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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용준 鄭容俊
1981년 광주 출생. 200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장편소설 『바벨』 등이 있음. sfcyjlove@naver.com
눈구름
1
어때요.
해영은 말을 멈췄다가 한 호흡 쉬고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이 정도면 조건이 되나요?
닥터 한은 틀어진 안경테를 바로잡았다. 야구모자가 만든 그늘에 숨은 눈동자 두개가 한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한은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한은 왼쪽 가슴 포켓에서 펜을 꺼내 들고 차트를 뒤적이며 뜸을 들였다.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일부러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유해영씨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운 거군요.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건 생각 자체는 아무 힘이 없다는 겁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사실을 바꾸지 못하고 반성이 죄의식을 지우지 못합니다. 자학한다고 해서 새 의미가 생기지도 않죠. 다시 말해 최면을 걸듯 자신에게 어떤 생각을 주입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이건 결국 해석의 문제죠. 사람들은 생각만큼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상처받은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강박적으로 좋은 상태 아래 놓으려고 해요. 그러나 그 느낌과 해석은 불확실하죠. 다른 노력을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그렇게 내성이 생기는 겁니다.
해영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개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한은 의자를 끌고 책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좋아요. 좋아요. 그럼 물어보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일부터 십까지.
해영이 날카롭게 외쳤다.
십일.
내내 고요했던 해영의 급작스런 소리에 한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일반론… 지겨워요. 무의미한 이야기 그만두고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한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안경 안으로 두 손을 집어넣어 마른세수를 했다. 양미간에는 어느새 칼로 그은 듯한 날카로운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 해영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한 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스스로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불안정해 보입니다.
아니요. 멀쩡해요. 선생님. 시험할 필요 없어요. 전 모든 걸 걸고 왔어요.
한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상이 깊군요. 이건 제 영역 밖입니다. 다른 의사를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소울트레인 방화사건. 서준. 그분의 추천으로 왔어요.
해영이 말했고 진료실엔 침묵이 흘렀다. 한은 마비된 사람처럼 꼼짝 않고 서 있기만 했다. 그 시간은 실제로 일분쯤이었지만 한에겐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기압이 바뀌어 공기가 희박해진 것처럼 호흡에 불편을 느꼈다. 한은 마른기침을 몇번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협박인가요?
아니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아니, 그렇게 생각하셔도 할 수 없어요. 제겐 더이상 방법이 없거든요.
어떤 경계가 있다는 건 말입니다.
차분했던 한의 말투가 스타카토처럼 툭툭 끊어졌다.
어떤 의미론, 안쪽을 지켜주는, 그러니까 울타리 같은, 그런 겁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위태로운 낭떠러지로 변하죠. 하물며, 그걸, 뛰어넘으려고 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어요.
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은 흔들림 없는 해영의 태도에 결국 빙긋 웃고 말았다.
2
‘감정을 없앴대요.’ 트레이를 정리하던 해영은 그 말을 듣고 살짝 고개를 돌렸다. 수간호사 김간과 박간이 시트를 갈며 대화하고 있었다. 교정직 간호사로 있던 박간은 한달 전부터 병원 혈액투석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해영이 아는 거라곤 더는 수형자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일을 그만뒀다는 것과 틈날 때마다 교도소에서의 경험을 자극적으로 풀며 사람들과 친해진다는 것뿐. 해영은 들리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척 투석기를 만지며 귀를 기울였다. 박간은 질린 표정으로 혀를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 끼치네요. 그 사람, 누군지 알아요?
구겨진 시트를 손바닥으로 평평하게 만들던 김간이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소울트레인 방화범.
박간은 무표정한 얼굴로 꼿꼿이 서서 엄지와 검지를 핀셋처럼 만들어 관자놀이에서 뭔가를 집어 쑥, 뽑아내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하더니 ‘농담이에요’라고 말하는 거 있죠?
으으으. 김간은 헌 시트를 돌돌 말아 빨래를 짜듯 움켜쥐고 몸서리쳤다.
나 같으면 무서워서 못 있을 것 같아.
그들은 다음달 스케줄에 관해 이야기하려다 근처에 해영이 있는 걸 보고 눈을 흘기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그들은 멀어졌지만 해영의 귀에는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렸다. 수도 없이 병원을 옮겼다. 소문은 소멸되지 않는 불길한 먹구름처럼 해영의 주위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딜 가나 사람들은 해영에 대해 속삭였다. 처음엔 그 이야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불온한 것으로 취급하면서도 말하고 또 말했다. 그들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일부러 해영이 없는 곳에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는 말은 반드시 해영의 귀에 닿았다. 해영은 그들 앞에 내적인 고통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들은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당신은 그럴 자격도 없다.’ 해영의 편에 선 이들도 있었다. ‘힘내라.’ ‘네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해영은 그런 말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그들의 호의와 따뜻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뜻한 말 속에 얼음이 박힌 것 같고 부드러운 표정 이면엔 냉혹한 얼굴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한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두발 세발 도망가는 해영은 점점 더 고립되어갔다. 해영은 투석기 앞에 서서 튜브를 손에 쥐고 속을 빠르게 오가는 붉은 피를 가만히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평소 같았으면 동료들의 말과 눈빛에 상처를 받았겠지만 이번엔 그게 아니었다. 감정을 없앴다고? 감정을…… 그 순간 투석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튜브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해영은 꿈에서 깬 듯 튜브를 내려놓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복도 끝에서 카트를 끌고 처치실로 들어가는 박간이 보였다.
박간은 처치실 문을 닫고 들어와 자신 앞에 선 해영을 보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병원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는데 가장 먼저 듣고, 많이 들은 이야기는 해영, 정확히 말하면 해영의 쌍둥이 동생 유해경에 관한 것이었다. 박간은 경계심을 보이며 불안한 눈으로 해영을 바라봤다. 해영은 박간에게 감정을 없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박간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다짜고짜 말을 거는 해영을 무시하려 했으나 해영은 문 앞을 막고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명을 듣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그 눈빛에 박간은 위협을 느꼈다. 박간은 소울트레인에 불을 지른 뒤 출구를 걸어 잠그고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타 죽을 때까지 태연하게 지켜본 수형자에 대해 말했다. 수감된 지 3년 만에 급성신부전을 앓고 왼쪽 신장을 제거해야 했던 것과 어깨의 정맥에 도관을 삽입하는 혈관수술 중 혈관이 터진 일에 대해 말했다.
