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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지금 페미니즘 교육을
김고연주 金高連珠
서울시 젠더자문관. 저서 『나의 첫 젠더 수업』 『조금 다른 아이들, 조금 다른 이야기』 등이 있음.
김서화 金瑞花
여성학자. 저서 『페미니스트 엄마와 초딩 아들의 성적 대화』가 있음.
김지은 金志恩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저서 『어린이, 세 번째 사람』 『거짓말하는 어른』 등이 있음.
최현희 崔玄希
서울위례별초등학교 교사. 공저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가 있음.
김고연주(사회) 여성혐오 현상 및 젠더 갈등, 현실에 만연한 성폭력 등이 최근 큰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이것이 일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전반과 관련된 것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근본적인 개선을 위해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상황입니다. 이같은 분위기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라는 요구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오기도 했는데요, 이에 대해 청와대에서는 성평등 교육을 포함한 체계적인 통합 인권교육의 토대를 마련하겠다면서 수요조사와 교과서 내용 검토 등의 방안을 말한 바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접근으로 당장 실효성 있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더불어 페미니즘을 일반적인 인권교육의 틀에 포함하는 게 맞는지 의문도 없지 않습니다. 휴머니즘과 페미니즘은 차이가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젠더권력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이를 변화시키려는 지향을 담고 있죠.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인간이자 시민으로 간주되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인권교육은 자칫하면 인간존중이라는 당위성에 따라 여성과 남성의 젠더권력관계를 희석시키거나 비가시화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성평등 교육을 위해서는 성평등한 교육내용, 교수방법, 교사 등이 필요한데 이러한 인프라가 매우 부족한 상황입니다. 특히 학교현장에서는 성평등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크지 않은 것 같아요.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가는 것에 비해 과연 페미니즘 교육이란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현실은 어떠하며, 현장의 요구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논의는 일천한 상태입니다. 이에 『창작과비평』 여름호 대화에서는 어린이·청소년을 상대로 한 교육에 경험이 많은 분들을 모시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페미니즘 교육을 둘러싼 전반적인 상황과 여건을 점검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각자 소개를 부탁드릴까 하는데요, 지금 하시는 활동의 소개와 더불어 어떤 맥락에서 그런 일을 하시게 되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얘기를 꺼낸 김에 저부터 말씀드릴까요?(웃음)
페미니즘과 함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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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연주 저는 작년 1월부터 서울시 젠더자문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성평등 정책을 여성 관련 부서에서만 담당할 것이 아니라 모든 부서에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마련된 자리입니다. 작년에 출간된 『나의 첫 젠더 수업』(창비)은 제가 2014년부터 쓰기 시작한 책이었어요. 임신 중이었는데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멋모르고 시작했다가 출산과 양육으로 손도 못 댔고, 그뒤로도 서울시 일로 정신없이 바빠서 겨우 3년 만에 완성했어요. 그런데 그 3년 사이에 여성혐오 현상이 표면화되고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시의성으로 더 주목받게 된 것 같아요.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양가적인 감정이지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도서라는 요청을 받고 최대한 쉽게 쓰려고 했는데 만만치가 않았어요. 어떤 권위에 충분히 기대지 않고서 저자의 주장을 담으면 편견이 많다, 극단적이다 하는 비판이 금세 나오거든요. 많은 화제가 된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만 해도 소설이지만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잖아요. 이른바 팩트 중심이 아니라면 페미니즘을 논하는 데 거부감이 더 심해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런 현실에서 그동안 여성학을 연구하면서 아무리 목청 높여 얘기해도 듣는 사람이 많지 않고 변화가 느리다고 느꼈어요. 그러던 중에 2017년에 서울시로 왔는데, 성평등 정책을 집행하면서 행정력이라는 것이 큰 효과가 있음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어떻게 하면 여성들을 정치세력화할 수 있을지 더 고민하는 계기도 되었고요.
김지은 저는 어린이·청소년문학을 읽고 비평해오고 있는데 근년의 관심사는 페미니즘입니다. 2014년까지 EBS ‘라디오 멘토 부모’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프로그램 등에서 생방송으로 청취자들을 상담해주는 일을 하면서 어린이책은 쓰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도 많지만 독자들도 젠더에 대해 상당한 편견을 가지고 어린이책을 수용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뒤로 2016년까지 ‘서천석의 아이와 나’라는 팟캐스트에서 어린이책을 소개하는 코너를 맡아 진행했는데요, 젠더 이슈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하던 때라 방송에서 좋은 책이라고 소개했다가 곧바로 페미니즘적으로 걸리는 부분이 떠올라서 다시 녹음하고 싶어지는 과정을 내내 겪었어요. 그 과정에서 많이 발견한 것이 우리 아동문학에서 스토리상 비난을 귀결시키는 대상이 여성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었어요. 여성이 부당하게 그려지는 문제에 대해 본격적이고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하고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인데요, 이에 대해 비평가로서 공개적으로 발언해나가고자 합니다.
김서화 저는 여성학 연구자입니다. 2009년에 「월경하는 여성과 몸의 권리」라는 사회학 석사논문을 썼고요. 그뒤로 잠시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경력 단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3월 『페미니스트 엄마와 초딩 아들의 성적 대화』(일다)라는 책을 냈어요. 여성주의저널 일다(ildaro.com)에 연재한 ‘초딩 아들 영어보다 성교육’이라는 칼럼을 묶고 수정해 낸 책입니다. 첫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당연히 성교육을 해야지 하고 생각했다가, 기존의 성교육, 폭력예방 교육의 한계들을 보게 되면서 주제를 확장해서 쓴 에세이예요. 예를 들면 성교육이나 폭력예방 교육이 잠재적 피해자로 여겨지는 여성만을 교육대상으로 한다든지, 그렇기에 초등 남아들은 성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하지 못하거나 왜곡된 것만을 배운다든지, 전반적으로 성별이분법이 현 성교육에 있어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지 등이 보였어요. 제대로 된 성교육을 위해서도 페미니즘 관점이 좀더 사회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고요. 그래서 더욱 저와 아이의 실제 성적 대화를 중심으로 썼어요. 우리를 지배하는 수많은 젠더편견을 일상에서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고, 이를 아이와의 대화로 풀어내는 것이 성교육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특정한 교육적 관점이 준비되어서 이 책을 썼다기보다는 그 전에는 보지 못하다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더 크게 보이게 된 문제들이 있어서 쓰게 됐습니다. 성평등한 시각으로 아이를 교육할 수 있다고 자신했었는데 막상 겪어보니 제가 가진 이론적 지식과 저와 아이의 삶 사이의 격차가 크더라고요. 