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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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인숙 金仁淑

1963년 서울 출생.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칼날과 사랑』 『유리 구두』 『그 여자의 자서전』 『안녕, 엘레나』, 장편소설 『핏줄』 『그늘, 깊은 곳』 『꽃의 기억』 『우연』 『봉지』 『소현』 『모든 빛깔들의 밤』 등이 있음. sunisok99@gmail.com

 

 

 

아주 사소한 히어로의 특별한 쓸쓸함

 

 

산불을 본 적이 있다. 지방 국도를 달리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길이 막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상습 정체구간이 아니었고 차가 막힐 이유가 없는 시간대였는데도 그랬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뻣뻣해진 목을 풀기 위해 반대편 차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뭔가 분명히 이상했는데, 반대편 차선의 운전자들이 모두 룸미러로 뒤를 보며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대편 차선 역시 약간의 정체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고속도로급의 국도에서 뒤를 바라보며 달린다는 건, 제정신이 아닌 생각이었다.

그는 반대편 도로 운전자들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길게 뽑아 보았다.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길가로 나와 서 있는 것이 멀리 보였다. 사고를 구경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반대편 차선을 바라보았는데, 여전히 그쪽 운전자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뭘 봤길래 저럴까.

전방으로 갑자기 확 솟아오르는 불길이 보인 건 그때였다. 비명인지 감탄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터져나왔다. 불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야말로 엄청났다. 마치 저기 어디쯤, 산 하나가 통째로 불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그는 꿈을 꾸듯이 차에서 내려섰다. 흡사 정지되었던 화면이 바로 그때부터 돌아가기 시작한 것처럼 불타는 냄새가 쏟아져오고, 그을음이 날아오고, 불타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고속도로로 쏟아져나온 사람들이 일제히 질러대는 소리가 들리고, 소방차 싸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는 감전이라도 된 듯 진저리를 쳤는데,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의 진동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멍한 시선으로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전화기를 들고 내렸구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고, 액정에 뜬 전화번호가 회사 동료라는 걸 알았고, 그가 왜 아직도 회사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지를 추궁하는 전화이리라는 걸 알았고, 산 하나가 통째로 불타든, 세상 전부가 불타든, 달라지지 않는 건 달라지지 않은 채 돌아간다는 걸 알았다.

 

K와 같은 버스를 탄 게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아주 많이 늦기는 했지만 그는 어쨌든 회사로 돌아왔고, 차량을 반납했고, 그리고 회식 중이라는 부서원들을 찾아 고깃집으로 향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이 곧바로 퇴근을 해도 됐지만, 그는 산불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는 본부장이 함께 있었다. 아마 우연한 합석이었던 듯한데, 간부는 간부답게 부서원들에게 소고기를 시켜주고, 시답잖은 농담과 격려를 하는 중이었다. 부서원들 중 누구도 그에게 왜 늦었는지 묻지 않았고, 그 역시 무슨 말이든 끼어들 기회가 없었다. 그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먹고 마셨다. 본부장이 자리를 뜨기 직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요샌 왜 이렇게 불이 많이 나나 몰라,라고 중얼거렸는데 아마 포털 메인에 산불뉴스가 뜬 듯했다. 그는 그 산불을 자기가 봤다고, 물론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K와 같은 버스를 탔고, K가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자신에게는 순간이동을 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이다.

 

훅 갔다 오는 거야. 어디든.

 

K와 같은 버스를 탄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K는 최근에 이사를 했다는데, 새로 이사한 집이 그와 같은 동네에 있었다. 그들이 사는 동네, 서울의 북쪽에 있는 신도시로 가는 퇴근길의 버스는 늘 만원이었지만, 그날 그들은 운이 좋게도 둘 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주 잠깐 동안 폭등하는 서울의 아파트 전셋값과 좀처럼 오르지 않는 그들 동네의 아파트 가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는 곧바로 각자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흔들어 깨우는 듯한 느낌에 눈을 떠보니 K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K의 눈이 붉었다. 그가 잠들어 있던 동안, 내리 울었던 사람처럼.

그런데 문제는 거기가 내가 의도한 곳이 아니고, 또 그 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서 거기가 어딘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거지. 그래서 증명이 안 된다는 거지. 그래서 누구도 안 믿어준다는 거지.

그는 그냥 듣기만 했다.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누구도 안 믿어준다는 거지.

K는 같은 말을 한번 더 반복했다.

