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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묵시록과 계급

백민석의 ‘폭민’과 최진영의 여자들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최근 평론으로 「리얼리티 재장전: 다른 민중, 새로운 현실 그리고 ‘한국문학’」 「단지 조금 다르게: 김현의 근작들과 시대전환」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1. 불가능한 변화?

 

의문의 바이러스나 재난이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뒤 문명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처절한 생존투쟁을 그린 이야기들은 도처에 차고 넘친다. 까뮈(A. Camus)의 『페스트』(1947)로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소설과 영화로 세계적 이목을 끌었던 주제 싸라마구(Jose Saramago)의 『눈먼 자들의 도시』(1995)나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로드』(2006)를 위시해 국내에서도 편혜영의 『재와 빨강』(2010)이나 정유정의 『28(2013) 같은 장편소설들, 여러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만들어져 화제가 된 바 있다.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묵시록 서사들의 온상이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자본주의의 세계재패를 뜻하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globalization)에 있다는 사실은 새삼 지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묵시록 서사는 거의 언제나 ‘세계감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경쟁체제의 심화나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 인적·물적 자원의 이동 확대에 따라 주기적으로 발생해온 글로벌 전염병의 존재도 이러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한몫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묵시록 서사들은 그것들이 종말의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지목하곤 하는 관료제 국가기구나 자본주의체제를 극복이 불가능한 막다른 골목처럼 상상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소영현(蘇榮炫)의 정리가 간명하다. “다분히 대중문화와 하위문화적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의 종말에 대한 상상은, 변화에 대한 어떤 상상도 불가능한 폐색의 ‘현실-미래’와 거기에 갇혀 고립된 개인들에 관한 알레고리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이 소설들이 보여주는 상상력은 (…) 현실이 극단적으로 비인간화되는 현상을 포착해왔던 기존의 문명비판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상상력과 그리 다르지 않다”1는 점도 놓치지 않는다. 과연 현대 관료사회와 실존의 위기에 착목한 카프카(F. Kafka) 이래 그런 문명비판적 상상력은 얼마만큼 익숙해져버린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재난서사가 종래의 그것들과 차별화된다면 그것은 “‘일상’과 ‘정치’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공공적 공간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가”2라는 물음을 가능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에서조차 배제되는 이중/삼중의 배제”나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시스템의 배제 논리를 강화해야 하는 비극적 운명을 살게 된다는 구조적 역설을 고발”하면서3 “인류와 인간의 범주뿐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의 유용성에 대해 재점검할 시간이 도래했음”4을 환기하는 작품들이 그 물음을 얼마나 충실히 던지고 또 감당하고 있는지는 좀더 따져볼 일인 듯하다. ‘환기’와 ‘고발’ 자체가 전제하고 있는 수세적 현실인식의 한계도 한계려니와 이런 논리 아래에서는 ‘배제’의 메커니즘이나 ‘구조적 역설’의 배후일 ‘국가’와 ‘자본’이 여전히 도전받지 않는 관념으로 자연화되곤 하기 때문이다. 해당 작품들이 관찰 가능한 현실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상상력에 접속한 듯 보이지만 거기서의 자유가 실은 허가받은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에 불과한 게 아닌지 자꾸만 의심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변화에 대한 어떤 상상도 불가능”한 ‘체제’가 아니라 어쩌면 그러한 불가능성 자체의 신앙화인지 모른다.

촛불혁명과 대선기간 앞뒤로 잇달아 출간된 백민석(白閔石)의 『공포의 세기』(문학과지성사 2016)와 최진영(崔眞英)의 『해가 지는 곳으로』(민음사 2017)는 그런 의미에서 묵시록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 개성 넘치는 작품들이다. 이제 막 출간된 『해가 지는 곳으로』는 그렇다 쳐도 『공포의 세기』에 대한 주목이 충분치 않았던 것은 아쉬운 일인데, 그것이 조금 뒤늦게 도착한 묵시록인 탓도 있지만 ‘가독성’에 저항하곤 하는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재난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버린 현실이나 재난 이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종의 전사(前史)다.