그동안 배우고 생각했던 것들을 아이에게 제대로 전하기가 어려웠던 거죠. 그런 좌충우돌을 겪으면서 한국사회의 젠더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젠더 감수성을 느끼고 질문할 수 있게 해주는 노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칼럼을 연재하던 기간이 둘째가 막 태어났을 때여서 밤에 수유하다가 잠깐 짬 나면 급히 써서 보내곤 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런 반응을 접하면서, 사람들이 정확하게 언어화하지는 못해도 곳곳에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머지않아 폭발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랬었죠. 아무튼 이런 시간들을 거치면서 페미니즘을 질문하고 전달하는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최현희 저는 14년차 초등교사입니다. 교직은 어떤 직업보다 적성이 맞아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우리 사회 많은 여성들이 그것과 상관없이 교직으로 떠밀리는 현실이 있어요. 다른 직업에 비해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이 적고 경력단절이 없는 거의 유일한 여초 정규직이니까요. 돌이켜보면 저 역시 그런 사회적 압력에서 자유로웠던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는게 즐거웠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부조리한 학교구조에서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쌓이면서 너무 답답해서 5년차쯤에는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때 제가 존경하는 한 선배 교사가 조금만 참으면 나아질 거라고 말리더라고요. 학교는 연공서열, 나이주의가 작동하는 곳이니까요. 실제로 그분의 말처럼 되는 면이 있었어요. 여기서는 결혼한 것, 아이가 있는 것, 나이 든 것이 그 자체로 일정 부분 권력이 되더라고요. 여초집단이라서 성별권력보다는 나이나 보직에 의한 위계가 더 작동하는 면도 있고요. 그래서 경력이 쌓일수록 나이에 기대어(웃음) 조금씩 자신감을 갖고 문제제기도 하면서, 힘든 공간이지만 뭔가 실천할 여지를 찾아나갈 수 있겠구나 하면서 투쟁하듯 학교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재작년에 혁신학교로 옮겨서 뜻있는 교사들과 학교를 바꿔가는 경험을 하며 전보다는 희망적인 교사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학교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도 활발하게 할 수 있었고요. 그런데 작년에 닷페이스 사건(2017년 7월 온라인매체 닷페이스와의 인터뷰에서 최현희 교사가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데 대해 일부 반페미니즘 세력으로부터 사이버테러가 가해진 데 이어 ‘아동 학대’라는 명목으로 고발당했으나 올 4월 검찰로부터 무혐의 처분을 받음—편집자)을 겪으면서 많은 게 달라졌어요. 평범한 개인에게 집단적인 린치를 가하는 전형적인 백래시(backlash, 반격)를 온몸으로 겪은 거죠. 힘든 시간이지만 그래도 이 사건이 작은 불씨가 된 것 같아서 한명의 페미니스트로서 기쁘기도 했어요. 그런데 페미니스트 ‘교사’로서는 복잡한 심경이 교차했어요. 페미니즘 교육을 향한 사회의 열망을 보며 희망을 느끼기도 했지만, 학교현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제가 한동안 일간지에 칼럼을 썼는데, 연재 요청을 받았을 때 건강 문제로 도저히 수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럼에도 쓰겠다고 한 건, 보통 평교사에게 이런 지면을 잘 주지 않거든요. 중요한 교육정책이나 학교의 문제를 다룰 때 늘 교육의 직접적인 당사자 주체인 평범한 교사들은 소외되고, 평교사들의 이야기가 반영되지 않은 정책은 점점 교실현실과 괴리되는 식의 교육실패를 거듭해왔던 거죠. 제가 초등교사가 아니라 교수나 교육학자였다면 닷페이스 인터뷰에 이 정도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봐요. 이런 사회에서 이번 사건이 역설적으로 평교사에게 목소리를 준 계기가 된 거죠. 지금 뭘 많이 쓰고 고민할 몸 상태가 아니지만,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현장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하고 고무적으로 생각하려 하고 있습니다.
억눌려온 목소리, 높아지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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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연주 최근 흐름을 보면 페미니즘에 대한 열망,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높아지는 상황인 동시에, 최현희 선생님의 경험에서 볼 수 있듯 이에 대한 백래시 현상도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이러한 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데요, 저같이 페미니즘을 학문으로 다루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페미니즘의 암흑기라고 느껴왔습니다. 제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하기 시작한 2001년에도 여성학을 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긴 했지만 그뒤로 상황이 더 나빠질 거라곤 예상치 못했어요. 석사, 박사 과정을 거치는 동안 여성학 과목이 계속 폐강되고, 많은 학교에서 여성학과가 없어졌어요. 활동가들의 처지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던 것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에 분위기가 확 바뀌었어요.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촛불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여성들도 많이 나왔죠. 온라인에서 여성혐오가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온라인을 매개로 여성들이 연대하고 실천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열망과 사회를 바꾸겠다는 의지가 지속적으로 더 커져온 것 같습니다. 그 무렵 페미니즘 도서의 인기가 갑자기 높아졌는데 출판계에서도 이 현상을 반기면서도 너무 낯설어서 당황했어요. 얼마나 오래갈지 장담할 수 없었고요. 그런데 분위기가 꺼지기는커녕 점점 더 확장되는 모습을 보면서 페미니즘에 한번 눈을 뜨면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미투운동이 분명한 사례죠. 사실 강남역 사건 때도 미투가 있었던 건데 이때는 주로 자신의 피해 경험에 한정되었다면 미투운동에서는 가해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지목하는 식으로 확대됐잖아요. 그렇게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서 페미니즘 책을 읽고, 강좌를 찾아 듣고, 차별의 경험을 더 자각하고 나누면서 성장하고 있는데 남자들은 별 고민은 안 하면서 여성혐오라는 말 자체에만 몰두해서 비판하는 식으로 상호 간극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게 최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양상이라면 다른 분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어떤 점에 주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지은 페미니스트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여성의 모습이 많이 바뀌어온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생각한 여성주의자의 상은 강건한 중년 여성이었어요. 항상 팔다리 건강한 언니들을(웃음) 만날 수 있는 곳이 여성주의자들의 공간이었어요. 그런 느낌의 목소리가 담긴 작품으로 『후박나무 우리 집』(고은명, 창작과비평사 2002)이라는 동화가 있는데, 작가가 자신의 여성주의적 각성을 동화 양식으로 쓴 작품이에요. 어린이가 엄마의 각성을 관찰하는 인물로 등장하거든요. 아동문학으로서 내적 의의도 지녔지만 여성작가가 젠더에 관해 주체적 관점을 가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뒤로 강남역 사건을 거칠 무렵에는 페미니즘이 20대 여성의 얼굴이더니, 최근 들어서는 용화여고 학생들이 그렇듯이(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교사들로부터 당한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면서 서울시교육청의 특별감사가 진행 중—편집자) 10대 여성의 얼굴이 보여요. 저한테 SNS에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걸어오는 분 중에 초등학생이 많거든요. ‘우리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하는. 이런 경험 속에 있다보니 저는 곧 여성 어린이의 각성이 시작될 거라고 전망하게 됩니다.
