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기획 | 문재인정부와 시대전환

 

지금 바로 경제적 전환을 시작하자

 

 

전성인 全聖寅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저서로 『화폐와 신용의 경제학』 『경제학원론』(공저) 등이 있음. junsijun@gmail.com

 

 

JTBC가 최순실의 태블릿 PC를 입수해 단독보도한 지 장장 7개월 반이 흘렀다. 장미 대선은 예상대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文在寅)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는 그동안 미뤄둔 각종 정책과제를 풀어나갈 때다. 역사적으로 보면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만들어낸 소위 ‘87년체제’를 새롭게 정비하여 ‘17년체제’를 정착시켜야 할 때다. 이하에서는 대선 이후의 과제를 경제정책의 관점에서 검토해보기로 한다.

 

 

1. 현실과 전망

 

경제현실은 암울하다. 비록 올해 들어 외부 경제 여건의 호전에 힘입어 수출 등 해외수요와 연관된 생산이 부분적으로 활성화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한국경제는 노화(老化) 현상을 보이고 있다. 당연하다. 인구 자체가 급속하게 노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15세부터 64세까지의 인구를 보통 생산가능인구라고 한다. 이 수치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올해 그 증가율이 음수로 떨어진다. 그리고 인구추계 수치가 나와 있는 2065년까지 계속 음수다. 절대적 인구수로 보면 현재 약 3700만명인 생산가능인구는 2065년에 약 2천만명까지 떨어진다. 거의 반토막이 나는 것이다. 반대로 65세 이상 노령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현재 700만명에서 2065년에는 약 1800만명으로 증가하게 된다. 두배가 넘는 셈이다. 2065년에는 노령인구 숫자가 전체 생산가능인구의 90%에 육박하게 된다.

노령화는 정치 및 경제적인 측면에서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노령화는 인구 혹은 노동력이라는 매우 원초적인 생산요소의 공급을 감소시킨다. 주지하듯이 생산은 노동과 자본이 특정한 생산기술과 결합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과 생산기술 수준이 고정되어 있을 때 노동투입의 감소는 당연히 생산량의 감소를 초래한다.

이 단순한 명제의 함의는 그리 간단치 않다. 우선 잠재성장률이 하락한다. 잠재성장률 추계치는 자본증가율과 기술진보율에 대한 가정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잠재성장률 그 자체가 하락할 것이라는 데는 조금도 이견이 없다. 한국은행과 KDI(한국개발연구원)의 공식 통계는 아직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3%대라고 보고 있지만, 국회 예산정책처는 이미 2020년까지의 잠재성장률을 2%대로 예측하고 있고, 조만간 한국은행과 KDI도 이 수준으로 전망치를 낮출 것으로 보인다. KDI는 2030년대까지 1%대로 하락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두번째 함의는 연금 파탄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회계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즉 모든 국민연금 가입자가 자신이 낸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찾아 간다. 평균적인 이자율까지 다 감안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구조가 가능할까? 두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후속세대가 더 부자거나, 아니면 머릿수가 더 많거나.

그동안 우리나라는 매우 행복하게도 이 두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 5%의 실질성장률은 오히려 낮은 편에 속했던 적이 많았고,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에서도 개인들의 실질소득은 대체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그러나 최근 10년 동안 경제 전체의 성장률도 많이 가라앉았고, 개인소득은 특히 정체현상을 보였다. 이제 우리 개인들은 더이상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본 인구구조의 변화는 두번째 조건도 충족되지 않으리란 것을 잘 보여준다. 생산계층의 인구는 감소하고 은퇴계층의 인구는 증가하고 있다. 후속세대의 머릿수가 상대적으로 더 많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적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설사 후속세대가 약간 잘살게 되더라도 급증하는 노령인구의 부담을 무리 없이 해소할 수는 없다. 그 결과가 연금 파탄이다.

