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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불가능한 몸이 말하기
세월호 시대의 ‘시적 기억’
함돈균 咸燉均
문학평론가. 저서로 『얼굴 없는 노래』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예외들』 『사물의 철학』 등이 있음. husaing@naver.com
기록이 없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기록은 영원하다. 한 사무기기 제조사가 내세운 인상적인 광고 문구다. 그러나 남길 수 있는 기록 자체가 부재하다면, 혹은 도저히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면 기록의 만세유전(萬歲遺傳)을 확신하는 저 문구는 유효한가. ‘공식적 기록’이 기록의 생성단계에서부터 왜곡되거나 은폐되거나 망실되는 세계에서, ‘기억’은 비상하고 절박하며 특별한 지위를 강제적으로 떠맡게 된다. 한 사건에 대한 개인들의 경험, 그런 주관적 기억만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이 아니라) ‘기억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기록’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개인들의 머릿속에 담긴 불완전한 기억은 주관적 경험을 넘어서 객관적 ‘사실’이 되어야 한다는 불가능한 요구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사실과 진실과 허구, 객관과 주관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기이한 언설로 독자를 미궁에 빠지게 했던 작가 보르헤스( J. L. Borges) 이야기가 아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현재 500일에 이르고 있는 세월호사건의 현황이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지금까지 종래 대형사건과 달리 이 사건이 던지고 있는 특별한 화두는 기억이다. ‘기억하라’라는 슬로건은 이 일이 ‘사고’가 아니라 ‘사건’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최초 순간부터 지금까지 명료하고 일관되게 선언된 시민들의 제1 행동강령이자 윤리적 태도였다. 그런 점에서 기억하라는 말은 (온전히 칸트적인 의미에서) 세월호사건의 ‘시민 정언명령’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이 시민 정언명령조차 매우 벗어나기 힘든 ‘기억의 딜레마’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전쟁 상황조차 전지구적으로 실시간 영상이 전달되는 요즘 배가 가라앉는 그 순간 텔레비전 화면은 정지영상만을 내보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조난당한 긴박한 현장 화면은 왜 생중계로 전송되지 않았으며, 어떻게 이런 완벽한 방송통제가 가능했는가. 모든 방송은 그 정지화면 속에서 사상 최대의 구조작전이 벌어지고 있으며 ‘승객 전원구조’라는 메시지로 국민을 안심시켰으나, 선체 안으로 진입하는 구조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304명이 배와 함께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21세기에 어떻게 이런 완벽한 오보와 국민 기만이 가능했는가. 더 놀라운 것은 해경과 해병대와 해군 UDT가 출동하여 ‘곁에’ 있었으나 민간구조업체와 맺은 이해하기 힘든 계약과 ‘구조수칙’에 의해 공권력에 의한 긴급재난구조 자체가 ‘저지’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정황이다. 그 계약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 배의 실소유주는 누구인가. 정부와 언론에 의해 갑작스럽게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며, 그 사람은 왜 영문도 모를 곳에서 얼굴도 확인할 수 없는 해골로 발견되었나. 그 해골은 정말 그의 사체인가. 조작된 정황이 짙은 지역관제센터의 메시지들은 무엇인가. 국가의 재난 컨트롤센터는 존재했는가, 왜 그들은 ‘방관’했는가.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대통령의 부재 일곱시간 논란은 또 무엇인가.