버스는 그때 실내등을 끈 채로 외곽순환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세상은 어둡고, 버스는 만원이고, 버스 천장의 고리에 매달린 사람들은 둥근 고리와 함께 둥글게 흔들리고, 그는 옅은 취기와 졸음으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다시 자고 싶었지만, 그러나 예의를 다해 물었다.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데?

그냥 훅.

훅?

눈 깜짝할 사이에, 그냥 훅.

K는 이제 앞을 보고 있었다. 살짝 통로 쪽으로 고개를 틀고 있어서 옆모습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K의 귀가 쪽박귀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그 귓가로 자라난 흰머리가 눈에 띄게 덥수룩하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와 K는 동갑이었다.

그날, K는 대체 얼마나 취해 있었던 것일까. 편안한 회식자리가 아니었으니 누구도 취하도록 마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K에게서는 술 냄새보다는 숯 냄새, 그리고 숯에 탄 고기 냄새가 더 많이 풍겼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중간하게 취해 있거나 어중간하게 깨어 있었고, 만원인 직행버스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고기 냄새와 숯 냄새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K와 똑같았고, K는 그와 똑같았다.

사실은 말이지.

그는 K에게 말했다.

난 오늘 산불을 봤어.

하지 말았어야 했다. 순간이동을 하는 남자 앞에서 기껏해야 산불 구경 이야기라니. 게다가 산불이 ‘고작, 겨우, 기껏’이 되어버리다니. 그는 부끄러웠고, 까닭을 알 수 없게도 몹시 쓸쓸한 기분이었다.

 

그의 회사 근처에는 피규어를 파는 상점이 있었다. 피규어가 장난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것들에 붙어 있는 놀라운 가격표 때문이었다. 어떤 피규어는 그의 월급 전부를 털어야만 할 정도로 비쌌는데, 그런 걸 누가 사랴 했지만 ‘가게’가 아니라 ‘숍’에 가면 그 정도는 오히려 싼 축에 속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가게와 숍의 차이는 장난감과 피규어의 차이와 같았다.

그곳에서 K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가게 앞에서였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는데, K는 근처 치과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고, 그는 살짝 멋쩍은 표정으로, 아들이 곧 생일인데 애가 이런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뭐 이딴 게, 지랄맞게 비싸다고, 욕을 섞어 덧붙였다. K는 이가 많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뺨에 대고 있는 한 손을 떼어내지도 않은 채로, 찡그린 얼굴로, K는 말없이,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어깨만 툭툭 두드렸다. 위로하듯이, 혹은 격려하듯이.

K에게서 순간이동 이야기를 들은 후, 그 장면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 어디에든 갔다 올 수 있다는 K는,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는 K는, 정작 자신의 치통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어디 치통만 그렇겠나. 변비도 그렇고 배탈, 설사도 그렇겠지.

K와 다시 순간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할 기회는 없었다. 다른 어떤 일반적이고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기회도 없었다. 같은 버스를 탈 일도 더는 없었는데, K가 자신의 집 앞에서 내리는 더 빠른 노선을 알아냈기 때문이고, 그걸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그였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같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그 점심을 간혹 한 테이블에서 먹기도 하고, 회식 자리에서는 옆자리에 앉거나 마주 앉기도 했다. 그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K를 지켜보려고 했으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자신이 눈 깜빡할 사이에 K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말았는지, 어쨌든 K는 늘 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K의 얼굴이 가끔 쓸쓸하다고 여겨졌는데, 그러나 그건 순간이동의 비밀 때문이 아니라 끝없이 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업무 때문이고, 나이 때문이고, 월급 때문이고, 건강 때문이고, 상승하는 전셋값에 관한 뉴스 때문일 터였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들 모두의 쓸쓸함, 누구에게도 특별할 것이 없는.