그와 관련해 저의 분야를 말씀드리면, 우리 아동문학이 꼭 넘어서야 하는 두 주인공이 있어요. 『몽실 언니』(권정생, 창작과비평사 1984)의 몽실이와 『마당을 나온 암탉』(황선미, 사계절 2002)의 잎싹이입니다. 물론 두편 모두 훌륭한 작품이고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습니다. 다만 『몽실 언니』가 가지고 있는 희생자로서의 어린 여성, 가련한 누이의 이미지는 이제 극복해야 할 문학 속 여성 어린이상 중 하나가 되었다고 봅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그보다 훨씬 뒤에 나온 작품인데요, 폐계가 된 암탉이 자신이 낳지 않은 아기를 정성껏 돌봐 영웅으로 키워냈다는 점에서는 여성주의적으로 진일보한 면이 있습니다. 모성에 대한 혈연 중심 사고라는 닫힌 마당을 넘어선 거죠. 그런데 그 결말이 죽음으로 나타나거든요. 암탉의 투쟁이 결국 무참한 죽음으로, 엄마인 잎싹이의 또다른 희생으로 이어진 거죠. 이렇듯 우리 동화 속 여성의 모습이 ‘희생하는 여성’의 이미지에 여전히 갇혀 있다고 봅니다.
어릴 적 동화를 읽으며 형성된 인간과 인권에 대한 감수성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접하는 또다른 서사들을 이해하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요. 여성이 주체화되는 서사가 부족한 것도 분명 문제이지만, 단지 여성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권할 수 없는 경우가 참 많아요. 아동문학은 어린이가 어른에게 맞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 과정을 담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때 맞서게 되는 어른이 주로 여성으로 상정됩니다. 여교사, 엄마, 이웃 할머니…… 신경질적이고 어린이에게 함부로 하는 인물로 그려져요. 사치스럽고. 여성 어린이를 비롯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최근 들어 오히려 퇴행했다고 보는 편이에요. 아까 김고연주 선생님이 체감하셨다는 여성학의 암흑기라는 사회분위기가 아동문학에도 어느 틈에 반영된 거죠.
김서화 여성의 현실에 있어서 한국사회가 이루어낸 진보가 있다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가 교육부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실상을 세심히 보면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고, 현재의 백래시 혹은 역차별의 배경을 추측하게도 합니다. 얼마 전 서울대 다양성위원회에서 첫 다양성 통계를 냈는데(『서울대학교 다양성보고서 2016』), 서울대 학생 중 여성 비율이 거의 반수에 이르렀어요. 학부생의 40.5%, 대학원생의 43.2%가 여성이에요. 그런데 단순하게만 볼 수 없는 것이, 여교수는 전임교원의 15.0%밖에 되지 않거든요. 여학생과 여교수 비율 사이에 심한 격차가 있는 거죠. 교직원은 전체 여성비율이 심지어 반수를 넘습니다. 비전임교원 및 연구원 중 57.6%, 전업 시간강사의 61%, 무기계약직/기간제 근로자의 74.6%가 여성이에요. 반면 훨씬 대우가 좋은 보직교수의 경우는 13%만이 여성이고요. 여성이 많이 진출하고 제도적 평등을 가장 잘 이룬 것처럼 보이는 교육분야의 대표 격인 대학의 상황입니다. 물론 얼핏 체감하기에 여자가 훨씬 더 많다고 느끼죠. 우리가 실생활에서 주로 접하는 사람은 권력이 많은 이들보다는 실무를 담당하는 쪽이니까요. 보직교수보다는 시간강사를 더 자주 보고, 대학생활에 있어서 기간제근로자의 행정실무를 더 가깝게 체감하게 되잖아요. 그러니 어딜 가나 여성이 많고 모든 일은 여성이 하고 있다는 착시를 느낄 법도 합니다. 그러면서 공적 영역에서 여성이 많이 늘었다는 감각이 여학생이건 남학생이건 공유된 것 같아요. 이게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죠. 여자들은 이룰 만큼 이루고, 얻을 만큼 다 얻지 않았느냐 하는. 그러나 실제로는 수치가 보여주듯이 실질적 평등을 의미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심히 차별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교육분야가 여성에게 제일 만만한 영역이기도 했는데, 그 안에서도 불평등은 이토록 개선되지 않았다는 거죠. 분명 이 통계는 서울대라는 한정적 공간만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국내 대학 현실을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포착한 첫 통계였다는 점만 보아도 우리가 그간 현실을 좀더 면밀한 시선으로 포착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온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흔히 역차별 담론에서는 이전 세대와는 달라진 여성의 공적 생활 증대를 여성인권이 향상된 것으로 쉬이 연결시키지만 그 실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되묻고 싶어요. 좀더 체계적으로 사태를 파악하면서 역차별 담론의 허구성과 페미니즘 교육이라는 단어에 집약된 불평등에 대한 시정요구, 그리고 그것을 위한 근본적인 변화의 열망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최현희 저는 작년 제 사건 이후로 병휴직 중이기 때문에 가장 최근의 흐름을 말씀드리긴 조심스럽습니다. 그사이에 미투운동을 비롯해서 다양한 이슈들이 있었으니까요. 제가 학교에 있었을 때의 분위기를 떠올려 말씀드리자면, 학교는 다들 아시겠지만 정말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공간이에요. 큰 건물에 수용한 많은 학생들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한 나름의 관성과 효율(적이라고 믿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관료사회죠. 작년 여성의 날 슬로건이 ‘페미니즘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였는데요, 민주주의를 완성해가기는커녕 민주주의가 시작도 되지 않은 곳이 학교예요. 그래서 페미니즘 이슈를 학교현장에서 가시화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학급번호의 위계적 성별화, 녹색어머니회의 존재, 학부모 대신 엄마라는 호칭이 일반화된 관습 등 명백하게 성차별적인 문제조차도 교직원회의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학급번호에 문제제기를 했다가 교장·교감은 물론 부장교사 및 동료교사들로부터 암묵적인 비난을 받아 힘들어한 동료도 있어요. 해오던 대로 하면 되는데 까칠하고 예민하다는 거죠. 이 정도로 기초적이고 단순한 성차별의 관습도 바꾸기가 어려운데 성별에 따라 두줄로 세우는 등의 성별이분법 문제,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교사의 태도나 언어 등을 성찰하고 고민해볼 틈이 있나 회의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희망적인 것은 오히려 학교 밖의 움직임과 압력이에요. 학교 안에서 자생적으로 담론이 깊어지고 실천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밖에서 강력한 움직임이 생기니 학교도 조금씩은 반응을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학급번호 문제의 경우에는 학교나 교육청에 민원을 넣는 학부모님들이 많아지고 언론을 통해 이 문제가 조명되자, 바로 가나다순으로 바꾸는 학교들이 생겨났어요. 이건 소수의 페미니스트 교사들이 학교에서 아무리 목소리 높여 주장해도 반영되지 않던 견고한 제도였거든요. 물론 교사들 간의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학교운영사항을 결정하지 못하는 현실이 바람직하진 않지만 일단 지금은 어떤 식으로든 균열과 변화가 필요하니까요.
