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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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송곳』을 읽다

 

 

황정은 黃貞殷

소설가.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등이 있음. aamudo@empal.com

 

최규석 崔圭碩

1977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98년 서울문화사 신인만화공모전으로 데뷔했다. 대표작으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100℃』 『울기엔 좀 애매한』 『지금은 없는 이야기』 『송곳』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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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최규석, 황정은. ⓒ이정수

 

 

1

 

노동勞動.

며칠째 이 말을 생각하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몇몇 사람들에게 당신의 노동을 ‘노동’이라고 말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거나 없는 것 같다는 대답을 자주 들었다. 자기 일이 힘쓰는 일이 아니라서…… 노동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대답이 자주 있었고 자기 일을 ‘노동, 막노동’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그렇게 혼자 생각만 했을 뿐, ‘노동’이라고 말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는 대답도 있었다. 그들의 대답 그대로,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을 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구두회사 사무직, 여행사 사무직, 대형마트 판매직, 백화점 판매직, 가사노동, 방산업체 프로그래머, 대학원 조교 등등 직종도 다양했는데 이들 모두 자기 노동을 노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 경우에도 살면서 가장 오래 한 일이 글쓰기 노동인데, 이것을 내가 노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와 내 친구들은 우리의 노동을 ‘일’이라고 말하는 데 익숙하다. 숫자 1을 발음하는 것처럼 ㅇ을 거세게 발음하는 경우는 있어도, 일하러 간다거나 일하고 있다고 말하지, 노동하러 간다거나 노동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일’은 ‘노동’보다 덜 수고롭고 더 고상하고 덜 정치적이고 더 중립적이며 보다 개인적이고 때가 덜 묻은, 곧 무구(無垢)한 맥락의 말인 듯하다. 그렇다면 ‘노동’은 그보다 더 수고롭고 덜 고상하고 더 정치적이고 덜 중립적이며 더 복잡한 맥락을 지닌 ‘별것’이라서 이미 오염된 맥락을 지닌, 너무 무거운 언어일까…… 우리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그 느낌은 거부감이나 혐오에 가깝다. 혹은 그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인지도 모르겠다.

노동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겪어온 고통에 대한 거부감과도 관련된 듯하다. 사울 알린스키(Saul Alinsky)는 단어들에 대해 “정치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들은 인간의 상처, 희망 그리고 절망으로 물들어 왔다”고 말한다. 조금 더 이어보자면 “모든 정치적 단어들은 대중의 비난으로 채워져 있고, 그것들의 사용은 습관화되고 부정적이며 감정적인 반응을 낳는다. (…) 정치학, 정치라는 단어 그 자체도 심지어는 부패라는 맥락에서 일반적으로 고찰된다.”1 알린스키의 생각을 빌려 생각해보자면 ‘노동’이라는 말에 실린 수고롭고 고된 싸움과 갈등의 역사,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고통이 자신의 노동과 무관하다 여기고 싶은 것처럼 우리는 노동을 줄곧 ‘일’이라고 말해온 것은 아닐까. 어렸을 때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내 세대로 말하자면 거기에 또다른 맥락이 추가되어 있다. 나와 내 친구들이 ‘노동’이라는 말을 최초로 읽고 본 경험은 흔히, 조선로동당, 빨간 깃발과 더불어 휘날리듯 그려진 ‘로동’이라는 문구였다……

 

그러나 노동勞動.

힘들이고 애쓰느라고 지치고 고달프고 괴로우며 수고롭고 치사한, 일을 하는 것. .

흔들리고 옮기고 동요하고 떨리고 느끼며 일어나고 시작하고 나타나고 변하며, 움직이는 것. .