그렇더라도 그는 K가 왜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가 궁금했다. 왜 굳이 그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피규어 가게 앞에서 그와 마주친 적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가 결국 값이 너무 비싼 피규어도, 값이 너무 싼 조잡한 장난감도 사지 못했던 걸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혹은 그날 오후에 그가 목격했던 산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 회식자리에서 어쩌면 K는 산불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그의 기색을 눈치챘던 것인지도 모른다. 홀로 술이 올라 있던 본부장의 격려사는 지겹기가 짝이 없었고, 호응하고 박수치고 웃어줘야 할 포인트는 자동적으로 주어졌고, 그래서 모두들 한꺼번에 딴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여전히 산불을 목격한 흥분에 사로잡혀 있던 그를 바라보며 K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저 정도로 안달이 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K는 오래전에 사표를 내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K가 해주었던 말이다. 사표를 품에 지니고 있던 그 하루, 실은 고작 반나절, K의 얼굴이 바로 그랬었다고 했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거의 불덩이 같았다고. K는 바로 그 자리에서 품에 지니고 있던 사표를 꺼내 찢어버리는 대신 손을 씻던 물에 적셔버렸는데, 사표가 젖어가는 속도로 K의 얼굴 역시 젖어들었다. 슬픔이 아니라 안도 때문에, 환멸이 아니라 평화 때문에. 아무튼 간에, 저자의 흥분은 무엇일까, K는 생각했을 것이다. 사표 따위를 낼 위인은 못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본부장에게 입 닥치라고 말할 용기는 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보다 딱 한 끝만 덜 간절한, 그러나 정말이지 하고 싶은 말이란, 여보세요, 부서 사람들, 실은 나는 말입니다, 슈퍼맨이랍니다, 그쯤은 돼야 하지 않을까, K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실은 그렇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도 않았을 터인데, 택배회사의 직원인 그들은 영업소의 차량기사도 아니고, 거리를 미친 듯이 달리는 퀵 딜리버리맨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을 대충 스피드맨쯤으로는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K, 그 자신은 순간이동도 하지 않는가 말이다.

 

피규어를 파는 가게에서 빈손으로 나온 후, 아들의 생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도 그는 아무 선물도 사지 못했다. 중학생인 아들은 그 나이답게 히어로를 좋아했다. 한동안은 거의 마니아급이었다. 히어로의 세계에 디씨와 마블이 있다는 것도 그는 아들을 통해서 알았다. 아들은 마블 팬이었다. 우주에서 날아온 슈퍼맨보다는 엄청난 부자에다가 잘생기고 신형 장비들이 짱짱한 아이언맨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아들이 아니라 그의 해석이기는 했다.

전처와 사는 아들과 만날 때마다 그는 히어로 영화를 보고, 히어로 피규어를 사고—아니 히어로 장난감을 사고, 히어로 이야기를 하면서 햄버거나 피자를 먹었다. 그런데 이 히어로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들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히어로들이 뉴욕에만도 5천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세계적으로 활동하는, 혹은 잠시 잠수를 타고 있는 히어로들까지 합친다면 그 수가 어느 정도나 되겠는가. 그는 뉴욕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 만일 히어로의 날 같은 게 있어서 세상의 모든 히어로들이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모인다면 그건 정말이지 장관이겠다 싶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실례지만 무슨 히어로신지?

아 그렇습니까? 저는 이런 히어롭니다.

아 그러시군요. 저쪽 저분도 비슷한 히어로시던데. 그럼 전, 우리 소그룹 쪽으로 이만.

그런 상상을 해보면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본 히어로 영화 속에서는 히어로들의 능력이 그와 같이 웃기는 수준인 게 아니라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서, 누구는 무엇이든 부술 수 있고, 누구는 무엇이든 불태울 수 있는데, 또 누구는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고, 무엇에도 불타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 불행히도 그는 그런 영화들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그가 깨어 있는 건 오직 도무지 잠들 수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화면과 엄청난 소리 때문이었다. 상영시간 내내 그는 불타는 영화관에 있는 느낌이었다. 한꺼번에 활활 불타오르는 영화관이 그는 뜨겁고 불편했다. 노력하기는 했지만, 끝없이 노력하고는 있었지만, 그는 정말이지 어떻게 해도 영화 속 그 히어로들의 이름을 외울 수 없었고, 그 이름과 능력을 매치시킬 수가 없었다. 아들과의 대화는 자주 끊겼고, 아들은 그가 자신의 눈치를 살핀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했고, 화를 내다가, 그 화를 참기 시작했다. 중2병. 사람들은 그런 걸 중2병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아들의 생일을 앞두고 그는 아들과 통화를 했다.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랜만에 연결이 된 통화였고, 너무나 바빠서 다음다음주, 또 그 다음주쯤에야 그를 만나줄 수 있겠다고 아이가 허락해준 날짜는 지난번 만남으로부터도 근 반년, 어쩌면 거의 1년쯤이 지난 날이었다. 생일을 사흘 앞둔 날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바쁘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바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고, 그래서 아이가 바쁜 건 정말 다행한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아이의 전화기가 꺼져 있는 경우는 없었지만,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 안내멘트를 들을 때마다 그는 아이가 아마도 공부 중인 모양이라고 혼자 생각하며 안심했다.