정상적인 이성을 지닌 시민이라면 누구나가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의심에 이를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나온 그 어떤 정보도 진술도 메시지도 발표도 해석도 믿을 수 없다! 이 사건의 가장 특이한 본질은 사건과 관계된 1차 정보 상당수가 증발되거나 은폐되었으며 정부에 의해 공개된 정보에 조작 혐의가 짙다는 사실, 그리하여 그로부터 파생되는 정부 공식발표와 언론보도, 심지어는 ‘안전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해석조차도 ‘허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누가, 왜 숨기는가. 국민을 죽이는 정치권력은 있었지만 집단조난 상황에서 국민을 죽게 내버려두는 정부는 없었던 정치사에서, 이 사건은 ‘국가가 국민을 구하지 않은’ 사건으로 규정되었다(박민규 「눈먼 자들의 국가」).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계속 놀라게 하는 것은 500일이 지난 시점에서도 사건의 실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추가로 알려진 게 없다는 사실이다. 진상조사를 위해 법률적 근거에 의해 만든 세월호진상조사특별위원회는 이 시각까지 단 1원의 예산조차 배정받지 못함으로써 가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실 규명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이렇게 반복하여 정리할 수 있겠다. 이 사건에서 지금까지 밝혀진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별로 없다는 사실뿐이라고. 우리는 어떠한 믿을 수 있는 ‘공식적 기록’을 아직까지도 별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는 시민 정언명령은 기억해야 하는 내용이 분명히 무엇인지 모른 채 기억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불가능한 목소리가 온다
반복하건대, 이 사건에서 ‘기억’은 기록을 대신하여 사실의 ‘복원’에 안간힘을 써야 하는 과잉 임무를 부여받는다. 시민들의 주관적 기억의 합을 통해서라도 객관적 사실의 구성에 이르러야 한다는 불가능한 작전에 호출된다. 세월호유가족협의회에서 시민사회와 힘을 합쳐 만든 ‘4·16기억저장소’ 같은 특이한 이름이 붙은 기구의 출현은 이 과제의 엄중하면서도 웃지 못할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있다. 기록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저장’하는 기구가 사실 규명의 공식기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록과 기억, 사실과 진실과 허구 사이의 전도와 경계 무화는 보르헤스의 소설이 아니라 2015년 지금 실재하는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세월호 시대’의 작가적 상황이기도 하다. 이 상황이 부득이하게 문학의 창작론에도 당혹스러운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있을 법한 허구’라는 소설적 개연성을 소설가는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인 질문에 우리 모두를 맞닥뜨리게 한 이 사건은 우리 시대 문학이 피해갈 수 없는 테마가 되었으나, 작가적으로 해석되거나 규정되기 어렵다. 문학적 해석을 통한 진실 재현의 길이 애당초 원천봉쇄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수상한 1차 정보 증발 상황에서 작가는 해석과 재현을 시도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공식기록, 즉 ‘사실’이라는 이름의 텍스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1차 정보의 총체적인 은폐·왜곡·조작·망실 상황에서 작가는 정보 자체를 ‘발견’하고 ‘증언’해야 하는 괴상한 상황에 놓인다. 우리 시대 작가들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건의 ‘원천 정보’를 갖지 못한 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게 된 것은 아닌가. 여기에서 작가는 사실의 해석이나 재현을 사후적으로 구성하는 3인칭 관찰자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사건 현장의 1인칭 ‘나’로서 그 사건을 ‘직접’ 발화해야 하는 ‘주인공’ ‘증언자’ ‘목격자’가 되어야 하는 불가능한 위치에 놓인 것은 아닌가.
이러한 ‘증언’은 가능한가. 만일 이 불가능에 가까운 발화가 가능하다면, 이 발화는 우리 문학에 종래 ‘사실주의’ 기율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도입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예컨대 난 ‘세월호 시대’라고 부를 만한 이즈음 우리 시대의 근본적 정치퇴행 상황이 촉발시켰다고 믿는 한 문학적 ‘기억의 회귀’에서 이런 불가능한 발화를 확인한다.1) 이 논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발화는 소설 문장의 외관을 두르고 있지만, 실은 지극히 ‘시적인 발화’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들의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있었어.
내 배 위에 모르는 아저씨의 몸이 다시 구십도로 가로질러 놓였고, (…) 내 얼굴에 그 형의 머리카락이 닿았어. 그 형의 오금이 내 맨발에 걸쳐졌어. 그 모든 걸 내가 볼 수 있었던 건, 내 몸 곁에 바싹 붙어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야.
