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작가조명
다시 시작하는 끝
하성란 河成蘭
소설가. 소설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 『웨하스』 『여름의 맛』, 장편소설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 『A』 등이 있음. rifleha@gmail.com
조갑상 曺甲相
1949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끝』 『길에서 형님을 잃다』 『테하차피의 달』 『병산읍지 편찬약사』, 장편소설 『누구나 평행선 너머의 사랑을 꿈꾼다』 『밤의 눈』 등이 있다.
1
추위가 풀리면서 저녁 무렵부터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그날은 좀 늦게 집을 나서게 되어 버스가 제 노선이 아닌 시청역 방향으로 우회해 승객들을 모두 내려놓았을 때 이미 날이 어둑했다. 아현동 가구거리 쪽으로 올라와 종근당 아케이드 쪽으로 길을 건넜다. 교통 통제로 텅 빈 왕복 팔차선 도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녹십자병원과 강북삼성병원의 불빛이 보였다. 서대문우체국 사거리를 지나 막 문화일보 앞을 지날 때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두 남자를 보았다. 어두웠지만 그 시간에도 벗지 않은 선글라스와 배낭에 꽂은 태극기로 그들이 ‘태극기집회’에 참석했다 일찍 빠져나온 이들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등 뒤에서 목덜미를 낚아채인 듯 상체가 몹시 부자연스러웠는데 가까이 와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커다란 배낭을 멘 위로 비닐 우비를 걸친 탓이었다. 배낭의 한쪽 어깨끈 뒤로 끼운 태극기봉이 우비를 뚫고 솟구쳤는데 빗물이 스며든 태극기가 그들이 쓴 각진 모자 위로 처지고 있었다.
쿵쿵 울리던 노랫소리는 새문안교회 앞을 지나칠 무렵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커졌다. 음반에 의무적으로 건전가요 한곡을 끼워 넣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날 광화문 일대를 들썩이던 노래는 그때 나온 건전가요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광화문사거리로 다가갈수록 태극기를 든 이들이 많아졌다. 사거리를 중심으로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나뉘기 시작하면서 혹시나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차단하느라 차벽이 겹겹이 둘러쳐졌다. 촛불집회 현장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집회 장소에서 이탈했으면서도 삼삼오오 서 있던 이들이 종북 빨갱이 척결이라고 구호를 외쳤다. 태극기집회에 나오는 이들이 선동세력에 동원되거나 단순히 ‘목욕비’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으로 동참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
바로 내 앞에 태극기를 배낭에 꽂은 이가 걷고 있었다. ‘이봐요, 그쪽이 가야 할 곳은 이쪽이 아닌 거 같은데.’ 속으로 중얼거리다 다시 보니 태극기 봉에 세월호 리본이 묶여 있었다. 그제야 탄핵 반대세력에 의해 의미가 변질된 태극기를 되찾아오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두쪽의 태극기를 분별하기 위해 세월호 리본을 달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빗줄기가 굵어진데다 이리저리 흔들어대느라 리본이 떨어진 태극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다. 어느 쪽 태극기인지 분간이 가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촛불집회는 이미 축제가 되어 코스프레에 가까운 차림으로 나오는 이들도 많았는데, 조금 옷차림이 요상하다 싶으면 다시 돌아보았다. 태극기집회의 참가자들은 혼자 잘 움직이지 않고 이른 밤이면 귀가하는 노인들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편에 생긴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집회가 끝나고 도보행진이 시작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효자동삼거리 쪽으로 삼삼오오 모여 행진했다. 그곳에서 집회 참가자들의 개인발언이 이어졌다. 곧이어 삼거리 입구 쪽에서부터 희망을 담은 커다란 풍선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머리 위로 옮겨지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곁을 지나친 태극기를 든 남자 때문에 정작 내 머리 위로 지나갈 때는 손도 대지 못했다. 결국 그날 집회는 딴 데 정신을 팔다 끝이 나고 말았다.
해프닝과도 같은 그날 밤의 일을 이렇듯 풀어놓는 것은, 잊고 있던 그날 밤이 기억난 게 조갑상 작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6월 말부터 작가조명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작가의 신작 원고부터 읽기 시작했다. 『병산읍지 편찬약사』는 장편 『밤의 눈』(산지니 2012) 이후 5년 만에 출간된 책이다. 7월이 되고 출간에 맞춰 서울로 올라온 조갑상 작가를 만나 점심식사를 하고 두어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은 건 작가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뒤 편집자 L에게 송고하는 일뿐이었다.
