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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구병모 具竝模
2009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빨간구두당』 , 장편소설 『아가미』 『한 스푼의 시간』 등이 있음.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
소설가 P씨의 계정을 팔로우한 지는 2년 남짓 되었다. P씨의 팔로워는 5만여명인데 팔로잉은 3명에 불과했으며, 그것은 친구나 가족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들의 계정이었다. 그는 1년에 평균 1권꼴로 6년째 저서를 출간했는데 모두 소설이었고 웬만큼 쓴다는 작가라면 으레 한권쯤 낼 법도 한 산문집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P씨는 신문, 잡지, 방송 어디에도 칼럼을 싣는 법이 없었다. 생활밀착형 미셀러니를 비롯하여 무게감 있는 에세이나 사회·문화 논평에 이르기까지, 말하자면 소설 아닌 글은 무엇 하나 발표하지 않았다. 소설은 인물이나 줄거리 따라가는 재미에 집중하느라 티가 잘 나지 않지만, 스토리텔링이 적은 산문에서는 저자의 평소 사고와 문장의 밑천이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그가 평소 SNS에 올리는 토막 단상들은 그럴듯한 삽화를 얹어 책으로 대강 엮어 팔기에 큰 무리는 없지만 범상한 문장만큼이나 사유 또한 단순하여 지나가는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그 정도 말은 구사할 수 있겠다 싶은, 말하자면 저자 특유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글이었으니, 산문집을 굳이 출간하지 않는 것은 암만 수익지상주의 업체라도 최소한의 보는 눈 내지는 출판의 사회적 책무를 고려하는 양심이 있다는 뜻이며, 이 세상의 푸르른 나무들을 위해서도 올바른 선택일 터였다.
딱히 내세울 것 없는 문체와 살짝 빈곤한 사유에도 불구하고 P씨가 매해 꼬박 신간을 선보이며 꾸준한 판매 지수를 유지하는 한편 웹에서는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까닭이라면 역시 그거지. 첫 책이 16부작 케이블드라마로, 두번째가 영화로, 세번째가 20회작 웹드라마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박은 첫번째뿐이며 작품이 유명세를 탔다고 하여 그걸 쓴 작가가 셀러브리티는 아니겠으나, 이후 꾸준한 중박으로 업계 입장에서는 뭘 해도 본전치기는 하겠다 싶은 작가가 그리 흔치 않지. 원소스멀티유즈가 가능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하나, 계산기 두드려봤을 때 손해는 안 나고 언젠가 다시 터질 잭팟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을 필요도 없는 고른 작품 수준—알다시피 우리가 대형마트 팝업보드나 식당 메뉴판에서 종종 발견하는 ‘고른 품질’ 내지는 ‘균질한 맛’ 따위의 표현은 딱 그 가성비라든가 그보다 살짝 밑도는, 하여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뜻이다—거기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음으로써 본명과 성별 및 나이와 직업, 거주지 등 정체를 궁금하게 만드는 은둔자 이미지도 한몫할 터다.
매년 발표하는 소설마다 소비되기 좋고 소진되기도 쉬운 적당한 감흥을 안겨주는 P씨의 계정을 처음 팔로우한 이유는, 마침 그 무렵 논란이 된 사례에 대해 P씨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려고—그보다는 이런 논란을 일으키는 사람의 일상을, 그의 토막글과 사진만으로 어디까지 파악할 수 있을지 호기심이 생겨서였다고 할 것이다.
당시 P씨가 발표한 신작은 그전까지 재개발 구역의 휴먼코미디—병원 배경의 미스터리 로맨스—고등학교 신임교사의 참교육 도전기 등으로 이어져온 일련의 소설에서 따뜻하고 푹신한 톤을 덜어낸 것으로, 소위 사회파 스릴러로 분류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때 주인공을 통해 선악의 모호한 경계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했다는 북섹션 리뷰와 함께, 기존 그의 작품들이 거쳐온 수순대로 영화사에서 수시로 접촉이 들어온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그런데 인물들을 하나씩 톺아보면, 주인공 옆에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어지는 악인은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 노동자였고, 그외에 시골 총각과 결혼한 지 한달 만에 가산을 돌라내어 도망가다 잡히자 배 째라고 내미는 방글라데시 여인에다, 주인공의 보조자로 미모의 청각장애인이 등장했다. 도대체 인물만 열거해서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을 법한 소설이라는 점은 접어두고, 350여쪽의 책에서 열두개 문단 정도가 캡처 편집되어 써브컬처 게시판에 올라가자 아직 책을 접하지 않은 이들은 그 편협함과 낡은 세계관에 경악했고, 이미 책을 읽은 이들은 스스로 둔감했음을 한탄했다. 나는 그때까지 누구에게 선물로 줄까 말까 고민하면서 그 책을 3부 정도 장바구니에만 담았다가, 끝내 결제 버튼을 클릭하지 않고 이듬해 보관함으로 이동시켰다.
게시판에서 SNS로 이동한 편집본이 리트윗 단계로 넘어가자, P씨의 소설은 외국인 노동자가 악인이라는 편견을 고착화하여 기피 대상으로 규정하는 데에 한몫하며, 매매혼이나 다름없는 현 사회의 뒤틀린 국제결혼문화에 대한 반성과 고찰 없이 외국인 신부를 사기꾼으로 몰아간데다 그녀의 서툰 한국어를 지속적으로 드러내어 희화화하는 한편, 선한 행동에서 성스러운 느낌마저 자아내는 청각장애인 여성이 주인공의 보조자에 그침으로써 장애인은 모두 착하고 순박해야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강요된 이미지를 재생산 및 배포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특히 주인공이 제 분을 못 이기고 그녀에게 ‘병신’이나 ‘귀머거리’라고 반복적으로 토해내는 장면은 해당 인물의 내적 갈등을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하기보다는 청각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명칭을 공고히 하며, 설령 그것이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형상화하기 위한 장면이라고 주장한들, 반드시 한 주체의 인격을 짓밟음으로써 갈등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면 작가의 소양이 저급하다는 뜻이라는 사람들의 분석이 이어졌다. 주인공의 폭언을 듣지 못하나 입모양과 행동으로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여성이 분노하기는커녕 그를 포옹하는 장면은 모성 판타지의 일종이겠는데, 이때 그녀가 하필이면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사전 묘사는 각종 혐의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고작 한권의 소설에서 이렇게 용납하기 어려운 대목이 쏟아져 나온다는 건 그 저자가 평소 어떤 가치관을 지녔는지를 보여준다는 댓글과 타래들이 달렸다.