(…)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 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내 몸은 다른 몸들과 함께 묵묵히 흔들리며 트럭에 실려갔어. 피를 너무 쏟아내 심장이 멈췄고, 심장이 멈춘 뒤로도 계속 피를 쏟아낸 내 얼굴은 습자지같이 얇고 투명했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 똑같은 죽은 몸인데, 누군가의 손길이 남아 있는 그 몸이 한없이 고귀해 보여서 나는 이상한 슬픔과 질투를 느꼈어. 몸들의 높은 탑 아래 짐승처럼 끼여 있는 내 몸이 부끄럽고 증오스러웠어.
그래, 그 순간부터 내 몸을 증오하게 되었어. 고깃덩어리처럼 던져지고 쌓아올린 우리들의 몸을. 햇빛 속에 악취를 뿜으며 썩어간 더러운 얼굴들을.
—한강 『소년이 온다』, 46~47, 53면
한강(韓江)의 장편 『소년이 온다』(창비 2014)는 세월호에 ‘관한’ 소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2014년 4월 세월호와 1980년 5월 광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광주를 다룬 이 소설은 ‘세월호 시대’에 출현한 가장 뛰어난 문학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내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은 35년이나 지난 사건이 왜 하필 지금 이러한 문학적 형상으로 ‘돌아왔는가’ 하는 것이다.2) 작가가 유년시절 간접 체험했던 5·18의 기억을 소환한 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어딘지 닮아 있는 ‘5월 광주’와 ‘4월 세월호’ 사이의 유사성을 직관적으로 감지하게 함으로써, 두 사건을 공히 특수한 역사적 국면에서 보편적 층위로 상승시킨다. 4·16의 입장에서 보면 4·16은 어딘지 5·18의 기시감을 환기시키는데, 이 기시감은 21세기 광화문광장을 늘 점거하고 있는 경찰병력이 연출하는 억압적 도시풍경, 말할 권리와 공정한 언로가 왜곡된 시대상황, 제도정치권과 퇴행적 사이비 시민사회 전반에서 연출되고 있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이 시대의 지독한 모욕감이 1980년대의 정치상황과 겹쳐지면서 자연스럽게 증폭되고 강화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나타난 소설 속 소년의 회귀(‘온다’)가 세월호를 사고가 아니라 ‘사건’으로 만든 이 시대의 강력한 정치적 억압·퇴행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텍스트 내적 관점에서만 보면 두 사건은 모두 강력한 정치적 억압과 왜곡에 의해 사실이 은폐·왜곡·조작·망실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끝내 열리지 못한 세월호 선실 내부가 일단 물속으로 가라앉은 후에는 그 현장의 증언자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처럼, 80년 광주의 어떤 참혹한 민간인 살해 현장 역시 소문으로만 전해질 뿐 정확하게 증언되지 못한다. 그에 비해 바다에서 수습된 주검들 중에 발견된 휴대폰 영상으로 선실 내부를 엿볼 수 있다는 비극적 상황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세월호가 구조를 기다리며 물속에 가라앉은 이후 ‘암전’의 시간은 아직도 인양되지 못한 현장과 더불어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30년이 지나도록 생존자도 목격자도 증언자도 존재하지 않았고, 공식적 기록을 통해 묘사될 수 없었던 5·18의 어떤 순간과 세월호의 선실 내부 사이에서 모종의 유사성을 감지한다. 소설의 재현이 아무리 공식적 정치·사회·역사의 기록 형식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런 목격자 부재의 현장은 소설의 묘사에도 불가지적(不可知的) 현장에 선 듯 난제를 던진다. 세월호가 그런 것처럼 35년 전 광주에서도 ‘기억’은 화두였다. 