그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어깨에서 솟아오르는 핏줄기를, 그 피가 상의를 붉게 적시는 모습을 쳐다보더군요. 그 눈은 황홀하게 젖어 있었어요. 뭐랄까요, 막 태어난 작은 것들을 바라보는, 예뻐 죽겠다는 그런 눈 있잖아요. 난 황급히 거즈로 그의 어깨를 강하게 누르고 지혈을 했죠. 그는 태연했어요. 괜찮은데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는 듯 무심히 나를 보고 있었죠. 두려웠어요.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귓가에 그 사람의 더운 숨결이 느껴졌거든요. 무슨 말이든 해야 했어요. 그래서 이 말 저 말 횡설수설했고 신장을 떼어낸 일에 대해 말했죠. 괜찮다고 안심을 시켰어요. 생활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죠. 그는 말하더군요.
여기까지 말하면서 박간은 손으로 귀를 비비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기묘한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난 이미 다른 것도 없앴거든요. 그리고 말없이 나를 쳐다봤어요. 마치 그게 뭐냐고 물어봐달라는 듯이 말예요. 난 물었죠. 그게 뭔데요? 그는 팬터마임을 하는 것처럼 옆머리에서 뭔가를 뽑아내는 시늉을 했어요. 그리고 말하더군요. 감정.
감정. 그게 무슨 의미지? 해영은 머릿속에 총구멍이라도 난 듯 멍하게 서 있었다. 해영은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현실로 돌아온 박간은 경계하는 얼굴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그 꼴 더는 보기 싫어 그만둔 거라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해영을 봤다. 이제 그만 비켜주시죠. 그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해영은 새벽 내내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김간은 넋을 잃고 복도 한가운데 차트를 들고 선 해영에게 소리를 질렀다. 평소 작은 일에도 트집을 잡는 김간이 흐트러진 해영을 가만둘 리 없었다. 그러나 해영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의 해영은 뇌가 망가진 임팔라 같았다.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려 피가 질질 흐르는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 무심히 앞으로만 걷는.
퇴근 후 아침. 해영의 엄마 소아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철제 압력솥에 담긴 전골이 가스레인지의 중간불 위에서 끓고 있었다. 그녀는 푸른빛이 도는 어두운 주방에 서서 초점 없는 눈으로 기포가 터지는 걸쭉한 회색 국물을 바라봤다. 해영은 엄마의 어깨를 붙잡아 조심스럽게 끌어 의자에 앉게 도와주었다. 소아가 해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들은 갔니?
해영은 오랫동안 반복된 무미건조한 어투로 대꾸했다.
바깥엔 아무도 없어.
소아는 어깨에 닿은 해영의 손길을 뿌리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런 식으로 날 위로할 필요 없어. 저렇게 계속 수군대고 있는데. 아무도 없다니. 사린, 사린, 사린, 이렇게 말하고 있잖아.
해영은 엄마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수렁의 밑바닥에 무기력하게 누워 미안합니다. 제가 죽일 년입니다. 사린, 사린, 중얼거리는 불행한 여인. 해경이라는 악인을 낳은 죄인 중의 죄인. 죽일 년 소아. 해영은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커튼으로 창을 가려도 환한 방. 해영은 정수리를 가린 부분가발을 뜯어내고 피곤한 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벽을 보고 몸을 웅크린 해영의 눈동자에 휴대폰 액정화면이 반사됐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 강박적으로 사건사고를 검색하고 댓글을 확인했다. 테바(tebah)가 운영하는 블로그와 트위터에 들어가 그가 찍어 올린 까페의 풍경과 두꺼운 철학서, 만년필로 노트에 적어 내린 히브리어를 봤다. 리트윗한 강력사건들과 그것에 관한 몇줄의 냉혹한 평가도 읽었다. 팔로워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피해자의 억울함을, 가해자의 끔찍함을 잊어선 안 됩니다.’ 해영은 그가 올린 글을 읽을 때마다 불덩이를 삼키는 것 같았다. 이건 언제 끝나는 걸까? 호흡이 가빠지고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져 손에 쥐고 있는 걸 바닥에 던져버렸다. 자야 한다. 자야 한다. 자고 싶다. 자고 싶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눈은 감기지 않고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해영은 무의식적으로 정수리에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뽑아냈다. 둥글게 탈모되어 두피가 하얗게 드러난 부분이 조금 더 넓어졌다. 그 순간 해영의 머릿속으로 섬광처럼 그 말이 떠올랐다.
‘감정을 없앴다.’
해영은 책상으로 달려갔다. ‘소울트레인’을 검색해 몇몇 기사를 읽어 방화범의 이름을 알아냈다. 종이를 펴고 펜을 들었다. TO,라고 쓰고 한참 뒤. 서준씨,라고 썼다.
3
어느날부터 날아든 편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상한 사람들은 언제나 있고, 너무나 많으며, 앞으로도 있을 테니. 범죄자를 심판하려는 이들과 욕하는 사람들, 존경이니 사랑이니 자신을 높여대는 덜떨어진 아이들까지. 이 편지도 그렇고 그런 편지인 줄 알았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통이 오고 두통이 왔다. 열통이 삼십통으로 오십통이 칠십통으로 늘어났다. 어떤 날은 하루에 세통씩 오기도 했다. 서준은 어느 순간부터 유해영의 편지를 기다리게 되었다. 처음엔 아무 맥락 없이 신세한탄을 늘어놓았지만 점점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괴로움에 관해. 의구심과 울분, 슬픔에 대해. 증오와 미움. 이해할 수 없음과 견딜 수 없음. 해경이라는 동생. 죄와 죄의식에 관하여. 발신자는 편지가 깊은 바다라도 되는 듯 모든 걸 집어던지고 있었다. 비밀과 감정이 녹아 있는 편지의 문장들은 불 꺼진 밤 봉투에 담겨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불면이라는 느낌을 몰랐던 서준은 쉬이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였다. 편지에 적힌 여러 문장들이 뒤섞여 하나의 말로 귓가에 들렸기 때문이다.
더 나빠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더 나빠집니다. 바닥에 있는데도 계속 추락하고 있습니다. 죄의식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더군요. 사과하고, 사과하고, 사과했어요. 정말이지 난… 사과하는 데 지쳤어요. 단 한번의 사건이 내 삶을 틀었고 그건 남은 삶의 전부가 되었죠. 심장이 있던 자리에 돌이 들어 있고 두뇌는 상한 두부처럼 변해버렸어요. 사람들이 던진 말은 사라지지 않아요. 침대에도 누워 있고 화장실에도 쌓여 있고 허공에도 둥둥 떠다닙니다. 그것들이 하는 말을 멈추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내가 가여워요. 잠들어 있을 때도 나는 두 팔을 휘저어 무언가와 싸우고 있어요. 시시각각 얼굴 없는 적들에게 포위당한 채.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깨무는 작고 날카로운 이빨들. 꿈속까지 잠식한 정체불명의 죄의식. 유해경이라는 이름. DNA가 동일한 쌍생의 운명. 깨고 나면 몸 전체가 시뻘건 심장이라도 되는 듯 세차게 뛰고 있어요. 계속 남의 탓을 해보려 했습니다. 끔찍한 일을 저질러버린 동생과 그를 낳은 엄마. 나를 욕하고 저주를 퍼부은 사람들. 내 탓만 하기엔 너무나 힘이 들어 누구라도 탓하고 싶었거든요. 억지로라도 죄책감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기분이 들면 차라리 나아요. 그걸로 겨우 하루를 달래고 잠들었어요.