작가를 만나고 돌아온 저녁에 녹음파일을 열었다. 까페에서 틀어둔 음악과 다른 테이블의 의자 끄는 소리 사이로 부산 사투리 억양이 섞인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는 오랜만에 나온 책을 앞에 두고 자신의 과작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부산 동구의 수정동에서 대학과 군 생활을 제외하고 27년 가까이 살았다, 초등학교 때 몸이 아파 한 학년 꿇게 되었는데,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간 동네는 너무도 조용해서, 월사금 이야기를 쓴 원고지 30장짜리 소설이 『학원』지에 실린 건 중학교 2학년, 그때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 같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원고를 완성하는 일이 넘지 못할 벽처럼 다가왔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책을 다시 읽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병산읍지 편찬약사』에 실린 여덟편의 소설을 읽고, 장편소설 『밤의 눈』을 다시 읽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처음 다룬 단편 「사라진 하늘」이 실린 첫 창작집 『다시 시작하는 끝』(세계일보사 1990, 개정판 산지니 2015)을 부랴부랴 구입해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올 여름을 조갑상 작가의 소설들과 보냈다.
만남의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작가와 만난 그날 저녁, 그의 조촐한 출간기념 자리가 있었지만 선약이 있어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했다. 한참 뒤 그 자리에 있었던 편집자 K로부터 “조갑상 선생님, 딱 부산 남자시던데요!”라는 말을 듣고 귀가 번쩍했다. 뭔가 ‘재미난 말씀’이라도 했던 것일까? 잠시 뒤 그녀가 토를 달았다. “말씀이 적으시고 부산 남자 특유의 툭툭함이 묻어나더라고요.”
녹음된 부분을 다시 들으니 한참 후배에게도 깍듯한 존댓말을 쓰던 작가가 툭 지금과는 다른 말투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묻는 장면이 있었다. “서울에 남았시몬 잡지사에 갔을라나?”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어야 했다는 후회, 그날 저녁 자리에 참석해 좀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다는 후회, 지금이라도 당장 부산으로 내려가 선생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적어도 작가를 조명한다는 글을 쓰면서 어떻게 『밤의 눈』의 옥구열이 걸어간 부산 시내를 걸어보지 않을 수 있나, 그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기 위해 멈춰 섰던 침례교회 앞에 서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들로 복잡했다.
며칠 뒤 어떤 기척에 잠에서 깨고 잠을 깨운 것이 다름 아닌 매미울음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 소리에 집중하는 동안 11세기 일본의 궁녀 세이 쇼오나곤(淸少納言)이 쓴 산문집 『마쿠라노소시』(지만지 2012)가 떠올랐다. 그녀는 ‘운치 있는 벌레’라는 제목의 글에서 여러 벌레에 대해 써놓았는데 그중 도롱이 벌레는 아버지가 “곧 가을바람이 불면 데리러 올 테니 기다려라”(75면)라고 말한 뒤 도망간 것도 모르고 바람 소리가 들리면 “아빠, 아빠” 하고 청승맞게 우는 벌레라 했다. 잠시 울음을 멈췄던 매미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했고 1950년 여름 그날도 이렇게 매미들이 울었겠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매미울음 소리만큼이나 가냘픈 목소리로 “아부지, 아부지” 울어대던 여섯살짜리 남자아이가 떠올랐다. 바로 「물구나무서는 아이」의 김영호씨다.
그러니까 그렇게 떠오른 김영호씨의 마지막 모습, 지인에게 우연히 목격된 희망버스 반대 집회에 참석한 김영호씨의 모습에서 태극기집회에 모인 이들의 모습이 겹쳤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날 밤이 끌려 올라왔을 것이다.