김고연주 이러한 현실의 변화, 혹은 새롭게 문제시된 현실은 페미니즘의 결과이기도 하고 페미니즘이 당면한 도전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페미니즘의 암흑기라고 했지만, 어쩌면 잘못된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토양을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페미니즘에 대한 열망이 응집되어 분출될 수 있는 거라고 봅니다. 그 열망이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고요.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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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화 저는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여러 다른 열망이 섞여 있다고 봐서, 그 의미와 요구를 좀더 체계화하고 세분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페미니즘 교육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돌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그간에 이루어진 각종 성교육에 대한 불만이 지금의 열망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때 성교육은 초중등에서 배우는 성교육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인데요, 성, 젠더, 성평등, 성인식, 성폭력 등 말 그대로 성이 주제가 되는 각종 교육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사회에 그간 15~20년 정도 사이에 이런 식의 성교육이 엄청 많이 늘어났어요. 이런 교육들을 페미니즘 교육이라고 직결해 말할 순 없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이나 개념들이 페미니즘과 아예 연관이 없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 많은 이들은 이런 주제를 다룬 것만으로 그 모든 교육을 여성적이라거나 페미니즘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고 보고요. 굉장히 복잡하지만 이에 대한 명백한 비판과 분석 그리고 성찰이 지금 요구됩니다. 예를 들어 성폭력특별법(1994년 시행)이 만들어지면서 성인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성폭력 예방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공무원은 물론이고 대학이나 웬만한 사업장에서는 다 법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이런 의무교육의 내용에 페미니즘이 얼마나 개입되어 있는지에 대해 저는 상당히 회의적이에요. 무엇을, 왜,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에 대한 주도권을 누가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들이 치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이라고 봅니다. 아이들도 요즘은 성희롱 예방교육을 포함해서 생각보다 성교육을 많이 받더라고요. 성교육은 그 의무시수도 꾸준히 늘어왔습니다. 연간 15차시 이상이 의무로 정해져 있지만 어느 학교도 실질적으로 제대로 채우지 못해요. 그저 타 교과에서 유사한 주제가 등장하면 의무 성교육 시수에 포함해버리는 실정입니다. 더군다나 2015년부터 계속 문제가 된 ‘국가수준성교육표준안’처럼 제도교육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교육의 내용이 오히려 반여성적이며 차별에 있어 무지하기도 한 거죠. 가끔 학부모들도 와서 배우라고 하는데, 부적절한 내용이 너무 많아요. 초등학교 가정통신문에 ‘여학생들에게 치마를 입혀 보내지 마세요’ 이런 걸 아직도 버젓이 써서 보내는 실정이니까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성,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해 우리는 대체 그동안 무엇을 어떻게 누구에게 배워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저는 ‘성’이라는 주제어 아래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배워온 것들, 지금 배우고 있는 것들에 대한 여러 불만이 폭증해, 그것이 지금 페미니즘 교육을 원한다는 말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둘째로, 공교육 자체에 대한 불만도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대체로 초중고등학교를 두고 말하게 되는데 초중고의 공교육이 사실 문제가 많잖아요. 최근 분위기만 보더라도 공교육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교육의 내용이나 제도가 친자본적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느끼거든요. 페미니즘이 과연 교과목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건가에 회의적일 법도 한데 그 와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걸 의무화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요구까지 하게 된 데는 우리 공교육이 지금껏 해오지 못한 것들, 잘못해온 것들을 페미니즘이라는 틀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는 열망이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최현희 공교육의 문제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학교라는 곳이 실은 굉장히 반인권적인 공간이기도 하거든요.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물리적으로도요.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규범을 정말 열심히 가르치지만 사실 얼마나 뛰고 싶게 만들어놨어요? 딱 교실 한칸 안에만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온도를 맞춰놨으니 복도에선 여름엔 더워서 뛰고, 겨울엔 추워서 뛰고…… 과밀학급이다보니 자기 공간도 전혀 확보가 안 되지요. 이렇게 인권을 논할 기반조차 부족한 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까지 제기됐다는 것은 사실 인권에 대한 인식이나 감수성이 엄청나게 확장된 겁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대해 질문해나가면서 조금씩 균열이 나고 변화하는 건데, 그런 질문의 ‘끝판왕’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인권을 말하고 생태를 중요시하던 교사라 할지라도 페미니즘 면에서만큼은 어떤 견고한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모습이 지금 깨지기 시작한 거거든요. ‘일베’를 포함해 이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현상이 학교교육의 실패라는 일부의 지적이 있던데 어쩌면 염치없는 일입니다. 학교교육의 실패가 아니라 전사회적 시스템의 실패라고 봐야죠. 교육담론에서는 학교가 사회를 변혁하는 진보적 공간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도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의 역사적 맥락에서 학교는 주류 이데올로기를 전수하는 보수적인 역할을 해왔고 또 그게 일반의 상식이잖아요. 교사가 주류에 반하는 얘길 했을 때 사회가 참지를 못해요. 그러니 학교라는 곳이 성차별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고 새삼 놀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학교가 시민교육을 위한 곳인가에 대해서조차 합의하지 못한 게 우리 사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쩌면 시민성의 궁극이라고도 할 수 있을 페미니즘을 학교에서 교육하는 걸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죠. 일단 학교가 그저 주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전수하고 이른바 ‘인성교육’을 하기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서 시민교육을 하는 공간이라는 합의를 이루고, 그같은 교육을 위한 전제와 여건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핀란드 같은 선진적 교육을 요구하는데 학내 조건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요. 작년에 저희 학급이 42명이었거든요. 학급당 인원수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수준인 23명까지 줄었다고는 하지만 전국 평균이 그렇지 서울 밀집지역은 아직도 40명 넘는 데도 있어요. 그리고 사실 23명 수준도 과밀학급이에요. 옛날엔 한 반에 칠팔십명씩 있었다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학생 개개인의 욕구가 커지고 다양한 교육방법론이 등장한 지금의 교실에서 그 정도 인원수는 사실상 제자리 상태라고 볼 수 있죠. 또다른 문제는 시민교육을 해야 할 교사 역시 시민성을 박탈당하는 현실이에요. 교사는 정당가입을 할 수 없잖아요. 게다가 여성 교사와 남성 교사의 현실이 다른데, 사실 제가 남성 교사였다면 이 사달이 나지 않았을 거예요. 여성 교사에 대한, 특히 초등 여교사에 대한 어떤 전형적인 이미지랄까, ‘순결한’ 모성을 대리할 거라는 기대가 있죠. 실제로 남성 교사가 저와 비슷한 발언을 했을 때는 댓글창이 깨끗했거든요. 이런 복잡한 현실 속에서 제가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할 때마다 놓이는 딜레마가 있어요.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학교도 페미니즘 교육을 해주길 바라는 분들은 저에게 어떤 선명성을 기대해요. 페미니즘에 대한 생생한 교육 사례 말이죠. 그런데 페미니즘 얘기를 선명하게 하면 학교현실이 납작해지고, 반대로 학교 얘기를 많이 하다보면 페미니즘의 선명성이 흐려지는 걸 느껴요. 페미니스트로서 페미니즘 얘기만 실컷 하면 좋은데 교사로서는 현장의 여러가지 복잡한 현실이 마음에 걸립니다. 어려운 문제죠.