문제가 불거지고 일주일 넘게 P씨는 자신의 SNS에 글을 올리지 않아서, 사람들은 그가 접속을 자주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평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드러날 만한 외신 기사 한 토막을 리트윗하는 손가락조차 매우 인색했으며, 대부분은 사진과 함께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며 자기 건지 누구 건지 모를 사색을 포함하여 때론 저자가 명시된 시나 소설의 일부를 인용하여 올리는 정도로 가뭄에 콩 나듯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P씨의 저서는 그때그때 출판사 계정에서 알아서 홍보했고 그 자신은 신간이 나왔다거나 이번에도 잘 부탁드린다든지 같은, 개인 육성이 드러나는 말 한마디를 보태지 않았다. 팔로워가 책을 잘 읽었다든가 앞으로도 꾸준한 활동을 부탁드린다고 말을 걸면 웃음 이모티콘에 Thank you가 적힌 이미지로만 답글을 보내는데, 무성의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Thank you 문구만 고정이고 배경 이미지는 매번 다양한 사진과 그림을 사용했으며, 악플이나 시비 거는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동안에도 이렇게 소극적으로 소통할 거면 애당초 자물쇠를 채우거나 익명으로 할 일이지 뭐하러 P씨라는 이름으로 공개 계정을 팠느냐는 불평과 비판이 종종 있었다.
이대로 사안이 묻히게 두고 볼 수 없었던 유저들은 작가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니 출판사 계정에 지속적 멘션을 보내서 해명과 이후 방침을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다음 올라온 P씨의 첫 게시물은 놀랍게도 카메라의 제원만 밝혔을 뿐 별다른 캡션이 없는 사진 세장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P씨는 설명 없이 직접 찍었다고 추정되는 사진들을 종종 올렸고, 사진에는 그 자신이나 주변 지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전혀 없이 주로 자연 풍경, 국내외의 거리 모습과 타인임이 분명한 사람들, 박물관이나 전시관을 비롯한 어떤 장소와 정물을 비롯한 인테리어가 나타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 대중없는 이미지의 파편들을 조합하여 그가 어느 지역에 사는지 어떤 곳을 여행하고 어디에 들렀으며 무슨 종류의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추측하는 한편, 그렇게 드러난 관심사를 통해 성별과 나이와 가족 사항을 분석하기도 했다. 화면 구도 잡는 방식이 거칠고 대범하며 아기자기한 소품에는 관심이 없는 한편, 분위기 좋은 이딸리안 레스토랑에 몇번이나 가놓고도 테이블의 음식 사진이 단 한번도 올라오지 않았고 평소 고양이나 강아지 사진이 전무한데, 서로 다른 디지털카메라의 스펙을 비교하는 장면이나 무언가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장면이 종종 올라온 것으로 보아서 안정적 수입원이 있는 남성일 확률이 높다든가, 아니 굳이 사진으로 판단할 거 없이 이미 발표한 소설마다 매번 30대 중반의 남성이 중심 화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알조라거나, 일상생활 관련 성토 내지는 푸념이 엿보이지 않으며 수많은 미술관과 여행지 사진으로 보아선 결혼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자녀가 없는 우아하고 윤택하며 기품 있는 생활을 누리고 있으리라는 추측, 어딘지 모를 초등학교 운동회 장면이 최소한의 연출과 구도를 무시한 채 올라온 걸 보면 아이를 둔 부모라는 또다른 추측, 그 정도야 단지 지나가다 찍은 풍경일 수 있다는 반론, 아니 확실히 일련의 다른 사진들에 비해 소재가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결이 달라 결이, 뭐가 됐든 사진과 글을 주로 올리는 시각으로 볼 때 회사원은 아니고 자영업자겠지, 아니 자영업 하면서 가게 놔두고 이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닐 수 있나, 결론은 프리랜서나 전업작가, 그런데 포털 연재도 아닌 연 1권 전작 출간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전업작가가 우리나라에 몇명이나 되겠으며, 매번 영화나 드라마의 2차 판권료를 억대로 받지 않고서야 불가능하지 않나, SNS에 비교 분석기가 올라온 그의 카메라를 보자면 렌즈 포함 오백만원에 이르니 애당초 돈 좀 있는 딜레땅뜨이겠다든가, 아니면 또다른 필명으로 대중성 있고 접근성 좋은 플랫폼에 좀더 로맨틱하거나 에로틱하거나 속도감 넘치는 무언가를 연재하여 생계를 메울지도…… 같은 식이었다.
그러나 그전까지의 짐작이 일종의 유희 차원에서 오간 이야기였다면, 이번 경우는 P씨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벌어지는 중인데 관련 피드백 없이 파도가 덮쳐오는 찰나를 찍은 사진만 올리다니, 책을 내놓고 나 몰라라 하는 무책임이 도를 넘어 독자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는 비난이 높아졌다.
