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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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곽재구 郭在九

1954년 광주 출생.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이 있음. timeroad99@hanmail.net

 
 
 

와온(臥溫) 가는 길

 

 

보라색의 눈물을 뒤집어쓴 한그루 꽃나무*가 햇살에 드러난 투명한 몸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궁항이라는 이름을 지닌 바닷가 마을의 언덕에는 한뙈기의 홍화꽃밭**이 있다

눈먼 늙은 쪽물쟁이가 우두커니 서 있던 갯길을 따라 걸어가면 비단으로 가리워진 호수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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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구슬나무라고 불리며 초여름에 보라색의 꽃이 온 나무에 핀다. 꽃이 진 뒤 작은 도토리 같은 열매가 앵두 열 듯 열리는데 맛은 없다. 겨울이 되면 잎 진 가지에 황갈색의 열매가 남는다. 눈이 온 산야를 덮게 되면 먹을 것이 없어진 산새가 비로소 이 나무를 찾아와 열매를 먹는다. 남녘 산새들의 마지막 비상식량이 바로 멀구슬나무 열매인 것이다. 깊은 겨울 누군가를 끝내 기다려 식량이 되는 이 나무의 이미지는 사랑할 만한 것이다.

**잇꽃이라고도 불리며 삼베나 비단에 분홍빛 염색을 할 때 사용한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할 때의 연분홍의 근원이 바로 이 꽃이다. 시인 김지하는 천연 염색으로 빚어진 한국의 빛들을 꿈결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홍화로 염색된 이 분홍빛이야말로 꿈결 중의 꿈결이라 할 것이다.

 

 

백야도에서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뜨거운 일

 

실비 속으로

연안여객선이 뱃고동과 함께 들어오고

 

붉은 꽃망울 속에서

주막집 아낙이

방금 빚은 따뜻한 손두부를 내오네

 

낭도섬에서 빚었다는 막걸리맛은 융숭해라

파김치에 두부를 말아 한입 넘기는 동안

 

붉은 꽃망울 안에서

아낙의 남정네가

대꼬챙이에

생선의 배를 나란히 꿰는 걸 보네

 

운명의 과녁을 뚫고 지나가는 불화살

 

늙고 못생긴 후박나무 도마 위에 놓인

검은 무쇠칼이 무심하게 수평선을 바라보는 동안

턱수염 희끗희끗한 사내가

추녀 아래 생선꿰미를 내걸고 있네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뜨거운 일

 

물새 깃털 날리는 작은 여객선터미널에서

계요등꽃 핀 섬과 섬으로 연안여객선의 노래는 흐르고

 

대꼬챙이에 일렬로 꿰인 바다

핏기 말라붙은 어족의 눈망울 속

초승달이 하얗게 걸어들어가는 것을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