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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문승숙 외 『오버 데어』, 그린비 2017

행위자의 관점에서 본 미군기지의 역사

도덕적 비판을 넘는 성찰의 무게

 

 

이동기 李東奇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leedk@gw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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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군사기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유럽 중남부 지역의 옛 로마군 주둔지 유적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고대 유럽의 로마제국은 리메스(Limes)라는 이름의 북방 경계선 곳곳에 군 주둔지를 건설했다. 제국의 보위를 책임졌던 이 첨병기지들은 때로 2천년의 세월을 뚫고 그 흔적을 드러낸다. 로마제국 흥망사가 보여주듯, 제국의 발전과 유지의 토대는 단순히 경제나 동맹만도 아니고 군대규모나 무기기술만도 아니다. 군사제국으로서의 세계제국은 군사기지를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했으며 그곳 인간들의 삶에 깊은 낙인을 남겼다. 기지야말로 제국의 구체적 현실이었고 현존적 권력이었다.

20세기 후반 미국의 세계 지배와 점령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나 사회운동 차원에서 관심이 시종 높았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그 세계제국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토대인 군사기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미군기지는 군사동맹의 맥락에서 안보정치의 당연한 귀결로 무심히 받아들여지거나, 반대로 제국(주의) 지배의 강제와 폭력범죄의 소굴로 여겨져 정치적 비판과 도덕적 질타의 대상이기에 바빴다. 그런 점에서 미군기지에 대한 협애한 분석을 넘는 체계적인 연구는 반갑고, 그것을 통해 인습적 시야를 넘는 비판의 전망과 성찰의 근거를 갖는다.

미국 바사대학의 두 학자 문승숙과 마리아 혼(Maria Höhn)이 저자로 참여하고 편집한 『오버 데어: 2차세계대전부터 현재까지 미군 제국과 함께 살아온 삶』(이현숙 옮김)은 냉전 초부터 현재까지의 해외주둔 미군기지에 대한 촘촘한 연구다. 그것은 미군기지의 군(인)과 지역사회의 관계를 정면으로 다루며 군사사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즉 냉전과 냉전 직후 세계 지배를 위한 미국 무장권력의 조직적 담지자인 해외주둔 미군의 구체적 현실과 미군 병사들의 생생한 삶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이때 군을 전쟁 준비나 수행의 ‘제도’로만 다루지 않고 사회 구성요소로 보며 기지를 매개로 지역의 경제와 사회와 일상의 연관관계를 포괄한다. 이 책은 치외법권적인 군사기지와 미군 병사와 지역주민들이 교류하는 곳인 ‘오버 데어’에 대한 심층연구를 통해 미국의 냉전 수행과 제국 지배의 물질적 층위를 두텁게 밝힌 전체사회사적 냉전연구의 모범이다. 게다가 독일과 한국 및 일본의 미군기지에 대한 비교를 감행하고 해외주둔 미군의 세계적 동시성과 연루를 함께 살핀 야심작이다.

두 편저자들에 따르면, 미군과 주둔국 사회 간의 권력관계는 평등 정도에 따라 세가지 수준, 즉 가장 평등한 서독(독일)과 가장 불평등한 한국 그리고 서독과 한국의 중간 정도인 일본과 오끼나와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들은 평면적 비교나 정적인 대비에 만족하지 않고 주둔국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삶의 개선에 따라 미군과 주둔국의 관계, 즉 주둔군지위협정(SOFA) 규정과 미군 지도부의 미군 관리정책이 지속적으로 변화했음을 밝혔다. 이때 이 책은 주둔국 사회를 미국의 제국정치에 수동적으로 조응하는 ‘단순한 졸’로 보지 않는다. 1부 ‘감시받고 있는 관계’의 3개 장은 전후 초기에 서독과 한국과 일본에서 미군 병사들의 성생활과 지역 여성들의 매춘업 고용 및 종사에 주둔국의 정책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비교 고찰했다. 서독정부는 미군과 독일 시민들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미군의 공격적인 성욕 추구 행위로부터 ‘정숙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제한된 지역에 사창가를 건설하도록 미군 지도부를 설득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경제발전을 계기로 미군 기지촌이 쇠락하면서 미군들이 찾는 유흥공간은 주로 대도시에 집중되었다. 반면, 한국정부는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지촌 성매매 산업을 독려하고 조장했다. 박정희정권은 1970년대 초 기지촌 정화활동 등을 통해 성노동 여성들을 더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함으로써 주한미군의 ‘깨끗한 성관계’를 보장해주었다. 오끼나와와 일본의 경우도 초기에는 자국 하층민 여성을 미군을 위한 성노동자로 모집하고 감시함으로써 한국과 마찬가지로 신식민주의적 성착취의 양상을 보였다.

