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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토머스 핀천과 1960년대

 

 

이정진 李廷進

영문학 박사. 역서로 『불한당들의 미국사』 『축구의 세계사』(공역) 『친밀한 적』(공역) 등이 있음. godard1@naver.com

 

 

 

1

 

1966년에 출간된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 1937~)의 두번째 소설 『제49호 품목의 경매』(The Crying of Lot 49)에는 주인공 에디파 마스(Oedipa Maas)가 1960년대 미국의 진보적인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버클리 캠퍼스를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1950년대의 안정적이되 폐쇄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주부인 그녀는 자유와 활력이 넘실대는 그곳의 분위기에 이질감과 아울러 강렬한 매혹을 느낀다.

 

때는 여름이었고, 주중의 오후였다. 에디파가 생각하기에 대학의 교정이 시끌벅적할 때는 아니었지만, 이곳은 그랬다. 그녀는 휠러 홀에서 언덕길을 걸어내려가 새이더 게이트를 통과해 한 광장으로 들어섰는데, 그곳은 코듀로이와 데님 바지, 맨다리, 금발, 뿔테안경, 햇빛을 받는 자전거 바퀴살, 책가방, 흔들리는 사각탁자, 땅바닥까지 끌리는 긴 서명용지, 해독이 어려운 FSM, YAF, VDC(자유언론운동을 위시한 여러 학생운동단체들—필자)의 포스터들, 분수의 물거품, 코를 맞대고 대화하는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녀는 두꺼운 책을 들고 그곳을 통과할 때 끌림을 느끼면서도 불안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곳에 어울린다고 느끼고 싶었지만, 그러자면 평행우주(alternate universe)들에 대한 얼마나 많은 탐구가 필요할지 아는 이방인 같았다. (…) 이곳 버클리는 그녀 자신의 과거에서 떠올린, 잠에 취한 한적한 대학과 전혀 달랐고, 언젠가 읽은 적이 있었던 극동이나 라틴아메리카의 대학과 더 닮았다. 가장 사랑받는 전래신화들이 의심되고,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며, (정부를 붕괴시키는 종류의) 목숨을 내건 헌신을 결의하는 그 자율적인 문화의 근거지 말이다.1

 

이 인상적인 대목은 상당한 정도로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줄곧 은둔작가로 살아온지라 정확한 시기와 장소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핀천이 첫번째 소설인 『브이』(V.)를 출간한 1963년 이후부터 꽤 자주 캘리포니아주에 머물며 당시 그곳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던 신좌파와 히피들의 새로운 정치활동과 여러 하위문화를 관찰하고 경험했다는 증언이 제법 있다. 그것은 역사의 현장에 가까이 있고자 하는 작가적 의지의 발현이자 개인으로서의 성장을 위한 자기교육 과정이기도 했다.

1984년에 출간된, 습작기의 단편을 모은 『느리게 배우는 사람』(Slow Learner)에 붙인 작가서문을 보면 핀천이 1950년대의 순응적인 문화에 얼마나 갑갑증을 느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돌이켜보면 대학생 연령의 하위문화에는 전반적으로 소심함이, 자기검열하는 경향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1950년대의 가장 치명적인 영향 중의 하나는 그 시기에 성장했던 사람들에게 그 시기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믿게 했다는 것이다. 이상한 머리모양을 한 잘나가는 어린 상원의원으로 여겨졌던 존 케네디가 상당한 주목을 받기 전에는 방향성을 상실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모든 것은 1960년대의 시작과 함께 달라진다. 핀천은 케네디(John F. Kennedy)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대의 흥분과 활력 속에서 마침내 그간 웅크렸던 “몸을 뻗어 발걸음을 내딛기”로, 즉 직전 시기의 비트(beat) 세대를 포함하여 다수의 위대한 미국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출판된 자료에서 눈을 돌리고” “책 밖의 미국의 현실”을 두루 살피기로 결심한다.2

