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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영주 李映姝
1974년 서울 출생. 2000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가 있음. oistrak3@naver.com
비
나는 네 가느다란 팔을 붙들고 느닷없이 추방되었다 미래는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온다 만져보면 내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물질 나란히 비를 맞으면 철근처럼 삭아내리는 너와 내 팔 단백질을 거울에 비춰보면 다른 물질이 된다 보리차를 마시고 너와 나는 서로를 바라본다 거울을 닦는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파 구름이 팽창한다 물질의 순서가 바뀌었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는 늘 어두운 기운이 따라붙는다 만나고 떠나고 다시 만나도 어떻게 매번 새롭지? 어제 맞은 비가 안으로 들어온다 녹아 없어지는 부위가 조금씩 넓어지나봐 내 손이 닿으면 네 단백질이 분해되고 우리는 옥상에서 서로를 잠시 부둥켜안는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웅덩이가 얼마나 깊어져 있으려나 흐르는 시간 단위는 생각하지 말자 총격이 없어도 추방될 수 있다 빗줄기 안의 화학식이 바뀌었어 함께 비를 맞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터는 밤 투명한 물은 바깥으로 흘러가고 우리는 서서히 부식되어 가는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렇게 젖어가는데 너와 나는 순서가 바뀌잖아 비를 맞아서 함께 뼛속까지 핥으면서 내 단백질이 분해된다 평생 배가 고프다니 아무것도 소화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미래는 연습하지 말자 별은 없어지면서 빛을 낸다는데 넓게 퍼지면서 손을 잡는 너와 나는
덩어리가 된다 썩은 꿀과 같이 시큼달콤하게 녹아내리는 손
유리창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옥상 난간을 붙들고 내려다봅니다 어느새 나는 이렇게 많은 계단을 올라온 것일까요 갈 곳이 없어서요
푸른 냄새가 날 것 같은 빛을 향했을 뿐입니다 도시락을 먹고 잠깐 위를 올려다볼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나는 유리창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시간 창을 옮기면 투명한 화학식 모든 풍경이 경계 없이 흘러갑니다
날카로운 기계 안으로 내 피는 조금씩 들어가고 가장 깊은 화학식으로 완성되는 시간 나는 손가락이 짧고 굵습니다
창문 위에 창문 또 창문 위에 창문 계속해서 바라보면 창문은 보이지 않아요 어느정도의 지평선을 넘으면 고유의 빛으로 불투명해지는 우주처럼
나는 점심시간이면 창 안쪽을 보기 위해 빛을 쫓아갑니다 잠깐씩 계단을 올라갑니다 바라볼 곳이 없어서요 관찰할 수 없는 세계는 너무 많은 공식들이 난무하지 않을까요
안에서 밖을 통과하는 수많은 눈빛을 만든 사람입니다 계단을 걸어 바라볼 곳에 도착해야 하는 사람
난간에서 밑으로 밑으로 떨어집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바닥에 닿는 기분은 무엇일까요 바라보기 위해 유리창을 만들었습니다
내 피를 먹고 무럭무럭 자란 기계들 더욱 투명하고 찬란한 풍경의 탄생
참을 수 없이 비린내가 나요 잠들 곳이 없어서요 높이 한번 떠오르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