 

 

2

 

『송곳』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트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이다. 이 사람들은 마트에서 일하다가 자기가 일하는 장소에서 자신의 일이 하찮아지는 순간을, 보다 정확하게는 그 일을 하는 자기 자신이 하찮아지는 순간을 겪고 좌절하고 갈등한다. 사측이 경제적인 이득과 손실을 따져 노동자를 쫓아내기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실행할 때, 노동자는 경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고 사회적인 의미로도 하찮아진다. 사측은 노동자들을 자기 노동에서 몰아내기 위해 그들을 모욕한다. 알린스키가 말하기도 했던 노동자 ‘본연의 역할’2 같은 것은 없다. 네가 하는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 일을 하는 너도 전혀 중요하지 않은데 너는 몰랐겠지만(정말 몰랐다고?) 실은 처음부터 너와 네 노동이 모두 그러했다…… ‘일’을 깨기 위해 마음을 먼저 깨뜨린다. 일하는 각각의 사람이 그 순차적 파괴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이 파괴에서 망치를 쥔 인간은 회사의 지시를 노동자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사측 노동자들이다. 이수인에게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132면) 판매사원을 해고하라고 지시하는 정부장도, 그 지시를 전달하라고 지시했다는 푸르미 지점장 가스통도, 가스통의 지시를 최종적으로 전달받은 이수인 과장도, 회사에 고용된 노동자다. 최규석 작가는 이 구조에서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가를 작품 내내 말하지만, 누가 나쁘고 누가 선한가는 말하지 않는다. 『송곳』의 독자는 각 개인 중에 누가 악하고 누가 선한가를 판단하지 않는 작가의 관점을 따라 푸르미 노조의 설립 과정과 권리쟁의 과정을 목격한다. ‘악한 강자, 선한 약자’ 프레임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당혹스러울 국면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최규석 작가를 만난 자리에서 이 이야기부터 했다.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263면) 노동상담소 소장인 구고신이 이수인에게 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나쁜 강자, 착한 약자 프레임에 익숙하다. 곳곳에서 이 프레임을 깨고자 한 노력이 보인다.

 

그렇다. 선한 약자도 깨야 하고 악한 강자도 깨야 하고. 선한 약자 프레임에 대한 비판에는 이런 욕망이 있다. “윤리적 틀을 우리가 덮어쓰고 싶지 않다.” “우리는 선하지 않아도 우리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강자가 악하다’는 프레임은 깨고 싶지 않은 욕망이 있다.

 

‘선한 약자’보다 깨기 어려운 프레임일 수도 있겠다.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운다.” 인기가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논리적인 틀만 놓고 보면 위험한 말이다. 그러면 강자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비판하고 공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발생하니까. 강을 악으로 그리지 않으면 논리가 복잡해진다.

 

그런 복잡한 상황이 작품에 종종 나오는데.

 

누군가가 굉장히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누군가는 왜 이렇게 강력한 의지를 가지는가,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 사람의 행위 경로를 만들어내는 틀은 우리 사회가 만든다. 그것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기에 집중을 해야 하는데 잘 안 된다 그게.

 

사회적 문제에서 사람을 미워할 경우, 할 수 있는 일은 그 한 사람을 있는 힘껏 미워하는 것밖에 없다. ‘악한 강자’ 프레임이 먼저 작동하면 비난이 개인에게 집중되면서 구조적 문제점을 잘 보지 못하게 된다…… 최규석 작가의 선인/악인 프레임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그렇게 들었다. 사회는 구조이고 이 구조엔 서열이라는 것이 있으며 더 약하고 더 강한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 간에 분쟁이 있을 때 특히 구조적으로 더 약하고 더 강한 존재 사이에 싸움이 붙었을 때, 제도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면 『송곳』의 푸르미 상황은 어떤가.

스타일이 먼저 작동한다. 정부장은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재포장 판매해 부과된 벌금 50만원과 관련 공무원 접대비로 지출한 48만원, 도합 “98만원의 비용으로 수천만원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직접 증명해 보이며 프랑스인인 가스통에게 한국의 룰을 학습시킨다. “디스 이즈 코리아 스타일”(343면)을 천진하게 내밀어 제도에 앞선 스타일을 선보인다. 가스통이 후에 노조탄압을 자기합리화하면서 ‘현지화’라고 주장하는 코리안 스타일이다. 그 장면에서 내가 독자로서 느낀 수치심에 대해 말하자 최규석 작가는 그 부분을 그리면서 느낀 죄책감에 대해 말했다.