이렇듯 핀천은 본격적인 창작활동의 기원을 1960년대에서 찾는 작가인데, 실제로 그는 그 시대, 특히 청년세대의 세계인식과 감수성에 호응하는 혁신적인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곧 1960년대적 현상의 일부가 된다.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연합(SDS)의 초대회장이었던 토드 기틀린(Todd Gitlin)이 쓴 『1960년대: 희망의 시대, 분노의 세월』에는 당시 핀천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케 하는 구절이 나온다. 기틀린은 핀천이 특히, 1963년 워싱턴행진 이후에 SDS로 대거 유입된 이른바 ‘초원’(prairie)세대에게 자신들의 개인적 경험을 미국사회 전체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시키는 일종의 정치 교과서 노릇을 했다고 말한다. SDS의 기존 구성원(Old Guard)들과는 달리 진보적인 사회운동 전통이 미약했던 중서부나 남서부 출신인 그들은 “제국을 건설하려는 미국의 경향성”을 짐작조차 못했고, “미국의 제도를 믿도록 교육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민자의 자손들과는 달리 처음에는 〔주류사회로부터〕 소외되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이 반전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절연하게 되는 경험을 통해 “소외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칼 맑스보다는 토머스 핀천을, V. I. 레닌보다는 존 레논을 찾았다.”3 기틀린은 이 2세대 신좌파의 지적인 기율 부족과 그와 연관된 감상적인 무정부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핀천을 언급하지만, 당시의 핀천이 밥 딜런(Bob Dylan)이나 존 레논(John Lennon)과 더불어 1960년대의 최전선(이 아니라면 그 가까이 어디쯤)에 위치한 창작자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핀천은 1960년대와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소설가이고, 차차 확인하겠지만 최근작을 포함한 그의 모든 창작활동은 1960년대의 자장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작가라는 그간의 지배적인 평판이 핀천의 이런 핵심적인 면모를 가렸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초기작들이 1960년대 세대에게 그토록 열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사정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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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작부터 형식의 여러 층위에서 두드러졌던 핀천 소설의 새로운 요소들은 1960년대의 정치적·문화적 분위기와 공명하는 것이었고, 그런 요소를 통해 구현된 그의 주제의식은 1960년대 신좌파를 위시한 미국의 진보진영이 도달한 정치적 발견이나 깨달음과 맞닿아 있었다. 일단 핀천 작품의 인장과도 같은 편집증적인 인물과 음모론적인 플롯은 1960년대 내내 고조될 수밖에 없었던 지배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반영한다. 흑인민권운동에 대한 폭압과 베트남전에서의 만행, 그리고 무엇보다도 케네디와 킹(M. L. King Jr.) 목사를 위시한 진보진영을 대변하는 인사들의 잇단 암살과 석연치 않은 해명을 연이어 목도했을 때 주류사회의 권위가 뒷받침하는 모든 공식적인 서사를 의심하는 태도가 확산되고, 더 나아가 납득되지 않은 일련의 사태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고자 비가시적이지만 전능한 악의 존재에 대한 상상이 불붙었던 것이다. 그러나 핀천의 플롯은 속 시원하게 음모론의 실체를 확인시켜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각양각색의 음모론에 열중하는 군소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그런 이야기의 재료들을 더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음모론으로 통합해야 하는 주인공급의 인물들은 자신의 강박적인 추구의 동기를 스스로 캐묻고, 무엇보다도 음모론의 최종적인 단서가 드러나는 계시의 순간은 계속해서 유보된다.

