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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신샛별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절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의 두가지 행로」 등이 있음. venus860510@naver.com

 

정용준 鄭容俊

소설가.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장편소설 『바벨』 등이 있음. sfcyjlove@naver.com

 

최정례 崔正禮

시인.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 감정』 『Instances』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개천은 용의 홈타운』 등이 있음. ch2222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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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최정례, 정용준, 신샛별. Ⓒ신나라

 

 

신샛별 안녕하세요. 2018년 상반기 문학초점을 최정례 시인과 함께 맡았습니다. 봄호에는 정용준 소설가를 모셨습니다. 각자 시인, 소설가,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이 풍성하게 펼쳐지기를 기대합니다.

 

최정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처음인데 만나서 반갑습니다. 덕분에 시와 소설을 집중적으로 읽게 돼서 바빴지만 몰입의 시간이 참 좋았어요.

 

정용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겨울의 몇 안 되는 목표 중 하나가 독서였는데, 좋은 기회 혹은 핑계가 생긴 것 같아 참여하게 됐습니다.(웃음)

 

 

이해존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실천문학사)

 

179_360신샛별 『당신에게 건넨 말이 소문이 되어 돌아왔다』는 이해존 시인의 첫번째 시집입니다. 수차례의 손질을 거쳐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시편들이 묶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최정례 이해존 시인은 오랫동안 편집 일을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먼발치에서 고개 숙이고 일하는 모습만 봤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어요. 사실은 시를 쓰는 줄도 몰랐어요.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었고요. 이번 시집을 읽는 중에도 ‘필경사 바틀비’처럼 항상 고개 숙이고 일만 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겹쳐 보이더라고요. 특히 「옆구리」 「감별사 K」 「공평한 어둠」 같은 시에서요. 혼자서 갖은 고생을 다하며 살고 있겠구나 짐작은 되는데 그런 삶의 모습들이 전면적이거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파편으로만 언뜻언뜻 흩어져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입자」 「녹번동」 「고시원」 같은 시에서는 우리 사회·경제의 고질적 문제가 한 개인의 거주공간에 어떤 폭력을 가하는지 여실히 드러나지요. 요즘 비싼 집값 때문에 갈 곳 없는 이들이 변두리로, 더 열악하고 좁은 방으로 전전하는 일이 허다하잖아요. 시인은 몸 하나 편히 누일 공간 없는 비극을 직설적으로 고발하지 않아요. 점묘하듯이 슬쩍슬쩍 엮어 넣지요. 그림자처럼 비치는 그런 장면들이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신샛별 등단작 「녹번동」은 저도 유심히 봤습니다. 세 들어 사는 작은 방에 유폐된 상태를 백족(百足), 즉 지네라는 상관물을 등장시켜 표현했더라고요. 다리가 백개나 있지만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상황을 1절에서 보여주고, 2절에서는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라는 구절을 통해 상처 입은 시적화자의 괴로움과 울부짖고 싶은 심정을 토해내요. 그리고 마지막 3절에서는 침수로 젖었던 동네가 햇빛에 세간을 내다 널고 삶을 복구해나가는 이미지들이 나열되는데, 미약한 생의 의지와 탈출에 대한 희미한 기대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협소하고 남루한 공간에서 느끼는 절망을 강렬하면서도 아프게 전달하고 있어요.

 

정용준 저는 이분의 시가 굉장히 사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적인 걸 썼다는 뜻이 아니라 시가 시인의 개인적인 감정과 감각의 결과물처럼 느껴졌어요. 그런 점이 무척 좋았어요. 세계의 여러가지 문제가 객관적인 상황으로 그려지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끝내 사적으로 만들어서, 작가의 정서 안에 들여놓고 해소해내요. 저는 시를 읽을 때 내용과 단어, 시인의 생각·사상·가치관·의도보다 우선 시인의 문체를 직관적으로 느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시인의 몸과 마음의 일부로서 언어가 느껴지는 걸 좋아해요. 사적이라는 건 이런 의미요. 읽는 내내 시인을 만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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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례

최정례 이 시인은 시를 통해 투쟁하거나 고발하려는 의지를 드러내지 않아요. 시를 전개할 때도 진술의 방법을 쓰지 않고 묘사 형식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는 드러내려 하지 않고요. 사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거예요. 오랫동안 한국 시가 사회적 고발을 열정적으로 했잖아요. 그러나 시를 고발의 수단으로써만 사용한다면 목적 달성 이후에는 시의 존재 이유가 없어지거나 그 목적의 시녀 이상이 될 수 없겠지요. 즉 시는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걸 이해존 시인은 이미 잘 파악거지요.

 

신샛별 그런 점에서 「수상한 사과」와 「유목의 방」이 흥미롭습니다. 「수상한 사과」는 어 과일행상의 자살 뉴스의 영향하에 썼고, 「유목의 방」은 고시원 옥상에 설치된 천막 휴게실에서 이주노동자와 교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시인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는데요. 그같은 배후의 사연이나 경험이 시에 드러나지는 않아요. ‘현실이 잘 반영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최정례 시인 말씀대로 의도된 것이라면 하나의 기법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저는 초점화가 잘 안 됐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용준 초점화가 잘 안 되어 있기도 하고 사적인 감정조차 희미하게 느껴지긴 했어요. 감정을 감추는 거죠. 고시원에서의 삶이나 사회적 사건에서 시상이나 소재를 끌어오는데, 그것을 시적화자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희미해요. 하지만 그런 미지근한 느낌이 좋아요. 세계에 대해 내가 느끼는 슬픔과 시적화자가 느끼는 슬픔이 같은지 다른지 알 수 없는 흐릿함이요.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흐릿해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반면 「확실한 거실」에서 “창문이 창문을 바라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발상과 전개는 잘 는 감정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익숙하면서도 친근했달까요. 약간 고전적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요.

 

최정례 우리나라의 심각한 부동산 문제를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 사람이 읽는다면 현실이 아니라 상상의 장면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내 키만 한 곳에 창을 단 골목을 지나 주인집 대문을 열면, 또 다른 골목으로 창을 낸 내 방으로 통한다 사방 처마가 전깃줄을 끌어내려 밑동을 땅에 묻지 않아도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전봇대, 그 어지러운 전깃줄의 수혈이 아니고는 이곳은 난청이다”(「이곳은 난청이다」). 그런데 상상이 아니라 진짜 우리의 참담한 주거환경이잖아요. 굉장히 리얼 현실인데, 그 현실을 문제 삼는 시인은 많지 않지요.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져요.

