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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문재인정부 100일을 평가한다
강문대(姜文大)
변호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총장. 저서 『교회, 가이사의 법정에 서다』가 있음.
김연철(金鍊鐵)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저서 『협상의 전략』 『냉전의 추억』 등이 있음.
이철희(李哲熙)
더불어민주당 제20대 국회의원. 저서 『이철희의 정치 썰전』 『1인자를 만든 참모들』 등이 있음.
장윤선(張允善)
오마이뉴스 기자. 저서 『소셜테이너』 『한국의 보수와 대화하다』(공저) 등이 있음.
김연철(사회) 문재인정부가 8월 17일로 정부 출범 100일을 맞습니다.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높은 기대를 받으며 출범했지만, 인수기간 없이 당선 확정과 동시에 바로 임기가 시작돼 아직은 좀 어수선합니다. 그럼에도 남다른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정부가 제대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다른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이에 오늘 창비 지면에서의 대화를 통해 정부 출범 100일을 평가해보고자 합니다. 각각 국회, 법조계 및 시민사회, 언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세분을 모셨습니다.
우선 촛불혁명 이후 등장한 새 정부의 역사적 과제와 시대적 의미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국민들의 높은 기대와 객관적인 정치적 현실을 같이 고려할 때 문재인정부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핵심적 과제가 무엇인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새 정부의 시대적 과제는?
이철희 문재인정부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간명하게 표현하면 민주공화정의 온전한 복원이라 하겠습니다. 박근혜정부가 민주공화정이라는 헌법의 골간을 짓밟았기 때문에 촛불혁명으로 탄핵됐지요. 민주공화정이 꼭 정치적인 의미만을 담은 개념은 아니고, 사회경제적인 의미도 포함한다고 봅니다. 쉽게 풀면 결국 함께 결정하고 다 같이 잘살자는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먹고사는 문제에 짓눌려 힘들어하던 많은 사람들의 현실이 탄핵을 야기한 근본 동력이었습니다. 물론 촛불혁명이 촉발된 계기는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이었지만, 그 기저에는 보수정권 9년 동안 민생이 심각한 수준으로 피폐해진 상황이 있었다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국민들이 민주공화정을 되찾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거고 그것이 조기 대선과 문재인정부의 출범으로 나타났습니다. 상당 기간 정치권력이 워낙 심각하게 민주주의를 왜곡해왔기 때문에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보여주는 소통 행보처럼 정치의 문화행태적 측면을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겠지만, 결국 가장 큰 숙제는 불평등·양극화를 해소해서 보통 사람들의 고단함을 풀어주는 일이라고 봅니다.
강문대 비슷한 시각이지만 표현을 조금 달리하면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정부가 되어야 합니다. 헌법상 국민주권이 선언되어 있는 만큼 그것이 정치를 비롯해 모든 영역에서 관철되어야 할 기본 원리여야 하는데, 지난 정권의 행태를 돌이켜 보면 그러지 못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에서도 국민은 사라져버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책방향에서도 국민들이 배제되었고 나중에는 국민들이 그런 점을 실감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국민들 다수가 내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상황임을 깨닫게 된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국정농단 사태가 알려지자 국민들의 분노와 울분이 폭발했던 것이지요. 국민주권을 실현할 때 핵심적인 과제는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 안에 여러 구체적인 과제가 있겠지만, 제 관심 분야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현 정부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바로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입니다. 이것은 국민의 주권과 생명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자 그 토대가 되는 부분으로, 현 정부에서 이들 개혁을 나중에 어떤 정치세력도 되돌릴 수 없게 완전한 형태로 구현해야 합니다.
장윤선 추운 겨울날 무려 22주 동안 1700만명의 시민이 주말을 반납하고 촛불을 들었습니다.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요. 이게 바로 민주주의의 회복입니다. 1987년 이후에 정치적·제도적 민주주의가 상당 부분 완성됐다고 믿고 살았던 국민들이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어떻게 우리 민주주의가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는가, 30년 전으로 후퇴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하는 한결같은 마음에서 전선을 지킨 거라고 봐요. 자연히 문재인정부의 핵심적인 시대적 과제는 촛불이 회복시킨 민주주의가 다시 후퇴하지 않도록 저지선을 지켜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에 ‘오마이TV’가 한주도 빼놓지 않고 집회현장을 생중계했는데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민들을 인터뷰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가 내 삶을 바꾸는 대통령을 원해서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대통령 이름 하나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여기 담긴 바람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국민의 삶을 지금보다 훨씬 낫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으로써 공평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상을 수립해야겠고요.
김연철 세분 말씀에 공통분모가 있네요. 민주주의를 전체 사회를 작동시키는 소통의 절차로 한정하면 새 정부 들어서 절차적인 정당성 문제는 확실히 개선된 듯 보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보여주는 소탈한 자세나, 토론하고 협의해서 결론을 내리는 리더십의 형태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극명하게 대비되고, 그런 면에서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씀하신 대로 양극화와 불평등 등 민생의 문제, 즉 삶의 질을 어떻게 개선할지는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이고, 시간도 걸릴 것 같습니다. 지금의 높은 지지율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요. 세분의 전망이 궁금합니다.