김지은 일단 성인들이 아동과 청소년을 자신들이 지배해도 되는 영토처럼 생각하는 한 해법을 찾기 쉽지 않을 겁니다. 어린이가 자기를 주어로 삼아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라고 당당히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된 게 제가 보기에는 몇년 안 돼요. 어린이에게도 목소리를 주는 건 세계적 추세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긴 했어요. 논술교육, 독서토론 같은 걸 통해서. 근데 막상 아이가 발언하는 걸 보니 참한 복종보다 싫은 거예요. 여기서 저는 어린이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비슷한 방식으로 외면당하고 있다고 봐요. ‘악쓴다’고 하죠. 악쓴다, 데굴데굴 구른다, 뒤집어진다 등의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를 보면 대개 어린이나 여성 주어가 붙어요. 어린이와 여성은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들의 말을 찬찬히 듣지 않으려 하면서 미리 폄하하고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는데, 복종적 시민으로 만드는 과정의 일부죠. 어린이에게 순응을 유도하는 인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그 훈육의 책임은 다시 여성에게 지웁니다. 가정 내에서도 남성 양육자가 ‘에헴’ 하고 싫은 기색을 보이면 아버지의 그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여성 양육자가 대신해서 어린이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잔소리를 하는 방식이 되풀이됩니다. 아버지의 규율을 전달하는 대행자로 지명된 여성 양육자는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아이 양육을 두고 다른 여성과 경쟁하고요. 당연히 어린이는 직접적인 잔소리의 발화자인 여성 양육자에게 거부감을 지니면서 성장해요. 말하자면 이게 다 엄마 때문인 거죠. 요즘 동화에서 엄마가 계속 마녀화되고 있는데요, 기존의 희생하고 인내하는 여성-엄마 역할에서 벗어나 좀더 건강하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려는 여성들이 많은데도 그런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아요. 짜증 많은 엄마, 집요한 엄마만 주로 묘사됩니다. 저는 이것이 아동문학 안의 백래시라고 생각해요.
김서화 말씀에 공감을 많이 했는데, 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중요한 지점은 아이가 자기를 잘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얘기를 칼럼에 열심히 쓰다가 종료할 때쯤 6학년이 된 아이를 보니까 그동안 아이의 말을 잘 듣고 있다는 게 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어요. 아이가 자기 말을 더 따박따박 하기 시작하니까 정말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웃음) 내가 뭔가를 잘해보겠다고 생각한 게 철저하게 나의 추상성 안에만 있었다는 걸 실감한 거죠. 그래서 그런 경험을 책 말미에 추가하게 됐고요. 엄마들이 왜 고학년 남자아이를 제일 어려워하는가를 보면 이 아이들의 말을 유독 참을 수 없어서인 것 같아요. 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모든 위계가 언제 어디에서 생기는가, 누구의 말은 들리고 누구의 말은 들리지 않는가, 누가 저 사람의 목소리를 빼앗는가 하는 것들에 대해 첨예한 이론이자 정치이고 실천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걸 중시하겠다던 제가 아이 말을 무시하고 있었던 거죠. 아이 말은 듣지 않으면서 아동 성폭력 예방교육 같은 데서는 ‘싫어요’라고 말해라?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더 어렸을 때부터 ‘싫어요’라고 무수히 말하지만 매번 거부당하잖아요.
최현희 내가 내 아이와의 관계에서 권력을 자연스럽게 취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페미니스트로서 인식과 실천 사이의 모순을 끊임없이 직면하는 일이죠. 근데 하물며 교사로서 페미니스트일 때의 그 고통은 정말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과밀학급 환경에서 억압적인 학교조직 안의 교사 개인이 안팎으로 부딪침과 좌절을 겪으며 자괴감을 느낄 때가 많아요.
김고연주 페미니즘에서 젠더권력관계에 대한 성찰이 핵심이다보니 페미니스트 교사·교육자에게 ‘권위’라는 게 모순이 될 수 있습니다. 교육자로서의 권위를 가져야 하겠지만 동시에 남용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균형이 어렵다는 거죠. 특히 페미니즘 교육이 교사와 학생,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상호존중, 돌봄, 성장을 지향하기 때문에 교육자로서 균형적인 역할을 하기란 만만치 않은 과제인 것 같습니다.
의무교육을 위한 기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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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연주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은 성평등 교육을 여성과 남성 등 특정 성에 대하여 부정적인 감정이나 고정관념, 차별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고,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사회적·문화적 차별로 직결시키지 않으며, 남녀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특성을 충분히 발현하여 자신의 자유의지로 삶을 계획하고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교육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성평등 교육에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성교육 등을 포함하고 있고요. 이 교육들을 포함해서 페미니즘 교육은 사실상 대학에서 유일하게 학제화되었는데, 그나마 대개 교양 선택과목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단순한 섹슈얼리티, 심지어 연애 얘기하는 줄 알고 오는 학생들도 있어요. 하지만 일단 신청하면 학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라도 들어야 하잖아요. 그게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이라면 더욱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참여하게 될 테고요.
페미니즘 교육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 필요합니다. 개인의 성정체감은 유아기부터 발달합니다. 사회에 의해 성차별과 성고정관념을 갖게 되는데, 아이들이 ‘젠더박스’에 갇히기 시작하는 시기가 상당히 빠르다는 거죠. 누군가를 차별하고 차별받는 경험을 하기 시작하고, 성장할수록 그것이 더욱 심화되고 공고해집니다. 페미니즘 교육을 빨리 시작해서 아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자유롭게 만들어가도록 해야 해요.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도 알게 될 테고요. 사회적으로는 페미니즘 교육이 성차별적인 의식을 바꾸고, 나아가 사회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사회 변혁을 가능케 합니다. 교육은 이데올로기 도구이기도 하지만, 사회 변혁의 도구이기도 하잖아요. 페미니즘 교육을 통해 가부장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기존 교육과정을 변화시키면서 공교육의 목표와 교육과정도 재설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앞서 최현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시민성의 합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는데요, 너무나 지당한 지적이면서도 동시에 이상적이라는 느낌도 들어요. 그런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길 기다리다보면 페미니즘 교육은 더욱더 요원해질 수 있겠죠. 김서화 선생님의 경험처럼 페미니즘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스스로와 타자를 더 세심하게 성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저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인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해서라도 모든 여건이 무르익을 때를 기다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페미니즘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겠다는 거죠.
최현희 그런데 의무교육을 하는 데 있어서 신중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교육현장에서는 교수학습의 내용과 방법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그걸 매개하는 교사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충분히 전달될 거라는 일종의 신화가 있거든요.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교육과정이 하향식(top-down)으로 만들어지는데요, 실제 현장 여건이나 교사의 수준이 교육과정이 표방하는 이상과 가치에 따르지 못해서 실패로 끝난 사례가 많아요. 창의성 교육, 안전교육 등등. 인권조례도 비슷한 맥락이고요. 페미니즘 교육시수를 의무화하고 일방적으로 성과를 요구하는 식으로 기존의 방식을 답습한다면 오히려 페미니즘과 거리가 먼 교육이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현실에서는 큰 성과일 수 있겠지만요. 관료적이고 비민주적인 학교 시스템의 모순과 억압이 페미니즘적인 성찰로 해체될 수 있어야 진짜로 페미니즘이 학교에서 제 역할을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단순히 말과 글로 페미니즘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학교의 문화와 교실의 공기 속에서 체득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글로 많이 배우지만 모두가 민주시민이 되진 않잖아요.