가끔씩 끝을 올리며 묻는 문장들은 서준의 고요한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 심정 아나요? 사방이 너무 어두워 냄새가 날 것 같은 날들을?
해경은 날 어둠으로 쑤셔넣고 저 혼자 빛의 세계로 사라져버렸어요. 그런데 그건 해경이 내게 한 일일까요? 그저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걸까요?
궁금해요. 일정량의 벌을 받으면 죄는 사라지나요? 죄의식은 옅어지나요?
그는 매일 책처럼 읽어 알게 된 한 사람의 토로에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질문 앞에서 쉽사리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내내 골똘해져야 했다. 편지는 항상 같은 문장으로 끝이 났다.
P. S. 부탁해요. 내게 감정을 없애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마침내 서준은 98번째 편지로 인해 답장을 하기로 결심한다.
또 익명의 메일이 왔어요. 이름은 숨기고 있지만 그자를 알고 있어요. 지난 5년간 끈질기게 날 찾아내 계속 정죄한 사람입니다. 동생이 저지른 일을 잊지 마라. 피해자들의 고통을 생각해라. 그걸 속죄하며 살아라. 물 한잔도 편하게 마셔서는 안 된다. 유해경은 악마다. 그런데요…… 들지 않아요. 아무리 반성하고 깊이 생각해도 동생이 악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서준은 해영에게 답장했다.
당신의 말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할 말이 있습니다. 나를 만나러 오세요.
4
두꺼운 이중창과 철망을 사이에 놓고 해영과 서준은 마주 앉았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관찰했다. 가슴 왼편에 붉은 명찰을 단 사형수는 초췌했다. 창백한 피부와 움푹 꺼진 두 뺨. 오랫동안 바늘을 꽂아 두껍게 부풀어 오른 팔목의 푸른 정맥이 쇠잔한 몸 상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팽팽하게 오른 목의 힘줄과 한쪽으로 빗어 고정시킨 단정한 헤어스타일은 그가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서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해영의 눈을 쳐다봤다. 좀처럼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두개의 회색 눈동자. 마치 카메라 렌즈처럼 활짝 열려 있었으나 표정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살인자의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지 못한다. 두려워하거나 반대로 흥미를 갖는다. 그러나 편지의 발신자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했다. 간절함 하나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욕망이 단순하거나 모든 종류의 욕망이 파괴되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서준이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해영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감정을 떼어내고 싶다고 했죠. 지금도 그렇습니까?
네.
고개만 끄덕이세요. 편지로 도와달라고 한 건 혹시 내가 감정을 떼어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가요?
해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서준은 고민에 빠진 얼굴을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감정을 없앴다는 건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느껴지는 감정을 없앨 순 없어요. 다만 몇몇 부분을 바꿀 순 있지요. 나의 경우엔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만 소실시켰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떤 생각에 잠겼다. 잠깐이지만 입술 끝이 부드럽게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졌다.
그건…… 정말 편리해요.
미소는 금세 지워졌고 그는 단호한 얼굴로 해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당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열어버릴 겁니다. 그게 무엇일진, 아무도 모릅니다. 없애고 싶은 게 뭐죠?
해영은 눈을 깔고 한동안 침묵했다.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죄의식. 아니, 죄책감. 아니, 아니, 죄가 없는데도 죄가 있다고 느끼는 모든 것. 그냥… 나는… 기분이 나아지고 싶어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죠. 해경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고 난 가족이니까. 회개하라 해서 성당에 간 적도 있어요. 시키는 대로 무작정 기도를 했죠. 정말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흐르더군요. 그러나 그건 내 신세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지 죄가 있다고 느끼진 않았어요. 난 그 애가 밉지 않아요. 해경을 변호하려는 건 아니에요. 나쁜 일을 저질렀죠. 나도 증오하는 마음이 들면 좋겠어요. 그러면 편할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순간은 오지 않더군요. 도리어 동생의 영혼을 돌봐달라고 빌고 있는 나를 발견할 뿐이었죠. 만약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 일을 저지르기 전의 해경을 만날 수만 있다면 내가 그 애를 죽일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이상 동생을 욕하지 않겠죠. 내가 지은 죄로 당당하게 욕먹고 죄책감을 느끼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아요. 더는 이런 걸 느끼고 싶지 않아요.
격양된 해영의 소리에 면회실의 교도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을 마치고 해영은 놀랐다. 자신이 그렇게 할 말이 많았는지, 혹은 그런 말을 할 기운이 있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던 것이다. 감정이 격해지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해영은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울지 않으려고 입 안쪽의 살을 깨물며 애를 썼다. 누군가에게 심지어 혼잣말조차 그런 식으로 말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서준은 손가락으로 튀어나온 혈관을 꾹꾹 누르며 잠자코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굴 소개시켜줄게요. 그를 찾아가세요.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그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 당신이라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을 겁니다.
뒤돌아 면회실을 빠져나가려던 서준은 교도관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아와 한마디 더 했다.
내가 그걸 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는 일도 없을 겁니다. 당신도 그렇게 될지 모릅니다.
해영이 물었다.
후회하나요?
클럽의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지른 뒤 태연하게 그걸 감상해 사형을 선고받은 수형자는 허를 찔린 듯 부드럽게 웃은 뒤 고개를 젓곤 손을 들어 교도관에게 이만 가자는 신호를 줬다.
5
나는 그걸 태풍의 눈이라 부릅니다.
안경을 벗어 탁자에 놓고 한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안구를 마사지하며 입을 열었다.
순결한 그 텅 빈 눈동자가 무심히 지나갈 때 일어나는 일들. 의도치 않게 저지르게 되는 것들. 이유도 모른 채 거세게 부는 바람. 황폐화되는 삶의 조건들. 그 때문에 겪게 되는 끔찍한 감정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돌이키려 할수록 점점 끔찍해져만 가죠. 그러니까 제가 해드리는 건 그 눈을 감겨드리는 겁니다. 태풍이 지나간 깨끗한 평원에 서본 적 있으십니까? 강풍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강한 고기압으로 맑게 갠 하늘 아래 서 있는 느낌.