노령화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큰 함의를 갖는다. 이번 대선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로 많은 선거 전문가들은 ‘이념이나 지역성에 종속된 투표보다는 세대성을 반영하는 투표성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실제로 대선 전의 여론조사 수치를 보면 60대 이상의 투표 성향은 그 아래 세대의 투표성향과 확연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이런 추세가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60세 이상 세대는 우리나라 정치지형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세대로 매우 오랫동안 군림할 가능성이 크다. 인구학적으로 보면 2023년이면 55세 이상 인구가 18세 이상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다. 현재 유권자는 19세 이상이지만 설사 앞으로 그 하한이 18세로 낮아진다고 해도 단순히 유권자를 후보별로 줄 세우는 대통령선거에서 노령인구가 보유할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노령화의 함의는 정치적 함의와 경제적 효과를 합칠 때 더욱 암울해진다. 먹을 것을 만들어낼 세대는 줄어드는데 그 줄어드는 생산물을 분배할 정치적 파워는 먹을 것을 만들지 않고 소비만 하는 세대가 가지게 될 때 어떤 문제가 생길 것인가? 드라마 「도깨비」가 유행시킨 말처럼 “파국이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노령세대는 생산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계(視界)가 짧다는 것이다. 생산가능인구의 중간 연령을 40세로, 노령인구의 중간 연령을 75세로 보고, 평균수명을 대략 90세라고 치면 생산가능인구는 50년을 내다보고 경제활동을 하지만, 노령인구는 15년 정도를 내다볼 뿐이다.

그 결과는 너무도 명확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면 당장 잡아먹으라”는 것이다. 환경이 파괴되어도 당장의 빵만 많으면 되고, 모든 조세부담은 미래세대로 넘기면 그만이다.

이런 왜곡된 인센티브가 막강한 정치적 파워와 만나는 나날들, 그것이 상식적으로 예측 가능한 우리나라의 미래다. 가히 민주주의의 위기라 할 만하다. 이미 모든 국민이 처한 상황이 평등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모든 이가 평등하다고 간주하는 것부터 사실은 문제다. 가진 것도,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도, 국가 내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영향력의 강도도 다 다른데 모래알같이 흩어진 개인을 상정하여 “법 앞의 평등”을 외치는 것은 나라를 커다란 파국으로 내몰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17년체제’의 필요성이 나타난다.

 

 

2. 17년체제가 갖추어야 할 특징

 

(1) 경제성장과 기술개발

17년체제가 풀어야 할 두가지 숙제는 ‘경제성장’과 ‘세대 간 통합’이다. 두가지 모두 어려운 문제고, 하나를 풀려면 반드시 다른 하나까지 풀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성장부터 보자. 왜 성장에 신경써야 하는가? 가만 내버려두면 경제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가? 추락의 원인을 잘 살펴본 후, 그 원인을 반전시킬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그게 불가능하면 다른 방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럼 이런 일반론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추락의 원인은 다름 아닌 인구구조의 노령화다. 이것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 물론 장기적으로 노력해야 하겠지만 한 세대 내에는 어렵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호주처럼 이민자를 받아서 나라를 꾸려갈 수 있을까? 요새는 미국조차도 국경에 담장을 세우겠다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고 있다. 한마디로, 어렵다. 물론 “통일은 대박”이라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처럼 통일이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으나 인구구조를 젊게 만드는 것 외에 별도의 비용이 얼마나 들지 알 수 없다. 결론은 노령화 추세를 당장 반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장을 위해서 다른 방책을 모색해야 한다. 그 다른 길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줄어드는 노동하에서 자본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진보를 재촉하는 것이다. 이 중 첫번째 정책은 애석하게도 거의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주어진 기술 수준과 줄어드는 노동하에서 자본만 획기적으로 늘리면 어떤 일이 생길까? “파국이다.” 왜 그런가? 소위 수확체감의 법칙이 극심하게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이 늘어나기 가장 좋은 여건은 자본과 노동이 서로 적절한 결합비율을 유지하면서 함께 늘어나는 경우다. 그런데 노동은 감소하는 상황에서 자본만 계속 투입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적절한 결합비율은 눈을 씻고 찾아도 안 보이고, 자본과잉 상태만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생산은 잘 늘어나지 않는다. 생산이 잘 늘어나지 않는데 자본을 투입할 바보도 없다. 자본은 이미 넘쳐난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이자율을 보면 안다. 이자율이 지금 지속적인 하락세이지 않은가. 이것은 생산에 대한 자본의 기여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성장을 하려면 기술 수준을 발전시키는 것 이외에는 해법이 없다. 기술 수준을 발전시키면 주어진 자본과 노동하에서 더 많은 생산물을 얻을 수 있으므로 성장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생산을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자본과 노동에 더 많은 보상을 해줄 수 있고, 이를 통해 전체적으로 총수요가 다시 늘어나서 생산물이 소비되는 선순환이 나타날 수 있다. 그 부수적 효과는 고용의 증가가 될 것이다. 실업 문제 해결의 요체는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기술개발인 것이다. 따라서 17년체제가 이루어야 할 첫번째 실천적 과제는 기술개발 친화적인 체제를 갖추는 일이다.

