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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임재희 林在熹
1964년 강원 철원 출생. 2013년 세계문학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당신의 파라다이스』 『비늘』 등이 있음. vhyunlim@hanmail.net
로드(Road)
케네디 암살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낸 건 명이었다. 최종 목적지가 댈러스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지루한 사막지대가 끝없이 이어지던 차창 밖 풍광에 모두가 지루해하던 때였다. 그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흥미롭다고 범도 맞장구를 치며 명의 흥을 돋우었다. 우연들이 겹치고 그 우연들이 마치 미리 계획된 시간 속에서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오싹할 정도라고 했다. 진은 케네디에 관한 영화와 책이 너무 많이 쏟아져나와 식상하다고 한마디 보탰다. 명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사람들은 완전히 낯선 이야기보다 계속 의문을 던지는, 알려진 얘기에 더 흥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정말 꼼꼼하게 계획하고 벌인 일일까?”
범이 물었다.
“암살이? 아니면 그 집이?”
진이 물었고 운전대를 잡고 있던 명이 한쪽 손을 들며, 실은 나도 그게 궁금해, 소리쳤다. 셋 모두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 범, 명, 삼남매는 고모가 사는 쌘안토니오에서 출발해 댈러스를 향해 달리는 차 안에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뿔뿔이 흩어져 다른 주(州)에 있는 대학에 가는 바람에 셋이 함께 장시간 운전을 하고 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크리스마스를 한달 정도 남겨두고 있었고, 선글라스 없이 한치 앞을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햇볕이 따가운 날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반대쪽 도로에는 셀 수 있을 만큼 차들이 드문드문 지나다녔다. 파란색 승합차 한대가 캠핑용품인지 이삿짐인지 모를 것들을 가득 싣고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운전석 옆에 앉은 아이들이 고개를 길게 빼고 진, 범, 명이 탄 차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진은 차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모래색을 닮은 바위들과 그런 바위들이 만든 언덕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식물들이 바싹 말라비틀어진 채 뒤엉켜 있었다. 거대한 나무처럼 웃자란 선인장들은 두 손을 높이 쳐들고 포효하다 굳어버린 들짐승 같았다. 기대했던 부드러운 모래둔덕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막이라고 다 같은 사막이 아닌 것만 같았다. 지루했고, 지루해서 쓸데없이 방금 스쳐간 파란색 승합차에 타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려볼 지경이었다. 운전석에 있던 사람보다 체구가 몹시 작아 보였으니 아이라고 여겼는데 아닌 것도 같았다. 역광 때문이었을까. 진은 그들의 머리가 기이할 정도로 커 보였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티셔츠 색깔이 밝은 파란색이었다는 것도 그제야 기억났다.
그 어떤 생각을 해도 진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가 전화로 주소를 불러주었을 때부터 엄마의 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얼마 전에 서울 변두리에 있는 작은 빌라로 옮겼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뭔가 앞뒤가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가격이 싸도 그렇지, 연고도 없는 댈러스 외곽에 집이라니. 그녀로서는 여전히 의아한 일이었다. 서울의 작은 아파트 전세 보증금의 반도 안 되는 가격이라고 해도 엄마에겐 큰돈이었다.
진은 라디오의 볼륨이 귀에 거슬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를 줄였다. 휴가라도 가는 사람들 같네. 속으로 된소리를 삼켰다. 래퍼의 목소리가 거친 기계음처럼 흘러나왔던 차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옆에서 운전을 하던 명이 진을 슬쩍 쳐다보았다.
“릴 웨인의 노래를 함부로 끄다니!”
뒤에 앉아 있던 범이 과장되게 두 손을 벌리며 말했다. 랩이라도 있어야 사막의 지루함과 삭막함을 견디지. 분명 그런 눈빛이었다. 범의 저런 모습은 정말 싫다고 진은 생각했다.
“제발, 너 그 래퍼들에 대한 미친 애정을 멈출 수 없니?”
