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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병근 鄭柄根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1988년 『불교문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태양의 족보』 등이 있음. jbg4321@daum.net
선인(善人)
보일러가 고장나서 사람을 불렀다. 노랑머리에 챙모자를 쓴 청년이 불쑥 들어왔다. 뭐 이런 사람이 보일러를 고친다고, 이것저것 변설이나 늘어놓으며 새 보일러로 교체해야 한다고 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막힌 하수관을 뚫을 때도 세면기와 변기까지 들먹이던 사거리 대한설비 아저씨 생각이 덜컥 났다. 보일러를 제법 아는 사람처럼 상황을 설명하고 옆을 지켰다. 청년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나가 계시라고 했다. 헛기침을 하며 거실을 서성거리는데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물걸레 좀 없어요?” 수건에 물을 적셔서 들고 갔다. “보일러는 아직 쓸 만해요. 이쪽으로 가는 필터가 막혔어요. 보이시죠? 이걸 빼서 한번씩 청소해주세요.” 청년은 필터에 바람을 쉭쉭 넣고 후후 불더니 걸레로 닦았다. “빗자루도 좀 주세요.” 청년은 부스러기를 쓸어낸 뒤 쪼그리고 앉아 때가 새까맣게 낀 바닥을 걸레로 박박 닦았다. 그 모습을 보니 미안해졌다. 일을 다 끝낸 청년에게 출장비 외에 웃돈 만원을 더 내밀자 단박에 사양했다. 청년은 주스를 한목에 들이켜고는 뭐라고 뭐라고 전화를 하며 바삐 나갔다. 나는 그 청년이 간 뒤에도 한참 서 있었다. 예전에 생수기를 깨끗이 닦아주던 물 아저씨 생각도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