 

신샛별 이 시인에게 빈곤을 비관한 자살이라든가 참담한 주거환경 등 이른바 사회적 사안들은 삶의 기본전제라 자신과 분리가 불가능한 것 같아요. 어느 정도냐면 그런 사안들을 독자가 시에서 감지할 수 없을 만큼으로요. 시인의 고통과 세계의 척박함이 일체화돼 있다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듯합니다. 시인과 세계 사이에 적절한 거리가 설정될 때, 달리 말해 세계와의 대자적 관계가 맺어질 때, 이런 종류의 시가 추구하는 정서적 효과가 독자에게는 더 잘 발휘되지 않을까요. 사진을 찍을 때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피사체와 무작정 가까워져서만은 안 되잖아요. 「수상한 사과」나 「유목의 방」의 경우 시인이 세계와 너무 밀착돼 있어서 독자의 눈에는 오히려 상이 잘 맺히지 않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 시편들에서 모종의 절실함을 느꼈지만 정작 무엇에 대한 절실함인지는 끝내 뿌옇게 보였어요.

 

정용준 시인이 척박한 세계 속에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거죠. 저는 소설가여서인지 시에 등장하는 인물과 그 인물이 처한 상황을 먼저 봐요. 세계가 척박할수록 인물은 상황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이 시의 화자들은 순응적이에요. 이 순응은 비겁함과는 다른데, 어떤 포기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감각이 살아 있요. 그러나 감각만 있기 때문에 어떠한 주장도 강하게 하지는 않는 거죠.

 

최정례 시인이 개인의 비극적 생활상을 내보이며 진부한 고발 형식으로 주장했더라면 자해공갈단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아니면 계몽적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고요. 일상 속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지게 하려면 진술적 주장보다는 묘사가 더 효과적일 거예요. 그것이 체념적 태도로 보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이런 적나라한 체념상태가 주장이 할 수 있는 효과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답답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은 큰 목소리의 주장보다 체념하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가슴 아프거든요.

 

정용준 제게는 ‘시인’에 대한 세 종류의 이미지가 있어요. ‘분노하는 사람’ ‘미치거나 이상한 사람’ ‘슬픈 사람’이요. 이해존은 슬픈 시인 같아요. 전 슬픈 시인이 쓴 시를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집을 끝까지 읽으며 자조적인 것 이상을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시선이 머무는 자리 하나하나를 넘어선 부분이라든가, 아니면 내적인 가치판단 같은 거요. 시를 사회적으로 환원하라는 뜻이 아니라 시적화자가 갖는 감정의 정체가 더 드러나길 바라는 거죠.

 

최정례 「이미테이션」에서는 세상 모든 걸 가짜라고 봐요. 가짜가 주인인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지요. 이 시에서 시인의 문학관이나 인생관이 드러나요. 모두가 가짜인 거죠. 이 가짜들과 사는 방법은 하는 일을 계속하며 끊임없이 실존적인 대화를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마치 시시포스처럼요. 그렇게 보면 ‘순응’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정용준 저도 「이미테이션」에 실존적인 모습이 투영돼 있다고 요. 그러나 그 실존이 드러내는 정서가 순응적으로 느껴졌다는 뜻이에요. 좀더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지, 상황에 패배했다는 의미 아닙니다. 사실 체념이라는 감정은 인간이 삶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갖게 되는 것이고 저 역시 문학에서 인간을 다룰 때 가장 궁극적인 상태가 체념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체념과 순응은 어쩌면 완료된 느낌이거나 초월한 느낌으로 다가와요. 저는 그 순간의 시적화자의 표정 그리고 시가 끝났을 때 변화된 시인의 표정을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박순원 『에르고스테롤』(파란)

 

179_366신샛별 정용준 소설가가 말한 시인의 세가지 이미지가 재미있어요. 이해존이 슬픈 시인이라면 박순원은 어떤 시인일까요?

 

정용준 이상한 시인에 속하지 않을까요?(웃음) 박순원의 시집은 이상한 면이 있기 때문에 읽으며 무척 즐거웠어요.

 

최정례 박순원은 이상하고 재미있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가 좀 재미있으면 안 되나요? 우리 시단은 지나치게 진지하지요. 우리가 슬프고 비극적인 역사를 지나왔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웃기는 시, 깔깔거리는 시를 제외해버린다면 우리 시를 협소한 장에 가두는 것이겠지요. 물론 박순원의 시가 가볍게 웃고 지나칠 수 있는 시는 아니라고 봐요. 자기풍자의 자조적인 시는 때로 읽는 사람을 서늘하게 하기도 하지요.

 

신샛별 시집 전반에 말장난이 풍부하죠. 「포동포동」 같은 시를 읽으면서 ‘아, 시인은 원래 말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어요. 단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 같은 태도가 보이죠. 그래서 동시를 읽을 때와 흡사한 재미를 느끼게도 하고요. 그러나 어떤 말놀이 단지 유희에서 끝나버려 아쉽기도 했습니다. 저는 정치적인 언어를 가지고 말장난하는 시들이 특별히 좋았어요. 정치적 언어에는 어떤 과잉이 있고, 그래서 그 언어를 사용할 때 중압감을 느끼게 되는데 박순원의 시를 통과하면서는 순간적으로 가벼워졌어요. 해방감을 주더라고요.

 

최정례 그 점이 정말 좋죠. 저는 박순원의 시집들을 거의 다 읽었는데 ‘주먹이 운다’라는 제목의 두번째 시집(서정시학 2008)을 읽고 깜짝 놀랐어요. 특이했어요. 진지하지 않으면서 할 말을 다 하는 시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세번째 시집 『그런데 그런데』(실천문학사 2013)에서는 술 마시는 이야기가 아주 많이 나오는데, 좀 거슬리더라고요. 각성 상태에서 세계와 맞대면하는 시를 좀 보여줬으면 하고 바랐거든요. 그래서 이번 시집은 어떨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읽었는데, 일단 술 마시는 이야기가 없더라고요.(웃음)

 

신샛별 세월호와 관련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일곱 시간’을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일곱 시간은 내가 말하는 일곱 시간이 아니다”(「일곱 시간」)라고 선언한 뒤 풍자적으로 사용할 때, “나는 중복이다 중복 세력이다”(「나는 거듭거듭」)로 시작해서 ‘종북’이라는 말을 자유롭게 가지고 놀 때 참 신선했습니다.

 

정용준 오랜만에 제대로 된 풍자를 봤어요. 그게 정치적인 고발을 끌어안을 때는 굉장히 빛이 나더라고요. 르뽀처럼 힘준 고발이 아니라, 마당놀이처럼 과장도 하고 자기비하도 하면서 웃고 떠들며 풍자하는 거죠.

 

최정례 자기를 풍자하지 않고 남만 풍자하는 시는 엄밀한 의미에서 풍자시라 할 수 없지요. 독자의 호응을 얻기가 어려워요. 그러나 박순원 시인은 그 풍자 속에 늘 자신을 포함하는 자조적인 어조로 공감을 획득하죠. 예를 들어 “일제시대 태어났더라면 나는 친일을 했을 것이다 아니 친일할 기회가 없어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 같은 구절은 너무 솔직해서 읽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민족주의자들에게 몰매 맞을까봐 저는 이런 말 못해요. 무서워요.(웃음) 그러나 이 천진한 자기고발 형식의 자기풍자가 주는 매력이 있어요.

