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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민주주의와 문학, 그리고 헌법의 안팎
남상욱 南相旭
인천대 일문과 교수. 공저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일본, 상실의 시대를 넘어서』 등이 있음. indimina@gmail.com
1. 광장과 헌법
민주주의의 위기가 일상화되고 있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직접적인 시위는 한국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동시대적으로는 2012년부터 일본의 국회와 총리 관저 주위에서 벌어져온 반원전·반개헌 시위나 2014년 홍콩의 우산혁명이 그러하다. 하지만 규모나 영향력으로 봤을 때 2016년 말에 시작된 한국의 촛불에 비견될 만하다고 말하긴 힘들다. 오히려 촛불은 약 반세기 전인 1960년 일본에서 일어난 안보투쟁을 연상시킨다.
안보투쟁은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갱신을 반대하는 국민적 요청을 무시하고 1960년 5월 19일 키시 노부스께(岸信介) 내각이 경찰대를 국회 안에 배치한 후 신안보조약 통과를 강행하자, 이에 반발한 노동자, 시민, 학생 들이 국회를 둘러싸고 약 한달에 걸쳐 벌인 시위인데, 6월 4일 시위에는 일본 전국 각지에서 참가한 사람의 수가 56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1 이러한 국민적 압력 때문에 당시의 총리인 키시 노부스께가 사임하게 되는데, 이렇게 일본 역사상 최대의 국민이 모여,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한 권력자의 사임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촛불과 유사하다.
물론 안보투쟁은 애초의 저지 대상이었던 미일안전보장조약이 몇가지 사항만이 변동된 채 갱신되었고,2 일본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은 여전히 강고하게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정치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에 미친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본현대사에 있어 가장 큰 규모의 시위였던 만큼 그 사회적 파급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일본문학에도 적지 않은 변동이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그 변동은 일본의 정치적 이슈나 시민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젊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젊은 일본의 모임’(若い日本の會)을 만들어 이에 참여한 반면, 그동안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일본공산당 계열 문학인들의 권위가 실추되었으며,3 그때까지는 뚜렷한 정치적 성향을 보이지 않았던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 후꾸다 츠네아리(福田恒存), 에또오 준(江藤淳) 같은 작가들이 안보투쟁 이후 보수적 성향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되었다는 식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동의 이면에 ‘헌법’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가치판단이 맞물려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박원순(朴元淳) 서울시장이 말한 것처럼 한국인들에게 촛불이 “문자로만 있던 헌법 제1조, 장식물에 불과하던 헌법 제1조가 그야말로 광장에 살아나온 것”을 목도한 경험이었던 것처럼,4 1960년 안보투쟁 역시 그동안 진지하게 질문되지 않았던 일본국헌법의 가치가 문학장에서 화두가 되는 계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안보투쟁 이전에 헌법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가 지적한 대로,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 직후부터 일본의 정치권에서는 대미 종속의 해소와 비무장 중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재군비와 개헌을 통해 미국과 대등한 파트너가 될 것인가 하는 방향성을 둔 논의가 이미 진행되어왔는데, 1955년 집권한 자민당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자위대는 헌법이 금하는 ‘전력’이 아니다”라는 이른바 ‘자위대합헌론’을 들고 나왔고, 이를 기반으로 한 자위대의 군비강화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많은 일본인들 또한 일본국헌법의 틀에서 자위대의 유지를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5 하지만 안보투쟁 이후, 자위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나는 전쟁 방기라는 모럴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일본인의 일반적인 모럴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일본에 자위대라는 군대가 있고, 그것은 갓난아이의 눈에도 보이고 노인의 눈에도 보인다. 그것은 우리들 일본인 모두의 눈에 나타나 퍼레이드를 한다. 그것을 바라보면, 헌법에 전쟁 방기라는 조항6이 있는 나라의 인간으로서, 누구라도 자신의 모럴이라는 것이 상처받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적인 퇴폐, 혹은 모럴의 파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7
1964년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郎)가 ‘헌법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이른바 ‘헌법-내-인간’으로 규정하게 되었을까.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이 글은 안보투쟁을 거치면서 일본 문학자들이 현재 일본의 헌법을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아베 신조오(安倍晋三)의 개헌 시도에 대한 일본 문학자들의 대응을 예측하게 할 뿐만 아니라, 촛불 이후 한국문학의 미래를 생각하는 데 있어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이다.