진은 ‘그게 바로 늘 엄마가 걱정하는 부분이야’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엄마는 범이 가끔 대마초를 피우고 친구들과 히죽대며 노는 것도 다 랩을 좋아해 생긴 버릇이라고 여겼다. 드레드락스며 힙합 복장, 게다가 초점 없는 눈초리까지 래퍼들을 닮아갈까 미리 걱정했다.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방은 지저분해도 옷은 늘 단정하게 입고 다녀 엄마의 걱정은 기우였다는 게 증명되었지만, 진조차도 그게 범의 전부를 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범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런 진을 쳐다보았다. 언제부턴가 그녀가 점점 엄마의 목소리를 닮아가며 엄마처럼 행동하는 ‘젊은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땡스기빙을 앞두고 쌘안토니오에 사는 고모가 진, 범, 명을 초대했다. 가족 중에 유일한 미국사람이었던 고모부가 3차 항암치료를 이기지 못하고 힘들어하던 때였다. 고모부는 그들에게 한국이라는 문을 열고 나와 미국이라는 대륙을 체험하게 해준 존재였다. 그는 조카들의 서툰 영어발음을 바로잡아주었고, 이름도 생소한 디저트를 함께 만들었다. 침대 시트를 주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는 법과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의 기원과 가글과 치아교정의 필요성, 게다가 디즈니영화의 개봉소식 모두 그가 알려준 것들이었다.
고모네 간다고?
엄마는 진의 얘기를 듣고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절묘한 순간이라고 외치는 사람 같았다. 주소를 불러주며 적으라고 했다. 누가 사는지 누구의 집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가서 봐. 보기만 해. 엄마는 마치 그 집에 누가 살든 누구의 집이든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은 그게 엄마의 집이라는 말로 들렸다. 엄마는 이제 완벽하게 스스로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개체라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의아했던 마음은 금세 사라지고 감정이 조금 북받쳐 올랐다. 찬 눈물 한방울이 뺨에 똑 떨어진 것처럼 서운했다. 흐트러짐 없는 엄마의 목소리가 다행스러우면서도 야속하게 들렸다.
엄마가 텍사스주에 간 건 겨우 한번뿐이었다. 고모가 사는 곳이었지만 첫 가족여행이 될 뻔했다. 아빠는 출발 이틀 전에 회사에 일이 생겨 결국 함께하지 못했다. 진, 범, 명은 한시도 한자리에 가만있지 못할 정도로 힘이 넘치는 나이였다. 그들은 엄마와 알라모성을 둘러보고 씨월드에 갔다가 저녁 무렵 리버워크에 갔다. 그 도시의 방문객들이 놓치지 않고 가는 코스를 그대로 따랐다.
리버워크는 긴 강을 끼고 이어진 거리였다. 까페와 상점에서 흘러나온 불빛들이 아름답게 물 위에 드리워져 찰랑거렸다. 관광객을 태운 색색의 보트들이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지나갔다. 진, 범, 명은 카우보이 물건을 파는 가게를 기웃거렸다. 궁금하고 신기했는데 안으로 한발짝도 들어가지는 못했다. 갈기를 휘날리며 말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엄마의 치마를 꼭 붙들었다. 어느 곳에서나 음악이 흘러나왔다. 광대옷을 입고 마술쇼를 펼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로등에 기댄 채 키스하며 서 있는 젊은 연인들의 발밑에 둥글고 뭉툭한 그림자가 네개의 발을 품고 있었다. 모퉁이마다 집시들이 모여 춤을 추는 축제의 도시였다. 엄마는 한 손에 음료와 간식이 든 커다란 기저귀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명의 손을 잡은 채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다 엄마는 명의 손도 놓은 채 가게를 등지고 혼자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애써 찾으려는 사람처럼 미동도 없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언 몸이 풀린 사람처럼 어깨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너편 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팔, 어깨, 다리가 조금씩 꿈틀거렸다. 세상 그 어느 음악과도 어울리지 않는 서툴고 어색한 몸짓이었다. 엄마의 행동에 진은 당황스러웠다. 세월이 흘러도 그때 엄마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건 흥에 겨워 흔드는 몸짓이 아닌 것만 같았다. 오히려 전혀 반대의 어떤 기운이 그녀의 몸을 잡아 트는 것만 같았다.