김고연주 일단 교대 안에 그런 교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런데 저도 느꼈지만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교수 개인과 페미니즘 학문의 괴리가 클 때가 있잖아요. 저는 그런 경우에도 학생 스스로 배울 바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사람이 가르치는 것과 그 사람 자체의 한계 사이의 괴리,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이 있고 저마다의 한계를 지니고 있지요.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도 배우는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최현희 사회적 담론 확장이라는 불씨가 있으면 초등학교는 오히려 당장 발 빠르게 변할 부분도 많다고 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학급번호의 변화처럼요.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이에 대한 부당성을 그렇게 건의했는데도 부차적인 문제라고 무시해오던 것이 최근에 페미니즘 이슈가 사회적으로 제기되면서 바뀐 거잖아요. 어떤 문제를 학교 내부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하려 하기보다 우회적인 경로를 만들어내는 것이 오히려 학교현장의 문제를 개선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김지은 저는 최현희 선생님과 초등성평등교육연구회가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물꼬를 텄다는 게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어린이보다는 청소년들이 교실 안에서 폭력적인 여성혐오를 더 힘들게 겪어왔거든요. 비근한 예로 최근 몇년간 느끼셨겠지만 많은 화장품회사들이 청소년을 고객층으로 편입시켰어요. 그러면서 화장하지 않으면 왕따 되는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어른들은 이를 모르는 채로 애들이 공부하기 싫으니까 저런 짓이나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기표현의 욕구가 왕성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또래집단 안에서 굉장한 압박을 받으며 화장하는 여성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고 고통을 겪는 아이도 많거든요. 이렇게 페미니즘이 다루어야 할 고민이 어린이 단계로 내려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저도 페미니즘 교육을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서화 한편으로 대학의 역할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요구되는 페미니즘 교육이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여성학 전공이라든지, 여성학과에서 개설하는 교양수업과 같은 방식이라고는 생각되진 않지만요. 일차적으로는 초중고등학교나 시민교육 차원에서 성과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한 다른 접근과 다양한 정보가 보장되고, 제대로 된 교육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는 요구가 더 높아 보여요. 그럼에도 대학이 떠오르는 이유는 대학이 바로 그런 교육과 지식담론을 생산하는 중요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결국 페미니즘 교육은 대학 내 여성학과의 현실, 한국사회의 페미니즘 지식생산의 문제로 연결될 필요가 있어요.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지식담론의 장이 깊고 튼튼해지는 것이니까요. 그럼으로써 실천의 기반도 더 마련되겠고요. 페미니즘이라는 지식체계와 담론이 훨씬 더 풍부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여성학의 기반이 너무 협소해요. 페미니즘 지식생산을 풍부히 할 수 있는 제도적·물적 기반이 굉장히 열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울에서조차 여성학과를 유지하고 있는 대학이 몇 없어요. 서울대는 대학원 협동과정으로 있는데 곧 20주년이 되는데도 여전히 전임교수가 한명뿐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지식생산이 얼마나 잘될까요? 이렇듯 페미니즘 교육을 위한 준비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그것을 요구하는 열망은 갑작스럽게 표출된 건데요, 필요한 일들을 세분화해서 각자의 분야에서 진지하게 해나가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어쩌면 제일 중요한 관건은 바로 재원이에요. 교육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재원상 뒷받침이 없다면 분명히 한계가 있죠. 반대로 재원이 충분하다면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봐요. 예를 들면 성교육 의무시수는 늘려놓고 이를 교육할 인력은 제대로 구성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교과내용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매뉴얼 정도만 만들고 위에서 막무가내로 그냥 가르쳐라 하는 방식, 교육자 양성을 위한 꾸준하고 지속적인 국가적 예산분배의 부재 같은 것들 모두 그런 차원이지요. 또한 페미니즘 지식생산의 장인 여성학의 경우 전국 대학에 독립된 학부체제가 하나도 없음에 분개해야 합니다. 이를 제도화하기 위한 교육부의 예산 책정과 실천, 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인력 구성과 인건비 등등. 모든 문제 해결은 사실 예산을 비롯한 물적 자원의 지속적이고도 합당한 분배에서 시작하는 거죠. 젠더 사안에 있어 흔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구색 맞추기식의 정책, 눈요기식 예산분배로는 페미니즘 교육이라는 단어 안에 담긴 열망을 절대 해결하지 못할 겁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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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연주 그렇다면 페미니즘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페미니즘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의 가장 큰 고민은 페미니즘이 하나의 관점이라는 데 있습니다. 관점이고 인식론이다보니까 문학에도 페미니즘이 들어가야 되고 윤리 과목에도, 역사 과목에도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다보니 페미니즘 교육이라 했을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가 책을 준비할 때도 무엇을 어떻게 쓸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자신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구축하는 시기인 10대들에게 중요한 이슈들을 선정해 접근했어요. 외모, 가족, 사랑, 노동처럼 중요하고 일상적인 문제들이 어떻게 젠더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했지요. 중학생을 대상으로 썼지만, 더 어린 초등학생, 유아 등을 대상으로 한 책도 수요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이 연령대 대상으로는 또다른 방법론과 커리큘럼이 필요할 것 같아요.
김지은 청소년기와 달리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교육은 감수성으로 접근할 수 있어요. 타자를 어떻게 만나고 손잡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와 이미지를 통해서요. 그림책이나 동화를 읽고 감상을 나눈다든지 함께 노래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논리체계보다는 말랑말랑하게 접근하는 교육이 더 효과적인 시기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그런 방향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거죠. 지난 십여년간 우리 사회가 여성주의적으로도 많이 나빠졌다는 말씀들 하셨는데 그 요인 중 하나로 생각해볼 만한 것이, 이즈음 문학교육을 배제하고 비문학 중심 교육을 했다는 점입니다. 스토리를 가미한 교육을 도입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스토리텔링 과학, 스토리텔링 수학, 스팀 교육(STEAM, 과학·기술·공학·예술인문·수학의 이니셜 약자로, 여러 사고방식을 융합해 문제해결을 돕는 것을 지향하는 교육방식) 같은 것들 중심이었거든요. 교환가치가 있고 양적 측정이 가능한 지식정보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심어준 거죠. 그러는 사이 문학을 읽고 같이 문학적 감수성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교육과정 안에서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어린이들이 타자의 서사를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험이 태부족하게 됐고요. 『엄마의 마흔번째 생일』(최나미, 청년사 2005)이라는 동화가 있어요. 엄마의 각성을 가족이 지켜보는 얘기인데 굉장히 좋은 작품이에요. 근데 이걸 읽은 아이 중 누군가가 ‘엄마만 생일’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이 작품이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어린이들이 겪는 교실 안 성차별의 현실은 어디서도 잘 이야기되지 않다보니, 페미니스트로 자각하는 엄마의 자립이 자기들 문제로 생각되지 않는 거죠. 그리고 여성에 대한 험한 소리를 유튜브에서, 교실에서, 길에서 너무 많이 듣잖아요. ‘아줌마, 비켜요, 차 빼요.’(웃음) 심지어 ‘맘충’ 같은 말까지. 생활언어부터 시작해서 접하는 이미지 등등 문화예술 교육을 통해 공동체적인 감수성을 길러줄 필요가 있어요. 유튜브가 생활교육자의 역할을 점유하는 분위기를 생각하면 성평등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도 절실합니다. 저는 페미니즘 교육이 그 안에 포함된다기보다는 그것을 리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보고요. 아직 스스로를 한쪽 성별로 특별히 정체화하지 않는 시기니까요.