2. 헌법의 재발견
안보투쟁 당시 일본 도립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국문학 연구자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는 1960년 5월 21일 학교에 사표를 제출한다. “헌법이 무시당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도쿄도립대학 교수직에 머문다면 취임할 때의 서약을 저버리는 일”이며, “교육자로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될 것임을 그 이유로서 들고 있다.8 이어서 6월 12일, 그는 ‘우리의 헌법감각’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오늘날 우리는 저 5월 19일을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절차를 거쳐 독재자가 태어난다는, 역사상 초유의 사건과 마주했습니다. 아무리 성문헌법이 훌륭해도 단순한 관료의 작문일 뿐입니다. (박수) 지금 헌법을 몸으로 익히려면 옷 갈아입듯이 과거 헌법을 버리고 새 헌법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전통 위에 서서 혹은 전통을 재해석하며 지금의 헌법이 새롭게 자기 몸에 배어들게 해야 하며, 과거 전통의 연속 위에서 헌법감각을 새롭게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헌법과 민주주의의 민족화 내지 주체화 혹은 내면화가 아무래도 중요하며,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지금의 권력 아래에서 우리는 노예가 되는 일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9
마루까와 테쯔시(丸川哲史)가 지적한 바10와 같이, 패전 이후 미국의 지배력이 강화된 일본에서 중국연구자로 살아간 타께우찌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본의 진정한 독립을 통해 중국과의 관계를 재개하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 그는 보수주의 정치인들이 빈번하게 입에 담는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피하고,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이 안보투쟁 이후 위와 같이 바뀐 것이다. 즉 “형식적 민주주의의 절차를 거쳐 독재자가 태어난다는, 역사상 초유의 사건” 앞에서 이른바 민족해방운동을 통해서 외세(미국)를 몰아내는 문제보다 “헌법과 민주주의의 민족화 내지 주체화 혹은 내면화”가 더욱 시급한 과제로 인식된 것이다.
사실 패전으로 인해 군국주의에서 겨우 벗어난 일본의 문학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점령 초기부터 매우 중요한 의제였다. 예컨대 「비 내리는 시나가와역」으로 유명한 사회주의계열의 작가 나까노 시게하루(中野重治)는 1946년에 열린 좌담회에서 점령군에 의해 “주어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배계급 측은 자유롭게 누리게 된 반면, 인민 측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사람이 문학적 표현을 얻어가는 장으로서 ‘민주주의문학’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11 이러한 나까노의 주장에 대해 아라 마사히또(荒正人)나 혼다 슈우고(本多秋五) 같은 『킨다이분가꾸(近代文學)』 동인들은, 이러한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주로 공산당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유될 것을 우려하며 문학이 정치의 시녀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정치와 문학의 분리를 주장하는 한편,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먼저 선취되어야 할 것으로서 근대적 자아를 가진 개인의 확립을 통한 근대성의 성취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렇게 전후 새로운 문학을 정립하는 데 있어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빠르게 시작되었음에도, 점령이 끝나면서 일본 문학장의 키워드는 한편으로는 ‘민족의 독립’,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성’에 밀리게 되었다. 거기에는 일본의 ‘민주주의’가 패전과 이에 따른 연합국의 일본점령에 의해 강제된 이념이라는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문학장에서 타께우찌처럼 ‘민주주의’를 헌법과의 관계 속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된 것은 1960년 안보투쟁 이후가 된다.
사실 오늘날 안보투쟁과 관련해서 당시의 타께우찌가 주목받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헌법의 중요성을 언급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안보투쟁의 방향성을 안보조약 파기(미국으로부터의 독립)보다는 독재타도를 통한 민주주의의 재건으로 잡았다는 점 때문이다. 헌법과, 헌법에 근거한 의회제 민주주의를 옹호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당시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같은 급진적 학생운동 세력만이 아니라, 그들을 옹호한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시미즈 이꾸따로오(淸水幾太郞)도 큰 불만을 표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며칠 후인 6월 15일 국회 진입을 시도하던 전학련과 이를 저지하던 경찰 기동대의 충돌 시 대학생 칸바 미찌꼬(樺美智子)가 사망했을 때, 토오꾜오의 주요 일간지들이 발표한 성명이 바로 “폭력을 배제하고 의회민주주의를 지켜라”였기 때문이다. 의회민주주의를 옹호하자는 주장은 언제나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에 의해서 전용될 위험성이 있다. 그런데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타께우찌는 어째서 갑자기 일본헌법의 준수를 강조하게 된 것일까.