실상 중요한 것은 음모론적 상상력으로 촉발된 주인공의 숨가쁜 여정 그 자체이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앞의 인용문에 나오는 표현인) ‘평행우주’라고 불러야 할 만큼, 감추어지거나 잊혀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미국의 어두운 현실과 깊고 넓게 조우하게 된다. 『제49호 품목의 경매』에서 애초에 에디파가 확인하려 했던 것은 유럽에서 건너온 어떤 지하 우편시스템의 존재였고, 특히 (핀천과 마찬가지로 명문 코넬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그 우편시스템의 유럽에서의 행적에 대한 우화로 보여지는 자꼬뱅 시대의 한 복수극의 해석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 ‘지적’ 탐구는 그녀를 그녀가 몰랐던, 아니 미국이 부인해왔던 여러 삶의 풍경들로 데려간다. 그녀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비참한 가난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존재이다. 지면 한계상 인용은 어려우나 소설 말미에 에디파가 죽음을 앞둔 듯한 한 노년의 전직 선원의 편지 부탁을 들어주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며, 1930년대 인민전선기의 르뽀르따주가 연상된다. 밥 딜런과 포크부흥운동의 경우가 잘 보여주듯 1960년대가 특히 초기 국면에서는 1930년대의 계승이자 재발견이라고 할 때 핀천은 그런 흐름에 동참한 창작자이고, 그의 대리자인 에디파는 본인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당시의 수많은 학생운동가들, 예컨대 투표등록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 남부의 여러 주로 떠났다가 흑인들의 비참한 생활환경을 목격하게 되는 학생비폭력조직위원회(SNCC) 운동가들과 동료가 된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핀천의 다른 작품들도 이와 유사하게 일종의 ‘이중플롯’ 구조에 따라 전개된다. 『브이』에서 주요인물 중의 하나인 허버트 스텐실(Herbert Stencil)은 외교관이던 아버지의 유품인 비망록에서 거듭 언급되는 브이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온 세계를 떠도는데, 브이를 둘러싼 신비는 결국 해소되지 않지만 그 긴 여정 중에 그가 손에 넣게 된 온갖 자료들은 거듭 서구 제국주의를 추동해온 병적인 심리와 열망을 확인시켜준다. 역시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본질을 인식하게 되는 신좌파의 급진화 과정과 궤를 같이하는 내용이다. 1973년에 출간된, 많은 이들이 그의 최고작품으로 꼽는 대작 『중력의 무지개』(Gravitys Rainbow, 한국어판 이상국 옮김, 새물결 2012)는 손쉬운 요약을 불허하지만, 마찬가지로 음모론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발한 설정이 더 큰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는 계기로 활용되는 구조이다. 2차세계대전 중에 런던에서 근무하는 미군 정보병 타이론 슬로스롭(Tyrone Slothrop)은 자신이 성적으로 흥분한 지점을 표적으로 삼는 로켓의 개발에 얽힌 비밀을 탐색하던 중에 예정된 파국을 향해 착실하게 전진하는 역사의 비극적인 향방을 깨닫게 된다. 역사의 진정한 결정인자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을 통한 기업의 이윤추구이고, 세계사적 사건인 세계대전마저도 그 과정을 촉진시키는 수단일 뿐이며, 그런 기업의 원리가 관철될 때 모든 인간적인 것은 소멸하게 되리라는 것. 이런 묵시록적인 정조는 이 소설이 씌어지던 1960년대 후반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앞에서 인용한 기틀린의 책 제목처럼 1960년대는 근본적인 변혁에 대한 드높은 ‘희망’으로 시작되었던 만큼 닉슨(R. Nixon)의 대통령 당선으로 요약되는, 그 꿈의 완벽한 좌절은 현기증 나는 낙폭의 느낌과 함께 절망과 ‘분노’를 불러왔을 것이다. 어느 연극과 영화의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1960년대는 ‘지금 천국’(Paradise Now)을 선언하며 시작했다가 ‘지금 종말’(Apocalypse Now)을 목격하며 끝났던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라도 언급할 필요가 있는 사실은 핀천의 음모론이 더 실질적인 현실 탐색의 플롯을 작동시키기 위한 구실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악한 권력의 ‘실제’ 작동방식을 규명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좌파 음모론과는 달리 핀천의 음모론은 (앞서 언급한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평행우주’라 부를 수 있을, 역사의 다른 경로와 가능성에 대한 상상으로 경도된다. 『제49호 품목의 경매』에 등장하는 지하 우편시스템 트리스테로(Trystero)는 그 실제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에디파가 발견하게 되는 그 비밀스러운 조직의 기원—트리스테로가 유럽사의 전개 과정에서 패배자였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역사의 대안적인 가능성을 투사하게끔 해준다. 그리고 실제로 에디파는 그들의 실체를 쫓던 중에 배제되고 소외된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중력의 무지개』에서는 후반부로 갈수록 비극적인 정조가 압도하는 가운데서도 역사의 대안적인 가능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좀더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슬로스롭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피해 도달하게 되는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영역(zone)에는 대항세력(counter-force)이라고 통칭되는 다채로운 무정부주의자 무리가 존재하며, 그들은 영역마저 역사로 포섭되는 것을 막기 위해 투쟁 중이다. 대항세력이 대항문화(counter-culture) 세대를 염두에 둔 이름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반면 로켓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지구로 떨어지는 중에 끝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세계의 종말을 실현할 그 거대하고 사악한 물건의 이름은 리처드 M. 닉슨이 연상되는 리처드 M. 즐럽(Zhlubb)이다. 이렇듯 1960년대에 대한 장엄한 장송곡이라 할 『중력의 무지개』는 동시에 실제 역사의 진행에 배반당한 그 시대의 이념을 보존할 ‘평행우주’를 품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제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 정리로는 핀천 작품의 실제 독서실감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 핀천의 주제의식은 방대하고 심각하지만 전반적인 톤은 굉장히 희극적이고, 그가 의도하는 희곡적 효과는 대체로 벌레스크(burlesque) 쪽으로 기운다. 풍자나 아이러니의 세련된 구사보다는 계속되는 시끌벅적한 상황의 연출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앞서 시사했듯 핀천 소설은 주인공이 여러 인물을 만나고 다니는 피카레스크(picaresque)적 구성을 띠는데, 자주 “인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대부분 멍청한 내용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괴상하고 기이한 성적행동이 벌어지고, 항상 관용적이지만은 않은 모호한 말들이 말해지며, 사실에 반하는 일들이 벌어진다.”4 한두 마디 보태자면 위에 언급한 몇몇 주인공들의 경우처럼 다수의 인물은 있을 법하지 않은 해괴한 이름으로 불리며, 대개 우화적인 그 이름이 암시하는 기벽의 소유자들이다. 예컨대 『브이』의 주인공 중 한명인 막 제대한 수병 베니(Benny) 프로페인(Profane, ‘상스러운’이란 뜻의 형용사)은 뉴욕의 지하철을 타고 맴도는 인간 요요(yoyo) 짓을 하며 시간을 때울 때 좀더 편안하게 여자들을 관찰하기 위해 자신의 목이 360도 돌아기기를 소망한다.