공식적 기록이 조작되고 은폐되었으므로 사건의 전모는 아주 오랜 시간 아귀가 맞지 않는 퍼즐처럼 괴상한 모양을 하고 인식론적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여기에서도 역시 기억은 기록의 부재를 메우는 불가능한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진실의 영토는 상당시간 동안 주관적 기억들의 합과 전승으로만 간신히 알려질 수 있었다. 기억은 ‘카더라’ 수준의 풍문의 외관을 띨 수밖에 없었으며, 풍문은 그것을 옮기거나 듣는 이들 모두에게 공포와 증오의 에너지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든 기억 중에는 기억할 수 없는 종류의 기억이 있다. 정확한 재현이 불가능한 기억이 있다. 전언의 형태로는 정확히 옮길 수 없는 기억이 있다. 타자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사라진 타자‘의’ 기억이 그것이다. 목적어로서의 기억이 아니라 주어로서의 기억. 내가 체험할 수 없었던 그의 고유한 기억. 그러나 기억과 체험의 주체가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기억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체험에 ‘사실성’을 부여할 타자의 타자, 증언자·목격자로서의 타자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목격자 없는 기억, 증언자 없는 기억, 생존자가 없기에 ‘죽음/죽임’의 당사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는 사건의 기억. 체험적 주체로서 1인칭, 그 곁을 지키는 2인칭, 장면을 증언하거나 전승할 매개자로서 3인칭 모두의 부재. 여기에서 타자의 체험, 타자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증언될 수 없으므로 존재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다. 사실이 ‘무(無)’가 되는, ‘있음’이 드러날 수 없음으로 인해 존재 자체가 기각되는 상태. 망각의 대상과 주체 모두가 삭제되었으므로 망각의 조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인식론적 불가지의 지대,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있지는 않은’ 존재.
인용된 장면은 ‘죽은 자’의 시점이라는 점에서 어떤 형태의 ‘기억의 정치’도, 정확한 문학적 묘사도 무력해지는 현장이다. 지금까지 줄곧 소문은 무성하지만, 믿을 수 있는 공식적 기록이 부재하며, 트럭에 실려 간 사람들 중에 아무도 살아온 자가 없으므로 그 장면을 증언할 수 없는 산 속의 시체더미. 여기에서 어떤 서사가 가능한가. 어떤 재현이 가능한가. 이 장면의 본질은 ‘보여주기’(showing)가 아니라 ‘장면 스스로 말하기’(telling)라는 사실에 있다. ‘나’가 말하는 이 순간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누구도 증언할 수 없었던 순간이라는 점에서 ‘다시 나타남’(재-현)이 아니다. 주검은 말할 수 있는 ‘몸뚱이-입’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나’를 문장의 인격적 발화자이자 1인칭 주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목소리’라고 말하자. 이 순간을 ‘실재’가 스스로 말하고 자기를 현시하는 방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전율감이 느껴질 독백 중 하나가 될 이 목소리는, 근 수년간 한국소설에서 눈에 띄는 현상이었던 묵시록 소설의 좀비나 ‘산 주검’(the undead)이 아니다. 이 목소리의 출현 시점은 미래의 어떤 가상 시점이 아니다. 이 목소리는 명백히 방금까지 ‘사람이었던’ 것이며, 역사의 ‘실재’를 구성했던 존재라는 점에서 ‘낯선 것’(the uncanny)이라고 부를 수 없다. 목소리의 발화처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이 장면의 전율은 확인되지 않은 모종의 것이 환기하는 (철학적) ‘불안’과도 다르다. 다만 이 목소리는 절대적인 고립 속에 내던져져 있다. 생존자도 목격자도 증언자도, 그러므로 전승도 기억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못한 이 목소리는, 복원도 재현도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한 목소리는 어떻게 왜 ‘지금’ 나타난 것일까.
