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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지돈 鄭智敦

1983년 대구 출생.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내가 싸우듯이』, 장편소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등이 있음. hier910@gmail.com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Light from Anywhere)

 

 

양코씨가 서울에 온 건 1968년 11월 10일이었다. 나이는 스물일곱, 키는 중간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고 호리호리하고 허리가 짧고 팔다리가 길어 중간보다 조금 커 보이지 않아?라고 했지만 태순은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나보다 작으니까, 작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작은 건 작은 거지. 양코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건 작은 거, 작은 건 좋은 거지? 그는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억양으로 말했고 태순은 왜 작은 게 좋은 건지 생각했다. 작은 건 나쁜 거 아닌가. 그녀는 1968년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해 서울에 올라왔고 그 전까지 영천에 살았으며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에서는 수업 듣거나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풍경만 보고 살았다. 명동에서 종로까지 걸으며 유리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신축 빌딩과 아케이드 안으로 사라지는 사람들, 바스러질 것 같은 구한말의 집들과 일제시대에 지어진 백화점의 벽을 손으로 더듬었고 건물 사이를 들고 나는 바람과 사람들의 차림, 버스가 새로 개통한 고가도로를 올라가는 풍경을 보았다. 양코씨는 자신이 바로 그렇다고, 나와 똑같다라고 말했다. 토오꾜오에서 태어나 동경대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연세대 대학원에 입학한 양코씨는 1박에 520원인 신당동의 싸구려 여관에 자리 잡았다. 잠깐 있다 집을 구한다는 게 어쩌다보니 세끼 식사 합쳐 한달에 11,000원이라는 주인아줌마의 제안에 넘어가 1년이 넘도록 방을 떠나지 않았고 일본에도 가지 않았으며 수업이 없을 때는 방에 누워 이태준과 박태원, 김동인 따위의 소설을 번역했고 삼학소주에 김치를 곁들여 먹으며 글을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정처 없이 서울 시내를 떠돌며 풍경만 보고 지냈다. 수업을 듣거나 공부를 하고 다른 학생들과 교류하는 것에는 왠지 게으름을 부렸고 명동에서 헌책방을 히야까시 하거나 사보이호텔 뒷골목에 기어들어가 도쿄삿포로야 라면을 먹었지만 딱히 토오꾜오가 그리워서는 아닙니다, 한번은 반외팔이 사내에게 꼬여 오양빌딩의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커다란 연탄난로가 있는 주점에서 낙지와 야채와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끓인 안주에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지요. 사내는 더블브레스티드 양복에 하얀 목도리, 베이지색 코트를 걸친 행색으로 어딘지 모르게 무서우면서도 웃긴 모양이었고 솔직한지 무례한지 구분이 가지 않는 태도로 쪽바리놈아 돈 내놔!라고 윽박질렀다가 곧 하하 웃으며 겁먹지 말라고 어깨를 치곤 했습니다. 양코씨는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했지만 그게 서울이지요,라고 말하며 사람과 바람, 서울은 이 둘,이라는 식의 같잖은 각운을 맞추며 슬며시 웃었다. 양코씨는 행색이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더럽거나 가벼워 보이지 않았고 왠지 모르게 품이 큰 윗도리와 팬츠가 썩 잘 어울리는 사내로 여타 한국 남자들처럼 목소리가 크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애정과 복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게 일본인으로서의 자격지심 때문인지 원래 생겨먹은 성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신중하고 예의 발랐으며 때때로 웃겨서 좋았지만 태순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웃기면 웃으면 되는 거다, 하는 식으로 되뇌었고 나도 웃길 수 있는데 생각했지만 태순아, 여자가 웃긴 건 미덕이 아니야 하는 큰오빠의 말이 떠올랐다. 웃기고 있네, 웃기지도 않은 주제에. 태순은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생각난 걸 말하지 않고 속으로 말하다보니 어느 순간 말하지 않는 게 편해졌고 받아칠 타이밍도 잊어버렸고 난 더이상 웃기지 않나봐 생각이 들어 우울하기도 했지만 내가 나를 웃기니 그걸로 됐어, 웃기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거나 생각하고 집에 들어가 오늘 있었던 일을 쓰고 내일 있을 것 같은 일을 쓰고 더 기분이 좋을 때는 10년 후에, 30년 후의 일에 대해 일기를 쓰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30년 후에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때는 나도 오십이 넘고 손녀 손자에 볼장 다 봤을 나이고 텔레커뮤니케이션으로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세기말이니까 여자가 웃긴다고 지랄할 사람은 없겠지, 안 그래, 양코씨? 하고 태순은 생각했다. 양코씨는 자기가 뭘 실수했나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태순을 봤다. 태순의 눈이 뭔가 말하고 있었고 입꼬리가 실룩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태순은 가끔 그랬고 말하고 싶은 게 잔뜩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는 걸 온몸으로 말했는데 그건 나도 그래, 너랑은 다르지만 나도 그래, 68혁명이 일어나고 야스다 강당이 해방되고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검은 장갑 시위대가 행진하고 기동대가 투입되고 박살 난 동경대생들이 질질 끌려나오는데 나는 여기서 뭐 하지, 반도호텔과 삼성빌딩 사이에 서서 골목을 돌아나오는 바람, 서울 시내의 골목을 휘젓고 튀어나온 젤리 같은 부드럽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감상에 젖기나 하다니, 그렇지만 내가 서울에 살기로 한 것도 이 바람 때문인데, 베를린과 토오꾜오를 본뜬 서울의 건물들 사이를 거닐며 액화되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면 안 되냐고 양코씨는 생각했고 이쪽으로 가요, 오늘은 남산으로 가요,라고 말했다. 양코씨와 태순 모두 서울에 산 지 일년 넘도록 변변한 친구가 없었고 친구를 사귈 생각도 없었다. 이르게 죽음을 맞은 망자처럼 서울의 남은 시간을 보기 위해 끊임없이 걸었고 그렇게 오래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길을 걸으며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마주치지 않으면 점점 얼굴이 흐릿해지고 몸의 가장자리가 천천히 깜박거리는 거 같은 느낌이 들지요, 양코씨를 만난 건 그렇게 망각이 일상화되고 내가 서울의 풍경을 비추는 외벽유리처럼 느껴지던 때였습니다,라고 태순은 말했다. 양코씨가 왜 양코씨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의 본명은 초오 쇼오끼찌, 한자로는 장장길(長璋吉). 하지만 모두 양코씨라고 불렀다. 모두라고 해봤자 태순을 포함해 두어명밖에 없지만 모두 양코 내지는 양코씨라고 했고 그런데 별명에 씨를 붙이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렇다고 양코라고 하기는 좀 그렇죠. 태순은 말했다. 양코라고 할 만큼 친하지 않고 초오짱, 초오쿤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양코씨는 아무렇게나 불러요,라고 했고 이름에 대한 문제는 그걸로 일단락, 후에도 이름에 대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했다.

