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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영관 전집』(전2권), 삶창 2017

‘진정성’은 시가 되지 않는다

 

 

백무산

시인 imagine4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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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불운한 시인이 있습니다./서툰 몸짓으로 불온한 꿈을 꾸었고/미처 피지도 못한 채 시들었습니다.”

지난 4월 ‘노동자 시인 조영관 추모사업회’에서 보내온 『조영관 전집』(1권 시·산문편, 2권 소설편)에 들어 있던 쪽지글이다. 시인을 기리는 사업회가 추모사업을 10년씩이나 이어가고 있고, 유고집이긴 하지만 전집까지 낼 수 있었던 시인의 불운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그는 왜 꽤나 폼 잡고 살 수 있었던 길을 버리고 공장노동자로, 용접사로, 떠돌이 노동자로 살아버린 것일까? 그는 왜 단행본으로 치면 네댓권이나 되는 원고를 가지고 있으면서 생전에 한권의 책도 내지 않았을까? 남들이 썰물처럼 빠져나오는 길을 왜 역주행해서 들어간 것일까? 한 시대의 운명을 온몸으로 껴안고자 했으나 그를 좌절케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타들어가는 목숨까지 지불하고 그가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집을 펼쳐들면 수많은 질문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다시 읽는 이들에게 돌아온다.

익숙하게 사용되었으나 금세 낯설어진 단어들이 있다. 언어가 시대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겠으나 아직 끝나지 않은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낱말들도 씻은 듯이 용도폐기 되는 것을 볼 때도 있다. 그 가운데 ‘진정성’이라는 낱말이 있다. 이 단어는 개인적 양심의 토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믿음이 깨어진 자리 혹은 그 사회의 이념이나 가치 지향들이 퇴각한 자리에 고독한 맨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겠다는 결의를 내장한 단어다. 그런데 ‘진정성’은 이상하게도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접미사가 붙어 한 단어로 취급되지 않아서인가 했지만, ‘인간성’ ‘적극성’ ‘진실성’ 등은 모두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이 단어가 따로 취급된 것은 한 시대에 잠깐의 부침을 겪다 곧 폐기될 운명에 처하리란 걸 사전 편찬자가 예상했던 것일까?

사실 ‘진정성’은 ‘순결성’만큼이나 촌스런 단어다. 이유 불문하고 듣는 이에게 자기검열과 엄격성을 요구한다. 자기방어적이고 결벽증적인 이 단어는 그러나 상황과 환경에 따라 부유하고 분열되는 존재에 강한 주체를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 역사적 변화로 인해 삶의 좌표가 흔들리고 이념과 기존의 가치들이 폐기되면서 타협과 변질을 강요받게 된다. 현실적 힘 앞에 무력한 개인은 분열과 딜레마를 겪게 된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우리 시대는 이제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세상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누군가는 또 지금을 괴물이 출현하는 시대라고 한다. 물론 그 괴물은 우리 안에서 출몰한다. 우리는 현실이 요구하는 굴욕보다도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 유치한 괴물 앞에서 더 좌절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종종 항거할 수 없는 굴욕의 시대를 벌거벗은 삶으로 돌파하려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물론 이러한 삶은 대부분 개인적인 실패와 불행으로 종결된다. 그러나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기꺼이 받아안고 맨몸을 최후의 무기로 삼는 이들도 있다. ‘진정성’은 바로 위기의 시대에 실패를 무기로 굴욕적인 현실에 항거해 맨몸으로 던지는 자기선언이다.

여기 한 시인이 있다. 오직 진정성 하나로 자신의 삶을 내몰았고, 바로 그 진정성 때문에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한 시인이 있다.

 

1957년 전남 함평 출생

서울시립대 영문과 졸업, 도서출판 일월서각 근무

1986년 이후 노동자 생활

2002년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

2007년 간암으로 사망

 

노동자의 삶이 대개가 그러하듯이 그의 약력 또한 단 몇줄에 그친다. 등단 이후 4년여 활동에 불과하다. 첫 시집(『먼지가 부르는 차돌멩이의 노래』, 실천문학 2008) 또한 유고시집이다. 그의 이력 단 몇줄 속에 그의 성품 전체가 드러난다. 데뷔작 몇편이 작품의 전부인 시인들도 드물지 않을 만큼 문단에 이름부터 내밀기에 급급한 세태에 삶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글은 세상에 내보내지 않겠다는 결기를 엿볼 수 있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안정된 생활과 방해받지 않는 환경을 원할 터인데, 오히려 그는 작가가 되기에 가장 열악한 환경과 불안정한 삶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것도 얼마간의 체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몸으로 사는 길을 택했다. 그가 생각한 올바른 글은 한 시대를 몸으로 살아온 자들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된 후에는 시 쓰는 일에 매달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시 쓰는 일보다 더 급한 일들이 그 시절엔 얼마든지 있었다”지만, 그럴 때조차 글쓰기를 유보한 것이 아니라 삶과 글의 일치를 고민해온 시간이었다. 이러한 시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시를 이해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것이다.

어떤 미학적 끌림도 문학적 기교도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시적 유행도 시인이라는 자의식도 없이 시에 매달렸던 것 같다. 현실의 완강함에 비추어 시 쓰는 것이 부끄러웠다는 그는, 노동으로 “호사스런 잡것들을 죽”일 때 진실이 드러나고, 진실은 곧 “몸이 드디어 말을 하는”(「내가 보는 뜨거운 한세상」) 그 순간에 체득된다고 믿었다. 그의 시들은 몸을 통한 현실감각이 사회학적 지식이나 이념적 당위에 끌려가는 것을 거부했다. 당시 노동시라고 불렸던 것은 ‘노동’시라기보다 ‘노동운동’시였고, 노동현실의 열악함과 사회 역사적 관계의 모순을 폭로하고 변혁에 기여하려는 목적의식적인 시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념적 당위를 이끌어내려는 의식적 활동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영관 시인의 시는 노동현장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도 몸의 확신 없이는 당위에 기대지 않았다. 당연한 귀결로서 그가 고단한 현실을 타개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세계는 어떤 정치적 목적을 지향하기보다 원초적 생명세계로 향한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을 사랑했으나 자본주의 노동은 신성하지도 않고 인간적 본성도 아니라는 것을. 노동자는 자유와 개성과 인간을 팔아 밥을 먹는 대신 보잘것없는 삶을 살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라는 것을. 노동자는 노동하면 할수록 하찮아지고 존재는 허황해진다는 것을. 인간을 유지하면서 노동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간을 버리지 않는 노동자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조영관 시인의 불행은 그곳에 있고 그가 꾼 꿈이 불온했던 이유 또한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진정성’ 때문이었다. ‘진정성’은 ‘맨몸’과 동의어이다. 그는 그것을 시대에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