 

신샛별 자신의 속물성을 천진난만하게 인정해버리니 웃음이 터지더라고요.

 

정용준 그냥 웃긴 게 아니라,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웃음이었어요. 그래서 더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시처럼 오래된 문학 장르가 또 없잖아요. 이만큼 문학적 기교나 스타일에 예민한 분야도 없고요. 고전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새로이 던지는 천진난만한 신선함이 있었어요. 아까 말장난이라고 하셨는데, 그런 어린아이 같은 접근법도 좋았어요. 저는 말장난이 궁극적으로는 아름다움에 접근해야 한다고 믿어요.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언어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에요. 이 시집은 자유롭게 그런 지점까지 다가가는 것 같더라고요.

 

최정례 종결 부분에서 통쾌하게 끝나는 시가 많아요. 예를 들어 「가죽」에서는 사람의 가죽을 쓰고 태어나 가죽 값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능청스럽게 늘어놓다가 느닷없이 군대에서나 경험했을 것 같은 어투가 끼어들면서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 쓰고 반납할 때 개수만 맞으면 된다니까”라면서 끝나버려요. 전혀 예상치 못한 유쾌한 종결인데 시에서 이러기가 쉽지 않거든요. 대충 쓴 것 같지만 고심한 결과지요. 또한 이 시인은 한꺼번에 에너지를 쏟아내는 다변의 형식을 취요. 게다가 굉장히 빠르고 리듬감도 있어요. 그런데 그 특유의 어조나 많은 말을 풀어내는 과정이 일정한 톤으로 고조되어 다소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에너지나 박자의 강약을 조절하며 다양하게 접근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신샛별 자기풍자적 시 중에서도 「언젠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이 시인이 공동체적 감각 속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게 보였어요. “아버지는 여전히 정권에 빌붙지도 못 하고 저항도 못 하고 나는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없이 친구 얘기나 팔아 이게 시가 될까 어쩔까 더듬더듬 쓰고 있지 여태 정권에 빌붙지도 못 하고 저항도 못 하고” 같은 부분에서 시적화자는 자신의 세속적 삶을 공동체와의 연관 속에서 반성하고 있거든요. 부당한 권력에 투항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항도 하지 않 채 생계에만 몰두해온 아버지와 스스로의 지난날을 반복적으로 환기하고, 어린 시절 고향 친구의 부고를 듣고도 팍팍한 서울살이에 적응하느라 무심했던 과거를 부채의식 속에서 떠올리는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부당한 권력의 자장 안에서 누군가에게 빚을 진 채로 내가 여태 살아왔고, 여전히 살고 있다는 이 시의 감각이 요즘은 확실히 귀해진 것 같아요.

 

최정례 그러한 부채의식조차 뒤집어서 말하죠. 즉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한없이 미천한 속물이라고 말하지요. 표피적 언행은 자신의 속물성을 위악적으로 드러내면서 실은 그 이상을 말하고 싶어하는데 독자들은 그것을 감지하고 공감하게 되지요. 대부분 사람들의 언행도 이와 같지 않나요? 공동체가 요구하는 거대이념 같은 것에 빌붙지도 못하고 저항하지도 못하면서 사사로운 일에 묻혀 살아가지요.

 

정용준 나이 들며 가져야 하는 ‘어른스러움’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진지함보다 좋은 것은 유연함과 유머라고 생각해요. 박순원이라는 시인 자체에 대한 궁금증이 자꾸 생겨나는 독서경험을 했어요. 분명 좋은 어른이지 않을까 생각했고, 시를 쓰는 작가의 태도가 과연 무엇일지 직접 물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바로 뒤에 다룰 장석남의 시도 마찬가지지만 이번 문학초점에서 다루는 시집들이 각각 오랜만에 접하는 정서를 담고 있는 듯해요. 지금 시단에서 주목받는 젊은 시인들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니까요.

 

 

장석남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

 

179_370신샛별 그러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자연스럽게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시집 전체를 읽고 난 후 제가 떠올린 것은 ‘동자승의 얼굴’이었습니다. 동자승이 쪼그려 앉아서 마당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주워 바닥에 무언가를 그고, 거기에 굉장한 의미가 담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쓱 지워버리고는 또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해맑음을 이 시집에서 봤어요. 안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해맑은데 그 깊이가 상당해서 무언가를 거듭 곱씹으며 사유하게 만드는 동자승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더라고요. 두분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정용준 3부 ‘고대(古代)에 가면’에 수록된 시편들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고대’라는 단어가 가진 ‘원형’이나 ‘전통’의 느낌을 넘어서 ‘희망’과 ‘궁금증’을 담아낸 것 같아요. 정말 ‘시인답다’라고 할 만한 모습들이 많이 보였어요. 신샛별 평론가 말씀에도 깊이 공감하는데, 무언가를 얼핏 보여주고 지우기 때문에 이미지가 휘발되는 느낌도 받았어요. 그럼에도 지워진 그 이미지를 기억하려는 또다른 이미지들이 시집 전체에서 등장하는 것 같고요.

 

최정례 독자들이 시인에게 으레 기대하는 시들이 있잖아요. 장석남 시인은 항상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시를 써왔어요. 그런데 사람은 이상해요. 맛있는 음식을 자꾸 먹다보면 이상한 쓴맛의 특별한 자극을 원하는 것처럼 좀 파격적인 어떤 것을 원하게 되더라고요. 이번 시집에서 본 「눈사람의 스러짐」은 저를 한방 꽝 쳤어요. 「정육점」 「오후 세시의 나무」도 좋았고요. 순전히 취향이 반영된 것이지만, 이 세편의 공통점은 기존의 장석남 시와 달랐다는 거예요. 아주 쓴맛의 시였어요.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1)의 「그리운 시냇가」를 쓸 때의 시인이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제 자꾸 죽음을 생각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원숙한 시선을 갖게 된 것 같았어요. 그런데 장석남 시인 아직 젊잖아요.(웃음) 젊어도 늙어서야 쓸 수 있는 시를, 그리고 늙어도 젊은 시를 쓸 수 있는 게 시인의 능력이지요. 「눈사람의 스러짐」 같은 시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맞닥뜨려야 할 국면을 담대하게 마주 대해요. “나는 녹는다 (…) 나는 소리친다 소리친다/누구도 듣지 않으므로/발밑에서 질척인다 나의 외침은” 같은 구절이 특히 그래요. 녹고 스러지면서도 소리친다는 것이 세상이 주목하지 않아도 시를 써왔고 쓰겠다는 외침처럼 들렸어요. 그리고 이어서 “나의 스러짐/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한 방의 펀치를 날리는데 존재의 한계를 향해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아까 신샛별 평론가가 언급한 동자승의 이미지처럼, 이 시는 시인이 질긴 수련을 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육점」 같은 시도 시인이 예전에는 이런 국면 속에서 시를 찾아내지 않았어요. “천장에 매달려 뼈째 가슴을 벌린 팔등신/바닥엔 몇점 응고된 피” 좀 끔찍한 풍경이잖아요. 이런 시는 슬프죠.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막막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지요.