반도의 바람은 열도와 달라요. 양코씨가 말했다. 반도의 바람은 대륙의 바람이고 사또오 키요시는 한랭의 미를 맛보는 것은 조선에 사는 자의 특권이라고, 추위에 하늘이 갈라지고 모든 찌꺼기, 더러움, 구태, 불순한 생각과 허례허식이 얼어붙어버린 차갑고 조용한 경성의 거리를 걸어보라고 했지요, 물론 저는 그 사람을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양코씨는 문학을 공부했고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책을 쓰고 싶어했다. 태순은 영문학을 공부했지만 책을 쓰고 싶지 않았고 영시를 낭송하는 재미 같은 건 대학 입학 첫날 깨끗이 잊었다고 말하며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들뜨거나 풀이 죽는다고 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아침마다, 가끔 밤의 침묵 속에서 불쑥 솟아올랐고 그건 아무래도 지금 시대 때문 아니겠어요?라고 양코씨는 말했다. 모든 게 변하고 있고,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하고 양코씨는 말했다. 양코씨는 일어도 영어도 잘하고 매일 외국 잡지를 끼고 다녔다. 반면 태순은 뭔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게 없어, 친구들이 빠져드는 불문학이나 독문학, 비틀즈 말고 다른 게 없을까, 조금 덜 낭만적이고 덜 파퓰러한 걸 찾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따위의 생각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그러다 양코씨와 함께 우연히 인간환경계획연구소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인간환경계획연구소는 1969년 초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사장을 그만둔 김수근이 세운 곳으로 당시에는 오오사까 만국박람회를 위한 미래학 세미나를 진행 중이었다. 그때만 해도 김수근이 누구인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가 뭔지 알 수 없었던 태순은 어떤 경로로 연구소를 알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하지만 그땐 모든 환경이 그곳으로 연결되어 있었어요, 양코씨는 본래 잡지 『공간』의 구독자였고 태순은 이어령 교수와 소흥렬 교수의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으며 게시판에는 오오사까 만국박람회에서 일할 안내원을 뽑는 공고가 붙었지요, 꽤 큰돈을 줬을 뿐 아니라 비행기도 못 타본 아이들에게 외국이라니요, 정확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저는 어느새 양코씨를 끌고 연구소가 있는 태화관 건너편의 바로크 빌딩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선명히 기억나는 건 1969년 12월, 세미나가 끝나고 신신아케이드의 양식 그릴에서 식사를 하며 몬트리올과 오오사까 만박에 대해, 여의도와 구로 무역박람회에 대해, 독시아디스니 로버트 융크니 하는 이름과 메이시 컨퍼런스, 델로스 심포지엄, 맨카인드2000같이 이름만으로도 미래에 도착한 것 같은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양코씨와 태순에게 스테이크를 사주며 이야기를 나눈 이는 조영무라는 남자로 회색 중절모를 쓰고 감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할아버지 말고는 중절모를 쓰지 않을 때라 시대착오적으로 보였지만 그래서인지 멋이 풍기기도 했어요. 비가 그치고 난 밤하늘처럼 얼룩덜룩한 푸른빛을 발하는 감색 코트를 보며 태순은 코트의 조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를 느꼈고 그건 호감의 한 양식이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영무는 평생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책만 보고 산 사내로 지나친 독서와 공부로 시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거점 역시 잃으며 어둠 속으로 물러나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게 되지만 그때만 해도 프랑스 외무성의 초청으로 세계를 떠돌며 도시와 주택, 고건축과 모더니즘, 미래와 과거를 순환하는 보편논리를 연구하는 야심만만한 젊은이였지요. 조영무는 양코씨에게 우메사오 타다오와 하야시 유우지로오 같은 일본 관료 출신 학자들과 정보화, 21세기, 오오사까 만박에 대해 말했고 양코씨는 시종 무표정한 얼굴로 스테이크를 뒤적였는데 역광이라 무표정해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반면 영무는 담담했고 이야기 도중 중절모를 썼다 벗었다 했는데 아케이드의 유리 천장으로 새어 들어온 창백한 겨울빛이 모자의 귀퉁이에 길쭉한 세모 모양의 온기를 남겼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저는 지루함을 달랬습니다. 안보투쟁과 시에 대한 양코씨의 말이 길게 이어졌고 조영무는 베를린에서 엔첸스베르거를 만난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의 방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고 책도 없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남미 시인의 커다란 사진만이 걸려 있었다, 창문 밖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숲과 공원이 보였고 그 중앙을 북을 든 소년과 금관악기를 든 소년, 그들을 뒤따르는 제복 입은 소년들이 걸어갔고 막 내려앉기 시작한 밤의 거스름, 하나둘 불이 들어오는 가로등, 도시를 울리는 발자국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잊을 수 없다며 프로테스트보다 이후의 침묵,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조영무는 말했는데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양코씨는 저치는 순 허풍쟁이다라고 말했지요. 