어떻게 말해도 설명에 잉여가 남을 수밖에 없는 이 목소리를 차라리 ‘시적 발화’라고 말하는 것은 어떨까.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시적 발화의 내밀한 신비 중 하나는 작가가 문장의 ‘나’를 ‘실시간으로’ 겪는다는 체험의 ‘직접성’ ‘현사실성’이다. 이 장면은 ‘소년의 목소리’가 작가의 모종의 정신 영역에 ‘깃들고’, 그것이 문장의 ‘나’로 (재현이 아니라) ‘나타난’ 것이다. 어디론가 실려가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않은 시체더미의 세계, 죽음을 체험한 주체와 목격자·증언자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그 상황을 작가는 문장의 1인칭 주어가 되어 ‘겪는다’. 불가능한 정신의 지점으로 넘어가는 세계의 어떤 국경에는 ‘신비적’ 도약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신비체험’은 신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건 정신의 기투는 전쟁터에만 있지 않다. 매우 예민한 독자라면 이 체험이 작가가 쓴 ‘나’를 통해 ‘소년이 온’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 장면에 한정해서 보자면 『소년이 온다』의 가장 놀라운 성취 중 하나는 소설의 영역에서 지극히 내밀하고 낯선 시적 영역을 개방했다는 사실에도 있다. 소설가 한강에 시인 한강이 겹치는 이 영역에서, 작가는 소설 속 ‘나’와 ‘너’뿐 아니라 작가와 등장인물, 주체와 타자, 삶과 죽음, 사실과 허구, 역사와 이야기,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를 무화하면서, 증언할 수 없는 장면이 스스로 말하는 지점을 드러낸다. 이러한 시적 체험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불가능한 것을 말하는’ ‘기각되고 망각된 것이 스스로 발화하는’ 문학적 전율과 조우하게 된다. 이 전율이야말로 믿을 수 있는 기록 부재로 인해 미궁에 빠진 세월호 시대의 문학에 이 작품이 주는 낯설지만 깊은 상동성을 지닌 ‘시적 암시’가 아닐까.
더이상 죽지 않는 것: 메시아적 기억에 관하여
망각의 조건으로서 기억 자체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실의 불가지론적 영역, 더이상 돌파될 수 없는 문학적 ‘사실주의’의 한계선이자, 우리 시대 정치 부조리와 파탄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세월호 선체 내부로 침투하려는 다음과 같은 대담하고도 위태로운 시적 시도는 그래서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일종의 ‘시적 빙의’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시적 체험의 현재성, 시인이 몸 전체로 겪는 ‘시간의 현재성’ ‘존재의 포개짐’과 깊은 관련이 있다.
4. 16. 11:18-
아니요……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이제 시작입니다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아니요…… 죽임이 나타났습니다 사선 뒤의 사선이 나타났습니다
뉴스가 꺼지고,
카톡이 안되는 시간입니다
스마트폰이 숨 거둔 시간입니다
기다려라 기다려나 봐라 기다려버려라, 없어진
우리는 천천히 오그라듭니다
고통이 너무 많이 천천히, 천천히 옵니다
우리는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죽임이 옵니다
우리는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죽임이 만집니다
우리는 천천히, 천천히 죽임이 알아봅니다
우리는 다급히…… 죽음을 모릅니다
헤어지지 않습니다, 버려졌으니까 네 손과 내 손을
묶습니다 정말 없어질지도 몰라, 입 맞춥니다
젖은 몸을 안습니다 젖었으니까 안습니다 웁니다
그칩니다 웁니다 어둡습니다
무섭습니다
미끄러지고 뒹굴고 떨어지고 부딪히고 처박힙니다
떱니다
찢어지고 흘립니다 움켜쥐고 끊어지고 긁습니다
부러집니다 꺾입니다 그리고……
어둡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숨을 안 쉽니다
