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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내가 살아갈 시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21세기 오감도(烏瞰圖), 21세기 소년 탄생기(誕生記)」 등이 있음. renton13@daum.net
그의 작품을 문예지에서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새로웠다. 지면을 채운 세련된 언어가 ‘세련된 언어’에 그치지 않는 것이 늘 반갑고 신기했다. 그는 알 만한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알고 싶은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또한 그는 남을 속이면서 동시에 자기도 속는 그럴듯한 시에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현자처럼 깨달은 말을 하는 목소리와도 거리를 두고, 거꾸로 선 현자처럼 광기와 착란에만 기대어 목소리를 내는 일도 드물었다. 누군가는 종종 그의 시의 화려한 기술을 논했지만, 그런 말은 일부만 맞는 말이다. 나는 그 화려함이 소박한 열정이 빚어낸 것이고 평범한 삶의 터전에서 터져나왔다는 점까지 말해야 옳다고 본다. 그래서 그의 시는 화려하면서도 단단했다. 단단한 시를 쓰는 사람이기에 더욱 두서없이 물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첫 질문, 어쩌다가 시를 쓰게 되었나요?
정말 ‘어쩌다가’ 시를 쓰게 되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전혀 생각이 없었어요. 한마디로 그냥 관심이 없었죠. ‘남자는 이과(理科)지’라고 말하는 친구들 따라 고교시절을 보내고 공대에 갔어요. 정말 우연찮게 문학동아리에 들었는데, 물론 문학에 뜻을 품었던 건 전혀 아니었고 그냥 사람들이 좋아서였죠. 독서토론을 위해 난생처음 읽은 시집이 『노동의 새벽』(박노해, 1984)이었는데 그때 큰 감동을 받았어요. 거기에 너무 정직한 언어들이 있는 거예요. 줄글로 풀어놓으면 그냥 생생한 일기가 될 것 같은 정직한 언어들. 거기에 감응해서 시라는 장르의 매력을 알게 되었는데, 그 시집과의 만남이 약간은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시집을 읽으며 어렸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장면들을 이해하게 되었거든요. 유년시절에 서울 구로에 살았어요. 말하자면 노동자들이 모여사는 상습침수구역이었는데, 「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국경꽃집』, 2007)에도 나와요. 대문이 파란색이었고, 아버지는 부재중이었고, 비가 오면 집에 물이 들어오고…… 그 동네가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집들이 있고 콘크리트 담장도 아닌 철망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었어요. 아무튼 그랬던 곳인데, 장마가 오면 동네 사람들 다 학교 교실로 가는 거예요. 가서 일주일씩 살고, 학교에서는 수업을 해야 하는 날인데 비가 안 그치니 수업을 못하고…… 어린 저는 그런 게 내심 재미있기도 했고요.
서울 외곽에 살다가 아버지가 외국에 가시면서 외할머니집에 들어온 거였는데, 당시에는 그 집에 세든 누나들이 무얼 하는지 몰랐죠. 마당에서 그 누나들과 놀고 그랬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스무살도 채 안된 그 누나들이 다 공장에 다녔던 것 같아요. 동네 어머니들마저 다 일을 하러 간 골목에는, 학교를 파하고 뛰어노는 아이들 사이에 직업 없이 어슬렁거리는 친구의 아버지가 있었는데 한쪽 손이 없었어요. 프레스에 찍힌 건지 어쩐 건지…… 그런데 그 신체의 불구성이 왠지 어린 내게는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어요. 마치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공터에 가지가 부러진 채 서 있던 나무처럼 말이에요. 늘 보는 당연한 모습이었거든요. 제 시 「야행」(『내가 살아갈 사람』)에 나오는 분이 그분인데, 『노동의 새벽』을 읽으면서 그런 오랜 기억의 조각들이 성인이 된 현재로 다시 소환되어 당시의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인지 속에서 다시금 조립되고 이해되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런 경험 때문에 시라는 것이 제게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그러고부터는 계속 읽게 되고, 읽다 보니 쓰게 된 것이죠.
