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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6월항쟁의 재구성

촛불의 관점에서 돌아보다

 

 

김태우 金泰佑

한국외대 한국학과 교수. 저서 『폭격』 『평화를 걷다』 『쟁점 한국사: 현대편』(공저) 등이 있음. taewoo21@gmail.com

 

 

1. 무엇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 10일,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인 순간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87년 6월항쟁에 의해 탄생한 헌법재판소가 2017년 촛불민심에 의해 추동된 탄핵심판을 통해 수구세력의 상징과도 같은 박정희(朴正熙)의 딸을 대통령의 권좌에서 공식적으로 끌어내리는 순간이었다. 2014년 세월호사건 이래 급속히 기울던 박근혜호는 2016년 4·13총선의 태풍과 박근혜게이트로 점화된 촛불집회의 거친 파고에 부딪혀 끝내 침몰하고 말았다.

박근혜(朴槿惠) 탄핵은 이명박정부 이래 가속화된 민주주의의 역행에 제동을 걸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확보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사실 민주주의는 1987년 6월항쟁과 87년체제의 구축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거스르기 힘든 시대정신이자 국가운영의 원칙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노태우-김영삼 보수정부하에서도 부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 소위 수구세력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롤백(roll back, 뒤로 되감기) 전략’과 ‘점진 쿠데타’(creeping coup d’etat)로 의심되는 행위들에 의해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손상되고 있었다. 2016년 4·13총선 이전까지만 해도 수구세력의 영구적 헤게모니 확보에 대한 근심과 의구심이 시민사회 곳곳에서 진지하게 제기되고 있었다.1

그러나 야권의 분열 속에서도 선거혁명을 완성한 4·13총선의 돌풍은 역류하던 물줄기에 강한 맞바람을 불어넣더니 결국 시대의 커다란 흐름마저도 돌려놓고 말았다. 우리는 지난 1년여의 기간 동안 진행된 놀라운 역사의 흐름을 지켜보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올해는 현대 한국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6월항쟁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6월항쟁은 그로부터 불과 7년 전 광주학살을 주도했던 전두환정권하에서 감행된 놀랍고 감동적인 민주주의의 대서사시였다. 또한 6월항쟁은 87년체제의 형성을 통해 민주주의 지향을 거스를 수 없는 국가운영의 원칙으로 확립시킨 체제전환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우리는 아직 2016~17년의 촛불집회의 열기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새로운 체제 형성의 현실적 계기가 될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확히 한 세대 30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한 6월항쟁과 촛불집회의 계기, 동력, 전개과정 등에 대한 비교·분석을 통해 민주주의의 지속적 전진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조건이나 시대를 관통하는 정치적 혜안을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 외적으로 굉장히 상이했던—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했던 6월항쟁과 시종일관 평화로웠던 촛불집회—시위 양상과는 달리, 두 역사적 사건을 관통하는 본질적 내용과 성격에서는 적잖은 유사성이 존재한다. 그같은 본질적 유사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시대전환의 길목에 서 있는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다. 30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무엇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6월항쟁, 시대를 관통하다

 

⑴ 진실과 용기: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이른바 청와대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 사무실 PC에서 청와대 관련 자료가 무더기로 발견됐습니다.” 2016년 10월 24일 JTBC 뉴스룸의 시작을 알린 아나운서의 일성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운명을 순식간에 뒤바꾸어버렸다. 다음날 박대통령은 최순실의 국정개입을 인정하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고, 11월 4일 제2차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검찰의 수사를 성실히 받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끝까지 검찰의 대면조사 요청을 거부하면서 ‘진실’을 외면했고, 결국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치욕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2016년 10월 말, JTBC의 최순실 태블릿PC 자료 공개는 관련 의혹 제기의 정점에서 발표된 것이었다. 이에 관한 최초의 의혹은 놀랍게도 수구보수세력의 균열을 상징하는 청와대와 조선일보의 갈등 과정에서 제기되었고, 청와대의 과민반응에 의혹을 품은 한겨레에 의해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부인할 수 없는 다수의 증거자료를 제시한 JTBC 방송보도에 의해 진실로 확증되었다. 이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형성 과정에서 벌어진 대기업 금품 수수,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정유라의 입학비리,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등과 관련하여 다수 언론과 용감한 제보자들의 증언을 통해 괴담 수준의 이야기가 현실로 입증되기 시작했다. 박근혜정권 몰락을 재촉한 근본 동력이 된 주말 촛불집회가 10월 29일에 최초로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10월 24일 JTBC 보도의 국민적 충격과 영향력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2016년에 JTBC가 있었다면, 30년 전 6월항쟁기에는 놀랍게도 동아일보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현재 한국사회의 대표적 보수언론 중 하나인 바로 그 동아일보 말이다. 그리고 정권의 직접적인 위협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또다른 진실의 대변자들도 다수 존재했다. 6월항쟁이 광범한 시민항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핵심적 계기 중 하나인 박종철(朴鍾哲) 고문사망사건의 진실 폭로 과정은 그 대표적 예이다.

