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베를린이여 안녕』, 창비 2015
오해가 없는 끔찍한 세상
최정화 崔正和
소설가 daysmare@hanmail.net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Mr Norris Changes Trains, 1935)와 『베를린이여 안녕』(Goodbye to Berlin, 1939)은 우리나라에서는 『싱글맨』이라는 작품으로 잘 알려진 영국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가 베를린이라는 이국의 도시에 머물렀던 경험을 토대로 쓴 두권의 소설이다. 이셔우드가 애초에 기획했던 것은 ‘없어진 사람들’이라는 소설이었는데 그는 발자끄(H. de Balzac)처럼 하나의 플롯구조를 고안해낼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이 두권의 소설은 ‘없어진 사람들’의 실패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자기가 본 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녹여내지 못하고 장편과 중단편선으로 나누어 썼다. 이 두권의 작품을 ‘베를린 이야기’라는 시리즈로 묶었던 것은 우연한 결과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실패의 이유가 그가 이 소설을 쓴 방식과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셔우드가 자기 자신인 채로 살지 못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나의 생각일 뿐이다.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소통은 언제나 오해를 낳지만, 그 오해가 아니라면 세상은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베를린 이야기’ 1권인 『노리스씨 기차를 갈아타다』의 서두는 화자인 윌리엄 브래드쇼가 본 아서 노리스의 눈에 대한 서술로 시작한다. (윌리엄 브래드쇼는 이셔우드의 중간 이름이다.) 윌리엄은 상대의 눈을 보고 “그는 내가 자기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25면)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에는 꽤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눈을 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있다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전지적 시점이 아닌데도 초반부에는 종종 이런 식으로,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화자인 ‘나’가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이 도를 넘어선 것이 아닌지, 지겨운 사람 혹은 사기꾼에게 자신을 갖다바친 것이 아닌지 생각하는 중이었다”(27면)라는 식으로 1인칭 시점에서는 불가능한 형태의 진술이 나타난다.
‘베를린 이야기’ 2권 『베를린이여 안녕』 중 「베를린 일기: 1930년 가을」에서도 연관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길거리에 대한 소묘로 시작하는 첫 문단에 이어 화자는 곧장 “나는 카메라다”(12면)라고 말한다. 내가 거리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거리가 내 방 창문에서 ‘보이는’ 것이다. 화자는 ‘보지’ 못하는 자이고,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자이며 그것을 고정해두기 원한다. 그가 세상을 향해서 열어둔 유일한 신체기관이자 그가 그 자신일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은 눈이다. 카메라로서의 눈이 열려 있고, 그 눈을 통해서 작가는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기록한다. 그 눈이 묘사하는 정경은 건조하다기보다 정서적이어서, 깊숙하다, 근엄하다, 거대하다, 묵직하다, 깊다, 공허하다, 음탕하다, 은밀하다, 구슬프다, 날카롭다, 절박하다 등의 형용사에 상당부분을 의지한다. 나는 슬쩍 그 형용사들이 거리가 아닌 화자의 눈, 시선에 대한 묘사가 아닐까 뒤집어 생각해보았다.
위의 두가지 지점에는 어떤 혼동이 있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의 혼동, 눈과 그 눈이 바라본 세계 사이에서 작동하는 혼동이다. 이셔우드는 베를린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고, 존재하기 위한 최후의 유일한 신체로 ‘눈’을 선택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그 눈을 통해서 타인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는 거의 타인에 가까워지고 만다(“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좌우로 돌려가며 혹시 형사들이 있나 살피고 있었다. 아서의 경찰 강박증은 아주 전염성이 강했다”, 1권 111면). 그는 없어지지 않기 위해 바라보지만(“우리는 (…) 독일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 나는 없어진 사람이야”, 2권 82면), 그런 존재방식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한다.
그는 타인을 매개 없이 거의 직접 만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그는 내가 진담으로 말하지 않았음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2권 37면) 이 문장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었는데, 가장 이셔우드다운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그가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이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작가들이라면 타인의 말 자체를 따오거나 표정이나 행동을 묘사했겠지만 이셔우드가 소통하는 방식은 ‘표시’에 가깝다. 전달하려고 하는 바가 어긋나는 게 불가능하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심지어 그는 타인이 바라본 세상까지도 본다(“환멸을 느낀 보비의 눈으로 보려고 하면서”, 2권 27면). 그러므로 그가 본 세상에는 오해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대신 현실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이 집 안의 장면에 내 자리는 없어 보였고”, 1권 103면). 그래서 그는 소설 속에 자신의 이름을 넣었다. 결국 이 소설은 오해가 작동하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현실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소설 속에 자신의 이름을 넣는 방식으로 존재하려 했던 하나의 시도가 아닐까.
나는 최근 심리적인 이유로 문자 텍스트를 읽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실은 이 소설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몇개의 문장만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읽은’ 것이 아니라 그 문장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내가 정확하게 겪었던 문장들이었다. 나는 그 문장들을 조합해서 ‘베를린 이야기’라는 책 대신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라는 작가를 만났다.
그의 눈이 몹시 궁금해져서 사진을 찾아본다. 그의 눈은 그가 본 세상과 달리 깊숙하지도 근엄하지도 거대하지도 않다. 윌리엄이 본 아서의 눈과 같이, 그것은 그저 신체의 일부일 뿐이다. 얄팍하고 가볍고 그리고 아주 조그마한 흑색 동그라미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