그날 밤, 태극기란 태극기를 볼 때마다 진짜와 가짜를 가리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내 모습을 떠올리는 일은 끔찍하다. 기다 아니다,로 나눌 수 없는 것들이 많고 바로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좌우됐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편 가르기를 하고 있었다. 광화문에서 TV에서 태극기 부대를 볼 때면 눈살부터 찌푸려졌다. ‘부대’라고 일컬어지듯 그 조직에서 개개인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 속에 또다른 김영호씨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진해서 광장으로 나와 구호를 외쳐대던 이들은 김영호씨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어째서 “반공, 반공, 또 반공”을 외치게 되었는지를 살피기 위해 그들 한명 한명의 서사에 집중하는 일은 역사의 것이라기보다는 소설의 몫이라 할 수 있을 테다. 이를테면, 그들이 가진 믿음의 형성과정을 명백히 틀렸다고 단정 짓거나 잘잘못을 가려내기 위해 그 믿음 자체를 추적하는 게 아닌, 돌이킬 수 없는 삶을 대신 돌아봄으로써 마치 풀리지 않는 매듭을 품은 채 살아야만 했던 한 사람의 내력을 상재하는 역할 말이다. 소설은 그를 통해 막힌 마음을 물구나무 자세로 풀어보려는 어떤 이들이 지금 세상의 구석진 자리로 내몰린 이유가 비단 그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양경언, 『병산읍지 편찬약사』 해설, 209면)
‘국민보도연맹’으로 아버지를 여읜 김영호는 어느날 담임으로부터 “빨갱이 새끼”로 낙인이 찍히면서 담임의 무조건적인 반공교육에 세뇌되고 만다. 반공은 곧 생존의 다른 이름이었다. 급기야는 자신이 일했던 공장의 사장을 간첩으로 몰아세우는 일까지 하게 된다. 공산주의와 종북 문제로 사소하게 시작된 다툼이 그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중차대한 일이었고 결국 그의 일생은 “빨갱이 하면 치를 떨더니 결국 그거 시비하다 갔네”(「물구나무서는 아이」 33면)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되고 만다.
그러니까 이번 여름 조갑상 작가의 책과 씨름한 보답 중 하나는 내 민낯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었다.
2
하늘에 걸린 둥실한 달이 너무나 청명하게 내리비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쳐다보기 겁이 날 정도로 달빛이 밝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일어나더라도 무서울 일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 아래서 일어나고 있었다. 생사를 가르는 엄청난 일이 대낮같이 훤한 달빛 아래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달은 공포 그 자체였다. (…) “내가 당신들 안 죽이면 당신들이 언제 나를 죽일지 모르잖아.”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바람처럼 귀를 스쳤다. 그 소리가 숨 막히는 정적을 뚫고 벼락처럼 한용범의 귀를 울렸다. 죽이는 기다. 똑같은 소리가 이번에는 환청처럼 귀를 울렸다. 그와 동시에 수런거림이 일었다. 몇 사람이 소리치며 몸을 일으키고, 같이 묶인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땅! 하는 소리가 울렸다. 한용범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달을 보았다. 밤의 눈. 허벅지인지 옆구리인지가 뜨끔하다 싶더니 앞사람들이 벼 가마니 쓰러지듯 풀썩 몸을 덮었다. 그는 달이 공포가 아니라 밤의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고 있음을 의식을 놓기 직전에야 알았다. (『밤의 눈』 148~49면)
『밤의 눈』의 무대는 이미 한차례 학살이 벌어진 ‘대진’이라는 곳이다. 민간인을 향한 총질이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된 이들은 두번째 학살부터 총살을 당할 이들에게 자신들이 죽어 파묻힐 구덩이를 파게 하는 만행까지 저지른다. 아무런 죄가 없는 이들을 향해 총질을 해대고 달은 밤의 눈[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만 지켜볼 뿐이다. 총소리와 비명, 고함으로 아비규환 같았을 이 장면이 이상하게도 매번 읽을 때마다 마치 음소거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 공포스럽고 압도적이다.
작가에게는 종종 ‘보도연맹사건을 천착한 과작의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보도연맹 사건은 우리 역사에서 국가 공권력이 저지른 가장 잔혹한 만행이었다.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와 어떻게 마주할 용기가 생기게 된 것일까.