그날 나눈 이야기가 처음 나눈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나 이후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때의 지루함을 생각하면 왜 이것이 이어지게 내버려두었는지, 양코씨는 왜 어두운 낯을 하고도 바로크 빌딩으로 기어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우리는 모두 왠지 모를 힘에 이끌려 낯선 공간과 관계 맺어지는데 그 힘을 일컬어 시간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그때는 미래라는 말이 너무 좋고 일기에 미래를 여러번 반복해서 쓰며 아이를 낳게 되면 아들딸 구분 없이 미래라고 하자, 미래에는 남녀 구분이 사라질지도 모르고, 미래에는 아이를 낳지 않아도 아이가 있을지 모르고, 미래에는 미로로 만들어진 방과 건물, 도시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도 지치지 않고 두렵지 않고 예기치 않은 조우와 나무가 우거진 광장을 가로지르는 자전거, 테라스를 맴도는 새떼의 울음소리, 쇼윈도에 비친 초록색 베레모와 다리 아래를 오가는 작은 자동차 무리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일지도 모르니 미래를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1969년 12월 미래학 세미나를 듣기 위해 덜컹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크 빌딩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신기한 경험이었지요, 침침한 형광 불빛 아래 짙은 적색 융단이 깔린 복도, 문이 열리면 슈트 차림의 작은 남자들이 담배를 물고 자료를 뒤적이는 모습이 나타났고 커다란 머리통을 가진 최정호 기자와 똘망한 표정의 젊은 건축학도들, 고급스런 뿔테 안경을 쓴 이어령과 더벅머리를 한 소흥렬이 스스로의 이야기에 심취해 몇시간이고 떠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곱슬머리를 뒤로 넘긴 건장한 체격의 김수근은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앉아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리고 대화 사이를 흐르는 시간의 물결을 유유히 관찰하는 것 같아 보였지요. 세미나가 끝나면 나와 양코씨는 코트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종로2가 로터리를 가로질렀고 파고다 아케이드를 통과해 세운상가로 들어가 불고기를 먹고 커피를 마시며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태순은 어린 시절부터 아케이드를 좋아했다,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거대한 말발굽, 밝고 투명한 심해어의 내장, 안과 밖, 위아래가 연결되고 갈라지는 선로의 분기점, 소화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찌꺼기와 찌꺼기를 먹고 사는 기생충의 흐름 같은 것들, 태순은 말했고 양코씨는 이상한 취향이 아니라 할 수 없다며 세운상가에 오면 오오사까의 우메다 지하상가가 생각나는데 자신은 지하가 싫고 아케이드도 싫고 워커힐도 싫고 국립경기장도 싫다, 그리고 미래가 싫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들의 미래지 우리 미래가 아니요, 그들의 진보지 우리 진보가 아닙니다, 정말 오오사까에 갈 생각입니까, 양코씨는 물었고 태순은 방 안에 틀어박혀 「운수 좋은 날」 따위를 읽는 것보단 낫겠죠, 언제까지 여자 패는 소설을 읽고 있을 작정이에요,라고 말했다고 했지만 어쩌면 아무 말도 못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태순은 정부에서 뽑는 엑스포70 한국관 안내양에 뽑힌 상태였고 양코씨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양코씨는 대답을 미루고 있었다. 안내양이라니 왠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양코씨는 말했다. 태순은 여의도에 라데팡스에 버금가는 미래도시가 생기고 토오꾜오 앞 바다에 인공도시가 생기고 아폴로11호가 달에 착륙한 시대의 안내양이라면 다르지 않겠냐고 했지만 양코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순은 그때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했지만 무슨 말을 한 건지, 당시 세미나장을 떠돌던 수많은 이야기들, 약관을 갓 넘긴 건축가들이 만든 모형과 언어들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시간 속에서 끌어내린 하나의 구조, 결정체, 시간의 흐름에서 튕겨나온 파편에 불과한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야 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1969년 말, 한국정부는 오오사까 엑스포70 한국관의 안내를 맡을 13명의 여대생을 선발했다. 여대생들은 1970년 3월 5일 오오사까로 떠났다. 아래는 당시 신문기사다.