“이번 땡스기빙에는 고모부가 만들어주는 초콜릿무스 케이크는 기대하지 말아야겠네.”
범이 엉덩이를 조금 들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명의 뒷머리를 손으로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출발 때부터 별말이 없는 동생이 신경 쓰였다. 엄마와의 기억이 상대적으로 적은 막내였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이야.”
명은 조금은 귀찮다는 듯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말했다.
“뭐가?”
“다, 모두. 어른들의 일 말이야.”
“야, 우리도 이미 어른이야.”
“죽는대. 곧. 어쩌면 크리스마스 전에.”
“고모부가? 곧?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갑자기 죽어?”
진이 놀라 물었다. 겉으로 보기에 고모부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척추뼈 일부를 제거해 키가 줄어든 모습이 기이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의 유머감각은 살아 있었다. 죽음은 웃음과 함께 떠올려보지 않아서 현실감이 없었다.
모두 말이 없었다. 누군가 죽고 사는 문제를 너무 가볍게 입에 올린 것을 후회하는 눈치였다. 그 누군가가 그들과 몹시 친밀한 사람이라 말을 아꼈다. 그때 갑자기 명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아, 오늘이 11월 22일, 맞지? 존 에프 케네디 암살당한 날이네, 여기, 댈러스에서!”
“오 마이 갓, 정말 오늘이네! 우리가 이런 역사적인 날에 댈러스를 간다고?”
범도 흥분해 소리쳤다. 과장되게 부르르 몸을 떠는 시늉을 하며 명의 흥을 돋우었다.
“어떻게, 그렇게, 극적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그렇게 극적인 삶을 살 수가 있지? 사건 자체가 미스터리야, 빅 미스터리!”
명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끄집어낸 자신을 대견해하는 눈치였다. 고모부나 부모에 대한 진지한 얘기는 불편하고 싫었다. 무심하려고 해도 가슴이 무거웠고 숨이 찼다. 차라리 케네디 얘기가 좋았다. 씹고 씹어도 부드러워지지 않는 육포처럼 밤을 새워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더 흥미로웠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중에 하나가 딜리 플라자라는데, 우리 그럼 거기도 가보자!”
“케네디 암살 장소?”
진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명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사진으로 보았던, 총성이 울려 퍼졌다는 회색빛 건물을 떠올렸다. 누군가 불행히 죽은 곳을 보자고? 지나온 길이 거의 황폐한 사막이었는데, 그걸로도 모자라서?
“그런데, 엄마가 일부러 오늘 가라고 한 건가? 그런 건 아니겠지?”
“뭐야, 이런 상상력은?”
“케네디가 댈러스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퍼레이드를 간 거잖아. 엄마가 굳이 우리에게 비행기로 가지 말고 차로 가라고 고집한 이유가……”
범의 말에 진은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흔들기까지 했다. 개연성 부재의 일을 저토록 의미화하려고 노력하다니. 그가 아직도 일정한 수입 없이 고생하는 게 다 그런 연유 때문인 것만 같아 말도 섞기 싫었다.
“그냥, 하루 가볍게 드라이브하는 맘으로 갔다 오자고.”
가볍지 않은 목소리로 명이 말했다.
진은 처음부터 ‘엄마의 집’이라고 단정 짓는 눈치였지만 범은 쉽게 공감하기 힘들었다. 익숙한 단어들 속에 틈입한 낯선 느낌 앞에 주춤거렸다. 엄마의 집이라는 말 자체가 엄마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 같았다.