여기까지 읽은 일부 독자들은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알파고가 우리에게 준 충격을 잊었는가? 기술이 개발되면 인간은 설 자리를 잃고 실업은 오히려 더 만연할 것이다. 생산이 늘어날지는 몰라도 그건 우리 것이 아니라 기계를 부리는 소수 사람들의 몫이 될 것이다. 이게 무슨 이상적인 체제인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사회 체제가 자리를 잡고 그 체제가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질문에 확고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대답을 다음 절에서 생각해보자.

 

(2) 인적 자본 축적의 장려

기술개발과 고용촉진을 동시에 푸는 실마리는 인적 자본(human capital)의 축적이다. 노동력을 보유한 각 노동자에게 높은 기술 수준을 체화(體化)시키는 것이다. 기술은 추상의 상태에서는 독자적인 생산요인으로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떤 생산요소에 배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윈도우XP가 돌아가는 구식 PC보다 윈도우10을 장착한 새로운 PC가 더 높은 기술 수준을 구현한다.

그러나 이를 운용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무인 자동차가 개발되어도 가치판단을 해야 하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SF가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빈구석을 적절하게 찔러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국 일정 부분은 사람이 자본과 기계를 통제해야 하고, 따라서 기술의 발달이 노동을 완전히 사장시키리라고 보는 것은 성급할 뿐만 아니라 적절하지도 않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이를 잘 활용하도록 노동의 질을 제고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태도다. 이는 또 노동력의 절대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자연스런 해법이기도 하다.

즉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노동자의 머릿수로 표현되는 노동투입은 줄어들 수 있어도, 인적 자본을 가미한 효율적 노동단위(efficient labor unit)의 투입은 증가할 수 있다. 또 그렇게 해야 경제도 성장하고 개별 노동자들도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생산현장에서 밀려난 노동력 중에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없는 인력은 서비스업으로 소화하면 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를 위협하게 되는 상황은 과학기술의 발전 그 자체가 아니라 이것을 인간이 활용할 수 있도록 사회가 적절한 교육·훈련 시스템을 제공하지 못할 때이다. 결론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그 속에서 인간이 생산에 참여하고 적절한 풍요와 성취를 누리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발전도 장려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인적 자본의 축적도 장려해야 한다. 이것이 17년체제가 경제성장을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3) 사회적 공동체와 세대 간 통합

17년체제가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세대 간 통합이다. 왜 세대 간 통합이 중요한가? 세대 간 통합이 되지 않는 한, 정치적 자원배분 권한을 경제활동을 상대적으로 더 적게 하는 은퇴세대가 장악하게 되는데, 이 세대는 별도의 유인체계가 없는 한 근시안적인 자원배분 정책을 지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성장도 없고 발전도 없다. 그래서 세대 간 통합이 필요하다.