오랜 지지율 고공행진의 의미
이철희 문재인정부에 주어진 시대과제와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원을 대충 비교해보면 지지율 70%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고 봅니다. 내려갈 거예요. 그러나 변화에 대한 열망이 워낙 크기 때문에 어느날 푹 꺼지진 않을 겁니다. 관건은 어느 정도 선에서 유지해나가느냐인데, 두가지 기준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우리 사회 문제가 5년으로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10년, 20년 동안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5년 단위로 시야를 좁히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 정부가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서두르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풀어낼 수 있는 것부터 손에 잡히는 성과를 보여주면서 차근차근 밟아나가야 합니다. 정치나 개혁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어느 것이 우선순위인지, 어디서부터 성과가 나올 수 있는지는 각자 판단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우선순위나 성과를 판별하는 기준은 지지기반을 흩트리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개혁이라는 건 찬반이 있기 마련이고 반대세력의 목소리가 커지기 쉽잖아요. 어떤 사안에 반대가 많아지면 성과를 내기 어려워지고 결국은 전체적인 개혁이 좌절될 수밖에 없어요. 정권의 지속 가능함이라고 할까요, 문재인정부를 넘어 그 이후까지 진보정권을 유지하려면 지지세력을 약화시키는 선택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역시 국민들이 체감하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장기적 개혁에 대해 많은 열망이 있지만, 어느 순간 ‘축제’가 끝난 뒤에 내 삶은 나아진 게 없다고 한다면 허탈감을 느끼게 될 거고, 그게 불만과 저항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개혁과제와 효과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곧 출범 100일이 되는데, 물론 100일 동안 지지율을 이 정도로 유지한 것도 대단한 거죠. 그러나 앞으로는 지지율 조정기간을 거쳐서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구도,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인 다수의 진보연합(durable & stable majority progressive coalition)을 유지하고 확장해나갈지를 이 두가지 기준에서 고민하면서 국정운영을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강문대 일단 지금의 높은 지지율에는 대통령의 탈권위적인 행보나 절제된 언어, 진지한 태도, 공감의 표정 같은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과제를 국회에 떠넘긴 채 허송세월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은 바로 해나가면서 신뢰감을 준 것, 그리고 민생을 우선시한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최저임금 인상, 집값 안정화 정책, 건강보험 급여 범위 확대 검토 같은 과제들을 먼저 다루어왔지요. 이런 점들이 종합적으로 반영돼 높은 지지율로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개혁을 하는 과정에서는 기득권 계층과 보수층의 반발을 각오해야 합니다. 지지층 내부에서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하고요. 저는 제가 지지하는 정당과는 무관하게 현 정부의 높은 지지율이 유지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쨌든 대통령이 여러 과제들을 수행하고 있으니 많은 지지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벌써부터 의견이 대립되는 쟁점들이 제기되는 것 같네요. 우리 민변도 현 정권의 출범을 환영하고 정부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반대 입장으로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거든요. 지지율이 높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비판해야 하는, 정치적으로는 현 정부를 지지하지만 자기 삶의 문제에 있어서는 입장을 조정해야 하는 문제가 분명히 생기는 겁니다. 다만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쟁점과 모순, 갈등의 요인을 덮는 식으로 갈 순 없기 때문에 대통령께서, 또 현 정부가 용감하게 문제들을 다 드러냈으면 좋겠습니다. 레토릭이나 선언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논리적 설득이든 현실적 어려움에 대한 호소든 공개적으로 문제를 드러내놓고 토론하고 선택했으면 합니다. 저는 우리 국민들이 이제 대화와 토론, 설득을 통해 충분히 소통하고 사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논쟁을 풍부하게 할 시민사회의 역량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고 보고요. 현상적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고 상호 깊이있고 풍부한 논쟁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장윤선 한국갤럽 조사를 살펴보면 역대 대통령의 임기 초 지지율이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높습니다. 첫 직무수행 평가에서 YS, DJ가 71%, 노무현 60%, 이명박 52%, 박근혜 42%였어요. 문재인 대통령은 6월 첫째주의 첫 평가에서 84%로 나왔고 최근 조사인 8월 첫째주에 77%입니다. 이런 높은 지지율은 시민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부는 절대 망하면 안 돼’ ‘내가 참여해서 만든 촛불정부이기 때문에 실패하면 안 돼’ 하는 거죠. 초반 100일간의 플랜이 후보 시절부터 미리 세워져 있었잖아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국정교과서 폐지, 인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 석탄화력발전소 가동 중단, 세월호참사로 사망한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 그동안 국민들이 박근혜정부를 보면서 답답해하던 문제들을 ‘사이다’ 식으로 바로 해결해준 거예요. 그러다가 인사 문제에 봉착하면서 지지율이 조금 빠지긴 했습니다. 대외 문제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보이고요. 국내 정치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서 잘하고 있지만 외교안보 문제에서 논란이 세게 터지고, 대처를 잘 못한다 싶으면 지지율이 하락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남북관계, 4강과의 외교가 중요할 거예요.
이철희 강변호사님이 우려의 말씀을 하셨는데, 시민사회에서 이슈를 드러내놓고 제기하는 것과 정부가 그중에서 어떤 것을 취사선택하고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느냐는 좀 다른 선상에 있는 것 같습니다. 현 정부가 탄핵이라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서 국민의 열망을 등에 업고 집권했지만 그럼에도 개혁은 민주적인 방식의 정치과정, 특히 입법과 선거를 거쳐가면서 풀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진 정부라도 입법에 실패하거나 선거에서 지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데, 아시다시피 입법에는 의석 분포에 기초한 각 당의 이해관계가 작동하고 선거에는 감성적인 요인들이 끼어들면서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잖아요. 노무현정부 때 보궐선거, 지방선거에서 참혹할 정도로 깨졌거든요. 지금 여소야대인데다 ‘옳은 일’을 하는 과정상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점 때문에 선거에서 지는 모습을 많이 본 터라 겁이 나서 이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옳은 일을 하는 것과 입법 성공·선거 승리는 함께 고민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개혁의 지속이 불가능해요. 당시에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면 노무현정부 5년이 그렇게 매도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봐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정부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시민사회 내에 여러 큰 열망이 있더라도 잘 설득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김연철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건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세계화의 물결로 국내적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되다보니까 정치에 대한 요구가 높습니다.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고 변화에 대한 열망이 높지요. 좀 왜곡된 형태지만 트럼프 현상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겠고요. 프랑스에선 ‘마크롱 사태’(웃음)도 일어났습니다. 기존 정치를 부정하는 대중의 열망을 업고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마크롱 정부가 그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지지율이 거품처럼 빠졌어요. 물론 오랫동안 누적된 양극화와 불평등을 한번에 해결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정부가 당장 할 수 있는 일과 장기적으로 개혁해야 할 과제를 구분하고, 지금 당장 어렵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를 제시하고, 동의를 구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크롱과 같은 사태를 겪지 않을 겁니다.
