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개헌 문제, 어떻게 해야 하나
권김현영 權金炫伶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위원, 성공회대 외래교수. 공저 『한국 남성을 반대한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등이 있음.
백승헌 白承憲
변호사, 바꿈 이사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등을 역임.
이인영 李仁榮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제20대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간사. 저서 『2017 통일걷기, 민통선을 걷다』 『복지국가 정치동맹』(공저) 등이 있음.
정두언 鄭斗彦
전 국회의원. 서울시 정무부시장,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등을 역임. 저서 『잃어버린 대한민국의 시간』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 등이 있음.
백승헌(사회) 『창작과비평』의 대화에 참석해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이번호 주제는 ‘개헌’입니다. 그간의 개헌 작업은 다소 지지부진하고 정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 의미있는 결과, 즉 개헌을 하든가 아니면 최소한 향후 개헌 추진 방식과 일정에 대해 높은 수준의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앞으로 개헌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오늘 대화를 통해 개헌의 필요성과 그 내용, 현실성 등을 두루 짚어보고자 합니다.
개헌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습니다. 국정농단 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만 우리 정치의 뿌리 깊은 퇴영성을 극복하기 위해, 더 근본적으로는 87년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대현실에 걸맞은 개헌이 중요하다는 목소리였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촛불혁명을 완수하려면 개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현행 1987년 헌법은 제헌헌법 이래로 가장 드문 방식, 즉 정변 등의 일방적 방식이 아니라 민주헌법으로 성립되었습니다. 또한 성립 이후 일곱번의 대통령선거를 치러냈고 여야 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 선출된 권력이 헌법을 무력화시키는 취약한 부분도 드러냈지만, 반면에 그것을 헌법체제 안에서 탄핵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했다는 것은 그 나름의 효율성을 증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헌법을 개정한다면 이전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일 텐데, 그 필요성의 핵심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봤으면 합니다.
87년 이후 30년, 개헌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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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김현영 1987년 이후 30년간 한국사회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변화들에 대응하는 방식이 헌법은 그대로 두고 특별법을 제정하거나 관련 위원회를 만드는 등 사안마다 보수하는 식이었습니다. 문재인정부 들어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각종 국민청원이 올라오고 있는데요, 이 가운데 20만명 이상이 동참함으로써 청와대의 답변이 요구되는 의제들을 살펴보면 조두순 출소반대라든지 낙태죄 폐지,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등 대개가 성평등 관련 이슈예요. 지금 정치에 어떤 공백이 있는지, 우리 사회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현실을 반영하는 헌법적 가치라는 게 어떻게 정식화되어야 할지 논의가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인영 87년 당시와 지금은 우리 현실이 많이 다릅니다. 정치권력과 관련된 얘기는 뒤에서 하겠습니다만, 정보사회로 진입하면서 생기는 문제, 기후온난화 등의 환경문제, 4차산업혁명의 도래에서 드러나는 문제 등을 지금의 헌법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국민주권시대가 전면화된 추세에 맞춰 기본권을 더 충분하게 보장해야 한다거나, 직접민주주의에 관한 요소, 즉 헌법과 법률에 관한 시민들의 발안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의 공직자 소환권 같은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월호참사를 비롯해 근래 일어난 여러 재해를 보면서 헌법적 수준에서 생명안전권을 명확히 할 필요성도 대두되었죠. 더불어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양극화가 구조화되어가는 상황에 대응해 경제 분야의 개혁, 경제민주화 방안 등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1987년에 기업이 슬그머니 경제적 시민권을 부여받았는데요, 노동 등 여타 부문에는 경제적 시민권이 부여되지 않은 문제, 즉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불리는 문제에 대해서 헌법상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자치분권을 확대하자는 문제의식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한 시점이 되었거니와, 중앙정부가 탄핵으로 소용돌이에 빠져도 우리가 나라를 유지하는 데 무리 없을 정도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었음을 보여줬기 때문에, 이제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과감하게 지방정부로 이전해가면서 발전해나가야 합니다. 한가지 덧붙이면, 처음 헌법이 만들어진 1948년은 우리 사회가 아직 봉건적이며 전근대적이었던 만큼 그 자체로 낡은 면도 고려해야 합니다. ‘여자’ ‘신체장애자’ ‘연소자’ ‘근로자’ 등 개선의 여지가 많은 표현이 정리될 필요가 있어요. 개헌이 필요한 데는 이렇듯 종합적인 이유가 있는 거죠.
정두언 저는 사실 개헌의 필요성 자체에 이견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헌법 탓을 하는 건, 아마도 우리 정치가 적게는 10년 길게는 20년 넘게 지지부진했기 때문일 겁니다. 탓할 게 정치만도 아니거니와 여러가지를 탓하다보면 집중이 안 되니까 헌법에 초점을 맞추는 것 아닌가 싶어요. 시점은 좀 다르지만 유시민씨가 ‘헌법이 무슨 죄인가’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동감해요. 개헌 이야기를 듣다보면 종종 헌법사항과 입법사항을 혼동하는 경우도 보입니다. 헌법은 말 그대로 기본적인 원칙과 개념을 정리해놓은 것인데, 거기에 입법으로 해결하면 되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넣으려 하면 그게 헌법인지 법률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기본적으로 헌법은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굳이 헌법 자체를 바꿀 필요는 없다는 거죠. 영미 선진국의 경우는 몇백년 된 헌법을 일부 조항만 수정할 뿐 지금까지 유지해가는데도 나라가 잘 굴러가지 않습니까.
백승헌 기존의 헌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으로도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87년헌법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라도 그것의 한계가 있다면 무엇을 지적할 수 있을까요?
정두언 87년헌법뿐 아니라 우리나라 헌법은 특히 권력구조 부문에서 대통령제와 내각제 요소가 혼합되어 있어 그 책임소재가 불명확하고 견제와 균형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유당 집권 시절인 1952년 발췌개헌에서 비롯된 문제인데요, 이를테면 대통령제하에서 총리는 의전 역할을 맡는 존재인데 국회에 와서 정부를 대표해 답변하는 것만 해도 이상한 일입니다. 견제와 균형 면을 보면 법안제안권, 예산편성권, 감사원 기능 등이 모두 정부 권한에 포함되다보니까 대통령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화된 측면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백승헌 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전부터 있어왔지만 그동안은 주로 정치권에서 권력구조 개편 문제를 두고 이야기되었습니다. 2016년에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하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2016~17년 촛불과 탄핵이라는 정치적 격변을 통해 사회 전반에서 더 폭넓은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이인영 촛불 이전과 이후의 개헌 논의는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된 권력이 정치갈등의 만성적 원인이 되고 있으니 그걸 개선하자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금융위기 이후 우리 사회와 헌법이 보인 한계를 계속 지적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대안적 체제의 필요성을 주장해온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더 주목받는 측면입니다.
