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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박소란 朴笑蘭

시인.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이 있음. noisepark510@hanmail.net

 

하재연 河在姸

시인. 시집 『라디오 데이즈』『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등이 있음. hahayoun@hanmail.net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학과 정치’에 대한 단상」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 등이 있음. jwhyi@naver.com

 

 

왼쪽부터 박소란, 한영인, 하재연.  Ⓒ 김준연

왼쪽부터 박소란, 한영인, 하재연. Ⓒ 김준연

 

 

한영인 안녕하세요. 박소란 시인과 함께 2017년 하반기 문학초점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번호에서는 하재연 시인을 모시고 이 계절에 주목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박소란 이번 계절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작품집이 많이 나와서 대상 도서를 선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고른 책들인 만큼, 각각의 특장을 면밀히 소개해드릴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재연 최근에 나온 작품들을 풍성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177_410한영인  김애란(金愛爛)의 네번째 작품집 『바깥은 여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2003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한국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김애란이 등단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등단작 「노크하지 않는 집」을 굉장히 인상깊게 읽었었는데 저 그 소설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분위기의 하숙집에서 엄청난 생경함을 느끼며 막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김애란의 소설을 읽을 때면 함께 나이 먹어가는 누군가를 곁에서 지켜보는 듯한 애틋함을 느끼게 됩니다. 한편 이번 작품집은 김애란이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서사의 외연을 넓혀온 동시에 세계와 대상을 탐구하는 눈의 깊이를 키워왔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데요, 소중한 대상의 상실을 경험하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도 자주 있었습니다.

 

하재연 김애란 소설이 그려내는 세대감각과 독자들을 공감하게 하는 능력은 탁월한 것 같아요. 신형철 평론가가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가?”(『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라고 했는데, 저는 약간 바꿔서 “김애란 소설의 인물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가능한가?”라고 묻고 싶어요. 이는 작가의 문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디테일을 살려내는 솜씨가 뛰어나죠. 「입동」을 보면 작중인물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가는 구조인데, 벽지에서 아이의 글씨를 발견하는 장면에 이르면 독자들이 인물의 내면과 조우하고 동화될 수밖에 없어요. 디테일을 통해 세대의 공통감각을 예민하고 적확하게 묘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박소란 저 역시 같은 세대로서 김애란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껏 작가는 이른바 ‘88만원세대’의 삶과 고민에 대해 주로 이야기해왔는데, 이제 그 세대의 ‘성장담’을 넘어 삶 일반에 대해 진중하게 접근해간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시선이 깊어진 만큼 현실과 일상에 대한 작가의 인식도 훨씬 첨예해졌다는 생각입니다. 가령 「입동」에서 “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 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33면) 같은 부분에서 그러한 인식이 두드러집니다. 상실의 이미지를 강하게 드리운 작품 중에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마지막 부분,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266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애도, 나아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아픔을 위무하려는 작가적 태도가 엿보였는데, 이 또한 한층 깊어진 시선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어요.

 

한영인 저는 이번 작품집에서 「건너편」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보면서 「성탄특선」(『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이 떠올랐어요. 「건너편」을 「성탄특선」의 후일담으로 읽었거든요. 모텔을 전전하던 20대 인물들이 이제 10년의 시간이 흘러 제 나이대가 된 거죠. 근데 “우리는 웬만한 일엔 크게 들뜨거나 실망하지 않는 삼십대 중반”(「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245면)이라는 표현이나 “바야흐로 ‘풀 먹으면’ 속 편하고, ‘나이 먹으며’ 털 빠지는 시기”(「건너편」 87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그렇게 힘든 시기를 견뎌 도달한 30대라는 게 별 볼 일 없어요. 오빠와 함께 살던 단칸방에서는 벗어나 둘만의 전셋집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사실 삶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죠. 「성탄특선」이 그나마 축제의 설렘을 느낄 수 있는 1224일을 배경으로 했다면 「건너편」에서는 그 흥분마저 다 가셔버린 1226일이 시작되며 소설이 끝나요. 이것이 30대의 삶인가 싶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 특유의 위트와 유머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소설의 배경인 노량진이 현재를 희생하는 댓가로 미래의 안정과 행복을 도모하는 공간의 은유라고 했을 때 그렇게 도달한 미래 역시 또다시 희생되고 유예되어야 하는 현실에 불과하다는 서늘한 통찰이 작가에게 있는 것 같아요.

 

박소란 성찰과 반성의 기미가 매 작품마다 배어 있어요. “인생의 작은 우연과 돌이킬 수 없는 결과, 교훈 따위 없는 실패를 떠올렸다. 지난 십 년간 자기 삶에 남은 것 중 가장 귀한 것이 뭘까 생각했다”(「건너편」 93면) 같은 구절에서 잘 나타나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같은 작가의 ‘성숙’이 우리가 흔히 김애란 고유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온 따뜻하고 엉뚱한 상상력, 위트 같은 것을 감쇠하게 만든 듯해 조금은 아쉬워요. 정색하고 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다분하니까요.

 

하 재 연

하재연

하재연 세대와 계층의 문제는 김애란 소설에서 계속되어온 테마였습니다. 이번 작품집에서는 공무원시험 준비생의 노량진 생활(「건너편」), 사회에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학교 주변을 배회하는 시간강사의 삶(「풍경의 쓸모」), 한국에서 새롭게 형성 중인 국제결혼가정(「가리는 손」) 등 시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세대와 계층이 나오죠. 그러나 말씀하셨듯이 위트나 아이러니가 많이 빠졌습니다. 「물속 골리앗」(『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같은 작품은 현재적이면서도 동시에 징후적인 느낌 또한 강했습니다. 집이라는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세대의 모습이 잘 드러나면서도 세기말적인 결말의 풍경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런데 이번 작품집에서는 징후적이거나 미래에 관한 상징적 메타포의 느낌보다는, ‘이후’에 대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저는 세월호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입동」 또한 집과 거주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물속 골리앗」과 연속되는 측면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 같은 인물 간의 대화나,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36~37면)라는 묘사는 명백히 세월호사건을 환기시킵니다. 문체에 위트나 유머가 빠질 수밖에 없었던 건 ‘겸손하게 귀 기울이고 듣겠다’는 자세가 강해졌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 커다란 슬픔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더 듣고 더 보고 그 슬픔이 가리키는 의미가 무엇인지 끝까지 함께 알아내겠다는 의식’ 아닐까 싶어요. 이 죄의식과도 연관됩니다. 「노찬성과 에반」은 가장 강하게 죄의식에 집중하고 있요. 사실 여기서 죄의식을 가져야 할 사람은 노찬성이라는 아이가 아니라 그 외의 사람들일 텐데, 아이만이 죄의식을 갖는 모습에서 우리에게 작가가 던지는 강한 의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의문에 대한 추궁이 세월호사건 이후 작가의 감각이라고 생각해요.