1987년 1월 중순, 학생운동권과 재야세력은 전두환정권의 초강경 초토화 공세에 밀려 매우 수세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시 운동권은 1986년의 5·3인천사태, 구국학생연맹 사건, 건국대 사건 등과 같은, 정권의 혹독한 탄압으로 매우 위축된 상태였다. 그러나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사망사건 이후 중요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박종철 추모 물결 속에서 6월항쟁 승리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던 야당과 재야 민주화운동세력과 학생들 사이에 강력한 연대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종철의 억울한 죽음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용감하게 투쟁했던 소수의 개인들과 일부 언론의 지속적 노력이 없었다면 결코 당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 당시 학생들은 수많은 대형 공안사건이 수시로 터지는 상황에서 박종철 고문사망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일과성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언론이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쳐 진실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다수의 시민과 보수적인 종교계와 야당까지 적극 호응하는 것을 보면서 학생들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2

1987년 동아일보는 박종철사건 진실 추적의 제일선에 위치하고 있었다. 박종철 사망 특종은 사건 발생 다음날인 1월 15일에 중앙일보가 최초로 보도했지만, 중앙일보는 해당 기사를 사회면 2단으로 간소하게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진실의 추적에서도 매우 수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동아일보는 특별취재팀을 구성하여 끈질기게 진실을 추적했고, 사회면에 4단 이상 박종철 관련 기사를 쓰지 말라는 국가안전기획부의 서슬 퍼런 ‘보도지침’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사 게재를 멈추지 않았다.3

사건에 관한 정부 측의 최초 해명은 1월 15일 저녁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통해 최초로 등장했다. 그는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며 혐의사실을 추궁하자 갑자기 ‘억’ 하며 책상 위로 쓰러졌다”고 밝혔다.4 “탁 치자 억 하고 쓰러졌다”는 씁쓸한 유행어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1월 16일 오후에 발행된 동아일보는 이 사건 보도에 불을 붙였다. 「조사받던 대학생의 죽음」이라는 2면 사설을 비롯해 사회면의 대부분을 박종철 관련 기사로 채웠기 때문이다.5 1월 17일에는 정구영 서울지검장이 당국자로는 최초로 물고문 혐의 사실에 대해 언급했고, 급기야 동아일보 데스크는 당일 “확인된 사실은 모두 쓰라”는 과감한 지시를 하달했다.6 당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걸요”라는 위협을 받는 속에서 내려진 지시였다.

실제 1월 17일자 동아일보는 여러 면에 걸쳐 박종철 사건을 다뤘다. 5개의 1면 기사, 3개의 3면(정치면) 기사, 5개의 7면(사회면) 기사가 게재된 것이다. 특히 김중배(金重培) 논설위원의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는 두고두고 읽혔다. 그는 “박종철, 그의 죽음과 이름은 거듭 되새겨지고 거듭 불려져야 한다. 건강과 밝음이 충만했다는 그 젊음이 무슨 변고로 주검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는가. 우리는 그 진상을 한점의 의문도 없이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 동아일보 기자들의 주말 취재 기사로 가득 찬 1월 19일(월요일)자 신문은 정부 당국뿐만 아니라 모든 신문사 데스크까지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여타 신문사 데스크들은 “동아일보를 베껴서라도 지면을 채우라”는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7 마치 2016년 JTBC의 태블릿PC 특종보도를 여타 언론들이 받아서 기사화할 수밖에 없던 상황과 유사한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정부의 보도지침은 무너져갔고, 언론의 행보는 빨라지기 시작했다.