진의 전화를 받았을 때 범은 분주하게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몇년째 같이 살던 세명의 룸메이트와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직장이 위치한 거리 때문에 헤어지기로 했다. 범 혼자 살기에 집은 너무도 컸고 새로 룸메이트를 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사진작업을 하는 스튜디오에서 살기 싫었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일과 생활의 공간은 분리. 평소에 그렇게 외쳤는데 형편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름은 화려한 프리랜서지만 수입은 언제나 초라했다. 콘서트를 다니며 무대 뒤편의 사진과 이야기를 담았다. 화려함 뒤에 가려진 진짜 얼굴들은 늘 그를 매료시켰다. 그가 쓴 기사와 사진은 음악전문지에 자주 실렸다. 고료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일을 하며 그 일을 계속했다. ‘9시 출근 5시 퇴근’이라는 생활방식을 선택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인간이 기계화되는 첫 관문처럼 여겨져 최대한 그런 틀에서 오래 벗어나고 싶었다. 그의 결정을 지지해준 사람이 엄마였다. 불쑥 달려가볼 수 없는 거리라 가끔 엄마를 원망해본 적은 있어도 유대감을 의심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엄마 집이라니. 엄마가 그 중요한 일을 한마디 언급도 없이 혼자 결정했단 말인가?
덩어리 치즈인 줄 알고 샀는데 포장을 뜯고 보니 한장씩 슬라이스된 치즈를 마주한 느낌처럼 생뚱맞았다. 엄마는 평소에 사람이 집 한채를 갖는 꿈은 허영이 아니라고 자주 말하긴 했다. 집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환상적인 현실의 공간일 거라고도 했다. 뷰파인더를 통해 피사체를 오래 관찰하다 초점을 맞추고 드디어 셔터를 누를 때, 범은 자신만의 집을 가진 기분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엄마를 조금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명은 소변을 참을 수 없다며 사막 한가운데에 차를 세웠다. 앞과 뒤, 모두 지루한 지평선만 보이는 곳이었다. 명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지개를 길게 켜더니 커다란 바위 뒤쪽으로 걸어갔다. 범은 진과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진은 그 둘을 바라보다 선글라스를 잠깐 벗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금세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썼다.
진은 며칠 전에 엄마에게 전송받았던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집들이 가지런하게 들어찬 길은 바둑판처럼 반듯했다. 커다란 호수를 중심으로 집들이 둥글게 퍼져 있는 동네였다. 정작 엄마가 주소를 불러주었던 그 집은 어디에 있을까. 발밑에 모래먼지가 이는 곳에서 호수가 있는 동네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곳을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거나 나무 위에 붉은 꽃이 다닥다닥 피어 있는 사진들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더 들었다.
명은 범에게 운전대를 맡겼다. 범은 시동을 걸고 라디오의 볼륨을 다시 높였다. 에미넴의 목소리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는 랩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나왔다.
볼륨이 귀에 거슬렸는지 진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휴, 담배 냄새.”
“그래도 ‘그린’은 아니잖아.”
“뭐? 너, 아직도 대마초 피워?”
“왜 그래, 누가 피운대?”
“너, 이 새끼, 엄마한테 이른다.”
범이 찔끔거렸다. ‘새끼’라는 단어가 한국어로 된 욕 가운데 가장 센 걸로 알고 있는 진, 범, 명은 이 부분에 이르면 말을 잠시 멈추거나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 단어라도 음색에 따라, 혹은 표정에 따라 그 의미가 정반대로 들릴 때가 있다는 것도 그들은 안다. 엄마의 입에서 흘러나와 뺨에 닿았던 ‘내 새끼’라는 단어는 따뜻한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진의 입에서 나온 ‘새끼’는 욕이었다.
진은 아직도 화가 안 풀린 사람처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비슷비슷한 풍광이 사라지지도 않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먼 곳에 있는 큰 바위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사물에 시선을 고정하는 버릇은 그녀 스스로 화를 누르는 방법이었다. 바위 위에 커다란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빨간색 페인트로 이니셜 ‘H’가 하트 안에 새겨져 있었다. 이름의 첫 글자이거나 좋아하는 단어의 첫 글자일 것이다. 어느 아내가 새긴 ‘Husband’의 H이거나. 누구의 무엇이든 그녀에게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글자를 새긴 사람은 다시는 이곳을 지나가지 않은 채로 살다 죽을지도 모른다.
진의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범이 슬슬 눈치를 살폈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정말로 나쁜 걸로 따지자면 담배가 더 나빠. 대마초에 대한 혐오감으로 편견을 갖는 게 정치적인 문제로 출발한 파워게임에서 비롯됐다는 걸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고. 그러니까 이번에 캘리포니아주도 대마초를 합법화했겠지. 정말 중독성이 있는 건 시중에서 파는 담배야.”