실제로 앞의 강연에서 그는 “헌법과 교육칙어가 한 몸인 저 압박 아래서” “충성이 천황에게 집중되어 있기는 했지만, 사실 그렇게 말고는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자신의 염원을 표출할 길이 없어 저렇듯 뒤틀린 모습”으로 인간성이 형성된 세대의 인간으로서, 전후 일본의 헌법이 “인류 보편의 원리가 강조되어 있어 몹시 좋지”만, “왠지 눈부시다, 내 것이라 부끄럽다는 느낌이 들었”고, “주어진 것”이라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읽어봐도 어딘지 모르게 번역투여서 친숙해지지 않는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 헌법감각을 가지고 있던 그가 “역사 내지 전통을 뼈대 삼아 지금의 헌법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는 없을까” 하고 말하게 된 것은 단순히 국민정서를 무시한 키시 노부스께의 폭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12
헌법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은 당시의 그가 일본의 차별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타께우찌는 1959년 1월 쿄오또(京都)의 부락문제연구소 방문을 계기로 같은 해 12월 동 연구소 주최의 공개강연회에서 ‘기본적 인권과 근대사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차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차별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부락 질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완전한 시민이라 여긴다”라는 일종의 이중의식이 일본의 사상과 문학인들 사이에 만연해 있음을 지적한다.13 일본인들의 이중의식에 대한 타께우찌의 비판적 인식은 루쉰(魯迅)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러니까 차별구조 그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노예가 주인이 된다고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루쉰 사상의 핵심을 통해 일본사회의 차별 문제를 들여다본 것인데, 그는 이것이 나라와 나라 사이 관계에서도 적용된다고 본다. 즉 일본인들의 이중의식이야말로 “미국씨에게는 적수가 못 된다고 꼬리를 내리면서, 아시아 나라들에는 꼬리를 치켜세우고 싸울 태세”14를 하는 일본의 안보전략과 맞닿아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렇게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관심이 그로 하여금 헌법문제연구회에 참가하게 만들고, 당면과제로 일본의 독립보다 일본인 안에서의 민주주의 실현을,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인류 보편’의 원리가 명시되어 있는 헌법의 내면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봤을 때 헌법에 대한 당시 일본인들의 거리감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이러한 거리감은 헌법이 자주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징벌적 조항이 있음을 강조하는 우파 진영만이 아니라,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고자 하는 사회주의혁명의 꿈을 완전히 접지 못했던 사회당과 공산당, 혹은 급진적 좌파 진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안보투쟁을 계기로 한 타께우찌의 헌법에 대한 긍정은 큰 사고의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헌법에 대한 교차하는 시선
하지만 타께우찌는 내면화되어야 할 헌법의 이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마루까와 테쯔시가 지적하듯이 헌법에 대한 타께우찌의 태도는 “제도나 법을 실체로 삼고 거기서 민중의 생활을 연역적으로 규정하는 발상이 아니라, 그 내용을 민중의 노력과 의욕에 채워 완성해가”는 것이었다.15 요컨대 타께우찌에게 헌법의 내면화는 곧 일본헌법에 그 내용을 채워 넣는 행위, 즉 헌법 이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문제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안보투쟁 이후 헌법에 대한 논의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거기에는 타께우찌 같은 기성세대 문학인들만이 아니라, 그동안 헌법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젊은 세대 작가들도 참여하게 된다. 이는 가장 먼저,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으로 표면화된다.
1960년 12월 발표된 후까자와 시찌로오(深澤七郞)의 「풍류몽담(風流夢譚)」과 이듬해 1~2월에 연재된 오오에 켄자부로오의 「세븐틴」이 그러한 움직임을 대표하는데, 전자는 꿈속에서 일본에 혁명이 일어나 황실 사람들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도하는 내용이며, 후자는 1960년 10월 12일 토오꾜오 히비야 공회당에서 연설 중이던 당시 사회당 당수 아사누마 이네지로오(淺沼稻次郎)를 살해하고 한달 후 토오꾜오소년감별소에서 자살한 17세의 우익 소년 야마구찌 오또야(山口二矢)를 모델로 우익 정치소년을 풍자한 내용이다.