2016~17년 촛불집회 현장에서 JTBC는 언제나 시민들에게 특별대우를 받았다. 반면에 KBS나 MBC는 집회현장 곳곳에서 욕설을 듣거나 쫓겨나기 일쑤였다. 이와 비슷하게 동아일보도 당대 시위 군중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곤 했다. 동아일보 황열헌(黃烈憲) 기자의 기사에서 주목받은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다이”라는 문구8가 시위현장 곳곳에서 쉽게 눈에 띄었고, 동아일보 사건기자들은 시위현장에서 언제나 프리패스였으며, 보도가 나간 직후에는 수많은 독자들이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어 “동아만 믿는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박종철 관련 기사로 가득한 동아일보 가판신문은 광화문 일대에서만 60만부씩 팔려나갔고, 신문 추가보급 요청에도 불구하고 윤전기의 인쇄용량 한계로 인해 신문을 못 보내줄 정도였다.9 진실을 향한 민중의 갈증을 알 수 있는 일화들이다.

1987년 한국기자협회는 제19회 한국기자상 취재보도부문을 동아일보 박종철군 취재팀에게 수여했다. 심사위원은 각 신문사 편집국장들이었다. 당시의 동아일보 사회부장 정구종(鄭求宗)은 “우리 기자들에게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귀중한 진실의 증언을 귀띔해준 ‘Deep throat’들에게 새삼 감사드린다”는 소감을 피력했다.10 아마도 그 진실의 증언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외부인으로서 최초로 박종철을 본 후 물고문 가능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했던 젊은 의사 오연상(吳演相, 당시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의), 사체를 부검한 후 당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고문 가능성을 적시한 황적준(黃迪駿) 박사, 법정 증인으로 나와 사실대로 진술한 박종철 하숙집 주인 박경호(朴經鎬) 부부, 1987년 5월 경찰 간부회의에서 박종철사건 범인의 축소 조작이 모의되었음을 귀띔해준 익명의 취재원 등이 그들이다. 1987년에도, 2017년에도 이같은 사람들의 진실을 향한 용기가 우리 사회를 또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주었다.

 

⑵ 참여와 연대: 불가능해 보였던 연대의 성공과 광범한 시민참여

역사학자 서중석(徐仲錫)은 6월항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데 있다고 평가했다.11 그리고 아마도 1987년의 6월항쟁과 2016~17년 촛불집회의 가장 큰 공통점 또한 광범한 시민의 지지와 참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이끈 주말 촛불집회는 대외적으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하 ‘퇴진행동’)의 주최하에 진행되었지만, 퇴진행동은 집회의 시간과 장소와 진행순서 등을 계획·공지하는 주체였을 뿐, 광장을 가득 채운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퇴진행동과 인적·물적으로 완전히 무관한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서울시내 곳곳에서는 10월 29일 최초의 주말 촛불집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교복 입은 학생, 정장 입은 직장인, 유모차 끌고 나온 가족 등이 ‘평일 촛불행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12 십대 청소년들은 “기특하다”는 어른들의 칭찬 대신, 망가진 세상을 과감하게 뜯어고칠 정치적 주체로 우뚝 서길 갈구했다. 이십대 청년들은 아이돌 콘서트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형광 피켓을 들고 나와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젊은 여성들은 집회 내의 여성혐오 발언들에 직접적으로 제동을 걸며 페미니스트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에 스스로 눈떴다. 난생처음 집회에 나왔다는 노년의 부부는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 얇은 방석 하나를 깔고 앉아 몇시간 동안이나 ‘박근혜 퇴진’을 외치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조금의 과장도 필요 없는 광범하고 자발적인 시민의 참여였다.