제 몸에 쌓여 있던 기억의 더미를 발견하고 그 속에서 발산하지 못한 감정의 꾸러미를 풀거나 고여 있던 욕망과 꿈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작업으로서의 시쓰기. 이같은 시쓰기가 이루어질 때 우리 삶의 가장 어두웠던 부분은 환한 빛에 물든 얼굴을 드러낸다. 유년을 말하는 시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표정에서 저 자신을 좀더 충만하게 바라보게 하는 이미지와 제 몸을 긁어놓고 간 ‘낙서’들을 맥락화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시인의 얼굴을 보았다. 이상하고 신기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시 속에 이야기를 풀어내는 목소리는 과거의 김중일과 현재의 김중일 어느 쪽으로도 소급되지 않았을 테니까. 또한 정체를 뚜렷이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어느새 간접화법으로 들어앉아 시인이 연루된 사회와 문화의 맥락을 시 속에 새겨넣었을 테니까.
어릴 때 옆집의 광필이는 제 아버지 직업을 야간여행자라 적었다. 지도 한장 달랑 들고 구멍 뚫린 쪽배로 난바다를 건너온 난민이라 했다. 백지 같은 백주 위로 금세 낙서가 가득했다. 검은 낙서로 가득 차 어둑해진 해거름이면 나뭇잎을 짊어진 개미들이 일렬로 골목을 횡단했고, 광필이 아버지는 야행을 떠나며 개미들이 그어놓은 절취선을 따라 일력처럼 부욱 한장의 하루를 찢어갔다. 학교 화단에 꽂아놓은 모종삽처럼, 주머니에 오른손을 꽂고 있었다. 별을 캐는 사람이라 했다. 한번은 절벽에 핀 초질량의 별을 따다 되레 오른손이 그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었다 했다. 대신 별빛 번쩍이는 공중을 깎아 의수처럼 매달고 다녔다. 광필이의 눈이 멀까봐 늘 주머니에 오른손을 찌르고 다녔다. 주머니 밖으로 청어 지느러미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야행」 부분)
보통 시의 이미지들은 세계와 우리에 대해 말하기를 그치지 않는데, 김중일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 역시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말한다. 국가라는 사회적 안전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난민과도 같은 삶과 제 몸보다 훨씬 큰 짐을 짊어진 채 살아야 했던 일개미 같은 삶을, 시는 설명도 묘사도 아닌 방식으로 우리 눈앞에 들이민다. 그런데 거기에는 불우한 의식만이 살아 있지 않다. 행복을 앎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불우함조차 마법 같은 이야기의 소재로 활용할 줄 아는 슬기로움도 숨어 있다. 그러므로 저 시의 언어들은 원한에 사로잡힌 현실에 대한 묘사도 아니고 실상을 모르는 자가 지어낸 허무맹랑한 꿈도 아니다. 그것을 굳이 이름 붙이자면, 미래로부터 맥락을 부여받기를 기다리던,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현실의 조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기억을 시화(詩化)하는 과정에서 시인이 맞닥뜨린 건 시의 신비였을 것이다. 언어가 시의 형식을 빌리자 기억이 되살아나는 신비, 삶이 시로 적히자 그것이 다시 삶을 재구성할 생산적인 기억의 마디가 되는 신비. 시인이 시를 ‘각인’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의 삶에 침투하는 신비로운 시의 힘을 생각했다.