두 작품 모두 천황제를 문학적 표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이에 격분한 우익단체의 표적이 되었는데,16 이렇게 천황을 포함한 황가 혹은 천황의 이름하에 정치적 활동을 수행하는 우익들에 대한 문학적 표현은 전전의 대일본제국헌법하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일본국헌법에 의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이후에 곧바로 활성화된 것도 아니었다. 사실 점령기에도 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GHQ/SCAP)는 프레스코드(press code)를 설정해 일본에서 발행되는 모든 출판물에 대한 검열을 시행했는데, 전쟁기간 중 엄격하게 통제해온 ‘풍속’과 관련된 부분(주로 음란물이나 과도한 성적 표현이 있는 출판물)에 대해서는 관대한 정책을 취해서 상대적으로 언론의 자유가 실현된 것처럼 보였을 뿐, 점령기 미군에 의해 행해진 폭력 등에 대해서는 엄격한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 이후 일본문학에서는 점령기간 중 본토에서 행해진 미군의 폭력에 대한 서사가 붐을 이루게 된다. 1958년 「사육」으로 아꾸따가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오오에 켄자부로오 역시, 「인간의 양」이나 「타인의 발」 같은 작품을 통해 미군의 폭력을 그리는 데 주력해왔다. 그렇다면 어째서 오오에는 갑자기 정치적 테러를 일으킨 일본인 우익 소년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천황과 그를 숭배하는 우익 소년을 조롱함으로써 표현의 자유의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서였을까.17
오오에는 몇년 후 1964년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전후세대와 헌법’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 「세븐틴」의 주인공은 그의 자유롭고 불안한 내부에 존재하는 국민주권보다도, 훨씬 절대적이고 확실하게 느껴지는 주권을 외부에서 구하고, 마침내 그 뜻에 따라 죽은 것이다. 이로써 그는 약간의 실익도 얻지 않고 자살했으므로, 그 역시 자신의 기본적인 모럴 감각에서 행동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주권이라는 모럴 속에서 사는 전후세대와, 죽음을 내걸고라도 자신의 내부 주권을 거부하고 외부의 권위에 몰입하려고 한 전후세대 사이의 틈이 어째서 벌어졌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하나의 날카로운 공포와 조우하지 않을 수 없다.18
여기서 오오에는 사춘기의 격동 속에 있는 17세 소년에게 주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매우 불확실한 것인 반면, TV 화면을 통해 비치는 천황과 황태자가 훨씬 절대적이고 확실한 주권자처럼 보일 수 있음을 일단 인정한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안보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회당 당수를 살해하는 테러를 가하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행위에 오오에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행위가 천황제밖에는 몰랐던 자신의 윗세대가 아닌, 아랫세대의 소년에 의해 행해졌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소년의 행위의 의미를 되묻도록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즉 그는 소설 쓰기를 통해서 소년의 ‘정치적’ 행위를 되묻고 이를 “자신의 내부 주권을 거부하고 외부의 권위에 몰입”하는 모습으로 의미화함으로써, 반대로 오오에 자신의 문학적 행위의 의미가 이미 자기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주권, 혹은 주권이라는 권위를 발견하는 데 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오오에는 이러한 주권의식 형성이 일본의 역사적 변동에 따른 것으로 설명한다. 전전의 국민학교 시절 수신(修身) 시간을 통해 스스로를 유일한 주권자인 천황의 통치를 받는 신민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패전 직후 수신 시간을 대체한 “새로운 헌법 시간”에서 “상하 2권의 『민주주의』라는 교과서”를 통해 “‘재민주권(在民主權)’이라는 사상”을 알게 되었고, 이것은 ‘전쟁 방기’와 함께 “자신의 일상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모럴”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요컨대 앞선 타께우찌와는 달리, 오오에는 전후의 새로운 헌법 교육을 통해서 일본국헌법을 이미 내면화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타께우찌가 말한 ‘헌법의 내면화’를 앞의 글에서 오오에가 “주권을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하려는 태도”로서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역시 안보투쟁과 이에 대한 직접적인 반발의 한 형태였던 아사누마 암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안보투쟁 이전 오오에 작품 속의 일본인들은, 예컨대 버스 안에서 일본인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미군 병사들과 이에 침묵하는 일본인 남성들을 그린 「인간의 양」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군의 폭력 앞에서 대항할 목소리를 빼앗긴 양과 같은 짐승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일본국헌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미군이라는 주권자 앞에서 일본인들은 한낱 짐승에 지나지 않다는 인식을 투영한다. 하지만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 안보투쟁 이후 오오에 작품에서는 더이상 주권이 미군에만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히로시마나 오끼나와처럼 국가에 의해 시민들의 주권이 제약을 받고 있는 지역에서도 스스로 삶의 권위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주시하고, 그 처절한 노력을 르뽀의 형식으로 기록한다.