한은 창문을 열고 하늘을 보며 낮은 음색으로 노래를 불렀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모습을 보고 해영은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두려움과 떨림. 매혹과 공포. 양극단에 서서 양쪽을 향해 달리기를 시작한 두개의 상반된 마음. 다른 말은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하루빨리 깨끗한 평원에 서보고 싶었다. 한은 노래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해영을 쳐다봤다.
죄의식이라고 했죠? 좋아요. 그걸 감겨드리죠. 의식하지 않으면 거리낄 게 없죠. 당신은 용감해질 겁니다. 그러니까 용기가 생기는 거죠.
해영은 입술을 살짝 움직여 용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눈을 감기면 다른 눈이 떠집니다. 아시겠지만 눈길이 머무는 곳으로 손과 발은 움직입니다. 가치판단 없는 순수한 눈동자. 어떤 이들은 그걸 악이라고도 하고 선이라고도 하죠…… 당신이 만난 그 친구에겐 불꽃이었고 어떤 이에겐 파괴였어요. 어떤 이는 난해한 수식에 대한 탐구심이 어떤 이에겐 온종일 돌을 조각하는 열정이 생겼죠.
이래도 괜찮겠냐고 묻고 있는 한의 눈을 해영은 외면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둡고 우울한 방의 축축한 침대에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던 날들을. 언제든 죽을 수 있도록 병원에서 훔쳐 서랍 깊숙이 숨겨놓은 포타슘 두병을 눈앞에 떠올렸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이미 난 반쯤 죽어 있고 확실하고 완벽한 죽음도 서랍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날 이후 내 삶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 죽음보다 더 끔찍했다. 세상에 그것보다 나쁜 게 뭐가 있을까? 이미 난 죽음 이후의 지옥 밑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셈이다. 나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무섭다. 내가 무엇이 되든 어디를 가든 지금보다 나을 것이다. 해영은 다시 한의 눈을 쳐다봤다.
지금 느끼고 있는 걸 끌 수만 있다면 무엇이 오더라도 상관없어요.
한은 안경을 쓰고 옷걸이에 걸어둔 가운을 집어 들었다.
기억엔 변화가 없을 겁니다. 다만 경험에 대한 해석은 모두 초기화됩니다. 백지가 되는 거죠. 그 기억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일지 다시 쓰면 되는 겁니다.
해영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은 의자에 앉아 해영과 눈을 맞췄다.
쉽게 말해 나쁜 기억이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강제적이고 영구적인 기억정리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기억은 남고 ‘나쁜’만 사라지는 겁니다. 공감한다는 건 인간의 아름다운 가치 같은 게 아닙니다. 그저 뇌에 본능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는 따라하기에 불가하죠. 그저 거울같이 가해자처럼 죄의식을 느끼고 피해자처럼 고통을 느끼죠. 하지만 상상력은 그걸 더욱 증폭시켜 과민하게 느낍니다. 난 그 거울을 깨버릴 겁니다.
해영은 한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두렵다. 떨린다. 무섭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한은 중간중간 해영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뒤를 돌아보며 느리게 걸었다. 그리고 어느 문 앞에 섰다. 아무 표식도 설명도 없는 하늘색의 철문이었다.
유해영씨. 지금 우리가 나눈 대화는 그저 이상한 생각 혹은 나쁘다면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가설에 불가하지만 하고 나면 진짜가 되는 겁니다.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지요.
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당신의 경우엔 뭐였나요? 어떤 눈이 떠졌죠?
한은 문에 손가락을 대고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입술을 열어 작게 속삭였다.
호기심. 타인들에겐 어떤 눈이 숨겨져 있는 걸까? 난 그걸 참지 못합니다. 자, 들어가시죠. 우리는 서로 이걸 너무도 원하는 것 같군요.
6
다음날 해영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일어나는 걸 느꼈다.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일고 곧 크고 작은 소용돌이가 생겨나 어지러움을 느꼈다. 머리가 물에 젖듯 무거워졌고 이내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얼음을 급하게 먹을 때 느껴지는 좁고 날카로운 느낌이 뇌의 어느 부분을 꽉 조였다가 놓는 것 같았다. 해영은 짧게 신음을 내뱉고 몸을 동그랗게 말며 머리를 감쌌다. 그렇게 십초쯤 흘렀을까. 통증도 어지러움도 무거운 느낌도 모두 사라졌다. 해영은 서서히 몸을 펴며 눈을 떴다. 변색된 아이보리색 천장. 같은 높이의 베개. 익숙한 이불의 감촉과 냄새. 여전한 방의 풍경. 모든 것이 똑같았다. 그러나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해영은 눈을 깜박깜박 뜨고 감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요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눈을 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소리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도로에 타이어 자국을 남기며 브레이크를 밟는 자동차. 배관을 지나는 물소리나 윗집에서 함부로 의자를 끌고 부주의하게 발뒤꿈치로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발소리. 거실에선 엄마가 칼을 쥐고 도마를 내려치는 소리나 기이한 주문 같은 혼잣말이 사린, 사린, 사린, 반복되어 들려왔다. 누군가 귓가에 스피커를 붙여놓은 듯 해영에겐 그 모든 소리들이 견딜 수 없게 끔찍했지만 자력으론 끌 수 없었다. 그런데 조용하다. 마치 일순간 태풍이 소멸된 것 같았다. 해경의 일 이후 해영은 이런 기분을 처음 느껴봤다. 그 순간 한의 말이 떠올랐다. ‘태풍이 지나간 뒤의 깨끗한 평원.’ 무의식적으로 정수리 근처로 손을 옮겼다. 머리카락을 뜯진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만질만질한 부분을 만졌다. 짧고 부드러운 솜털들이 마치 병아리 털처럼 돋아났다. 귀엽다는 생각에 웃기까지 했다. 해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손바닥으로 옆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사라졌어. 정말 사라졌어.
해영은 이국의 도시를 걷듯 느린 걸음으로 박스가 쌓여 있는 집 안을 돌아다녔다. 언제 또 이사를 가야 할지 몰라 이젠 이삿짐도 풀지 않고 임시적으로 살고 있다. 주민들이 단체로 몰려와 항의하고 때론 문 밑으로 편지를 밀어넣기도 했다. 이사를 가달라는 것. 두려워서 잠을 잘 수 없으니 떠나달라는 것. 이러는 우리들의 마음을 이해해달라는 것. 그때마다 소아는 허리를 굽혀 사과했고 서둘러 이사를 갔다. 그렇게 수없이 이사했고 어느 순간부턴 전입신고도 하지 않게 됐다. 창문에 종이를 붙이고 커튼으로 햇빛을 가렸다. 책이 든 박스 위에 겨울옷이 든 박스가 있고 그릇이 든 박스 위에 신발과 가방이 든 박스가 있다. 그 위로 옷을 걸고 재활용 쓰레기까지 쌓아둔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삶이었다.