 

한영인 맞아요. 세월호를 빼놓고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우울의 정서를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위트와 유머가 사라진 자리를 목울대를 울리는 울컥함이 채우고 있지요. 엉엉 소리 내어 울거나 분노하는 대신, 자기도 모르게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데 꾹 참아버리게 되는, 그런 꽉 막힌 슬픔이 보입니다. 이건 세월호사건을 자신의 내면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인물들이 겪는 곤경과도 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해요. 「침묵의 미래」에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132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읽으며 뜨끔했어요. 김애란은 단순히 세월호를 성공적으로 애도한 후 일상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을 자기 안에서 여전히 앓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김애란의 ‘우울’은 그런 점에서 작가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윤리적 결과일 수 있겠다 싶었어요.

 

하재세월호사건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와해를 느꼈습니다.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온갖 비윤리적인 일들이 벌어졌고, 그런 행위들을 지켜보면서 이 한국사회에서 윤리적 지향을 포함한 공동체를 사고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과 회의가 이어졌죠.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제 이곳에서 가능한 것은 슬픔의 공동체뿐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인물들의 내적 고통을 따라가다보면 슬픔에 감염이 돼요. 「노찬성과 에반」을 보면, 노찬성이 자기의 작은 욕망들 때문에 개의 안락사 비용을 끝내 마련하지 못하는데, 김애란 소설에서 계속되는 질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이곳에서는 이런 작은 욕망도 죄가 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박소란 슬픔의 공동체, 슬픔의 연대를 형성하게 된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한편, 저는 「가리는 손」을 무척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인물이 지닌 입체감과 우리 사회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어요. ‘편부모가정’ ‘다문화가정’의 아이를 보는 사회적 시선과 그런 시선 속에서 한 아이가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지를 절묘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아이의 엄마인 ‘나’ 역시 아이를 위로한다며 “너희 아빤 여기 일하러 온 거 아니야, 공부하러 온 사람이었어”(204면)라고 말하는데, 일상세계의 ‘지극히 평범한 추악함’이 아주 섬세하게 드러나지요.

 

하재연 「가리는 손」에서는 동일화라는 폭력의 피해를 입어온 아이가 폭력의 구조 속에서 폭력의 가담자로 재생산되기도 하는 복합성이 구체적으로 그려져요. 그런데 작가의 의식이 향하는 비판의 지점이 우리가 가진 비판의식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때 느껴지는 공감에 대해서는 망설임이 생깁니다. 작중 인물들의 내면과 행위에 대한 소설적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끝내 의문으로 남는 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영수 『애호가들』(창비)

 

177_416하재연 정영수(鄭映秀) 소설에도 구조적인 모순에 의해 패배자로 규정되는 인물들이 나오는데, 김애란에 비해 세대나 계층을 드러내는 역할을 강하게 부여받지는 않습니다. 정영수 소설에는 전체적으로 일종의 유머가 깔려 있어요. 무대 위에서 무지한 인물들이 벌이는 희극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자살하거나 실직당하는 비극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어떤 숭고도 없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비극의 21세기적 버전과 이를 체현하는 인물들의 희극적 상황 간의 불균형이 느껴집니다.

 

박소란 먼저 저는 정영수가 매우 영민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이 하나의 맥락에서 읽히는데, 그럼으로써 작가의 세계관을 매우 집요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요. 이 작가가 인식하는 삶이란 비루하고 또 지루한 것인데, 그런 삶을 견디기 위해 소설 속 누군가는 스페인 문학을 연구하고 누군가는 그리스 비극을 외우고 누군가는 희곡낭독모임을 기웃거리죠. 이들 자체가 말하자면 ‘애호가들’인 셈입니다. 어쩌면 ‘오타쿠들’이랄 수도 있고요. 바로 우리 자신의 다른 이름이지요. 삶의 무미를 견디기 위해 어떤 무용한 일에든 몰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혹은 몰두하는 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등단작 「레바논의 밤」이 지나치게 소설적이라 읽는 재미가 덜했던 데 비해, 나머지 작품들은 이같은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으로 인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하재연 그러고 보니 ‘오타쿠들’도 제목으로 어울리네요.

 

한영인 ‘힙스터들’도 가능할 것 같아요.(웃음)

 

박소란 또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 소설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에서 책이나 언어가 주요한 장치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인물들은 그와 관련된 일을 천착하며 때때로 “텍스트의 홍수” 속을 살아가지요. 여기에는 작가로서의 고민이나 자의식이 투영돼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17세기 스페인 문학을 연구하는 이유가 뭘까요? 21세기의 서울에 사는 우리가 베가나 께베도를 연구해서 뭘 어쩌자는 걸까요”(「애호가들」 51면) 같은 문장은 이 시대에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자기 질문처럼 다가오기도 했어요.

 

한 영 인

한영인

한영인 전 부인과의 결혼생활을 이야기하는 한 문장으로 이 책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상상해오던 것처럼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지도 않았고 남들 말처럼 원수처럼 서로 죽일 듯이 싸우지도 않았다.”(「여름의 궤적」 110면) 정영수 소설의 열도(熱度)는 이 정도가 아닐까요. 뜨겁거나 맹렬하지는 않은데 고유의 덤덤하고 느릿한 리듬이 있어요. 인물들 간의 관계에도 끈적거림 같은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 능동적으로 산뜻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인물들이 마주쳐서 열도를 생산해낼 만한 에너지가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첫 소설집에서 사람들이 기대할 법한 강력한 힘이나 결기보다는 권태나 무기력함이 두드러지더라고요. 저는 사실 작가가 느끼는 권태나 지루함에 동감하는 편이에요. 표제작인 「애호가들」을 저는 힙스터에 대한 냉소와 풍자로 읽었어요. 힙스터는 규정하기에 따라 다양한 특징을 갖겠지만 저는 ‘파편적 진정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싶어요. 지금 현실은 타락했고 비루하고 진정성을 상실했다는 식이죠. 그래서 진정한 세계는 거기 없고 나에게만 있다는 인식이 생겨요. 힙스터의 특징은 그 진정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정치적인 이념이 아니라 문화적 취향에 기반한다는 점입니다. 「애호가들」에서도 문학에 대한 진정성이 가득한 주인공은 형식적 규준에 밀려 번번이 실패하고 주인공은 그 현실의 비루함을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무마하려 해요. 오랜 연인과도 헤어지려 하고요. 이런 것이 다분히 힙스터스러운 태도죠. 실제로 정영수의 소설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어휘를 고르라면 ‘취향’이 아닐까 합니다. 가령 「지평선에 닿기」에서 주인공은 서지연과 취향이 비슷해서 사귀잖아요. 「애호가들」 주인공은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지고 그라나다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표절 논란에 휩싸이면서 좌절되고 말죠. 그런데 그 이후의 행동이 좀 이상해요. 좌절된 현실에 분노하거나 항의하거나 슬퍼하는 대신, 샤워 딱 하고, 그러니까 물로 쏵 씻어버리고 오영한의 교수 취임 축하연에 참석할 준비를 하거든요. 일상으로의 복귀가 너무 깔끔해요. 결국 오영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풍자인 건데, 이 풍자가 자기 내부를 향하면서 발생하는 어떤 피로감 같은 것도 느껴졌어요.