저에게 시는 일기 같은 면이 있어요. 삶에 대한, 내면에 대한 기록 같은 건데, 삶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내면도 고여 있지 않아요. 내면이란 게 끊임없이 흘러가고 사라지거든요. 제게 시를 쓴다는 건 한때 내가 가진 적 있는 내면이 증발하기 전에 시로 기록해놓는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제가 쓴 많은 시편들이 이른바 환상적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몽환적인 이야기처럼 보일 텐데, 그 시들의 촉발은 거의 다 현실 속의 제게 벌어진 일에 대한 나름의 기록으로서 씌어진 거예요. 독자는 독자 나름대로 시를 읽고, 저는 저대로 마치 타임캡슐 같은 텍스트 속에 숨겨둔 당시 제 내면의 풍경을 지금도 꺼내 보는 것이에요. 아마 시로 붙잡아두지 않았으면, 저도 당시의 제가 그런 생각과 감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잊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한때 제가 가진 소중한 기억들이 영원히 유실되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제가 쓴 시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저를 만족시켜야 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읽히느냐 나쁘게 읽히느냐 하는 건 차후의 이야기였어요. 당연히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길 바라죠. 시쓰기를 계속하면서 점점 그렇게 많이 노력하는 편이고. 다만 누군가는 ‘문학은 통찰이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저는 통찰까지는 할 능력이 안되는 걸 잘 알고, 대신 최근엔 공동체에 대해 그리고 그 일원인 저 자신에 대해 충실히 기록해놓는 작업을 하고 있죠. 시를 통한 기록은 소설과 다르고 더구나 역사서나 보도매체 같은 기록과 그 형식이 같을 수는 없잖아요. 시를 통한 기록은 ‘각인’ 같은 효과가 있다고 봐요. 혹은 생긴 흉터를 찰나에 드러내는 일이죠. 항상 어떤 현안을 담고자 할 때 그걸 염두하고 써요. 미적 집적물인 시의 정치적 기능을 말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시를 통한 각인의 효과 같은 걸 정치적 기능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것이 여러 현안을 담으면서도 시적인 것과 아닌 것의 차이가 아닐까 싶고……
‘각인(刻印)’의 사전적 의미는 ‘깊이 새겨져 뚜렷하게 기억되다’이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변화의 추이’까지 따라가보며 체험하고 관찰할 때야 그것이 우리의 감관에 ‘깊이 새겨질’ 조건이 형성된다. ‘뚜렷하게 기억’하는 일 역시 기억을 의미화하여 불변할 것만 같았던 기억과 나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고보면 글쓰기가 마련해주는 ‘깊이’란 이렇듯 세계와 나의 변화 가능성을 확인하는 경로가 아닐까. 무언가를 붙들고 글쓰는 일이 습관적인 관념의 고리를 끊는 일이라면, 이때 가장 드센 관념에는 ‘불변의 사실’이라 불리는 것들이 자리할 것만 같다. ‘불변의 사실’을 바꾸는 일만큼이나 정치적인 일이 또 있을까.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자주 시의 바깥으로 나아가게 된다. 김중일은 더 멀리 나아가고 싶은 것인지 자신이 ‘시인’이라고 불리는 일에도 상당히 거리를 둔다. 『내가 살아갈 사람』에 실린 ‘시인의 말’에는 ‘시인’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창작자’가 등장한다. “잊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창작자로 살게 해달라고 내게 기도합니다.”
저는 등단했을 때부터 ‘시인’이라는 말보다 ‘창작자’라는 말이 좋더라고요. 시인이라는 호칭이 요즘 들어 왠지 희화되어 사용되는 것도 같고…… 아무튼 저는 창작자라는 말이 더 취향에 맞아요. ‘노동자’의 느낌도 있고, 뭔가 담백하고 명징한 호칭 같고. 사실 시인이라는 호칭은 무엇이든 쉽게 묻는 백색의 옷 같은 것인데, 내가 과연 그 시인이라는 옷에 치열한 흔적을 묻힐 수 있을까 하는 자의식도 있는 게 사실이고요. 여전히 시인이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는 분들이 있을 텐데, 그게 저는 아닌 거 같아요. 시집이 나오고 기회가 주어져 이렇게 인터뷰를 하든 어떤 자리에 서게 될 때, 진행상의 편의상 잠깐 시인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정도예요.