그런데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처럼 광범하고 자발적인 시민의 참여가 없었다면 과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가능했을까? 새누리당은 지금처럼 다수의 국민들로부터 외면받는 자유한국당으로 위축되었을까?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특정 계층이나 세력에 의해 탄핵정국이 주도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정치지형을 상상하기란 매우 어렵다. 헌정 중단 우려를 운운하며 공식적인 탄핵 절차와 관련해서 계속 주춤거렸던 야당 의원들을 떠올려보면 충분히 합당한 추론일 것이다. 아마도 그 특정세력의 요구는 지속적 동력을 상실한 채 고립되거나, 정권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받고 흩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유사한 질문을 6월항쟁에 대해서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6월항쟁이 한국사회 각계각층의 광범한 연대와 시민의 적극적 참여가 없었어도 목표를 달성해낼 수 있었을까? 현재 우리는 1987년의 ‘민주대연합’, 즉 전두환정권에 맞서기 위해 학생세력과 재야운동권과 야당과 종교단체 등이 2016~17년처럼 매우 수월하게 연대를 형성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 당대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심지어 1986년까지만 해도 재야·학생운동권과 야당과 시민들은 심각하게 분열·갈등하고 있었다.

1986년의 5·3인천사태는 당시의 분열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당시 야당인 신한민주당(이하 ‘신민당’)은 1985년 2·12총선에서 핵심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직선제 개헌’을 현실화하기 위해 전국적인 ‘개헌서명운동’과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지방지부 결성대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소위 ‘개헌 현판식 집회’로 불린 신민당의 지방 행사들은 해당 지역민의 대대적 호응을 받으며, 부산, 광주, 대구, 청주 등에서 매번 수만명의 대규모 군중을 집회현장에 불러 모으고 있었다.13 야당은 이같은 지방에서의 여세를 몰아 수도권에서 큰 규모의 개헌투쟁을 벌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일 인천 집회현장은 예상치 못했던 급진적 구호들과 격렬한 폭력시위로 인해 현판식 개최 전에 이미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학생운동권의 민민투(반제반파쇼민족민주화투쟁위원회)는 ‘개헌’이 아닌 ‘제헌의회 소집’을, 또다른 학생운동권의 자민투(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는 ‘미제 축출과 반전 반핵’을, 노동운동단체인 서울노동운동연합은 ‘삼민헌법 쟁취’를 부르짖었다.14 급진화된 주장들은 사실상 일반 대중의 수용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에 정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인천대회 직후 각 사회단체 지도부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며 살벌한 공안정국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민주화운동은 수세기로 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5·3인천사태로 촉발된 재야·학생운동권의 위기 상황은 오히려 6월항쟁기 국민대연합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각자 자신의 급진적 노선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야당의 개헌 프레임에 대해서도 관점을 변화시켜나갔다. 1986년 하반기 수십개의 사회운동조직을 연결하는 중위동원자(mesomobilizer) 역할을 담당했던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사실상 직선제 개헌을 지지하면서 “전 운동세력의 결집과 단결”을 주장했고,15 학생운동세력도 화염병 사용을 당연시했던 과감한 투쟁 대신 비폭력노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6년 11월 29일에 이르러서는 야당과 사회운동세력이 함께 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하는 서울대회를 개최하는 성과까지 거두었다.16 1987년 민주대연합의 중요한 전제가 이렇게 형성되어갔던 것이다.