 

하재연 「애호가들」은 화자가 타인에 대해 묘사할 때 그 풍자나 비판적인 시선이 좀 뻔하지 않은가 싶어 따라 읽다보면, 마지막에는 소설의 화자가 가장 강력한 조소의 대상으로 역전되는 구조입니다. 「북방계 호랑이의 행동반경」에서도, 호랑이를 잡으려고 겨울 산을 헤매는 행동 그 자체는 숭고할 수 있지만, 세명의 인물들이 호랑이를 잡으려던 닭으로 요리한 닭백숙을 먹으면서 “다음 사업 아이템은 닭백숙으로 해야겠다”(177면)라며 떠들어대는 장면에서 그런 숭고함은 완전히 휘발돼요. 이런 아이러니와 희화화가 정영수 소설의 특징이자 강점 같습니다. 인물과 구조의 아이러니나 유머는, 이상(李箱) 소설의 화법을 환기시키기도 하고요. 그런데 웃을 수만은 없는 게, 읽고 있는 나 자신도 이 세계라는 허름한 무대의 인물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에요.

 

한영인 인물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 데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도 특징이에요. 가령 「레바논의 밤」에서 장이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큰 사건인데 자기가 그걸 왜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왜 호랑이를 쫓느냐는 질문(「북방계 호랑이의 행동반경」)에도 주인공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죠. 인물들이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행위한다기보다는 뭔가에 떠밀려서 행동하는 존재로 설정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사건성을 체험하기가 힘들어요. ‘삶은 별 볼 일 없는 것을 견뎌내는 것’이라는 세계관 안에서는 적극적인 의지와 행위 능력을 가진 주체가 등장하기 어렵기 때문 아닐까요. 이런 점이 소설의 강점인지 약점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주체의 행위 능력을 비워버리는 전략이 2000년대 이후 꽤 많은 작품에서 등장하는데, 그 계보에서도 정영수 소설은 독보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생각해보면 과연 이 작가가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을 보면 단순 조립 작업의 권태를 이기기 위해 그리스 비극을 외우던 주인공이 평생 그 비극을 번역하는 삶을 살았던 우정희 노인을 만난 뒤부터 그리스 비극을 외우지 못하잖아요. 거기서 이미 별 볼 일 없는 자기의 미래를 봐버린 거죠. 어쩌면 작가 역시 자신의 소설 쓰기의 미래를 너무 일찍 봐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동력으로 어떤 글쓰기를 해나갈지 계속 지켜보고 싶어요.

 

박소란 독특한 점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인물들이 건조함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물컹함으로 다가온다는 점이에요. 궁극적으로는 애처롭고 쓰다듬어주고 싶은 마음도 들죠. 제가 보기에 화자들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이 권태로운 세계를, 삶을 어떻게 견딜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이에요. 취미의 공동체나 얄팍한 연대감이라도 가져보려고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실로 무용해 보이는 일에도 진지하게 응하죠. 그런 모습이 순수한 연민을 자아냅니다.

 

하재연 소설 속 인물들은 왜 무기력한 와중에도 뭔가를 하는 걸까요. 그것도 이유도 모른 채로요. 정영수 소설의 인물들은 가끔 줄에 의해 조종되는 인형같이 느껴져요. 소설을 읽고 나면 인물에 거리를 뒀던 독자조차 자신도 줄을 쥐고 있는 인형술사가 아니라, 줄에 의해 움직이며 조종당하는 피조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될 법한 지점도 재미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취향이나 직업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라고 할까요, 희곡을 번역하는 과정이나 단순노동을 하면서 그리스 비극을 외우는 것을 묘사하는 장면들이 재미있어요. 사건적이기보다는 잉여적인 방식으로 서술하는데, 그 묘사에 계속 읽고 싶게 하는 매력이 있어요.

 

박소란 이 작가는 ‘사건’을 직조하는 데 있어 다소 무기력해 보이는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애초에 대단한 사건이랄 게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나의 미래」를 보면 “세명이 등장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다가 세사람이 동시에 마주치는 어느 한 순간이 있고 그들은 다시 그 시간을 지나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77면)는 서술이 나오는데요, 세계와 관계에 대한 작가의 인식과 유관한 대목으로 읽혔어요. 정영수에게는 하나의 주제에 대한 탐구나 자기발화가 중요하지, 서사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고 완성도 있는 캐릭터를 잡는 것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재연 저는 사건성이 약해지면서, 알레고리적으로 읽을 수 있는 지점이 결말에 와서 강화되지 않아 오히려 좋았어요. 서사적으로 불충분해 보이는 구조라고 할까요. 구조적으로 힘을 줘야 할 것 같은 부분이 아니라 다소 이상한 지점에 힘을 주어 서술하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지평선에 닿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성격적이든 운명적이든 결함을 갖고 있는데, 그 결함이 비극적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우연적으로 느껴져요. 이 소설 마지막 장면의 소묘처럼, 사건성이 지나치게 의미화되지 않는 지점이 좋았어요. 결함을 가졌다기보다는, 미성숙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좋을지 모르겠네요. 화자도 미성숙한 인간으로 설정되어 있고요. 그럼에도 끝까지 읽고 나면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느껴져요. 다만 아까 이상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는데, 이상의 소설에서 느끼는 불만과 비슷한 지점이 이 소설집에도 있습니다. 화자인 나라는 남성 인물과 등장하는 여성 형상 간의 관계나 구도가 조금 단순하게 느껴져요. 이상 소설에서 남성 화자가 여성 인물들을 묘사할 때 양파같이 까도 까도 알 수 없는 존재로 그리며 일종의 위악과 유머가 발생하거든요. 정영수 소설에서도 잔소리하고, 이혼을 요구하는 장면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유머러스하면서도 단순하게 나와요. 물론 말하는 화자 또한 결국 아이러니화되어 양쪽 모두에 독자가 거리를 두게 되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익숙한 구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소란 소설집의 마지막에 배치된 「지평선에 닿기」를 통해서는 이 작가의 이후를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혼자이면서도 더 혼자이고 싶었던 화자가 가족이나 타인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어설프고 조심스러운 손짓 같은 것이 드러나거든요. 전혀 격정적이지 않은 채로 말이죠.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햇볕 아래, 끓어오르는 길 위에 서서 형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211면)