 

떠나는 아가씨들, 한국의 참모습 보일 터

25대 1로 뽑힌 13명의 재원

만국박람회 한국관에서 안내역을 맡은 13명의 아가씨들이 5일 9시 KAL기편으로 떠났다. 이들 13명의 아가씨들은 지난해 11월 25대 1의 경쟁을 거쳐 뽑힌 뒤 5주간에 걸쳐 한국의 역사, 경제, 영어, 일어 등을 비롯해 음악, 무용에서부터 몸가짐에까지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이날 이충자 양 등은 출발에 앞서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이 모일 만박에서 한국의 발전하는 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단단한 결의까지 표명했다.

 

오오사까에서 태순이 목격한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었다. 이따미공항에 내린 그녀와 동료들은 버스를 타고 센리의 만국박람회장으로 향했고 가는 내내 버스 안에서는 콘니찌와 콘니찌와 하는 박람회의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세계의 나라에서 안녕하세요.” 박람회장에 다가갈수록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 300미터에 이르는 육교를 가득 채운 머리통, 형형색색의 애드벌룬과 만국기가 휘날렸고 박람회장 속으로 서서히 전진하는 모노레일, 거대하게 솟은 태양의 탑을 향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인파는 그 어떤 건축물보다 인상적이었다고 태순은 말하며 한국에서 온 열세명의 안내양들은 서로의 손을 나란히 꼭 쥐었는데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는 사실을 손에서 나는 열기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지요, 손을 놓치면 국제 미아가 되기라도 할 듯 우리는 아주 작은 염기 서열을 만들어 인파 속을 헤치고 나갔습니다.