백승헌 거기에 한가지 덧붙이면 주권자의 문제를 다시 고민하게 된 것도 중요한 지점 아닐까 싶습니다. 권김현영 교수는 촛불의 집단적 체험이 헌법적 질서와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권김현영 경제양극화를 극심히 겪으면서 우리 사회에서 평등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만들어졌어요. 흥미로운 것은 2008년 촛불시위에 나온 시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헌법 제1조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87년체제 성립 당시의 문제의식이 군사독재 타도, 즉 정치적 권리의 확보에 있었다면, 1997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문제가 명백하게 경제적인 차원으로 이동했다고 생각해요.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정부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외치며 실용주의를 내걸었죠.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고 시민사회의 운동역량이 극도로 축소되었을 때 2008년의 촛불이 등장합니다. 헌법 제1조를 걸고요. 헌법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드디어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는 점에서 전환적 계기였다고 봅니다. 그래서 2017년의 촛불혁명은 2008년의 촛불시위 없이는 설명될 수 없죠. 2008년의 촛불시위는 권위주의적인 국가에 반대하고, 국민의 알권리에 바탕을 둔 생활주권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국가가 어디까지 권력을 사유화할 수 있는지를 보게 된 것이 이후의 정치적 상황이었죠. 저는 이 상황을 돌파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헌법 제1조, 주권재민의 원리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각성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승헌 반면에 정두언 전 의원은 헌법을 꼭 바꿔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말씀하셨는데요. 2016년부터 우리 사회의 집단적인 요구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지금 상황에 맞도록 헌법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보시는 건가요?
정두언 1987년 6월과 2016~17년 탄핵 국면에 차이가 있다면, 87년에는 직선제 개헌이라는 요구가 분명했던 데 반해 이번에는 개헌이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국정농단, 권력의 사유화가 핵심 이슈였죠. 사실 ‘권력의 사유화’라는 말은 이명박정부 당시에 제가 이상득 의원과 싸우면서 쓴 표현이거든요. 그 말을 다시 한번 설명해드리면,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 다만 그 국민이 권력을 직접 행사할 수 없으니 선거를 통해 대표자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는 순간 권력이 위임된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투쟁해서 얻은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는 권력을 자기가 비즈니스해서 번 돈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어느 정권이든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던 것 같고요. 그런데 탄핵과 촛불혁명을 거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다른 의식을 갖게 된 걸로 보여요. 진정한 의미의 주권재민 개념을 실감하고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의식하게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다만 그렇게 해서 권력을 제대로 운영하면 되는 거지, 그 주권재민의식의 무엇을 얼마나 더 바꾸려고 개헌까지 가나 싶은 거죠.
백승헌 제도가 모든 것을 담지하진 않지만, 제도 자체의 개혁 없이 제도의 운영이나 규범의 해석 그리고 개인의 선의에 기대는 것도 한계가 분명할 텐데, 우리 사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개헌이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정두언 입법개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해요. 예를 들어 선거제도 바꾸고 정당구조 개혁하고 공천제도 손보면 되지 꼭 헌법을 건드려야 하느냐는 거죠. 게다가 현실성도 없어 보이고요.
백승헌 많은 분들이 정치개혁을 위해서 헌법개정만큼 정치관계법 개정도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저도 거기 동의하지만, 본원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헌법과 정치관계법의 동시개혁이 필요하지 않을지요. 게다가 기본권 조항의 손질도 더이상 미루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6월 지방선거와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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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헌 정부와 여당은 작년 대선 당시 올해 6월 지방선거 때 개헌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바 있습니다. 연초에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다시 언급하기도 했지요.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개헌 문제가 점차 뜨겁게 달궈지는 이유입니다. 야권도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고 모호한 부분도 많지만 적어도 개헌의 필요성 자체에는 동의하는 언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1야당을 포함한 상당수는 더 천천히 합의해서 가자는 주장을 하는 듯한데요. 그렇다면 왜 지금 개헌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권에서 지금 이 시기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인영 우선 대선 공약이니 그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석에서 하는 말이 ‘헌법 갖고 장난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대통령이, 공당의 대표들이 헌법을 놓고 한 말을 지키지 않으면 정치의 근간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는, 지금이 모두에게 이해관계가 없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지방선거 이후로는 총선 등 또다른 정치적인 이해관계, 정치공학이 작동할 테니 지금이 적기죠. 물론 국민적인 공감대가 제일 높은 시기이기도 하고요. 여론조사만 보면 지금보다 개헌에 대한 공감도가 높았던 적이 없었을 거예요. 여전히 70퍼센트가 넘습니다. 기술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개헌이 국민투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국민투표라는 게 국민의 50퍼센트가 참여해야 성사되잖아요. 절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방선거 때 같이하는 게 성립요건을 충족하는 데 좋지요. 한번에 1200억원쯤 들어가는 선거-투표를 두번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요.