앞에서 핀천의 창작동력을 1960년대와의 ‘접속’(tune-in)으로 요약하며 그의 방대한 주제의식이 신좌파의 정치적 의제에 대응하는 양상을 살펴보았는데, 좀 거친 분류라는 점을 감수한다면 핀천의 독특한 스타일은 히피 문화의 지대한 영향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위의 표지 인용문은 특히 로큰롤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밖에도 핀천은 온갖 대중문화 장르들, 특히 1960년대 세대의 반주류 취향에 부합하는 만화, SF, B급 영화 같은 하위문화 장르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핀천 문학에서 차용·인유·패러디되는 것은 통상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지는 온갖 전문적인 과학 담론에까지 이른다. 그의 소설이 흔히 백과사전적이라고 묘사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장르의 혼융이 야기하는 만화경적인 효과는 핀천 특유의 밀도 높은 문장들—창의적인 조어와 약어가 수시로 등장하고, 영어 어법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길고 복잡한 구문이 동원되며, 과학적인 용어로 풍경이나 심리를 묘사하는 시도에서처럼 분야를 교차시킴으로써 참신한 비유를 빚어내는—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과연 핀천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설명하는 데 야단스럽다(zany)는 표현이 자주 쓰일 만하다. 핀천 소설을 읽는 체험은 풍부한 지적 자극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강렬한 로큰롤 음악을 듣는 것에 비견될 수 있다. 사실 핀천의 로큰롤 사랑은 유별난데, 그가 소설작품 이외에 쓴 몇편 안 되는 글 중에는 자신이 지지하는 로큰롤 밴드의 앨범속지 해설이나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가히 종교적 열정에 가까운 진지함으로 로큰롤을 대했던 1960년대 세대의 일원이며, 계속해서 은둔작가 생활을 고집하는 것도 ‘변절’(sell-out)에 저항했던 그 세대의 윤리적 지향을 고수하겠다는 태도로 보인다. 물론 작품 자체의 스타일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지만 어느 정도는 이런 ‘공적’ 이미지에도 힘입어 핀천은 아직까지도 ‘힙’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학계에서 연구되는 대가급 작가들 중에는 예외적으로 이후 세대들에게도 컬트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구글에서 핀천을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성립 시점이 다른 다양한 종류의 팬사이트들이 열성적인 팬층을 거느린 구루라는 핀천의 독특한 위상을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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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언급했다시피 핀천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여겨진다. 핀천 소설의 독특한 스타일이 1960년대 이후 등장한 대가급 소설가들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새로운 것은 맞고, 여러모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적 의제에 부합하는 것도 사실이다. 분명 핀천의 작품은 과도하게 ‘텍스트의 놀이’에 몰두하는 측면이 있으며, 그와 더불어 음모론 플롯의 자의식적인 운용이 낳는 서사상의 불확정성은 재현에 바탕한 표준적인 사실주의 예술기획에 의심을 표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거듭 확인했듯 핀천은 자기 시대의 정치적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한 작가였고, 그의 혁신적인 기법은 표준적인 사실주의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거대한 역사의 향방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기 위해 고안된 측면이 컸다. 곧 소개하겠지만 그의 최근작들 역시 역사에 대한 열렬한 관심을 드러내며, 몇몇 작품에서는 사실주의적인 요소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역사에 대한 핀천의 새로운 탐구방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세히 논할 계제는 아니지만, 1970년대 이래로 문학연구의 지배적인 조류로 자리잡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위시한 형식주의 경향 자체가 1960년대의 역사적 실패에 대한 자기보상적·자기위안적 반응인 측면이 있다. ‘시대착오적인’ 사실주의의 폐기 주장과 함께 예술이 현실과 연루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물음을 의도적으로 망각한 후, 대신 세계를 하나의 텍스트로 전제하고 그 텍스트(=세계)를 해체·재조립하는 혁신적인 기법에 여러 윤리적·정치적 가치를 부여하는 전략은 손쉽게 문학비평 ‘행위’의 진보성과, 더 나아가 ‘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핀천 작품을 논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조함직한 비평은 제임스 우드(James Wood)의 히스테리컬 리얼리즘(hysterical realism)론이다. 그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유형의, 이론적인 언술을 거의 동원하지 않는 대신 소설예술의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꼼꼼한 읽기를 통해 개별 작품의 예술적 성취를 평가하는 직업적인 서평가 류의 비평가다. 여기서 정밀한 읽기를 근거로 삼는 그의 작품론을 본격적으로 따져묻는 것은 불가능하고 핀천을 포함한 최근 소설의 어떤 지배적인 경향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를 간략히 요약하는 데서 그칠 수밖에 없다. 우드가 히스테리컬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쓴 것은 2000년에 『뉴리퍼블릭』(New Republic)에 기고한, 제이디 스미스(Zadie Smith)의 소설 『하얀 이빨』(White Teeth)의 서평에서이다. 그 글에서 그는 제이디 스미스의 작품이 핀천이나 드릴로(Don Delillo) 혹은 루슈디(Salman Rushdie) 등 현재 대가로 인정받는 영미권의 주요 소설가들을 모델로 “거대하고 야심찬” 작품을 쓰고자 한 시도이며, 그 문학적 직계선조들과 비슷한 약점을 공유한다고 평가한다.