 

한영인 거기서 형이 쁘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유태인 아니어서 존나 다행이다 싶었잖아.”(206면) 이게 정영수 소설의 방식 같아요. 무겁고 끔찍한 현실을 가벼운 유머로 눙치고 넘어가려는 위악적 포즈 같은 거 말이에요. 그렇지만 이런 식의 유머는 재미보다는 안쓰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해요. 그건 결국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이 아니니까요. 이런 태도가 소설 전반에서 엿보입니다.

 

 

조선희 『세 여자』(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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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 조선희(趙善姬)의 장편소설 『세 여자』는 20세기 초 국내 사회주의 활동가들, 그중에서도 세명의 여성 인물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를 중심으로 다룬 일종의 역사소설입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몇차례 작품의 스토리와 관련한 꿈을 꾸었어요.(웃음) 그만큼 흡인력이 대단한 작품이었어요. 부족한 사료에 기반해 뼈대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 미시적인 사건조차 대체로 생동감 있게 복원해냈습니다. 특히 종반에 이르러 딸을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하던 주세죽이 열차에서 사경을 헤매는 장면은 매우 탁월했는데요. “창밖으로 눈 벌판이 햇빛을 받아 빛난다 싶더니 다시 눈이 퍼부었고 설원 위로 황혼이 물들다가 다시 눈보라가 몰려왔다. 세죽은 이따금 정신이 까무룩히 멀어졌다 돌아오곤 했다. (…) 불덩이 같은 비탈리를 안고 있다 싶은데 정신이 들고 보니 자신의 몸이 불덩이였다”(2320면) 생생한 묘사가 바로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워낙 풍부하게 취재한 덕분인지 작품을 읽는 동안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를 두루 조망할 수도 있었고요.

 

하재연 이 소설은 무엇보다 사회주의자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에 가려져 있던 인물들을 역사라는 무대 위에 올려 소설로 그려냈다는 점에 의미가 있겠지요. 소설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더 탐구되어야 할 주제니까요. 사료의 제한 때문에 더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남성 사회주의자만큼 목소리가 남아 있지 않은 대상을 복원하는 작업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는 문학적역사적 상상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그런 상상의 무대에 동참하게 하는 점도 좋았습니다. 한국의 근대성이 어디에서 기원하는가,라는 통찰을 여러 측면에서 할 수 있도록 독자의 손을 잡아끕니다. 이 소설은 로망적인 요소와 저널리즘적인 요소가 함께 있지만, 후자가 더 강한 듯합니다. 한국소설사에서 다양하게 탐구되지는 않았던 이같은 요소들을 방대한 서사를 통해 결합시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한영인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는 1980년대 후반 일련의 해금 조치 이후 문학과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편입되면서 더는 음지의 그늘에 불온하게 숨어 있지 않아도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강렬한 매혹의 대상이라는 지위에서 내려온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그 ‘불온한 낭만’에 매혹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조선희가 공들여 살려놓은 인물들의 면면은 “‘소설’이 ‘역사’를 배반하지 않도록 주의했다”는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소설적 생동감이 느껴지죠. 이 소설은 상해, 남경, 모스크바, 카자흐스탄 등 우리 현대 문학에서 소거되었던 영토들을 서사의 주요 무대로 소환하면서 각 인물들이 겪는 내적 모험의 스펙터클을 효과적으로 창조해냅니다. 물리적으로 그리 멀지 않음에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 지명들을 보며 분단으로 인해 제한된 우리의 심상지리를 다시 한번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하재연 저 또한 이 소설을 읽으며 소설의 무대가 폭넓게 기반을 두고 있는 사료의 스케일에 매료되었습니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이 무대에 동참하면서 한국역사의 다른 영역을 보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죠. 다만, 때로는 사료와 사실(史實)에 대한 작가의 강한 확신이 이 상상적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점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13장 끝부분에서 역사의 비극과 분단의 원인을 진단하는 방식은, 오히려 역사의 복합성을 일면화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여기에는 작가가 상정하는 일종의 대중이 있고, 우리 역사를 현재에 이르게 한 것들을 펼쳐 보여주자는 의식이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강한 작가의식의 노출은 근래의 소설 중에 뚜렷이 존재감을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 저 개인에게는 앞서 말한 아쉬움을 느끼게 하기도 했습니다.

 

박소란 저도 비슷한 아쉬움을 느꼈는데 마지막에 이르면 공산주의 자체에 대해서 창익의 입을 빌려 정리해버려요. “우리가 유물론이라 믿었던 것이 어쩌면 일개 관념론이었는지도. 우리는 결국 미국을 보지 못한 콜럼버스들이었소.”(2360면) 이런 식이 사건이나 인물에 생동감을 부여할 수 있는 결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종 흥미롭게 작품을 읽어내려간 독자로서 그 끝이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졌어요. 당대 혁명가들에 대해, 그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지켜내고자 한 사상과 신념에 대해 독자로 하여금 자유롭게 사유할 여지를 주었다면 더 좋았겠다 싶습니다. 한편, 형식적 측면에서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를테면 서술자가 순간순간 작품에 개입하는 점을 들 수 있겠는데요. 대체로 적절하게 전지적 시점을 유지하다가도 일순간 설명자도, 해설자도 아닌 이가 나타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현장이 얼마나 비장했을지 상상해보라” “나중에 허정숙의 남편이 될 두 남자가 나란히 연사에 나섰다는 게 재미있는 우연이었다”처럼요. 이런 면이 소설로서는 조금 느슨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한영인 저도 동의합니다만 이 소설이 역사에 대해 작가가 지니는 특별한 개입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요. 어떤 면에서 이 소설은 ‘패배의 기록’입니다. 공산주의운동의 패배, 독립자주국가 건설의 패배 등이 ‘세 여자’의 패배자적 운명 뒤에 자리하고 있죠. 북한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들 허정숙의 삶을 성공적이라고 볼 순 없을 겁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내레이터의 개입은 소설의 배면에 자리한 이 패배에 대한 회한과 비탄의 시선이 서사 속에서 돌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때론 거칠게 느껴지지만 다른 면으론 작가의 명확한 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죠. 또한 하재연 시인께서 말씀하신 작가의 역사관 혹은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쟁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그것이 역사소설이 갖는 특유의 미덕 중 하나겠지요. 제가 아쉬웠던 건 이 소설의 출간이 작가의 사정으로 인해 많이 늦어진 부분이에요. 작가가 이 소설을 2005년부터 집필했다고 했는데 그때는 노무현정권기로 첨예한 역사전쟁이 벌어졌던 때잖아요. 여운형에 대한 서훈이 추서된 게 2005년이지요. 2004년에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가 나왔고 이강국을 모델로 한 인물이 등장한 드라마 「서울 1945」가 방영된 것이 2006년입니다. 그즈음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학계를 넘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는데요, 그 무렵 이 책이 나왔으면 더욱 큰 사회적 울림과 파장을 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 현재적 문제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전향 이후 『동양지광』에서 일했던 고명자나 김한경에 대한 서술에서는 우리 사회가 이른바 친일행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처리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일지 고심 흔적이 엿보입니다. 학계와 시민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난제를 던졌다고 생각해요.