정두언 대부분의 대선에서 개헌은 흔한 공약사항이었어요.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모든 후보가 공히 시기까지도 약속했기 때문에 더욱 원칙적으로 개헌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보이긴 합니다. 그런데도 야권에서 이제 와 하지 말자고 하려면 사과부터 해야 하는데, 안 하더라고요. 그야말로 정략적이었다는 거죠. 반대하는 이유가 실은 별것도 아니에요. 개헌투표를 같이 하면 지방선거에서 본인들이 대단히 불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인데요. 일단 개헌투표를 하면 찬성이 많겠죠. 현재 지지율이 높은 대통령이 미는 것이니까요. 이들이 그보다 더 우려하는 건 개헌에 한표 던지면서 자연스럽게 1번을 찍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고요. 결국 반대하는 이들에게 명분은 없는 셈입니다.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말도 있는데, 아니 지금까지 얼마나 검토를 많이 했는데요. 다만 아까 여론조사에서 70퍼센트 이상이 개헌에 찬성한다고 하신 데 대해 저는 그 수치를 이렇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은 개헌에 찬성하느냐라는 질문을 ‘개혁’에 찬성하느냐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어요. 실제로 개헌에 대해서는, 글쎄요, 단순하게 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권김현영 개헌에 대한 내용적인 합의는 불분명한 면이 있지만 개헌의 필요성 자체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봅니다. 국민이 원하는 게 개헌이냐 개혁이냐 구별하셨습니다만, 어떻든 변화의 필요성에 폭넓은 공감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시대정신의 변화와도 맞닿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 1960년의 헌법개정을 통해 식민지배자로서의 남은 특권을 스스로 잘라내는 결단을 내린 역사가 있습니다. 1999년에는 선출 공직에 대한 남녀동수를 보장하는 개헌을 이루어낸 결과, 다음과 같은 문구가 프랑스 헌법 1조 2항에 명시되었습니다. “법률은 여성과 남성의 선거와 관련된 직무와 선거에 의한 지위 그리고 직업적·사회적 책임에 대한 동등한 접근을 촉진한다.” 이어 2008년에는 헌법정신의 현대화라는 측면에서 사상, 문화, 언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의 개정이 이루어집니다. 한국도 지금의 현실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헌법을 바꿀 때가 되고도 남았죠. 1987년 이후에 개정된 적이 없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에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개헌을 통해 하나하나의 헌법조항을 손질하면서, 진짜 많이 망가지고 갈라져버린 사회를 지금 손봐야 해요. 함께 살아간다는 공동체 정신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황에서 공동의 가치에 대한 언어를 만든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세상에 대한 인식을 규정하기 때문인데요, 어떤 단어, 어떤 가치에 대해 합의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성숙의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백승헌 지금 개헌이 필요하다는 데에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가 있음에도 정치권에서 이를 실현하기 쉽지 않은 이유도 분명 있겠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장 내용상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시기를 못 박고 급하게 할 게 아니라 합의를 위해 더욱 노력하면서 필요하면 다음으로 넘길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지적도 나오는 상황입니다. 이런 부분을 인정한다면 정치권에 정파에 따라 생길 수 있는 유불리함을 조금은 상쇄해주는 제도적 보완책을 유연하게 마련할 수는 없을지 궁금합니다.
이인영 그런데 아마 야당보다 먼저 문재인 대통령이 ‘지방선거 때 개헌투표 하지 말자’라고 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격렬한 갈등이 생겼을 거예요.
백승헌 지금은 야권이 정부와 여당에 대해 무엇이든 반대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웃음)
이인영 네. 야당 쪽에서 ‘국민들이 잘 모르니 더 토론하자’라는 말도 나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 중에 대선 전에는 조기개헌 하자고까지 했던 분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5000명이 참여하는 원탁토론회를 비롯해 다양한 숙의과정을 가져보자는 저희 쪽 제안을 모두 거부했어요. 심지어는 40억원가량의 예산을 배정해서 개헌 캠페인을 열어 시민들에게 알리려 한 계획도 무산되었고요. 더 토론할 것이 남은 게 아니라 결국 계산만 남은 거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이 적기입니다. 지금을 놓치고 다시 논의하게 되면 훨씬 더 혼란스러울 거라 생각해요. 개헌의 내용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를 두고 지지부진한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정두언 시기는 못을 박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이유는 조금 다르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87년 개헌도 대선이라는 시한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토론하다 날 샜을 거예요. 저의 정치 경험으로도 의견 수렴이라는 게 시한이 없으면 끝이 없거든요. 그런 점에서 저는 어떻든 개헌의 필요성이 당위적으로 주어졌다는 걸 인정한다 했을 때는 지금이 적기라고 봅니다. 적기인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아까 이의원께서 암시한 바 있지만, 지금 여권이고 야권이고 확실한 차기 대선주자가 없잖아요. 이럴 때가 적기입니다. 대권주자가 나타나면 이미 기득권자가 생기는 거거든요. 그러면 개헌이 더 힘들어지죠.
백승헌 이인영 의원께서 국회 개헌특위 간사로 계시니까 지금의 정치권 상황이 어떤지 요약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인영 국회는 지난해 개헌특위에서 논의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방대한 양의 자료를 섭렵했고 지금도 논의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종합적인 내용을 거의 완성할 수 있을 만큼요. 임혁백 교수(고려대)가 개헌을 최소주의 원칙으로 하자고 제안하신 것을 들었는데, 최대주의까지도 가볼 수 있을 정도의 근거가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국민들과 많은 시간을 들여 토론했느냐 하시면, 야당과의 문제 등으로 인해 그러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요. 그 문제를 완벽히 풀기도 쉽지 않고요. 지금 야당이 우보전술(牛步戰術) 쓰는 게 아니겠습니까. 합법적인 태업이라 볼 수 있을 만큼요. 그럼에도 어쨌든 정부 형태 관련해서 토론을 해왔으니 2월 말쯤까지는 기본권 영역까지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 1년간의 성과가 방대하게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접목해서요. 대통령은 작년 연말까지는 사실상 국회의 목소리를 존중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올해 1월이 지났음에도 개헌 논의에 별 진전이 없는 것을 보고 스스로 공약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많은 분들이 시간에 대한 걱정을 하시는데 물리적으로는 가능한 상황입니다. 지금 2월 초순이 지났는데, 현행 헌법상 헌법개정에는 90일이 소요됩니다. 지방선거 90일 전이라고 하면 3월 15일에는 발의해야 하는 셈이죠. 정치적 합의만 있다면 이 소요시간을 50~60일로 단축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대략 4월 20일까지는 시간이 있는 거고, 두달은 쓸 수 있는 셈입니다. 그 두달의 시간은 87년에 개헌하기로 하면서 합의까지 간 시간과 거의 동일해요. 결국 하고자 하는 의지에 달렸다고 봅니다.