아이와 만나던 날, 그는 아이보다 먼저 피자집에 도착해,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건널목 건너편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아이를 지켜보았다. 파란불이 켜지자 아이는 마지못한 듯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했다. 지난번보다 조금은 더 커졌나.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바라봤다. 적어도 아이가 지난번보다 조금은 더 빠르게 걷는 건 분명했다. 그를 만나고 싶은 열망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자랐다는 뜻이고, 그만큼 보폭이 커졌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성장속도를 이기지 못해, 아이는 만나기가 귀찮고 성가신 아버지를 1분쯤 더 빠르게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는 아이와 피자를 먹고, 운동화를 사고, 영화를 볼 작정이었다. 최근에 본 영화에서 이혼을 한 아버지가 전처와 함께 사는 아들에게 운동화를 사주는 장면을 보고, 왜 모든 이혼한 아버지들은 전처와 사는 아들에게 운동화를 사주는지가 궁금했었다. 심지어 그는 운동화 매장에서 이혼한 회사 동료가 아들을 데리고 온 걸 본 적도 있었다. 불행히도 서로 눈이 마주쳐버린 그들은 멋쩍게 웃으며 눈인사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쩐 일인지 그후부터 그들은 회사에서 마주쳐도 서로를 피했고, 회식자리에서는 결코 가까운 자리에 앉으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혼한 전처가 키우는 아들에게 운동화를 사주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소린가.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선물, 창의적인 선물이 필요했다. 아이는 더는 초등학생이 아니었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창의적인 대화, 부끄럽지 않은 대화, 그런 거.

그는 아들에게 산불 이야기를 했다. 그게 얼마나 엄청났는지. 세상에 산불을 직접 보다니, 놀랍지 않니? 아이는 빨대로 콜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산불을 끄러 달려오던 소방차 행렬의 싸이렌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화제를 바꿔야 했다. 실은 그 자신에게조차도 산불을 본 놀라움과 감동 같은 건 이미 없었다. 그러니 무슨 얘기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는 K의 얘기를 했다. 아빠가 어떤 사람을 아는데, 그 사람이 글쎄 말이다, 그런데 웃기는 게 얼마나 빨리 갔다 오냐면… 아이가 빨대에서 입을 뗐다.

그래서 그 사람은 뭐를 하는 사람인데요?

어……

그는 당황했다. 질문도 질문이었지만 존댓말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이에게는 말끝을 흐리는 나쁜 습관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는 아이의 달라진 말투를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잘 지냈니, 물었을 때는 고개만 끄덕였고, 뭘 먹을래, 물었을 때는 턱 끝을 올릴락 말락 메뉴판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었다. 그런데 지금, 마지막 물음표까지 똑똑하게 존댓말로 발음을 하고 있었다. 물음표에도 존댓말이 있다면, 분명히 그런 어조로. 그러니까 따지듯이. 그는 당황한 채로, 어쩌면 겁을 먹은 채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아이가 말했다.

아빠,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다고… 그래…

 

아버지, 세상에 히어로 같은 게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아버님, 세상에 히어로 같은 게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버지, 그만하세요. 아빠, 입 닥쳐!

 

그가 아들에게 주눅이 드는 이유는 아들과 같이 살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들이 무얼 좋아하는지 몰랐고, 지난번에 좋아하던 걸 여전히 좋아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지난번에 외웠던 아들이 좋아하는 히어로의 이름을 그사이에 또 까먹어서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게 다 섞여 있기는 했지만,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그 아이의 어머니와만 이혼한 게 아니라 또다른 아이의 어머니와도 이혼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두번의 이혼, 그리고 두명의 아들, 그 아들들을 데리고 사는 두명의 전처. 한번의 이혼과 두번의 이혼은 정말로, 아주 많이 달랐다. 첫번째 이혼이 슬픔이었다면 두번째 이혼은 좌절에 가까웠고, 첫번째 이혼이 상처였다면 두번째 이혼은 실패에 가까웠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치심이 있었다. 자신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실수를 고치지 못할 것이라는, 그러니까 첫번째 이혼도 굳이 할 필요는 없었을 거라는, 더 따지고 들어가면 아예 결혼 같은 것도 하지 말고, 아이 같은 것도 낳지 말았어야 했다는……

두번째 아들, 이제 여섯살인 그 아이도 그 나이의 아이답게 히어로를 좋아했다. 다행히도 그 아이가 좋아하는 히어로들은 다들 꽤나 유명해서 그도 별 노력 없이 이름을 외울 수 있었다. 그러니까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뭐 그런 평범한 히어로들. 그리고 그 아이는 피규어가 아니라 장난감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아직은 창의적인 생일선물이 필요한 나이가 아닌 것이다. 물론, 창의적인 대화도.