 

하재연 사회적 문제 제기와 관련해서라면 이 소설의 젠더 문제에 관한 초점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작가가 페미니즘에 대해 의식적으로 고려한 것은 아니라 해도, 소설의 기획으로서 우리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젠더에 대한 문제의식은 분명히 존재했을 거예요. 이 소설이 이슈가 되는 것 또한, 문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배제되었던 여성이나 여성의 문학에 대한 최근의 다시 읽기 분위기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죠. 저 또한 이 소설을 통해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라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다시 만나게 됐으니까요. 다만, 여성 인물들의 삶이 입체적으로 그려졌는가에 대해서는 몇가지 의문이 듭니다.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가 정치적으로 또는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순간에 대해 작가적 상상력이 개입되는 장면을 보죠. 주세죽은 ‘딸 옆에 있고 싶다’는 이유로, 허정숙은 ‘아들의 가족을 위한다’는 이유로, 고명자는 ‘사랑을 위해서’ 그러한 결정을 하죠. 셋의 차이가 별로 없어요. 세 인물을 통해 더 다채롭게 근대를 통과해온 여성의 삶과 선택을 볼 수 있기를 바랐는데, 이들의 내면에 독자가 동화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대체로 가족주의적인 센티멘털리즘에 의존한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또한 허정숙의 입이 아니라 ‘모던걸’로서, 혹은 ‘북한체제의 입’으로서 말하는 것 같은 부분은 인물에 대한 가치평가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평이하고 속도감 있게 잘 읽히는 문체는 이 소설의 장점이지만, 독보적인 혁명가이자 시대의 격변 속에서도 그 중심 흐름에서 밀려나지 않았던 여성 허정숙의 모습을 묘사하는 문체로서는 다소 단순해 보이기도 합니다.

 

한영인 말씀하신 아쉬움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오랫동안 어두운 땅 밑에 묻힌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를 세 여성의 삶의 모험과 결합시켜 형상화 한 노작(勞作)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요즘 「박열」을 비롯해 「군함도」 「택시 운전사」 같은 영화가 나오면서 역사적 사건의 재현을 둘러싼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저는 서사적 흡력을 갖춘 이 소설 역시 영화로 만들어지면 아주 매력적인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박소란 정말 그렇겠네요. 격동기를 살았던 파란만장한 젊음, 더욱이 여성 혁명가를 중심에 둔 작품이라는 점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품격의 시대극 영화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큰 역사의 줄기에서 그간 비교적 왜소하게 자리한 여성의 역사,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역사를 소설로 가공하겠다는 의지와 또 그것을 대체로 능란하게 복원한 기량 자체로도 이 작품 역사소설의 저변을 굳건히 하는 데 기여했다 하겠습니다.

 

 

김학중 『창세』(문학동네)

 

177_427한영인 이제 시집으로 넘어가보죠. 김학중의 첫 시집 『창세』는 최근 들어 쉽게 접해보지 못한 시적 스케일을 보여줍니다. 등장하는 시어들을 봐도 우주, 세계, 역사, 신, 지구, 태양, 대륙, 대지 등 어마어마하죠. ‘창세’라는 제목이 주는 묵직한 울림이 있습니다. 게다가 첫 시집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시인이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개시해 보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재연 시들 간의 스펙트럼이 넓다고 생각했어요. 풍자적인 감각도 있으면서 시간의 역사나 신화적인 이미지를 가져오기도 하고, 서사의 느낌으로 시를 구성하기도 하죠. 독자적인 스타일을 고수하는 게 잘 느껴집니다. 「홈스틸」이라는 시처럼, 풍자와 페이소스가 결합되는 방식이 김학중 시의 특징 같습니다.

 

박소란 시인이 삶의 고통을 인식하고 발화하는 방식이 이채로웠어요. 지극한 고통의 근원을 탐지해가다 결국 창세에까지 거슬러 이른다는 것. 시인의 고투가 절절하게 다가왔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고투가 다름 아닌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는 건데요, 우주, 태양, 미래, 예언 등의 시어에서 드러나듯 거대한 영역으로까지 사유를 확장해가지만, 그 기반이 현실에 있기 때문에 단단한 느낌입니다.

 

한영인 ‘미래일기’ 연작은 왜 시인에게 창세라는 개념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부제는 ‘미래일기’지만 거기엔 미래가 없죠. “미래는 오랜 실업 끝에 죽었”(「일기예보와 시장경제」)다거나 “매일 떠돌아도/다른 날로 갈 수 없었다”(「몽당연필 일기」)라는 식으로 닫힌 시간성이 제시됩니다. 그렇다고 세계의 끝이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도 아니에요. “종말 없는 종말”(「외계인의 탄생」)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세계는 그저 종말에 점근선적으로 접근하면서 지속될 뿐인 거죠. 그래서 종말도 미래도 그저 이름뿐인 껍데기로 제시됩니다. 저는 시인이 미래를 이렇게 아무런 사건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자신을 배태한 기원으로 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래는 보잘것없고 그럴수록 과거와 기원에 어떤 열기가 응집되는 거죠.