장윤선 문재인정부가 역대 정부보다 특히 노력해야 할 부분은 직접민주주의 또는 참여민주주의 요소를 더 많이 반영하는 갈등관리인 것 같아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리는 영역에서, 가령 신고리 5·6호기 전면폐쇄를 결정하기 전에 공론조사를 하기로 한 것처럼 더 많은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시민 스스로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가는 가운데 결정된 의견에 수긍하고 합의할 수 있도록 갈등관리를 잘했으면 좋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명박근혜’식 불통을 할 리는 없겠지만 혹여 그런 현상이 여타 부처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예전과 다르게 언론보다 SNS가 훨씬 빠르게 돌아가기 때문에 국민들이 하루에도 수많은 이슈에 대해 직접 확인하고 있거든요. 소통과 그것을 통한 문제 해결이 쉽진 않겠지만 가급적 그런 방향을 잘 취해나간다면 문재인정부가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질 거라고 봅니다.
북핵, 사드, 미국, 중국…… 위기의 한반도
김연철 이제 좀더 구체적인 문제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당장 위기를 겪고 있는 외교안보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볼까 하는데요. 문재인정부가 확실히 어려운 상황을 물려받았습니다. 김정은체제는 확실한 핵 억지력을 갖겠다는 목표가 분명합니다.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이 분명하지 않은데, 우리 정부도 대북정책에서 혼선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저는 먼저 문재인정부가 단독으로 풀기 어려운 악조건의 현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부정적 유산도 심각한데요, 이른바 ‘남북관계 제로’ 시대입니다. 접촉과 협력의 기반이 완전히 무너지고 아무런 신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국내 여론도 대북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보수화되어 있어요. 그러니 문재인정부가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대적 과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부가 내세우는 평화로운 한반도라는 목표와 현실 사이에 틈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론에 단기적으로 매이지 말고 긴 안목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당장 사드부터 큰 쟁점이 되고 있는데 정권 초기에 불거진 이 사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앞으로 북핵 문제, 한미관계, 한중관계 등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강문대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사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공격받기도 했지만 지지층에서는 대체로 양해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지지율 1위 후보가 안보와 관련한 첨예한 문제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띠는 것을 이해해준 거죠. 실제로 문대통령이 취임한 후에는 정확한 보고를 하지 않은 국방부를 질책하고 환경영향평가 실시 등 적법절차를 강조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현 정부가 일단 시간을 확보해놓은 상태에서 남북관계를 진전시킨다거나 중국과 미국을 설득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사드 문제를 안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북한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이후에 정부가 사드를 임시라지만 추가로 배치하는 방침을 발표했어요. 저간에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드와 북한 ICBM이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면, 이러한 조치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정부는 그 전날까지도 환경영향평가를 먼저 실시하겠다고 했거든요. 일단 적법절차의 면에서라도 지금처럼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이에 우리 민변도 그 점을 지적하면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장윤선 저는 문재인정부가 사드 딜레마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후보 시절에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했어요. 다음 정부에 넘겨라. 그게 무슨 의미냐고 기자들이 묻고 따지고 했지만 결국 명확한 답변을 안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한미정상회담 이후에 사드 배치 기정사실화로 가버렸어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한미동맹 차원의 약속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했고, 강경화 외교부장관도 동맹과의 결정을 번복할 의도가 없다고 했죠. 이명박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도 그렇지만 사드도 동맹국가로서 미국의 손을 들어준 거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당연히 중국이 반발하고 있죠. 물론 탄핵으로 갑자기 들어선 정부라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한중관계에 대한 기본 구상을 가지고 사드 문제에 접근했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싶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7월 초에 이른바 신베를린 구상으로 남북관계에 대해 큰 비전을 놓고 구체적으로 얘기했잖아요. 상호적대행위 금지하고 이산가족 상봉하고 성묘까지 하자고요. 온갖 패키지를 내놓고 원샷으로 딜을 성사시키면 사드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던 거죠. 외교적 자산을 총동원해서 남북관계를 복원해야 사드 문제도 해결하고 한중관계도 풀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이철희 제가 정치체제이자 사회경제적 체제로서의 민주공화정을 얘기했는데, 안보체제로서도 민주공화정이 필요합니다. 모름지기 대통령이 안보 이슈에 대해서도 국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하면서 소통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사드와 관련해서는, 꼭 여당 국회의원이라서가 아니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있다보니까 대통령의 고민이 이해가 갑니다. 외교의 특성상 공개적으로 다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현실적으로 있어요. 대통령이 신베를린 구상을 가지고 뭔가 해보려고 했는데 당장 파트너 중의 하나인 북한이 도와주기는커녕 미사일을, 그것도 미국을 겨냥해서 쏘니까 제안한 쪽이 머쓱해져버린 상황이에요. 그 사거리가 미국에 도달할 정도니까 미국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합니다. 아직 핵을 탑재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패권국가인 미국 입장에서 ICBM에 노출됐다는 것은 엄청난 데미지거든요. 일부에선 미국이 북한의 도발에 대해 과잉대응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저도 일정 부분 동의하기도 합니다만 ICBM이 미국을 심리적으로 자극하는 정도에 비춰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우리 대통령이나 안보팀이 미국과 빈틈없이 소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트럼프와 통화도 안 하고 휴가 갔다고 비판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중국과도 우리가 소통 채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다툼입니다. 절충이 쉽게 안 돼요. 시 진핑과 트럼프가 만나서 의외의 밀월이 이루어졌을 때는 미국도 사드에 대해서 잠시 압박을 안 했는데 다시 밀월이 깨졌잖아요. 그러다보니 미국 강경파는 사드 배치를 계속 압박하고 중국은 중국대로 자기들 길을 가니까 우리는 운신의 폭이 크게 줄었습니다. 미중에 비해 약소국인 우리로서는 미국을 달래면서 갈 수밖에 없어요. 거창하게 말하면 한미동맹이라는 틀을 계속 유지하면서 가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대통령이 사드 임시 배치를 선택했다고 하면 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후보 시절 발언과 상충하는 면이 있는 건 사실이죠. 