1987년 상반기 박종철 추모 열기는 참여와 연대를 위한 또다른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재야운동권과 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시선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국민적 추모 물결 속에서 민주대연합 형성의 현실적 계기도 마련될 수 있었다. 박종철을 애도하는 2·7추도시위와 3·3국민대회 현장에서 시민들의 반응은 과거와 달랐다. 어린 자식을 둔 부모들에게 박종철의 죽음은 결코 남의 일로 간주될 수 없었다. 당시 박종철은 피의자로 끌려간 게 아니라 수배된 학생을 찾아내기 위한 참고인으로 끌려갔을 뿐이었다. 참고인으로 끌려가는 것은 모든 학생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17 박종철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되어 광범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야당은 이같은 여론동향에 주목하며, 운동권과 함께 2·7추도시위와 3·3국민대회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결정했다. 6월항쟁의 대표적 특징인 전국적이고 동시다발적인 집회 방식 또한 박종철 추모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기획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종철 사망 관련 사안에 더해,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전두환(全斗煥)의 4·13호헌조치와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민운동본부’, ‘국본’)의 결성 또한 정권에 저항하는 대규모 연대의 형성과 시민들의 적극적 동참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전두환정권은 1985년 2·12총선 이후 전면화된 ‘직선제 개헌’ 프레임의 ‘대중성’을 간과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고, 결과적으로 엄청난 실망과 분노를 느낀 다양한 세력의 연대와 저항의 급진화를 야기하면서 정권 스스로 위태로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분명 6월의 시민들은 전에 없던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정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경찰병력이 압도적으로 집중되어 있던 서울에서는 시민들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도심지 연도(沿道)에서 시위대에게 박수나 환호성을 보내거나, 음료수나 음식물을 제공하거나, 도망가는 학생들을 상가에 피신시켜주거나, 학생을 연행하는 전경에게 야유를 보내는 등의 방식으로 시위를 돕곤 했다. 다수의 사무직 직원들로 구성된 소위 ‘넥타이 부대’들도 종종 서울 도심에 나타나 시위에 힘을 실어주었다. 택시기사들도 도로를 일시적으로 점거하거나 경적시위를 펼치며 시위대를 응원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기 다수의 학생시위 현장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모습이 도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지방에서는 시민들이 시위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거나, 심지어 시위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곧잘 볼 수 있었다. 수만명의 시민이 매일 전국 각처에서 국본이나 야당과 무관하게 거친 시위를 전개했다. 고속도로가 점거당하고, 열차가 정지당하고, 시청과 KBS가 공격당하고, 파출소와 민정당 당사가 불태워지는 치안 부재의 상황이 전국 곳곳에서 연출되었다.

물론 6월항쟁기에 가장 헌신적으로 투쟁한 집단은 전국의 대학생들이었다. 6월항쟁이 전두환정권의 치안을 마비시켜버릴 정도로 전국적이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서울지역 대학생들 외에도, 지방 소재 대학이나 서울 소재 대학 지방 분교 대학생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80년대에 신설된 다수의 지방 소재 대학 학생들은 시위의 전통이 부재했던 여러 지역에서 항쟁의 열기가 타오르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학생들은 경찰폭력에 맞서 싸우는 것을 당연시하면서 6월 한달 내내 거의 초인적으로 시위투쟁을 지속해나갔다.

6월의 시민들은 그같은 학생들의 헌신성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생들도 광범한 연대투쟁의 가치에 대해 현실적으로 자각해나갔다. 책으로 읽고 세미나에서 듣기만 했던 역사 속의 ‘민중’이 그들 앞에 현실로 나타나 때로 자신들보다 더 강렬하게 투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의 자기헌신과 시민들의 광범한 참여는 그렇게 우리 사회를 또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⑶ 선거와 헌법: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 위에서