저는 오오사까에서 육개월간 체류했고 충자 언니와 제가 머물렀던 곳은 센리의 뉴타운으로 돌이 갓 지난 딸이 있는 삼십대 일본인 부부의 이층 주택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벽마다 저희와 함께 일어났고 아침식사를 같이했으며 우리는 걸어서 박람회장으로, 남편은 한뀨 센리선을 타고 직장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아내에게 만국박람회가 코앞인데 보러 오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녀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요, 부부는 밤이면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뭔가 소곤거렸고 충자 언니와 제가 도우려고 하면 완곡한 태도로 거절하며 방문을 닫아걸었습니다. 우리는 아이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그 때문이지 아이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지요,라며 태순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오지마에서 광부로 살던 카제미 세이이찌씨는 아내 타미꼬씨와 아버지 겐조오, 두 자녀를 데리고 홋까이도오의 개척촌으로 이주를 결심합니다. 세이이찌 일가는 연락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나가사끼에 도착한 후 열차를 타고 홋까이도오로 이동했는데 산요 본선을 타고 가던 중 오오사까에 들르기로 합니다. 타미꼬가 만국박람회를 보고 가야 한다고, 그게 두 자녀인 혼마와 사나에의 교육에도 좋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박람회장의 인파에 휩쓸린 타미꼬는 네살 된 딸 사나에를 잃어버렸고 가족들은 그날 내내 센리의 구릉지대에 들어선 미래의 인공도시, 오오사까 만국박람회장을 헤매다니게 됩니다,라고 태순은 말했다. 제가 광기에 휩싸인 타미꼬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미찌꼬와 미국관을 보고 나와 6개의 분수대 앞을 지나던 무렵이었습니다. 미찌꼬는 일본정부에서 각 국가관에 도움을 주기 위해 파견한 일본인 안내양으로 만박 동안 곧잘 함께 다녔고 그날도 쉬는 시간을 이용해 오늘은 꼭 미국관을 봐야 한다, 찰스 콘래드 주니어가 가져온 월석을 봐야 한다고 우겨서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글라스 케이스에 들어 있는 월석은 현무암처럼 보이는 검회색 돌덩이로 스포트라이트의 불빛 때문인지 각도에 따라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고 측면에서 보면 달의 어두운 면 같은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버티고 서서 월석의 모습을 하염없이 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 보지 못하고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타미꼬의 목소리는 미국관에서 나온 직후 안내방송을 통해 흘러나왔는데 음악이 멈추고 안내 멘트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돌연 날카롭고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 사나에, 사나에 하는 소리가 맹렬한 바람 소리, 고장난 마이크의 찢어지는 듯한 소음처럼 터져나왔지요. 박람회장의 움직임이 정지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스피커를 쳐다봤는데 그 순간 무빙벨트도 정지하고 모노레일도 정지했으며 전기 자동차의 이동과 분수대의 물줄기도 멈췄고 미래의 시간이 테이프가 감기듯 과거로 회전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요, 다시 한번 사나에! 하는 소리와 제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이 이어졌고 방송은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종료되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정돈된 안내 멘트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시스템은 가동되었지요.