물론 동세대 문학자들이 모두 오오에와 같은 방식으로 일본국헌법을 긍정적으로 보고 자신의 이념으로 내면화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오오에와 함께 ‘젊은 일본의 모임’의 일원으로 안보투쟁에 참여했던 문학평론가 에또오 준은 안보투쟁이 끝난 이후 「‘전후’ 지식인의 파산」이라는 글에서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로 대표되는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이 “8월 15일을 절대화”하고, “헌법에서 ‘사물의 본성’을 찾는” 태도를, 패전으로 상처받은 ‘자긍심’을 봉합하기 위해 패자라는 현실을 망각하고 새로운 규범을 찾는 일종의 “감성의 합리화”라며 비판한다.19 그는 안보투쟁 이후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안보투쟁’의 경위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일본 국내에서 이 두개의 힘이 격돌했다는 사실이며, 거기서 빠져나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냉혹한 현실이다.20
여기서 “두개의 힘”은 각각 ‘너무나도 친미적’인 보수당과 ‘너무나도 친소련·친중국적’인 공산당으로, 에또오는 이러한 외부적 힘 앞에 일본국헌법은 거의 무력한 것이 일본의 현실이라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안보투쟁에도 불구하고 1960년 6월 새로 체결된 신미일안보조약하에서도 미국의 군사기지가 오끼나와에 계속 존재하게 된다.
이렇게 인식하는 에또오의 문학적 행위는 일본국헌법을 지키기보다는 그것의 작위성을 밝히는 쪽으로 전개된다. 특히 1980년대에는 점령기 일본의 문학자들이 미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자기검열을 수행했는데, 그는 이러한 자기검열이 내면화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는 주장을 피력한다. 일본국헌법의 어두운 일면을 그 성립기에서 집요하게 환기하고자 한 에또오의 문학적 행위는, 일견 헌법의 권위를 부정(혹은 상대화)함으로써 스스로의 주권성을 회복하고자 한 시도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러한 문학적 행위 역시 스스로의 친미적인 행위를 감추려는 알리바이의 일부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에또오로 대표되는 보수파는 일본국헌법을 부정하고 일본의 독립을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미일안보조약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지 않는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고, 이는 오오에 켄자부로오로 대표되는 호헌파에 의한 개헌 저지가 오랫동안 우위를 점하게 된 이유가 된다.
4. 헌법의 경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 헌법이 패전의 결과로 외부에 의해서 기안되고 강제되었다는 점은 상당수 일본인들에게 개헌의 욕망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어왔다. 그것은 비단 전쟁 방지 조약인 헌법 제9조를 바꿔 전쟁을 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보통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아베 신조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3·11대지진 이듬해인 2012년, 아즈마 히로끼(東浩紀)는 자신이 만든 출판사 겐론(ゲンロン)의 기관지 『시소오찌즈(思想地圖)』에 장장 100여면에 걸쳐 「신일본국헌법 겐론 초안」과 그 설명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는데, 서문에서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헌법을 제안한다는 것은 위험한 시도이다. 특히 전후 일본에서는 헌법에 대해 수정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특정 이데올로기의 표현으로 여겨지는 부자연스러운 언론 상황이 계속되어왔다. 본지의 시도는 그러한 상황에서 완전히 떨어진 장소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쓴다 해도 적지 않은 독자는 믿어주지 않겠지만, 천황을 원수로 하고 자위대를 합헌화하는 한편, 전문에서 국가의 개방을 노래하며 재일외국인 참정권의 대폭적인 확대를 인정하는 우리들의 시도가 종래의 혁신 대 보수, 호헌 대 개헌의 대립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21
아즈마와 같은 비교적 젊은 세대의 지식인이 1955년 자민당이 구상했듯이 천황의 지위를 대원수로 규정하고 자위대를 합헌화하는 데 동의한다는 점은 분명 충격적이지만, 현재 참의원과 중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회를 ‘국민원(國民院)’과 ‘주민원(住民院)’으로 나누고 일본에 주민으로 사는 외국인들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제안은 한편으로 신선하다. 하지만 주민원의 선거권은 일본 영토 내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에게 주지만, 국민원의 피선거권은 “법률로 ‘유식자(有識者)’에 맞는 조건을 정하고, 그 조건을 충족하는 자”에게만 한정함으로써 차별의 구조를 낳는 등의 논리적 모순이 있고, 무엇보다 보수와 진보를 함께 섞어놓은 탓에 그의 제안은 양쪽 모두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바로 잊히고 만다. 하지만 이러한 아즈마의 시도는 법이념으로서의 완결성과 실현성의 문제는 제쳐두고서라도, 현재 일본국헌법의 불완전성을 전경화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것은 분명하다.
