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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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림

1947년 경북 문경 출생. 1989년 『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등이 있음. poemsea56@hanmail.net

 

 

 

고장 난 시계 사이로 내려가는 계단 2

 

 

나의 시계가 고장 났습니까 아님 당신의 시계가 고장 났습니까 나의 시계는 지금 세신데 왜 당신은 자꾸 열시라고 합니까 당신은 말합니다 ‘늦었어, 그만 불 끄고 자지’ 그러면 나는 대답하죠 ‘아이 당신두… 한낮인데 자다니요? 난 조금 전에 점심 먹었어요’ 그러면 또 당신은 심드렁하게 말하겠지요 ‘장난치지 말고 잠이나 자요’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야말로 장난치지 말아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잖아요 픽업해서 미술학원에 데려다줘야지요’ ‘아니, 한밤중에 학교라니? 미술학원이라니? 그럼 정말 아직 당신이 세시에 있단 말이오?’ ‘나도 당신이 벌써 밤 열시에 있다는 건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이 벌써 열시에 도착했다면 그 사이 일곱시간은 어디서 무얼 했단 말예요?’ ‘내가 일곱시간 동안 무얼 했냐구? 가만있자… 세시에 사무실에서 연말결산을 끝내고 네시에는 P상사 김부장을 만나고 여섯시에 퇴근을 하고 잠수교를 건너고 혼자 저녁을… 여보 피곤해 죽겠다 제발 잠이나 자자’ ‘무슨 소리예요? 난 네시에 여고 동창 모임이 있어요 그리고 열시에는 다시 학원에 있는 아이를 데려와야 하잖아요?’ ‘무슨 소리야 그럼 당신은 벌써 또 내일 세시에 도착했단 말이오? 그렇다면 당신은 무려 열일곱시간을 어디서 무얼 했단 말이오?’ ‘하긴 뭘 해요 만날 다람쥐 쳇바퀴 돌기지요, 그 사이는 그냥… 있었죠 그냥…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그냥… 당신은 회사에 가고 그냥… 나는 청소를 했죠 당신 집을 닦았죠 당신 세탁기를 돌렸죠 위이이잉 세탁기 속에 지구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죠 세탁기 속에서 처얼썩 철썩 파도 소리가 들렸죠 파도에 아랫도리가 다 젖는 줄도 모르고… 소용돌이 속의 지구가 몸부림치는 소리를 들었죠 그 곁에서 나는 방금 도착한 햇살로 뜨개질을 했죠 한뜸 한뜸 지구의 덮개를 짰죠 나의 시계가 고장 났습니까 당신의 시계가 고장 났습니까 당신은 또 말했죠 ‘출근시간 늦었다 여보 내 넥타이 어디 있지? 양말은? 와이셔츠는?’ 나는 또 대답했죠 ‘여보오 우리 그만 좀 해요 밤 열시라 했잖아요 이 분홍빛 잠옷 좀 보세요 침실에 은은히 흐르는 바흐가 들리지 않으세요? 무드 있는 밤이군요’ ‘이 여자가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출근시간에 잠이라니?’ ‘아니 그럼 당신 또 내일 아침 아홉시에 도착한 거예요? 그럼 어젯밤은 어디서 잤단 말인가요? 지난 열두시간 당신은 또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죠?’ ‘나? 현관문을 밀고 나갔지 지하 차고로 가 희뿌옇게 기다리는 차를 끌고 거리로 나갔지 사장부장사장부장들이 끼어들고 앞지르고 밀어붙이는 길을 요리조리 빠져 회사로 갔지 아니, 여, 여보 이럴 때가 아니야 정말 늦겠네’ 그런데 말입니다 나의 시계가 고장 났습니까 당신의 시계가 고장 났습니까

당신은 또 말합니다 ‘오늘은 종일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낯도 모르는 자들과 엄청난 액수의 사이버머니를 주고받는 날이야 몇놈을 잘 속이고 몇놈을 때려잡느냐 목줄이 달린 날인데 젠장 아침부터 잠옷타령이라니’ ‘아무튼 이 밤중에 당신이 가는 곳이 어디냐구요?’ ‘그 참 밤중이 아니라니까 당신이야말로 매일 어디에 가 있는 거요? 뉴욕? 런던?’ ‘모르겠어요 여긴 그저 밤이에요 거리가 쥐죽은 듯 고요하고 이따금 앰뷸런스 소리가 귀청을 찢어요 봐요 저기, 저 창문에 무언가 어른거리잖아요?’ ‘아, 문단속 잘하라니까!’ ‘여, 여보 무서워 죽겠어요 저 좀 안아주세요’ ‘거기가 어딘지 알아야 안아주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오?’ ‘글쎄요… 여기가 어딜까요? 칠흑에 침대 하나가 둥둥 떠 있어요 사방이 창이에요 캄캄한 것들이 사방에서 들여다보고 있어요… 제발’