 

ⓒ이정수

ⓒ이정수

 

그 부분을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렸다. 한국사회를 싸잡아 욕하는 데서 느끼는 쾌감이 있는데 그걸 자극하는 장면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걸 자극하는 방식의 작업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이 상당히 그렇다. 스토리 진행상 필요한 부분이고 정부장은 그런 사람이고. 복잡하다. 죄책감을 느끼는데, 필요하니까 그려야 되고. 디스 이즈 코리안 스타일. 그 말 자체가 헬조선, 하고 한마디 던지는 거랑 똑같다. 그렇게 분석하는 것을 나는 싫어한다. 더러운 물을 보고 ‘똥물이다, 저기 손을 담그면 몸이 다 더러워진다’라고 하는 것과, ‘똥이 몇 프로 섞여 있고 물이 몇 프로이며 똥 외에 흙이 어느 정도 섞여 색깔이 저렇고 이걸 분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다르지 않나.

 

‘저기가 똥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지금 내 몸이 담긴 여기가 똥물’이라고 말하는 것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담그고 있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거다. 우리가 다 똥물에 담겨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면 그 분석에 의해서 그렇다,라고 인정하는 사람의 경우, 어제까지 똥물이 아니었는데 오늘 갑자기 똥물이 된 거잖나. 그러면 어제까지 그렇게 많이 불편하지 않았다가 오늘 갑자기 사는 게 굉장히 불편해지는 거다 계속 가려워지고. 내가 그걸 주는 역할을 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한다.

 

『송곳』이라는 작품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나.

 

맞다. 그 공포를 계속 가지면서 하는 거다. 지금까지 몰랐던 관점을 만화로 누군가에게 제시했을 때, 그 사람이 그걸 받아들였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거지, 어제까지 그 사람에게 괜찮았던 것이 갑자기 오늘 안 괜찮아져서 괴로워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뭔가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건 좀더 나은 상태가 되는 건데……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건조하게 사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에 기여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있는데. 그게 참 어렵다.

 

 

3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상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 있나.

 

100℃』(창비 2009)에서.

 

어떤 질문이었나.

 

왜 여성 캐릭터가 어머니로만 존재하느냐고. 독자 만남에서 받은 질문이었다. 『100℃』는 취재를 통해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소속 부모님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다. 취재를 할수록 대중매체에서 그려지는 어머니상이라는 것이 너무 확고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의 동기를 다양하게 찾아보려고 해도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의 동기가 다 광주인 것처럼. 현실이 그랬다.

 

“해야 하고/해도 되면/하는 거요.”(4114면)

구고신이 이수인에게 하는 말이다. 등장할 때부터 조마조마했다. 구고신은 왜 이렇게 말할까, 이 대목이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할까, “해야 하면/하는 거요”였다면 좀 덜 불안할까…… 그런 생각을 하느라고 그 페이지에서 독서가 한동안 중단되었다. 아무래도 중간 토막, “해도 되면”이 내게 문제였던 것 같다. 해도 된다고 판단하는 것은 누구일까. 거기에 너무 많은 권력이 있다. 권력(힘, power)은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다. 사울 알린스키가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 ‘사악한 단어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한 첫번째 예가 권력이다. 그러나 “권력의 부패는 권력 자체에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있다.”3 쉽게 억압받는 사람들이 억압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힘은 필요하다. 노동쟁의는 그 힘을 가져야 할 노동자들이 제대로 그것을 가지려는 싸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야 하고/해도 되면/하는 거요, 이 권력의 논리는 노동자를 대하는 사측 태도와 같다. 『송곳』에서, 그리고 너무 많은 현실에서. 구고신의 말로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최규석 작가는 그 점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송곳』의 다른 장면에서 “프랑스 회사고 점장도 프랑스인인데 왜 노조를 거부하는 걸까요?”라고 묻는 질문에 “여기서는 그렇게 해도 되니까”(1204면)라는 대답이 등장하기도 한다.