상자에 붙은 테이프를 뜯어냈다. 입구가 열리자 뒤섞여 있는 잡동사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영은 헝겊 인형과 화병을 꺼내 쓰다듬고 스노우볼을 뒤집어 안을 바라봤다. 눈 덮인 작은 마을에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해영은 태엽을 네바퀴 돌렸다. 오르골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살갗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예쁘고 맑은 음. 해영은 허밍으로 멜로디를 따라했다. 오랜만에 느껴본 자유로운 느낌. 해영은 어떤 도취감에 사로잡혀 공기방울처럼 떠다녔다. 태엽이 멈추고 다시 침묵. 해영은 뜯어낸 테이프를 손가락에 돌돌 말며 박스에 걸터앉아 소아를 봤다.
엄마. 속으로 엄마를 부른 해영은 마음에 아무 진동도 느껴지지 않음을 알았다. 다시 불러봤다. 엄마. 심장을 누르던 걱정도, 무슨 일이 생겼을지 노심초사하는 불안한 감정도 사라졌다. 엄마의 우울한 표정을 자신도 모르게 따라하던 날들. 좀비처럼 의식 없이 그저 왔다 갔다 움직이기만 했던 날들이 눈앞에서 흘러갔다. 해경을 잃고 엄마는 인격이 나뉘어버렸다. 바깥에선 사과하는 기계였고 반성하는 로봇이었다. 사람들과 눈만 마주쳐도 고개를 숙이고 누군가 해경의 일을 꺼내면 자동반사적으로 반성하고 사죄했다. 하지만 집 안에서는 돌변했다. 소리를 질렀고 이를 갈며 사로잡힌 짐승처럼 울어댔다. 동공이 풀린 눈동자 안쪽에 푸른 연기 같은 광기가 떠 있었다. 소아는 해영을 붙잡고 마음껏 쏟아부었다. 절망을 함부로 말하고 무너지는 몸과 마음을 수도 없이 내던졌다. 해영은 매번 그걸 맨몸으로 받아냈다. 처음엔 소아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괴로워하며 해영에게 미안해했다. 그러나 소아는 자력으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다. 나중엔 점점 절망을 습관화했고 패턴을 반복했다. 그 어떤 감정도 다스리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영은 그걸 다 받아줬다. 오랜 실패의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다. 엄마는 고장 났고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곁에 두거나 버리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소아는 해영에게 말하곤 했다.
우린 잘못했다고 해야 해. 사람들의 분노한 눈을 보고 그들의 슬픔보다 두배로 슬퍼해야 해.
어느날은 이삿짐을 싸는 해영을 따라다니며 속삭였다.
해경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을지 몰라.
또 어떤 날은 잠자는 해영을 흔들어 깨우며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쌍둥이잖아. 너 몰랐니? 말릴 수 없었던 거야? 할 수 있었지? 하지만 넌 모른 척했지? 말해봐. 말해보라고!
해영은 소아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소아는 해영을 울지도 못하게 했다. 다른 사람이 듣는다 했다. 웃지도 못하게 했다. 다른 사람이 본다고 했다. 이사하고 사흘 만에 주민들이 몰려와 떠나달라고 했을 땐 해영은 쌓아놓은 박스를 넘어뜨리고 발로 밟고 울며 소리쳤다. 소아는 고통스런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살아야 해. 우리가 불행해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진다면 난 기꺼이 불행해질 거야. 해영은 차라리 죽자고 했다. 그러나 소아는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하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안 돼. 우리가 해경의 죄를 사죄하며 갚아야지. 해영은 그럴 때마다 소리치고 엄마에게 화를 냈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왜 내가 걔 때문에 죄인이 되어야 하느냐고. 소아는 무서운 눈으로 슬프게 울며 중얼거렸다. 해영아. 우린 해경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자. 왜 너는 같은 피를 나눴으면서 동생을 그렇게 말하니. 엄마는 심지어 이렇게도 말했다. 너였어야 해. 내가 말은 안 했지만 네가 훨씬 더 악했어. 네가 더 잔인했다고.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엄마를 봐도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쌍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다. 그저 저 사람이 내 엄마구나. 머릿결은 왜 저렇게 푸석한 걸까. 몸은 왜 저렇게 구부정해졌지?
소아는 도마 위의 칼질을 멈추고 이상한 기분을 느껴 등 뒤를 바라봤다. 해영이 스노우볼을 쥐고 서 있었다. 기척도 없이 그림자처럼 다가와 아무 말도 걸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눈빛이었다. 탐구하는 눈빛이랄까. 관찰하는 표정이랄까. 소아는 자신도 모르게 도마 위에 칼을 내려놓고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해영은 무심하게 엄마 잘 잤어?라고 인사하며 식탁으로 걸어갔다. 멀뚱한 눈으로 거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냄비에서 끓고 있는 전골을 국자로 휘저었다. 소시지, 돼지고기, 두부, 상추, 토마토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소아는 힘들 때마다 요리를 했다. 그러나 그건 요리가 아니었다. 그저 불안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이를 딱딱 부딪치며 벌벌 떨며 펄펄 끓는 국이 담긴 냄비를 그대로 바닥에 쏟아버리기도 했다. 해영은 국자를 휘휘 젓고 한 국자 퍼서 그릇에 담았다. 소아는 그 모습을 보고 해영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자신이 만든 것을 먹을 수 없는 음식으로 여겨 입도 대지 않고 통째로 개수대에 부어버리던 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걸 맛보려 하고 있다. 해영은 한 숟가락 떠서 바람을 불고 한 입 물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으음, 괜찮네.
평소와 다른 딸의 다정다감한 모습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할지 모른 소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병원에 가는 해영의 발걸음이 평소와 달랐다. 정수리 끝에서부터 분수처럼 터지는 모종의 기분 좋음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발가락은 간지럽고 안면근육이 자꾸만 멋대로 움직이려 했다. 시선에 부드러움이 생겼다. 걸음에도 부드러움이 생겼다. 경계가 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크게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걷고 싶고 뛰고 싶고 멀리까지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감정적인 짐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영혼은 바닷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자유로웠다.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쓰러질 정도였다. 해영은 입술을 오므리고 몸을 떨었다. 이어 어깨를 곧게 펴고 걸었다. 얼굴과 마음에 박히던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빗겨나간다. 해영은 그들 사이를 마치 한 방울의 기름처럼 미끄러지듯 걸어나갔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 분수대가 있는 정원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숨을 골랐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반짝여 해영은 눈을 감아야 했다. 환희의 감정이 강렬하게 밀려왔다.