 

정용준 ‘정육점’이라는 단어 자체가 왠지 생경했어요.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단어’를 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정육점’이 왠지 장석남의 단어가 아닌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최정례 시인의 말씀을 들으니 그 생경함의 정체가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신샛별 장석남의 앞선 시집들이 자연을 많이 다뤄왔기 때문인지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도 ‘탈속’이나 ‘도인’ 같은 단어를 먼저 연상하게 됐는데요. 저는 이 시인이 자연에 몰입한다기보다 더 정확히는 자연과 인간이 접촉하는 면에 이끌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예컨대 「한 소식」에서 화자의 시선은 여자를 업은 남자가 남긴 두 사람 무게의 발자국에 머물러 있는데 “무거웠던 자국에서/가장 먼저 흙이 올라올 겁니다”라고 마무리돼요. 인간의 족적과 대지의 찰나적 접촉면에서 ‘한 소식’, 즉 깨달음이 피어난다는 발상이 담겨 있는 거죠. 또 「어느 겨울날 오후에 내 발은」에는 한쪽 발이 햇빛에 물들어 절름발이가 된 화자가 등장하는데요. 그는 절뚝거리면서도 “황금 웃음”을 보여줘요. 인간의 관점에서라면 신체장애를 갖게 된 셈인데 “우는 대신 깔깔대고” 있으니 그 웃음이 기묘하죠. 장석남의 경우 인간과 자연의 교집합에서 태어나는 육체를 우리 시대의 이상적 인간으로 생각하고 그 아름다움을 말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듯해요. 그래서 경계지점의 표식이 되는 ‘문’ 같은 시어를, “나는 아무 데나 문이 되어 서 있곤 하였다”(「문을 얻다」)라든가 “안팎으로 문은/사람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달과 바람을 가리지 않고 (…)//가끔 문을 잠그고/적적한 어둠속에서/아이를 만든다”(「문을 내려놓다」)라는 식으로 사용하는 것 같고요.

 

최정례 감각이 섬세해요. 방금 언급하신 ‘햇빛에 물드는 발’에서도 그런 예민한 감각이 돋보였는데, 「녹슨 솥 곁에서」를 비롯 고대를 거슬러 오르며 상상하는 시 여러편 있어요. 지나치기 쉬운 이런 소재들, 특히 햇소금, 녹슨 솥, 대장간 같은 것에 주목 시를 써낼 때 시인 특유의 감각이 발휘되는데,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재 시점에서 도시생활을 하면서 이런 오래된 것들을 낚아채는 감각은 아주 모던한 것들 속에서 훈련된 안목을 지녀야만 지요. 이런 시선들이 시집 전체를 세련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정용준 「입춘 부근」을 보면 “문득 다가서며/밥 먹는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지점에서 저는 시적 순간 같은 것을 느꼈어요. “밥 먹는가”, 이렇게 짧은 말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말한 것인가를 곱씹다보니 기분이 묘해지더라고요. 아까 말씀하신 자연과 인간의 교집합에서 태어난 이상적 인간이 여기서도 드러난 것 아닐까 싶어요.

 

신샛별 그 시 바로 다음의 「파란 돛」도 좋았어요. 이 시를 보면 장석남에게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라는 말보다는 감각을 능숙하게 부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도 같아요. “바다는/어디서부터 가져온 파도를 해변에, 하나의 사소한 소멸로써/부려놓는 것일까/누군가의 내부를 향한 응시를/이 세계의 경계에 부려놓는 것일까”. 덧없는 반복처럼 보이는 파도를 “누군가의 내부를 향한 응시”라고 표현한 것이 신선하고 절묘했어요. ‘응시’는 정적이고 지속적인 느낌을 주는데,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동적이고 순간적인 속성과는 반대니까요. 그런데 바닷가에 서 있는 누군가가 파도를 본다면 어느 순간 그 파도가 자기의 내부를 들여다보러 자꾸 온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요.

 

정용준 「고양이가 다니는 길」도 참 좋았어요. “조용하여라/다정하여라/위태로워라”로 시작하는 노래를 만들고 싶어질 정도로요. 고양이의 세계를 세마디로 완전하게 정리하잖아요. 장석남 시가 좋은 것은 섬세한 감각 때문도 있지만, 그 안에서 파동처럼 느껴지는 음악성과 함축성 때문 같기도 해요. 이런 요소가 시에서 여전히 중요하다는 걸 몸소 보여줍니다.

 

최정례 그 부분에서 탁월하죠. 그야말로 노래로서의 시에서부터 그의 시가 비롯한 것은 맞아요. 가수가 되고 싶었던 시인이에요. 이를 두고 ‘다른 실험을 안 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나요? 우리가 믿고 있는 시에서 완성된 정수 뽑아내려는 노력이 중요하죠.

 

신샛별 언어의 조직과 배치를 통해 만들어지는 운율과 리듬을 요즘 유행하는 랩 말고 시에서도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이 시집은 무척 쉬운 언어들을 사용하면서 그런 감흥을 제공해요. 시의 음악성에 대한 고민이 저도 반가웠습니다.

 

정용준 『에르고스테롤』을 다루며 말놀이가 아름다움에 근접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음악성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 아름다움은, 뭐랄까 좋은 노래의 후렴처럼 다가와요.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고, 밑도 끝도 없고, 인과도 없이 자꾸 내면에서 발생하는 언어 같은 거죠.

 

신샛별 대체로 만족스러운 독서를 하신 것 같은데, 혹시 아쉬운 점은 없었는지요.

 

최정례 굳이 그런 것도 말해야 하나?(웃음) 장석남 시를 꾸준히 읽어온 독자로서 너무 잘 정돈된 시 혹은 정제된 시 벗어나서 좀 흩트려놓은 시도 보고 싶다, 그게 불만을 포함한 희망사항일 수 있겠네요.

 

정용준 독자들은 작가가 변치 않는 색깔을 계속 유지하길 바라면서, 동시에 이전과 똑같으면 똑같다고 비판하죠. 그런데 그 모순되는 요구가 사실은 타당하기도 해요. 우리는 가끔 십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에게서 새로운 좋은 점을 발견하기도 하잖아요. 비슷한 맥락에서, 저는 이 시인의 현재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삶의 어떤 고민이 들어와서 이런 시가 되었는지 선뜻 와닿지가 않았거든요.