 

 

2. 폭민정동 네트워크: 백민석의 『공포의 세기』

 

『공포의 세기』는 요약이 쉽지 않은 작품이다. 서사를 해체하고 있다거나 서사라고 부를 만한 것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실은 그 반대다분절된 이야기 단위들이 전체 서사의 일목요연한 파악을 어그러뜨리는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연작소설 여러편을 분해해 하나로 재조립해놓은 듯한 인상을 줄 정도인데, 부()의 구분 없이 이어지는 14개의 장은 매번 다른 초점인물을 번갈아 내세울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장 안에서 이같은 구성을 되풀이하기도 한다. 따라서 『공포의 세기』가 어떤 이야기인지 묘사하려면 번거롭더라도 중심인물인 모비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경, 심, 령, 효, 수 등)의 생애를 몫몫이 추출해 요약하는 편이 효율적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작중현실에서 서로 한번도 마주치거나 관계를 맺지 않는다. 다만 모두가 ‘불의 혀’라 불리는 일종의 ‘성령’(聖靈)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뒤 분신(焚身) 테러로 삶을 마감한다는 초자연적 말로를 공유할 뿐이다. ‘공포의 왕’을 자처하는 모비의 짧은 일대기그는 예수처럼 서른세해를 살다 간다를 중심으로 각각 요셉과 마리아에 비견되는 그의 의붓아비와 생모 그리고 그에게 희생당한 인물들의 사연을 엮어 전하되 그와 무관해 보이는 다섯 광인의 이야기를 평행선처럼 덧대어놓음으로써, 작품은 전체적인 구도보다 인물들 저마다의 상황과 개별삽화들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런데 전체적인 흐름을 떠난 내용의 세부 단위에서도 손쉬운 납득에 제동을 거는 장면들은 적지 않다. 예컨대 령은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우울증을 피해 열여섯에 가출한 뒤 이십대에 이르도록 유흥업소를 전전하며 애인인 망치와 함께 온갖 범죄를 일삼는 인물이다. 그는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불의 혀’의 계시를 받아, 색정광으로 소문난 어느 “주식투자의 귀재”를 대상으로 자살테러를 계획한다. 물론 둘은 생면부지의 관계다. “령은 사내가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갈 자세를 취하자 라이터를 당겼다. 그녀가 불의 혀로 타오르는 데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사내의 허리를 끌어안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아래로, 아래로, 그녀의 고통이 있는 곳으로. 그녀뿐만 아니라, 타락한 세상 전부가 반드시 가야 할 곳으로.”(318면) 그러나 령의 과업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령은 자신의 센스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확신이라는 병에 걸려 있었다. 불운한 그 사내는 주식투자의 귀재가 아니라 건너편 빌딩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보험설계사였고, 오피스텔도 야근한 직원들을 위해 회사에서 마련해준 기숙사였다. 게다가 그는 이미, 그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318~19면)

 

3인칭 서술자의 진술을 통해 건조하게 전달되는 이런 장면들은 실소를 유발하는 지독한 블랙유머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삶 자체에 대한 허무의식이나 모독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할 것이다. 하기는 천주교 신부를 유혹해 살해한 또다른 등장인물 수의 꿈속에선 신성모독조차 일종의 개그다. “모세는 석판 대신 자신의 머리통을 들고 있었다. 한껏 치켜든 두 팔은 화산보다 높았다. 머리통은 지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 재잘재잘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녀는 꿈의 모든 게 즐거웠다. 뚜껑이 열린 활화산과 재앙이 덮칠 이 세상과 머리가 떨어져 나간 잔소리꾼 모세.”(326면) 하지만 무엇이 되었건 이런 대목들의 의미가 어느 한쪽으로 간편히 수렴되기는 어려운데 주인공 모비가 드디어 ‘공포의 왕’으로 상징적 즉위식을 치르는, 어쩌면 두려운 위엄까지 갖추었어야 할 장면에서마저 어느 80년대 코미디 디너쇼의 단골 레퍼토리가 섞여든다. 마침 주인공이 요한계시록의 한구절을 새기고 난 바로 뒤여서 분위기는 더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다. “모비는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말이 너무 비극적이고 감동적이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옹알이처럼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오, 수지 큐. 오, 수지 큐. 그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멜로디였다.”(297면)5