그것이 꼭 부족한 준비기간이나 안보팀의 미비에서 빚어진 거라고 해석하기보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변화들에 의해서 강제된 면이 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 덧붙이고 싶은 얘기는 사드만 보지 말자는 겁니다. 안보전략 전체를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인데 사드만 도드라지게 논의하면 정부의 운신의 폭이 더 좁아질 겁니다. 사드 또한 전체적인 전략의 한 부분으로 볼 때 여유롭게 대응하면서, 심지어 이거 도로 가져가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해요. 전반적인 안보전략을 잘 짜야 하는 우선적인 과제가 정부에는 있는 거고, 문재인 대통령이 거기에 대해서 리더십을 잘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들을 고려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장윤선 정부가 남북관계를 잘 풀어서 동북아 정세를 일괄 타결하는 방향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북한의 협조가 따라오리라고 너무 낙관했던 건 아닌지. 당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대통령께서 너무 구체적으로 제안을 했다가 북한이 안 받아들이면 그때는 어쩌나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정부가 처음부터 너무 많은 걸 구체적으로 내놓았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철희 연말까지는 북이 쉽게 응대하지 않을 거라고 봐요. 정부도 북이 한번에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이후를 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금 던질 필요가 있었고, 그런 포석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김연철 신베를린 구상은 비록 상황이 불안정하지만 길게 보고 입구를 마련할 필요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드 문제에 대해서는 의원님 말씀에 일부 동의해요. 상황논리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박근혜정부에서 한중관계가 최악이었던 것은 단순히 사드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신뢰의 붕괴도 작용했습니다. 문재인정부는 가능하면 중국에 상황을 설명하고 양국 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사드 문제를 단순히 무기체계가 아니라 동북아 지역질서의 결정적 변형으로 보기 때문에 한국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결국 이 사안은 북핵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갈 것인가, 그 해결 과정에서 한중・한미・미중 등 여러 관계들이 어떻게 상충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 그리고 동북아의 장기적인 질서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등이 집약적으로 담긴 문제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매우 어렵고 민감성이 큰 사안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철희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박근혜정부 때 사드와 관련해서 진도가 너무 많이 나갔습니다. 특정 날짜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금년 상반기까지 6기를 다 배치한다는 합의가 있었어요. 이건 국가적 합의이기 때문에 지난 정부 일이니까 우린 모르겠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았던 현실이 분명히 있었다는 거죠. 문재인 대통령이 그동안 취해온 태도를 보면 국민을 기만하려 한다거나 사드 찬성론자로 표변한 건 아니잖아요. 길게 볼 필요가 있어요. 너무 찬반논쟁으로 단순화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강문대 지금껏 다들 신뢰하고 기다렸는데 이번처럼 갑자기 입장을 바꾸면, 사드가 꼭 성주 주민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주민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신뢰와 기대가 큰 만큼 반대로 실망과 낙담도 커집니다. 안보 상황과 관련된 모든 걸 밝힐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국민들이 믿고 기다릴 수 있는 사정은 설명하면서 조금 더 진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연철 정부가 한미 간에 어떤 논의 과정이 있는지를 소상하게 밝히기 어려운 측면이 있겠지요. 외교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공개하기는 어렵다는 점도 압니다. 악조건을 물려받았고 현재의 상황에서 운신의 폭이 좁다는 점도 이해하고요. 그러나 이 선택이 한반도와 동북아 질서에 미치는 영향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한미동맹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우리의 국익과 상충할 때는 분명하게 ‘No’라고 말해야 합니다. 좀 어렵더라도 우리 입장을 밝히고 설득하고 이해를 구해야겠죠. 외교무대에서 좀 당당해졌으면 좋겠다, 우리의 운명은 이제 우리가 결정하자,라는 것이 촛불시민의 요구이기도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정부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정치권에서 해야 할 역할도 있고 시민사회에서도 지혜를 모아야겠습니다. 벌써 실망한 분들도 계신데 너무 그러진 마시고요.(웃음)
장윤선 특사 파견 얘기도 나오던데, 눈에 보이는 가시적 조치가 나올 수 있도록 남북대화에 힘을 쏟아야 할 것 같아요.
김연철 예, 특사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메신저보다 메시지가 더 중요합니다. 편지가 있어야 우편배달부가 전달을 하지요. 대북정책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북한과 미국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임에서 장단을 맞출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북핵 문제의 해법을 제시해야 합니다. 과거의 실패한 전략을 되풀이할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특사가 아니라, 특사가 가져갈 협상안부터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도전에 직면한 탈핵, 그리고 공론화의 실험
김연철 그런가 하면 국내적으로도 쟁점이 되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근의 대표적인 이슈로 에너지 정책을 꼽을 수 있습니다. 새 정부가 내세운 탈핵이라는 게 단순한 에너지 정책이 아니라 미래 비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광범위한 기득권과의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크죠. 일반 국민들이 사안을 이해하는 정도에도 부족함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현실을 종합적으로 보면, 반대여론을 극복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대안을 어떻게 마련하고 어떻게 집행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장윤선 탈핵은 대체에너지와 함께 정부의 철학이 담긴 환경정책 노선인데, 일자리, 예산, 기타 이해관계 조율 등 조정이 쉽지 않은 문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통령이 후보 시절보다 한발 물러서서 공론조사 방식을 던진 거죠.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위’가 출범해서 조만간 2만명 정도를 1차 여론조사하는 등 공론에 부친다는 건데,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갈릴 때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예민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지난 8월 1일부터 3일까지 전국의 성인 1004명을 상대로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여부를 물은 결과(표본오차는 신뢰수준 95%에 ±3.1%포인트), 남성의 50%가 계속 건설, 38%가 중단 의견인 반면, 여성은 29%가 계속 건설, 46%가 중단을 원했습니다. 연령대별로 보면 50대 이상은 ‘계속 건설’, 40대 이하는 ‘중단’ 의견이 과반을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50대와 60대 이상에서는 계속 건설 의견이 각각 50%, 59%였지만, 그 아래 연령대에서는 중단 의견이 각각 61%(30대), 58%(20대), 53%(40대)로 높게 나왔습니다. 만약 미래지향적으로 이 노선이 맞는다고 생각하면 정부가 밀어붙이는 힘도 필요하다고 보는데, 반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이때야말로 갈등관리 능력이 중요해질 겁니다.