기본권, 무엇을 얼마나 담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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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헌 이제는 각론으로 들어가볼까 합니다. 헌법상 기본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국회 개헌특위 안에서 많이 논의했고 대부분 합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반면 그것은 유보된 동의이지,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 그 내용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도 들려오고요. 기본권의 헌법개정에 대해 국민들이 어려워하는 이유가 필요한 내용들이 그저 나열되는 정도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을 바꾸면 좋을지 대표적인 것을 콕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권김현영 현행 헌법의 문구를 보면 자손, 전통문화, 동포애, 모성적 가치 등 낡은 개념이 많아요. 그러다보니 권리 보장이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는데 가령 모성적 가치만 해도 이를 임신, 출산, 양육과 관련된 권리로 바꿔야 합니다. 변화한 현실에 맞게끔요. 성평등 가치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가족을 중심으로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부터가 기이한데요. 권리란 개인의 존엄을 기반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가족이라는 말이 그것을 흩트려놓고 있는 현실입니다.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 지점에서 가족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앞뒤를 조정해야만 지금의 ‘차별’ 문제가 정리될 수 있을 거예요. 다른 한편으로, 2000년대 초반에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계 인사들을 만나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라고 한 말을 많은 분들이 오래 기억하더라고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민주주의를 실제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권력구조를 바꾼다고 해도 시민들은 재벌의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는 문제, 그리고 그들이 전혀 견제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많이 의식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노동권이 헌법적 가치로서 분명히 명시되어야 이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백승헌 그런데 앞선 말씀을 떠올리면 정두언 전 의원께서는 성평등이나 경제 부문의 문제들도 굳이 개헌이 아닌 법률 개정으로도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고 하실 것 같은데요.
정두언 그렇습니다. 우리 헌법이 기본원칙을 정한 거잖아요. 기타 조항도 있고요.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제37조 1항)라는 식으로 헌법은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열려 있거든요. 시대변화를 법에 반영하는 것 자체는 동의합니다. 다만 그 절차와 방법은 다양하다는 거죠. 헌법으로만 수렴하면 백가쟁명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게 난장이 되어버리면 국가적 업무를 처리하는 데서 어려움이 생기는 거죠.
백승헌 그런 점에서 개헌이 가능하려면 합의된 수준이 높은 부분만이라도 먼저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의원께서는 지금 현실에서 기본권에 있어 이 정도는 반영이 가능하다라고 할 만한 범주를 어디까지로 보고 계신가요?
이인영 일단 생명권과 안전권입니다. 생명권 안에서 사형제도, 낙태, 배아줄기세포 이용 문제 등의 세부 사안은 좀더 검토·논의가 필요하겠습니다만, 큰 틀에서 4·16세월호참사 이후 생명안전권을 강화하자는 문제의식에 비추어보면 최소한 안전권에 대해선 헌법에 포함하는 데 별 이견이 없다고 봅니다. 정보에 대한 권리도 꼽을 수 있습니다. 알권리를 넘어 정보의 자기결정권, 정보문화향유권, 정보격차 해소 등의 문제를 헌법에 포함하자는 취지로 어느 정도는 공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평등도요. 남녀차별 관련 조항을 특별히 강화해서 직장 안에서나 사회적 진출·공직 진출 시 여성이 받는 차별, 양육 면에서의 일방적인 책임전가 등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과 연관이 있지요. 환경문제에도 대응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렇듯 실제로 기본권 신장과 관련해서는 여야 간 이견이 있는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백승헌 기본권에 관해 논의되고 있는 내용을 범주화하면 세가지 정도인 것 같습니다. 첫째는 국제적 규범 수준으로 높일 부분인데, 대표적으로 노동권, 양성평등 같은 영역입니다. 87년 당시에는 우리의 인권상황이라는 것이 국제규범에 비추어 열악했고 선진국을 좇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개선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였죠.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국제 기준에 맞출 때가 되었다는 거고요. 둘째로는 새로 창출되는 권리 규범입니다. 개헌한 지 30년이 지나니 그동안 법률적으로는 이미 반영된 부분도 헌법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게 있어요. 예컨대 정보기본권, 환경권, 생명권, 동물권 등입니다. 셋째로, 아까 낡았다고 표현들 하신 부분인데,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당대의 문화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서 여전히 전근대적으로 남아 있는 요소를 이제는 단순히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조금이나마 주권자 친화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인영 예를 들어 우리 문화와 관련해서도 현행 헌법에는 전통문화를 계승하자고 쓰여 있습니다. 지금 중시되는 다문화사회의 가치를 수용할 규범적인 근거는 없고요. 이런 걸 보완하는 것은 매우 상식적이어서 분쟁의 소지가 적지요. 그에 반해 ‘근로자’를 ‘노동자’로 바꾸는 문제는 간단해 보이지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고요.
백승헌 시간의 제약으로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문제라든지 논의할 부분이 많습니다.
권김현영 헌법에서 기본권 조항을 정비할 때 여러 부분에서 정쟁의 소지가 적지 않을 거예요. 사형제도나 낙태 같은 사안도 물론 논쟁적이지만, ‘남녀평등’을 ‘성평등’으로 할 것이냐 ‘양성평등’으로 할 것이냐처럼 이미 매우 이데올로기화된 문제들이 있습니다. 동성결혼 문제만 해도 이것을 허용하느냐 마느냐의 수준으로 가기는커녕 미국에 있었던 결혼보호법(DOMA, 1996년 미국 연방정부가 제정한 법안으로, 부부의 권리와 복지를 보장하면서 그 대상을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규정. 2013년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 판결을 받음)을 재현하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견이 없는 듯 보이는 문제도 사람들이 지금 굳이 입을 열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 이러이러한 조항이 헌법에 반영된다고 하면 극심한 갈등이 벌어질 영역이 꽤 있을 겁니다. 하지만 논쟁이 제대로 되기만 하면 사회는 정말 바뀝니다. 예를 들어 1999년에 프랑스에서 앞서 말씀드린 ‘남녀동수’를 헌법에 반영한다고 했을 때 사회적으로 엄청난 논쟁이 있었는데요. 논쟁 끝에 그것이 헌법에 반영되었고, 이후에 프랑스는 추상적 개인이 아니라 실질적 개인의 구체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죠.
이인영 사회적으로 공론화될 때 폭발력을 가진 이슈들은 물론 있지요. 그러나 그런 문제들이 합의되지 않았으니 나머지도 안 될 거라고 말할 순 없다는 겁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이 풀려가고 있고요.