이 살육과 광신, 실소와 망상의 피투성이 카니발을 관류하는 복잡한 감정선은 얼핏 무잡하게 파편화된 것처럼 보이는 작품의 외관에 대해 일종의 구성적 유비관계(analogy)를 이룬다. 따라서 막연하게 알려진 것과 달리, 그리고 백민석의 소설 대부분이 또한 그러하듯이, 이 작품은 폭력의 끔찍함과 그로 인한 공포 따위를 전시하고 감염시키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망령에 사로잡힌 존재들의 이야기인 이 소설이 ‘사개가 어긋나버린 난장판의 세상’(the time is out of joint)6을 ‘바로잡으려는’ 의미심장한 경고문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포의 세기』에 나타나는 말세관(末世觀)은 독특한 데가 있다. 요컨대 그것은 신학적이라기보다 역사적이며, 상징(또는 알레고리)적이라기보다 ‘현실’적이다. 묵시록 서사들이 흔히 취해온 종말론적 상징이나 알레고리를 포함하지만 여기서는 그 또한 리얼리티 획득의 방편으로 수렴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뉴밀레니엄이 시작되고 오 분쯤 지났을 때,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밝은 와인 색상의 윈드브레이커를 걸친 어린 친구가 들어섰다”(9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의 첫 장은 이어서 ‘궁’이라는 이름을 단 천호동의 한 대형 레스토랑 내부를 예의 “어린 친구”의 팽팽하게 긴장된 움직임과 시선을 좇아 주도면밀하게 축조해나간다. 3인칭 서술임에도 화면의 중심과 주변은 위계적으로 구도화되거나 일목요연하게 잡히기보다 인물의 동선을 따라 제한적으로 조각조각 포착된다. 이를 통해 직접적인 내면묘사 없이도 인물의 차고 메마른 성격과 긴장된 심리상태를 충분히 암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작품 구성상의 전체적인 특징을 미리 압축해놓은 유전자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복수극사장은 사소한 이유로 아르바이트생이었던 “어린 친구”를 해고했다은 더없이 차갑고 사실적이다. “몇 초 뒤 사장의 두 눈이 돌아가고 팔뚝을 잡았던 두 손이 저절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목구멍 안쪽에서 피거품이 끓어올라 입 밖으로 넘쳐흐르기 시작하자 그는 뼈칼을 빼냈다. 입천장에도 조금 구멍이 났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 오버는 누구나 하고 그걸로 사람이 죽지 않는다.”(17~18면) 이와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 「웰컴 투 마이 월드」나 「왓 어 원더풀 월드」 같은 밀레니엄 파티의 배경음악들이 차례로 흘러나오는 동안, 가해자는 스스로 경찰에 신고전화를 걸고 곳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비명소리들을 뒤로한 채 레스토랑을 유유히 빠져나온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라는 이 장의 제목은 신고자의 신원을 파악하려는 경찰 측의 물음에 대한 “어린 친구”의 답변 가운데서 따온 것이다. “나요? 내 이름이 왜 필요해? 아, 나는 아무도 아니에요.”(15면) 뉴밀레니엄에 도취된 레스토랑의 이름이 궁이라면 혀가 갈라져 피투성이로 널브러진 사장은 그 주재자인 왕이며 “어린 친구”는 그를 시해한 반역자인 셈인데, 그가 아무도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사실성의 차원에서 그것은 일단 자연스럽다. 그의 복수에는 처음부터 죄의식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징적 차원에서 그것은 세부의 ‘자연스러움’ 너머로 나아간다. 사장이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더라도 상징으로서의 왕은 이미 처형된 셈이며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인 “공포의 왕이 온다”(20면)는 선포가 가리키듯 비어버린 왕좌는 모비“어린 친구”의 이름은 이 장의 끝에서 처음 등장한다의 차지가 될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종말의 예언들이 하나같이 빗나가고 파티에 참여한 모두가 뉴밀레니엄을 축복하며 실체 없는 희망에 마비되어갈 무렵, 오히려 ‘아무도 아닌 자’에 의해 하나의 완강한 질서를 갖춘 듯 보였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 ‘나는 모두다’가 웅변하듯 ‘아무도 아닌 자’들은 어디에나 편재한다. 파티장을 채우고 있는 무국적의 분위기와 거기에 도취된 ‘하이칼라’들의 모습이 상징하는 ‘세계화’의 이면에서 그것은 쉼없이 성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IMF 외환위기로 대량실업이 줄을 잇기 시작하던 해에 모비가 중학생이 되었다는 사실(156~57면 참조)을 참조하면 뉴밀레니엄을 맞은 시점은 그가 자기 생애의 절반을 막 통과할 무렵이고, 서른셋으로 현생을 마감하던 때는 아마 이 소설이 출간(2016년)된 어름일 것이다. 이런 정보들은 생각보다 중요한데 그것은 초자연적 외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실제 현실 또는 역사의 시간에 상당히 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처음 나간 교회에서 전도사의 손을 물어뜯고 돌아온 모비가 혼전순결 강박에 시달리는 생모7의 품에 안겨 “열사의 나라를 연이어 덮친 재앙들에 대한 이야기”(95면)를 듣기 시작한 게 네살 때였으니 이 작품은 예의 ‘공포의 왕’이 자신의 운명에 최초로 눈을 뜬 이후 30년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우리가 통상 ‘민주화 이후’ 또는 87년체제라고 지칭해온 기간과 거의 겹친다.