그 여섯살짜리 아들을 만나던 날, 티브이에서 산불 소식이 계속 속보로 올라오고 있었다. 불은 좀체 잡히지 않았고, 산등성이를 넘어가며 다시 타오르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무서운 불,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산불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었다. 아이의 축축한 손이 그를 건드리는 걸 느끼고 쳐다봤을 때, 아이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땀까지 흘릴 정도로 그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며칠이 지나도록 K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그 산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안 한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기회도, 그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못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여섯살짜리, 두번째 전처가 키우는 둘째 아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얼마나 굉장했는지, 얼마나 뜨거웠던지, 얼마나 활활 타던지, 얼마나 무서웠던지, 다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 아이는 마치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이 물었다.

 

그래서 아빠가 불 끌 거야? 그럴 거야?

 

불은커녕… 그는 두번째 전처가 키우는 여섯살짜리 둘째 아들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혼자서만 생각했다. 갑자기 불이 홀랑 다 타버린 것 같은 마음으로, 이렇게.

불은커녕, 아빠는…

아비이기는커녕, 위자료는커녕, 인간이기는커녕…… 첫번째 아내가 그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그나마 에둘러 해준 말이었을 터이다. 그냥 거두절미 말하고 싶었을 텐데. 대책 없는 인간, 뻔뻔한 자식, 어쩌면 쓰레기. 왜냐하면 그들이 같이 살던 동안 그녀가 가장 빈번히 했던 말이 바로 그거였으니까. 쓰레기 좀 치워, 그 쓰레기 좀 치우란 말이야! 첫번째 아내와 살던 당시 그는 영업소에서 일을 했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택배 박스들과 쏟아져 나가는 박스들. 쏟아져 들어오는 트럭들과 쏟아져 나가는 트럭들. 그리고 쏟아져 들어오는 매입기록과 쏟아져 나가는 매출기록들. 현장에 있으면 세상이 얼마나 거대하게 돌아가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그래봤자 그 거대한 박스들의 행렬은 박스와 박스의 집합일 뿐이었고, 그 박스 안에는 모조 장신구와 값싼 옷들과 고양이 모래와, 생수 묶음과 간장게장과 굴비와, 다시 한번 고양이 모래, 그 빌어먹을 고양이 모래, 고양이 모래들일 뿐인데. 그 사소하고 자질구레하고 구질구질한 생활의 찌꺼기들은, 그러나 박스에 실려 다시 다른 박스들과 만나 쌓이고, 다시 쌓이고, 탑차 하나, 탑차 둘, 탑차 셋을 채워가며 거대한 세계가 되었다. 그래봤자 고양이 모래, 빌어먹을 고양이 모래들일 뿐인데.

첫번째 아내는 아들 하나와 고양이 두마리를 키웠다. 고양이들이 똥과 오줌으로 만들어내는 쓰레기는 많기만 한 게 아니라 대단히 무겁기도 해서 그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은 그가 전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내는 아들의 똥을 치우고, 그는 고양이들의 똥을 치웠다. 아내는 아들의 똥이 묻은 기저귀와 고양이 똥이 뭉친 모래를 쓰레기봉투에 넣고, 그는 그 봉투를 치웠다.

쓰레기 좀 갖다 버려, 그 쓰레기 좀 갖다 버리라고, 이 쓰레기야!

그가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사람에서 쓰레기가 되어버리기까지의 과정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특별히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라 너무나 평범해서였다. 그걸 깨닫게 된 건 두번째 결혼이 실패할 즈음에 이르러서였다. 왜 자신은 똑같은 걸 다시 한번 반복한 후에야 그 잘못을 깨닫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말하자면 복습. 예습은 없는데 복습만 있는 것 같은 삶, 그러고도 또 틀리는 것이다. 한번 틀린 문제는, 영원히, 완전히 교정되지 않는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또 한번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러고는 또 아들을 낳을지도 모르고, 세번째 아내는 또 고양이를 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첫번째 아내가 키우는 첫째 아들과는 피자집 앞에서 헤어졌다. 같이 볼 만한 영화도 없었고, 신발도 새것인 게 분명했다. 피자집 앞에는 버스정류장이 있었고, 아이가 탈 버스가 거기에서 섰다. 배차 간격이 드문 버스였다. 그는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렸다. 아이가 휴대전화와 함께 손에 쥐고 있는 오만원짜리 지폐 몇장이 계속 눈에 거슬렸다. 그가 생일선물로 아이에게 준 돈이었다. 중2인 아이가 받기에는 충분히 넉넉한 돈이었으나, 괜찮은 피규어를 사기에는 모자랄 터였다.