김서화 그와 더불어 저는 지금으로선 젠더나 섹슈얼리티에 대한 구조적 시각을 전달할 수 있는 교육내용이 중요할 것 같아요. 지금의 성교육 내용은 남녀 이분법에 지나칠 정도로 강박적이기도 하지만 성을 그저 사적이기만 한 영역으로 설명합니다. 개인신체의 해부학이거나 사적 영역에서의 은밀한 만남, 특히 위험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폭력으로서의 성. 이런 관념이 너무 지배적이죠. 우스운 것은 성을 굉장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처럼 전제하는 성교육에서도 여성의 쾌락은 절대 가르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성은 폭력의 잠재적 피해자였을 뿐이지요. 쾌락을 탐구하거나 고민해보게 하지 않으면서 덮어놓고 ‘노’라고 말하라고 시킨다든지 ‘예스’를 왜 안 하냐고 되묻는 것은 그 자체로 희비극이죠. 아무튼 성적 사안은 결코 개인적이거나 사생활의 영역으로 축소·환원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페미니즘 교육이라는 말과 그것의 의무화라는 강한 어조까지 등장한 데에는, 바로 그간 성교육의 내용들이 결국 성적 사안을 구조나 사회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지속적으로 축소시켜온 것에 대한 분노이기도 한 거죠. 이게 굉장히 어려운 내용이니 김지은 선생님의 말씀처럼 서사를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과 정말 잘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최현희 저는 초등학교에 있기 때문에 모든 급간을 대표하긴 어렵고 초등현장에 한정해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초등과 중등은 전혀 다른 관점과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초등학교는 감수성 교육이 적합하다는 김지은 선생님 말씀에 매우 동감합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 타인의 고통을 인지하고 공감하는 경험, 구성원의 문제를 공동체가 함께 관심 갖고 협력해 해결해가는 경험들 속에서 페미니즘 감수성을 길러나가야 해요. 초등학교는 담임교사가 학생들과 한해 동안 생활을 함께하기 때문에 각 교과수업 외에도 학급의 문화를 통해 정말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데요. 더 확장해서 학교의 문화가 되어야겠죠. 하지만 지금 같은 경직되고 억압적인 학교 안에서 그런 변화를 도모하기란 정말 어렵기에 일단 학급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페미니즘 페다고지를 논의함에 있어서 직접적인 페미니즘 의제와는 동떨어져 보이지만 ‘학교 민주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해요. 학교민주주의 없이는 페미니스트 교사가 자신의 페미니즘적 성찰과 교육관을 동료 교사나 관리자들에게 펼쳐 보일 기회 자체가 차단되니까요. 페미니즘 감수성이 없는 교사들 중에 저는 대다수가 안티페미니즘의 신념을 가졌다기보다 이슈에 대한 민감도가 낮고 여성주의적으로 자신의 교육활동이나 경험을 해석할 계기를 아직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교사의 발언이 존중되고 상호 간에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의 감수성이 길러질 수 있어요. 이건 교육부나 교육청의 매뉴얼로는 절대 일궈낼 수 없는 성과라고 봅니다. 동료들 간에 소통할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학교구조를 좀 바꿔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학교 안의 한줌도 안 되는 페미니스트 교사들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고 사회적으로 학교 문화나 구조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에서 어떤 내용을 통해 학생들에게 페미니즘을 잘 가르칠까 하는 질문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통해 교사가, 학교가 얼마나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 현재의 문제를 짐 지우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학교는 미래의 시민을 키울 뿐만 아니라 현재 학생들과 교사들의 삶이 있는 곳이잖아요. 페미니즘으로 학생들과 교사들이 함께 ‘지금 여기’를 직시하고 바꾸고 더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그러려면 페미니즘 교육과정이나 방법론을 개발하고 정책화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교사를 비롯한 교직원, 학부모의 젠더감수성을 기르기 위한 교육이 지금 당장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사양성 과정에서의 페미니즘 교육, 교사 그리고 학부모를 위한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해요. 학교에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나 공감의 기반이 약한 상태에서는 당장 학생들을 위한 페미니즘 교육 내용에 대한 고민보다 그 교육을 해야 할 교사의 감수성부터 기르는 일. 이러한 과정이 멀리 돌아가는 것 같지만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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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연주 많은 분들이 실감하시겠지만 여성혐오가 교사와 엄마에게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중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단체로 자위를 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어요. 교사권력 및 연령권력을 성별권력으로 전복시키고 그걸 다시 성적 대상으로 만든 사례라 하겠습니다. 또한 사랑과 헌신의 대명사로서 사회적으로 유일하게 존경받던 여성인 엄마도 이제 무차별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사와 엄마는 양육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어요. 돌봄이 사라진 시대에 유일하게 타자를 돌보는 이들이 교사와 엄마인데도 불구하고 김지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들이 오히려 어린이에게 함부로 하고 어린이의 성장을 방해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명백한 여성혐오지요. 이러한 현실에서 여기 모인 우리도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인데요, 어떻게 지치지 않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실천해나갈 수 있을지를 마지막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최현희 지금 페미니즘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거의 최초로 담론화된 역사적인 장면에 서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지금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말하기 어려워졌어요. 페미니즘 교육이 가시화되지 않았을 때는 개별 교실에서는 자유로운 교육활동이 가능했거든요. 사실 긍정적으로 언급할 현상은 아니지만, 교사 간 상호불간섭의 문화가 뿌리 깊은 관료적이고 폐쇄적인 학교구조가 어떤 면에서는 열정 있는 교사들에게는 일종의 기회이기도 했어요. 교실 안에서만큼은 자신의 교육적 신념을 어느 정도는 간섭 없이 실천할 수 있으니까요. 제 경우도 그런데, 예를 들면 ‘우리 가족 성평등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서 명절에 가정통신문으로 보냈어요. ‘친가에 먼저 간다’ 같은 항목으로요. 지금 이런 거 보내면 당장에 ‘메갈’ 교사라고 논란을 삼는 사람들이 나타나겠죠. 실제로 전교조 여성위에 계시는 한 중등교사가 3·8 여성의 날에 학생들에게 ‘무지개’ 배지를 나눠줬다가 학부모들의 민원에 시달리고 교장에게 압박을 받기도 했어요. 아주 기본적인 성평등 교육만으로도 민원을 받고 위축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렇지만 넘어서야죠. 교사 개인이 교실에서 혼자 마음껏 페미니즘 교육을 했던 시기보다는 백래시가 있더라도 공론화시켜서 앞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겪은 일련의 사건이 안팎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솔직히 우려돼요. 저뿐 아니라 많은 페미니스트 교사들이 이 모든 경험을 함께 겪고 있거든요. 페미니스트 교사를 향해 가해지는 악성 민원과 인신공격 등에 대해 교육부·교육청이든 사회든 교사를 보호해줌으로써 여기까지는 안전하다는 걸 보여주지 않으면 당분간은 진전하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해요. 저의 경험이 개인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으로 함께 대응해나가는 경험으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사실 많은 분들이 연대하고 있고 그런 힘이 느껴져요.
