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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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경애하는 마음, 그 느린 전진

 

 

박연준 朴蓮浚

시인.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산문집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등이 있음. gkwlan@hanmail.net

 

김금희 金錦姬

1979년 부산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했다.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가 있다.

 

 

왼쪽부터 박연준 김금희.

왼쪽부터 박연준 김금희. ⓒ 강민구

 

 

1. 마음에 대해 우리가 하는 말들

 

‘마음’은 가용 범위가 넓은 단어다. 그 뒤에 다양한 서술어가 붙을 수 있다.

 

마음이 넓다 좁다. 마음이 있다 없다. 마음이 편하다 불편하다. 마음이 상하다. 마음이 간다. 마음이 쓰이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힘들다. 마음을 돌보다. 마음을 공부하다. 마음이 예쁘다. 마음이 보인다. 마음을 주다. 마음을 훔치다. 마음을 사로잡다. 마음이 돌아서다. 마음이 끌리다……

 

이렇게 많은 용언이 ‘마음’이라는 명사를 위해 ‘언제라도’ 복무할 준비를 한다.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이것에 기대어 자기 처지와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 걸까? 마음으로, 마음이, 마음을, 마음에, 마음도—갖가지 조사를 바꿔 달고, 마음은 생기고 진화하고 달아나며 사라진다. 마음이여, 너는 무엇이기에 “파괴”될 수 있지만 “폐기”할 순 없는 것인가? 김금희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창비 2018)에서 경애가 사랑 때문에 파괴된 마음을 어떻게 폐기할 수 있는지 질문하자 상수는 이렇게 답한다.

“폐기 안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176면)

 

『경애의 마음』의 주인공은 등장인물들의 ‘마음’이다. 책을 다 읽고, 제목의 탁월함에 감탄했다. 수긍과 납득에서 오는 탄성이었다. ‘경애의 마음’은 경애가 ‘지닌 마음’으로도, ‘경애하는 마음’으로도 읽을 수 있다. ‘경애(敬愛)’란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 아닌가.

 

작가 김금희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마주친 적 있다. 눈인사를 하고, 손을 잠깐 잡아보고, SNS로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그이를 잘 안다고 할 순 없다. 그저 멀찍이서 그이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이자, ‘쓰는 일’에 종사하는 동료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내게 ‘촉’이 있어, 그이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이는 작은 일도 공들여 하는 사람, 소소한 것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사람, 여리고 무른 것에 애정이 많은 사람, 늘 쓰고 있는 사람, 쓰다 지쳐도 다시 일어나서 쓰는 사람, 몸으로 쓰는 사람, 무엇보다 ‘애쓰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렇다. 나는 그이를 ‘애쓰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마음이 어떤 상태라면, 애는 상태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마음이다. 신발을 신고 움직이는, 초조한 마음이다. 먼 곳을 돌아다니는 수고로운 마음이다. 때문에 애는 태우고, 쓰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까지 읽고, 작가의 말과 마주했을 때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울컥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마음을 다해 썼다. (「작가의 말」 전문)

 

모든 작가는 적을 무찌르며 글을 쓴다. 글쓰기의 적은 ‘완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다. 보이지 않기에 더 두려운 적이다. 자주 나타나 기운을 떨어뜨리고 기분을 엉망으로 만드는 적. 이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저 애를 쓰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수밖에.

 

장편을 작업하는 작가들이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단편을 쓸 때와 다르게 장편은 내내 나를 장악했거든요. 단편은 2,3개월 고생하고 벗어날 수 있지만 장편은 안 놔주니까요. 꼭 뭐가 붙은 거 같았어요. 나중에 ‘작가의 말’을 쓰게 되면 꼭 이 두 문장을 써야지, 내내 생각했어요.

 

시가 춤추고 난 뒤 몸에 신명이 깃드는 노동이라면, 소설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물댄 논에 모를 심는 노동일 것 같다고 말하자 단박에 이렇게 대꾸한다.