그럼 그 통합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정치적으로 이를 풀어내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도 보통선거가 민주주의의 한 원칙으로 정착한 지 벌써 70여년이 되었고, 은퇴세대의 선거권을 제한할 수 없는 한, 은퇴세대가 정치적 광장에서 더 크게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선거구를 지역구 제도에서 세대구(世代區) 제도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미 은퇴세대가 정치적 영향력의 효능을 자각하기 시작한 이상 정치공학적으로도 이를 도입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17년체제는 다른 통로에 의한 세대 간 통합을 모색해야 한다. 경제적인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은퇴세대는 은퇴세대대로 세대 간 통합에 응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고, 생산세대는 생산세대대로 세대 간 통합을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사회제도를 고안해야 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어떤 세대의 희생으로 다른 세대가 이익을 보는 구조가 되면 통합은 물 건너가고, 우리 사회는 결국 분열과 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세대도 눈물 흘리지 않고 모든 세대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다(경제학에서는 이를 파레토 효율성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은퇴세대가 자원배분에 관한 정치적 헤게모니를 부분적으로 양보해야 한다. 생산을 직접 담당하는 세대가 자원에 대한 배분 권한을 가질 때 더 효율적인 생산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생산에 참여한 세대는 이처럼 어렵게 얻은 자원배분 권한을 잘 사용해서 은퇴세대에 적절히 보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은퇴세대가 당장 그 권한을 회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젊은 세대와 정치적 영향력을 보유한 은퇴세대 간에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 필요하다.

말은 쉽다. 문제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런 계약을 체결하고 구현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무조건 조세와 보조금만을 떠올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정부가 생산계층에 세금을 물리고 그 재원을 노령층에 복지로 지출하는 것은 자칫 생산계층의 생산의욕을 저하시킴으로써 정작 은퇴세대는 제대로 된 복지 혜택을 얻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은퇴세대에 필요한 것이 꼭 돈만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울려 사는 것’일 수 있다. 사회적 관심이야말로 돈 주고도 사기 어려운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세대 간 통합의 가능성이 열린다.

생산계층이 은퇴세대에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은 사회적 관심이다. 물론 경제적 지원도 중요하다. 그러나 노인세대에 물어본다면 돈만 주고 돌아보지 않는 것보다는 돈을 조금 덜 주더라도 자주 찾아오기를 더 원한다고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의미에서 아주 희미하게나마 ‘사회적 공동체’ 같은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경제전망을 제시할 때만큼 백퍼센트 자신있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직관적인 의미에서 일부 노동자들은 인적 자본 축적을 통해 효율적으로 생산해서 여분의 생산물을 많이 만들어내고, 다른 노동자들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해서 은퇴세대나 미래세대에 대한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은퇴세대는 정치적 헤게모니를 일부 양보하는 대신 한편으로는 효율적 생산의 과실을 함께 향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서비스를 누리는 형태가 사회적 공동체다. 이것이 17년체제가 추구해야 하는 모습은 아닐까?

 

 

3. 17년체제와 경제정책 과제

 