‘이크, 캄차카 어디쯤에서 나를 부르는군 내가 오늘 때려잡을 자인지 몰라 이따 얘기하자구’

‘여, 여보 제발 부, 불 좀 켜주세요’

그녀 비틀거리며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선다, 순간 구들장이 소리 없이 열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아래로, 아래로 펼쳐진다. 놀라 발을 헛디딘 그녀 캄캄한 계단을 솜뭉치처럼 굴러 내린다. 방바닥이 소리 없이 닫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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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집에 실렸던 글을 시로 재구성하였음.

 

 

 

발광(發光)

 

 

문경 대야산 물소리에 기대 하룻밤 지나간 적 있지요 낯선 어둠의 알몸 더듬거리며 산중 여인숙에 든 적 있지요 칠흑이 물소리처럼 와서 온갖 색(色)들을 순식간에 지워버리는 장관을 본 적 있지요 하고많은 목숨들의 윤곽이 거짓처럼 지워져도 그 울음만은 지우지 못하는 비밀을 본 적 있지요 소리와 칠흑의 숨 막히는 발광을 보았지요 무언지 반딧불처럼 반짝반짝 빛의 모스부호를 보내고 있었지요 문득 그들도 나처럼 그자의 비밀조직원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어쩌면 나의 슬픔은 내가 다만 그자의 비밀조직원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날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수려한 외모에 우울한 목소리로 한때 세간을 울리던 A라는 가수가 생각났지요 어느날 그는 그저 한컵의 우울을 마시고 망각의 무한발광 속으로 사라졌지요 그믐이었지요 그리매 노래기 하늘다람쥐 노랑머리 독사 여치 귀뚜라미 쓰르라미… 숨 있는 것들은 모두 제 방식으로 발광하고 있었지요 ‘참숯 같은 발광’이라고 내 속에 누군가 중얼거렸지요 그리고 나의 유일한 발광인 불면이 시작되었지요 가만 보니

입구도 출구도 없는 그 여인숙은 너무 오래된 것 같았습니다 부패의 향기가 코를 찔렀습니다 여기저기 새어나온 누수(漏水)가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따라 계류(溪流)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별별 종들의 비밀스런 방들은 눅눅함과 자체발광 외에 그 어떤 배려도 없다고 풍문으로 들은 적 있지만 투숙자들이 그 열악한 환경을 견디는 것은 다만 그자의 비밀조직원이라는 자긍심 때문이기만 할까요? 사실 처음부터 무료였다는, 그 여인숙의 구조를 아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가령, 개미 두더지 구더기 들의 방은 지하에 진드기의 방은 썩은 나무둥치 밑에 이끼벌레들의 방은 이끼들 사이에 있을 거라고 짐작이나 할 뿐이지요 아, 주황발무덤새라는 슬픈 이름을 가진, 새도 닭도 아닌 자는 환한 주황의 맨발이 그의 발광이라더군요 누군가 찌르르 찍찍 울기 시작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온갖 것들이 울었습니다 그들이 밤을 도와 우는 것은 그들의 발광이 다만 울음뿐이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자와의 접선은 왜 발광뿐인가요?

어느 방에서 누군가 목덜미 잡혀 끌려가는지 절박한 신음소리 들렸습니다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교체되고 보충되면서 그 여인숙이 여전히 성업 중인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요? 이 이상한 발광들이 다 끝나면 아침이 오는 건가요? 그러면 또 하루 치의 지령이 단풍 한잎의 형상으로 툭툭 지는 건가요? 몇미터 그 추락의 길조차 허공이 잽싸게 두루마리로 말아 지워버리는 것은 또 무슨 해괴한 장난입니까? 그 자리에 또 처음처럼 아득함만 자체 발광하겠지요? 너무 커서 차라리 들리지 않는 그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립니다 보입니다 몸에 꼭 맞던 방이 헐렁해지고 물소리 천둥 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