 

제가 늘 하는 말이에요. 시는 예술! 소설은 노동! 소설 작업을 하는 중에도 소설은 읽지 않지만 시는 읽어요. 시를 한편 읽으면 받고자 하는 그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확 와서, 나를 치고 가는 느낌.

 

 

2. 불화할 수밖에 없어 불화하는, 불화의 아이콘

 

소설 이야기를 해보자. 반도미싱 영업직원 상수는 “팀장은 팀장인데 팀원이 한명도 없는”(11면) 팀장대리다. 입사동기들이 승진하는 동안 상수만 승진하지 못하고 있자 간부들이 꾀를 낸다. 팀장 뒤에 ‘대리’라는 꼬리를 붙여 ‘팀장대리’라는 애매한 직함을 준다. 상수는 ‘잘린 꼬리’와도 같은 존재다. 꼭 필요하진 않지만 존재하기에 따로 떨어뜨려놓은 사람.

 

승진 사유는 역설적이게도 상수의 극심한 감정기복이었다. 발작적으로 터지는 눈물과, 긴장과 불만이 일 때마다 시작되는 그 흐억어억 웅앵웅초키포키 하는 뜻 모를 혼잣말이 해당 층의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었으므로 나중에는 영업이사의 방을 줄여 상수의 독방을 만들어주었다. (11면)

 

어느 구석을 보아도 평범하다 할 순 없고, 감정기복이 심하며, 부적응자로 보이는 자가 활개를 치는 곳이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언니는 죄가 없다’에서 상수는 팔로워 2만명을 거느린 ‘언니’이자 운영자다. 이곳에서 상수는 팔년째 여성들의 연애상담을 하고 있다.

 

언니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에 대해 아는 일이었다. 섹스하는 여자들, 원치 않았던 여자들, 이별해야 하는 여자들, 싸우는 여자들, 가족을 떠나려는 여자들, 우울한 여자들, 속은 여자들, 살이 찐 여자들, 소비하는 여자들, 지켜야 할 비밀이 있는 여자들, 억울한 여자들, 죽은 혹은 죽으려는 여자들, 분노에 빠진 여자들, 어리거나 너무 나이 든 여자들, 기다리는 여자들. (33면)

 

회사에서 내쳐지고 겉도는 상수, 하지만 낙하산으로 들어와 쉽사리 자를 수도 없는 상수, 꼬리 중에도 꼬리인 상수, 잘라내고 밟아도 ‘순수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잡풀 같은 상수에게 ‘드디어’ 팀원이 하나 생겼는데 그가 경애다. 경애는 삼년 전 파업(물론 실패했다) 당시 농성에 가담한 적이 있어 회사에선 눈엣가시 같은 직원이다. “원래 홍보부에 있었던 사람이 총무부로, 다시 영업부로”(22면) 옮겨진 이 상황은 승진도 배려도 아니다. 그저 견디어야 하는 회사생활의 일환일 뿐이다. 묘하게 닮은 두 사람이 만나 각자의 상처와 아픔을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변하는지를, 소설은 그리고 있다.

 

김금희는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을 편애한다. 사회에서 볼 때 ‘평범 이하’라서, 오히려 개성이 돌출하는 인물들. 그들은 사회와의 관계에서 삐걱거리며 불화한다. 불화하지 않으면 잘 굴러갈 수 있는데, 반이라도 갈 수 있는데도 그들은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돈다.

 

왜 주로 아웃사이더들을 그리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사람들과 내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제가 그리는 인물들이 실패했다고 느끼지 않아요.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일 뿐, 그 정도를 유지하고 지키기기도 어렵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사람에 대한 제 기대치가 낮을지도 모르지만, 자기 질서를 가지고 일상을 이 정도로 영위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린 인물들처럼, 실제로 저도 사회에서 불화하는 면이 있어요. 제 생각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고 합의를 할 수 없는 선에 이르러요. 그런데 지금 세상을 보면, 세상과 불화하지 않고 사는 게 가능한가요? 저는 불화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불화하는 줄곧 싸움과 투쟁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는 백전백패다. 애초에 쥔 것이 없거나 보잘것없기에 싸움은 늘 힘겹고, 견디기 괴롭고, 패배가 예정된 투쟁이 된다. 그렇다고 이 싸움이 아주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약자라도 지켜내야 할 자존심이 있고, 자기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 즉 소신이란 게 있는 법이다. 이들은 치열하게 제 처지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성찰한다. 의식이 유연해야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변화를 거부하는 건 권력자들뿐이다. 그들은 잃을 게 많기 때문이다. 오직 잃을 게 없는 약자들이 더 쉽게 변한다. 작가는 ‘불화할 수밖에 없어서 불화하는’ 일, 틀린 것을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인물에 대한 애정과 공감으로 작품을 썼다.