아사히신문은 이 일을 다음과 같이 다룬다. 「펑크 상태, 잔혹한 박람」(1970년 5월 7일). “사람들은 초과밀 도시의 실험동물이 되고 만 것이다, 몰리는 사람들의 열기 속에 꿈쩍도 못하는 군중은 감정이 격해져 서로 고함치는 상태에 이르렀다. 아이가 짓밟힌다며 유모차를 도로로 내동댕이치는 아버지, 발을 밟힌 어린이가 불에 댄 듯 울부짖고 어머니는 넋이 나간 채 무빙벨트에 옮겨질 뿐, 사람들은 그저 꿈틀댈 뿐이다.” 타미꼬는 사나에를 찾았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병을 얻은 사나에는 토오꾜오의 응급실에서 고열로 죽음을 맞고 말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람회가 진행될 때만 해도 그러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조차 못했지요, 박람회가 시작되고 두달이 지난 즈음 오오사까에 온 양코씨는 만국박람회의 핵심은 태양의 탑도 아니요, 인공위성도 아니요, 인류의 조화와 진보도 아닌 무빙벨트에 있다며 무빙벨트는 미래나 기술의 발전과 아무런 상관없는 눈속임, 끝없는 노동을 위한 전초기지, 지루하고 사악한 반복의 하수인이라고 말하며 무빙벨트가 필요한 곳은 오직 하나, 회전초밥집뿐입니다,라고 했지요. 안 그래도 박람회장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음식점은 타까라 뷰티리온 옆에 있는 회전초밥집과 카가와현의 사누끼 미래 우동으로,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백미터가 넘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한국관 역시 질세라 비빔밥을 팔았는데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두지요, 처음 한국관을 설계할 때만 해도 김원은 자신이 비빔밥과 전통 춤, 바가지와 거북선을 홍보하게 될 줄 몰랐다며 자신이 원한 건 주위 환경을 반영하는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에코, 일종의 메아리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관에서는 시종일관 종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강석희라는 현대 음악가가 녹음한 에밀레종의 소리로 천년 만에 되찾은 소리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제 귀에는 그냥 소음에 불과했습니다. 김원은 제1세계는 도래한 미래를 다루면 되지만 제3세계는 도래할 미래를 다뤄야 한다, 미래의 내용은 공백이다,라고 칼럼에 썼지만 5월 18일 정일권 총리의 오오사까 방문을 앞두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겠다는 여론에 밀려 전시관은 약진 한국에 관한 이미지로 채워지게 됩니다. 김원은 김수근 아래에 있던 젊은 건축가였는데 처음 봤을 때는 지나치게 어려 보여 누구 조카인가 했지요. 알고 보니 꽤나 굴러먹은 건축가로 한국관을 설계한 핵심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저와 양코씨는 김원과 함께 한국관을 빠져나와 오마쯔리 광장을 걸으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김원은 작년 봄부터 여름까지 기술개발공사의 도시계획부 동료들과 아까사까의 뉴재팬호텔 802호에 머물며 한국관을 설계했습니다, 벚꽃 시즌이었지만 시일이 촉박해 구경을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지요, 창밖으로 신사를 향해 이동하는 인파를 보며 인구에 대해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윤승중은 결국 문제는 사람 아니겠냐는 하나마나한 얘기를 했지만 그 사람이 수치로서의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럴듯하게 여겨지더군요, 그와 나는 60년대 대부분을 합숙하며 보냈는데 토오꾜오에서 합숙을 하기 전에는 남산 타워호텔에서 합숙을 했고 서울 도시계획국장과 여의도 개발 계획을 진행했습니다, 여의도는 일년에 한달은 물속에 잠기는 전설 속의 섬으로 제일 높은 지대인 양말산의 꼭대기만이 물 밖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곳에 국회의사당이 지어지고 서울시청과 모노레일로 연결될 것이다,라고 김수근 선생은 말했고 윤승중과 저는 그가 고위 인사에게 즉흥적으로 던진 말을 실현할 방안을 찾기 위해 전세계에 존재하는 망상적 도시 계획을 뒤졌습니다, 여의도는 한강의 수위가 낮을 때는 비행장으로 이용되는 곳으로 박정희는 북한의 청광광장을 압도할 대규모 쇼를 벌일 생각이었지요,라고 김원은 말했다. 우리가 여의도를 방문했을 때는 신발 안에 강물이 찰박일 정도로 수위가 올라와 있었고 관제탑의 벽면에는 희미한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물이 머리끝까지 찼을 때의 경계입니다,라고 관제사는 말하며 파일럿과 자신은 가끔 잠수장비를 차고 비행장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지요,라고 말했다고 김원은 말했지요,라고 태순은 말했다. 미쯔비시 미래관의 해저 개발기지를 보며 감흥을 받았던 것은 미래에는 모든 게 수륙양용이 되고, 우주와 상공, 해저와 지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예술과 기술, 국경, 사유재산이 사라지고 원시시대처럼 모든 게 순환하는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발리 섬의 원주민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겐 예술이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한다. 우리는 관람객들 사이를 지나 센리의 완만한 구릉지대로 나아갔고 하늘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먹구름으로 검게 뒤덮여 페스티벌 플라자 전체가 불 꺼진 거대한 창고처럼 둔중한 소리를 내는 듯 보였습니다, 북풍이 등 뒤에서 여러차례 몰아쳤고 오마쯔리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점차 뒤로 밀려나며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났습니다. 