강문대 현재 공론화위원회가 대상으로 하는 건 신고리 5·6호기 아닙니까. 이건 정부가 큰 틀에서 탈원전 방침을 원칙적으로 정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탈원전 방침도 국민의 뜻을 물어서 정해야 하겠지만 그건 장기적으로 서서히 진행될 과제이겠지요. 신고리 5·6호기는 이미 진행 중인 공사를 중지시킬지 말지를 정하는 문제이므로 더욱더 국민의 뜻을 세심히 확인해야 할 겁니다.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이해관계자도 많을 텐데, 이들의 이야기도 경청해야겠고요. 이 문제를 지혜롭게 큰 분쟁 없이 해결할 수 있어야 장기적인 방향에서 탈원전 방침을 수립하는 데 장애가 없을 겁니다.
김연철 그런데 탈핵을 완성하려면 최소 수십년이 걸립니다. 중장기적인 국가전략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회적 합의가 중요합니다. 사회적 합의를 이뤄나가는 과정은 결국 정치권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이철희 독일도 탈원전 기조를 최종 결정하기까지 정치적 프로세스를 거쳤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정부가 탈원전의 큰 그림과 스케줄을 그려가면서 국민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과정 없이 신고리 5·6호기 가동여부만으로 포커스를 좁혀놓은 게 아쉬운 대목 중 하나예요. 공론화위원회에서 많은 토론을 하고 정부가 입장을 내놓겠지만, 국회에서도 논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공론조사를 하더라도 결론을 내지 말고,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하게 된다면 그때 이 문제를 함께 국민투표에 부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숙의민주주의로서, 사회 각 부문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충분한 논의를 거친 뒤 국민이 투표를 해서 방향을 정하는 게 좋다고 봐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우리 삶의 민주주의로 확장해나가느냐도 중요합니다. 시민들의 참여 자체도 그렇거니와, 어떤 문제를 자기 삶의 것으로 고민하고 풀어내도록 하는 게 공론화의 진짜 의미잖아요. 그게 성공하면 원전을 움켜쥐고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이른바 원전 마피아를 충분히 고립시키고 해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한, 이건 제 욕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시민들이 정책적 어젠다를 가지고 민주적 방식으로 의사결정구조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정치질서를 재편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포커스를 여기에 두면 좋겠어요. 탈원전을 할 거냐 말 거냐, 전기요금이 오르냐 내리냐 같은 것만으로 구도가 짜이면 꼭 이쪽이 이긴다는 보장이 없죠. 예를 들어 처리비용까지 따지면 원전이 싼 게 아니라고 하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운 얘기일 수 있거든요. 어떤 결론을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 부합하는 정보만 보이잖아요. 요컨대, 탈원전 문제는 단순히 찬반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를 바꾸는 재구성의 계기로 삼는 전략으로 가야 합니다.
김연철 현대 민주주의의 숙제 중 하나가 대표의 위기로 보입니다. 간접민주주의의 한계를 시민참여로 보완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 민주주의가 아직은 이해관계의 조정이나 갈등의 합리적 해결 경험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요. 일단은 정부가 잘해나가야겠습니다. 원전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데서도 비슷하게 얘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최근 정부가 발표한 부동산 대책 같은 것만 봐도 정부 입장에서는 현실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해서 지금 할 수 있는 조치라고 발표했지만 국민들 수준에서는 미흡하다, 좀더 근본적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평가가 있죠. 국민들의 기대와 정부가 제시하는 대책 사이에 격차가 있는 건데, 주요 민생 현안으로 들어가면 그 격차를 좁히는 문제가 더욱 중요합니다. 최저임금 인상, 재정확충을 통한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여러 이슈가 제기된 상황입니다.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정부의 민생고 해결 의지는 확실한가
장윤선 최저임금부터 얘기해보면, 보수야당이 ‘영세 자영업자들의 문제는 어떻게 할 건데?’ 식으로 정부를 흔드는 등 반발은 있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진정 국면에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7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최저임금 1만원은 단순히 시급액수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 권리를 상징한다’고 했던 말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내년도 최저임금을 16.4%나 인상(6470원→7530원)한 이유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을 보장하겠다는 거죠. 그만큼 자영업자들이 못 가져갈 거라는 우려들이 있지만, 최소한 지금 컵밥으로 끼니 때우고 편의점을 전전하는 청년들이 식당 가서 6000원짜리 김치찌개를 사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민생구조를 바꾸겠다는 점에서 보면 문재인정부가 민생 문제와 관련해서는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자리 추경도 국회에서 진통이 있긴 했지만 결국 합의됐죠. 지금 사람들이 가장 고통받는 부분이 노동-일자리, 양극화 문제입니다. 국정기획자문위의 ‘광화문1번가’가 50일간 시민들로부터 정책제안을 받아보니 총 15만건 가운데 국민 제안의 가장 주요한 키워드가 일자리, 고용, 청년, 여성 등이었다고 해요. 그밖에 사회적 약자의 복지 개선안,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의 의견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민생에서 핵심적인 이슈가 노동이니, 이 가운데 가령 비정규직 문제를 빠른 속도로 해결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시대만 열린다 하더라도 문재인정부 5년 동안 상당히 잘했다는 평가를 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문대 영세-중소사업자들이나 일부 중견기업에 최저임금 인상에 따르는 어려움이 있고, 그래서 정책을 구성할 때 그 부분을 고려해야 하는 건 맞습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그간 노동 문제에 있어서 기업친화적으로 곧 노동희생적으로 접근했던 관행을 문재인정부가 일단 과감하게 진로변경한 데 대해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평평한 틀 위에서 경기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정부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아직 더 확인해봐야 할 점이 있고, 정부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영역이 제한적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할 거예요. 공공부문은 정규직화가 가능하더라도 민간 부문은 정규직화를 강제할 방법이 적절치 않습니다. 법률을 개정하면 가능하겠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고, 개정한다고 해도 기업의 여건과 형편, 곧 지불능력을 도외시한 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노동보호적 개혁을 하려면 더 강한 의지와 더 정치한 정책수단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정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득권을 잃거나 손해 보는 사람들이 나올 텐데, 이들을 개혁 저항세력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하거나 적대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을 설득할 논리, 보완책 등을 강구해야 하고, 최소한 이들의 반발을 누를 도덕적・정책적 명분이라도 분명히 수립해놓아야 할 겁니다.