 

하재연 “아무래도 미래에게 미래는/그냥 이름일 뿐인 것 같아요.”(미래의 아침)처럼 위트와 풍자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이 이 시인의 장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창세라는 이미지와 현실과의 접점이 시편들마다 날카롭습니다. 예언자나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지금의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하는 인물 형상으로 그려져요. 대체로 알레고리적으로 읽히는 시편들 속에, 고독한 인물의 형상들이 다양한 진폭으로 드러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박소란 「행운의 편지」를 보면 “이곳의 아이들은 꿈을 갖기 전에/달력을 넘기는 것이 삶임을 알고 있으며/아프지 않아도 잘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그들의 유일한 기적은 생의 지루함인데”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시인은 일관되게 현실을 고통과 좌절로 인식하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인류가 낙원을 잃은 날부터 따라다닌 추위”(「창세기 4」)인 셈이죠. 고통은 어차피 처음 세계가 창조되던 때부터 예언되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대로 고통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가 질문하게 되는데요, 시인은 이에 대한 답을 대신해 어떤 암시를 줍니다. 일례로, 「창세기 4」의 “그들의 손은 하루를 짓느라/매듭이 굵어지고 그 굴곡을 움직여/노래로 집을 짓는다/집을 잃은 자들만이 지을 수 있는 도시/늦어도 늦어도 기다리는/남겨진 텐트들의 도시” 같은 구절을 보면 고통의 절망적 수순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로 그 절망을 가뿐히 넘어섭니다. ‘애초에 우리는 다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그러므로 지금의 이 고통은 당연한 거야. 이상한 것이 아냐, 괜찮아.’ 이런 묘한 위로를 건네는 것 같달까요. 현실의 고통을 응시하면서도 분노나 냉소로 치닫지 않고, 이렇듯 시인 나름의 세계관에 기반해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려는 태도가 돋보였습니다.

 

하재연 서울의 풍속도를 신화적인 느낌의 무대로 세팅한 것 같은 배경이에요. 그런 세태나 풍속도가 저에게는 납작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시인이 풍자적인 의도를 숨기지 않기 때문 같습니다. 마치 1980년대의 최승호나 장정일의 시에서 본 것 같은 도시에 대한 풍자적인 시선을 다시 보는 느낌인데요, 다만 이미지나 화법에 김학중의 목소리로 느껴지는 지점은 있습니다.

 

한영인 「천적」이 그러한 양면성을 다 갖춘 시라고 생각하는데요. 익숙하면서도 김학중만의 새로운 감각이 빛을 발하죠. 자본주의적 속도로 대변되는 고속도로와 컨베이어벨트처럼 돌아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익숙한 은유이자 풍자인데, 차들이 폐차되면서 백미러를 보고 길을 그리워한다는 부분에서는 저도 예상하지 못한 진한 마음의 떨림을 느꼈습니다. 설마 폐차당하는 차에 감정을 이입하게 될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통수를 한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박 소 란

박소란

박소란 이 시인은 기본적으로 ‘외야(外野)’에 대한 관심과 연민이 있는 것 같아요. 폐차된 차나 텐트 시티에 사는 사람들 모두 말하자면 외야의 존재들인데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치밀한 시적 장치와 함께 정직하게 구성해내는 것 또한 미덕으로 여겨집니다.

 

하재연 「우리가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입들」 같은 시는 풍자나 신화적인 이미지도 없는데, 오히려 일종의 이야기성이 흐릿해지며 더 좋게 읽었어요. 강력한 이미지나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강박을 조금은 덜어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한영인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은 이야기를 덜어내면서도 따뜻한, 조화로운 시 같아요. 전통적인 서정시의 느낌을 갖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둘’이나 ‘너와 나’가 사실 하나잖아요. 자신의 외부와 내부를 통합하는 하나를 둘로 명명하면서 둘이 맞잡은 고요의 상태를 드러내는 부분에서 어떤 차분한 깊이가 느껴졌어요.

 

박소란 이 시집을 통해 새삼 한 시인이 자신의 세계관을 어디까지 끌고 가는가 하는 점은 다른 어떤 부분보다 귀하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통의 근원을 탐지해가는 이 시인의 고투는 얼핏 수도자의 그것처럼 숭고하게 느껴지는데, 그래서 저는 이 시집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어요. 특유의 정직함 혹은 우직함이 단점으로 비칠 수도 있겠, 아마도 시인 자신이 그 점을 가장 잘 알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함 없이 밀고 나가는 결기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형식적 실험이나 의미론적 모험보다는 사유를 더욱 천착함으로써 신선함을 확보해내는 것이 이 시인의 계속적인 과제이지 않을까 싶네요.

 

하재연 저는 오히려 시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후의 시가 기대되는 것 같아요. 다만 제 취향일 수 있지만, 시 쓰는 자로서의 자의식은 시에서 좀 덜 드러내면 좋겠어요. 시의 호흡 또는 문체를 좌우할 수 있는 완급조절과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연관되는 것 같은데요. 어떤 시에서는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박연준 『베누스 푸디카』(창비)

 

177_431한영인 박연준(朴蓮浚)의 『베누스 푸디카』는 흐름의 운동을 만끽하게 해줍니다. “흐르는 키스들의 보관함”(「그릇」) “죽은 이들이 혈관을 타고 흐르네”(「암늑대들이 달아나는 법」) “나는 고인 채로 찰랑이다,/온 세상으로 흘러다녔다”(「베누스 푸디카 3」)처럼 다양한 운동의 이미지들이 존재하거든요. 그런데 흐름이라는 것은 능동적인 운동성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외부 상황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수동성의 의미도 갖습니다. 가령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를 뿐 그걸 거스를 순 없지요. 하지만 동시에 흐름은 기존의 조건을 침식시키고 범람하면서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이렇게 흐름이 지닌 양가성을 잘 보여주는 게 「베누스 푸디카 3요. ‘나’는 미끄럽고, 증발 불가능하고, 온 세상으로 흘러 다니는 액체인데 자유롭고 해방적인 느낌과 동시에 스스로 이 흐름의 결과를 알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오는 불안과 염려도 느껴졌어요. 증발 불가능하다면 언제까지 흘러 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이 유동성이 여성의 삶과 결합되며 고단함이나 불안함이 극대화됩니다. 같은 ‘흐름’이라도 근대적 남성이었다면 모험 주체의 운동성능동성을 떠올릴 텐데, 여성의 삶에서는 잡히지 않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인상을 받았어요. 「베누스 푸디카」 연작이 여성 시인으로서의 느낌을 잘 담은 것 같았습니다.

 

하재연 여성 시인으로서 무언가를 잘 담고 있다는 진술은 사실 여성 시인으로서는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평가일 것 같아요. 다만 ‘베누스 푸디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박연준은 여성성이 처한 이중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자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자의식이 여성성이라고 불려온 것을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고 활용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가하는 제한을 깨고자 하는 욕구로 작동하는 것이죠. 방금 ‘유동성’이라고 표현하시기도 했는데, 박연준 시인의 장점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언어라고 생각해요. 2000년대 이후의 많은 시들에서 화자가 다중화되거나 모호해지는 방식들이 자주 드러나곤 했거든요. 주체성이라고 할지, 화자성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박연준 시의 뚜렷한 화자성과 에너지는 특별합니다.