양코씨는 원래 이곳은 울창한 대나무숲이 있는 습곡 산지로 언덕과 계곡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는 600여개에 이르는 작은 연못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며 태양의 탑 너머를 바라봤습니다. 밭에서는 죽순을 재배했고 논에서는 주조용 쌀이 경작되었지요, 에도시대의 이곳 사람들은 특히 술을 좋아해 팔고 남은 쌀로 청주를 만들어 마시고 만취 상태로 연못에 빠지기 일쑤여서 밤이면 600여개의 연못 주변에 죽은 자들의 혼령이 도깨비불처럼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실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연못을 밝히는 횃불을 상시 설치해놓은 것으로 그로 인해 대나무숲은 야밤에도 일렁이는 빛과 그림자의 향연을 이루어 니시야마 우조오는 마스터플랜에서 이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탄게 켄조오는 산을 깎고 토사로 계곡을 메워 인공도시를 만드는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니시야마 우조오는 젊은 시절 맑시즘에 빠져 청년건축가 클럽에 가담했던 전적이 있는 인물로 은밀히 전공투의 활동을 돕기도 했다는데 이 때문인지 탄게와 사이가 매우 나빴고 결과적으로 탄게의 안이 채택된 것에 분통을 터뜨리며 제로지겐이 만국파괴공투회의를 결성하는 데 은밀히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과격한 사내다, 상식을 벗어난다, 가족이 자살했다, 영어를 못한다는 따위의 소문이 돌았는데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지난달에는 이또이 칸지라는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나체로 태양의 탑을 향해 질주하다 경찰에게 붙잡혔지요, 그 모양을 본 오까모또 타로오는 스고이를 연발했고 독일 관광객에 의해 찍힌 사진은 해외로 반출될 뻔했으나 일본정부가 거금을 주고 구입, 유출을 막았다고 합니다. 언론에 의해 전라남으로 불리게 된 사내는 경찰의 손에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어 진료를 받지만 완전한 정상으로 판명받지요, 그는 다다칸으로 불리는 행위예술가로 1964년 토오꾜오올림픽 때도 긴자 거리를 훈도시 차림으로 달렸다고 합니다,라고 양코씨는 말했고 김원은 권옥연 선생이 어느날 김수근과 택시를 타고 명동에서 종로로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라며 대화를 이어갔다. 김수근 선생이 갑자기 아니끼, 다이너마이트 하나 없소?라고 해서 권선생이 왜 그러냐 했더니 예술가라면 모름지기 폭탄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아니끼에게 다이너마이트를 빌려 저 건물을 폭파해버리겠습니다,라며 창밖의 빌딩을 손가락질했는데 그 건물은 김수근 본인이 지은 건물이었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다이너마이트, 테러, 파괴, 난동, 그러면 미쯔비시 관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양코씨가 말했고 김원은 한국관 설계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은 만박에 오지 못할 것입니다, 저만 들르게 되었는데 가장 놀란 건 전시관 내부가 일종의 영화라는 사실이며 실제로도 토오호오 영화사나 디즈니가 깊이 관여했다고 하니 중앙정보부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지요. 당시 가장 유능하며 예술적인 이들은 모두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툭하면 비리에 휩싸여 외유를 떠났는데 돌아올 때면 서구의 신문물과 아이디어를 잔뜩 싸들고 왔지요, 만박을 배경으로 두편의 반공영화가 제작되는 중이고 김수근 선생 역시 영화를 만들 생각을 품고 있었지요,라고 김원은 말했다고 태순은 말하며 만박 안에서도 국제영화제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출품된 한국영화는 ‘언제나 타인’이라는 제목의 신파로 미찌꼬와 봤는데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요. 저는 늘 이해할 수 없는 격차를 느끼곤 합니다, 왜 미래학 세미나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한국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토록 다르고 한국관과 한국관을 만든 사람들이 다르며 만박과 만박을 만든 사람들이 다른 것인지요, 저는 어디에도 피트하게 들어맞지 않는데 이것은 장소보다 시간을 꿈꾸게 합니다, 기술을 찬양하는 것과 기술을 비판하는 것, 박람회에 참가하는 것과 박람회를 분쇄하는 것, 국가에 동조하는 것과 저항하는 것 모두 몸에 맞는 옷을 선택해 입는 것이며 그런 옷을 입을 수 있는 몸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였지요,라고 태순은 말하며 그녀가 보기에 양코씨와 김원, 조영무는 모두 그러한 몸을 가진 사내들로 몸이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저는 누구보다 오래 한국관에 머물렀고 신문기사에도 나왔지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라고 말했다. 정태순이 말한 기사는 동아일보의 1970년 9월 14일자 기사로 ‘인기상위권의 한국관 일본 오사까 「엑스포70」 폐막 결산’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기사는 한국관의 유례없는 인기를 언급하며 이는 “한국여성민속무용단의 헌신적인 공연과 이십오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선발되어 온 한국관의 호스테스들의 상냥한 서비스 덕분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쓰고 있다.