“『공포의 세기』의 인물들은” “정신적 묵시록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 사회에서 정신이 핵심적인 문제가 되기 시작한 건 지난 세기의 말부터”이며, 우리는 “아직 세기말을 벗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좀더 심화된 세기말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말한 바 있다.8 그가 “정신적 묵시록의 세계” 또는 “세기말”이라고 부른 지난 30년간을 작품은 망상에 지핀 존재들의 폭민화(暴民化) 과정으로 요약하는 듯하다. 민주화 이후 30년의 사회적 집단초상이긴 하되 그것을 과연 누구의 편에서 그려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비교적 답이 분명해진다. 고향인 바닷가 마을에서 근친 성폭행의 상처를 안고 서울로 도망쳤지만 또다시 동거남 에이치의 폭력에 시달리게 된 비정규직 사환 경이나 가출 이후 온갖 타락과 야만을 거쳐 존속살해범이 되는 령, 그리고 뚜렷한 정황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오빠의 실종과 연루된 미지의 사건 이후 남자들을 유혹해 살해하는 까페 주인 수가 여성인물들로서 한 축을 이룬다면, 비교적 안정된 가정과 직업을 가졌지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원인 모를 적개심에 사로잡히거나 의처증에 잠식당해버린 뒤 자신이 이룩해온 거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중년남성 심과 효는 또다른 축일 것이다. 이들은 성별과 계급, 세대를 달리하면서도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탈락한 존재라는 공통점을 지니며 집단화되기보다는 끝내 개별적으로 머문다는 점에서 일종의 느슨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그 구심점에 자리한 것이 ‘불의 혀’임은 물론인데 무어라 간단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그것은 이들의 삶을 안으로부터 먹어들어가며 폭민화하는 지배적 정동(affect)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공동체의 뒤집힌 닮은꼴일 폭민정동 네트워크는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무서운 속도로 증식해 소위 중간계급 이하의 몰락뿐 아니라 우스꽝스럽고 위선적이며 거북살스런 인상으로 등장하는 지배계급 구성원주로 재벌이나 유력정치인들의 예기치 못한 무작위 파탄을 가져온다. 이를 뉴밀레니엄 파티 장면의 상징 맥락과 연결지어보면 “현재의 세계체제는 평형상태로 되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어그러졌고 하층계급은 물론 자본가에게도 더이상 득이 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렀다”(주2 참조)는 진단은 더욱 강한 실감으로 다가온다. 『공포의 세기』는 사실과 상징, 역사성이 겹으로 길항하고 이접하는 가운데 높은 강렬도의 리얼리티를 보여주지만 그것이 인물들의 폭민화 과정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부분적으로 희생한 결과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끝내 떨치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살육이 난무하는 공포의 카니발 대신 자신이 겪는 고통의 진정한 원인을 스스로는 알 길이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마지막 표정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작가의 전작들에 비춰서도 이것은 괄목할 만한 변화다. 종교적 망상 가운데 자신을 소진시켜버린 모비의 생모가 그랬고 자신의 몰락에 순응한 령의 아비가 그랬으며 효에게 참살당한 이름 모를 청년이 또한 그랬을 것이다. 물론 이 무정한 ‘공포의 세기’가 그것을 알 리는 없다. 이 또한 다른 버전의 패배주의일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고 말기엔 이 자리에서 울리는 경보음이 너무나 강렬하다.

 

 

3. 겨울의 심장을 걷는 여자들: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

 