그러자 재차 해명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막간을 틈타, P씨의 첫 책부터 의심스러운 대목이 깻단 속 낱알처럼 털려 나오기 시작했다. 재개발 구역을 무대로 한 첫번째 책에서는, 이미 반쯤 헐려 벽 너머가 드러난 집에서 맘에 두고 있던 여성과 다른 남성이 관계하는 모습을 목격한 주인공이 그쪽에 대고 소변을 발사하는 장면이나, 우연히 이 소변 줄기를 맞은 길고양이를 학대 살해하는 행위가 적나라하게 묘사된 장면이 문제로 꼽혔으며 이 묘사만 떠낸 이미지는 동물사랑협회 관계자들에 의해 대거 리트윗되었다. 케이블드라마에서는 이 부분이 최대한 각색 편집되어, 빈집의 성관계는 방송 매체라는 특성상 등장하지도 않았고 소변 맞은 고양이는 오히려 주인공을 할퀴고 도망가는 장면으로 처리되었으며 이때 대놓고 코믹한 배경음악이 깔렸는데, 드라마만 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늦게 원작 소설의 해당 대목을 보고 경악했다. 소설 속 고양이가 다루어진 방식이 오래전 에드거 앨런 포의 플루토는 저리 가라인데 그것이 인간에게 내재한 본질적 악을 환기하는 공포의 미학보다는 혐오와 불쾌감을 유발하니 선정적이고 저급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보충 멘션이 달리는 동안, 사면을 가리지도 못한 집에서 성관계를 맺은 동네 여성의 생리적 수치심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었을 정도였다. 두번째 소설의 배경인 병원에서는 30대 후반의 수간호사가 의사와, 20대 후반의 간호사가 담당 환자와 불륜에 빠지는데 각 장면과 상황이 고요한 분위기로 에로티시즘의 기름기를 쏙 빼고 그려지자 오히려 수채화 같은 풍경이 연출되는 바람에 불륜을 미화할뿐더러 사명감으로 고된 노동을 버티는 간호사 집단을 모욕한다는 판결을 받았으며, 특히 의사의 가족과 환자의 가족에게 이입한 가정충실주의자들의 공분을 사는 한편, 의사와 환자가 결국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 연착륙했는데 불륜을 저지른 자들이 그리 손쉽게 면죄부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뒤따랐다. 거기에 전현직 간호사를 칭하는 일련의 무리가 뜨더귀판에 참전하여, 종합병원급의 간호사는 결혼이나 임신 차례까지 정해주는 3교대에 연애할 시간은커녕 기초적 가정생활도 건사하기 힘들어 끝내 퇴직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뿐더러, 설령 의사와 연애를 한대도 그것은 상하 수직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에 마지못해 끌려간 겁박의 일종일 가능성이 크고, 한편 피고름과 토사물 등의 감염 위험물을 삼시세끼처럼 마주하며 소변줄 등의 교체 과정에서 오랫동안 씻지 못한 아랫도리를 보게 되는 입원환자와의 사이에 연애감정이 성립하기도 어려운 현실이니, 그저 환상과 낭만에 의존한 작가의 조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못 박기도 했다. 세번째는 교사의 서사와 병행하여 움직이는 중심축의 고등학생 두명이 모두 강인하고 순수하여, 어른들이 요구하는 프레임을 씌운 소위 대견한 청소년들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올드한 교훈주의라는 얘기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그 세권의 소설은 모두 우리 집에 있었고……
특히 세번째 책 같은 경우는 당시 전형적 힐링물로 평가받기도 해서, 자녀교육 문제에 관심 있는 주위 엄마들에게 몇권이나 선물로 돌렸었다. 그 뒤 교내 봉사활동 모임 후 커피숍에서 만난 엄마들의 감상평이 대략 어땠는가 하면, 자신의 딸과 아들이 꼭 그 주인공들처럼 자랐으면 싶은 바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 아이들이 좌충우돌하는 교사를 돕다가 겪은 각종 환난을 생각해볼 때, 가능하면 튀지 않고 조용히 수행평가와 입시에 전념했으면 좋겠다는 염려가 공존한다는 상식적·보편적 차원의 것이었다. 그중 한 엄마는, 그 상황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자신감을 잃지 않고 갈등을 일소에 해소하면서 큰 방황 없이 올바른 인간으로서의 선택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자신은 성공적 인물 형상화의 첫번째 요건이 입체성에 있다고 여기는 만큼,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평면적이고 나이브한 것 같다고 첨언했다. 그러자 다른 엄마는, 고작 극적 구성을 위해 아이들이 크게 잘못된 길에 빠졌다가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나태하거나 개연성 없게 여겨진다면서, 처음부터 맑았던 아이들이 큰 굴곡 없이 끝까지 맑다는 점이야말로 이 소설의 특색이자 강점이라고 꼽았다. 그러자 또다른 엄마는 문학의 결말에서 주인공들이 항상 올바른 길로 돌아와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말했고 마지막 엄마는, 그러면 남은 선택지라곤 처음부터 탁했던 아이들이 끝까지 탁한 인간으로 남는 것뿐인데 혹시 소설 속 아이들이 파멸하기를 바랐던 거냐고 반문하면서, 이 소설은 인물들이 정규교육을 받는 고교생들이라는 점에서 학교 밖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과 돌봄을 배제한 반쪽짜리라 말했다. 그들이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기에, 나는 어려운 건 잘 모르겠으나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고 일상에 널린 참괴와 환멸을 용의주도하게 피해가며 자신의 삶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뒤 아이를 최소한 넷은 낳아 길러서 국가에 이바지하는 것 이외의 다른 가능성을 생각한 적 없어 보이는 사람이 쓰는 반듯한 세계관의 이야기를 굳이 읽을 필요가 있겠느냐는 동문서답으로 때워서 그들 가운데 적어도 세명을 실망시키거나 혼란에 빠뜨렸고, 이때 서로 언성을 살짝 높인 두 사람의 사이가 싸늘해졌기에, 다음에는 실로 취향이 통하는 친구가 아닌 다음에야 섣불리 책 선물 같은 것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었다.