정두언 87년체제 이전에는 헌법과 실제 현실 간의 괴리가 컸잖아요. 그런데 87년체제에 들어서면서 기본권은 그 괴리가 매우 좁혀졌어요. 새로운 시대 조류에 맞지 않는 몇가지가 아직 남아 있긴 합니다만. 저는 세세한 용어 문제를 넘어서 국가주의·집단주의 대 개인주의라는 틀로 기본권을 바라보면 오히려 더 많은 문제가 발견될 수 있다고 봐요. 어찌 보면 민족을 앞세우고 개인은 그에 종속된다는 관념을 여야 공히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그런 차원에서 기본권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인영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헌법에서 부분적으로 ‘국민’을 ‘사람’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습니다. 대략 자유권을 중심으로 한 부분에선 그런 변화를 수용하고, 사회권을 내세울 때는 ‘국민’이라는 표현을 유지하자는 이야기지요. 개헌특위에도 그 논의가 들어와서 동의가 꽤 있고요.
권력구조와 정치개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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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헌 이제 권력구조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보겠습니다. 실제 현실정치에서 개헌의 가부는 이에 대한 합의가 가능한지에 달려 있다고 많은 분들이 보고 있는데요, 여야 정치권이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는 것 같아요. 여당은 대통령제의 골격을 유지하고 중임제를 도입하자는 것이 당론인가요?
이인영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분권과 협치의 방향으로 협상한다’가 당론입니다. 대통령제를 전제로 하는 데 야당이 동의하고 분권과 협치에 접점이 있다면 타결되는 것이고 대통령제라는 근간을 무너뜨리면 합의 못하는 것이고,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제도 다양한 방식이 있잖아요. 정·부통령제가 있고, 국무총리를 두되 그 권한을 어디까지 줄 것인지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죠. 만약 정·부통령제냐 국무총리제냐 선택하라고 하면 정·부통령제 쪽도 꽤 나올 것 같습니다. 한가지 덧붙이면 지금 저희 당이 대통령 4년중임제를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현행 5년단임제는 87년 이전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었던 대통령의 권한을 그대로 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건 어찌 보면 유신헌법이나 ‘전두환헌법’과 맞닿는 면이 있는 겁니다. 중임제로 가자는 건 그 문제를 풀겠다는 의미예요. 1인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희가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한다고 했을 때 세가지 측면을 강조하는데, 하나가 중임제고, 둘째는 대통령 권한을 의회와 지방정부에 분명히 나눈다는 것, 셋째는 삼권분립에 근거해서 서로 민주적으로 견제와 균형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4년중임제를 이야기하더라도 지금 같은 시스템이 아니라 대통령 권한을 분산시키는 방향이라는 점은 개헌특위를 시작할 때부터 밝힌 바로, 이 점은 여야 간에 이해하면서 출발한 거거든요. 그러니 4년중임제가 임기만 8년으로 늘리는 셈이니 지금의 5년단임제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다면 선동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백승헌 이에 대해 정두언 전 의원께서 주요 야당의 입장을 대신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두언 저는 대신하고 싶진 않지만,(웃음) 논리야 어쨌든 현실적인 면에서 야당의 의석수가 100석 아래로 줄어들지 않는 한 개헌은 불가능하다고 봐요. 그와 관련해 제가 한가지 논의하고 싶은 것은, 헌법이 있고 법률이 있지만 사실 어떤 경우에는 정부고시가 헌법보다 더 고치기 힘들고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거든요. 지금 정부 형태가 논의되는 이유도 대통령에게 권한이 너무 집중되었다, 제왕적 대통령제다, 이래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된 이유는 정부 형태 탓이라기보다도 여당이 국회에서 대통령의 거수기 역할을 하기 때문이에요. 총선 공천이 아래로부터 올라오지 않고 위에서부터 내려오니까 국회는 그저 거수기 역할밖에 못하고 대통령이 제왕적으로 될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 정당제도를 손봐야 대통령제든 내각제든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고 봅니다.
권김현영 이번에 개헌특위 논의를 보면서 놀랐어요. 자문위원단들이 방대한 내용을 가지고 많은 논의를 했잖아요. 그렇게 축적된 논의 자체가 사회적인 자산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헌법개정의 중요한 정신은 새로운 헌법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논의하고 합의하는 과정 자체에 있다고도 보는데요, 이 사회적 자산을 가지고 계속해서 책임질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개헌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기력함을 느끼기보다는 이 논의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시각을 옮겨가면 좋을 것 같아요.
백승헌 어쨌든 바로 권력구조 문제 때문에, 다른 모든 게 합의되더라도 결국 개헌은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권력구조를 둘러싸고 이견이 대립하는 건 지금만이 아니라 언제 개헌을 추진하더라도 똑같이 발생할 문제인데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조율할지 지혜를 모아볼 때인 것 같습니다. 일단 좀 좁혀서 얘기해볼까요? 이번 권력구조 개편 논의에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 두가지인데, 하나는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어디까지 도입할 것인지이고, 또 하나는 정치개혁이 헌법개정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입니다.
권김현영 일단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더불어민주당이 헌법개정 논의를 열심히 이끌어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선거구제 개편 같은 사항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비례성 강화나 선거구제 개편 등은 선출직 대표가 민의를 제대로 대표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현재 헌법개정의 핵심 정신인, 법치에 기반한 더 많은 민주주의와 분권을 가능하게 할 겁니다. 그러려면 일단 정당 내에서부터 의지를 보이는 것도 중요할 텐데요. 현재의 기초의원 2인 선거구제 같은 경우에는 지방선거에만 한정해도 양당제 상황에서는 무투표 당선이라는 해악을 낳을 정도로 문제입니다. 소수정당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승자독식을 통해 사표가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이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인영 소선거구제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바이고 세계적인 추세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선거구제, 즉 지역구가 아니라 비례대표의 비율을 얼마만큼 키우느냐죠. 비례대표 수를 늘리려면 선거구제 의석을 줄여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고민할 부분이 있습니다. 인구 수를 기준으로 선거구를 확정하니까 그러면 지역이 통폐합돼버려요. 지금 5개 시군에서 국회의원 한명 뽑는 곳이 있는데 이게 예닐곱개까지 확대된다면 지역의 대표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 때문에 상하원 양원제 도입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요. 반대로 현행 지역구 의석수를 그대로 둔 채 비례대표 의원수를 늘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국민여론의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례대표를 늘려야 할 필요성에 공감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크다고 봅니다.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의석수에 대해 말하면 국민들이 거부감을 느끼니 시민사회가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시민들을 설득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비례대표 구성을 어떻게 할지의 문제는, 지역구와 비례대표가 각각 1대1이면 좋은데 당장 어려우니 우선은 2대1로 시작하면서 연동형으로 해보자는 겁니다. 비례대표의 수를 늘리고 가급적 연동형으로 두어서 국민들이 지지하는 만큼 정당에 의석이 할당되는 방식이 정의롭다는 게 분명한 저희의 입장입니다. 다만 헌법에는 나름의 체계가 있으니까 그것을 헌법에 명시하자면 갑론을박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헌법에는 ‘선거제도는 비례성의 원칙을 지향한다’ 정도로 두고 그 정신을 바탕으로 선거제도는 명확하게 바꾸는 방향이라고 하겠습니다.