그리고 교실 밖의 연대도 힘이지만 가장 큰 힘은 학생들에게서 오는 것 같아요. 멀리서 보면 교실이 당장 붕괴할 것 같고, 총체적 난관인 것 같지만 사실 교실 안에 있으면 학생들의 눈빛에서 변화를 많이 체감하게 돼요. 초등학생들에게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요. 꼭 뭘 더 체계적으로 알아서가 아니라 어떤 공동체적인 문화, 감수성을 가지는 게 느껴지거든요. 학년 말이 되면 제가 학생들의 지적을 수시로 받고 많이 배우게 될 정도로요. 더불어 학내에서 페미니즘의 또다른 효과는 교사들 사이에서 인권을 말하는 수준의 진보-보수 자리를 재편한다는 겁니다.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던 교사들 중에 젠더 이슈에 피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분들이 계신데 이분들이 사실 학교에서 대단히 급진적인 분들이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상대적으로 보수 쪽이 되는 거죠. 자연히 진짜로 보수적이었던 분들의 입지는 좁아질 테고요. 그렇게 느리지만 전진하는 중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백래시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발견하고 그걸 부여잡고 나아가려 합니다.
김지은 긴 싸움이 되겠지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지금 상황에 대해 어느 쪽을 지지할지 아직 판단하지 못하고 있고요. 이럴 때, 모든 어머니들이 ‘뽀글파마’를 하던 시절 혼자 단발 흰머리를 했던 할머니들의 용기 같은 게 필요해요.(웃음) 제가 어릴 때 본 모습이에요. 당연히 모두가 뽀글파마를 해야 되는 줄 알았는데 단발인 할머니가 걸어가는 모습을 봤을 때, 이분이 무언가 훨씬 앞서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이런 존재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어린이들의 성장과 청소년들의 자기자리 확보에 힘이 되어줄 거예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믿음직한 서사라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유지하면서 성장하기란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책을 펼치면 항상 그 안에 친구들이 있고, 나를 응원하는 목소리들이 있어요. 그걸 느끼게 해주는 역할을 문학이 지금도 하고는 있지만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어떻게 독려해나갈지가 제 고민입니다.
제가 최근에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 출장을 갔다가 근년에 본 적 없었던 새로운 이미지를 실컷 목격했어요. 안경 쓴 여자 어린이가 표지에 쫙 등장한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에 여성 앵커가 안경을 썼다고 화제였는데 그 전의 일이거든요. 제가 그런 걸 보고 싶어해서 보인다고 하기에는 정말 하나의 현상처럼 모든 나라의 부스에 안경 쓴 여자 어린이가 축구하는 이야기, 안경 쓴 여자 어린이가 바이올린 켜는 이야기, 발레하는 이야기 등등이 있었어요. 어린이와 나누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변화가 이런 식으로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어머니들에게 힘을 드리고 싶어요. 양육자로서의 역할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분담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엄마에 대한 혐오를 빨리 멈출 수 있도록 하는 담론을 시급하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서화 저는 희망이라면, 교육이라는 단어에 매몰되기보다 페미니즘 교육 그 자체가 나의 문제라고 여기게 하는 순간에 온다고 생각합니다. 누굴 가르치는 문제, 누구를 교육하는 문제가 아니라 교육 주체와 대상 모두가 동시적으로 페미니즘을 만나는 문제라는 거죠. 저의 경우 이번에 낸 책에 ‘엄마’와 ‘아들’이라는 뻔한 명명을 그대로 사용했어요. 우려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말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엄마’라는 이름을 단 책들이 대부분 아이가 성공한 다음, 즉 ‘좋은 아이’로 성장한 결과 위에서 안정적인 지대를 마련해야만 엄마가 발언하는 게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 나는 성장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아이가 흔들리고 있을 때 엄마라는 이름으로 한번 써보자, 아이도 ‘아들’이라고 명명해놓고 그 안에서 흔들리는 그 자체의 글이었으면 좋겠다라는 식으로 사적 경험을 판 거죠. 책을 냈을 때의 마인드는 ‘아들을 교육시켜보자’보다는 성교육하겠다고 좌충우돌하는 어떤 초등학생 아이와 엄마의 모습 그대로였던 거예요. 누굴 내가 가르친다는 입장보다는, 너와 내가 만난 상황 자체가 바로 성교육에서 다뤄야 할 주제였더라, 우리의 상황 자체가 젠더적인 문제더라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래서도 더 끈질기고 집요하게 성교육이라는 이슈로 진입해서 페미니즘까지 가게 되더라고요. 교육받아야 하는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고 우리 문제가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이 사회가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정말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생각이 결국 저에게는 희망이었고,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해야 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엄마라는 이름이나 자식이란 이름이나, 아들이나 딸이나, 양육자…… 이런 단어들에 매이는 걸 넘어서서 모두가 다 내 문제로 진지하게 인식하는 순간들을 마주하면 좋겠다, 그 순간 의미있는 새로운 뭔가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순간을 경험하고 페미니즘 교육이라는 말에 각자의 경험과 의미들을 투여하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고연주 서울시에서도 성평등 교육을 굉장히 중요한 정책으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집 교사, 중학교 교사, 대학 교수, 조부모, 시민활동가 그리고 공무원까지 다양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을 진행 중입니다. 물론 여러 어려움에 봉착하긴 하지만 그래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교육의 양과 질을 제고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투운동으로 인해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 것 같아요.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말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지만, 자신이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든 안 하든 간에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그렇게 될 거라 기대하고요. 여태껏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지진 않을 거라는 태도로 살아왔는데 그게 아주 틀리진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의 움직임들이 너무나 반갑고 기쁩니다. 항상 페미니스트는 한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제는 그 생각을 좀 바꿔도 될 것 같아요. 페미니스트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김지은 한 무더기요.(웃음)
김고연주 미투운동이 확산되고,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가 논의되는 지금은 최현희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역사적인 순간인 거고, 또 진보의 순간인 거죠. 우려와 흥분이 교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분들이 곳곳에 계시기 때문에 항상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대와 희망을 품게 돼요. 오늘 이 시간도 그런 기대와 희망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대화에 감사드립니다. (2018.4.24.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