어쨌거나 거론되는 사안들의 파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타임라인에서 그대로 밀려날 듯하면서도 잊을 만하면 한두번씩 되는 리트윗으로 고로롱팔십의 밭은기침처럼 생명력을 획득했기에, 더이상 두고만 볼 수는 없었는지 그사이 P씨와 협의를 마친 듯한 출판사가 메인 트윗에 자사 홈페이지 공지사항의 링크를 걸어놓았다. 그러나 그 공지는 안 그래도 미적지근했던 P씨의 대응에 이미 실망할 대로 실망한 독자들을 분노의 단계로 이동하도록 부채질했다.
본사에서 발간한 P작가의 신작 소설에 큰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선 P작가가 익명으로 활동하는 저자로서의 특색을 유지하기 위해 본인의 계정이 아닌 출판사가 대리 발표하는 점을 헤아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소설은 작가가 데뷔 당시부터 관심을 가지고 3년간의 자료 조사와 구성 끝에 완성한 것으로, 소설에 등장한 각종 사례와 인물 묘사는 조사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일화와 배경을 변용하거나 자료에 기초한 순수 창작이며, 누구를 폄하하거나 공격할 의도로 씌어진 게 아닙니다. 다만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고 사회의 이면을 풍자함에 있어서 과도한 묘사나 진술이 따랐을 수 있으며, 이는 대다수 작가들이 창작을 할 때 부딪히는 대상화의 문제를 P작가 역시 피해가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소설은 P작가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사회물인 만큼 세계관 표출과 상황 전개에 있어 다소 정치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부족함을 앞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하나로 여겨주시면 작가에게 그 이상의 격려는 없을 것이며, 이와 같은 설정이나 소재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독자님들께 사과드립니다. 이 소설은 실존하는 타인의 명예를 작품 내에서 직접 훼손하거나 타인을 약취하는 등의 범죄행위와는 무관하므로 시중에서 책을 회수하는 조치는 없을 예정입니다. 또한 내부 논의 끝에, 재쇄 시 해당 부분들을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것 또한 작품의 전체 맥락과 구조를 해치게 되어 좋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이 부분 독자님들의 너른 이해를 구하며, 다음 작품에서 더욱 발전한 작가의 모습을 응원 및 기대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도서출판 ○○ 편집부.
이 공지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그 똥 참 길게도 싸네,였다. 결국 이것도 못하겠고 저것도 안 되겠으니 너네가 다 이해해라, 싫으면 보지 마라네? 독자를 무시하는 ○○사의 책은 오늘부터 모두 불매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대규모 성토의 타래가 뒤를 이었다. 우선 ‘과도한’ ‘다소’ ‘가능성’ ‘부족함’ 등의 애매모호한 표현들로 때워서 자사 발간 도서의 문제점을 깨끗이 인정하기보다는 외부에서 핑곗거리를 찾는 느낌을 주며, ‘대다수의 문제’라는 말로 다른 멀쩡한 작가들 머리채를 잡아끄는 물귀신 작전에, 맥락도 못 찾는 사람들로 독자 수준을 후려치고 있다는 원성이 나왔다. 그중 독자로서의 목소리 이전에 도서를 구입한 행위에 초점을 맞춘, 즉 실속에 예민한 소비자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부족한’ 소설을 출간하고 유료 판매한 출판사의 비양심적 상혼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앞으로 발전하는 과정으로 여겨달라니, 아무리 사소한 공산품이라도 각종 시험과 검수를 거친 합격품을 내놓는 법인데 돈 받고 파는 책이 미래를 위한 발판 수준의 시험작이라니, 독자를 봉 취급하는 데에도 정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사태가 이 지경인데 본인은 한가롭게 사진이나 올리고 출판사에 대리 발표를 시키는 P씨의 인성 및 사고능력에 대한 진단이 이어졌다. 지금이 과연 익명 저자로서의 권리를 계속 찾아도 되는 상황인지에 대해 당사자 없는 공간에서의 난상토론 끝에, 익명의 정체성을 그대로 가져가더라도 최소한 이번만은 본인이 직접 등판해야 하는 일인데 큰 회사 뒤에 숨어 혼자 고고한 척하는 건 비열한 행위이며, 그토록 철저한 비밀주의 엄수를 구실로 댈 것 같으면 애당초 SNS 계정을 파지 말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계정조차 본인 것 아닌 팬이나 출판사가 돌리는 봇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에다가, 시원을 따지기 시작하면 계정은 둘째 치고 애당초 책 같은 것도 쓰지 않았어야 마땅한 거냐는 소수의 반문이 있었지만 말 그대로 소수였으며, 얼마 뒤엔 쌜린저와 쥐스킨트를 비롯한 몇몇 사례가 언급되고, 최소한 그들은 얼굴과 이름이라도 깠지 그거랑 이거랑 같냐를 시작으로 비밀주의자와 전략적 은둔자의 개념이 뒤엉키는 한편, 어디 헬조선의 삼류 글쟁이를 외국의 거장들에게 갖다 대느냐는 준엄한 일갈이 사방에서 창궐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수많은 타래에 멘션을 직접 섞지는 않았으며 약간 흥미를 갖고 지켜보는 정도였다. 무언가를—누군가를 표현하고 논평할 만큼의 말발과 글발이 달리는 문제도 있거니와, 아무 데라도 한두마디나 혹은 전체 사안 중 극히 일부에 동조하는 말을 얹었다 치면 그것은 곧 가볍고 제한적이며 선별적 동의가 아닌 적극적 변호이자 독선적 ‘쉴드’이며 그 나머지를 배제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불똥이 튀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으므로, 어느 흙탕물에도 발을 담그지 않으려면 입을 열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사실쯤 알고 있었다. 참전이 아닌 관전. 나는 철저한 관중으로서의 권리와 여흥을 누렸다. 짧은 글들의 맹사(猛射)가 나열되자 사람이 대체로 어디서 꼭지가 돌고 뚜껑이 열리는지 압력의 평균값을 측정할 수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비등점은 제각각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했다. 