그러나 나에게는 시인의 저 대답이 곧이곧대로 들리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쓰는 시에는 이런 종류의 뜨거움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지상에 오르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두송이 꽃을 걸어야 하는 것
사실 너는 태어난 후 매 순간
떨어지는 중이다 찢긴 낙하산 같은
그림자를 지상이란 허공에 질질 끌며
콘크리트처럼 깔린 구름 위로
떨어지는 중이다 먼저 하늘로 떨어진
새들의 피가 석양의 창 속에 오늘도 가득하다
하늘로 떨어지거나 지상에 오르거나
공중에서 한장 한장 떼어지는 꽃잎처럼
바람 속의 귀가, 네 얼굴에 피고 지고 흩날린다
한장의 꽃잎처럼 침대가 놓인 집으로
바람 속의 귀가,
찬 밤마다 인중에 고이는 너의 고독
철탑을 타고 너는 끝까지 전송된다
(「타인의 투쟁」 부분)
자신의 삶을 짓밟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 함께 살자는 말을 전하기 위해 공중에 올라간 사람들과, 찬바람 속에서 붉게 얼어붙은 그들의 두 귀를 보며, 시인의 언어가 그들의 고난과 불안과 울분을 “두송이 꽃”으로 바꿔놓는 순간, 세상에는 고독이 고인 인중을 지닌 채 귀가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흐트러놓는 열기가 발생한다. 그 열기에 곁을 내준 자가 저 허공에서 싸우는 사람을 ‘타인’이라고 부르는 거리감을 유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3부의 시편들은 시가 ‘사회적 양심’을 발휘하며 아직도 ‘이웃’을 위해 뜨거울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중이다.
‘시인의 말’에는 또 하나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작품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게 표출한 표현으로도 읽히는 이 구절, “농담 같은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세상에 끝까지 농담으로 남을 농담을 건네고 싶었습니다.” 시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자신을 시적으로 고양된 상태로 이끄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시에 다가가기 위해 살짝 흥분된 상태, 거기에 김중일은 ‘농담’을 슬쩍 끼워놓는 개성을 보여준다. 시와 농담 사이의 묘한 거리감. 그가 말하는 ‘농담’이란, 감정의 열기에서 빠져나와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발휘할 어떤 지성을 작동시킬 수 있는 여유공간 같은 것일까.
문학이나 시의 위상이 실추되었다는 말에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에요. 문학이나 시가 어떤 위상을 가지려고 할 때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저 시류나 유행이나 이런 것들과 무관하게 꾸준하게 기억하고,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기록하는 창작자가 되려고 해요. 그래서 글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면 좋겠어요. 어떤 깊은 슬픔을 담은 시는, 나 대신 슬펐던 그곳 그 시간에 남아, 나보다 더 오래 슬퍼해주고 기억해줄 수 있는 나의 가엾은 분신 같아요.
‘농담’은 복잡한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주위에 황당한 일이 너무 많잖아요. 흔히들 말하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작금의 현실 말이에요. 가령, 지구 저편은 오랫동안 내전중인데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아예 어린아이들을 표적으로 폭격을 하잖아요. 그게 그 아이의 아버지들이자 적군인 성인 남자들의 전투력을 극소화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어서 그랬다는 건데. 이런 일이 버젓이 그것도 지속적으로 벌어진다고, 우주선을 타고 온 지구 밖의 이들에게 말한다면 농담하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농담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농담은 무얼까. 슬픔을 이겨내려고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그런 위로의 농담은 무얼까. 그걸 써봐야겠다 생각해보았던 것이고…… 그렇게 시를 쓴다는 게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와 유사한 면이 없지 않는데, 참혹한 농담 같은 현실에 너무 매몰되면 무거워지기만 하는 결과를 만들기 쉽잖아요. 기록을 위한 기록이 되기도 쉽고요. 저의 시적 농담이 어느정도 몽상이나 유희에 기반하고, 거기에는 어찌되었든 저의 미적 지향 같은 게 녹아들죠. 농담처럼 안타까운 현실과 제가 창작한 순수한 농담 혹은 유희를 잘 균형 잡아주며 ‘외줄’ 저 너머로 한번 건너보려는 것. 그게 제 시의 도전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농담’과 ‘유희’와 ‘몽상’은 일종의 시의 ‘형식’에 대해 말한 셈인데, 형식과 스타일에 관해서라면 김중일은 분명한 김중일표(標)를 지녔다고 본다. 그의 시에 편히 다가가기 위해서는 농담으로서의 이야기, 유희로서의 이야기, 몽상으로서의 이야기를 시 속에서 읽으려 할 것이 아니라 농담과 유희와 몽상 속에 이야기를 용해(溶解)하는 방식으로서의 시쓰기를 알아채야 한다.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는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시의 기술이란 반복해서 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면서, “하나하나의 시편은 창조의 순간에 소멸하는 ‘기술’에 의해서 창조되는 유일한 대상”이라는 의미다(『활과 리라』).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 이것은 시를 낭만적으로 신화화하는 언급에 지나지는 않을까.