우드는 그들의 소설을 거의 하나의 장르로 묶을 수 있게 해주는 특성으로 방대한 시공간적 배경과 아울러 기발함에 대한 강박적인 추구를 꼽는다. 이 계열에 속하는 소설은 끊임없이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이어가는데, 독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는 그런 창의적인 면모는 근본적으로는 인물의 빈약함을 가리거나 회피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우드의 분석이다. 인물다운 인물이 없기에 인물의 성격에 기반한 본격적인 극화가 가능하지 않은 탓에 다채로운 인물군을 등장시켜 뜻밖의 방식으로 그들 간의 만남을 주선하는 식으로 플롯을 전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드는 이런 인물들 간의 강제된 ‘연결성’(connectedness)이 현재 소설예술이 처한 곤경의 징후라는 입장이다. 방대한 규모와 그 모든 창의성의 발현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점으로 말미암아 이런 류의 소설은 주제적인 범위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작품들은 온후하고, 장난기 넘치며, 생동하는 정신의 평화로움을 공유한다. 이런 방식의 서사는 비극이나 고뇌와는 거의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5 우드의 ‘연결성’ 비판은 대번 편집증적 상상력을 플롯의 동력으로 삼는 핀천의 소설을 떠오르게 한다.

우드는 비교적 최근작인 핀천의 『낮을 거슬러』에 대한 서평 「중력은 없고 무지개뿐인」에서 그의 이전 입장에서 쉽게 예상되는 비판을 쏟아놓는다. 핀천은 “자신의 평면적인 인물들을 무대에서 잠깐 춤추게 한 뒤 치워버리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물들은 ‘무대’에 머무르는 동안 “쾌활하게 오랫동안 서로 어떤 생각들에 대해서 길게 ‘토론’한다.” 핀천 애호가라면 바로 그 점 때문에 핀천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며 그의 소설형식을 정당화할 것이다. 사실 이 글이 하려던 바도 그런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 지적은 뼈아프다. “모든 인물들은 궁극적으로는 진짜 위협으로부터 보호받는다. (…) 『중력의 무지개』의 나치 대위 블리체로나 『낮을 거슬러』의 무자비한 금융가 스카데일 바이브는 진짜로 두려운 인물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6