우리는 너무 자꾸 피에 젖습니다
모면하고 모면하고 모면합니다 실낱같이
가혹해집니다 희미하게 희미하게, 살아집니다
고통이 너무 많이 번개처럼 옵니다
고통이 너무 많이 번개처럼 웁니다
살고 싶어요를……죽고 싶어요를 눌러 죽이는 시간입니다
아픕니다 아팠습니다 아팠던 것 같습니다
아프고 있습니다
끝났습니까 끝났습니다 끝났습니까 끝났습니까……
4. 17-
아니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끝없는 끝이 왔습니다 죽임 뒤의 큰 죽임이 왔습니다
아니요…… 끝나고 싶습니다 뭉개지고 부서지고 흩날리고 싶습니다
다른 것이 돼버리고 있습니다
흐르지 않는 이 시간의 급소와 통점은 무엇입니까
숨결을 갈가리 뜯어먹는 이 캄캄한 짐승의 엄니는 무엇입니까
어느 하느님의 적들이 보냈습니까
어느 사랑의 원수들이 길길이 풀어놓았습니까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이것은 어떻게 왔습니까
이것이 왔는데, 왜 아무도 오지 않습니까
내가 왜 이것에게, 있습니까 나는
칼을 숨 쉬었습니다 나는, 몸이 벌렸습니다 나는
물에 끓고 있습니다 암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암전 뒤의 암전은 무엇입니까
암전 뒤의 암전 뒤의 이 암전들은 또 무엇입니까
(…)
4. 18-
아니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아니요…… 몸이라는 헛것을, 헛것을 빼앗겼을 뿐입니다
우리는 왜 이유가 없습니까
이유란 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우리 몸에서 쫓겨났습니까 터져나왔습니까
봄꽃이 봄에 피는 것 같은 대답은 어디 있습니까
가을에 가을 잎이 지는 것 같은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이 외롭고 무서운 삶은 무엇입니까 죽었는데,
우리는 왜 말을 합니까
난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날 닮은 이,
조용한 아이는 누굽니까 손톱이 빠졌습니다
친구들도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과 똑같이 생긴
이 아이들은 누굽니까 손가락이 부러졌습니다
말을 안합니다 엄마, 아빠, 나는 누구세요?
우리는 도대체 누구세요?
죽었는데, 우리는 왜 자꾸 말을 합니까?
이, 이상한 형체를 보아주세요
이, 불가능한 몸을 만져주세요
타오르는 진짜들을 느껴주세요
우리는 더이상 죽지 않는 것이고 말았습니다
고통을 모르는 고통입니다
오직 삶이라는 것만을 아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나타날 수 없는 것이 돼버렸습니다
—이영광 「수학여행 다녀올게요—유령6」 부분(『현대시학』 2014년 11월호)
4월 16일 세월호 선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17일, 18일 선실에는 어떤 일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는가. 여전히 지금 이 시각까지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존재의 추이를 산 자인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유일한 길은 시적 화자 ‘우리-나’를 매개로 작가가 그 시각의 선체로 진입하는 길뿐이다. 이 진입의 순간 시적 화자 ‘우리-나’에 깃드는 것은 작가의 ‘정신’만이 아니다. 깃드는 것은 그 시각의 존재들이다. 죽음에 임박한, 죽음에 먹히는, 그리하여 “다른 것이 되”고 “몸이라는 헛것을” 빼앗긴 존재들과의 접선은 과거와 현재, 작가와 시적 화자, 주체와 대상, 사실과 허구,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 경계를 지운다. 이런 문학적 도약은 일반인에게는 낯선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시인들이 시도하거나 시도한다고 넘어갈 수 있는 경계라고도 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의 역사에서 이러한 시도는 강력한 시적 정신들이 아주 드물지 않게 반복적으로 감행해온 모험이기도 하다.