첫 시집은 많은 ‘첫 시집’이 그렇듯이 어쩔 수 없이 쓸 수밖에 없는 것들을 썼어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시의 형식이 있었는데, 두번째 시집의 경우에는 시라는 형식에 대해 더 고민했죠. 기억을 소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나의 스타일이나 언어적 형식을 다지는 데 최대한 집중했어요. 쉽게 말해 쓰고 싶은 대로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썼어요. 과도기적인 온갖 유희와 몽상을 망라했었죠. 물론 「구름의 곁」이나 「늙은 역사와의 인터뷰」처럼 이후 시들의 방향성을 은연중에 보인 다른 시들도 있었지만요. 세번째 시집에서는 내면 밖의 어떤 확장을 생각했는데, 그것과 관련한 결과물이 이번 시집의 3부라고 보면 돼요. 그와 동시에 거대한 공동체로 나가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문은 결국 한 개인인 나 자신의 기원과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열려 있지 않나, 하는 인식으로 쓴 게 2부의 시들이에요. 1부의 시들은 같은 시간을 건너고 있는 타자인 ‘사람’들과의 밀접하고 내밀한 ‘지독한’ 만남, 사랑, 이별에 대해서 쓴 것이고요. 요컨대 1부의 시들이 2부를 거쳐 3부의 시들로 확장해가는 모양새를 그려봤어요. 그러니까 첫 시집은 내가 살 수 있는 집터를 골라 본능대로 무턱대고 집을 지어본 거고, 두번째 시집에서는 그 집안을 마음껏 꾸며봤죠. 세번째 시집에서 고민한 건 이제 이 정든 집에서 나가야 하는가였어요. 한발 정도는 집밖으로 내디딘 것도 같은데……
시를 쓰고 나서 내가 공허해지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 같은 게 있어요. 관성적으로 쓰진 말자. 저같이 이미지가 승한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유혹이 있죠. 딱히 쓸 이야기가 없는데도 이미지를 버무려서 그럴듯한 모호함을 던져놓는 건데…… 제 시들에는 대부분 제 개인 사연이 숨어 있어요. 하다못해 등장인물의 이름에라도 그런 장치가 있고…… 저만 아는 저에 대한 디테일이니 아마도 독자들은 찾기 힘들죠. 요컨대 제가 쓴 한편의 시가 있다면, 일단 그 시는 텍스트로서 독자에게 자의적으로 읽힐 수 있어요. 동시에 순전히 저 자신을 위한 기록물이기도 해요. 마치 저만 아는 집 뒤란 한모퉁이에 제 이름을 꾹꾹 눌러 적어놓는 것처럼. 하나만 밝히면, 「연인」이란 시는 ‘정’과 ‘철’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그려져 있는데, 그렇게 읽혔으면 해요. 다만 ‘정철’은 제 아버지 함자이고, 우리 가족이 처음 갔던 국외여행이 ‘상하이’였고, 아버지가 투병 중에 함께 많이 걸었던 곳이 집 근처 ‘율동공원’이었죠. 그리고 “오랜 노동으로 기운 어깨뼈” “깊은 인중” 등은 제 아버지에 대한 메타포죠. 저는 종종 내용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텍스트 속에 그런 것들을 내장시키고 활용해요. 순전히 저를 위해서요.