정두언 비례대표 공천을 지금의 정의당처럼 운영한다면야 늘려도 좋죠. 현재의 여당이나 다른 야당처럼 하면 늘려선 안 돼요. 비례대표 순서를 누가 정하는지는 귀신도 모르거든요. 과거 유정회(유신정우회)랑 똑같은 거죠.
권김현영 그거야말로 각 정당이 어떻게 공천의 투명성을 확보하느냐의 문제죠. 시민사회의 몫이 아니라 정당의 내부개혁이 얼마나 잘 되느냐의 문제 아닐까요.
이인영 이번 개헌을 통해, 헌법의 정당 조항에서 정당설립의 자유를 좀더 강화하고 정당운영 면에서 민주성과 투명성을 높이자고 하는 것도 그런 정신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백승헌 헌법에 그런 조항이라도 넣자, 또는 개헌 논의가 막혀 있으니 정치관계법이라도 먼저 돌파하자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두언 합의는 서로 이해득실이 불분명하면 이뤄져요. 과거 여야가 중대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꾸었을 때(1988년 제13대 총선. 제4당인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차지)는 서로 계산이 애매해서 받아들이게 되었을 거라고 봐요. 다들 자기 나름대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다고 기대하는 바가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힘들고, 세월이 더 지나 지역구도도 흐려지고 세대 간의 문제도 바뀌는 등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이해관계가 불분명해져야 그런 합의가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백승헌 지금 합의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진 않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는 말씀이네요.
이인영 좀 손해 보더라도 하자고 나서면 가능하죠.
정두언 누가 제일 손해 보는지가……
이인영 지금으로서는 우리 여당 손해가 제일 크죠. 그럼에도 하자는 겁니다.
백승헌 이 부분은 진보 보수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여당과 제1야당은 항상 양당제를 지향하고 소수정당을 배제하는 관점을 유지하는 데 일종의 묵시적 동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들이 계속되어왔는데요. 실제로 제1야당의 반대뿐 아니라 정부 여당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습니다.
이인영 다소 지나친 지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실제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도 검토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저희가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하면서 정부의 입법, 발의, 예산 편성, 감사, 그리고 대통령의 인사까지 여러 권한을 옮기려 하는 거거든요. 대통령과 정부가 발의하는 법이 상당한 규정력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국회의원들이 발의하는 건 주변적인 법이라고 할 수 있고, 결정적인 법안들은 사실상 정부가 다 쥐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이 안 된다고 하면 정당의 원내대표까지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 있기도 했고요. 저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을 지극히 제한해서, 즉 국회의 해당 상임위에서 일정한 동의를 받지 못하면 법안을 제출하지 못하게끔 하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입법의 중심이 점차 대통령에서 국회로 이동할 거라고 봐요. 예산에서도 증액동의권 같은 것 없애고, 총액 범위도 국회가 수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여당의 배타적 기득권 역시 완화되고 국회 구성원 모두의 보편적 권한이 증대하리라 생각합니다.
직접민주주의 요소의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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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헌 이런 지적도 있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비교적 활발히 논의되는데, 이때 그 권한을 대부분 국회로 이전하는 방식으로 흘러가요. 사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도 낮을 때가 많지만 국회나 정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도 그렇게 높지 않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국회가 대통령의 권한을 넘겨받는다 했을 때 그럼 국회는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되는 바가 별로 없다는 문제제기입니다.
정두언 그건 국회와 국회의원을 혼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국회는 본질적인 개념이고 국회의원은 수시로 바뀌는 구성원이에요. 국회의원들이 자질이 없다고 국회의 기능을 자꾸 축소시키면 대통령에 대한 견제기능이 약해져요. 그러면 어디가 살판나느냐면요, 언론, 재벌, 공기업, 시민단체 등의 고삐가 풀려요.
백승헌 일리있는 말씀인데, 그럼 다시 질문드리면 그 국회의원들은 무엇을 내려놓을 것이냐 물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정두언 지금까지 국회의원들이 정당 개혁한다고 할 때마다 ‘내려놓겠다’라고는 했지만 변한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려놓는다는 말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핵심은 공천권에 있어요. 공천권이 특정인이나 특정 세력에 있는 한 국회의원들은 거수기가 될 수밖에 없고 국민의 눈치보다는 공천권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요. 그 부분을 수정하지 않고 자꾸 내려놓으라고만 하면 국회의 정당한 권한이 줄어드는 거죠.
백승헌 이인영 의원께선 이 진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인영 속으로는 좋은 말씀이라고 동의하죠.(웃음) 이론적으로 입법권은 국회의 배타적 권한에 해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 개헌에서는 국민의 법률발안권에 길을 트려 합니다. 국회가 못하는 일들을 국민이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국민소환권도 있습니다. 물론 정치적 이유로 정적을 함부로 뒤흔드는 것까지 허용할 순 없겠죠. 그런 것들은 합리적으로 제한하되 소환의 권한 자체는 더 열겠다는 겁니다.