2014년 화제가 된 『일본은 왜 ‘기지’와 ‘원전’을 멈출 수 없는가』라는 책의 저자 야베 코오지(矢部宏治)는 지금의 헌법으로는 오끼나와의 미군기지 주둔을 저지할 수 없다고 인식한다. 나아가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미군과의 군사협정이 아니라 UN헌장을 중심으로 한 ‘국제법의 원칙’”에 근거해 주권 제한에 동의한 이딸리아 헌법의 전례를 따라 헌법 제9조의 표현도 바꿀 필요가 있으며, “국내에 외국군기지를 두지 않을 것, 즉 미군을 철수시킬 것을 반드시 헌법에 명기해 과거의 미군 관계 밀약을 모두 무효화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22
물론 일본의 지식인들이 모두 개헌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은 『헌법의 무의식』(2016)에서 전후 일본의 정치인들이 헌법 제9조를 바꿀 수 없었던 이유를 오오에 켄자부로오 등의 호헌파에 의한 계몽과 선전운동이 아니라, 프로이트(S. Freud)의 무의식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즉 프로이트는 “인간은 통상 윤리적 요구가 처음에 존재하고, 충동의 단념이 그 결과로서 생겨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최초의 충동단념은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된 것이고, 충동의 단념이 비로소 윤리성을 낳으며, 이것이 양심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어 충동의 단념을 다시 요구한다”고 주장했는데,23 이러한 이론에 근거해 카라따니는 일본인들이 개헌을 기피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전쟁 방기를 의미하는 헌법 제9조를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일본인들의 의식적인 “깊은 반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서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서 강제됨으로써 “집단적 초자아”가 되고, 이것이 개인의 차원에서는 설득이나 선전을 통해서는 변하지 않는 “무의식의 죄악감”의 형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4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상징천황제와 헌법 제9조가 에또오 같은 보수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반드시 외부에서 온 것만은 아니라 그 선행 형태로 토꾸가와(德川)체제에 기원이 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일본국헌법에 대한 이러한 카라따니의 해석은 모순적인데, 이러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헌법의 내면화를 수행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현재 일본의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감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일본정부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꾸시마원전 사고 이후에도 원자력발전소의 가동을 중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2013년에는 특정비밀보호법을, 2014년에는 해석개헌에 의한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 용인을 강행 통과시켰다. 국민의 민의를 수렴하지 못하는 대의제민주주의의 한계가 훨씬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현재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인들은 2012년부터 반원전시위와 개헌반대투쟁을 국회 앞과 총리관저 앞에서 거듭 벌여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아베 정부가 장악한 공중파 뉴스에서 거의 묵살당하고 있다. 이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는 2017년 3월, 2012년 여름 토오꾜오에서 있었던, 안보투쟁 이후 최대 인파인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반원전 항의운동을 영화화한 DVD를 ‘수상관저 앞에서’라는 제목의 책 속에 첨부해 발표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책에 실린 대담에서 그는 시위에 참여하고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국민주권’이라든지 ‘민주주의’를 형식으로서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직관력입니다. ‘주권자’라는 말의 어원은 ‘sovereignty’이니까 ‘지고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고한 것’이 더렵혀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감각이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은 분명 잘못되었다’라고 직관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법안의 설명이 어찌 됐든,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직관하는 힘을 나는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 영화에는 인간이 정말로 ‘이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보는 것으로, ‘이런 것이 “부당한 것에 항의한다”는 것이구나’라고 깨달아주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25
안보투쟁 이후 높은 경제성장을 거듭해온 일본에서는 직접행동으로서 사회운동이나 데모를 강하게 기피하는 풍조가 지속되었는데, 이러한 관행이 2011년 후꾸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바뀌게 된 것이다. 그 시위의 현장에서 오구마는 법의 논리를 운운하기에 앞서 ‘이것은 분명 잘못되었다’고 하는 직관력과 목소리를 통한 이의제기야말로 주권자가 되는 길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부당한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데모라면, 2012년 9월 11일 반원전시위에서 카라따니가 말한 것처럼 “데모에 의해 사회를 바꾸는 일은 확실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데모를 하는 것에 의해 일본사회는 사람이 데모를 하는 사회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은 안보투쟁 이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분명 “데모를 하는 사회”가 되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고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키시 노부스께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오가 정치적 스캔들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 10월 국회를 해산하고 실시한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 임기를 연장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개헌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만들기 위한 프로세스가 착착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야권이 분열해 적은 득표율로도 손쉽게 선거에서 이길 수 있게 된 현재 상황에서, 아베를 반대하는 목소리만이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카드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11월 3일 일본국회의사당 앞에서는 4만명의 시민이 참가한 시위가 열렸다.