어떤 착란 상태에 자기를 내던짐으로써 ‘사실’의 영역을 한번에 뛰어넘어 ‘실재’의 영토와 조우하는 이러한 위태로운 시도는 기억의 타자화, 사실의 ‘객관화’, 접선하는 대상과의 ‘거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존재와 ‘하나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난 적 없는 존재, 우리가 가보지 않은 영토,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은 시간 이후의 시간과 만나는 순간이 이런 시적 체험에 의해 극히 드물게 가능해진다. 여기에서 기억은 전통적 서정의 영토와는 달리 ‘회고’되거나 ‘회상’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기억은 활성화되어 있으므로 기억은 ‘현재형’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회고적 시간으로서의 과거를 통해서는 이 목소리와 조우할 수 없다. 이 선체 내부로 진입할 수 없다. 여러개의 시간이 하나로 만날 수 있는 시적 비의가 그래서 가능하다. 시를 쓰는 이는 시인이고 엄밀히 말해 기억은 시인의 기억처럼 보이지만, 시의 내부 논리에서 기억의 주체는 시 바깥에서 생활하는 자로서의 시인이 아니다. 시인은 시적 화자를 매개로 선체의 시각을 현재 시간으로 만난다. 이 시적 화자는 4월 16일 선체 내부에 있던 존재인 동시에 ‘지금 여기’ 시의 시간에 존재하는 ‘우리-나’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빙의’ ‘존재 접선’에서 기억은 현재의 ‘사실’이 된다. 적어도 시의 내부에서, 시인에게는 그렇다. 시적 발화는 그래서 ‘보여주기’나 ‘전언’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된다. 이 존재는 ‘대상’이 아니다. ‘나-우리-시인’이 함께 공동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대상에 ‘대한’ 지각(understanding)이라고 해서도 안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 이것은 존재‘의’ 발화다. 존재가 (스스로) 말한다.
벤야민(W. Benjamin)이 역사의 메시아가 열고 들어오는 ‘좁은 문’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이른바 철학자들이 오해하거나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런 시적 순간을 살펴보라. 벤야민에게 역사의 메시아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 시간을 뒤흔드는 ‘살아 있는 시간’ ‘활성화된 기억’이었다. 이러한 기억에서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 연속적·객관적 시간)적이지 않고 카이로스(kairos, 순간적·주관적 시간)적이다. 그가 메시아적 시간을 기억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야기하면서도, ‘지금 여기’( Jetztzeit)라는 수수께끼 현재를 통해 강조하려고 했던 것 역시 이런 시적 신비의 차원에서 묵상되어야 한다. 벤야민의 ‘메시아적 좁은 문’이 ‘기억’ ‘지금 여기’(현재)와 공존할뿐더러 나아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미래)까지 담보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시적 순간과 관련이 있다. 이런 시적 기억에서 ‘기억’은 한 시대가 비참과 굴종과 부정의(不正義)와 노예의 시간에 예속되어 있음을 현재 시간으로 길어올려 예속된 정신을 각성하고 활성화한다. 이 각성과 활성화는 다른 방식으로 말해, 비극적 역사와 굴종의 노예 상황에 의해 억압되고 망각된 것,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것, 지워진 것, “죽임” 당한 것, “나타날 수 없는 것”이 “아니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라고 항변하며 스스로 제 존재를 ‘증언’하는 ‘회귀’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이 기억은 우리에게 현행 세계시간이 여전히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속에 있으며, 비극의 시간과 굴종의 기억을 ‘도래할(도래해야 할)’ 해방적 시간의 한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하게 한다. 아직 메시아의 시간은 오지 않았으므로, 그 시간은 곧, 반드시 임재(臨在)해야만 한다! 그 메시아의 시간이란 상투화된 제도종교에서 이미지화한 천국의 도래가 아니라, 히브리 신앙 속의 예언자적 전승의 시간, 즉 현행 세계를 뒤덮고 있는 죄의 시간이 중단되는 시간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메시아의 시간은 천국을 임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 폭력’을 임재하게 한다. 이 메시아적 폭력은 현행 세계시간에 내재한 죄의 질서, ‘법권력적 폭력’을 중지시킴으로써 억압된 존재를 자유롭게 하고, 지워진 존재를 나타나게 하는 ‘해방적’ 시간과 다른 게 아니다.