겨울이 끝나지 않을 줄 알았지. 거대한 눈구름 하나가 허파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거든. 눈이 내리면 몸속에 눈이 쌓였고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지. 남들은 모두 가벼운 옷을 입고 저 햇살 속을 거니는데 나는 집 앞 마트를 가는 것도 두려워 움츠러들었네. 발 닿는 모든 곳에 깔린 검은 얼음. 사람들은 무심히 어깨를 툭, 치고 걸어가네.
해영은 알맞게 식은 커피를 세모금 마시고 앞으로 걸었다. 발밑에서 좍, 하고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7
왜 그렇게 보세요?
……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저를 보시네요.
평소처럼 해영에게 눈을 흘기던 김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해영은 차분하게 한발 한발 걸어 김간 앞에 섰다. 김간과 함께 모여 수다를 떨던 간호사들은 순간 긴장하며 해영을 바라봤다. 해영은 차분하게 한명 한명과 눈을 마주쳤다.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눈빛. 더없는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들의 눈에는 늘 적의가 차 있었다. 해영은 그 눈을 언제나 의식했고 혹시라도 눈이 마주치면 그들에게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해영은 더는 그들의 눈빛이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다. 거기엔 아무 의미도 없다. 해영은 말했다.
다 들리니까 그냥 크게 말씀하시거나 안 들리게 하세요. 애매하게 들리는데 안 들리는 척하는 것도 어렵네요. 그렇지 않겠어요? 뻔뻔하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은 겁에 질려 어색한 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말릴 수 없지만요. 그냥 생각만 하세요. 부탁드립니다.
해영은 고개를 숙이고 카트를 밀며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근무를 마치고 해영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부드러운 물줄기가 두개의 손을 차갑게 감싸며 흘러내렸다. 잠시 눈을 감고 서서 그걸 느껴봤다. 기분이 좋았다. 눈을 뜨니 거울 속에서 누군가 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기 없이 창백한 표정. 메마른 얼굴. 연기처럼 희미하게 감도는 정체불명의 들뜸. 해영과 거울 속 해영은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건 마치 시공간이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존재가 우연히 만나 신기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거울 속의 해영은 면회실 철망 너머의 서준으로 바뀌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그건…… 정말로 편리해요.’ 해영은 호, 숨을 내뱉었다. 유리에 둥근 김이 서렸고 거기에 손을 대 손자국을 남겼다.
소아는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 해영은 문턱을 밟고 서서 영혼이 없는 존재가 되어 구겨져 있는 엄마를 바라봤다. 침실 안쪽에 불도 켜지 않고 방치된 쓸쓸한 모습의 엄마. 허공에 시선을 두고 멍하니 그저 있다. 평소 같았으면 내버려뒀을 것이다. 그러나 해영은 엄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엄마,라고 부르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왜 그래. 그랬어? 누가 그랬어? 정말 그렇게 말했어? 괜히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고? 해경이를 욕했다고? 맞아. 해경은 살인자야. 아니야. 나빠. 엄마. 나쁘다고. 그런데 엄마. 우린 아니야. 엄마도 아니고 나도 아니야. 엄마. 진정하고 잘 들어. 우린 아니야. 뭐라고? 무슨 소리야? 잘 들어 엄마. 힘들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해선 안 돼. 이제는 안 돼. 알겠어? 알겠어? 대답해봐. 알겠냐고.
소아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끄덕였다. 해영은 휴지를 두장 뽑아 엄마의 눈가를 닦아내고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삿짐을 풀기 시작했다. 거실 가득 쌓여 있던 이삿짐이 줄어들고 창고 같던 공간은 서서히 집처럼 변해갔다. 화장품이 화장대에 놓이고 물을 채운 화병을 협탁에 올렸으며 옷걸이와 행거를 설치했다. 누군가 현관에 종이를 붙였다. 붉은 글씨로 ‘살인자! 이사 가’라고 썼다. 소아는 그걸 보고 벌벌 떨었다. 해영은 소아의 어깨를 감싸 안아 진정시킨 뒤 펜을 들어 보란 듯 글씨를 썼다. ‘살인자는 없습니다. 당신들이 떠나세요’ 입주자대표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중절모를 쓰고 색이 들어간 안경을 쓰고 있었다. 오싹할 만큼 기분 나쁜 시선으로 노려보며 협박했다. 떠나지 않으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해영은 그 시선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알려주고 싶어 눈동자를 거울처럼 만들어 그 시선을 반사시키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는 쭈뼛거리며 돌아갔고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책상 정리를 했다. 흩어져 있던 책을 책장에 꽂고 어질러진 물건들을 정돈했다. 서랍을 반쯤 열었다. 두개의 앰풀과 두개의 주사기. 해영은 잠시 그걸 멍하니 지켜보다가 힘을 주어 서랍을 끝까지 열었다. 구석에 뒤집어놓은 사진이 한장 있었다. 해영은 사진을 꺼내고 서랍을 닫았다. 앙상히 마른 까만 매화나무가지에 점점이 꽃이 핀 쌀쌀한 초봄의 어느 아침. 해영과 해경이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해영은 해경에게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서웠다. 그래서 사진도 볼 수 없었고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마음으로 생각해도, 작게 속삭여도 누군가 알아챌 것 같았다. 그들은 분명 해경을, 해경을 그리워하는 나를, 갈가리 찢어발겼을 것이다. 그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게 싫은 것도 아니라, 더는 그들이 해경을 그렇게 말하는 게 싫었다. 그뿐이었다. 해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해경아.
해영은 더는 묻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그 말을 또 하고 만다.
그런데 정말… 왜 그랬니?
사진 속 해경은 그저 웃고 있었다. 해영은 사진을 거울 위에 눈높이쯤 붙이고 한걸음 떨어져 그것이 마치 해석하기 힘든 추상화라도 되는 듯 오래도록 바라봤다.
깊은 밤 괴괴한 박물관에 홀로 남은 것 같다.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푸석푸석 먼지가 인다. 흰 천으로 덮여 있는 그림과 사진들, 어둠 한구석에 놓여 방치된 토르소. 머리와 팔다리가 잘린 기이한 육체를 해영은 손을 내밀어 쓰다듬었다. 해영은 천을 걷어내고 눈을 들어 그동안 고통스러워 직시하지 못했던 그림들을 봤다. 엄마와 내가 길을 걷고 있고 등 뒤에 사람들이 서 있다. 다 들리게 소곤거리는 소리. 끝까지 들리지 않지만 명확하게 들리는 두개의 단어. 악마. 살인.