5. 직접행동 없는 헌법수호가 가능한가
사실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로 문학과 헌법의 관계가 타케우찌 요시미나 오오에 켄자부로오의 경우처럼 반드시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예컨대 미시마 유끼오는 1970년 일본국헌법을 부정하는 일장 연설을 한 후에 할복해서 죽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시마의 연설조차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에 의해 가능했고,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문학은 헌법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장임과 동시에, 헌법에 적지 않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따라서 헌법질서의 위기가 곧 문학의 위기와 직결된다는 것은, 박근혜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통해서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문학이 반드시 헌법 수호의 의무만 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헌법정신을 수호하고 전파하는 것이 문학의 사명이라면, 문학은 자율성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권이 침해받고 있으며, 나아가 이에 너무나도 무감각해진 오늘날, 누가 굳이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헌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오오에가 『익사(水死)』(2009)에서 T. S. 엘리엇(Eliot)의 「황무지」 중 “These fragments I have shored against my ruins”라는 시구를 통해 에둘러 말했듯이, 헌법의 말들만이 혐오와 증오로 점점 황폐해져가는 현실에서 가까스로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임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실제로 촛불은 우리가 전면적으로 헌법을 소환하고, 이에 국회가 응해서 탄핵소추안을 가결해, 박근혜를 심판에 부쳐 최종적으로 승리한 경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촛불이라는 직접행동이 없었다면 박근혜가 헌법재판소의 최종판결에 의해 탄핵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직접행동이 없더라도 헌법이, 그리고 사법이 과연 우리 사회의 황폐화를 막고 민주주의를 지켜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예컨대 2015년에 김항(金抗)은 “헌법재판소가 아무리 민주화의 산물이며 역사의 정의를 체현하는 제도라 할지라도, 그것이 헌법의 수호자 혹은 절대적 규범이라는 발상에 기초해 있는 한”, 그리고 “사법제도의 권위를 지탱하는 것이 법률지식을 갖춘 재판관”의 인격이라면, “논란이 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서 알 수 있듯이, 사법부가 입법 권한을 가진 선출직 대의원을 직위 해제시”키는 일이 언제 발생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26 그러니까 만약 탄핵심판 당시의 헌법재판관이 이정미가 아니라, 우병우와 김기춘 같은 인물이었다면, 과연 박근혜는 탄핵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촛불은 바로 그러한 제도의 불안감에 근거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불안은 최종 탄핵판결문의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라는 대목에서 크게 밀려오는 안도 속에서도 가시지 않았다. “헌법수호의 이익”에 근거해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법의 운명이라면, 우리의 헌법은 여태껏 누구의 이익을 지켜왔던가. 그날 만일 헌법수호의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결정이 내려졌다면,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2016년부터 수개월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촛불을 들지 않았더라면, 그 행렬에 나, 너, 우리가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의 헌법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을까. 혹은 만약 헌법의 말들이 우리의 이익을 대변해주지 않았을 때, 그때 직접 행동에 나서는 우리를 버티게 할 수 있는 말은 과연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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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熊英二 『<民主>と<愛国>: 戦後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と公共性』, 新曜社 2002, 515면.↩