 

박소란 전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문학동네 2012)에서도 느꼈지만, 시인은 더욱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주춤대거나 망설이지 않고 내면의 비명이나 신음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면서 자신만의 작법을 만드는 과정에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 시도가 늘 성공적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백의 언어’로 이야기되는 특유의 발화법은 참 매력적입니다. 이런 미덕 덕분인지, 시인의 시는 삶의 비의를 이야기하면서도 좀처럼 생기를 잃지 않아요. 도리어 아주 활달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집을 ‘죽음의 텍스트’로 명명하고 싶은데요. “죽음은 왜 자꾸 내 앞에 와 엎드리는가”(「검은 짐승들」) 같은 절규가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귀신’이나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이 도처에 등장하고요. 그럼에도 화자에게선 묘하게 싱싱한 에너지가 뿜어져나와요. “식탁 아래로 (…) 죽은 이름들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반짝, 칼이 웃”(「쏟아지는 부엌」)듯 말이죠.

 

한영인 「암늑대들이 달아나는 법」도 앞서 말씀하신 독특한 발화법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느끼게 합니다. 알이 액체가 되었다가 사과처럼 맺혔다가 물방울처럼 떨어지고, 그러면서 달아나는 운동 같은 게 있죠. ‘속눈썹’은 시인이 즐겨 사용하는 시어 같은데, 이 시에서 속눈썹은 “칼뭉치”가 되어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을 베어버리는 공격적인 장치로 기능합니다. 눈을 감는 행위는 외부세계와 자기를 최후의 단계에서 단절시켜버리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이 이미지를 능동적으로 전도해서 에너지가 생겨납니다.

 

박소란 단절, 공격의 이미지가 반복해서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박연준의 화자들이 혼자만의 방에 갇혀 있길 원하지는 않아요. 언급하신 대로 “내 속눈썹은 칼뭉치,/깜빡일 때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벨 수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이는 한편으로 “태어나면서 깨”진 ‘미셸’과의 연결을 더욱 공고히 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죽은 이’로 통칭되는 약자와의 교감을 위한 몸짓이 여러 시편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고 있어요. 이를 시인의 성장 혹은 성숙의 일면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번 시집에서는 이같은 점 또한 중요하게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재연 「혀 위의 죽음」 같은 시를 보면, 여성의 육체가 시 안에서 하나의 매개가 되죠. ‘죽음’과 같이 인간의 육체가 담고 있는 보편성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하지만, 여성의 육체라는 특수성에 대한 박연준 식의 발언이 있어요. 「키스의 독자」의 “허공을 물어뜯어 아작내는” “투명한 물레바퀴에 혀가 물려/터엉, 끼익 터엉” 같은 부분에서 온순해지지 않고 길들지 않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감각이 느껴집니다. 마치 그러한 감각이 생래적인 것처럼 읽히는 점박연준 시들의 특수성이. 그런데 저는 마치 생래적인 것처럼 읽힌다는 이 부분에 대해 양가감정이 들기도 해요. 생래적인 감각이라는 말이 일종의 문학적 판타지가 아닐까 싶어서, 그 판타지를 강화시키는 쪽보다는 약화시키는 쪽의 언어에 대해 저는 더 친연성을 느끼는 편입니다. 화자의 선명성이 뚜렷해지는 박연준의 일부 시들에서는 여성 육체에 대한 사고와 감각의 틀이 좁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키스의 독자」가 보여주는 강력하면서도 모호한 이 이중적인 화자가 좋았습니다.

 

박소란 시인의 전작들에 비하면, 이번 시집이 특별히 에로틱하거나 파격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발기’나 ‘음부’, ‘가랑이’ 같은 시어들, 그리고 “붉은 성기의 날들이 지나갔구나”(「계란 일곱개 복숭아 세개」) 같은 표현들을 여전히 만날 수 있지만, 더이상 시인이 이런 주제로 이야기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지금에 와 이런 것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낡은 태도 같아요. 대신 저는 시인이 펼쳐 보이는 새로운 세계, 늙음이나 죽음에 대한 고찰에 좀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늙어버렸다/죄조차 이미, 늙어버렸다”(「하늘에서 돼지들이 떨어지는 저녁」)나 “개찰구를 통과하는 눈먼 귀신들//오늘 아침엔 아무도 서로를 못 본 채/모두가 귀신이 되어 사라졌다”(「아침을 닮은 아침」) 같은 표현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거든요. 이것이 죽음의 본질에 대한 것이든, 정치사회적 현상에 대한 것이든 세계를 해석하고 인식하는 시인의 품이 한층 깊어진 것은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신용목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창비)

 

177_435박소란 전작 『아무 날의 도시』(문학과지성사 2012)에서부터 형식상의 변화를 선보인 신용목(愼鏞穆)은 이번 시집에서 그 변화의 양태를 한층 공고히 한 느낌입니다. 그만큼 시적 완성도를 높였다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 시집을 읽으며 엉뚱하게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 등을 그릴 때 사용했다는 ‘스푸마또’(sfumato) 기법이 떠올랐어요. 붓으로 여러번 덧칠해 작품의 신비감과 생동감을 살려내는 기법이요. 이 시집에서는 시의 구조나 표현을 ‘덧칠’한 듯 치밀하게 잇고 또 엮어 감정의 손쉬운 흐름을 경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였어요. 시집의 키워드는 누가 뭐래도 ‘슬픔’일 텐데, 시인의 그같은 의지로 슬픔이 한층 아름답고 신비롭게 채색된 것 같습니다. 밤, 눈(눈사람), 비, 새, 가을, 낙엽(단풍), 창 같은 전통적 서정의 결을 고스란히 지닌, 어떤 면에서는 이미 익숙하다 싶은 시어들이 잇따라 등장함에도 시적 신비를 잃지 않는 점 역시 이와 유관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재연 『아무 날의 도시』에서도 시들의 구도와 형식을 중층적이고 복합적으로 구성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는데, 이번 시집도 그렇습니다. 신용목은 하나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구성하면서 건축물처럼 직조해내는데, 다만 이번 시집에서는 『아무 날의 도시』처럼 하나의 시를 입체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여러 호흡과 구조의 시들을 다양하게 배치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어요. 가령 「게으른 시체」와 같이 길고 풀어헤쳐진 호흡의 시들과, 「진흙 반죽 속에서 조금씩 내가 되어 걸어 나오는 진흙 인간처럼」같이 잠언적인 이미지를 극도로 짧고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시들의 차이와 배치를 눈여겨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김애란 소설과 관련해 ‘슬픔의 공동체’라는 말을 했는데, 신용목 시의 ‘슬픔’은 김애란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몸에 관한 상념’은 박연준과 비교하면 재미있고요.

