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쓰다’의 아포리아
김수이 평론집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권혁웅 權赫雄
시인, 평론가. 평론집으로 『미래파』 『시론』, 시집으로 『소문들』 『마징가 계보학』 『황금나무 아래서』 등이 있음. hyoukwoong@hanmail.net
김수이(金壽伊)는 지난 십여년간 대단히 성실하고 치열하게 시에 관해 발언해왔다. 그녀의 지난 비평집들을 읽으면 한 정직한 비평가가 전대의 시를 어떻게 반성하거나 상찬했는지, 새로운 시에 얼마나 열광하거나 우려의 시선을 보냈는지 알게 된다. 반성과 칭찬, 열광과 우려는 동시적인데, 이런 균형감각이야말로 김수이 비평의 한 덕목이다.
새 비평집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창비 2011)은 여기에 더해 글쓰기의 난경에 관해 이야기한다. 제목이 말하듯, 그것은 ‘쓰다’(write)가 품고 있는 쓸 수 있음/없음의 난경이다. 김수이는 말하기, 듣기, 읽기와는 달리 “쓸 수 없는 고통은 의학적이나 사회적으로 승인된 바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문맹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욕망은 언어를 통해서만 생겨나고(상징질서만이 욕망을 낳는다) 언어의 무능력을 통해서만 감지되기 때문이다(욕망은 언어의 잉여다). 쓸 수 있는 것이란 상징질서의 언어이며 쓸 수 없는 것이란 존재와 삶의 언어다. 후자에 합당한 언어체계가 없으므로 우리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할 수 없음’이란 아포리아에 봉착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어(쓸 수 있음)를 통해서만 그 너머의 실재(쓸 수 없음)를 짐작할 수 있다. 시는 이 능력/무능력의 핵심적인 현시물이다.
‘쓰다’는 그것의 수행성을 통해서 주체를 낳는다. 어떤 실체가 있어서 ‘쓰다’라는 행위를 수행하는 게 아니라, ‘쓰다’라는 행위가 최초의 원인인 (가상의) 주체를 낳는 것이다. 라깡은 최초의 기표가 짐승 한마리를 사냥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새겨둔 (첫번째) 금이라고 말한다. 주체는 이런 금(균열, 결여, 흔적)으로서만 출현하며, 따라서 ‘쓰다’가 있는 곳에 그것의 가상적 원인인 주체가 있다. 김수이가 시인, 화자의 자리에 시적 주체란 용어를 새겨넣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유연한 전략이다. 시와 시인(또는 화자)의 동일화에서 벗어나면, “더없이 희박하면서도 역동적인, 무수한 타자들과 다채롭게 동행하면서 동일성의 권력에 저항하는 주체”(22면)와 동일성의 주체 사이에서 마련된 시차(36면)를 두루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수이는 이 주체를 검토하면서 두번째 차원의 ‘쓰다’(use), 곧 자본주의의 이중화 전략에 관해서 지적한다. 최근 시의 복수적인 주체, 원심적인 주체가 자본주의의 유통망에 상응하는 주체라는 지적이다. 분산되고 복수적으로 구성된 주체란 지젝의 말대로 “후기자본주의에 조응하는 주체성의 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동일화 속에서 차이의 환상을 유지하는 자본주의의 오래된 전략이 아닌가?(22~23면) 따라서 ‘쓰다’(use)의 지평은 주체/객체의 아포리아에 속박되어 있다. 자본과 주체 가운데 누가 주어의 자리에 오는가? 타자는 자본의 다른 이름인가, 아니면 주체의 다른 이름인가? 전자일 때 최근 시의 복수화된 주체들은 자본의 교환가치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후자일 때 교섭 가능한 진정한 타자가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히스테리증자의 담화다. 욕망의 추구가 그것의 불만족으로 귀착되는 체제가 자본주의이며, 그런 언어가 히스테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시는 타자의 자리로 무한히 나아가려는 노력과, 그것의 불가능성을 절감하는 가혹한 자각 사이에서 씌어질 수밖에 없고 씌어져야 한다.”(27면) 세번째 ‘쓰다’(bitter)의 차원이 여기에 있다. 곧 타자에 대해 무한히 접근할 수 있음/접근 불가능함 사이에서 추구되는 욕망의 점근선적인 운동 말이다.
비평 역시 주인 기표를 요구한다. 비평은 모든 기표를 정박시켜줄 단 하나의 기표—진리를 포기할 수 없다. 비평가는 그것을 떠안아야 한다. 이것이 최종적인 차원의 ‘쓰다’(undertake)이다. 시인의 욕망이 개별적인 산출물을 목표로 한다면 비평가의 욕망은 그것들의 네트워크와 계보를 목표로 한다. 김수이의 비평이 늘 문학사적인 평가에 유의하는 것도, 시의 “미로”와 “심연”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문학사는 완성되는 순간 타자화된다. ‘진리’라 주장되는 순간, ‘지식’의 차원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비평가의 욕망 역시 충족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비평가는 그 꿈을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하는 순간, 개별적인 시도 비평가의 손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 불가능한 꿈에 걸맞은 에피쏘드를 소개한다. 김수이의 비평이 언젠가 우리에게 시의 완전한 족보를 소개해줄 날을 기다리면서.
“족보 만들기가 끝났어요.” 어느날 피에르 굴드가 우리에게 알렸다.
“그래요? 어디까지 올라가던가요?” 우리 중 누군가가 물었다.
“아담과 이브까지. 방금 말했잖아요? 다 끝났다고.”
—베르나르 키리니 「기상천외한 피에르 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