 

구고신의 말은 모든 적들이 쓸 수 있는 말이다. 멋있어 보이지만 굉장히 위험한 말들. 전쟁의 언어들.

 

이 전쟁의 언어는 송부장이라는 인물에게도 사용된다. 이수인은 물리적 충돌이 벌어져 노사 협상에 불리한 상황이 되기 전에 ‘씨발년’이라는 말로 송부장을 매장에서 퇴장시켰다.

 

이수인 본인도 한 20년은 후회할 일이다.

 

이수인은 그뒤로 한동안 모자를 쓰고 다닌다. 왜 모자를 씌웠나?

 

그거는 파업을 시작해서…… 잘 씻지 못하니까. (송부장에게 한 언행 때문에) 부끄럽다기보다는……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워낙 황급한 국면이라 전략을 짤 시간도 없고. 더 나은 선택지도 있을 수 있었겠지.

 

송부장에게 전쟁의 언어를 사용하기 직전까지도 이수인은 갈등한다. “해도 되는가?”(5201면) 구고신의 견인과 자기 자신의 필요로 노조활동에 발을 들이게 된 이수인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차마 넘기 싫은 선’을 넘는다. ‘더 많은 아군’이 아니라 ‘시스템’이 제때에 작동해야 한다고, 후에 이수인은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끼리’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고 말이다. 전출이 결정되어 푸르미 매장을 떠날 때 이수인은 송부장에게 한 말 때문에 매장에 남은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지 못한 채 떠난다.

 

 

4

 

전반전과 후반전 같다.

한두해 전에 『송곳』을 3권까지 보고, 최근 완결된 내용까지 여섯권을 한꺼번에 본 뒤에, 그런 생각을 했다. 1권에서 3권에 이르는 이야기가 전반전, 4권에서 6권까지가 후반전. 시작부터 절반은 이제 모여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에너지와 접촉함이었다면 나머지 절반은 내내 쓰러지기를 거듭하는 도미노를 목격함이었다. 『송곳』의 후반엔 보다 많은 입장들이 등장하고 각자의 맥락이 더 구체적으로 언급되면서 붕괴가 진행된다. 구고신의 과거가 등장하고,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구고신과 함께했지만 현재는 사측에 고용되어 노조를 깨고 다니는 전문가, 정환도 등장한다. 이수인에게는 배우자인 영진씨가 짊어진 독박 육아라는 맥락이 붙는다. “일상이 들이닥쳤다.”(598면) 일상을 지키려고 시작한 싸움이 일상을 무너뜨리고, 일상이 그 싸움을 무너뜨린다.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는다는 말로 3권을 끝내놓고, 그뒤로는 거의 모든 인물을 넘어뜨리고 무너뜨린다. 작가가 작정한 것 같고…… 작품 속 인물들은 이제 그만할까, 여기서 그만둘까를 고민하고 독자는 여기서 그만 읽을까, 이것을 읽기(목격하기)를 그만둘까를 고민한다.

 

Ⓒ신나라

Ⓒ신나라

 

이 낙차는 처음부터 계획했나.

 

훨씬 더 심하게 떨어뜨릴 계획이었다. 미안하더라. 현장에서 고생하는 분들의 힘을 뺄 것 같다는 걱정도 있었다.

 

후반은 읽기의 경험이 아니라 목격의 경험이다. 이걸 중단하고자 하는 욕구가 계속 생긴다. 작품 속 인물이 이제 그만할까,라고 갈등하는데 독자가 그걸 같이 경험한다. 현실을 목격하는 과정과 같았다. 의도했나.