“분단을 환기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나에게는 ‘보련’(국가보도연맹)이 그것이었어요.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6・25때 피해를 겪지 않은 집은 없었지요. 제사 때 같은 날이면 어른들이 쉬쉬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는데, 제사도 못 지내는 사람 이야기나 그때 똑똑한 사람 다 죽었다 같은 이야기였지요.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였는데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신문과 잡지를 보고 알게 된 거죠. 어릴 적 반 친구 중에도 유복자들이 있었는데, 그때 그 일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어린 시절 들었던 단편적이고 막연하던 이야기가 구체적인 사건이자 분단시대의 비극으로 나에게 다가온 겁니다.”
「사라진 하늘」(『다시 시작하는 끝』)이 ‘보련’과 학살에 주목하고 있다면 『밤의 눈』은 ‘보련’ 사건은 물론이고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학살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이후의 삶’에 집중한다.
소설은 유신헌법 투표가 있던 1972년에서 시작해 학살이 자행된 1950년을 거쳐 4·19혁명의 1960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에서 이후 7년여의 시간,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된 1972년으로 되돌아온다. 마지막 장은 부마항쟁이 있던 1979년 10월 16일 혹은 17일로 추측된다.
시작인 1972년은 한용범의 시각으로, 마지막의 1972년은 옥구열의 시각으로 펼쳐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해설을 쓴 평론가 구모룡은 『밤의 눈』을 “살아남은 이들의 슬픈 이야기”라고 했다. 가족과 친지의 학살로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비극은 그다음 세대로 대물림된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한용범과 아버지를 잃은 옥구열에게 살아 있는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었다. 자신의 대에서 끝날 줄 알았던 비극은 어린 자식들에게까지 빨갱이 꼬리표가 따라붙으면서 대물림된다.
1972년,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다는 것을 주요골자로 한 유신헌법안이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되어 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국회의원 수의 3분의 1인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구성원은 대통령이 추천할 수 있었다. 말이 선거지 종신 집권을 위한 포석이었다.
그 투표장에서 한용범은 오직 왼쪽이다,라는 말만 되뇐다. 생각은 필요없다. 왼쪽 칸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 왼쪽은 찬성이고 여당 지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정보부 형사의 눈이 어디든 따라다닌다. 타의에 의한 행동이지만, 군사정권의 국민임을 억지로 보여주는 모습에서 「물구나무서는 아이」의 김영호씨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도 싶다.
4・19혁명과 함께 유족회가 형성되고 시신 발굴 작업 등이 이루어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정부에 의해 이들의 행위는 ‘반국가행위’로 규정되고 유신체제 내내 한용범과 옥구열은 구금과 고문, 감시의 대상이 된다. 10년 전 피붙이들이 전쟁의 희생양이었다면 이제는 그 가족들이 쿠데타 성공을 위한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그들을 향해 “넌 우리의 영원한 표적이야! 인수인계된 표적이란 말다”(326면)라고 이기죽거리는 사복경찰은 ‘보련’ 사건 당시 민간인을 향해 총을 겨누면서 “내가 당신들을 죽이지 않으면 언제 당신들이 날 죽일지 모르잖아”라고 말하는 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
구모룡은 “『밤의 눈』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투쟁에 그치지 않는다. 또한 자유의 공간에서 부여된 증언의 영역을 서술하는 데 의도를 한정하지 않는다. 이보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우리를 끊임없이 회수하는 국민-국가는 어떠한 체제인가? 개인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국민은 정당한가? 아니면 국민을 그만두는 방법은 어디에 있는가? 등등의 물음을 던지게 한다”(『밤의 눈』 해설, 395면)라고 평했다.
단편 「사라진 하늘」이 장편 『표적』이 되었다. 신문연재를 다 마쳤지만 『표적』은 아쉽게도 책으로 발간되지 못했다. “『표적』을 완성하고 많은 고민이 있었어요. 역사적 사실과 사건에만 너무 몰입한 나머지 소설적 형상화가 충분히 되지 못했다고 판단했지요. 작품에 대한 불만과 스스로에 대한 미진함에 제대로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고 여러 시도 끝에 『밤의 눈』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 작가를 ‘과작의 작가’라고 칭할 때 그것은 책을 내는 속도와는 별개로 한 작품에 작가가 들인 공에 대한 수식일 때가 많다. 어떤 글은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는 글들도 있지 않은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작가는 고개부터 흔들었다.