자신이 해온 작업들을 집에 관련한 산뜻한 비유를 통해 들려주니 단번에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집을 다 짓고 살 만하니 다시 그 집을 떠나야 한다니, 시인의 존재형식이란 참 불편하고 엉뚱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집처럼 편한 곳에 마음과 몸을 머무르게 하고 싶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불편하고 엉뚱하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말에 귀속되지 않는 특별한 삶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려는 움직임과 밖으로 향하는 긴장을 잃은 자를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겸연쩍은 데가 있을 것이고…… 그런데 김중일이 나아가면서 만나는 단어들이 좀 독특하다. 이번 시집만 하더라도 ‘별’과 ‘바람’과 ‘구름’과 ‘꽃’이라는 낱말이 시집 곳곳에 놓여 있다.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시의 집’에 거주한 말들이 아닌가.
일단은 ‘별’이나 ‘구름’ ‘바람’ 이런 것들이 원형적인 이미지이고 이미 무수히 사용된 시어이기 때문에 시 속으로 가져올 때 위험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시에 쓰기에는 사어(死語)에 가까운 말들이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저는 그 시어들에 조금은 더 의욕을 가졌고 집중했어요. 재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잘 버무려 다른 맛이 나도록 요리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굳이 생경한 단어를 찾는다든가 하지는 않죠. 제 시에 의외로 외래어도 별로 없어요. 한번은 일부러 시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를 한글프로그램 기능을 이용해 일일이 세본 적도 있어요. 역시나 ‘별’ ‘구름’ ‘바람’과 함께 ‘새’ ‘꽃’ 등이 압도적으로 많더라고요.
맞는 말이다. ‘시’에서 중요한 건 ‘단어’가 아니라 ‘시’이니까. 시로 쓸 수 있는 단어와 시로 쓸 수 없는 단어는 따로 있지 않다.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서 몇가지 제한적 의미에 갇힌 단어를 시인은 다시 자유롭게 놓아준다. 시의 단어들은 시인의 요리를 통해 잃었던 힘을 되찾아 상호 침투하는 능력을 보이며 느낌과 생각의 유연한 관계망을 형성한다. 서로를 밀고 당기는 단어들, 서로를 깨고 변화시키는 느낌과 생각들. 평소 김중일 시의 매력 또한 이 역동적인 말의 활력에서 비롯된 면이 많다고 여겨왔다. 이번 시집에는 이 역동성을 배가하는 형식이 또 하나 있다. 오랜만에 발견한 활달한 연시(戀詩)였다. 사랑의 축복과 사랑의 저주가 동등하게 새겨진 시들이었다. 사랑을 통해서조차 단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관념적인 연시가 아니라, 격정적인 감각의 장난스러운 활기와 폭력적으로까지 보일 만큼의 욕망의 끈질김을 그려내는 연시여서 더욱 좋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
이제야 고백건대 지난 계절 나는 지독히 사랑했던 제이의 얼굴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다. 몸을 내버린 마음의 투신이었고 제이는 무방비였다. 제이의 얼굴은 깊었고 나는 내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제이는 나를 이번 생으로부터 안전히 건지기 위해 평생 제 얼굴에 그물을 드리웠다. 그늘을 드리웠다. 나를 보며 울고 웃고, 웃고 우는 순간 얼굴 위로 팽팽히 그물이 끌어당겨졌다. 무수한 표정의 물고기들이 그물에 갇혀 얼굴 속으로 자맥질했다. 벗어나지 못했다. 결코 제이는 나를 산 채로 얼굴 밖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다. 밤새 같이 울던 제이와 이별로 가던 날. 모래톱처럼 깎인 제이의 얼굴, 턱선 밖으로 파도의 주름에 떠밀린 죽은 물고기처럼 나는 쓸려나왔다. 이제, 제이의 얼굴 속에 내 물고기는 살지 않고 이제, 제이의 얼굴 위로 성긴 주름의 그물이 허물처럼 떠올랐다. (「제이와 함께 한 이야기」 부분)