최근의 국내외 정세변화는 비록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파멸적 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 체제가 확고부동한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뚜렷한 실감을 더해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브렉시트(Brexit)나 ‘트럼프(D. Trump) 현상’처럼 “글로벌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징후들이 등장을 거듭할수록 “자신들이 또한 그 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취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는 물음은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9 최진영의 짧은 장편 『해가 지는 곳으로』는 바로 그 문학적 응답의 일환이다. 작품은 끊임없이 묻는다. “이제 어디로 가지?”(12면) “우리는 어디로 가?”(24면)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모든 것을 연결하고 흐르게 한다는 ‘지구화’가 실은 그보다 더한 규모의 봉쇄(blockage) 메커니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통찰10을 뚜렷한 알레고리로 보여주면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 없이 마지막에 관해 강박적으로 고민하는 묵시의 한 형태”11들과는 정반대에 가까운 길을 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해가 지는 곳으로』의 서사적 중심은 하루아침에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 모를 바이러스가 세계를 휩쓴 뒤, 한국을 벗어나 러시아로 탈출한 세 가족의 두달 남짓한 여정이다. 여기에 짧은 후일담인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붙인 3부 구성인데 단일한 장으로 이뤄진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중심서사는 16개, 에필로그는 3개의 장으로 다시 나뉜다. 이 소설은 시종일관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화자는 다섯이나 되며 장이 바뀔 때마다 교대로 등장한다. 물론 구간 배분이 모두에게 고르지는 않다. 중심인물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사랑을 안고 “겨울의 심장을”(58면) 횡단하는 도리와 지나, 그리고 류라는 여성 주인공들이어서 지나의 이웃 남동생 건지의 시점을 취한 장은 세개, 도리의 친동생인 미소가 화자로 나선 장은 에필로그의 첫번째 장 하나뿐이다. 하지만 다중초점을 취한 작품임에도 『공포의 세기』와 달리 일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에 비교적 순응적이어서 화자들은 마치 이어달리기를 하듯 배당된 구간의 이야기를 충실히 이끈다. 『공포의 세기』가 서로 다른 서사적 평행선들의 산술합계를 통해 나름대로 세계를 ‘총체화’하려 했다면 『해가 지는 곳으로』는 일인칭 복수화자들의 협동과 분업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서사를 통해 그것을 시도한다.

이 작품에서 재난의 원인에 대한 탐색은 이뤄지지 않는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집단적 실명(失明) 현상이나 『로드』의 세계멸망 모티프처럼 그것은 완벽히 괄호에 묶여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인들을 일인칭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작품에서 재난의 원인을 밝히는 과정이 생략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해당 장르관습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과학과 의학 또는 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재난은 ‘우리가 알고 있던 현실’을 강제 중단시키는 유력한 장치로서만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알고 있던 현실’의 중단이 겹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들은 쉬지 않고 서쪽으로 이동하면 유럽 어딘가에 더 안전한 곳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물론 그것은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을 안고 끝도 없는 불모의 대륙을 헤맨다. 그것은 확실히 ‘역사의 시간’이 중단된 ‘다른 시간지평’의 이미지를 띠고 있지만, 이곳의 생리를 설명하고 전달하는 논리는 재난 이전의 실제 현실, 즉 ‘역사의 시간’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인물들마다 출신과 내력을 부여하고 그것을 재난 이후의 성격과 행동으로 연결짓는 작품의 자연주의적 밀도와 형상화는 상당한 수준이라서12 그 이상으로 독해를 진전시키지 않는 한 이 작품이 “변화에 대한 어떤 상상도 불가능한 폐색의 ‘현실-미래’와 거기에 갇혀 고립된 개인들에 관한 알레고리”를 넘어설 가능성은 점차로 희박해진다. 작가가 이런 한계를 돌파하는 계기로 내세운 것이 바로 두개의 후일담, 곧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다.

프롤로그의 유일한 화자는 류다.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하고 화장품 회사의 사원을 거쳐 여행사 상담원이 된 그는 단이라는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 슬하에 딸과 아들을 하나씩 두었지만 빠듯한 살림살이와 바쁜 직장생활, 힘겨운 육아에 지쳐 남편의 외도마저 방관하는 인물이다. 재난이 있기 전의 삶 또한 일종의 출구 없는 재난상태였던 그에게 “당신은 한국을 아는가?” “한국은 아직 그곳에 있는가?”라는 느닷없는 두개의 연속된 물음을 던지게 한 작가의 의도는 짐작되고도 남는 바가 있다. 그런데 이 물음들이 벌써 말해주고 있듯 프롤로그에서 이미 “일흔 살”을 넘어버린(“아니, 여든 살인가”, 13면) 류가 사는 곳은 한국이 아니다. 아들 해민이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바르샤바도 아니고 재난을 피해 헤매던 러시아도 아닌 이곳은 대체 어디일까? 재난 속에서 가까스로 화해 근처에 이르렀던 남편 단은 살아남았던가? 작품은 그런 의문들에 대해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하루도 빠짐없이 당신들을 기억하고”(14면) 있다 말하는 단 한 사람, 류의 자리를 마련해놓음으로써 ‘재난 이후’의 세계를 기억의 자리로 만든다.