3
작가가 단편 「혼자 웃기」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건 1980년이었다. “딱딱하던 시절이었어요.” 첫 소설집을 발간하는 1990년까지의 그 10년은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1980년 광주항쟁으로 시작해 1987년 6월항쟁, 그리고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이어진다. 그동안 자기검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데도 원고를 더 수정하자는 출판사의 연락을 받던 때이기도 했다.
그 10년 동안 작가는 활발하게 작품들을 내놓았다. 첫 창작집 『다시 시작하는 끝』에 실린 중단편의 편수는 무려 열일곱편. 지금 같아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분량의 창작집이다. 작가는 10년 동안 발표했던 서른편 가까운 소설들 중에서 열일곱편의 소설을 추렸다.
첫 소설집의 출간과 함께 90년대가 시작되었다. 90년대는 80년대와는 너무도 딴판인 분위기였다. 문학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90학번이었던 나는 그 시절을 잘 기억하고 있다. 온통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신세대 작가’로 불리는 작가들이 그때 등장했다.
조갑상 작가가 「사라진 하늘」에서 ‘보련’ 이야기를 다룬 것은 1989년, 등단 9년 만이었다. 그제야 작가는 자신이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그 이야기를 반길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혼성모방이랄까…… 나는 그 변화를 잘 따라가지 못했어요. 직장생활 때문에 충분히 시간을 못 만든 탓도 있었겠지요. 아니, 작품에 달려들어 부딪치는 힘이 직장을 핑계 대며 약화된 것일지도……” 말끝이 흐려졌다.
창작자라면 한번쯤 그런 시간을 통과할 것이다. 혹시 그 시절 본격적인 답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시작하는 끝』은 절판되었다가 2015년에 재출간되었다. 책의 해설을 맡은 전성욱 평론가는 “조갑상의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여러 기둥들 중에서도, 이야기의 장소가 가장 실한 버팀목”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작가는 오랫동안 부산의 소설 지지학에 천착했다. 편저와 연구서를 출간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소설 속의 부산 곳곳을 직접 답사하고 그 감상과 함께 작품들의 결을 따라 읽은 『이야기를 걷다』로 보람을 얻었다. 흘러간 시간이 소멸시키고 변질시켜놓은 것들, 그 쇠락하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정조가 그의 지지학적 탐색의 근본을 이룬다. 그 장소 사랑의 애틋함은 등단작 「혼자 웃기」에서 이미 오롯하다”(420~21면)고 밝히고 있다.
「혼자 웃기」를 비롯한 「방화」(재출간하면서 작가는 「옛 동산에 올라」를 빼고 「방화」를 넣었다. “첫 소설집을 낼 때 「방화」를 실을지 말지 고민했습니다. 「방화」에는 그 어느 소설보다 그 시절을 답답해하고 벗어나려던 제 모습이 많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지요.”) 「은경동 86번지」는 이른바 ‘은경동 3부작’으로 불린다. 은경동은 바로 작가가 오래 거주했던 수정동이다.
“1950년대 중반 마산에서 부산 수정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70년대 후반까지 약 25년을 수정동의 한집에서 살았지요. 나의 유년과 청소년 시절의 모든 시간이 멈추어 있는 장소입니다. 돌이켜볼 때 그곳은 한번씩 골목길처럼 답답하고 막힌 듯한 느낌을 줬어요. 하지만 다른 한편 성장의 원초적 숨결이 있는 곳이기도 했죠. 한동네에서 자랐기에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익숙하고 친밀했어요. 산업화와 도시화가 시작되는 시기였기에 시골의 친지들이 우리 집을 많이 거쳐갔어요. 수정동 집이 그분들에게 도시살이의 정거장 같은 역할을 했달까요? 동네의 기억, 친척어른들의 이야기. 이런 것들이 나의 소설적 자원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한번씩 수정동을 지나칠 일이 있으면 도중에 차에서 내려 그 동네를 걸어봐요.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옛날 골목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있고요. 예전에 살던 집은 슬래브 2층집으로 바뀌었는데 집은 달라졌어도 그 터는 여전하니까요. 거기 골목에서 나의 과거를 보는 듯해서 마음 한켠이 찡할 때도 있지요.”
