기의 배경으로 깔아놓은 뒤, 정작 시는 삶의 현장을 환기시키는 질문을 통해 뒷문을 열어놓으면서 완성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원고지의 밤」이나 「독서의 방법」 같은 소소하고 차분한 고백이 좋았고, 「저녁이 다 오기 전에」는 전통 서정시의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리가 반성하는 시간」은 대상에 뭔가를 덧씌우려 들지 않고 소박한 시선으로 그저 한 장면을 묘사했을 뿐인데 시가 깊어지는 묘한 순간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두편의 시가 문제적이었는데요, 앞서 말씀하셨던 「뱀의 입속을 걸었다」와 「겨울 강」은 경험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을 자유롭게 벗어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번 반복해서 읽게 만드는데, 반면 「평생교육원 1」을 포함한 다수의 시들은 너무 쉽게 시작되고 또 완성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습니다.

 

정홍수 저도 「뱀의 입속을 걸었다」와 「겨울 강」을 눈여겨봤습니다. 시적인 응축이 강한 작품들이더군요. 「뱀의 입속을 걸었다」에서 내부와 외부가 뒤섞이고 경계를 허물고 하는 지점이 나오잖아요. 이게 고영 시인이 동일성, 연민과 공감의 세계에서 더 밀고 나갈 수 있는 시적 영역으로 보였습니다.

 

신용목 우리가 이 시집이 좋다고 느꼈다면 그 이유는 차분하면서도 정직하고 소박한 매력 때문일 텐데, 대체로 그런 시들은 한번 읽고 나면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잘 일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죠. 반면 「뱀의 입속을 걸었다」나 「겨울 강」은 읽을 때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환기시켜주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시는 비록 그 의미가 잘 잡히지 않더라도 세계 뒤편에 도사린 어떤 예감을 던져줄 필요가 있지는 않은지.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인의 직정(直情)은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정아 「뱀의 입속을 걸었다」나 「겨울 강」은 ‘예외’적인 시잖아요. 이런 예외들이 적다는 게 아쉬웠던 것 같아요.

 

신용목 네, 「연민」 같은 시가 많은 게 좀 아쉬워요. 이 시에서처럼 “우리 아직 포기하지 말자!”라고 말하고 나면 더는 할 말이 없어지잖아요.

 

정홍수 「선물」도 그런 시인 것 같습니다. 선물로 받은 오래된 벙거지 모자가 머리를 묻기 좋은 예쁜 무덤으로 바뀌고, 빈 무덤이 되는 마음의 흐름은 너무 곱기도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따뜻했다//한겨울을 무사히 났다”로 끝나면서는 많이 아쉽고 정말 할 말이 없어지죠. 자기 시 안에서 흔한 방식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시적 응축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의 시선, 전선을 조금 확장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지금까지의 세계를 얼마간 허물면서 말이죠.

 

황정아 저로서는 사유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시도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요. 의미를 더 분명히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서정의 변방처럼 보이는 사유가 오히려 낯선 서정을 개척하기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뜻에서요.

 

정홍수 여기서 마무리할까요. 긴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