진은 이미 그 대화에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아무 대꾸도 없었다.
차 안에 다시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흘러나오던 랩도 어느새 꺼져 있었다. 범은 그의 차 안에 가득 실린 이삿짐을 떠올리고 있었으며, 명은 뉴욕에서 사회초년생으로 지낼 생각으로 긴장되었고, 진은 부모의 짐이 다 빠져나간 옛집을 떠올리며 스산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명은 차 트렁크에 실려 있는 아이스박스를 떠올렸다. 시원한 맥주가 들어 있다고 하자 범은 야호! 소리쳤다. 그들은 길 안쪽으로 쑥 들어가 약간 언덕진 곳에 차를 세웠다. 해를 가릴 수도 없는 허허벌판이었지만 지나온 길이 다 보이는 곳이었다. 진은 대형 타월을 두개 꺼냈고 준비한 돗자리도 펼쳤다. 차문을 열고 노끈을 이용해 타월을 서로 연결했다. 돗자리를 타월 위에 덧대었더니 세명이 겨우 빛을 가리고 앉을 곳이 되었다. 바닥은 따뜻했고 바람은 건조했다. 찬 물방울이 맺힌 맥주캔은 알맞게 시원했다. 멀리 차 한대가 빠른 속도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진, 범, 명은 그들이 달려온 길을 바라다보며 찬 맥주를 목으로 넘겼다. 검정 아스팔트가 긴 뱀의 꼬리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길이었다. 참 멀리 왔구나. 셋은 아마도 그렇게 느꼈을 거였다. 그 심정으로 그들은 말없이 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삼남매가 고요한 마음으로, 게다가 사막에서 찬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날이 쉽게 다시 오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 순간,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 안에 무언가 차오르는 게 있었다. 어쩌면 엄마가 정작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집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긴 여정을 생각하는 시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문득 자신들도 길 위에서 쉬지 않고 달려왔음을 떠올렸다. 태엽이 감긴 인형들처럼 움직임을 멈춘 적이 없었다. 계속 학교라는 곳을 다녔고, 계속 무언가를 배웠고, 계속 시험이라는 것을 치렀고, 계속 보이지 않는 적들을 만났다. 부모의 갈등을, 병을, 상처를, 분노를 헤아릴 여유도 없이 마주치고 흡수했다. 언제부턴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오고 있었고,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 어딘가를 향해 지금도 여전히 길 위에서 앞만 보며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맥주가 쓰게 느껴졌다.
“난 가끔 엄마가 무너지기 시작한 순간들을 떠올려보곤 해.”
진이 두번째 캔을 비우고 나서 말했다. 너희는 모르지? 그런 표정이었다.
“나를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엄마 혼자 돌아서 갈 때 보았던 그 얼굴. 뭔가 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 눈, 코, 입이 녹아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고. 그때 엄마는 뭔가를 스스로 놓아버린 것 같았어. 그게 엄마 자신이었는지, 결혼생활이었는지, 우리 가족이었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엄마와 아빠 사이에 중간 역할을 늘 했었잖아. 그런 내가 비행기를 타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을 갔으니. 엄마는 내가 없는 빈자리를 어떻게 감당해야 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진은 어느새 자신이 울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고 한번 터진 울음이 그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범과 명은 그런 진을 말없이 지켜보며 맥주를 홀짝였다. 길고 지루한 사막은 가족들이 지난 몇년간 지나온 시간과 닮아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가 이름도 희한한, 빈둥지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도 그러다 낫겠지 했다.
“엄마가 혼자 춤추는 모습을 아빠가 봤다면 좀더 신경을 써줬을까?”
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범과 명은 엄마가 춤을, 언제? 그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그걸 알 리가 없지. 진은 설명하고 싶지 않아 혼자 고개를 저었다.
“어떤 행위 뒤에 오는 정서의 총체적인 것. 행위와 정서. 나는 요즘 그런 화두에 몰두해 있어.”