중편 「은경동 86번지」는 고향을 떠난 뒤 오랜만에 은경동을 찾은 형사 문영호의 시선으로 쇠락한 골목골목을 훑는다. 동네는 자신이 떠난 때와 비교해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에게 은경동은 “어린 시절의 자취나 땟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데서 오는 푸근함이나 안도감”(334면)과 함께 자신이 살던 곳이 “이토록 게딱지같이 더러운 동네였을까 하는 수치스런 당혹감”(335면)이 뒤엉킨 곳이다. 한편 그곳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우물은 사라지고 없다. 단순한 시설물 이상으로 그는 상실감을 느낀다. 그가 살던 집도 세탁소가 되었다. 세탁소 가게는 부엌과 공부방이 있던 자리로 동향인 본채와 달리 햇살이 비쳐 드는 남향이었다. 순간 떠오르는 건 자위를 하던 기억이다. 십수년 만에 찾은 추억의 자리에서 기껏 떠올리는 것이 자위라는 부끄러운 추억이라니. 대문을 열고 본채가 있는 마당으로 들어가 그가 한 일은 대문 옆의 변소에서 오래 오줌을 눈 것이었다.
작가의 장소 사랑은 『밤의 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1979년 부마항쟁의 신호탄이 쏴올려지고 대학생들이 부산 시내로 우르르 몰려나온다. 부산데파트 앞에서 시작된 옥구열의 여정은 부산 시내를 지나 부산역까지 이어지는데, 작가는 당시의 부산 시내를 촘촘하게 복원해낸다. 건물과 도로들, 학생들이 몰려오는 모습이 눈앞에서 보듯 살아나고 그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시민들의 웃음과 박수 소리가 생생해진다.
이 부분은 『밤의 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인데, 이 글 서두의 ‘그날 밤’은 바로 이 장면을 오마주한 것이다. 옥구열이 걸어간 거리를 떠올리면서 그날 밤 내가 걸어간 거리를 그려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두번의 발품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두 눈으로 보았다고 확신하고 있던 ‘녹십자병원’이 진작에 문을 닫아 그날 그곳에는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날 내가 보았다고 생각했던 녹색의 십자가는 무엇일까?
작가는 수없이 그 거리를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답사가 끝난 뒤에는 또다시 소설 속 옥구열이 되어 걸었을 것이다. 우연히도 1979년의 시위 장면이 2017년 집회와 들어맞았다. 그때와 달리 2017년은 평화시위였다. 그때로부터 39년이 흘렀다. 그사이 너무 많은 죽음들이 있었다.
「혼자 웃기」의 문식이 무장탈영해 인질극을 벌이게 된 것도, 「은경동 86번지」의 원태가 강도짓을 벌인 것도 모두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는 오래도록 함께해야 할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소멸되어야 할 고통스런 대상이다. (…) 남루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우리들의 과거, 그 근대화의 역사가 곧 아버지다. 아버지는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벽이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죄의식이다. 그들은 가난했고 그 가난을 견디기 어려워 방황하거나 방탕하였다. (…) 근대화란 개발이면서 파괴였다. 개발과 파괴의 각축 사이에서, 지속되어야 할 것은 파괴되고 소멸되어야 할 것은 지속되었다. 아버지는 지속과 소멸이었고 무엇보다 바로 그 근대화였다. 그렇게 아비의 연대기는 우리들의 장구한 역사와 하나로 포개진다.(전성욱, 『다시 시작하는 끝』 해설, 422면)
결국 문 형사에게 붙잡힌 원태의, 당신도 이 동네에 살아서 동네 아버지들이 얼마만큼 잘못 살아왔는지를 알 거 아니냐!는 절규는 그래서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 아버지는) 최내과 말대로 이 동네 술쟁이 중에 아직도 산 사람이 있느냐는, 그 한 사람이란 말이요. 그냥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이 고집처럼 들었어요. 우리 동네 아버지들의 마지막 표본으로 버티게 하고 싶었단 말이요. 불쌍하다는 말은 할 수조차 없어요. 나나 문식이나 또는 내 형이나, 아버지들이 살아온 삶을 털털 털고 일어설 아들이 우리 동네에서 몇이나 되겠어요. 그랬더라면 아버지들의 죽음은 용서될 수 있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은경동 86번지」 389면)
그러고 보니 작가는 한 신문에 「바다가 보이는 골목길」이라는 제목의 산문을 쓴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시간이 참으로 느리게 흘렀다.