- 패전 후 미국에 의한 일본 점령기간에 기안되어 발포된 일본국헌법은 제국헌법과는 달리 주권자를 천황이 아니라 국민으로 규정했고, 전쟁 금지를 명문화했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과 동시에 체결된 미일안전보장조약은 미국이 미군의 세계전략에 따라 일본 전토를 기지로서 제공받을 뿐만 아니라 일본 내 치안 유지를 위한 내란진압을 할 수 있도록 했지만, 일본방위의 의무는 빠져 있는 종속적인 조약이었다. 키시는 안보조약 갱신을 추진하면서 미군의 일본방위 의무를 명시하고 내란진압 조항은 삭제했지만, 극동의 평화 및 안전을 위해 일본을 군사기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극동조약’은 그대로 남겼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일본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요인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 패전 후 일본문학의 헤게모니는 공산당 계열의 『신니혼분가꾸(新日本文學)』가 쥐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시민 주도의 안보투쟁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맹렬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세계사의 동향을 결정한 러시아혁명이나 중국혁명에 비하면 일개 일본의 패전 따위 고려할 가치가 없는 매우 작은 일이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안보투쟁의 의미를 축소시킨 하나다 키요떼루(花田清輝)에 대해, 요시모또 타까아끼(吉本隆明)는 “국가권력 밑에서 각 인민의 싸움 동향의 총화야말로 세계사의 동향이라든지 혁명의 인터내셔널리즘보다 중요하다”라고 반발하며, 안보투쟁을 전후 15년의 “의제의 종언”, 즉 인텔리에 의한 계몽주의의 종언으로 총괄했다.↩
- 박원순 「촛불이 바꾼 것과 바꿔야 할 것」,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307면.↩
- 小熊英二, 앞의 책 496면.↩
- 제9조를 지칭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고, 국권이 발동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방기한다. 2.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과 그 외의 무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나라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 大江健三郎 『嚴肅な綱渡り』, 講談社 1991, 194면. 이하 강조 및 주석은 인용자.↩
- 다케우치 요시미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1: 고뇌하는 일본』, 윤여일 옮김, 휴머니스트 2011, 375면.↩
- 같은 책 389면.↩
- 丸川哲史 『竹内好: アジアとの出會い』, 河出ブックス 2010.↩
- 中野重治 「民主主義文學の問題: 中野重治を圍んで」, 『近代文學』 第3號, 1946, 35면.↩
- 다케우치 요시미, 앞의 책 385면.↩
- 예컨대 진보적 성향의 『신니혼분가꾸』에서조차 일본과 조선을 가리켜 “닛조(日朝)”가 아니라 전전(戰前)의 차별어였던 “鮮人”을 연상시키는 “닛센(日鮮)”이라는 말을 사용해 독자로부터 항의받았음을 예로 들고 있다.↩
- 다케우치 요시미, 앞의 책 352면.↩
- 丸川哲史, 앞의 책 190면.↩
- 「풍류몽담」 발표 이후 이에 격분한 우익 소년이 게재지인 『츄우오꼬오론(中央公論)』의 출판사 사장 저택에 침입해 가정부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세븐틴」의 2부인 「정치소년 죽다」에 격분한 우익단체가 역시 게재지 『분가꾸까이(文學界)』의 출판사 분게이슌쥬(文藝春秋)를 협박해 오오에는 일시적으로 일본을 떠나게 된다. 양 출판사 모두 사과문을 게재했고, 「세븐틴」은 「정치소년 죽다」가 빠진 채로 단행본에 수록되게 된다.↩
- 실제로 오오에는 「세븐틴」의 주인공을 우익단체가 ‘열사’로서 숭배하고자 하는 ‘사심’을 버린 숭고한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가족과 학교에서 소외되어 자신의 존재를 자위행위와 암살 흉내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던 지리멸렬한 소년으로 그렸다. 그러한 소년이 강하게 이끌리는 ‘천황’ 역시 이른바 일본의 전통과 문화의 대표자가 아니라, 자신의 관념이 만들어낸 ‘순수천황’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그림으로써 실제 사건의 의미를 축소시키게 된다.↩
- 大江健三郎 『嚴肅な綱渡り』, 講談社 1991, 170면.↩
- 江藤淳 『一九四六年憲法: その拘束』, 文藝春秋 2015, 169면.↩
- 같은 책 184면.↩
- 東浩紀 「新日本國憲法ゲンロン草案」, 『日本2.0: 思想地圖β』 Vol. 3, ゲンロンシャ 2012.7, 105면.↩
- 矢部宏治 『日本はなぜ、「基地」と「原發」を止められないのか』, 集英社 2014, 274면.↩
- 지크문트 프로이트 「마조히즘의 경계적 문제」,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04, 428면.↩
-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17, 31면↩
- 大熊英二 『首相官邸の前で』, 集英社 2017, 25면.↩
- 김항 「예외상태와 현대의 통치」, 강상중 외 『예외: 경계와 일탈에 관한 아홉 개의 사유』, 문학과지성사 2015, 257~5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