이철희 저도 친기업에서 친노동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평소 그런 주장을 해오기도 했고요. 그런데 선의를 가지고 풀더라도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 시절에 비정규직보호법을 시행했습니다. 당시에는 이게 비정규직을 위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장에서 결과는 엉뚱하게 나타났거든요.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최저임금제도 잘못하면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가야 하는 길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그 실행방안과 전략에 대한 고민들은 아직 숙성이 덜 된 것 같아요. 3조원 정도의 재정을 투입하겠다는 건데 그걸로는 답이 안 나온다고 봅니다. 최저임금이 크게 오르면 산업계나 시장에는 변혁적 효과를 부르는 거잖아요. 이걸 어떻게 감당할지 정부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력도 안 되는데 밀어붙이면 엉뚱한 데미지를 줄 수 있어요.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지금 기업들이 해외로 나갈 궁리를 하고 있다고도 하잖아요. 이게 엄살에 그치지 않고 만일 정말로 그런 흐름이 뚜렷하게 형성된다면 일자리가 더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지겠죠. 제 얘기는 그러니까 두려움을 갖고 접으라는 게 아니라 이런 현상을 막을 방법이 무엇일지 여러 대책을 잘 강구해서 추진해야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는데 아직 그런 준비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는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치밀하고 용의주도하게 준비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 해도 5년 내내 달라붙어도 풀지 못할 수도 있는 큰 어젠다인데, 조금 성급했던 게 사실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변화를 요구하는 열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에 더 기다려달라고 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있고요. 아무튼 이건 우리가 충분하게 준비하고 덤벼들어야 되는 문제예요. 현재의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화만이 해법이냐, 아니면 또다른 답을 찾을 여지가 있느냐는 질문까지 포함해서요.
개인적으로 핵심은 노동의 힘을 키워주는 것이고 그 중심은 노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로즈벨트의 뉴딜개혁이 성공한 핵심 비결입니다. 노조조직률을 지금보다 획기적으로 늘려줄 제도적 장치나 유인책을 만들 필요가 있어요. 그 힘을 바탕으로 노동자가 자기 목소리를 찾아내도록 해야지, 힘이 없는 상황에서 여러가지를 준다 한들 경제가 조금만 어려워지면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추경도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게 국민적 합의였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안의 내용 하나하나를 살피면 미흡한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은 시급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충분히 수긍합니다만 앞으로의 기획들에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깊고 넓게 고민하고 치밀하게 추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효과가 날지도 몰라요.
강문대 노동 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개혁을 함에 있어 상호이해가 많이 충돌하게 될 텐데, 이제는 문제의 해결점을 하한의 기준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찾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쪽 사람, ‘성 밖’ 사람들의 희생과 인고를 토대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얘긴데요. 노동의 문제는 바로 노동자의 문제, 곧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노동 문제는 경제 영역의 변방 문제쯤으로 취급돼왔는데, 그러다보니 노동자, 곧 사람은 실종되고 숫자와 도표만 남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실제 고통을 겪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문제의 해결점을 찾기가 어렵죠. 이제는 그런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하한선을 정하고 그 선은 최대한 보장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급여조건과 근로조건의 하방 안전선을 확고히 설정하는 가운데 그것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상층에서 조정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나오겠지요. 그게 이전보다 더 큰 반발을 부르고 단기적으로 혼란을 야기한다고 해도 이제는 그렇게 해야만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사회는 증세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김연철 최저임금과 일자리, 공공부문, 비정규직, 이 문제들을 모두 제대로 해결하는 것은 전반적인 산업구조나 우리 사회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큰 과제와도 연결될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거기까지 얘기하긴 어렵겠고, 다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증세 문제를 그와 관련한 하나의 실마리로 삼아 논의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정부가 증세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가능하면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겠다는 건데요. 일단 드는 의문점은 그 정도 가지고 되겠나 하는 겁니다. 한편으로 이해는 하면서도 더 과감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요구들이 있습니다.
장윤선 바른정당 이혜훈 대표가 ‘세금 문제를 공감대 없이 힘으로 밀어붙인 정권이 성공한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는데요, 저는 문재인정부의 증세 정책 방향은 정확하게 ‘부자 증세’라고 생각해요. 부자 증세에 찬성한다는 여론이 80%까지 나왔습니다. 지금 소득세와 법인세 개편을 추진하고 있는데 법인세를 22%에서 25%로 올리는 거야 이명박정부 때 깎아주었던 부분을 노무현정부 수준으로 원상회복하는 정도죠. 물론 삼성이 5500억을 더 내게 됐네, 현대차가 3422억원 더 내게 됐네 하지만 그런 기업은 소수 재벌 대기업이에요. 소득세도 연소득 3억에서 5억 사이의 소득구간을 하나 신설해서 슈퍼리치 9만명에 대해 증세한다는 건데, 물론 이 9만명은 속이 쓰리겠지만, 더 많이 벌면 당연히 세금 더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면에서 이 노선은 틀리지 않았고, 반발도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부동산 정책과 관련해서도 다주택자에게 양도세를 세게 부과한다고 하는데 저는 여기에 덧붙여서 보유세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국토부는 보유세가 투기지역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모든 주택 보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금방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유보적인 입장을 내비쳤지만 실제로 집 많이 가진 사람들은 양도소득세야 안 팔고 안 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보유세를 강화해서 더이상 ‘집 사재기’ 못하게, 집을 투자라는 미명하에 투기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철희 정권보고 죽으라는 얘기네요.(웃음)
장윤선 이런 거 하라고 촛불정부 세운 거 아니에요?(웃음)
이철희 저도 증세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 문제도 준비 없이 덤비지는 말자는 겁니다. 돈 많은 사람들에게 세금 더 걷는 문제는 우리가 사회적 합의로서 당사자도 수용하는 가운데 그렇게 하자는 거지, 징벌세는 아니잖아요. 사적인 모임에서도 ‘네가 우리보다 많이 버니까 밥값 더 내’ 이러면 기분 나쁠 수 있거든요. 부당한 부는 사정(査正)을 통해 엄정하게 단죄하되 정당하게 축적된 부라면 존중해주는 게 맞죠. 핵심은 증세가 왜 필요한지를 사람들에게 충분히 설득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정치 효능감(efficacy)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납세에도 일종의 효능감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세금이 복지로 돌아오는 게 체감되어야 세금 올린다 했을 때 충분히 동의가 되면서 조세저항이 적을 거예요. 그런데 과연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납세 효능감을 키워주었나요? 학자들은 복지를 위해서 이만큼 돈이 필요하니 과감해져야 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정부의 입장은 좀더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중하게 가는 걸 탓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아까 개혁이 선거라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증세도 마찬가지예요. 담뱃값 올렸던 사람들이 다시 내리자고 하는 거 보세요. 한심하다며 웃어넘기거나 비아냥대고 끝낼 일만은 아닙니다. 진보정권이 이삼십년 가야 복지국가 제대로 만들 수 있는데 선거 의식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장윤선 지금 반대 여론이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이철희 노무현정부에서 종합부동산세 도입했을 때 실제로는 납세 대상이 얼마 안 됐어요. 그럼에도 세금폭탄 담론에 깨졌던 이유는 꼭 홍보를 잘 못해서가 아니라 종부세 이전에 과세표준을 현실화하면서 상당수 사람들이 자기 세금이 늘어났다고 생각해서거든요. 지금도 얼마든지 그럴 여지가 있기 때문에 면밀하게 준비해야지, 일종의 증세 강박증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일단 물꼬를 텄으니 그렇게 가면서 복지를 잘 체감할 수 있게 만들어준 다음에 ‘이제 세금을 더 내면 좋겠습니다’ 하면 국민들이 동의할 거라고 봐요. 다만 그 기간을 너무 길게 잡아서는 안 됩니다. 최대한 당겨서 해야죠.