한편 에필로그의 화자는 류를 제외한 나머지 넷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어른이 되지 못했다”(179면)라는 고백에서 암시되듯 도리의 여동생 미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존재다. 그러나 이 유령화자의 독백에는 원한과 분노 대신 “보석이 된 내 (사랑의인용자) 약속은 영영 변치 않을 것”(180면)이라는 믿음이 들어서 있다. 뒤를 잇는 것은 건지의 장이다. 일행에서 떨어져 나온 건지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걷고”(181면) 또 걸어서 지옥의 현실에서 그가 꿈꾸던 “따뜻한 바다”(134면) 비슷한 어떤 장소에 다다른 듯하다. “이곳에 사람이 산다. 그 수는 아주 적다. 자연이 허락하는 것만을 취하며 산다. 사람들은 싸움을 피하고 적당한 무관심으로 서로를 보살핀다. 매일 수영을 하고 물고기를 잡는다. 열매를 먹고 씨를 뿌린다. 풍족하지도 아쉽지도 않다.”(182면) 그렇게 “수천 일을 살고 더 살았다”(183면)고 했으니 재난 당시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뒤다. 그런데 이쯤 되면 그것이 죽은 자의 것이건 산 자의 것이건 이상의 이미지들은 일종의 비전(vision)이 된다. “소리를 잃던 밤”엔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지만 “숨을 잃던 밤엔 우주를 나는 꿈을” 꾸었다던 미소는 이어서 “우주를 나는 건 시간을 나는 것. 시간을 날고 날아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야 말아서 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179면)고 말한다. 이것이 현생에서의 죽음과 영원한 구원에 대한 믿음, 즉 종교적 비전이라면 건지의 현재는 아마도 자연의 질서에 순종하는 생태적 비전에 대응할 것이다.

‘우리가 알던 세계’, 그러니까 “사회는 전쟁터라는 말. 함부로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 착하면 손해라는 말.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말. 약육강식. 각자도생. 승자독식.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덮기 전에도 숱하게 들어온 말들. 그런 말을 비난하면서도 이용하던 사람들”(123~24면)의 세상을 문득 중단시킨 것은 소설 속에서 종작없이 몰아닥친 재난이었다. 그리고 은유적 차원에서 그것은 불평등과 폭력이 난무하는 구제불능의 자본주의적 현실을 차라리 초기화(reset)해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집합적 파괴욕망의 상관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소와 건지의 비전은 ‘우리가 알던 세계’를 초기화한 세계(“모두가 공평하게 불행한 지금이 차라리 홀가분하게 느껴질 때”, 37)마저 중단시킨, 새로운 시작일 수 있을까?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지만,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나는 모른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182면)라는 건지의 독백이 알려주듯 이들의 비전은 여전히 ‘우리가 알던 세계’를 초기화한 세계 안에 속해 있는 무엇인지도 모른다. 물론 작품은 여기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에 ‘우리’를 등장시킴으로써 다른 차원의 암시로 나아간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화자들은 역시 지나와 도리다. 그러나 이 장은 누군가를 앞세워 일인칭 주인공 시점을 취하는 대신 ‘우리’라는 제목 아래 마치 희곡처럼 대화문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시공간의 묘사와 제시에 비교적 충실했던 작품은 여기서 돌연 무시간적으로 추상화되어 두 인물 사이의 대화가 현실인지 아니면 유령적 존재들의 그것인지조차 불투명해진다. 어느 쪽으로도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무대 상황 위에서 두 인물은 “인간들이 자기가 죽은 걸 모르고 유령으로 계속 살아가는”(186면), 꾸고 나면 “이상한 기분에 빠져”(187면)버리곤 하는 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상한 기분?

내가 유령인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거든. 이미 망해 버린 세상을 망한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 거 아닌가.

……망하는 게 뭘까.

내가 내린 결론은, 우리가 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진짜 망한 게 아니야.

진짜 망하는 건 뭐야?

망했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거.

……유령처럼?

응. 망해야 할 순간에 망하지도 못하는 유령.

……망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

 

인류가 멸망하는 꿈을 꾸는 것은 지나이고 도리는 그 꿈 이야기를 듣는다. 이 에필로그의 마지막 무대는 진정한 멸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일종의 맥거핀(Macguffin)에 불과하다. “망했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망해야 할 순간에 망하지도 못하는” 것이 진정한 인류멸망이라는 지나의 확신은 상식적으로도 그럴듯한데다 적어도 멸망의 의미에 관한 일차원적 해석에 머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전하려는 모종의 메시지를 운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도리의 반문과 회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상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화제는 건지가 “바다에 유리병을”(188면) 띄우는, 앞뒤가 지워진 꿈 이야기로 넘어갔다가 이렇게 마무리된다.