 

한영인 「나비」에서 시인은 난롯불을 쬐면서 문장을 떠올리고 메모합니다. 이 시집 자체가 그런 모습으로 읽히는 것 같아요. 시인의 아포리즘들이 메모된 하나의 두꺼운 텍스트를 골몰하며 읽게 되거든요. ‘생각’이라는 시어가 질문 형태로 자주 제시됩니다. 그런 면에서 시인이 책에 대해 질문하는 동시에 독자가 시인의 질문을 공유하게 되는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에 대한 비유나 뼈, 바람, 아버지 등은 이전 시집과 공유되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이번 시집만의 독특함이 있다면 말씀하신 ‘슬픔’에 더해 ‘생각’이 있을 것 같아요. 슬픔이 외부의 사건에 의해 자기가 체험하게 되는 수동적 감정이라면, 생각은 세계를 객관화면서 파악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세계를 이해하려는 고투를 많이 담은 것 같아요.

 

하재연 김애란 ‘여기 놓여 있는 죄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새로운 공동체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의문’을 보여줬는데, 아마 일종의 시대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신용목 또한 우리가 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첫 시 「후라시」가 대표적일 텐데,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죄처럼 느껴진다는 의식이 짙게 깔린 것으로 읽힙니다.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 나오는 전짓불의 이미지가 좌우 이념대립을 상징했던 것이라면, ‘후라시’에 드러난 우리의 얼굴은 삶과 죽음 또는 죄와 슬픔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보여요. ‘슬픔의 현상학’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서만 나의 존재에 대해 간신히 말할 수 있는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인데요. 자신의 살아 있음 자체를 수긍할 수 없는 현실에 처해서, 슬픔을 겪고 있는 몸으로서만 나 자신을 현상할 수 있는 화자라고나 할까요.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는 여기 현상된 슬픔들을 보며, 이제야 독자도 나의 슬픔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식을 갖게 됩니다.

 

박소란 시집 속 슬픔은 강력한 힘처럼 느껴집니다. 시인을 추동하는 어떤 힘 말이죠. “미안하다, 나는 밥을 먹는다”(「그리고 날들」)는 화자는 어느 순간 슬픔에게로 이끌리듯 가서는 최선으로 그것을 껴안고 있는 듯 보여요. “젖은 마을을 다 돌고도 주인을 찾지 못해 나에게 와 잠을 청하”(「공동체」)는 슬픔과 함께 “하얗게 사라지고 싶”(「목소리가 사라진 노래를 부르고 싶었지」)은, 즉 ‘슬픔에의 의지’가 시 전반에 커다란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번 시집은 내용보다 형식에 더 주목하게 되는데요. 특히 이미지와 그것을 운용하는 방식에 있어서요. 시집 전체를 놓고 보면 시가 이미지를 견인한다기보다 이미지가 시를 견인한다 싶을 정도입니다. 각각의 이미지가 시인의 사유를 담보로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풍부한 정서적 감응을 촉발합니다. 이는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질뿐더러 시의 완성도에도 기여합니다만, 그럼에도 어떤 시에 이르러서는 ‘~처럼’ ‘~같이’ ‘~인 듯’ 같은 비유적 이미지가 너무 잇달아 등장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재연 시인은 ‘이 슬픔 속에서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듯해요. 소설가 한강이 어느 강연에서 『소년이 온다』를 쓰게 된 계기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은 경험을 연결지으며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라는 의문, 그 알 수 없음에 대한 질문과 80년 광주에 대해 쓸 수밖에 없었던 한 작가의 정신에 관해, 이번 시집을 읽으며 이 질문이 다시 떠올랐어요. 이토록 폭력적인 세계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우리는 벌거벗은 몸뚱아리 같습니다. 「호모 아만스(homo amans)」에는 이 재난과도 같은 사태에 처한 우리에 관해 질문하는 부분이 있어요. “신들도 제 몸의 웅덩이에 빠져 넘어졌을까?” 이런 폭력과 죄의 시대를 인간으로서 견디기 위해 시인은,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심미주의적인 감수성으로 슬픔을 관통하는 아름다움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한영인 조금 덧붙이자면, 시인이 죽은 자의 편에서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이 세계를 살아 있는 자로서 감각하고 견디고 희망을 보려 하지 않고, 차라리 차갑고 어둡고 잠겨 있는 세계 속에서 말하고 싶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흰나비는 이 세상 것 같지가 않다.”(「흰나비」)처럼 화자의 목소리도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데가 있어요. 시인이 이 세계에 일어난 비참함을 대면하고, 자기가 파내려간 죽은 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놓아본 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하재연 예전 시집에는 묵시록적인 이미지들이 엿보였어요. 도시에 일상처럼 드리워진 전쟁과 죽음의 이미지는 신화적이기도 했는데, 이번 시집은 죽음과 동거하는 유령적인 느낌의 화자 이미지가 있었어요. 죽음 자체가 내 몸을 통해서 말하고, 슬픔의 공명통으로서 화자의 목소리가 들리거든요. 그런 지점을 잡아내는 측면이 탁월했어요. 우리를 가로지르는 슬픔의 정서를 이만큼 아름답게 살려낼 수 있을까라는 감탄이 드는 한편, 슬픔에 지나치게 붙들려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감정을 절제하는 고전적 태도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듯이 느낌을 자유자재로 풀어내죠. 그럼에도 센티멘털이 조금 줄었으면 좋겠어요. 슬픔과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쩔 수 없는 탐닉의 태도 같은 것이 드러나게 되면, 읽는 이로서는 일부 시편들의 높낮이가 동일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박소란 시집을 읽으면 읽을수록 강하게 이끌렸습니다. 그 속에 알알이 맺힌 아름다움 때문에요. 그러나 지적하신 대로, 지나치게 유미주의적 경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도 함께였죠. 그간 시인이 지켜온 현실과 일상에 대한 실물감을 잃지 않는 속에서 이같은 아름다움에의 고투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늘 6명의 작가와 그들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늘 그렇듯 어렵고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여기 모인 한권 한권이 모두 귀중하게 읽혀야 할 책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어요. 여러모로 유의미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2017.7.21.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