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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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吳銀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wimwenders@naver.com

 

 

 

란드

 

 

나는 란드에서 태어났다 부동산에서, 재화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중개로, 써비스로

 

핀란드에서 나는

이가 나면서부터 자일리톨이 잔뜩 들어간 껌을 씹었다 단물 빠진 껌을 앞니 뒤에 숨기면서부터 비밀을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해맑게 웃으며 거짓말하는 법을 배웠다 양들처럼 두가지 일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침묵하기, 동시에 무럭무럭 자라나기

폴란드에서 나는

글을 깨치면서부터 시를 읽었다 시엔키에비치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심보르스카는 언제나 너무 멀리 있었다 호기심은 낯설고 결핍은 낯익었다 낯 뜨거운 일들은 밤에 벌어진다는 걸 알았다 낮은 이미 충분히 뜨거웠으므로

네덜란드에서 나는

대마초를 피울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노천까페에서는 렘브란트와 반 고흐의 엽서를 싸게 팔았다 대통령같이 아무 데도 없는 것들과 축구공같이 어디에나 있는 것들에 시종 둘러싸여 있었다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겨울이 꼭 친구 같았다 반쪽 같았다

그린란드에서 나는

순간을 얼리는 법을 터득했다 별을 헤고 있으면 살이 에이는 것 같았다 새우잡이를 해야 겨우 세우(細雨) 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지구가 온난해지자 젖은 옷은 마르고 지하에 있던 자원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발견의 순간에는 주인공이 “이누크!”*라고 외쳤다 성엣장이 떠내려가듯 유유히 발음하는 게 중요했다 란드에 남은 마지막 에스키모와 키스를 한 순간, 나는 주인공이 되었다 어른 이누크가 되었다

아이슬란드에서 나는

외로움을 다스리는 훈련을 했다 당시에 나를 포함해서 한국인은 총 아홉명이었다 까만 눈과 까만 머리카락은 가장 독특한 액세서리였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초리가 어음장처럼 날아왔다 나는 빚을 갚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숫자를 셌다 숫자는 두자리가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홀수여서 나는 덜 외로웠다 더 이로웠다

 

나는 란드에서 태어나 란드에서 자라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란드, 돈이 되는 란드

여기는 땅이다, 네가 와서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해맑게 웃으며 거짓말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아무리 참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 온화하고 냉혹한 땅,

 

란드

 

 

--

*그린란드어로 ‘인간’을 뜻하는 말.

 

 

 

분더캄머**

 

 

과거는 왜 항상 부끄러운가?

미래는 왜 항상 불투명한가?

 

방문을 열면

얼굴이 화끈

배 속이 발끈

 

허기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너를, 너희들을 소환한다 오늘

 

누구나 소유할 수 있지만,

아무나 소유하지는 않는

 

새로운 친구가 왔단다

 

너희들은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

지분을 배정받은 공유자처럼

묵묵하고 꿋꿋하다

우정 따위의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너희들이 더 많아질수록

너희들이 더 다양해질수록

나는 더 작아지고 적어진다

 

재능이 넘치면 노력이 부족해

시작이 창대하면 끝이 미약해

 

어떤 경지에 오르려다

어떤 지경에 이를 수도 있지

 

현재는 왜 항상 불완전한가?

 

배 속을 다 채우면

나는 예정대로 구역질을 한다

신물나는 완벽함을 향해

 

빛나가면서 빗나갈 때

뒤쳐지면서 뒤처질 때

 

놀랍게도

 

나는 방 안에서 놀라워진다

내 방을 누가 들여다볼까봐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진다

 

눈을 감아도 네가 보인다

너희들이 빤히 보인다

 

아, 대체 나는 어디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내 앞에 도래하는

백지상태의 내일 앞에서,

새로운 친구같이 어색하기만 한 나는

 

 

--

**독일어로 ‘놀라운 것들의 방’이라는 뜻.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사람들은 자기 방에 물건을 수집했는데, 이러한 방은 분더캄머(Wunderkammer)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