강문대 제가 일선 정치에 있지 않아서 잘 모르는 면도 있겠지만 지금도 국민들 설득하면 될 거라고 보거든요. 플랜을 가지고 효능감 체득시킨 다음에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렇게 해도 반발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의 부자증세보다 증세 대상이 많아지고 사회적 발언권이 센 중산층도 그 대상이 되는 수준에 이르면 그 전에 어떤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반발은 나올 거라는 거죠. 그러나 이들의 반발은 언론을 통해 과대 증폭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들이 언론사의 주된 독자라는 점, 기자들이 이들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한다는 점, 또한 이들이 SNS에서도 주축이라는 점 등으로 인해 실제보다 더 크게 부각될 수 있어요. 이러한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겠지만, 국민 전체의 이해가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일거에 증세를 다할 수 없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합의를 거치고 준비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죠. 다만 지금의 부자증세가 그런 과정의 첫 단추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가 나중 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지 않은 채 일단 현재 방침만 발표했는데, 조만간 장기적인 계획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김연철 단순히 세금을 늘린다는 차원을 넘어서 조세정의를 어떻게 바로 세울 거냐는 문제도 있습니다. 집행 과정에서 다수의 지지 동력을 유지하려면 소통과 이해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고요.
이철희 그래서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는 게 리더십이거든요. 능숙하게 국면을 풀어내면 돌파를 잘할 수 있지만 기계적으로 대응하면 벽에 부딪힐 겁니다.
장윤선 저는 증세든 조세정의든 분명한 자기 지지기반이 어디인가 보고 움직이면 된다고 봐요. 문재인정부의 지지기반이 슈퍼리치라면 부자증세 해선 안 되겠죠. 다수 대중, 중산층과 서민들이 지지기반이라면 이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증세를 해야 되는 거고요. 세금 걷어서 4대강 파고 자원외교 하면 국민들이 동의하지 않죠. 그러나 세금으로 공공보육시설 확충하고 공공성을 살리는 정책 펼치는 데 쓴다면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내가 세금을 낸 만큼 보상받는 제도적 혜택이 있다면 증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철희 그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서구 복지국가도 정치적 타협을 통해서 이루어졌잖아요. 군사작전이나 다수파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듯이 만든 게 아니고요. 그리고 그런 나라들은 대부분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죠. 복지국가는 정치기획, 정치의 산물입니다. 이 명제를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권했으니까 여기까지 밀고, 어느 때인가 저들이 집권하면 그걸 다시 되돌리고… 이러면서 복지국가 이룩한 데는 없어요. 지속 가능성을 고려해 요만큼 가더라도 합의를 이뤄내면서 갔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개헌만큼, 아니 개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선거제도를 바꾸는 것이라고 봅니다. 국민주권의 헌법, 그 헌법을 헌법답게 하려면 다수대표제에서 비례대표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지금 같은 승자독식의 선거제도하에선 선거에서 지면 단지 권력만 빼앗기는 게 아니라 전체 정책의 흐름까지 되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잘 고민해서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천천히 하는 전략이 중요하고, 그게 결국 리더십의 문제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장윤선 동의합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대로 최대한 갈등관리를 잘하면서 국민적 총의를 모아나가는 과정의 민주주의, 집단지성의 힘, 이런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100일 이후의 정치
김연철 결국 개혁과제를 집행하려면 민주적인 방식으로, 법률이 정한 데 따라 진행해야 합니다. 당연히 모든 요구와 기대가 정치권, 국회로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서는 또 여당의 임무, 야당의 역할이 각각 있겠지요. 그런데 정치권이 잘해야 한다고 관성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정치권이 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시민사회의 역할도 분명 필요합니다. 언론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현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가운데 정부나 국회에서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강문대 국회선진화법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이게 사실 내가 반대하는 정당이 과반 이상일 때에는 나한테 안전판으로 다가오고, 반대로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과반을 차지했을 때는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게 만드는 답답한 제도로 느껴집니다. 이철희 의원님 말씀처럼 지금 천천히 가더라도 이 틀 내에서도 무언가 하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될 듯 안 될 듯 하면서 결국 추경안 합의도 했지 않습니까. 물론 예산하고 법은 달라서 법을 바꾸는 일은 더 어려운 면이 있겠지만, 꼭 정당의 의석 분포가 국민의 의사를 그대로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잖아요. 탄핵도 의석 구조상으로 불가능했는데 이뤄내지 않았습니까. 국민들의 직접민주주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그게 국회에 직접적인 압박으로 작용하면, 현재 상태에서도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여론을 반영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꾼 건 되돌리기 힘들 거고요. 지금은 답답한 느낌도 듭니다만, 그래도 가능한 한 개혁을 최대한 이뤄내야겠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국민들이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가지고 국회를 계속 감시, 압박하는 활동이라고 봅니다. 시민사회도 더 활성화돼서 중간에서 매개 역할을 해야 할 겁니다.