백승헌 국회가 지녀야 할 권한, 그리고 국회의원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보장책까지 특권이라고 비판하면서 기계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관함으로써 대통령의 권한을 제어하기 힘들도록 해서는 안 되겠지요. 질문을 드렸던 취지는 국회가 가진 권한 가운데에도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그런 견제적 기능을 좀더 개방적으로 만드는 게 이번 개헌의 또다른 핵심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의제도 직접민주주의도 만능이 아닐 테니 우리가 우리 사회에 맞는 제도적 접점을 잘 찾아내는 일이 이번 개헌 논의에서 중요할 것 같습니다. 권김현영 교수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권김현영 옳은 지적이라 생각하면서도 저는 일단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국회의원의 문제만 해도 그들의 특권보다는 그들이 하나의 입법기관으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당 내 민주주의나 선거법상의 문제 같은 것들이 더욱 심각하다고 봐요.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음으로써 대의가 제대로 안 되는 것 말이죠.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은 정당민주화를 먼저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백승헌 저는 직접민주주의 요소가 제도적으로 도입되더라도 그것이 항시 사용된다기보다는, 법률용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위하력(威嚇力, 범죄억지력)을 지니는 효과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국회의원이 자기의 단기적인 정치적 이익만 추구하는 행태를 제어하는 것이 ‘선거’인데, 선거 이전에도 그런 행태를 제어할 수 있다면 그 위하력이 대단할 수 있다고 봐요. 입법 영역에서 정부의 권한이 지금보다 제한될 필요가 있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앞으로는 국회의원들을 통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냐라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다른 방안이 제안되어야 할 필요도 있고요. 권력의 분립에 있어서 삼권분립뿐만 아니라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 간의 견제와 균형도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제도가 중우정치의 도구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는 하지만, 국민의 의사를 묻는 것이 단지 여론조사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책임있는 제도로 활용될 여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분들의 견해 아닌가 싶습니다.
시민사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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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헌 정치권이 개헌을 추진한다고는 하지만 파열음만 높아지고 현실적 가능성은 별로 커지지 않는 이 교착 국면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회가, 정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시민사회가 먼저 자신의 역할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감당하고 있는지 자성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입니다.
권김현영 제가 주로 활동하는 여성 부문을 보면 성평등 개헌에 관한 논의를 꽤 열심히 해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게 과연 실현될 수 있나 하는 의문 때문에 이야기를 더 진전시키지 않은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보기에는 일단 인기가 별로 없는 주제여서 활발하게 논의되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고요. 그러나 인기가 있건 없건 간에 끌고 갈 필요가 있긴 하죠. 학계도 그렇지만 시민사회 전반에서 ‘개헌 논의라는 게 권력구조 논의가 전부는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권이란 무엇인가’ ‘주권재민이란 무엇인가’ 같은 문제의식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본권, 사회권, 경제권 등과 관련해서는 시민사회 주도로 별도의 테이블을 만들어 공론장을 형성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정두언 참정권 부분도 있지요.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국회에서 여성권익에 관한 법안이 올라왔을 때 반대하면 큰일 나는 분위기예요. 거의 100퍼센트 찬성률이고요. 물론 거기까지 올라온 과정은 어려웠겠지만요. 이번 기회에 선출 공직의 남녀동수 원칙 같은 문제는 확실하게 밀어붙이면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백승헌 우리 사회가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려면 시민적 동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2016년과 17년이 남긴 또 하나의 성과와 교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지금 꽉 막혀 있는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개헌이 이루어진 뒤까지를 포함해 국민참여가 더 강화되도록 설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인영 그렇게 설계는 했습니다. 개헌특위 자문위원회만 해도 몇몇 단체로 구성이 한정될 뻔한 걸 제가 바로잡아 그 범위를 넓혔고요. 국민들이 더 많이 참여해서 논의의 중심에 서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정치적인 불리함을 우려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다보니 당론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주요 쟁점들에 대한 의견 청취를 여론조사 같은 간접적인 방식 위주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평범한 조사만은 아니고 74만명쯤 되는 권리당원 전원에게 핵심적인 쟁점과 관련해서 ARS를 돌리기도 했습니다. 10퍼센트 응답률을 보였고요. 그리고 간접적일 수도 있지만 주요 쟁점과 관련해 국민여론조사를 두개의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확인하는 과정도 거쳤습니다.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죠. 지역에서 직접적인 토론회를 열기도 했습니다만 동성애에 반대하는 분들이 너무 많이 오면서 그 부분만 도드라지고 나머지는 묻히는 바람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습니다.
권김현영 얘기가 나온 김에 말씀드리면, 동성애, 동성애자를 반대한다는 그 자체가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거잖아요. 개인행복추구권이라든지 개성을 추구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고, 차별금지조항에도 어긋나지요.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서 우리 사회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영역이 아까 언급한 시장도 있지만 종교도 그렇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명박정부 때 다수의 사회복지서비스 운영을 교회에 넘기면서, 다시 말해 교회를 준공공기관화하면서 굉장히 비대해졌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복지 영역에서 중앙으로부터 관리되지 않을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여요. 정교분리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요. 세금도 못 거두고 있잖아요. 이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왜곡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심지어는 헌법정신을 위배하는 현실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이 제동을 거는 입장을 제대로 표명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논의에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느냐 이전에 이렇게 헌법정신을 위배하는 목소리들이 여론을 과잉 대표하면서 계속 더 큰 세력을 형성하게 방치했다는 데 정부 여당의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요?
이인영 지금은 양쪽 모두에게서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인정합니다. 저희 입장은 현재로선 적어도 양측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막자는 생각도 있습니다.
백승헌 이번 개헌 논의가 정치인의 의제로 굳어진 듯 보이게 된 데에 시민사회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없겠죠. 그렇더라도 정치권에서 이제는 정말 국민의 목소리를 수시로 듣는다는 의미로 국민들이 좀더 편하고 다양하게 논의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될 듯합니다. 지금 이대로 두면 정치의 비생산성이 개헌 논의에서도 그대로 현실화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번 개헌 과정이 이 부분을 해소해나가는 모범사례가 되도록 만들어나가면 좋겠습니다.
촛불 이후, 새 술은 새 부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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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헌 이제 대화가 막바지에 온 것 같습니다. 6월에 개헌을 이루어내지 못하거나, 이번에 못하더라도 최소한 앞으로의 가능성을 더 현실화해두지 못한 채로 불발될 경우 우리 헌정사에 또다른 상처로 남진 않을까 우려됩니다. 지금의 질곡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인영 당장 할 수 있는 것만 이번에 개헌하고 나중에 더 하자는 것은 야당이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대통령제 근간을 유지하면서 분권과 협치가 가능한 접점을 찾아보자는 여당 안에 대해서도 지금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건 더 이야기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왜냐하면 지금 개헌 안 하면 그냥 5년단임 대통령제로 계속 가는 거잖아요. 야당이 가장 부정하는 현존 제도가 그대로 지속되는 거거든요. 결과적으로 논리적 모순이지요. 게다가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대선후보 시절에 4년중임 분권형 대통령제가 바람직하다고 공식 문서로 남겼거든요. 국회 개헌특위에 제출한 문서뿐만 아니라 대선 공보물에도 밝혔어요.