 

출발할까?

그래. 그만 일어나자.

지나야.

응?

사랑해.(189면)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무엇이 진정한 인류의 멸망인가’가 아니라 아무것도 미리 정해진 것은 없다는 사실 자체다. 이 ‘아무것도 미리 정해진 것 없음’의 다른 이름이 마지막 문장에 등장하는 “사랑”이라면 어떤가. 알려지지 않은 비전으로서, 아직은 ‘사랑’이라고밖에 달리 부를 도리가 없는 그것은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165면)이자 “죽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170면) 무엇이기도 하다. 당연히 “출발할까?”라는 제안 가운데 목적지의 자리는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가 알던 세계의 초기화’를 욕망하는 세계가 문득 중단되는 것이다. 프롤로그가 재난 이후의 삶을 빈 노트처럼 남겨둔 이유는 이제야 비로소 뚜렷해진다. 우리에겐 미래이기도 한 그것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여전히 남아 있는 가능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폭력과 야만으로 얼룩진 『해가 지는 곳으로』의 참혹한 ‘자연주의’는 이러한 가능성의 경지를 호흡함으로써 일종의 리얼리즘적 전회를 이루는 것이다. 세부의 진실성이라는 측면에서 한두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13 그렇다고 해도 두 여성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이를 굳이 ‘동성애’로 구분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가 지닌 아름다움이 훼손되거나 작품이 개시하는 비전의 힘이 퇴색하지는 않는다.

 

 

4. 여기서 어디로?

 

두 장편은 확실히 지난 겨울과 봄의 혁명적 열기를 복기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지금이 평시인 줄로 착각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지만 우리는 아직 그 열기의 연장선 위에 있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기의 정점에서 출간된 『공포의 세기』와 일대전환의 출발선상에 등장한 『해가 지는 곳으로』는 외형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우선 같은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세상은 살아서 지옥이었다. 지옥이 아닌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그 극소수가 자신의 삶을 지옥이 아닌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녀의 몸에 손을 댄 에이치도, 친척들도 희생자일지 몰랐다. 어쨌든 그들의 삶도 지옥이었으니까”(백민석, 302면)라는 단락은 “살아남은 것도 죄고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도 죄라는, 너나 나나 몹쓸 인간이라는 자조와 책망이 눈빛에도 말투에도 깃들어 있었다. 안다. 불행해서 그렇다는 걸. 죽음에 억눌려 있다는 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힘들어서라는”(최진영, 36~37면) 대목과 맞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사개가 어긋나버린 난장판의 세상’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들은 그토록 서로를 닮아 있다.