세월호의 선체로 진입하여 그 선체에 있던 주체들이 ‘지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이런 시는 세월호에 ‘대한’ 시가 아니라 세월호‘의’ 시다. 여기에서 ‘세월호’는 사유와 문장의 목적어가 아니라 말하는 주어이며 사유하는 존재 그 자체다. 여기에서 세월호는 기억되지만 회상되지 않으며, 과거는 과거에 죽은 것으로서 갇혀 있지 않고, 현재 속에 살아 있으며, 이 현재는 미래 시간을 담지(擔持)한다. 시의 기억은 현재 시간 속에서 특수성을 넘어 역사의 보편적 기억, 문학적 진실의 차원에서 ‘사실’이 된다. 이 ‘(문학적) 사실’은 보편성을 담지함으로써 미래의 약속을 함축하고 있다.
이영광(李永光)의 시적 목소리 역시 한강 소설의 ‘시적 발화’가 그러하듯이, 종래 문학의 ‘사실주의’라는 기율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지금까지 알려진 시의 영토에서 더 멀고 낯설고 깊숙한 정신의 사막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만난’ 목소리다. 이런 시적 이행에 “아니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목소리는 난파선 속 익명의 개인들이 처한 절대적 어둠에서 건져져 보편적인 역사의 바다로 옮겨진다. 이 목소리는 ‘죽임’에 대한 존재의 저항을 통해 “암전 뒤의 암전 뒤의 이 암전들” 뒤에도, “죽임”과 죽임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시간이 존재함을 증언한다. “더이상 죽지 않는 것” “오직 삶이라는 것만을 아는 것” “불가능한 몸”은 시의 현재화된 기억을 통해, 현행 세계시간이 죄의 시간이라는 것을 고지하는 동시에 죄의 시간이 중단되어야 함을 알린다. 이 고지는 과거를 회고하게 하지 않는다. 이 목소리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도래할(도래해야 할) 역사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런 방식으로 위태로운 시적 기억은 하나의 목소리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아 있는 ‘지금 여기’에 임재하게 한다. “불가능한 몸”은 우리 시대에 ‘불가능한 것’, 억압과 굴종과 노예적 금기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한다. 이 요구는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상한 형체”를 하고 있지만 명확한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오직 삶이라는 것만을 아는 것”은 우리 시대에 죽음의 논리의 중단, 죽임의 질서의 종식을 요구한다. “오직 삶이라는 것만을”, 그러한 생명의 질서만을 요구한다. 목소리의 방향은 바로 이 요구의 방향이다.
한강의 경우에서나 이영광의 경우에서나 ‘시적 목소리’들은 역사의 악몽을 동반하는 ‘현재화된 기억’이다. 주의할 것은 이 ‘기억’은 난파당한 세월호 시대의 ‘생존자’인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고 했던 프로이트(S. Freud)의 직관처럼, 시대의 죄, 시대의 비명은 공식적 기록이 삭제해도 반드시 돌아온다. 소년이 오듯이, 아무것도 끝나지 않듯이.
우리는 이 목소리가 역사의 메시아, 문학의 메시아가 깃드는 ‘좁은 문’ 임을 알고 있다. ‘좁은 문’에 깃드는 메시아는 단지 ‘오는’ 게 아니라, 적그리스도(Anti-christ)를 극복하면서 온다. 기독교 성서의 여러 장면은 적그리스도를 극복하는 메시아의 방식이 ‘강한 것’이 지배하는 현행 세계질서를 폐지하고 중단시킴으로써 ‘약한 것’을 해방시키는 방식임을 암시하고 있다. 문학의 메시아, 시적인 것이 깃드는 ‘좁은 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의/시적인) 기억’은 현행 세계시간 속 ‘(공식적) 기록’을 이긴다. 이 기억 자체가 “더이상 죽지 않는 것” “불가능한 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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