정두언 여당이 대통령 권한을 많이 내려놓는다고 하는데도 지금 자유한국당은 선거를 의식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피하는 상황이니 결국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궁여지책이지만 그나마 합의가 가능한 현실적인 방안은 차차기 행정부부터 새 권력구조를 적용하기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전제하면 내용도 풀어나갈 수 있을 거예요. 다른 방법도 있긴 합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인기 좋잖아요. 계속 더 잘하시는 거예요. 다만 저는 지금 기조만으로는 이 인기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더 유연하게, 중도를 더욱 의식해가면서 국정운영을 펼쳐야 한다고 보는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다음 총선에서 3분의2 의석 확보하면 개헌할 수 있죠.
이인영 지금은 어쨌든 간에 야당이 당론을 구체화해서 들고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접점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따져볼 수 있어요. 그게 진지한 태도입니다. 그러지 않고 ‘너희들이 하려는 건 틀렸어’라는 식의 얘기만 하면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죠. 지방선거 때 개헌투표를 동시에 진행하면 투표율이 올라가서 야당에 불리할 수도 있지만, 너무나 분명한 국민적 동의와 명분을 가지고 여당이 드라이브를 거는데 그에 대해 자꾸 딴전만 부리면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봅니다. 헌법을 두고 자기 정치적 계산만 할 게 아니라 진지하게 임하면 국민들도 열어놓고 판단할 거예요. 국민이 ‘무조건 정부 여당 좋게 도와줘야 해’, 이렇게 생각하진 않을 거라고요.
백승헌 6월 지방선거 동시개헌이 안 되면 어떻게 될까요? 촛불의 성과로 지금 시민친화적·주권자친화적 헌법으로 진일보시키지 못한다면 일종의 실패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듯한데요.
이인영 그런 결과는 지금 상정할 수 없고요. 만일 촛불의 의사를 이번에 집약해서 개헌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면, 개헌이 안 된 상태에서 개혁을 통해 다시 그것을 이어받을 수밖에 없겠죠.
백승헌 저는 이번에 여야 대선후보들의 공약대로 개헌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힘들게 되더라도, 개헌의 필요성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권은 6월 개헌논의가 끝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듯 정치권 전체가 지금, 여러 문제의 종합판이기도 한 개헌에 대해 어떤 결론을 못 내고 있는데 여기에 해주실 조언이나 질책이 있을까요? 끝으로 한마디씩 해주십시오.
권김현영 정치권에 대해서라면 지금은 결국 더불어민주당에 얘기할 수밖에 없겠는데요, 어쨌든 새로운 시대의 헌법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의 가장 핵심적 가치를 분권으로 꼽을 만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개헌과 관련한 민주당의 행보가 대통령 공약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면피성 노력이라는 의심에서 벗어나 유권자들에게 진정성있게 다가가려면 헌법정신으로 강조한 분권을 선거제도 개편, 비례성 강화, 여성대표 남녀동수 등으로 당 내부에서도 제도적으로 소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두언 이 기회에 우리 사회가 본질적인 논쟁의 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동안의 갈등이나 모순을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특히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간의 시대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논쟁이 건전하게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지금 젊은 세대가 거의 개인주의에 입각해 있잖아요. 여기 앉아 있는 우리마저도 잘 이해 못할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은데, 그 부분에 관심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인영 헌법이 위정자들의 통치수단, 지배자들의 지배도구였던 시절이 있었잖아요. 그러다가 87년 6월항쟁에 따른 직선제 개헌을 통해 헌법의 문이 국민에게 열린 겁니다. 2016~17년 촛불광장에서 온전히 국민의 것이 되어가기 시작한 거고요. 당시에 접한 잊지 못할 인터뷰가 있는데요, 어떤 젊은이에게 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왔느냐고 물으니, 한 사람은 ‘백만명 중의 한명이 되고 싶어 왔다’고 했고, 다른 한명은 ‘대통령은 헌법을 어겨도 우리는 헌법을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왔다’고 했어요. 위정자들의 통치수단, 독재자들의 지배도구, 기득권자들의 연장통로로 헌법이 기능했던 현실을 온전히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가 충만해졌음을 보여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개헌으로 수렴해내지 않으면 헌법체제 밖에서 계속 맴돌면서 문을 두드릴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목소리를 헌법으로 담아내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도리이고, 또 그렇게 해야만이 그 긴 시간을 끝까지 평화로 인내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낸 국민의 의지와 국민주권의 올바른 발전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이 좌절된다고 생각하면, 사실 두렵습니다. 헌법이 국민의 것이 되었는데도 온전한 헌법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요. 그래서 나름대로 소명감을 갖고 임해왔는데 지금 진로가 명확하지 않아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좋은 헌법을 만들면 더 좋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열리고 또 더 나은 국민들의 삶으로 가는 길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더 노력하겠습니다.
백승헌 한 나라의 최고규범이나 정치체제를 단순하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미국 민주주의가 이렇게 덜거덕거리게 된 이유 중의 하나로, 헌법을 제때에 개정하기 어려운 시스템을 들기도 합니다. 반면에 유럽의 성문헌법 국가들은 헌법을 현실과 맞춰나가는 작업을 꾸준히, 거의 매해 벌이고 있죠. 헌법은 최고규범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가변적인 것들을 부정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정신과 가치가 헌법에 잘 정리될수록 상호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고리가 너무 딱딱해져버리면 현실을 거꾸로 옥죄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싶고요. 87년 개헌 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금융위기나 촛불을 비롯해 정말 많은 일을 겪은 만큼 이제는 본격적으로 헌법을 다시 가다듬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제가 단지 정치인만의 몫이 아니라 주권자 전부의 몫이라는 점을 유념하고 계속 주시했으면 합니다. 긴 시간 감사드립니다. (2018.2.8.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