으깨진 달팽이처럼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그 말들이 둥둥 떠다니며 나와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 움직이는지, 숨은 쉬는지, 조금만 꿈틀거려도 곧바로 밟아대는 사람들. 잔불을 꺼트리기 위해 물을 뿌린 뒤 알불에 바람을 후후 불어 조금이라도 붉은 기가 돌 때 거기에 침을 뱉었다. 그러다 문득 해경이 무서운 일을 벌이기 전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해영아. 만약 우리가 평생 탔던 배가… 아무것도 없는 죽은 섬에 도착한다면 넌 어떻게 할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섬에 미리 도착한 이들은 경고하지도 않고 편지를 쓰지도 않을 거야. 너무 강한 절망이라 그런 의지도 없는 거지.
그때 해영은 그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해경의 말이 무슨 뜻인지 무엇을 은유하는지도 몰랐다. 해경은 쓸쓸히 웃고 등을 보이며 밖으로 나갔고 시간은 흘렀고 이제 해경은 없다. 해영은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그리고 웃고 있는 동생에게 말했다.
섬에 도착하면 죽겠지. 그러나 이 배에서 내리지 않을 거야.
8
해영은 일상을 되찾았다. 더는 불필요한 감정소모에 시간을 쏟지 않았고 죄의식이라는 굴레에서도 벗어났다. 커튼을 내리지 않아도 잠들 수 있었고 더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사건사고에 강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고 해경의 이름을 검색하거나 사람들의 반응을 억지로 찾는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E4YAJUDGE’에게 오는 메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더이상 그가 하는 말에 깊게 상처받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분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불쾌함. 불편함. 의아함. 그리고 의문. 도대체 이자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라는, 전에는 감히 품어보지 못한 저항심. 해영은 그의 메일을 읽다가 언제나 마지막 문장으로 삽입한 성경의 한 구절을 소리 내 읽어봤다.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악인. 화가 있으리니.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해영은 새삼스럽게 그 문장을 곱씹었다.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해경은 악인이다. 그것까지 부정할 순 없다. 그래서 해경은 내 곁에서 떠났고 그후로 영원히 사라져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됐다. 그러나 왜 내게 이러는 걸까? 눈을 감아도 어둠속에서 흰 연기처럼 떠오르는 아이디 ‘E4YAJUDGE’ 이름은 ‘테바’ 노아의 방주를 뜻하는 히브리어. 그는 지나간 사건사고들을 몇번이고 끌어올려 팔로워들을 각성시켰다.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부여된 숙명이라도 되는 양 뜨겁고 헌신적이었다. 현장검증에서 가해자들이 희미하게 웃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었다. 무덤을 껴안고 우는 피해자 가족들의 사진 옆에 웃는 사진을 나란히 포스팅했다. 해경도 해영도 소아도 모두 그의 심판을 받았고 사람들은 분노하며 돌을 던졌다. 테바는 죄인과 악인들의 콘텐츠를 팔아 파워 블로거가 됐고 그를 따르는 팔로워 수는 매일매일 늘어났다.
해영은 테바의 트위터에 들어갔다. 그가 하루 사이에 올린 열한개의 트윗을 읽었다. 세개는 까페에서의 사진이었고 세개는 히브리어. 두개는 철학서의 한 문장. 나머지 두개는 두건의 살인사건과 한건의 강간사건의 기사를 링크했다. 마지막 트윗은 한줄의 문장이었다. ‘악인이 너무 많도다.’ 해영은 무의식적으로 링크를 눌러 사건사고의 기사를 눈으로 훑었다. 기사 밑에 줄줄이 달려 있는 댓글도 일일이 하나씩 읽었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댓글을 읽고 해영은 짜증이 솟구쳤다.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악마다. 더러운 피는 모조리 소멸시켜야 한다. 삼대를 멸하는 옛 법이 필요할 때.’
수천의 사람들이 그 댓글을 지지했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말들로 덧글을 달았다. 그들은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전후사정 같은 건 파악하지도 않고, 왜?라는 질문이나 의문조차 품지 않고 사건을 판단했다. 그저 강하고 자극적인 언어로 심판하는 문장에만 환호했다. 그의 말과 분노의 표출이 마치 정의라도 되는 듯 띄워주고 숭배했다. 해영은 손에 땀이 차고 이마가 뜨거워지는 걸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빙글빙글 방을 돌며 진정하려고 애를 썼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감정이었다.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향하는 것엔 무감하면서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 관해서는 흥분이 된다고? 아니다. 미묘하게 다르다. 뭘까? 이게 도대체 뭘까? 해영은 죄의식 이외에 처음으로 가져본 낯선 감정의 정체를 파헤치다 우뚝 멈춰 섰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공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분노다. 죄 지은 자를 반드시 심판하고픈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해영은 댓글을 쓴 사람의 아이디를 클릭했다. 비슷한 사건들을 찾아내 가해자와 가해자 가족 전부를 공격하는 아이디를 노트에 적었다. 그중 익숙한 느낌의 아이디가 몇개 있었다.
‘E4YA_3’ ‘E4YASWORD’ ‘24YAONE’ ‘dltkdi’
해영은 ‘dltkdi’를 한글로 타이핑하고 나타난 한글을 읽어봤다.
이사야.
검색창에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를 입력했다. ‘이사야 3장 11절.’ 해영은 눈을 감았다. 테바의 아이디가 어둠 속에서 연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E4YAJUDGE’
해영은 처음으로 받은 편지를 기억했다. 한장의 짧은 편지를 읽고 해영의 주위엔 순간 캄캄한 암흑이 드리웠다. 골짜기를 사이에 둔 맞은편 벼랑에 서서 해를 등지고 있는 그림자. 정체불명의 사람이 사방에서 무서운 눈으로 해영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편지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얇디얇은 한장의 종이는 공손하고 예의를 갖춘 고통스러운 축제의 초대장 같았다. 뺨을 갈기는 것 같은 질문.
이제는 다 잊고 편하게 사십니까? 모두 다 잊었지만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신은 눈동자처럼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후로 해영은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무심히 걷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닫힌 창문 틈으로 수천개의 눈동자가 깜박거리며 자신을 노리고 있는 듯한 공포. 두려움이 너무 커 길가 한가운데 주저앉기도 했다.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굳어버렸던 것이다.