마지막으로 1987년의 6월항쟁과 2016~17년 촛불집회에서 공히 ‘선거’와 ‘헌법’이라는, 현대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제도적 기초들이 민주주의의 역행을 막기 위한 최종저지선으로서, 혹은 대중을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운동의 슬로건 내지는 정치프레임으로서 현실적으로 작동했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놀랍게도 6월항쟁과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는 항쟁 발생 전의 총선 과정에서 공히 야당 돌풍 현상을 목도했고, 항쟁의 진행 과정에서 정권교체 프레임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 대통령선거와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었으며, 헌법의 개정 혹은 헌법에 기초한 법치주의의 구현이 핵심 쟁점으로 부상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흔히 선거와 헌법은 체제변혁을 이끌기보다는, 오히려 지배세력의 권력을 유지·강화하거나,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을 체제 내화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한국현대사에서도 선거나 헌법개정이 독재권력의 강화와 연장에 기여한 사례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반면에 선거 자체가 민중의 오랜 투쟁의 결과로 달성된 역사적 성취물이며, 선거시기가 되면 대중의 ‘정치적 역동성’이 고양된다는 점에서 사회변혁적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측면이 존재한다. 게다가 헌법 또한 단순한 규율적 성격을 넘어 한 사회의 목표와 이상을 적시해둔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사회변혁이나 운동과의 연관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우리는 1985년의 2·12총선과 2016년의 4·13총선, 1986~87년의 개헌 논쟁과 2017년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과정에서 이같은 모습을 생생하게 확인했다. 이를테면 2016년 4·13총선 결과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 있다. 총선 직전에 발표된 모든 여론조사 결과가 여당인 새누리당의 승리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분당 사태로 인한 야권 표심 분열은 이같은 예상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심은 이미 박근혜정권과 새누리당으로부터 심각하게 이반되어 있었다. 정권의 위기는 이미 2014년 세월호사건 당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거기간 내내 야권은 ‘정권심판론’을 핵심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대중적 지지를 넓혀간 반면, 여당은 정권의 반복적 실정에 더해 공천 과정에서 비민주적이면서도 졸렬한 정치행위를 거듭하며 내적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그 결과 새누리당은 자신의 오랜 표밭인 강남3구와 분당구 등에서도 5석이나 상실하면서, 서울·경기 지역에서 야당이 압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같은 4·13총선의 민심 돌풍은 결국 태풍이 되어 국회에 의한 대통령 탄핵안 발의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85년 2·12총선의 돌풍도 놀라운 것이었다. 원래 85년 총선은 어떤 변수 속에서도 여당인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의 승리가 확실해 보이는 선거였다. 우선 선거법 자체가 하나의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인데다가 제1당이 전국구 의석의 3분의 2인 61석을 차지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총선은 광범한 부정선거운동까지 병행한 민정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그리고 실제 선거결과 또한 민정당이 35.2%의 득표에도 불구하고 총의석의 53.5%(지역구 87석, 전국구 61석)를 차지하며 원내 다수당이 되었다.18

그러나 총선 개최 불과 한달 전(1월 18일)에 창당한 신민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놀라운 것이었다. 신민당은 특히 대도시에서 압승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선거 결과, 신민당은 서울에서 42.7%, 부산에서 35.9%를 득표한 반면, 민정당은 20%대 득표에 그쳤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신민당 돌풍의 원인이었다. 2016년 4·13총선에서 ‘정권심판론’이 핵심 슬로건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민당은 1984년 전두환정권의 유화정책에 의해 대중에게 개방된 정치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선거유세장에서 광주학살 문제, 전두환정권의 정통성 문제, 직선제 개헌 문제와 같은 금기시되어왔던 내용들을 거침없이 공론화하면서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었다. 민정당의 금품 살포와 행정력을 총동원한 관권선거에 맞서, 80년대 초반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김영삼(金泳三)과 김대중(金大中)의 신민당은 오로지 정치적 ‘바람’과 대중의 폭발적 관심만으로 제1야당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19

6월항쟁의 핵심 프레임인 ‘직선제 개헌’이 처음으로 진지하고 광범하게 논의된 것도 2·12총선 과정에서였다. 개헌은 총선을 거치면서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한 프레임이 되었고, 총선에서 예상외로 신생 야당인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자 학생·재야운동권도 개헌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 앞의 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애초 운동세력은 야당의 직선제 개헌 주장을 지나치게 온건한 노선으로 비판하면서 전두환정권 퇴진을 전제한 새로운 민주헌법 ‘제정’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86년 하반기 정권의 대대적 탄압 이후 학생·재야운동권은 온건노선을 적극적으로 채택하며 민주대연합을 달성할 수 있었다.