그리 오래지 않은 SNS 경험에 따르면 그곳의 말들은 전기포트 속 물방울이었다. 포르르 끓다가 부서지는 거품이 수면에 다시 합류했다. 일부는 증발하여 공기 중을 떠돌았다. 그대로 두자 물은 식었다. 때를 보아 스위치를 넣으면 다시 끓어 방울진 거품을 피워 올렸다. 그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면 거품의 토대가 되는 수면의 높이만큼은 어느새 눈에 띄게 낮아진다는 사실이, 예정된 부서짐에도 불구하고 말을 그치거나 가두지 않는 이유일 터였다…… 그런 점에서 몇몇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난장이라는 인식 정도는 있었지만, 세상은 아무렴 주전자보다는 크고 넓을뿐더러, 그 유의미에 내가 뭔가를 보태기에는 에너지가 빈곤했다. 저마다 입에 칼을 물고 손에 도끼를 들었는데도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전기적 신호의 공간에서 최상의 포지션은 구경꾼이었다. 안 그래도 충분히 바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중학교의 학부모회를 비롯한 각종 봉사는 작년부로 물러났지만, 때마침 친정과 시가에 질병과 빚보증과 철이 덜 든 남동생의 사업 실패 등 크고 작은 환난이 생겨 늘 신경이 곤두선 상태에서, 책을 읽는다든지 사람들의 반응을 눈여겨본다든지 하는 일도 일종의 사치였다. 육체적 실무와 감정노동을 제외하더라도, 누구도 증오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환멸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삶을 꾸리는 일이란, 생각보다 높은 칼로리의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친밀한 사람들—그보다는 서로 조심해야 할 관계로 이루어진 그물망을 유지 보수하기 위해 단순성과 모호성을 동시에 장착하고 자유로이 구사해야 했다. 삶이 오엑스 퀴즈와 같다면 그 중간에 발을 걸치고 서 있다가, 어느 쪽으로든 건너오라는 요구를 받으면 다수가 선 자리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반드시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한 제스처라기보다는,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선이자 최소한의 올바름이었다.
유수 종합 출판사가 P씨의 책만 출간한 것도 아닌데다 당장 그의 책이 수십만부 베스트셀러라도 되어서 특별 관리 보호 작가로 돌보는 상황도 아닌 모양, 지속적 피드백에 신경 쓰지 못하고 마침내 총알받이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이틀 뒤, P씨가 자신의 계정에 다음과 같은 간단명료한 글을 올렸다.
저는 다큐가 아닌 소설을 썼을 뿐입니다. 소설로 누군가를 다치게 할 생각은 지금도 앞으로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본의 아니게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불편을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P씨는 여전히 얼굴과 실명 등 정체를 까지 않았으나, 적어도 캡션 없는 사진이나 다른 책 인용구를 제외하고 거의 처음으로 들려주다시피 하는 본인의 목소리이자, 140자라는 글자 수 한계상 최소한의 이유와 구실을 배제하고 단순 입장과 소회만 밝힌 글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최초의 반응이, 너무 성의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툭 던지고 사라진다—였다. 출판사는 해명을 하랬더니 변명을 하고 앉았는가 하면 P씨는 변명이란 없는 대신 설명도 대안도 없으니 총체적 난국이라 했다. 죄송하다는 한마디는 사뭇 귀찮다는 뉘앙스로 이제 해달라는 대로 해줬으니 그만 떠들라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보이며, 더욱이 ‘느끼셨다면’이라는 조건을 붙인 것은 실제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지우는 동시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불편’이라는 말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 했다. 그러므로 그의 붓끝이 놀린 말 가운데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그가 어떤 오류를 저질렀는지, 무엇보다 이후 어떤 수정 조치가 따를 것인지를 명시하는 2차 해명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따랐다. 이어서 폭주하는 멘션에 P씨는 답을 달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계정에 자물쇠를 채우지도 않았다.
—그래서 절필은 언제 하실 건데요?
—‘앞으로도’ 없다는 걸 보니 그러고도 계속 쓰긴 할 건가보네.
—어쨌거나 깔린 책은 회수 안 하시겠다는 거죠?
—최소한 이미 팔린 책에 대해서는 토해내시는 게 맞죠. 도의적 책임이라도 느끼신다면 말이지만.
—그동안 자랑질했던 카메라들도 인세니 계약금이니 받아 샀을 텐데. 다 팔고 기부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러자 다음날엔 2차 해명 대신 좀더 구체적인 감정을 담은 글이 올라왔다.
설정상 그렇게밖에 쓸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용 진행을 위해서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직업이나 처지나 성별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봐도 느낌이 살지 않아서 원래 생각대로 썼습니다.
첫번째 트윗이 30여회 리트윗되는 동안 P씨는 두번째 연결 트윗을 올렸다.
서로 다른 입장들을 고려하고 지나치게 균형을 맞추려다 전체의 그림이 어그러지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소설의 개연성과 완성도에 집중하는 게 맞다고 보았습니다. 현실에 아주 없는 일을 쓴 것도 아니고 소설적 과장과 허구가 들어간 겁니다.
그의 육성이 조금 더 추가되자 빠른 속도로 반응이 달렸다. 한시간 만에 200여회의 리트윗이 되고 타래는 이러했다.