 

한국여성민속무용단은 모두가 젊은 여성들로서 십육명이 하루에 한 사람당 이십사회 출연이라는 격무에도 불구하고 매우 성의있게 충실한 민속무용을 보여줌으로써 전자기계나 전위예술 등 이해하기 어려운 많은 테마들과 달리 박력있게 관람자들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겠다. 안내양들의 서비스에 대해서 만국박람회 당국은 비공식으로 인기투표를 한 일이 있는데 이 가운데 한국은 두번째로 뽑히는 등 매우 훌륭한 인상을 주었다.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정태순양은 한달에 삼백 달러씩 받는 보수 가운데 약 반을 생활비로 썼는데 약간 저축된 돈으로는 앞으로 공부를 계속하는 데 필요한 학자금으로 쓰겠다고 말하면서 아시아에서는 어느 나라보다 한국이 여러모로 우수하고 특히 한국 남성들이 자기가 본 많은 일본 남성보다도 퍽 패기만만하게 보여 한국남성관을 새롭게 갖는 데 도움이 됐다고 그동안의 경험을 말했다.

 

양코씨는 1970년 9월, 신학기에 등록하지 않았고 연세대 대학원을 중퇴했다고 합니다. 몇번 편지를 썼지만 답장하지 않았고 듣기에 따르면 일본에서 한국문학과 관련된 독립잡지를 내고 『조선.언어.인간』이라는 책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한국 남성과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곳은 서울과 달리 커다란 규모의 주택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리조트 같은 곳으로 장을 보기 위해서 이십분가량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곳입니다. 김원은 미래학 세미나에서 서기 2000년 한국은 주 4일만 일하는 곳이 될 것이다, 4일은 사회를 위해, 3일은 자기 자신을 위해 생활하며 집은 자동차나 냉장고처럼 캡슐로 만들어진 내구성 소재 정도로 변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한국은 어떤가요, 주 4일 근무인가요,라고 물었고 나는 한국의 노동시간은 OECD 국가 최고 수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정태순은 서울을 떠난 지 40년이 넘었다며 마지막으로 한국에 들른 것은 박근혜가 당선된 2012년 겨울로 종로에는 신신 아케이드도 없고 파고다 아케이드도 없고 세운상가만이 있는데 그것 역시 허물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은 인천공항에서 내려 미니밴을 타고 자유로로 진입했다고 말했다. 도로를 달리는 내내 흐렸던 겨울 하늘에서 비가 퍼붓기 시작했고 냉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강변북로에 갇혀 몇시간이고 한강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국회의사당의 둥근 지붕은 희미한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는데 만약 김수근 선생에게 다이너마이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여의도를 영원히 물에 잠기게 했을까요, 반복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미래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평생을 다 쓴 것 같은데 지금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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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2018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스테이트 아방가르드의 유령’전의 커미션으로 제작되었다. 제목 ‘Light from Anywhere’는 1970년 오오사까 만국박람회 당시 설립된 테마위원회의 논의에서 따온 것으로, 국제 저널리스트인 마쯔모또 시게하루가 제출한 안이었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테마는 ‘Progress and Harmony for Mankind’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