사랑의 둘레를 회전하는 죽음과 불안의 그림자에 대해 정직하게 고백하는 시. 사랑은 자주 사랑에 빠진 자들의 관계를 강력한 비대칭의 형태로 만들어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남길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폭력성을 뻔히 알고도 몸을 맡기는 무모함 역시 사랑의 순간에 발생한다. 합리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격렬한 사랑의 열도가 곧 사랑의 중핵에 가까운 것일까. 그러나 김중일이 쓰는 연시의 무게중심은 감정의 열도를 전하는 데만 있지 않다. 김중일의 시에서는 뜨거운 사랑이 시간의 사슬에 사로잡혀 소멸되는 순간에 남겨진 냉정한 상황에 대한 인식 또한 중요하다. 뜨거운 사건에 참여했다 빠져나온 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텅 빈 공허함, 그리고 그것을 결코 덮어주지 않는 삶의 무자비함까지 다루는 시.
그러나 그 공허함을 다루는 시의 언어는 공허하지 않다. 순간의 극화(劇化)를 빚는 시가 하는 역할 중 하나는 상실에 대한 훈련을 제공하는 일이 아닐까. 시는 우리에게 획득하는 과정을 일러주기보다 온몸으로 상실하는 과정을 알려준다. 1부에 실린 연가(戀歌)에 이어, 2부에 실린 비가(悲歌)가 뒤엉켜 읽히는 건 우연일까. 1부와 2부를 쓰는 과정에서 그가 겪은 어떤 변화와 심정에 대해 묻고 싶었다.
세월호사건 이후 육친을 잃은 어떤 이의 고통에 대해서 상상해왔어요. 시로 쓰기도 했죠. 글쟁이로서나 그저 한명의 사람으로서 타인의 슬픔에 대해 내가 감각할 수 있는 고통의 양은 얼마나 될까? 그런 질문을 계속 했어요. 아마도 절반의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을 수 있어요. 이건 딱히 공감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은 저마다 태생부터 다르고 그 내면이 다르며, 개인의 고통은 저마다 자신의 생 속으로 이미 깊어져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인의 고통, 슬픔 등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일단 ‘사랑’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연가라고 표현하신 1부의 시들은 그런 맥락에서 사랑에 대한 시가 맞아요. 다만 개인 연애사를 시로 써놓은 건 아니고요. 물론 그런 시도 포함되어 있죠. 두세편 정도. 가족 아닌 누군가와 뼈와 살을 나누는 유일한 방법이 사랑이잖아요. 저마다 다른 삶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사랑을 통해 최대한 서로의 고통을 내 것으로 나누어 갖는 과정을 다룬 것이죠. 그런 사랑의 의지 또한 영원할 거라고는 경험상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이별과 상실에 대해서도 다뤘죠. 대략 그런 취지로 구성해본 게 1부의 시들이고요. 2부의 시들은 나의 기원과 나의 분신 같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죠. 1부와 2부의 시들은 분명 차이가 있지만, 1부의 시들이 궁극적으로 2부의 시로 옮아가기 위한 의지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거의 한몸처럼 뒤엉켜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세월호가 침몰하기 불과 이주 전에 저는 아버지를 저세상으로 보내드려야 했어요. 솔직히 무척 갑작스러웠는데, 그건 어쩌면 다가오던 죽음을 제가 애써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었을 수도 있어요. 아버지를 잃으며 저는 육친을 잃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일생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마음과 몸의 상태가 되었어요. 지금껏 상상에만 의지했던 다른 사람의 고통이 전에 없던 어마어마한 실제에 가까운 크기로 날 덮쳤죠. 3부에 실린 「꽃처럼 무거운 마음」은 그때 쓴 것이고요. 여러 불운이 겹치며 저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어요. 일생 먹고사는 문제로 가족과 많이 떨어져 살아야 했던 아버지인데, 그래서 몇배로 더 마음이 아팠죠. 세월호사건이 정말 아픈 건 유족들이 작별의 시간을 일방적으로 빼앗겼기 때문이에요. 그것도 예상치 못한 한순간에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속수무책 뺏기기에 작별의 시간은 너무나 절실한 것이죠. 계속 살아가야 할 사람에게는요. 세월호의 유족들은 작별하여 떠나보내지 못했고, 언제까지나 그 작별이라는 시간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건 평생의 형벌이에요. 모두 알다시피 죄 없는 피해자인데 벌을 받는 거죠.