—느낌 안 산다는 것도 자기 생각일 뿐. 어떻게 해도 느낌이 안 산다면 능력 부족의 증거.
—타인을 배려하고 균형을 맞추는 행위가 지나친 일이라는 분, 잘 가세요. 멀리 안 나가요.
—양념 반 후라이드 반도 아니고 언제 균형 맞춰달랬나요? 머리를 쓰고 공부를 하랬지. 누군가를 꼭 불편하게 만들고 싶으면 님이나 님 가족을 제물로 삼지, 왜 애매한 사람들을 갖고 그러는지.
—설정상 그렇게밖에 안 된다면 애당초 설정부터 바꿨으면 되는 문제잖아요? 출판사나 님이나 지금 계속 전체 그림 무너진다고 징징대는데, 그렇게 무너질 그림이면 처음부터 그리지를 말라고.
—그놈의 소설적 과장과 허구는 왜 만날 약자만을 대상으로 하는지 모를……
—그런 구린 방법을 써야만 내용 진행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가 얼마나 게으른지를 광고하는 거 아닌가…… 지금껏 버셨으면 이제 그만하심이.
—됐고, 그래서 지금 님한테는 이 개연성이랑 완성도가 만족스러운가보죠? 거기에 집중하느라 다른 걸 내다 버리셨다니까. 그것만 한번 말씀해보세요.
P씨가 입을 열수록 사태는 진정되기는커녕 게 자루를 풀어놓은 듯했다. 전체 타래 가운데 비웃음이 약 50퍼센트로 제일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30퍼센트가 맹비난이었다. 20퍼센트는 『가르강뛰아·빵따그뤼엘』이나 『인생의 첫출발』 같은 목록을 예로 들며 예로부터 풍자적 묘사란 기괴한 이방의 존재들, 신체가 뒤틀리거나 왜곡된 사람들,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이나 부스럼쟁이 등을 대상으로 이루어져온 만큼, 현대의 작가가 장애인이나 외국인을 오락적 소재로 삼았다고 하여 비난하는 것은 폭력적 염결주의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으나, 이는 P씨를 얘기하는데 본질을 벗어나서 이국의 라블레와 발자끄를 끌어오느라 먹물들이 퍽이나 애쓴다는 조롱과 함께 묻혔다. 그사이 시일이 두달 남짓 흘렀으므로 P씨의 신작은 자연스레 종합순위에서 자취를 감췄고, 그뒤로 미디어 판권이 계약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책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기회를 잃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 기억에서도 밀려났다. 매일 새로운 사건이, 주로 사고가 있었으며 그전의 사건은 너무 익어 발끝에 떨어진 무른 열매 같았다. 이미 출판사는 자사의 다른 신간 홍보에 집중하느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종 실용서와 교양인문서를 소개하는 중이었고, 실상 그런 책들이 더 많이 화제도 되고 팔려나갔으므로, P씨의 거취에 대해 출판사 계정에 문의하는 글은 곧 뜸해졌다. P씨의 계정에는 다시 일상적인 사진이 가끔가다 올라오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분위기 있게 찍힌 사진을 관성적으로 리트윗만 할 뿐 더이상 그의 지나간 책에 대해 캐지 않았다. 그것을 힐문할 만큼의 관심과 여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 타래를 떠나가 다른 주제에 집중하느라 P씨와 그의 사생활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새 책을 내놓음으로써 사정거리 안으로 재진입하기 전까지는.
그다음 해에 출간된 P씨의 다섯번째 전작장편소설은, 지난번 논란을 의식한 결과인지 상대적으로 안전한 수비 범위 안에서 인물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겪어내고 직접 부대끼며 살았을 가능성이 높은, 그러므로 현장감 좋고 굴절률이 작은 묘사를 기대할 수 있는 일상생활 테마의 가족극이기도 했거니와, 문제적 인물이나 상황이 줄었으며, 큰 굴곡 없이 평탄하다 가끔 완만한 곡선을 그린 뒤 제자리로 안착하는 갈등 구조를 지녔다. 그러고 보니 P씨는 이미 그전에도 불륜 묘사에서 증명한바, 다른 쪽의 역량은 몰라도 으레 중대히 다뤄질 법한 상황과 사건에 대해 호들갑을 떨지 않는 잔잔한 터치 감각 정도는 있었다. 샘물과 바람과 나뭇잎과 다람쥐 정도만 존재하는 듯싶은 세계를 그려내는 것도 재능이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서사를 한권 분량으로 흥미를 유지한 채 이끌고 나갈 엄두는 처음부터 내지 못한 듯, 인물들이 한번씩 폴리스 라인을 넘을 뻔했다가 돌아오는 고전적 패턴이 엿보이기도 했다. 오래 앓던 시모의 장례가 끝난 뒤 아내가 남편의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 한통만 남긴 채 트렁크를 끌고 가출하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바로 그녀가 중심 화자가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전에 내내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로 추정되는 30대 중반의 남자들만 전면에 내세웠던 P씨가 조금은 달라지려 노력했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한편 그녀의 고교생 딸은 학교를 일찌감치 떠난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가 일행의 꼬드김에 빠져 30대 중반의 회사원과 조건만남을…… 가졌다면 또다시 큰 파장을 일으켰겠지만, 사태는 그쪽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회사원은 아빠의 부하직원이었던 것이다.