생일선물로 비싼 피규어를 사지 않은 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아이가 여전히 히어로 마니아인지 히어로를 좋아하기나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중2쯤 되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창의적인 선물이란 결국 돈일 거라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당연하다는 듯 돈을 받아 그걸 주머니에 집어넣지도 않고 마치 그를 무시라도 하듯이 손에 쥐고 있는 아들의 태도는 그를 괴롭혔다. 일년에 두번만 만날 수 있어도 아들에게 훈계를 했을 것이다. 계절에 한번만 만날 수 있어도 야단을 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년에 한번 만나는 아들에게 그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때 길 건너 건널목에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그와 같은 동네로 이사를 온, 바로 K였다. K가 아들이 건너왔던 건널목의 건너편에 서 있었다. 뜻밖의 발견이었던 때문일까. 어찌나 반갑던지 그는 아이의 손을 움켜쥐면서 거의 외치듯이 말할 뻔했다.

아빠가 말한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야! 순간이동!

정말로 그러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만일에 그랬다면 앞으로 또 일년 후에나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아이를 어쩌면 훨씬 더 오래 기다려야 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어쩌면 정말로, 그에게 닥치라고 말했을 지도 모른다.

아이가 버스를 타고, 그가 그 버스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데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K였다.

여긴 어떻게?

그는 물었다. 버스를 타고 왔는지, 자기 차를 타고 왔는지, 아니면 순간이동을 해서 왔는지 물었던 것인데, K는 피자를 사러 왔다고 대답했다. 방문 포장을 하면 배달시키는 것보다 10프로가 더 싸다나. 그는 K를 쫓아서 다시 피자집으로 들어갔다. K의 피자가 나올 때까지 그는 K와 함께 잠시 전 아이와 함께 앉았던 자리에 앉아 신도시의 아파트와 전셋값 시세를 얘기했다.

피자집은 그들이 사는 신도시의 공원 건너편에 있었다. K는 아내와 아이들과 공원에 놀러 온 참이었고, K의 아내와 아들들은 공원에서 그가 사올 피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말이야.

K가 말했다.

공원에서 오늘 애들이 핫도그를 사먹었거든. 피자를 사먹을 줄 알았으면 핫도그를 안 사주는 건데, 그땐 피자까지 사달랄 줄 몰랐지.

그는 듣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혹시 배터리맨이라고 알아?

그는 여전히, 듣기만 했다. 이 자식이, 이번에는 순간이동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배터리맨인지 뭔지라고 말하려는 걸까.

그런 사람이 있더라고. 몸에서 전기가 난대. 비바 뭐라고 하는 사람인데, 저기 동유럽 어느 나라 사람이야. 정말로 사람이라고. 만화가 아니라.

그런데?

말을 거들지 말았어야 했다. 실은 피자집에도 따라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 내일이면 회사에서 또 만날 사람인데, 뭐하러 이렇게까지 했을까.

그자가 말이야. 어느날, 비가 내리는 날에 친구들이랑 어떤 펜스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는 거야. 그런데 그 친구들 중 하나가 펜스에 무심코 손을 갖다댔다가 그냥 나가떨어졌대. 감전이 된 거지. 난리가 나지 않았겠어? 비바, 그자도 놀라서 소리를 질렀는데, 그때 자기가 펜스를 움켜쥐고 있더래. 소리를 지르는 내내 펜스를 붙잡고 있었다는 거지. 친구들이 그걸 보고는 나가떨어진 놈이 장난을 치는지, 펜스를 움켜쥐고 있는 놈이 장난을 치는지 아리송해진 거지. 안 그랬겠어? 그런데 멀쩡한 걸 멀쩡하지 않은 것처럼 꾸미기는 쉬어도 그 반대는 어렵지 않겠어? 공갈은 나가떨어진 놈이 친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너도 나도 펜스에 손을 댔다가 다들 한꺼번에 나가떨어졌다는 거야.

그래서?

비바, 그자를 봤는데, 소시지를 굽고 있더라고. 맨손으로. 자기 몸으로 전기를 일으켜서 말이지. 포자 뭐라고 하는 동유럽 어디던데, 거기가. 그런데 그 소시지 냄새가 얼마나 리얼하던지…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나더라고. 팔았으면 샀을 텐데… 뭐, 그럴 마음이 들 정도로 냄새가 좋았다는 얘기야.