 

최정례 독자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창작자 입장에서는 정말 부럽기도 했어요. 새로운 길이 아니라도, 가던 길을 더 깊이 파면서 갔다는 느낌이었거든요. 이게 말이 되나 모르겠네요.(웃음) 오히려 여러 길을 다니는 사람보다 더 긴 여정을 했다는 느낌도 들어요. 사실 「눈사람의 스러짐」 같은 시를 한편 썼으면, 뭐 다른 걸 바라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웃음)

 

 

배수아 『뱀과 물』(문학동네)

 

179_375신샛별 작가에게 변함없는 모습과 새로운 모습을 동시에 바라는 짓궂은 기대가 저에게도 있어요. 배수아의 소설을 오래 따라 읽어왔기 때문에 뱀과 물도 그런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소설집은 배수아의 초기작들을 떠올리게 해요. 초창기 소설에서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에 대한 애착이 보였거든요. 이후 작가는 한국사회의 빈곤과 계급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도 했고, 이방인의 위치에서 한국사회를 상대화해보는 실험도 했고, 근래에는 관념이나 사상을 소설 안에 끌어들이는 시도도 했지요.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에 재차 관심을 갖게 된 작가의 심경변화가 궁금해서 최근 대담을 찾아봤는데, ‘메르헨 소설’을 써보겠다는 의지를 피력더라고요. ‘메르헨 소설’이란 안데르센이나 그림형제가 먼저 떠오르는, 마법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가 등장하는 옛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우리에게는 ‘동화’라는 번역어뿐이라 ‘메르헨 소설’의 잔혹하기도 무섭기도 한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좀 어려워요. 어쨌든 이번 소설집이 ‘메르헨 소설’을 써보겠다는 각오의 결과물로 보였습니다.

 

정용준 『뱀과 물』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직관적으로 동화 같다고 느껴져요. 단지 아이가 나오고 환상적인 소재가 사용돼서가 아니라, 작가의 의식 자체가 동화처럼 전개돼요. 저는 기획된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소설집 전체가 다분히 연작소설 같아요. 그래서 각각의 소설이 서로 겹치는 부분을 찾는 재미가 있어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우화’와 ‘비극’은 중요한데, 사실 한국소설에는 우화적인 측면이 너무 부족하잖아요. 인과를 바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어디로든 뻗어나가는 서사의 확장성이 우화의 장점일 텐데 『뱀과 물』은 근사한 우화로 읽혀요. 배수아가 가진 정체불명의 유니크함도 이런 데서 오는 것 아닐까요.

 

최정례 ‘도대체 소설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하게 만들어요. 스토리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장면의 이미지만 읽게 되는데 그래도 되는 건가, 같은 질문이요. 소설의 개념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도무지 줄거리 요약이 안 돼요. 서사들은 흩어지다 날아오르고, 가방을 붙들고 있다가 노송나무가 되고 잠이 들었는지 어느새 꿈이에요. 두개의 자아가 분리 혹은 연합되면서 나와 타인도 구별이 안 돼요. 당황스럽지요. 『뱀과 물』의 첫번째 시가, 아니 시가 아니고 소설.(웃음)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가 제목이었죠. 이 소설 읽는 내내 ‘아니, 마무리를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전개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꿈이 넘쳐 현실이 되면서 어느 순간 모든 게 딱 맞아떨어지더라고요.

 

신샛별 최정례 시인께서 ‘시’라고 실수하셨지만, 사실 실수만은 아니기도 한 것이, 저도 종종 배수아의 소설을 시를 읽을 때와 비슷한 독법으로 읽게 되더라고요.(웃음) 저는 이 소설집 표지가 어쩌면 이 소설집이 겨냥하는 바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소녀가 나체의 상태, 그러니까 아무런 치장도 가면도 보호도 없이 원시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세계를 소설집이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여성이 근본적인 수준에서 맞닥뜨리는 불안과 공포가 이미지의 수준에서, 감각의 차원에서 구현돼 있는 거죠. ‘여성의 실존’이라는 추상이 배수아가 제시하는 장면들과 더불어 그 구체적 형상을 얻었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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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정용준 저는 소설가이고 때론 소설에 대 강의도 하지만, 여전히 소설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힘들어요. 소설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 모든 것을 하면서도 소설다운 소설이 있거든요. ‘로망스’라고 불리던 하나의 스토리가 ‘노블’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스토리를 이용한 작가의 개성과 의지가 중요해졌잖아요. 그만큼 풍성해지고 또 그만큼 확장되었고요. 그러면서 ‘비서사적이게 느껴지는 것도 서사 같다’는 의미있는 감각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소설의 외연은 점점 확장되었고 이제 그 누구도 ‘이것은 소설이다’ 또는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고 정의하거나 규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소설의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그 넓혀진 영역이 소설의 중요한 가치이자 의미라는 것을 계속 보여주고 증명하는 작가가 배수아라고 생각합니다.

 

최정례 소설 안 인물을 넘어, 소설 밖 작가에게도 늘 관심이 가요. 배수아 작가는 세상이 정해놓은 틀 속에 자기를 엮어 넣지 않으려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꼭 한번 옆에서 보았을 뿐인데 그런 태도가 참 좋아 보이더라고요. 누가 뭐라고 하든 독특한 자기 자신을 지켜내려는 태도 같은 거요. 그래서인지 소설을 쓰면서 독자들이 어떻게 읽을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 태도에서 이런 독특한 소설이 태어나는 것 아닐까요.

 

정용준 맞아요. 하지만 그걸 소설이라는 하나의 결과물로 완성하기는 어렵죠. 왜냐하면 문학 안에 논리와 원리가 존재하잖아요. 그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자유를 추구하는 게 배수아의 힘 아닐까 싶어요. 그럼에도 소설이 어렵고, 친절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소설은 설득의 대상도, 전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신샛별 배수아 소설에 전도되는 사람은 배수아 소설을 이미 경험한 사람이지 않을까요.(웃음) 그의 소설과 동행하면서 자유로워지는 걸 경험한 독자만이 그 매력에 전염될 것 같거든요. 저는 「뱀과 물」과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를 읽을 때 가장 짜릿했어요. 두 소설은 거울 보기, 꿈, 상상, 글쓰기 등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나’들을 펼쳐 보여주죠. 「뱀과 물」의 ‘길라’가 어리거나 늙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설정이나,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화자가 죽은 이국의 할머니와 동일한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할머니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이야기로 복원해내고, 그러는 동안 삶과 죽음, 국경 사이의 벽이 사라지는 모습은 김혜순의 시 「딸을 낳던 날의 기억」(『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을 떠올리게도 했어요. 이 시는 출산을 거울 보기에 은유하면서 그 순간에 여성이 자신의 과거와 미래, 어머니와 태아, 나아가 모계혈통의 먼 친족들까지 두루 만나게 된다고 말하는데, 여성의 내면에 여러 시공간이 잠재적으로 존재다는 발상이 배수아의 그것과 흡사해요. 이런 발상에서 소설이 풀려나오니 하나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거나 시공간들 사이에 분명한 문턱을 만들어두는 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죠.

 

최정례 그런 점이 소설을 읽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겠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대담하게 내보이게 된 자신감도 느껴지는데, 그의 번역작업이 소설 쓰기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페소아(F. Pessoa)나 제발트(W. G. Sebald)의 글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목소리에 작가 배수아 목소리가 덮어씌워지는 것이지요. 페소아 역시 배수아 못지않게 몽환적이거든요.