문학만큼 사랑의 기적을 믿는 자리도 드물 것이다. 문인들은 직관적으로 안다. ‘내가 아닌 자’의 목소리가 ‘나’의 목소리와 서로 대립하고 때론 화합하고 또는 양립하는 순간에 작품이 씌어진다는 사실을. 타자의 언어와 충돌하지 않으면 시는 발생하지 않는다. 김중일 시인이 ‘사랑’을 말할 때, 나에게는 그의 말이 시가 가능한 조건에 관한 언급처럼 들렸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지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도를 하게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서 언급할 때나 세월호에 관해 말할 때 나는 그가 미세하게 자세를 바꾸거나 정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가 언급한 시 「꽃처럼 무거운 마음」의 구절을 빌리자면 기도란 “온몸이 통째로 마음이 되”는 경험에 가까울 것일 텐데, 나는 그의 시의 곳곳에서 기도하는 시인의 모습을 마주치곤 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의 고통이 덜어지길 기원하는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에 예민해지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비참한 삶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경이로움에 민감해지는 의식에 가깝다. 시인의 기도는 세상의 행복을 누구나의 것으로 만드는 마법을 실천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이후의 작업에 대해 물었다.
등단 무렵 노트 첫 페이지에 “자유롭게 그리고 첨예하게”라고 휘갈겨놓은 적이 있어요. 그 노트를 아직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그렇게 쓰는 게 대체 어떻게 쓰는 것이냐 자문하기도 했지만 당시 제 생각엔 무조건 그렇게 써야 제가 오래 시를 싫증 안 내고 잘 쓸 것 같았거든요. 지금도 같은 생각이에요. 다만 자유로우며 첨예한 시가 대체 무엇인지 나름대로 계속 찾아야 하고, 또 찾더라도 그걸 쓴다는 건 거의 대부분 실패를 감수해야 하죠. 이제 겨우 그것을 아는 정도예요. 전 시 속에서 틈만 나면 언어유희를 즐기는데, 최초의 이미지 하나를 낙하산처럼 메고 지구 밖에서 공중으로 훌쩍 뛰어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되죠. 자유낙하하는 제 온몸으로 엄청난 속도로 공중이 부딪쳐와요. 저는 그 바람의 결에 마음을 모두 내맡겨버려요. 제 시가 어디로 날아갈지 대부분의 경우 저도 몰라요. 단지 전 그 순간 내 생에 가닿고 싶은 곳, 손잡고 싶은 사람, 그때의 감정을 열렬하고 집요하게 기억하려 해요. 그러면 시는 공중을 통과하여 신기하게도 우연처럼 제가 가닿고 싶은 곳이나 만나고 싶은 사람 옆으로 저를 착륙시켜줘요. 성공한 경우가 그렇다는 거예요. 대부분 실패예요.
덧붙이면, 이미지가 너무 조밀하다는 말도 듣는데 앞으로는 조금만 더 투명해지고 싶어요. 「시인의 애인」이란 시에서도 그 바람을 담았듯, 공기처럼 누구나 들여마실 수 있는 시를 쓸 수 있기를 희망해요. 물론 제 방식대로…… 가능할까요? 계속 쓸 테니 언젠가 가능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