해영은 쓴웃음을 짓고 그날을 입에 머금고 있다가 꿀꺽 삼켜버렸다. 힘없이 짓는 허탈한 미소를 찍어 무덤을 껴안고 울고 있는 피해자의 가족사진 옆에 나란히 병치시켜 ‘피해자 가족들은 울지만 가해자의 가족들은 멀쩡히 웃는다’라는 문장을 만들어 퍼트린 악질적인 인간. 그는 어떤 사람인가? 정의로운? 윤리적인? 해영은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자는 나쁘다. 결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나쁜 짓을 한 좋은 사람이겠지. 해영은 순간 온몸에 열기가 퍼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편으로 흐르고 있는 더운 피의 물살. 사람들은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모를 때 모두에게 위협을 받는다. 누구로부터 도망가야 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도망갈 수 있겠어. 그러나 적이 누군지 안다면 다르다. 그는 다수가 아닌 한명이고, 신이 아니고 인간이며, 사회를 대표하는 목소리가 아닌 그저 잔인한 놀이를 즐기는 악랄한 사람일 뿐이다. 사람들이 동감을 표하고 칭찬해주면 그저 좋아 춤추고 흥분하는 아둔한 어린애. 그래. 너는 순수하겠지. 정의롭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죄인이야. 죄인을 괴롭히는 죄인.
너무 오랫동안 혀를 물고 있었던 해영의 턱관절이 미세하게 떨렸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난 그동안 뭔지도 모르는 죄 때문에 벌을 받아왔어. 물론 아직도 그게 무슨 죄인지 모르겠지만 난 죄를 지은 것 같아. 그걸 억울해하지 않겠어. 어쨌든 난 잠자코 받아왔으니까. 부정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 남은 날들도 계속 벌을 받게 되겠지. 그런데 넌? 너도 나쁜 짓을 했는데. 너도 사람을 괴롭혔는데. 거의 죽음에 이르게 했는데. 너도 뭔갈 받아야지. 그렇게 숭배를 받는 성인 취급을 받아선 곤란하지. 걱정 마. 내 죄는 누군가 벌해줄 거야. 이 문만 벗어나면 나를 벌할 사람은 모래알처럼 많으니까. 그러나 넌?
해영은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테바를 찾는 건 쉬웠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알리는 사람이었다. 까페엔 몇시에 가서 몇시까지 앉아 있는지. 잘 가는 마을 도서관은 어디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해영은 다 알고 있었다. 까페 클라우드. 그는 거기 있었다. 해영은 그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는 다섯시 방향에 앉아 그를 관찰했다. 의자 밖으로 나온 긴 다리. 빼빼 말랐다고 해도 좋을 만큼 가는 몸피. 칼라 없는 하얀 셔츠. 깨끗하게 다림질한 까만 슬랙스. 에나멜 구두는 광이 났다. 담배를 들고 까페 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이 한자루의 앙상한 연필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도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영은 그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 그가 펼쳐놓은 것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뭔가 대단한 걸 하기 위해 까페에 온 것처럼 탁자 두개와 의자 세개를 차지하고 온갖 것들을 늘어놓았다. 노트북과 태블릿. 단떼의 책과 두꺼운 히브리어 사전. 각인된 까만 노트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Choi Ban Suk. 해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해영은 자리에 돌아와 앉았고 테바는 긴 팔을 휘적휘적 흔들며 까페를 한바퀴 돈 뒤 자리에 앉았다. 한시간 동안 그가 한 일이라곤 노트에 만년필로 히브리어를 공들여 베껴 쓴 뒤 사진을 찍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과 노트북과 휴대폰의 화면을 번갈아 보며 낄낄거리거나 혼잣말로 낮게 욕설을 내뱉은 게 전부였다. 해영은 책을 읽는 척하면서 그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왁스로 조잡하게 붙여놓은 납작한 뒤통수와 좁은 어깨, 탁자 밖으로 왼쪽 다리를 꺼내놓고 달달 떠는 모습까지. 수치스러웠다. 저렇게 하찮은 사람에게 그토록 시달렸다니. 그에게 받았던 그 어떤 수모보다 지금 그를 보고 있는 감정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많은 생각들과 복잡한 감정이 해영의 몸과 마음을 통과했다.
너는 지금 이 순간도 벌줄 사람을 찾아 사형대에 세우겠지. 지옥의 밑바닥을 걷는 것 같은 좁고 더러운 길을 그들은 걸을 테고 동정이나 연민 같은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 없이 발 딛는 모든 곳에서 비난과 증오의 소리를 듣게 되겠지. 내가 그랬으니 그들도 그럴 거야. 사람을 피하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고개를 숙이고 세상 끝을 향해 걷게 될 거야. 끝없이 이사하고 이사하게 될 고단한 삶. 죄의식과 자기혐오로 뒤범벅된 감정에 시달리며 매일처럼 스스로를 역겹고 더럽다 여기게 될 거야. 너는 다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을 까발렸어. 그들은 현미경 아래의 벌레처럼 카메라와 시선 속에서 연구되다가 나중엔 폐기될 거야. 그들의 이마 한가운데 떠 있는 붉은 점. 누군가 조준경으로 겨누고 있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무심히 만지작거리는 동안 그들은 꼼작도 못해. 넌 사냥하듯 그들을 저격해왔어. 서슴없이 가족들의 사진을 올리고 직장이나 학교 심지어 얼굴 사진까지 올렸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그들을 지속적으로 무너뜨려왔어.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궁지로 몰아대는 걸 즐기는 사악한 맹수. 계속 사과해도 목덜미를 깨물었어.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 다시 넘어뜨렸지. 정의의 사도라고? 네가? 때마침 테바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화장실 열쇠를 들고 까페를 빠져나갔다. 해영은 그를 따라갔다.
9
해영은 소아에게 최근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말했다. 평온한 말투인지 즐기는 말투인지 소아는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말하고 그것들에 대해 무덤덤하게 말하는 태도에 무척 놀랐다. 몇번이고 확인했지만 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이 계속 말하려고 하자 소아는 본능적으로 딸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해영은 계속 말했다. 소아는 기가 찼다. 그리고 곧 서서히 기분이 묘해졌다. 누가 들으면 뭐 어때서,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딸의 태도가 어이가 없고 이상했던 것이다. 해영은 말했다.
암튼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어. 당연하지만 비밀이야. 알았지?
……
엄마. 비밀 하나 더 말해줄까?
……
실은 한개가 더 남아 있어. 원래는 이거 엄마 하나 나 하나 쓰려고 했거든. 알잖아. 우리 그동안 너무 힘들었으니까. 하나 남았지만 쓰게 될 일은 없을 거야. 없어야 하고.
해영은 촉촉이 젖은 눈으로 소아의 눈을 들여다봤다. 소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지? 이해했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쉿, 하며 한쪽 눈을 감는 해영의 얼굴을 본 순간 소아는 알았다. 그동안 해영에게서 느껴지는 공포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왜 그토록 익숙한 느낌을 받았는지. 그건 너무도 잘 아는 잃어버린 한쪽. 해경의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