몇가지 아슬아슬한 지점을 돌파하면서 용케도 휘청거리지 않은 이야기에 대해, P씨의 애독자들은 그전과 달라진 점이나 나아졌다고 판단하는 점을 꼽아 자기 블로그나 SNS에 올려놓았는데, 그중에는 몇몇 키워드 노출로 출판사의 의뢰를 받고 쓴 티가 심하게 나는 바이럴마케터들도 있었다. 작년에 있던 소란의 주인공 정도로 P씨를 기억하는 새로운 독자들은 호기심에 넘겨보았다가, 역시 사람들이 말리는 콘텐츠는 건드리는 게 아니라며 넌더리를 내곤 떨어져나갔다. 이번에 문제가 된 대목은 이러했다. 주인공 여성이 병든 시모를 쭉 모셨다는 대목부터가 고릿적 시절의 티브이 주말 대가족극에서 무한 반복 및 소비되는 맏며느리 이미지를 벗지 못했으며, 트렁크를 끌고 나선 정도가 무슨 대단한 일탈인 양 묘사되는 데 헛웃음이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그 와중에 그녀는 현관을 나서기 전 다섯시간에 걸쳐 집안 대청소와 식구들 빨래를 마치고 그걸 건조대에 하나하나 널어놓기까지 했다는 것. 특히 압권이었던 건, 상하지만 않는다면 남편과 아들딸이 열흘은 두고 먹을 수 있는 밑반찬을 대량 제조한 뒤 종류별로 투명한 밀폐용기에 나눠 담아 라벨까지 붙여놓고 냉장고 칸칸이 쟁여두었다는 점이었다. 누군가는 그 정밀 묘사에서 한국사회가 엄마에게 답습하기를 요구하는 모습의 전형이 느껴져 소름이 돋는 바람에 그대로 책을 도서관에 반납했다는 후기를 남겼다—마침 작성자 자신의 엄마 또한 수술을 앞두고 식구들 한달 치 반찬부터 걱정하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는 첨언과 함께.
한편 남편과 아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얘기가 없는데 왜 딸만 일탈 직전까지 가느냐 그것도 하필이면 엄마가 부재중일 때, 그건 여성이 위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나약하다고 부각하려는 의도이며, 엄마가 자리를 비운 책임이 그만큼 위중함을 강조하고자 조건만남 소재를 넣었다는 분석이 있었다. 더구나 만남의 상대가 하필 아빠와 같은 회사 직원이라는 우연의 타당성은 차치하고라도, 회사원은 상사의 딸이라는 걸 알지 못했는데도—딸이 남자의 정체를 알아본 이유는 아빠의 야유회 단체사진에서 본 얼굴이기 때문—그녀가 18세라는 걸 알자 근사한 저녁과 옷만 사주고 잘 달래서 돌려보냈다는 점이 수목 멜로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판타지라는 지적도 나왔다. 친구의 함정에 빠진 여학생이 순전히 남자 어른의 변심과 동정에 기대어 그 상황을 모면한다는 것으로, 문제 해결을 남자가 하도록 하여 여학생을 수동적 존재로 묘사하고, 그런 품위 있는 남자란 적어도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남성들 일반에 씌워진 혐의를 벗겨보고자 몸부림치는 작가의 작위가 느껴지는데, 그래봤자 애당초 조건만남에 응하여 그 자리에 나온 것부터가 이미 틀려먹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인물 묘사의 일관성마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결국 P씨는 이번에 큰맘 먹고 엄마와 딸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써보고자 했겠으나 실은 자신이 그것을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에 취했을 뿐, 사유 부족 또는 공부 부족으로 그전과 달라진 점은 없다는 종합 결론이 내려졌다. 그럼에도 소설의 절정과 결말은 비교적 순하게 흘러간데다 화제성과 판매 지수 또한 전 같지 않아서 예년과 달리 출판사의 계정으로 민원이 폭주하지는 않았고 다만 ‘당신이 집에서 부인을 어떤 존재로 취급하는지 잘 알겠다’ 내지는 ‘솔직히 말해봐요 조건만남 해봤죠? 여고생이 나오는 바람에 철창 갈까 겁나서 용돈만 쥐여주고 보내셨다거나?’ 정도의 비소가 한두달에 걸쳐 간간이 달렸다. 적어도 입장 표명이나 해명 요구의 움직임이 있던 전년도보다는 나았지만 나는 이번에도 P씨의 책을 장바구니 대신 기약 없는 보관함으로 옮기고, 누구에게든 선물할 생각을 접어두었다. 도대체가 이 시대에 책 선물이라니 어림 반푼어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세상 읽고 볼 것들 천지인데 원래 책이란 꼭 필요한 것만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된다고 보통들 여기니까. 신간에 대한 일반의 관심과 조소가 사라질 무렵, P씨는 그전의 누적된 멘션들에 대한 일종의 답을—이제 와선 누구도 새삼 확인하러 들어오지 않을 한마디를 올려놓고 또다시 SNS 휴식기를 가졌다.
현실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 중이며 무엇보다도 저한테는 아내가 없습니다.
그간의 글 모두를 털어 비로소 밝힌 P씨의 유일한 개인정보였다. 아내 없음.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세개의 반응만 달린 채 타임라인 바깥으로 밀려났다.
—현실에서만큼은,이라면 소설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다는 사실은 인정한다는 뜻인가요?
—소설을 읽고 상처받은 사람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닌가보네.
—와, 사람들 다 잊어버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줄 쓱 날리고 튀는 용의주도함 봐라. 안 물어봤어요, 안 궁금해요, 안 사요.