그러나 핀천의 인물들이 모두 어떤 관념을 대변하거나 플롯의 진행을 위해 동원된, 실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무중력의 존재만은 아니다. 습작기의 단편까지 포함해서 핀천의 거의 모든 소설에는 비슷한 유형의 남성인물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브이』의 프로페인이 전형적일 텐데, 그는 사물들과의 관계조차 원만치 않아 모든 일에 서툰 슐러밀(schlemiel)—무능하고 운도 따르지 않는 인물을 뜻하는 이디시어—인지라 사회생활에 부적격이지만 이런 열등함은 그에게 미덕으로 작용한다. 그는 태생적으로 성공이나 경쟁 욕구를 결여한 투명한 존재이기에 딱히 그러겠다는 의도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그래서 여러 인물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삶에서 당연히 따르게 마련인 긴장과 갈등을 초월해 있는 이런 인물의 형상화는 이즈음의 실감으로는 상당히 감상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인물 유형은 1960년대 세대의 목가적인 삶의 비전이 투사된, 핀천 작품의 ‘윤리적 중심’이다. 물론 문제는 핀천이 극화를 통해 이런 가치의 실현 가능성을 시험해보기를 회피한다는 것인데, 그런 가치를 다수가 공유하던 과거라면 몰라도 시대 분위기가 달라진 시점에서도 그같은 작풍을 고수한다면 향수를 자극하는 좌파 판타지가 되기 십상이다. 두드(Dude)라 불리는 신좌파 출신의 백수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코엔 형제의 영화 「빅 레보스키」(The Big Lebowski, 1998)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단언할 일은 아니지만, 『낮을 거슬러』나 제이디 스미스에 관한 서평에서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메이슨과 딕슨』(Mason & Dixon, 1998)은 이전의 작풍을 반복하는 측면이 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좌파와 히피 세대의 후일담이자, 핀천 특유의 ‘야심찬 대작’ 역사소설들과는 달리 규모가 작은 『바인랜드』(Vineland, 1990, 한국어판 박인찬 옮김, 창비 2016)와 『자체결함』(Inherent Vice, 2009)은 이전 소설들과 상당히 달라졌다. 특히, 간결한 플롯 운용과 더불어 사실주의적 요소들을 대거 도입한 탓에 상당한 비평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바인랜드』는 주목에 값하는 역작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는 다음을 기약하며 여기서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새로운 면모와 그 의의를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써 1960년대에 대한 핀천의 지속적인 탐구의지를 확인하고, 그와 연관해 『자체결함』 의 주제의식을 간략하게 언급하는 데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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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인랜드』에 담긴 신좌파운동이나 대항문화에 대한 평가는 간단히 정리하기 어렵고, 그래서 여러 엇갈린 반응을 낳았다. 1960년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만다거나 혹은 1960년대 세대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의견들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작품 자체의 난해함보다도 정치적 주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비평가들의 태도가 이런 상황의 주된 원인인 듯하다. 미국 국가폭력의 실상을 이 정도로 광범위하게 고발하는 문학작품이 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매체는 물론이고 학계에서조차 이 작품의 그런 주제의식을 거의 외면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이 소설은 연방검사 브록 본드(Brock Bond)와 휠러(Wheeler) 가족의 오랜 악연을 축으로 전개된다. 1960년대, (후에 휠러와 결혼하게 되는) 프레네시(Frenesi)는 급진적인 영화단체의 리더로서 각종 시위현장을 누비는 열렬한 신좌파의 일원이었다가 브록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의 끄나풀이 되고, 결정적으로 브록의 조종하에 자신이 속한 꼬뮌의 파국을 가져오는 비극적인 살인사건을 유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이후 그녀는 브록의 통제에서 잠깐 벗어나 조이드(Zoyd) 휠러와 결혼해서 딸 프레리(Prarie)를 낳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브록의 영향권 안으로 돌아가서 소설이 진행되는 1984년 현재 시점까지도 브록이 지휘하는 정부의 비밀스런 공작 활동에 동원되어 미국 전역을 떠돌며 살고 있다. 브록에게 성적으로 끌리고 어느 정도는 자발적으로 그에게 협조했던 프레네시의 문제적 형상화는 신좌파운동 전체의 어떤 위험한 경향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겠지만 사실 상당히 모호하기도 해서 그 함의와 한계를 따져묻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초점이 되어야 하지만, 그 문제를 다루는 비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상당히 광범위한 취재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는, 미국 국가권력의 자의적이고 불법적인 행태에 대한 이 작품의 꽤나 구체적인 묘사에 주목하는 비평마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의아하다. 이 작품 속 미국은 거의 파시스트 국가에 못지않아서, 본드의 제안에 따라 1960년대 좌파진영의 학생운동가들을 ‘재교육’하기 위한 대규모 불법 구금시설을 운영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서) 전문 닌자로 훈련받은 친구 디엘(DL)이 그 시설에서 프레네시를 구조하는 장면은 판타지처럼 처리되어 있지만, 한편으로 그 생생한 세부묘사를 보면 핀천은 그 시설이 실제 존재했다고 독자들을 설득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재교육캠프의 존재는 1960년대 당시 신좌파진영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음모론인데, 그렇다면 핀천은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이제 흥미로운 음모론적 플롯을 고안해내기보다는 세상에 실제로 유포되어 있는 음모론의 실체를 파헤침으로써 미국의 허구적인 자기상을 ‘뒤집는’(debunking) 저널리스트-소설가로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재교육캠프가 가장 충격적인 사례이지만 그 외에도 브록의 파시스트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사건들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그 주된 피해자는 조이드다. 조이드가 프레네시를 찾는 것을 완전히 단념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함정수사·협박·고문 같은 브록의 만행은 그 사실성을 의심할 수 없게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된다. 우드가 이 인물을 두고서도 “실제 인물이 아니라서” 충분히 위협적이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브록의 형상화는 이런 인물유형—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강렬한 인정욕구를 실현하는 중에 사악한 매력마저 발휘하는 자기도취적인 괴물로 변모하는 엘리트 남성—이 자주 등장하는 여느 정치소설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브록 이상으로 입체적인 인물이 조이드다. 처음 등장할 때 유리창에 몸을 던져 통과하는 기행을 벌이는 그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을 몰고 다니며 소극(笑劇)풍의 소동을 벌이는 전형적인 핀천 소설의 남성 주인공들이 연상된다. 그는 과거 스피드광이자 밴드의 키보드 주자로 활동했던 히피 잔당이며, 아직까지도 미국사회의 큰 흐름에서 비켜서 있는 바인랜드라는 목가적 장소에서 다른 히피 이웃들과 상부상조함으로써 불안정한 삶의 조건에 대처하고 있다. 또한 그는 딸과 펑크밴드 리더인 딸의 남자친구와 온갖 대중문화를 논하는 쿨한 아빠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어 점차 브록과의 악연을 포함한 그의 과거사가 드러나면서 그가 폐허가 된 삶에서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고투해왔는지가 밝혀진다. 특히 갓난쟁이인 딸의 양육이라는 막중한 삶의 과제를 안고서, 바인랜드의 거친 환경 속에서 터잡고 살기 위한 조이드의 노력은 (핀천 소설에서는 매우 드문) 생생한 자연묘사와 더불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에서 꽤나 사실주의적인 요소들이 늘어난 것은 맞지만,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비평가들과 하드코어 팬층이 열광해왔던 힙한 면모들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닌자 디엘과, 여러 복잡한 인연으로 얽혀 그녀와 동행하게 되는 전직 기업문제 전문 사설탐정 타께시(Takeshi)가 주로 그런 요소들을 담당한다. 소설 초반 그들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일본의 야꾸자 혹은 사무라이 장르영화와 「고질라」 같은 B급 SF 영화의 인용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그저 기존 팬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 줄곧 핀천이 작가적 책무로 삼아왔던 ‘평행우주’의 창조를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 그 에피소드의 다분히 비현실적인 느낌 때문에 실제로는 죽었으되 해소되지 않는 원한 때문에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타나토이드(Tanatoid)의 등장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상담을 받고자 디엘과 타께시를 찾아오는 이들의 존재와, 아울러 소설 곳곳에서 여러 인물의 입을 통해 말해지는 불교의 연기(緣起) 관념은 패배하고 억압된 존재들의 필연적인 ‘귀환’을 예고한다.