 

정용준 이 책을 좋게 읽은 저에게도 어려움은 있었어요. 그러나 어려운 것조차 아무 상관이 없어지는 어떤 종류의 이해심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런 소설을 좋게 읽었다고 하면, ‘나에게 이해가 되게 설명해보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저는 ‘이해하지 않았지만 좋았다’고 해요. 그런데 그 이해하지 않았지만 좋았다는 말조차 이해시키기가 힘들죠.(웃음) 소설에서 인과가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 인과마저 떼어내고 소설의 원리들을 포기해도 소설답다고 여겨지는 건 신샛별 평론가가 말씀하신 그 경험 때문이에요.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사실 저는 꿈이 나오는 소설 재미없어요. 갑자기 꿈으로 들어가면 촌스럽고 너무 쉬운 길을 택했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꿈이 현실의 한 축처럼 등장하니까 정말 ‘꿈답다’라는 느낌이 들면서 좋게 보였어요.

 

최정례 꿈에는 원래 시적인 요소들이 많아요. 꿈을 분석해보면 자신도 모르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현실에서 꿈으로, 꿈에서 현실로 이동할 때 그것이 꿈의 장면이라는 표시를 어떤 식으로든 하거든요. 그런데 배수아 소설에는 이런 장치가 없어요. 어떤 신호도 없죠. ‘이제부터 꿈이야’라고 말을 안 해주니까 너무 혼란스러워요.(웃음) 이건 작가의 담대함 때문인 것 같아요. 담대함은 작가의 창조적 자산이지요.

 

신샛별 배수아의 소설에서는 꿈과 현실이 분리되지 않고, 분리해본들 무의미할 것 같아요. 둘 사이에 문턱이 없으니 입구와 출구도 없고, 애초에 그런 경계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이 소설이 말하려는 바에 도달하죠. 완성된 하나의 세계로서 배수아의 소설을 대면할 때, 저는 제 내부에 주름처럼 접혀 있던 시공간의 다발이 한꺼번에 우르르 펼쳐지는 이완의 기분을 느껴요. 이 소설집에 대해 비평적으로는 수많은 잠재적 상태를 내포하는 ‘원형적 여성성’에 대한 탐구라고 의미를 부여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회적 고리가 느슨하다는 점에서 최근 주목을 끄는 젊은 작가들의 페미니즘 소설과는 조금 다르기는 해도 이 역시 페미니즘적 독해의 대상이 될 만하다고 생각해요.

 

정용준 ‘배수아’라는 브랜드가 있는 것 같아요. 문학의 언어를 읽고 나서 독자가 어떤 인식과 감정을 가지는 게 아니라, 상상의 세계에 독자가 참여하고 그 세계와 섞여버려서 궁극에는 ‘나’라는 것조차 잘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을 가진 브랜드요. 글 쓰는 입장에서 저도 이런 문장을 사용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자꾸 생기더라고요. 가령 「기차가 내 위를 지날 때」에서 “완벽한 사물에게 예속된 존재” “경사진 달의 영토” “고요히 발광하는 외국의 언덕” “암염을 핥는 말라빠진 암소들” “별 모양의 유릿조각” 같은 문장들은 문장이 지시하거나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문장 자체가 완성된 의미이자 이미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소설의 세계가 문장 안에서 완성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는 이 책을 새벽에 주로 읽었는데, 자면서 꾸는 꿈도 실제로 다채로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웃음)

 

최정례 저도 자극받은 매혹적인 구절이 있어요. 「뱀과 물」 중반부쯤에 이런 말이 나와요. “우리는 폭탄이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고, 심지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 폭탄은 우리의 불안을 공기 삼아,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는 거지. 그래, 폭탄은 터지지 않을 수도 있어. 폭탄이 스스로 그렇게 결정한다면 말이지. 말하자면 그건, 자의식을 가진 폭탄이야!”(202~203면) 이 부분은 그대로 한편의 시가 되지 않나요? 제목은 ‘자의식을 가진 폭탄’이고요. 아름다워요. 이 부분을 빌려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샛별 두분 다 배수아 작가로부터 받은 자극을 말씀하셨는데, 배수아는 ‘작가들의 작가’인 건가요?(웃음)

 

정용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많이 주는 것 같아요. 모든 언어의 원형적인 꿈은 시가 되고 싶은 것 아닌가 생각해요. 시도 시가 되고 싶겠죠. 읽고 나서 기억에서 완전히 소멸된 뒤에도, 공기 중에 섞인 잔향처럼 남는 글들이 있어요. 그게 시적 언어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텍스트의 음악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음악은 이미지를 직접 전달하지 않지만,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잖아요. 『뱀과 물』은 그런 음악성을 가진 텍스트예요.

 

 

정미경 『새벽까지 희미하게』(창비)

 

179_381신샛별 이제 고() 정미경 작가의 소설집을 살펴보려 합니다. 정미경 작가는 자본주의 현실에서 중산층이 느끼는 불안·고독·공허·권태로움을 잘 그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유 소설집이 된 『새벽까지 희미하게』에서도 그 경향은 여전히 발견되고요. 이 책에는 작가를 추모하는 아름다운 산문들도 실려 있지만, 오늘은 소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면 좋습니다.

 

정용준 작품세계는 여전한데, 이전에는 ‘생각하는 인물’이 나와서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면 이번에는 ‘말하는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듯 생각할 여지를 줬다면, 지금은 바로 단호한 판단을 내리는 태도를 보이는 거죠. 그리고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죽음이 암시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설에서 과거가 중요하잖아요. 소설 속 현재, 즉 인물의 상태에는 작가의 경험이 많이 투영돼요. 그런데 이 소설집에서 작가의 태도는 대부분 끝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 부분에서 저는 어떤 의연함과 체념의 정서를 느꼈어요.

 

최정례 맨 처음에 나오는 「못」이라는 작품이 훌륭했어요. 인물을 묘사하는 시선이 치밀하고, 서로 갈등하는 남자와 여자 두 인물을 배치하는 구성이 견고하더라고요. 그것 때문인지 또다른 어떤 장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결말에서 금희가 고양이를 버리면서 하는 말, “아뇨. 두고 갈게요. 알아서 처리해주세요” “길에 돌아다니던 고양이예요”(41)가 알레고리로 읽히면서 어떤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위악적으로 내뱉는 대사와 이런 냉정한 시선이 소설을 단단하게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정용준 정미경 작가는 세속적인 세계에 대해 이지적인 표현과 적절한 예화를 들어 인문학적으로 풀어내온 것 같아요. 이런 특징이 이번 소설집에도 드러나요. 대표적인 장면을 꼽자면 「엄마, 나는 바보예요」에서 주인공 ‘조’가 작가의 관점을 빌려 자기 자신을 둘로 나눠 바라보는 대목이에요. “조는 그 순간 아주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 강의 아내가 마개 부분만 한지로 포장한 막걸리 한병씩을 들려주었는데 트로피처럼 그걸 두 손으로 받아 든 채”
(77면)에서 보이는, 말하자면 막걸리병을 트로피에 비유하는 것과 같은 시선이 정미경 소설에는 자주 등장해요. ‘이거 문제 있잖아’라고 따로 말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관점을 담고 있는 어떤 시선을 문장 안에 제시하는 식이죠. 여기에는 ‘조’에게 환원되는 비판이 담겨 있기도 해요. 이런 지점이 정미경 소설답다고 느끼지만 그러면서도 엔딩은 여태까지와 달라요. 예전 같았으면 화자의 내면에 집중해서 더 자세한 마무리가 뒤따랐을 텐데, 이제는 체념하듯이 끝나요. 작가가 더 부연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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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샛별