장윤선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왜 이렇게 높은가 했을 때 국회에 견제세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제1야당의 대표로서 초강수를 두고 있지만 번번이 헛발질을 하고 있는 셈이잖아요. 지금은 민주당이 50% 이상의 굉장한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고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도 78%가 넘지만, 내년에 지방선거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중간평가가 될 텐데 그때까지 원전 정책, 조세 정책, 부동산 정책 등 평가받을 이슈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이 이슈들에 대해서 올 하반기까지 어떤 평가가 나오느냐에 따라서 더불어민주당의 지방선거 성적표가 달라질 거라고 봐요. 정부가 아무리 좋은 정책방향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것을 국회 안에서 입법으로 현실화하려면 더불어민주당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체력적으로 튼튼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탄핵정국에서 추미애 대표가 단독으로 박근혜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으로 문제를 돌파하겠다고 했을 때 민주당 의원들이 총회를 열어서 그 방향은 안 된다고 궤도 수정을 한 사례를 보면서 집단지성의 힘이 발현되는 정당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뢰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의외의 변수들에 부딪힐 때 무엇으로 돌파할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철희 저는 다당 구도를 잘 유지·활용해야 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선거제도는 양당제를 강제하는 효과가 있어요. 지금 4.5당 체제죠. 원내 정당이 5개지만 정의당이 교섭단체를 이루지 못해 5당 체제보다는 4.5정당체제라고 부르는 게 합당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지금의 구도는 탄핵의 효과로 만들어진 거거든요. 탄핵 국면에서 바른정당이 생겼잖아요. 이 다당 구도에서 활로를 찾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설적으로 박근혜정부가 비공식적 권력을 통해 패악을 부리기는 했지만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예컨대 자신들이 하고 싶던 방향의 노동법 개정에 실패했거든요. 과반의석을 넘겼음에도요. 우리도 그걸 반면교사로 삼아야 됩니다. 정치는 성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옳은 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성과가 안 만들어지기 때문에, 4.5당체제 속에서 필요하면 정책연대・입법연대도 하고, 지방선거 이후에는 연정까지 고민해볼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에서 탄핵안 가결시킬 때 76% 정도 되었는데, 지난 대선 때도 자유한국당 빼면 나머지 정당 득표율이 그 정도 돼요. 이 76%가량의 ‘탄핵연대’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어느 시점까지 끌고 갈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문재인정부 출범할 때는 공고한 연대 틀을 안 만들기로 했지만 지방선거 이후에는 열어놓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야 원하는 개혁조치를 할 수 있다고, 아니 개혁의 강도는 원하는 만큼에 못 미치더라도 지속 가능한 개혁을 위해서는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지방선거 전에는 뭘 할 거냐?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서 해야죠. 근본적으로 사회를 재편하는 입법들은 어려울 거라고 봅니다. 저쪽에서 안 해줄 거예요. 촛불민심을 반영한다면 당분간은 적폐 청산에 비중을 더 두어야 하는 면도 있고요. 적폐청산이라는 현재를 바로잡는 어젠다와 새로운 대한민국이라는 미래를 열어가는 어젠다를 어떻게 버무려서 균형을 잡아야 할지 고민은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의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20석, 어떻게 보면 절대여소잖아요. 의회가 지금처럼 생산성이 떨어지더라도 양해가 될 수 있는 마지노선이 지방선거 때까지라고 봐요. 저희도 그때까지는 국민들에게 시간을 달라고 할 수 있고 국민들도 양해할 수 있지만 지방선거 이후로, 총선 때까지도 그러고 있으면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연철 정당은 여론에 민감합니다. 다만 정치권이 사건을 쫓아다니지 말고, 시대의 과제를 하나씩 해결해가면서, 그 결과로 지속 가능한 지지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문재인정부 100일을 맞이해서 문재인 대통령한테 한마디만 한다면?(웃음)
장윤선 초심을 잃지 마시라고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2016년 가을부터 겨울, 그리고 2017년 봄, 1700만 시민들과 함께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그 마음으로 5년을 지내신다면, 함께 광장을 지켰던 국민들이 정부를 신뢰하고, 혹여 잘못 가더라도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까요? 퇴근길 남대문시장 포장마차에서 시민들과 소주 한잔 나누는 소탈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시장에서 대통령과 마주칠 날을 기다려봅니다.(웃음)
강문대 모호성을 떨쳐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대화를 통한 소통이 더 원활해졌으면 해요. 문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사심 없이 열린 자세와 합리적인 태도로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신뢰를 얻은 대통령은 거의 없어요. 시간이 지나도 국민들이 지금 가지는 신뢰가 금이 가지 않도록 계속 그런 자세와 태도를 견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철희 영어에 허니문(honeymoon)이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빗대서 표현하면 우리는 지금 허니문이 아니라 ‘허니 문’(honey Moon), 사랑스런 문재인 대통령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랑받는 대통령이더라도 불편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편치 않은 사람들까지 더 많이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셨으면 합니다. 이 자리에서 하나의 제안을 드리자면 문재인대통령이 유인태 전 의원 같은 경험 많고 사심 없는 시니어를 대통령 특보로 임명해 수시로 조언 듣고, 외부의 다양한 의견들이 전달되는 통로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얘기 했다고 유인태 전 의원에게 혼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연철 저는 ‘넓고 길게 보시기를’입니다. 특히나 외교안보는 짧게 보면 비관적인데 길게 보면 낙관적으로 만들 수 있어요. 문재인정부가 촛불시민의 열망을 기억하고, 책임감과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를 기대합니다. 시대적 과제들 하나하나가 쉽지 않지만, 소통하고 협의하고 공감대를 넓히면서 앞으로 전진해야겠지요. 폭염의 한가운데에서도 긴 시간 대화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7.8.4.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