이런 메시지는, 이 소설에서 구현되는 또다른 (좀더 사실적인) ‘평행우주’에서 좀더 명시적으로 선언된다. 소설 말미에 연방정부의 예산삭감으로 브록이 권력을 잃게 되면서 그가 마약 단속을 핑계로 은밀히 진행하고 있던 휠러 가족 ‘사냥’은 뜻밖에도 십수년 만의 가족상봉의 계기가 된다. 그들은 때마침 바인랜드의 숲에서 열리던 프레네시 친·외가의 조부모세대까지 모이는 대규모 가족행사에 참여한다. 이 가문은 19세기 후반부터 노동운동을 비롯한 미국의 온갖 진보적인 사회운동에 참여했고, 그 거듭된 패배의 역사를 쓰라린 가문의 전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 가족모임에서 좌장격의 윗세대 어른 한명이 정의의 실현을 자연의 원리로 파악하는 에머슨(R. W. Emerson)의 산문 한 구절을 낭송한다. “신성한 정의의 균형은, 흔들리고 나서도, 비밀스러운 응보에 의해 항상 원래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대들보를 기울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세상의 모든 폭군, 지배자, 독점자가 어깨로 빗장을 들어올리더라도 다 헛수고다. 꿈쩍없이 적도가 자기의 선을 영원히 지키고 있거늘, 인간이든 티끌이든, 별이든 태양이든, 그것을 따라야 한다. 안 그러면 반동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590면)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기본 관습을 따르는 『자체결함』도 그 소재상 『바인랜드』의 핵심주제 중 하나인 국가권력의 불법적인 행태에 대한 비판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 탐정이 의뢰받은 여러 사건들마다 정체를 달리해서 출현하는 금빛 송곳니(golden fang)의 존재는 『제49호 품목의 경매』가 연상되는 대목인데, 애초에 핀천이 이 장르로부터 차용했던 그런 음모론 플롯은 세상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비밀스런 악의 존재를 암시한다. 이런 장르적인 플롯 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도 히피적인 라이프스타일과 삶의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직업생활을 그럭저럭 영위해가는 탐정 닥 스포텔로(Doc Sportello)의 형상화다. 그러나 이 히피 탐정은 소설의 시점인 1969년에 1960년대가 이미 저물었음을, 그래서 자기 세대의 열렬한 이상주의적 시도들이 곧 (소설에서 종종 말해지는) 사라진 대륙 리뮤리어(Lemuria)처럼 흐릿하게 기억되는 전설이 되리라는 것을 수사를 위해 방문하는 모든 곳에서 확인한다. 특히 소설 내내 언급되는 찰스 맨슨(Charles Manson)의 연쇄살인행각은 1960년대적 가치나 행태들이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아마도 ‘자체결함’이라는 제목은 1960년대의 이상주의적 열망 혹은 절대적인 자유의 추구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암시하는 듯하다. 그래도 주인공은 1960년대의 어떤 근본적인 선함 내지 순진함을 믿는 듯하고, 그런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 예컨대 그는 수사 중에 우연히 확보하게 된 상당량의 마약을 매개로 지역의 거물급 인사와 거래할 기회가 생기자 곧장, 허위로 사망처리되어 경찰의 정보원으로 일하게 된 자신의 공짜 ‘고객’이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해줄 것을 요구한다.