앞에서 살펴본 17년체제는 단순히 경제정책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매우 유연하고 창조적인 사회적 공동체 구조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경제정책은 이런 사회적 공동체 구조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구축에 필요한 토대를 제공하고 그 과실을 최대한 생산에 활용하는 형태로 입안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경제정책 과제를 몇가지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술개발과 인적 자본의 축적을 장려하는 경제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노령화 사회에서 성장할 수 없고, 성장을 못하면 어떤 사회적 문제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점은 ‘인적 자본의 축적’에 있다. 기술개발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중요하지만 역대 정권이 모두 이 점을 중시했기 때문에 새삼 더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적 자본의 축적은 상대적으로 매우 경시되어왔다. 오히려 정부는 성장을 위해 투자촉진과 이를 위한 규제완화에 몰두하는 등 물적 자본의 축적만을 강조했었다. 예를 들어 인적 자본의 축적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나쁜 정책이 고용 유연화 정책이었다. 기업 경영자가 해고를 쉽게 하도록 만들어 투자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책은 인적 자본의 축적에는 나쁜 영향을 미친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데 특정 회사에 근무할 때만 필요한 정보나 근무방식에 몸을 바칠 노동자가 있겠는가? 아니, 그 노동자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일반적으로 평가받는 지표(예를 들어 토익 성적)를 높이는 범용적 인적 자본 투자에만 더욱 몰두하게 될 것이다. 즉 기업 특유한(firm-specific) 인적 자본 투자는 위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경제정책은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 지금은 자본과 노동 중 상대적으로 자본은 과잉이고 노동이 희소한 상황이기 때문에 노동 우대 정책을 펼쳐야 인적 자본의 축적이 그나마 장려된다. 필자는 이를 노동친화적 성장정책(labor friendly growth policy)이라고 이름 붙인다. 예를 들어 고용의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높이고, 노동소득 분배율을 높여서 성장의 과실을 노동에 조금 더 많이 배분하고, 최저임금을 높여서 극빈 노동자의 생활여건을 개선하고, 개인파산이나 개인회생 등 개인 채무자에 대한 회생제도를 채무자 우호적으로 개선하는 정책들은 모두 노동친화적이고 따라서 새로운 성장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사회적 공동체 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 경제정책을 장려해야 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노동친화적 성장정책은 세대 간 또는 자본과 노동 간의 협력을 선결 요건으로 한다. 사회적 공동체 구축을 장려하는 경제정책으로 중요한 것은 소위 ‘동반성장’으로 범주화되는 정책들이다.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초과이윤을 서로 나누는 초과이윤 공유제도나, 노사 교섭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기업 현황에 대해 자본가와 대등한 정보를 가지고 교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자 추천 이사제 도입 등이 그것이다. 을에 대한 갑의 우위를 통칭하는 소위 ‘갑을관계’의 개혁 역시 힘없는 을들의 생존권을 보호한다는 인권적·당위론적 정당성 외에 사회적 공동체 구축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구현한다는 측면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셋째, 조세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자산에 대한 보유세는 미약한 상황에서 계속 소득세의 부담을 높이는 것은 자산을 주로 축적한 은퇴세대의 조세부담보다 생산을 담당하는 청년세대의 부담을 상대적으로 가중시킨다는 점에서 세대친화적이지 않다. 따라서 부유한 일부 은퇴세대의 세부담을 다른 계층과 엇비슷하게 정렬하는 의미에서 부동산 보유세를 강화하고 오히려 소득세나 법인세를 일부 감면해주는 조세개혁이 더 생산친화적이고 세대친화적이다. 조세개혁은 특히 향후 연금제도가 파국에 직면함으로써, 준조세 성격을 가지는 청년세대의 연금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을 감안한다면, 세대 간 부(富) 이전의 전체적 부담을 형평성 있게 맞춘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4. 맺음말

 

87년체제는 정치적인 민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러나 87년체제가 과연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일관된 논리체계나 가치관에 기반해 사회구조를 설계했는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노동조합 설립 등이 활성화되었으나, 일시적이었을 뿐 추세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어왔다. 이런 현상은 비교적 진보적인 가치를 수용한 국민의정부나 참여정부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그런 의미에서 87년체제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선에서 제한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이런 가치체계를 끌고 나갈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는 성장할 수 없고, 성장할 수 없으면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낫고, 가난은 이제 흘러간 과거의 추억이라고 생각했던 2000년대까지의 사회적 상식은 이미 무너졌다. 청년세대는 사상 처음으로 내일이 오늘만큼 우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우리는 어느덧 또다시 ‘가난’이라는 사회적 질병을 마치 오래된 벗을 맞이하듯 곁에 두기 시작했다.

인적 자본의 축적에 기반을 둔 경제성장과 세대 간 통합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적 공동체 구축이 새로운 17년체제의 핵심적 가치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단일한 사회의 모양을 유지하면서 그나마 지속적인 성장을 성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십여년간 경제정책의 가장 핵심적인 화두였던 ‘경제민주화’는 이런 의미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최소한의 생존권 측면에서 인권적 가치를 지키는 정책이 아니라, 인적 자본의 훼손을 방지하고 사회적 공동체를 구축하여 경제성장과 사회적 통합을 달성하는 적극적인 성장정책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17년체제에서는 더이상 ‘성장이냐 형평이냐’라는 이분법이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형평을 달성하는 것이 성장을 이뤄내는 중요한 선결 요건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치는 정(正)과 반(反)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가 된 합(合)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펼치는 경제정책은 이런 더 큰 사회적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 문재인정부가 이번에 얻은 천재일우를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만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