그리하여 이제 P씨의 가장 최근,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그는 두달 전, 지치지도 않고 반성도 없이 꾸준히 잘도 쏟아낸다는 눈총을 받으며 신작 장편소설을 출간했는데, 여느 때보다 볼륨이 좀 작았다. 판형이며 표지 일러스트까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느낌을 물씬 풍겨서, 이번에야말로 선물용이니 업어가라는 팬시한 오라를 서점 매장 진열대에서 뿜어내고 있었다. 내용과 설정은 그전보다도 한층 더 위험 요소—욕동(欲動)이든 열광이든 폭력이든, 하여간 식물적이지 않은 것들 가운데 위험하지 않은 게 있기나 한지 모르겠으나—가 빠져 있어서, 그런 P씨의 노력은 오래전 LP시대 국내 가수들의 앨범에 사이드A와 B의 마지막 트랙으로 꼭 한곡씩 수록되어 있던 「어허야 둥기둥기」를 비롯한 건전가요 목록을 떠올리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개과천선한 문제아들의 농구대회 출전 우승기라니, 대놓고 감동팔이를 노린 듯한 클리셰에 좀 너무 내려놓고 쉽게 간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푸르른 스토리와 인물들은 그가 더 이상 어떤 새로운 시도나 현실 반영 내지는 현실 변용을 하려는 의욕이 없다는 증거로 보였다. 그러나 그런 걸 필요로 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으니 이렇게 옷을 입고 나왔지, 어쨌거나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조난자가 된 사람들은 그런 맑은 서사를 구호물자처럼 여기기도 하며, 이야기책 속에서마저 비애나 고난을 목도하기 원치 않는다 하니. 일부 고정독자들은 냉소 가운데의 예기치 못한 폭소, 고소(苦笑) 가운데의 은근한 미소가 주력상품이었던 P씨가 차포 다 떼고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의구심과 실망 섞인 의견을 내놓았다. 잔잔한 것도 좋지만 정도껏, 이전에 그의 잔잔함에는 그래도 간과하지 못할 긴장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밋밋하고 굴곡 없고 좋은 게 좋다는 식이고 더이상 볼 필요가 없겠네요 하차합니다. 정말로 이제는 그만 써도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날카로운 면도날들을 저마다 혀 밑에 숨기거나 손끝에 꽂고 있어서, 종합순위 근처에도 가지 못한 이 농구 이야기 역시 서사의 포가 떠지는 걸 피해갈 수 없었다. 다섯명의 선수들은 모두 소년원 출신으로 각각 폭행상해 및 금품갈취는 기본이며 그중엔 강간미수마저 있는데, 그들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받은 사람들은 조명되지 않을뿐더러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은 채 그 존재가 페이지 밖으로 지워지고, 어째서 선량한 이들을 괴롭힌 범죄자들은 운동하는 동안 눈물 콧물 짜내는 시늉 좀 하다가 승리를 거머쥐는가, 그들에게 우승컵을 들고 환호를 올릴 자격이 있나, 그들은 자기들끼리는 반성회라고 가지면서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사과한 적 있나. 소년원에서 단체생활을 한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댓가를 치르지 않은 자들이 감동의 주역이 된다니 모순이지 않나. P씨는 어둠에 웅크린 아이들을 끄집어낸다면서 그들로 인해 더욱 깊은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들려주지 않았고, 각각의 아이들에게 주정뱅이 아비와 병든 어미 내지는 집 나간 어미를 비롯한 식상한 배경을 끼얹음으로써 그들은 비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는 손쉬운 면죄부를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이때 집을 나가는 사람이 꼭 어미라는 점에서 여성을 무책임한 존재로 묘사하는 작가의 의도는 더 부연할 가치가 없겠다). 양쪽의 고통을 나태한 붓으로 팔아먹는 이야기를 예쁜 그림 좀 얹어다 책으로 엮어내고 재미 좀 보겠다는 출판사는, 언제까지 그런 식의 장사를 계속할 텐가.
안 그래도 사진이 올라오는 간격마저 뜸해졌던 P씨의 계정은 그즈음 마침내 자물쇠가 채워졌고, 5만여명의 팔로워 가운데 이제 실제로 그를 지켜보는 소위 살아 있는 계정은 내 것을 비롯해 5천명이나 될까 싶었는데, 서점 매대에서 책이 내려가고 얼마 뒤 그의 계정은 삭제되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보여준 이야기의 임팩트가 그리 크지 않았으므로 그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거나 그걸 두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출판사 계정에 문의를 넣지 않았고, 출판사가 P씨의 근황을 꿸 만큼 그에게 공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나, 어쩐지 P씨는 소설가로서의 삶을 종료하고 자신의 일상이나 취미에 조용히 스며들었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봐도 부족한 말들의 숲을 어설피 배회하는 자가 될 것이며, 어디서도 그의 발자국을 다시 발견하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이.
문자메시지가 연달아 네개 도착한 걸 확인하느라 인터넷 창을 닫았다. 하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감방 가지 않게만 도와달라는 남동생의 문자. ‘누나 그동안 알게 모르게 벌어둔 거 내가 모르지 않거든’ 따위 말만 덧붙이지 않았어도 맘이 움직일 뻔했다. 그다음, 아버지의 검사 결과와 검사비 24만원이 찍힌 영수증의 사진 파일은 엄마가 보낸 거였다. 다음 문자는 큰형님한테서 왔다. 내일모레 제사에 몇시까지 올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예 형님, 저 아이들 학교 보낸 다음 바로 찾아뵐게요. 아이들은 학원까지 마치고 저녁때 시간 맞춰 오도록 할 거고요. 전송 아이콘을 클릭하고 마지막 문자를 열었다. 정말로 다 없던 일로 해도 괜찮으시겠어요? 선생님 의향을 존중할 거고요, 기지급된 계약금 200만원을 저희 쪽에 따로 돌려주실 필요는 없으세요.
거기에는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좀 이따 하교할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났다. 문득 다시 펼쳐보지 않을 책들의 일렬로 늘어선 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방을 나섰다. 돌보아야 할 남편과 아이들, 엄마 아빠 동생까지 있는데 유일하게 나한테 없는 건 아내였다…… 펜 끝에서 한번 번져나가기 시작한 말들이 그리는 궤적을 바라보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흘러가는 말들을 포착하여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은 물방울의 표면에 새겨나가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지금은 원래의 가장 올바른 자리로 돌아가기에, 그리고 말의 죽음을 맞이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