테이블 위에서 대기표가 진동을 했다. K가 피자를 가지러 일어섰고, 그는 그사이에 말도 없이 피자집에서 나왔다. 거리에는 일요일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의 몸속에서도 뭔가 뜨겁고 쨍한 것들이, 불타는 것 같은 것들이, 감전될 것 같은 것들이 부글거리고 있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K에 대한 분노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에 대한 분노이겠나.

K는 그를 우습게 보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우습게 보기 시작하니 계속 그렇게 된 것이다. K는 이제 기회가 될 때마다 그를 쫓아다니며 그를 조롱할 작정인 것이다. 지난번에는 순간이동이었지만 이번에는 소시지를 굽는 배터리맨이고, 다음번에는 어쩌면 투명인간일지도 모른다. 그가 회사 화장실에서 똥을 누고 있는 동안, 그 비좁은 칸에 순간이동으로 들어와 같이 끼어 앉아서는 그에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투명인간의 슬픔을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피자집으로 들어갔다. 막 포장피자를 들고 나오는 중이던 K와 문 앞에서 마주쳤는데, 마주치자마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좀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우스워? 내가 만만해? 내가 그렇게 우습냐고? 그는 연이어 외칠 작정이었다. 그때 K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였다. 정말로, 훅…… 정말로, 훅 그는 어딘가엘 다녀왔고, 그 눈 깜짝할 사이에 무언가를 보았다. 미친 게 아니라면 분명히 그랬고, 분명히 그럴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잠깐 미쳤던 것이 틀림없었다.

 

배터리맨, 비바 스트라자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K의 말처럼 10대 시절의 어느날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알게 된 비바는, 나중에 그 능력으로 소시지를 굽게 되는 비바는 놀라운 능력만큼이나 놀라운 감동을 느꼈다. 그의 능력은 하늘에서 떨어진 횡재 같은 선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일종의 댓가이고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배트맨이 아버지를 잃고, 슈퍼맨이 자신의 별을 잃은 뒤에야 갖게 되는 능력들처럼 그가 겪고 있는, 겪어온, 또 겪어야 할 고독이나 고통에 대한 보상.

그는 무한증 환자였다. 없을 무(無), 땀 한(汗). 태생적으로 땀을 흘릴 수가 없는 몸이라는 것이다.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 흘릴 수 없다는 것이 어떤 고통을 수반하는지, 땀을 흘릴 수 있는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라고 비바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축축한 땀을 흘리는 사람들은, 뜨겁고 숨 가쁘고 들척지근한 땀을 쏟아내는 사람들은, 온몸을 쥐어짜내듯이 뻘뻘 땀을 흘려내는 사람들은.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은 몸의 냉각장치가 고장났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팬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팬이 돌아가게끔 설계된 기계에 팬이 딱 멈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팬이 돌아가지 않는 그는, 대개의 날들을, 개처럼 헐떡이며 살았다. 혀를 길게 내빼고, 헉헉헉헉. 물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바짝 메마른 몸으로, 헉헉, 헉헉. 땀 대신 침을 줄줄 흘려가며, 헉헉, 헉헉. 더위가 시작되는 늦은 봄부터 여름의 끝까지, 그는 죽어 있는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 불을 뿜어내는 그는, 전기를 만들어내는 그는, 순간의 존재, 순간의 자아였다. 살아내게 하는, 그 순간으로 버티게 하는, 다시 죽어 있는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는, 더는 개처럼 헉헉거리게 하지 않는.

비바, 배터리맨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지만, 또한 현실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뛰어들 것을 결심했다. 비범한 능력이기는 했으나 그 능력이 세상을 구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또 자신이 세상을 구해야 하는지, 구해야 한다면 어떤 세상을 구해야 하는 건지 그런 고민을 하느라 골머리를 썩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즐겁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장 큰 장기는 몸으로 만들어내는 전기로 소시지 굽기.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의 재능이기도 했다.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많아서 그와 같은 무대에서 소개되는 사람들 중에는 유리를 먹는 사람도 있고 쇠못으로 자신의 몸을 찔러대는 사람도 있었다. 관객들은 좋아하지 않았고, 비바는 그런 사람들의 능력을 의심했다. 그는 달랐다. 그는 진짜였다. 그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통돼지를 구워낼 수는 없었다. 산불을 일으키기는커녕 쓰레기통 하나도 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소시지는 얼마든지 구울 수 있었다. 그는 구워야 할 소시지를 사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의 고향인 세르비아 포자레바츠에서 마사지 일을 시작했다. 전기마사지. 소시지를 굽듯이 그의 고객들의 아픈 관절과 예민한 신경을 구워주었다. 그리고 돈을 받았고, 소시지를 샀고, 사람들을 위해 공짜로 소시지를 구웠고, 그 댓가로 돈을 벌었다.