『자체결함』은 잘 확립된 관습을 거느린 익숙한 대중장르에 작가가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요소를 버무린 소품으로서, 1960년대의 어두운 면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 핵심 작의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런 대중적인 측면 때문에 핀천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영화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노령의 대가는 앞서 연이어 출간한 두 대작 역사소설 『낮을 거슬러』와 『메이슨과 딕슨』 이후에 장르소설 풍의 소품으로 창작방향을 돌린 듯싶다. 그래도 『자체결함』에서도 비교적 가벼운 톤이기는 하지만 『바인랜드』에 이어 1960년대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 그만큼 1960년대는 핀천의 방대한 문학세계의 중심에 있는 핵심적인 탐구 대상이다. 이전의 작품들이 1960년대와 함께 호흡하며 나왔던 성과라면, 그후 17년이라는 오랜 공백기 끝에 나온 문제작 『바인랜드』는 오랜 시간 동안 다져진 역사에 대한 성찰에 바탕한 1960년대에 대한 회고이자 평가이다. 『낮을 거슬러』와 『메이슨과 딕슨』도 『바인랜드』의 주제의식을 잇는 연속된 기획이었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하지 싶다. 인터넷서점을 통해 얻은 정보에 따르면, 우선 『낮을 거슬러』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미국 무정부주의 전통을 추적하는 내용인데, 그렇다면 이 작품은 확실히 『바인랜드』에서 부분적으로 시도한 1960년대의 역사적 뿌리찾기를 본격적으로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건국과 더불어 보수적인 사회질서가 자리잡아가는 18세기 중후반의 미국을 배경으로 삼은 『메이슨과 딕슨』은 유독 핀천 특유의 시대착오적 서사장치들이 두드러진다고 하는데, 핀천은 그런 요소들을 통해 1960년대 이후 자유가 위축되어가는 미국사회의 부정적인 변화양상을 환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사회에서 1960년대에 대한 해석은 종종 현실정치의 쟁점이 될 만큼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다. 예컨대 1960년대에 대학 시절을 보낸 클린턴(B. Clinton)은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자신의 징집거부운동 참여나 마리화나 흡연이력을 공격하는 공화당에 맞서 스스로를 케네디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함으로써 1960년대를 연 희망의 정조를 상기시키고자 했다. 더 근본적으로 미국사회에서 1960년대와 그 유산에 대한 태도는 정치적·문화적 정체성을 가르는 결정적인 표지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진영논리로 말미암아 1960년대의 문화적 재현은 종종 낭만적으로 이상화되거나 과장되게 악마화되는 경향이 있다. 핀천은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스타일 자체가 증언하는바, 1960년대의 감수성과 가치에 깊은 헌신과 애정을 지닌 창작자이지만, 그 시대의 어둡고 위험한 측면까지도 깊이 고려하는 소설을 써왔다. 온갖 정치, 예술, 삶의 실험이 과격하고도 왕성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세계사적 중요성을 띠게 된 그 시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 핀천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핀천을 좀더 유익하게 활용하자면 여러 유행하는 이론적 언설을 펼칠 계기로 자주 핀천을 동원하는 비평들을 무시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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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어판 『제49호 품목의 경매』, 김성곤 옮김, 민음사 2007, 133면. 인용은 필자 본인의 번역이다.
  2. 토머스 핀천 『느리게 배우는 사람』, 박인찬 옮김, 창비 2014, 각각 13, 25, 36면. 인용은 역서를 참조한 필자의 번역이다.
  3. Todd Gitlin, The Sixties: Years of Hope, Days of Rage, A Bantam Books 1987, 186면.
  4. 이 문장은 핀천의 2006년도 작품인 『낮을 거슬러』(Against the Day)의 표지에 실린 광고문구이다. 작품의 홍보에도 깊이 관여하는 작가의 평소 습관으로 보건대, 핀천 본인이 이 문구를 직접 썼으리라는 것이 대다수 평론가들의 생각이다
  5. James Wood, “Human, All Too Inhuman”, New Republic 2000.7.24(https://newrepublic.com/article/61361/human-inhuman).
  6. James Wood, “All Rainbow, No Gravity”, New Republic 2007.3.5(https://newrepublic.com/article/63049/all-rainbow-no-grav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