바다로 가기 위해 건너던 철도 건널목을 한정없이 가로막고 서 있던 꼬리 긴 화물열차처럼. 아니면 끊어질 듯 이어져 어디로든 통하던 그 나른하던 골목길처럼 시간은 지루하게만 흘러 어서 어른이 되고만 싶었다. 동네 형들처럼 원양어선을 타고 나가거나 직업군인이 되어도 좋았고, 중장비 기술을 배워도 좋았다. 지겨운 아버지들을 벗어나 새로운 땅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고단한 노동을 막소주 한잔으로 달래면서 시골 인심을 마지막으로 간직했던 아버지들은 떠나고 자식들은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간에 허둥대다 이제 그 아버지들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 단순하고 거칠었던 아버지들과는 달리 세련되고 싹싹하게, 그러면서 이해타산에 밝은 옹졸한 중산층이 되었을까. 설령 그렇게들 되었다 해도 우리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제 가슴마다의 우물 하나씩을 잃어버린 세대로서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부산일보』 2007.7.26)
그렇게 아들은 아버지가 되었다. 가난한 삶을 술로 탕진하고 방황하던 아버지들을 보고 뛰어넘으려 했던 아들은 중산층의 삶을 지키기에 급급한 아버지가 되었다. 어느날 아버지는 기록사진전에 들러 집회나 대규모 행사, 경기장 등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사진을 보게 되면서 그 속에 내 얼굴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단체나 집단으로 움직여야 할 때마다 늘 외면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진 속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저마다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저마다의 절실함이 무엇이든 그런 절실함이 그 시간 그 장소에 모이게 한 것”(「봄, 그리고 여름까지」 108면)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자식들의 결혼식 단체사진이 스치고 그제야 얼마 전 셋째의 결혼식 이후에 생긴 불안감에 대한 원인을 짐작하게 된다. 셋째의 결혼식 전날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이 있던 날로 그 불안감은 그날 광장에 모인 “개인의 절실함을 군중의 그것으로 이어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진단이거나 추궁이었을지 모른다”(같은 면)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목구멍 너머」의 아버지, 김정태는 또 어떠한가. 일류대학을 나온 아들은 행정고시에 수차례 떨어지고 7급 공무원 시험으로 옮겨 도전했지만 그마저도 몇년째 계속 실패하고 있다. 자립심이 없어진 아들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아들을 통해 자신의 로망을 이루려는 아내도 포기할 수 없다. 그런 아내에게 세차장이라는 해결책을 내놓지만 아내는 이혼을 입에 올리면서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봄, 그리고 여름까지」의 아버지가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 모인 군중의 절실함을 떠올리고 이제 곧 그 열기가 사라질 거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그게 왜 끝나. 그게 끝이 있는 일이겠어?”라고 말할 때, 목구멍 너머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협심증의 한 증상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거라고 느낀 「목구멍 너머」의 김정태가 드디어 괴물을 기른 거라고, 아들뿐 아니라 아내와 자신 또한 괴물들이라고 고백하게 될 때, 아버지들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서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는 기회 앞에 서게 된다.
4
『병산읍지 편찬약사』의 표제작인 「병산읍지 편찬약사」는 작가가 천착해온 ‘보련’이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현실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다. 이미 작가는 『밤의 눈』의 한용범과 옥구열을 통해 시대에 따라 그들이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국민-비국민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비극을 보여주었다. 그런 작가에게 지난 정부가 밀어붙인 국정교과서 사업은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었다. “보도연맹 사건이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을 ‘좌빨 글을 싣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이들에 의해 원고 수정이 요구됩니다. 이규찬 교수는 원고를 놓고 이렇게 저렇게 줄여보려 하죠. 그러다 지워서는 안 될 것에까지 연필을 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그는 연필을 던지고 일어서면서 ‘이런, 제기랄!’이라고 외치게 되는 거죠.”