‘직선제 개헌’ 문제가 2·12총선을 경유하며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한 프레임이 된 사실은 6월항쟁의 전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제5공화국 헌법을 지켜내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는 전두환의 ‘4·13호헌조치’가 아래로부터의 대규모 저항을 발생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정권의 ‘최대의 실책’으로 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85년 총선 이래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온 직선제 개헌 프레임의 대중성을 지나치게 간과했던 것이다. 전두환의 일방적인 대통령 간선제 유지 표명은 일반 시민들에게 엄청난 박탈감을 유발하면서 사회 전반적인 정권 이반 현상을 가속화했다. 자발적 대중동원으로서의 각종 서명운동, 시국선언, 단식투쟁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돌이켜 보건대, 2·12총선으로 확장된 개헌 프레임의 대중성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항쟁의 대표적 슬로건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이름의 범국민적 저항조직을 탄생시키며, 궁극적으로 1987년 ‘민주헌법’ 탄생의 주춧돌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나 헌법과 같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들은 때로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고 저항을 내면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선거 과정에서 표출된 정치적 역동성과 법치주의의 이상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성장에 적잖은 기여를 해왔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6월항쟁의 직접적 산물로서 1987년에 탄생한 헌법재판소가 박정희 정신의 계승을 강조했던 박근혜를 탄핵한 2017년의 사건 또한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앞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은 여전히 지난하고 아득해 보이지만, 이렇듯 진실을 향한 용기, 정의와 평화를 위한 광범한 참여와 연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지속적 제도 개선 등을 통해 또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3.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이 글은 ‘진실과 용기’ ‘참여와 연대’ ‘선거와 헌법’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2016~17년 촛불집회의 관점에서 1987년의 6월항쟁을 되돌아보았다. 87년체제의 형성을 통해 체제전환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한 6월혁명과, 체제전환적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높은 촛불집회의 비교·분석을 통해 “무엇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름의 대답을 찾아보고자 했다. 이같은 질문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주요 정책을 시대 ‘역행’적인 것으로 해석해왔던 『창작과비평』의 논의를 일정한 연장선상에서 제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6월항쟁과 촛불집회에는 적잖은 차이점도 존재한다. 각각의 시대적 배경은 물론, 시위의 전개방식과 영향 등의 측면에서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항쟁에서 공통적으로 발현된, 진실을 위한 용감한 증언, 폭압 속에서도 관철된 언론의 진실 추적과 공정보도, 사회 각계각층의 광범한 연대, 시민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시위참여, 총선 과정에서 전면화된 정권비판론과 여론의 역동적 조응, 헌법적 가치의 실현을 위한 적극적 투쟁 등과 같은 요소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면 과연 항쟁의 성공을 장담할 수 있었을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향후에도 한국 민주주의가 또다른 위기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위와 같은 역사적 내용들을 참조·응용할 필요가 있다. 왜곡된 언론지배구조를 정상화하고, 시민들의 정치참여와 연대를 촉진할 수 있는 현실적 장치를 강구하며, 선거·헌법 같은 제도적 요소의 개선을 통해 민주주의의 지속적 성장을 위한 기초를 튼튼하게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6월항쟁 ‘이후’ 발생한 항쟁의 성과와 한계는 촛불시민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현시점의 한국사회 개혁에 적잖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6월항쟁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1987년 이후의 한국사회를 ‘87년체제’라고 부르게 만든 정치적 부문에서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제도화와 사회적·경제적 부문에서의 개발독재체제의 외형적 종식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87년 헌법상의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폐지, 국정감사, 헌법재판소 설치, 최저임금제와 구속적부심 등의 국민기본권 신장 조치, 경제민주화의 명문화 등은 한국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데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반면에 87년체제 자체가 정치세력 간의 타협의 산물로서 태생적으로 보수적 성격을 띠고 있다거나, 절차적 민주주의에는 성공했지만 ‘내용적·실질적 민주주의’에는 실패했고, ‘경제민주화’도 선언적 문구에 그친 채 실질적인 경제의 민주화에는 실패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20