신샛별 「엄마, 나는 바보예요」는 소설집 전체와 조금 다른 색채를 띤다고 느꼈어요. 다른 소설들이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를 주로 해 보인다면, 이 소설은 ‘조’의 일상에 나타난 균열의 징후들을 병렬해 보여주다가 그가 미미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온 불안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끝나는데요, 세속적 가치를 좇으며 살아가는 ‘조’의 삶이 우리의 것이기도 하니 이 소설은 동시대인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투시를 해 보이는 셈이에요. 그러기 위해 정미경 작가가 사용한 서사적 장치들이 인상적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견고하고 안정적이지만 언제든 내파될 가능성이 있는 삶의 상징으로 ‘집’이 등장하고, 내파의 결정적 계기로 ‘집 안의 아이’가 설정되죠. 이같은 장치를 활용해 중산층의 일상, 더 나아가 동시대 한국사회를 해부해온 사례들은 꽤 있어요. 예컨대 80년 광주 이듬해에 발표된 오정희의 「야회」(『바람의 넋』, 문학과지성사 1986) 같은 소설이 떠오르네요. 한편 정미경의 소설은 세월호 이후에 쓰였다는 점이 제게는 중요해 보여요. 환자와의 약속을 지키려 애쓰는 ‘조’는 직업윤리에 충실한 것 같지만, 막상 그 약속을 지키러 가는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지나쳐버리죠. 아이를 잃은 고통과 슬픔에서 못 빠져나와 상담치료를 받는 환자와도 공감하지 못하고요. 자신의 경제적·계급적 안위를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타자와의 소통과 공감에는 처참할 정도로 무능해진 한국사회의 일면을 이 소설은 지적하고 있어요.

 

최정례 그런 서사적 장치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아니라 지뢰처럼 흩어서 묻어둔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엄마, 나는 바보예요」 초입 부분에 있는 장치들, 즉 문의 장금장치의 작동음을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의도라든가 문단속을 잘하라고 아내에 말하는 부분, 서성거리는 수사관들이 옆집 사정을 묻는 질문, 그리고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심장박동에 대한 언급 등이 그런 지뢰장치라는 걸 소설을 뒤에서부터 다시 한번 읽으니 파악이 되더라고요. 이런 지뢰장치를 짚으며 읽는 게 소설을 읽는 재미겠지요.

 

정용준 결말에 이르면 ‘아, 결국 이것 때문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돼요. 「엄마, 나는 바보예요」는 ‘조’가 무정했기 때문에 비극에 당도한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주인공에게 이런 전개를 펼쳐주는 작가의 마음에서도 일종의 변화를 봤어요. 예전에 쓴 「시그널 레드」(『내 아들의 연인』, 문학동네 2008)를 보면 중심서사 바깥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인물이 설정되었거든요. 때문에 직접적인 고백보다는 그 고백을 듣는 입장과 관찰하고 응시하는 시선이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작가가 직접 인물 속에 들어가 서사의 핵심에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너무 비극적이었고 어떤 여지가 없는 단호한 마무리를 보여주죠. 그래서 소설이 끝날 때 좀 당혹스럽기도 했어요.

 

신샛별 표제작 비롯해 「못」 「목 놓아 우네」 「장마」에는 공통적으로 친밀성의 영역, 그러니까 가정이나 또래집단, 또는 직장에서 상처받은 인물들이 나와요. 그들은 일시적 관계나 문자메시지로만 교류하는 비대면적 관계에서 위안을 얻고요. 정미경 작가가 파악한 한국사회의 징후가 여기에도 투영돼 있는 것 같은데, 전통적인 인간관계가 이미 파탄에 가깝고 겉으로 좋아 보인다고 한들 ‘조’의 가족처럼 껍데기만 그럴싸하다는 인식이 바탕에 있죠. 그래서 저는 인물들이 우연히 만난 타자들에게서 위안을 받는 따뜻한 장면들을 볼 때, 오히려 세계를 보는 작가의 냉한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더라고요. 인물 속에 들어가 서사의 핵심에 작가가 서 있다는 정용준 소설가의 말이 이해가 되는 게, 이 작품들에서도 작가는 인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표면적 교류, 그 지층에 있는 인물 각자의 심리적 중핵을 들여다보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들의 내면에 잠복돼 있는 결핍과 상처를 작가가 함께 앓는 것 같았어요.

 

정용준 어떤 작가가 어떤 소설을 쓴 뒤에 바로 사고로 세상을 떠나도, 그 소설에 내재된 작가의 현재성 안에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어떤 작품에서도 죽음의 징후 같은 게 발견되는데, 그렇다면 소설이 인간의 단면을 담는 게 아니라 소설의 단면에 인간이 다 담기는 걸 수도 있겠어요.

 

최정례 소설의 단면에 인간이 다 담긴다는 말, 좋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문학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또한 무서운 말이기도 해요. 우리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죽음이 끊임없이 우리를 걸고 넘어뜨리려 하고 있지요. 작품 속에서나 일상에서나.

 

신샛별 두분 말씀을 들으니 이 문장이 특히 눈에 밟히네요. “다음. 다음이란 건 없어.”(「못」 44면) 판결봉을 내리치듯이 백지 위에 이 문장을 찍어 넣으면서 작가는 무엇을 보고, 또 어떤 생각을 을까요. 제게는 이 문장이 한국사회의 세태와 부조리에 늘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런 만큼 변화의 가능성을 치열하게 소설로 실험해왔던 작가가 동시대의 파국을 예감하면서 남겨놓은 절규 어린 판정처럼 와닿기도 합니다.

 

 

최은미 『아홉번째 파도』(문학동네)

 

179_385신샛별 이번에는 장편소설을 다뤄보겠습니다. 최은미의 첫 장편 『아홉번째 파도』는 역작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최정례 저도 이 소설 써내느라 정말 고생했겠다는 생각부터 했어요. 이번에 소설들을 읽으며 내내 한 생각이 또 한번 더 강하게 들었는데 ‘소설은 왜 쓰는가’ ‘소설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묻게 됐어요. 이 소설에 수용되고 다루어지는 현실이 앞에서 이야기한 배수아의 소설과 너무나 극명하게 대조되잖아요?(웃음) 이 소설의 배경인 척주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읽힐 정도로 현실감이 생생한데 그런 생생함도 소설가의 능력이겠지요?