범이 뜻 모를 이야기를 했다. 마른세수를 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늘이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어 수척해 보였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의 이혼이라는 행위가 우리에게 남긴 정서가 있잖아, 상처라고 부르는. 우리는 물론 그 행위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서는 고스란히 함께 느꼈잖아. 아이러니하게도, 엄마 아빠 이혼 뒤에 정말 우리가 가족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온몸으로 느꼈어. 어떤 행위를 같이하는 것보다 어떤 정서를 같이 나눈다는 게 더 긴밀한 관계구나, 우리는 생각보다 아주 긴밀한 가족이었구나, 그런 깨달음 말이야.”
진은 범이 몰라보게 성숙해졌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게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 쓸쓸하기도 해 또 울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번에 엄마가 가보라는 집은 엄마의 어떤 정서가 그런 행위를 하게 만든 결과물이라는 거지.”
“그 정서가 뭔데?”
진이 자신도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걸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는 거지.”
“범, 그…… 행위와 정서, 그것도 사진에 담을 수 있어?”
명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글쎄…… 그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움직임과 감정을 포착하는 작업이니까 행위와 정서를 담는 거지.”
진은 소변을 보고 오겠다며 일어섰고 범은 아이스박스를 열고 마지막으로 남은 맥주캔을 집어 들었다.
“나도 범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어.”
진이 울다 만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햇볕에 그을린 걸까, 술 탓일까. 명의 얼굴이 목덜미에서부터 불그레했다. 좀체 속엣말을 안 하는 명이어서 진과 범은 조금 긴장했다.
“마트에서 발렌타인 한병을 훔치다 걸린 적이 있어.”
“명, 정말이야, 언제? 바보 아니야, 너 같은 우등생이 그런 짓을, 왜 내게 말 안 했어?”
범은 명에게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말했고, 명은 정말 자신이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고, 진은 다시는 그 순간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엄마가 한참 힘들어하다 한국에서 살겠다고 갔을 때였어. 실은 그때 나도 같이 기우뚱거렸던 것 같아. 범이 말했던 행위와 정서로 비유한다면, 엄마의 어떤 행위가 나의 정서를 흔든 거야. 그만큼 밀착되어 있었다는 거겠지. 내부에서부터 균열이 생기다 나 혼자 터진 기분이었어.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미고 훈방조치돼서 집에 왔는데 한국에 있던 엄마가 전화를 했어. 슬프구나. 이 말을 두번 하시더라. 슬프구나,라는 말. 참 슬프더라고.”
명은 맥주를 마저 비우고 손으로 빈 캔을 구겼다.
“그래도 네가 삼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을 때, 엄마가 제일 좋아했잖아. 등록금 저축하게 되었다고. 하하.”
범은 명의 어깨를 대견스럽다는 듯이 툭툭, 쳤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한번도 엄마 아빠에게 이혼하지 말라는 말을 안 했을까?”
진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너희들은 했어, 묻는 눈치였다.
“그러게……”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으니…… 이혼은 당연한 거 아니야?”
“믿었던 거 아닐까?”
“뭘? 언젠가 둘이 다시 합칠 거라고?”
진, 범, 명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럴 가망성은 없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나는 좀 무기력했어.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
“둘이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걸 어떻게 장담해?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온 건데?”
“엄마랑 아빠랑 키스하는 거 본 적 있어?”
“뭐, 그따위 질문이…… 그러고 보니 없네.”
“거봐. 어릴 땐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친구네 부모는, 물론 미국사람이라 그런가, 우리 보는 앞에서도 포옹하고 키스를 하더라. 서로의 뺨에 얼굴과 입술을 가볍게 대는 정도였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감정들. 그게 바로 행위와 정서지. 우리 부모는 아마도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이인가보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싱겁긴.”
대화는 정말 싱겁게 끝났다.
진, 범, 명은 다 털어놓지 못한 대화를 어설프게 끝낸 기분이 들었다. 뿌연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같은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많은 것이 어른거렸지만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 없어 답답한 사람들 같았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들 사이에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몸은 자라 어른이 되었는데 어느 부분은 여전히 자라지 않은 채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때로는 분명한 것도 희미해졌고 희미한 것들 사이에서 날카롭게 빛을 반짝이는 것이 있어 혼란스러웠다.