이런 일은 사람을 나누고 꼬리표를 붙이는 데 유용하게 작용할 것 같다,라고 윤종열의 촉이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그는 ‘보련’ 이야기를 창고 속에 묻지 왜 꺼내느냐는 이들 편에 선다. 결국 ‘해방정국과 6・25전쟁’의 원고 수정은 편찬위 쪽의 윤종열이 맡게 되고 읍지는 보도연맹에 관련된 내용이 단 한줄만 실린 채로 발간된다.
지난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후」의 박영감은 어떤가. 장인의 파묘를 앞둔 어느 날 “나 왔네”라는 장인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고 그가 마주한 거울 속으로 “흐릿한 얼굴 형체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그 바람에 미끄러지면서 몸을 다치고 만다. 젊은 순경 시절, 그는 ‘보련’으로 갇혀 있는 장인을 불러내 집으로 돌려보내지만, 장인은 혹시 사위에게 피해가 갈까봐 다시 돌아와 죽음을 맞는다. 자신의 손으로 장인을 죽이는 일까지야 하지 않지만 철저한 상명하복의 세계에서 그 또한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민간인들을 향해 총을 쏜다.
그날 그를 찾아온 건 그들이었을 것이다. 시신을 수습해 묘를 쓸 수 있었던 장인과 달리 너무도 많은 이들이 그대로 묻혔다. 그가 눈으로 다른 산등성이들을 찾은 건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증산이 장인만이 묻힌 땅은 아니었다. 산소조차 쓰지 못한 죽음들도 새겨야 했다.”(29면)
여름 내내 조갑상 작가의 소설, 그리고 그 인물들과 지냈다. 증산과 병산, 대진 등은 지도에 나와 있지 않지만, 굳이 현 지명을 밝히지 않아도 될 만큼 이 땅에는 그런 일들이 많았다. 나는 아직도 한장의 사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젊은 아기엄마가 포대기로 아이를 둘러업고 나와 길가에 줄줄이 누워 있는 시신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들여다보며 남편을 찾고 있다. 아기엄마는 수많은 시신을 지나왔고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신을 확인해야 할지 모른다. 그녀가 신은 새하얀 버선은 그녀의 발아래 줄지어 누워 있는 시신들의 검게 때 오르고 해진 양말과 대조적이다. 작가는 그렇게 죽어간 무명의 인물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그 시절을 다시 살게 했다. 그것이 바로 작가만의 애도 방법이다.
앞으로 매미울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부지’를 불러대던 어린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같이 떠오를 것이다. 보름달은 이제 모든 것을 목도하고 놀라서 커다래진 눈이다.
옥구열이 침례교회 앞에 멈춰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한 말이 떠오른다. “회한의 눈물이어서는 안 된다, 미래를 위한 눈물이어야 한다.” 회한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했을 때, 끝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와의 만남에 꼭 제목을 붙여야 한다면, 작가의 첫 소설집 표제작이기도 한 ‘다시 시작하는 끝’이 가장 어울릴 거라고 생각한다.
5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지.”
“그래 좋지.”
“내가 하는 이야기가 다 진짜는 아니지.”
“그럼.”
“그렇다고 다 거짓말도 아니지.”
“그럼.”
어느 무슬림 이야기꾼과 청중들의 대화라고 밝힌 이 짧은 글은 『밤의 눈』의 인트로 부분이다. 이 글에 이제야 눈길이 간 건 충격적이고도 압도적인 이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용된 짧은 글로 작가가 오랫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소설을 가르쳐왔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소설창작에 관한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고, 곧 뒤에 이어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대해 운을 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다름 아닌 청중의 태도다. 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려 적극적이다. 이런 청중 앞에서라면 어느 이야기꾼이라도 자신이 숨겨둔 비장의 무기를 꺼내게 되지 않을까.
작가를 만나 맨처음 물었던 질문은 『병산읍지 편찬약사』의 ‘작가의 말’에서 가져왔다. “선생님은 지난여름부터 올 5월까지의 변화를 대변혁이라고 말하고 선생님의 글쓰기가 그 변화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고민하겠다고 하셨는데요, 다음 작품은 구상 중이신가요?”
작가는 말을 아꼈다.
나는 과작의 작가가 한 걸음 한 걸음 제 길을 걸어 곧 청중을 찾아올 것을 믿고 있다. 그가 찾아와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라고 말할 때, 청중인 나는 무한한 신뢰를 담아 큰 소리로 대답할 것이다.
“그럼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