여기에 더해 “87년체제가 1961년 이래의 군사독재를 종식시켰지만”, 독재의 기반을 제공했던 “1953년 이래의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할 수 있다.21) 물론 6월항쟁 기간에도 통일의 요구가 함께했고, 1987년 이후 지속적으로 통일운동의 흐름이 확대되어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이라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최근의 대통령선거운동 과정에서도 과거 새누리당 출신의 홍준표(洪準杓)·유승민(劉承旼) 후보는 문재인(文在寅) 후보 공략을 위해 북한 핵개발, 미군의 사드(THAAD) 배치, 유엔의 북한인권결의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는 소위 ‘태극기집회’에서도 가장 광범하게 운위된 담론이 소위 ‘종북론’이었다. 박근혜게이트로부터 촉발된 촛불집회는 한국의 수구세력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긴 했지만, 한반도 분단체제가 굳건한 이상 수구적 담론은 언제든지 소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6월항쟁도 어느새 한 세대를 건너 30주년에 이르렀다. 개인적으로 6월항쟁을 떠올리면 가장 인상 깊게 회고하게 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시인 윤동주(尹東柱)의 고향친구였던 문익환(文益煥) 목사가 1987년 7월 9일 이한열(李韓烈) 열사의 장례식장에서 먼저 저세상으로 간 열사들의 이름을 목 놓아 외치던 장면이 그것이다. 올해는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한데, 만약 윤동주가 일제의 감옥 안에서 죽지 않고 해방을 맞았다면 아마 그 단상 위에 문익환과 함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린다는 윤동주의 시(1942년작 「쉽게 씌어진 시」)가 촛불정국에서 많이 회자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촛불시민들은 윤동주와 같은 심정으로 촛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시대의 아침이 오길 숙원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시대의 아침에 서 있는 것일까, 아니면 촛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았을 뿐일까. 5월 10일 출범한 문재인정부는 매우 복잡하고도 어려운 국내외적 난제들 앞에 놓여 있다. 6월항쟁 이후 87년체제의 여러 성과와 한계들은 새 정부가 나아가야 할 길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새 정부는 실질적인 정치적·경제적 민주화의 달성이라는 한국사회 내적 문제와 함께, 북핵 문제를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혀버린 분단체제 극복의 난제를 슬기롭게 헤쳐나가야만 한국사회의 적폐 청산과 경제 개혁,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촛불시민의 복합적 요구에 일정하게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촛불시민들 또한 촛불집회가 체제전환적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도록 촛불 ‘이후’의 정치·경제 시스템 개혁과 남북관계 개선 과정을 냉철하고 비판적인 자세로 지켜보아야 한다. 한 세대 전의 ‘6월’은 오늘날의 ‘촛불’에 매우 명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싸움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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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남주 「수구의 ‘롤백 전략’과 시민사회의 ‘대전환’ 기획」,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2. 서중석 『6월 항쟁』, 돌베개 2011, 237면.
  3. 신성호 「검찰출입기자의 특종」, 『6월항쟁을 기록하다』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67~68면.
  4. 「대학생 경찰 조사받다 사망, 民民鬪 관련」, 동아일보 1987.1.16.
  5. (사설) 조사받던 대학생의 죽음」; 「대학생 경찰 조사받다 사망, 民民鬪 관련」; 「경찰서 대학생 쇼크사 검찰, 진상 규명 나서」; 「來週 진상발표」; 「新民서 진상조사단」; 「功에 급급하더니… 대학생 사망 묘한 반응」; 「치외법권적 지위 누려」; 「30여시간이나 쉬쉬」; 「구속자 가족들도 성명」, 동아일보 1987.1.16.
  6. 황호택 「언론보도, 저항의 뇌관」, 『6월항쟁을 기록하다』 3, 85면.
  7. 같은 곳.
  8. 「이 아비는 할 말이 없다이」, 동아일보 1987.1.17.
  9. 황호택, 앞의 글 83~87면.
  10. 정구종 「나의 사회부장 시절」, 『저널리즘』 1992년 겨울호.
  11. 서중석, 앞의 책 113면.
  12. 「촛불, 20일의 기록」, 『참세상』 2016.11.21.
  13. 광주에서는 전남도청 분수대로터리 일대를 중심으로 교통이 마비될 정도의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 약 20~30만명까지 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엮음 『개헌과 민주화운동』, 민중사 1986, 43면.
  14. 한국민주주의연구소 『1980년대 개헌운동과 6·10민주항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43면.
  15. 중위동원자로서 민통련의 역할에 대해서는 정철희 「중위동원과 6월항쟁」, 『한국사회학』 30호, 1996, 76~77면 참조.
  16.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앞의 책 47면.
  17. 1986년 서울대생의 경우 전체 학생수의 6.9%에 해당하는 1523명이 연행된 경험이 있었고, 2학년 학생은 10명에 2명꼴로 연행되었다(중앙일보 1987.2.2).
  18. 국회사무처 『의정자료집』, 2008, 63면.
  19. 류청하 「1985년 2·12총선: 위협당한 5공군부독재」, 『역사비평』 1992년 봄호 71~73면.
  20. 87년체제에 대한 다양한 담론에 대해서는 김종엽 엮음 『87년체제론』, 창비 200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