명이 얼굴이 너무 벌겋다며 운전대를 범에게 부탁했다. 사막에서 음주운전 걱정 안 해도 된다면서도 범이 흔쾌히 운전대를 잡았다. 내비게이션은 앞으로 1시간 35분 더 가면 목적지라고 알려줬다. 진은 에어컨을 최고로 틀었다. 조심해, 조심하라구, 운전! 진은 몇번이고 범에게 소리쳤고 범은 억지로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했다.
지평선 끝에 굵은 검정선이 점점 크고 진해지며 분명해졌다. 범은 혼자 콧노래를 불렀고 명과 진은 졸다 깨기를 반복하다 깼다. 오목하고 볼록한, 마치 검정 레고로 길게 이어 만든 거대한 횡단열차같이 생긴 도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셋은 알 수 없는 뿌듯함에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
케네디 암살의 진범이 누구일까,라는 말로 시작된 대화가 다시 엄마가 가보라는 집 이야기로 모아졌다.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엄마는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교해서 결정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그게 정말 엄마 집이라는 말이야?”
“생각해볼수록 그런 결론이야. 엄마가 느낀 생에 대한,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노후에 대한 불안 때문에 내린 선택이라는 말이지.”
명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국 자동차시장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토요타 본사가 댈러스로 곧 옮겨올 거라는 것. 사옥이 거의 완공되었고 무려 4천명 이상의 직원과 그 가족들의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다는 것. 게다가 대형 구장을 레인저스가 건설 중이라는 것. 도시가 대형화하거나 붐이 조성되는 그런 좋은 조건들이 엄마가 그곳에 집을 산 이유일 거라고 추측했다.
명의 말에 범과 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그렇게 분석적이라고? 아닐걸.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케네디 암살만 해도 많은 추측이 있었어.”
범은 다시 케네디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블랙홀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소재였기에 누구도 그의 얘기를 멈추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야기가 다시 케네디로 흘러가자 진은 좀 정신이 드는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는 그 나이트클럽 사장이라는 잭 루비라는 인물이 가장 흥미로워. 개연성이 없잖아. 범, 네 말대로 행위와 정서가 그에게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오즈월드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사실 같아. 근데, 왜 하필 감옥으로 이송되는 그 순간에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잭 루비가 뛰어들어 그를 쐈냐고? 미국을 사랑해서, 애국심에? 그건 말도 안 되는 추측이야.”
“케네디와 오즈월드가 같은 병원 응급실에서 생을 마감한 것도 너무 극적이야.”
“잭 루비가 마피아 꼬붕이었다는 설도 있어. 극우 보수세력과 소련 KGB, 쿠바 카스트로까지 파헤쳐봐야 답이 나와.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마릴린 먼로의 죽음까지 파헤쳐야 진짜 범인이 나올 거라는 거지. 그동안 나온 것도 다 알맹이 빠진 진실들이고.”
“진실을 다 알면 뭐할 건데?”
“무슨 진실? 케네디?”
“아니, 엄마가 가보라는 곳이 정말 엄마의 집인지 아닌지 나도 모르겠다고. 친구네 집인가? 우리가 모르는 엄마 친구가 있나? 그것도 불분명해.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생각해봐야 답이 나올 거라는 말이야.”
명은 어찌되었든 그들이 가는 곳이 엄마의 집이기를 바랐다. 범이 말한 행위와 정서에 동감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는 오히려 가정과 결과에 집중하는 성격이었다. 어느 것이 더 좋거나 나쁜 건 없었다. 아무튼 범과 진은 자신과 좀 다른 것 같았다. 그의 한국말 실력도 둘에 비해 많이 서툴렀다. 누군가 그에게 노스 코리언이냐 싸우스 코리언이냐고 물으면, 진과 범처럼 뭐 그런 질문이 있느냐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 친조부는 ‘캐성’ 사람이고, 내 외조부는 ‘킴천’ 사람이니 반반 섞인 코리언이라고 말했다.