 

언젠가 K와 함께 옥상에 있던 적이 있었다. 둘 다 담배를 끊기 전, 둘은 옥상 난간에 기대어 32층 아래를 같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늦게 출근하는 회사들의 늦은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시간대였던 걸로 기억한다. 점심을 끝내고 돌아오는 회사원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회사원들로 뒤섞여 거리는 분주하고 활기차고 나른하고 쾌활했다.

갑자기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었다. 갑작스레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는데 그 빗방울이 난데없이 굵었다. 그와 K도 비를 피해 몸을 옮겼다. 잠깐 사이였는데도 그의 흰 와이셔츠에는 빗방울 자국들이 남았다. K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는 빗방울 하나 피하지 못하는 K였던 것이다.

그토록 사소한 능력을 가진 K가, 그러나 그의 손목을 붙잡았을 때,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들이 타고 있는 버스 안에 있었다. 훅 하는 사이, 눈 깜짝할 사이, 그는 아들이 오만원짜리 지폐를 움켜쥔 손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는 것을 보았다. 아이의 얼굴에 얼룩진 눈물자국이 길게 남았다.

그러나 본 것일까, 느낀 것일까, 상상한 것일까. 눈 깜짝할 사이, 훅 할 사이는 그토록 짧았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런데도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팠을까. 왜 그렇게 저미도록 아파 견딜 수가 없었을까.

그는 다시 산불을 생각했다. 그 산불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렸을까. 한번도 눈에 띄지 못한 삶,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삶, 소리없이 조용히, 영원히 그럴 것 같은 삶,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을까. 실패조차, 슬픔조차, 쓸쓸함조차 너무 별 볼 일 없어서, 산불 하나 본 게 그리 대단했을까.

산불에 넋이 나가서 차에서 내렸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서 쥐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걸어온 회사 동료는 K였다. 고속도로에 쏟아져나온 사람들의 소리와 불타는 소리와 소방차 소리 때문에 그는 K의 목소리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산불을 바라보며, 어어, 어어어, 와아아, 우우우, 하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날, K와 같이 버스를 탔었다. 그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려야 하는 K가 ‘조심해 들어가’ 말하면서 그의 손등을 건드렸었다. 다음 정거장이면 내려야 했으므로 그는 다시 졸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그 잠깐 사이에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창밖의 신도시로,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가난한 동네로, 세상의 모든 히어로들이 퇴근을 하고 있었다. 배트맨이나 캡틴아메리카 아이언맨과는 견줄 수 없는, 물론 슈퍼맨, 헐크, 토르와도 비길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사소한 히어로들이, 누군가는 날아서, 누군가는 절름발이 늑대처럼 절뚝절뚝 달려서, 누군가는 잠자리 같은 날개를 퍼덕이며, 누군가는 담뱃불 같은 불을 뿜어내며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소한 히어로들의 피로한 퇴근길 풍경이었다.

그때, 창밖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누군가가 쓰윽 미소를 지으며 순식간에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슬쩍 윙크를 하고는 다시 자기 갈 길을 가는 거였다. 너도 이제 우리 팀이 됐구나, 하는 듯한 윙크였다. 기왕이면 우리 소모임으로 들어와,라고 하는 듯도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아니라면 누구도 보지 못할 장면이라는 걸. 산불이 났을 때 반대편 차선 운전자들의 눈까지도 들여다보았던 그가 아닌가.

산불을 봤을 때처럼 흥분되지는 않았지만, 쓸쓸하고 달콤한 꿈이었다. 그 꿈에는 적어도 보통의 쓸쓸함이 아니라 특별한 쓸쓸함이 있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단 말인가. 너무나 사소해서 빗방울 하나 못 피한다 해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어떻게 해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없을 거라는 걸. 그러나 그는 이제 특별한 쓸쓸함이 뭔지는 알 것도 같았다. 적어도 그 쓸쓸하고 달콤한 느낌이 뭔지는 알 것 같았다.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사소한, 그래서 비루하기까지 한, 그러나 누구에게나 특별한, 아니 오직 자신에게만 특별한. 그걸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 그도 어쩌면 저 사소한 히어로들의 소그룹 하나쯤에는 끼어들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초대장은 이미 도착했다. 이제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