 

정용준 권여선 작가가 쓴 추천사 마지막 문장이 “아무리 『목련정전』의 최은미이지만 이런 첫 장편이라니, 경이롭다”인데, 여기에 동의해요. 당연한 말이지만, 첫 장편이 어려운 건 처음이기 때문 같아요. 한국에서는 단편소설로 등단해 얼마 동안은 주로 단편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렇게 계속 쓰다보면 나중에 자연스럽게 장편도 잘 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중요한 건 길이가 아니라 그 길이를 이용한 서사일 텐데, 처음에는 그 감각을 자신있게 발휘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최은미는 첫 장편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인상이에요. 작가의 의도가 선연하고 분명해서 읽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저는 강정마을에 갔던 경험이 떠올랐어요. 해군기지 건설 찬성과 반대로 공동체가 갈라지는 비극 안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소모되는지가 자연스럽게 환기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한심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보고서 같아요.

 

신샛별 비평가 입장에서는 작가의 단편에서 발견한 재능이 장편에서는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어져요. 이 장편에서 사회적 이슈를 끌어안으면서 소설이 그리는 세계의 규모가 갑자기 커졌는데, 그동안 단편에서 보여줬던 인간에 대한 엄정한 관찰력과 삶에 대한 허심의 태도가 유지됐을까가 먼저 궁금했어요. 여전하더라고요. 생물학적인 한계에 갇힌 인간이 종적 본성을 어쩌지 못하고 저지르는 일들과 그 의미를 감정적 과잉 없이 그리는 솜씨가 돋보였습니다. 사실 최은미 단편들이 자연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예측되는 한계도 있었어요. 예컨대 자연주의적인 면모가 리얼리즘적 사회인식을 대체해버리는 상황 같은 것을 우려했는데, 이 소설은 인간들 사이에 벌어지는 아귀다툼과 그 싸움의 연원을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파헤쳐 그리면서도 사회인식을 북돋우는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최은미식 자연주의는 오히려 리얼리즘을 강화시키는 디딤돌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특히 정치·자본·종교 권력 사이의 야합과 분쟁에서 희생당하는 인간의 고통과 심리적 분투가 오히려 그런 권력들의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아닌지 짚어내는 지점까지 가닿을 때, 이번 장편을 통해 최은미 소설의 외연이 확장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최정례 언급하신 대로 정치·자본·종교 권력의 야합과 분쟁을 이렇게 그려내자면 전체를 개관하는 시선과 그 사건들을 구조적으로 연결하는 구성력이 요구되는데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더라고요. 다만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게 하는 흡인력은 좀 떨어지지만 그건 장편소설에서 일정 부분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네요.

 

정용준 이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를 더 알게 됐어요. 단편에서 보였던 그로테스크함을 체계화했다고나 할까요.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있었어요. 단편에서는 어떤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해서 독자의 정서를 환기했다면, 장편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점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아요. 서사를 끌고 가는 인물이 절망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위로를 주는데, 저는 조금 전형적이지 않나 생각했어요. 여러 인물의 결말이 어떤 닫힌 체계 안에 묻혀버리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읽으며 저 역시 그런 전형성을 기대하고 있더라고요. 어쩌면 긴 호흡의 소설에서는 전개와 절정 그리고 결말에 이르는 어떤 원리가 정말 중요한 것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흐름이 전형적이나 동시에 그 전형성이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만들어준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제목으로 선택된 ‘아홉번째 파도’라는 표현은 이 소설의 내용과 느낌 면에서 조금 다른 듯합니다. 상징적이고 시적이며 동시에 서사를 좀더 부드럽게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이 지점을 더 많이 확장시키거나 집어넣다보면 최은미 특유의 그 강철 같은 느낌이 흐려질 수도 있습니다만 제게는 조금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신샛별 그런 아쉬움은 이해돼요.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관찰하고 밖으로 드러내고 사실상 해결하는 역할까지 도맡아 하는 주인공 ‘송인화’의 태도에는 다소 관조적인 데가 있어요. 결말의 해결도 임시적인 것일 뿐, 이 세계의 법칙은 바뀌지 않았고, 않을 것이라는 뉘앙스도 분명하죠. 사건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또 일어나겠구나, 그러면 무수한 인간들이 또 아프고 슬프겠구나, 하고 독자는 책장을 덮는 순간에 예견하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닫힌 세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죠. 그래서 이만한 길이의 작품을 읽으며 독자가 은연중에 기대하게 되는 인물의 역동성이라든가 희망적 기미 같은 것을 끝내 발견하기는 어려워요. 그렇지만 저는 이런 일관됨이 최은미의 매력이 아닌가 싶어요.

 

정용준 독자의 기대를 충족하기란 정말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원하는 바를 드러낼 수 있을지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늘 있거든요. 드라마틱함이 주는 환기효과를 알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는 거죠. 비유하자면, 하늘에서 갑자기 한줄기 햇살을 내려주면 더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그려놓은 먹구름들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은 거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 부분이 꼭 소설가의 책무는 아닌 것 같아요. 소설가는 실감나는 감각을 통해 세계관을 확장해줄 수는 있어도, 기대를 충족시켜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독자의 아쉬움은 이해하지만요.

 

최정례 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우리는 보여주는 사람이지,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라는 독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죠.

 

신샛별 『아홉번째 파도』는 긴장감과 밀도에 기복이 별로 없어요. 일정한 톤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죠. 숙련된 작가의 역량이 바로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정용준 사실 모든 사람들은 변덕쟁이잖아요, 컨디션이 늘 다르고요. 소설도 그래서 한가지 톤으로 써지지는 않아요. 『아홉번째 파도』의 미덕은 이 톤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에요. 퇴고도 정말 열심히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원고를 다시 읽으며 들뜬 부분의 톤을 낮추고, 처진 부분은 끌어올리는 게 퇴고잖아요. 이 소설에 전체적인 균형감이 잘 잡힌 것도 그런 노력 덕분이겠죠. 사실 쓰다보면 ‘이 부분은 이렇게 쓴 걸 저 부분에서는 다르게 써봐야지’ 하는 욕심이 들거든요. 쓸 때는 그게 만족스럽기도 해요. 그러나 다 쓰고 나면 결국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최은미는 그 작업을 뚝심을 가지고 잘해낸 거죠.

 

최정례 말씀하신 것처럼 의도대로 끝까지 쓰기가 쉽지 않죠. 늘 의도를 배반하고 다른 길을 가게 되는데 최은미 작가, 참 꿋꿋하네요. 두분 덕분에 너무나 개성이 뚜렷한 시집과 소설 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신샛별 이렇게 봄호에서 다루기로 한 여섯권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두분께서 나눠주신 이야기들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1.22.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