명은 진과 범에게 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엄마가 두번이나 “슬프구나”라고 말한 이유였다. 첫번째는 명이 한 짓이 어리석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내가 갈까?”라고 물었을 때 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엄마는 또 “슬프구나” 했다. 명은 자신이 한 짓이 부끄러워 그렇게 대답했는데 엄마가 필요 없다는 말로 들리기에 충분했다. 명은 가끔 자신의 대답을 후회했지만 다 지난 일이었다. 가정과 추측은 늘 다른 예상을 낳기 마련이지만 이미 벌어진 결과에 승복해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가 뜬금없이 케네디에 대해 계속 주절거린 이유이기도 했다.
차는 어느덧 나무가 우거진 동네로 들어서고 있었다. 셋은 차 등받이에 기대었던 몸을 조금 일으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통과해온 길이 사막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푸르렀다. 키 큰 나무들의 그림자가 짙고 서늘해 보였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오후의 햇살을 등에 지고 걷고 있었다. 집 앞에서 공놀이를 하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바스락거렸다. 휠체어를 탄 어느 노인이 어깨에 숄을 걸치고 넓은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큰 개가 그 옆에 한가로이 누워 있었다.
“1008, 1014, 어디야, 1032라고 했지? 거의 다 왔네!”
범이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차창을 열었다. 셋은 고개를 길게 빼고 우편함에 적힌 번지수를 눈으로 따라 읽었다. 골목은 컬드색(Cul-de-sac)으로 이어졌다.
“저기다, 1032!”
진과 범의 눈이 명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모였다. 아, 하는 감탄사가 누군가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고 동시에 다른 둘의 입에서도 터졌다. 다른 큰 집들에 가려진, 언뜻 보면 작은 별채 같은 크기의 집이었다. 그래도 그건 어디에서 보아도 ‘엄마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집이었다.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차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고, 아이들이 집 앞에서 뛰어놀기에 안전한 컬드색, 단단한 붉은 벽돌집. 평소에 엄마가 노래처럼 말했던 그런 집이 그들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진, 범, 명은 차에서 내렸다. 보닛에서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와 그들의 얼굴에 닿았다. 셋은 붉고 단단한 벽돌로 지은 집을 향해 걸어갔다. 오후의 햇살이 가득 들어차 있는 빈집이었다. 삼남매는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기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훗날 명은 자신들의 이런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무당벌레 세마리가 유리창에 붙어 있던 모습으로 상상되어 웃음이 나왔다.
범과 명은 집을 둘러보겠다며 뒤뜰로 향했다. 진은 두 손을 귀 옆에 바짝 대고 유리창에서 얼굴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눈길은 거실에서 주방으로 그리고 반쯤 열려 있는 방문들을 따라갔다. 현관문 옆에 세로로 길게 장식된 색유리 창과 한쪽 벽이 통유리로 된 거실, 주방에서 나와 복도로 이어지는 구조. 낯설지 않은 집이었다. 진은 속으로 옅은 신음소리를 냈다. 오래전에 가족들이 함께 살던 옛집과 너무도 흡사했다. 크기만 작을 뿐이었다. 엄마는 무심코 인터넷 서핑을 하다 매물로 나온 이 집을 보았을 것만 같았다. 가상공간에서 창을 열어보고 주방과 거실을 거닐어보다 문득 자신이 잃어버린 유형의 것들과 무형의 것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게 엄마 스스로 버린 거라고 했지만 세상에 귀한 것들을 이유 없이 버리는 사람은 없다.
뒤뜰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날의 범과 명 같았다. 둘은 지붕 상태를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진은 범이 사는 씨애틀, 명이 살아가게 될 뉴욕,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하와이를 떠올렸다. 댈러스가 그 모든 지역의 중간지점이었다. 엄마가 걸어왔던 모든 길의 중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곳에 표석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했을 것만 같았다. 진은 여전히 엄마가 선택한 엄마의 집이라고 믿고 싶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엄마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진은 얼굴을 유리창에 더욱 바짝 붙이고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엄마라는 존재가 여전히 그녀를 놀라게 만들어 다행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