이 비명소리들의 출처가 ‘전통적인’ 계급적대와 결을 달리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소수에 편중된 부와 다수의 고른 가난 혹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대립구도가 완전히 힘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 작품에 나타난 그것은 계급적대라기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더 가까운 듯하다. 계급적대가 ‘노동계급(working class)=무산계급(proletariat)’ 등식에 기초한 동일 계급 내의 결속을 전제로 한다면, 『공포의 세기』와 『해가 지는 곳으로』가 드러내는 ‘계급의식’은 계급 내의 결속과는 거의 무관할 뿐 아니라 예의 기본등식이 들어설 자리조차 마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중인물들 간의 투쟁은 백민석이 그리는 폭민들의 세계나 최진영이 묘사하는 생존에 대한 맹목이 그런 것처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범주를 대부분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노동계급은 무산계급과 점점 더 자주 불일치한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만큼은 자산가이기도 하며, 반대로 부르주아의 일부 또는 상당 부분도 임금노동에 몸담지 않고는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자 추세이다. 두 장편은 이러한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중 계급적대의 공식에 들어맞는 인물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혹여 『공포의 세기』가 지배계급의 구성원들을 겨냥한 분신테러로 마무리된다는 점을 들어 계급적대를 논의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적대에 의한 테러라는 것이 대개 정해진 과녁을 빗나가곤 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여기서의 계급적대는 오히려 풍자의 대상처럼 보일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 동물적 생존투쟁을 가속시키는 계급구도의 ‘어그러짐’은 지구화가 초래한 중간계급의 양극 분해가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계급상승을 이룬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라는 점에서 중간계급의 하방 분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것이 묵시록 서사의 재생산을 추동하는 또다른 동력의 하나임은 두말할 나위 없는데 다른 한편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의 구체적 현실에서 유추되었다기보다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현실인식’을 수용한 결과에 가까운 면도 있는 듯하다. 계급을 둘러싼 지금 이곳의 특수한 조건들에 대한 탐구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은 묵시록 서사가 동반하는 알레고리적 형상화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보다 더 오래 여기가 어디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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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영현 「데모스를 구하라: 민주화의 역설과 한국소설의 종말론적 상상력 재고」, 『하위의 시간』, 문학동네 2016, 25면.
  2. 같은 책 30면.
  3. 소영현은 전자의 예로 배지영의 단편 「그들과 함께 걷다」와 김성중의 단편 「허공의 아이들」을, 후자의 예로 편혜영 장편 『재와 빨강』을 들고 자세한 분석을 시도한다. 같은 글 참조.
  4. 같은 책 36면.
  5. 세번째 장 ‘이주일 디너쇼’에 처음 나온 뒤 마치 주제가처럼 반복 등장하는 노래 「수지 큐」(Suzie Q)는 베트남전을 다룬 코폴라(F. Coppola)의 걸작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에서도 위문공연 씬의 섬뜩한 아이러니를 부각시켜주는 배경으로 긴요하게 쓰였다. ‘오늘날의 묵시록’쯤이 될 법한 영화의 원제 또한 『공포의 세기』가 그려내고자 한 바와 통한다.
  6. 괄호 안의 영문은 『햄릿』 1막 5장에 나오는 햄릿의 대사다. 한기욱은 ‘out of joint’를 “어그러진”으로 번역하고, 같은 대목을 원용하여 “자본주의체제의 현재를 진단한” 슈트레크(W. Streeck)와 월러스틴(I. Wallerstein) 등의 핵심논의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한 바 있다. “현재의 세계체제는 평형상태로 되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어그러졌고 하층계급은 물론 자본가에게도 더이상 득이 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기욱 「문학의 열린 길: 어그러진 세계와 주체, 그리고 문학」,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54~55면) 이 글은 백민석 소설에 나타난 ‘말세관’을 이해하는 데도 참조가 된다. 여기서는 본문의 흐름을 고려, ‘out of joint’를 “지금 세상은 사개가 물러나서 난장판”이라는 최재서(崔載瑞, 1908~64)의 번역(1954)을 바탕에 두고 변용하였다.
  7. 나중에야 밝혀지지만 모비의 생모는 어느 개척교회 목사와의 관계를 통해 모비를 잉태하게 되었으며 거기에 신앙을 빌미로 한 강압이 작용했을 것임이 암시된다. 반듯하고 내성적인 품성의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그가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에게 자신을 과잉투사하게 되는 과정은 그래서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8. 백민석 「연재를 시작하며」, 『문학과사회』 2015년 봄호 218면.
  9. Tessa Morris-Suzuki, “Rethinking the Cultural Politics of Globalisation: Where Do We Go from Here?,” Chinoiserie 2016.8.29., 1절 1~5번째 문단 참조.
  10. 같은 글 4절 ‘Flows and Blockages: A Short History’ 참조.
  11. 크리샨 쿠마르 「오늘날의 묵시, 천년왕국 그리고 유토피아」, 맬컴 불 엮음 『종말론』, 이운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263면. 황정아 「재앙의 서사, 종말의 상상: 근래 한국소설의 한 계열에 관한 검토」, 『창작과비평』 2012년 봄호 294면에서 재인용.
  12. 예컨대 무장단체에 끌려가 ‘위안부’로 성적 착취를 당하는 지나와 그 단체의 적극적 일원이 되어버린 지나 아버지의 조우 장면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자연주의적 귀결의 하나다. “가장 강한 단체가 러시아를 접수하면 그게 바로 새로운 러시아가 될 것이다. (…) 그런 말을 늘어놓는 아버지는 분명 들떠 있었다. 헤어질 때 텅 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 그래도 굶지는 않잖아. 그렇지? 말만 잘 들으면 살 수 있지. 기다리다 보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거야. 우리는 새로운 국가의 주인이 될 수 있어.”(140면)
  13. 우선 다섯명의 일인칭 화자를 내세웠음에도 목소리(문체)의 구분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삶에 대한 열정의 뜨거움을 냉정으로 통제하는 일관된 문체적 긴장은 얼어붙은 대륙이라는 그들의 환경과 생존에 대한 절박함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만 그것이 이만큼 획일화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주 등장하는 아포리즘적 문장들도 하루하루가 날카로운 깨우침과 터득의 순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 재난상황임을 암시하기는 하지만 작품의 규모를 고려하면 절제가 아쉬운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