 

그거 하면 안 되는데. 원래 계획은 훨씬 심했다. 독자들이 이수인을 미워하게 만들려고 했다. 독자들이 이수인에게 그만 좀 해라 이 새끼야, 하도록. 실제 장투(장기투쟁)를 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그렇지 않나. 처음엔 어느 정도 동조하고 불쌍하네, 하다가 길어지면 홱 뒤집어지는 순간이 온다. 쟤들 아직도 저러고 있네, 하면서 미워하는. 이 경험을 만화에서 똑같이 줘볼까, 했는데…… 작가로서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다 사실은. 독자들이 계속 붙어 있으면서, 적어도 붙어 있게 만들어야지, 붙어 있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게 만들어야지, 작품 자체를 보면서 싫어하게 만들면 안 되는 거다.

 

방향은 애초 계획 그대로 갔고, 다만 완급 조절을 했나.

 

했지만 철회는 안 했다.

 

5권에서 푸르미 노조는 천막농성에 들어간다. “치는 건 일도 아”닌데 “지키기가 어렵”(5214면)다는 바로 그 천막이 푸르미 매장 앞에 펼쳐진다. 이 천막에 ‘1일차’ 딱지가 붙으면서 『송곳』은 마지막권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1일차’ 팻말이 5권의 마지막 컷이다. 광화문 지하보도의 장애인 농성장 5년,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여전한 9년, 세월호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의 이제 거의 4년. 그 어디에나 붙었을 1일차.

그걸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최규석 작가에게 물었다.

 

시작의 어려움. 이제 시작 아닌가. 그 장면이 5권 엔딩이다. 1자 하나 붙이기까지 다섯권을 쓴 거다. 텐트를 치기까지도 싸움을 했고. 시작의 어려움, 이런 시작을 왜 해야 되는가. 그 전에 좀,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사람들 감정의 골이 더 커지기 전에, 제도적으로 건조하게 당신이 가져갈 몫이 이만큼이고 딱딱 잘라주는 순간들이 좀…… 국가가 개입해야 할 순간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이게 안 된 거잖나. 결국은 사람들끼리 싸우는 걸로 계속 끌고 가게 된 건데 그것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다. 복잡했다.

 

 

5

 

최규석 작가에게 독자란 어떤 사람들인가.

 

납득시켜야 하는 사람들.

 

『송곳』은 그렇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나?

 

모르겠다. 기본적인 목적은 달성했다. 노조위원장이 주인공인 만화인데 사람들이 재미있게 봤다.

 

힘들이고 애쓰느라고 지치고 고달프고 괴로우며 수고롭고 치사한, 일을 하는 것. .

흔들리고 옮기고 동요하고 떨리고 느끼며 일어나고 시작하고 나타나고 변하며, 움직이는 것. .

『송곳』은 노동(勞動)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그 언어를 독자에게 돌려주는 노조만화다. 이 책이 이십여년 전에 존재했고 내 동생들과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마트에서 백화점에서 햄버거 체인점에서 누구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며 나와 내 옆사람의 노동에 무지한 채 학교를 오가는 것과 같은 상태로 겁먹고 피곤한 채로 일하고 퇴근하던 때. 그때 우리가 이미 이 만화의 독자였다면. 『송곳』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마지막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부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기를.

『송곳』의 마지막 장면은 승리나 실패가 아니다. 노사합의 결과로 연수원으로 전출된 이수인은 주어진 조건에서 일상을 계속한다. 사측이 작성한 서비스 교육 책자와 노조 소식지를 함께 배포하다가,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묻는 연수원 부장에게 이수인은 대답한다.

“노동조합 일상활동입니다.”(62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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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울 알린스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박순성·박지우 옮김, 아르케 2016, 94면.
  2. “완전한 인간에게는 완전한 일, 즉 손만이 아니라 마음을 위한 일이 필요하다. 그런 일을 통해서 그는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고 본연의 역할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사울 알린스키 『래디컬』, 정인경 옮김, 생각의힘 2016, 58면.
  3.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9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