미군과 주둔국 정부와 지역민들 사이의 복합적 연관관계와 관련해 가장 흥미로운 장은 10장 ‘1971년 미군 내 인종갈등 위기’(마리아 혼)다. 1970년을 전후해 서독주둔 미군은 흑백 병사 간 인종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위기에 봉착했다. 변화의 동력은 서독사회에서 나왔다. 당시 서독 학생운동가들이 시민권운동에 영향을 받은 급진적 흑인 미군들과 연대활동을 벌이자 냉전대결에서 정치적 수세에 몰릴 것을 우려한 미군 지도부는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인종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미군 내 흑인인권개선을 위한 사무소 설립과 인종문제에 대한 민감성 워크숍 운영 등을 포함한 다양한 인종차별철폐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아울러 서독정부도 흑인 미군들을 겨냥한 서독 주민들의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팔을 걷었다. 반면, 유사한 인종 갈등과 차별을 겪은 주한 흑인 미군들은 어떤 해결책도 얻지 못한 채 지역주민들과 직접 충돌을 겪었다. 미군 내 인종차별의 부담은 고스란히 한국의 기지촌 여성과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주한미군 지도부는 흑백 간 인종차별을 위해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않았다. 한국정부도 한국의 성노동자들이 평등하게 흑인 미군들을 접대하도록 교육하는 것 외에 다른 방안을 강구하지 않았다. 독일과는 달리 한국의 경우, 기지촌 성노동자들은 애국심과 국가안보의식을 주입받으며 미군 내 인종갈등의 부담을 전적으로 떠맡아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군사사의 관점 확대와 냉전사 맥락의 강조 및 비교사의 지평 개척을 통해 큰 학문적 자극을 제공한다. 하지만 더 큰 학문적 장점은 젠더와 성과 인종과 계급의 경계와 층위들을 서로 가로지르는 특별한 시도를 전개했다는 점이다. 이 책은 미군 내부의 인종이나 계급 차이 및 복무기한과 가족동반 여부에 따라 다양한 행위양식이 생겨남에 주목했고 동시에 미군을 접대하는 성노동자들이나 미군과 교제하는 현지 여성들을 그저 수동적 존재로만 보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행위주체성(agency, 역자는 이를 원어 발음대로 에이전시라고만 옮겨놓아 의미전달에 성공하지 못했다)을 부각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이를테면, 5장에서 크리스 에임스는 오끼나와와 일본 본토 여성들의 상당수는 단순히 생계를 위해서 매춘에 종사하거나 성폭력의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고 미국에 대한 판타지를 지닌 채 고유한 동기와 주체적 욕망을 갖고 미군과 교제했음에 주목했다. 미군이 제공해준 치외법권지역의 혼성공간에서 다양한 행위자들이 주체적인 방식으로 인종과 젠더와 계급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과정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것은 주한미군에 복무했던 카투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문승숙은 카투사가 미군 병사들에 비해 계급적으로나 학력에서 평균적으로 우위에 서 있음을 자각하고 백인 미군 여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제국의 군사적 지배서열에 균열을 냈던 것에 주목했다.

‘오버 데어’ 속 다양한 행위자 집단의 주체적 인지와 고유한 동기를 강조하는 것이 그 혼성공간의 구조적 불평등과 폭력 발현의 편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행위자들의 주체적 능동성에 주목할 때 비로소 기지촌의 혼성공간이 지닌 불평등구조와 차별의 장벽들을 무너뜨리는 현실적 접근이 가능함을 함축한다. 지금 당장 미군기지를 철폐할 수 없다면 혼성공간의 뒤엉킨 삶들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더 평등하고 투명하고 비폭력적인 ‘오버 데어’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숱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으로 미군기지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 혼성공간에서 형성되거나 왜곡되는 냉전 이데올로기나 군사주의 또는 행위자들의 자아상과 타자상의 양상들이 더 해명될 필요가 있었다. 이 책은 행위자의 관점에서 ‘오버 데어’의 일상을 드러내고 있지만 더 다양한 집단생애사를 포괄하지 못했기에 ‘미군 제국과 함께 살아온 삶’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로는 미진하다. 이를테면 기지반대운동가들의 곡진한 삶이 빠져 있는 것은 아쉽다. 미군기지와 그 행위자들의 삶이 지닌 역사적 연속과 불연속 및 변이와 전환이 계기적으로는 잘 드러나 있지만 일국 내 정치적 사건과 군사적 위기 및 문화접촉과 인적 네트워크의 지평 속에서 더 다양한 현실적 실체가 밝혀질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오버 데어’도 언젠가 리메스의 로마군 주둔지처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흙더미 속 고고학적 발굴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그 간단치 않은 도정의 탄탄한 초석이 될 것이다. 경북 성주의 사드 배치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요즘 이 책을 통해 미군기지에 대한 다양하고 비판적인 토론이 새롭게 일어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