 

사실 우리도 경애와 상수하고 다르지 않았음을, 우리도 ‘불화의 아이콘’이었음을 고백하며 웃었다. 상처가 섞인 웃음이었지만. 그 시절 우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불화하지 않을 수 없던 나름의 불가피성을 확인했다. 나는 한두달마다 회사에서 짐을 싸 나오기 바빴다면, 작가는 6년 동안 편집자 생활을 하면서, 그의 주인공들이 그랬듯이 고요히 투쟁하며 버티었다는 점이 다르다. 작가의 얼굴에 상수와 경애의 얼굴이 잠깐 겹쳐졌다. 그들은 약하기 때문에 강자가 될 수밖에 없는, ‘약한 강자’다.

 

 

3. 1990년대, 인터넷, SNS

 

아주 오래전 유행하던, 거리의 낙엽을 다 쓸고 다닐 듯 통이 넓고 긴 청바지를 입고 머리스타일은 기장의 끝을 날카롭게 자른 이른바 ‘칼머리’를 하고 다니는, 이제 막 촌스러움에서 벗어나 요즘 말로 하면 ‘힙함’을 표출하려고 하지만 여러모로 받쳐주지 않아서 어딘가 ‘불우’의 느낌을 주던, 예를 들면 1990년대의 어느 풍경을. (156면)

 

작가마다 애착을 갖는 시기나 장소, 코드가 있다. 김금희의 작품엔 유난히 1990년대(그중에서도 1999년)의 풍경, 그때 인물의 경험이 많이 등장한다.

 

소설에서 부러 90년대를 그리지 않으려고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를 그리려고 하면 자꾸 그 시기가 들어와요. 1999년은 제가 스무살이던 해거든요. 제 인물들이 보이는 유연함을 지녔던 때죠. 그 시절을 아름답거나 순수했다고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나이가 가지고 있는 힘, 유연함의 힘을 지녔던 시기라고 기억해요. 소설에서 저는 인물들의 ‘변동’, 혹은 ‘성장’을 그리고자 하는데, 그런 인물에 대해 쓰다보면 자꾸 그 시절로 되돌아가보게 되는 것 같아요. 20대는 10대보다 더 유연한 시기 같아요. 길이 보이면서 유연해지는 때라고 할까요? 그와 동시에 2000년대는 ‘광장’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광장이 확 열린 것같이요. 여러가지가 다양해지고, 우리들이 밖으로 나와 무언가를 해낸 것 같은 생각도 들었고요. 월드컵도 있었고, 우리가 기성세대를 설득해 대통령을 뽑았고,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 이전에 비해 해소된 것 같았죠. 제가 2003년에 회사생활을 시작했어요. 대학 때 움츠러져 있고 해결되지 않은 게 있었다면 2000년대 넘어서면서는 사회의 일원이 되고 그것들을 풀어내며 해소한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일일이 응답해야 하는 시기로 온 거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대학 시절을 좀더 가깝게 체감합니다. 인간관계나 앞날에 대해 의문이 많았는데, 해결을 못한 채 사회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던 때. 그때 가졌던 의문들은 지워진 게 아니라 지금도 불쑥, 떠올라요.

 

90년대 풍경이 등장하지만, 인물들은 2000년대에 활동하며 나이를 먹는다. 인물들은 전화선을 빌려 통신망(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에 접속하던 시기부터 익명의 존재와 온라인에서 만난다. 온라인에서 ‘접속’이 종종 오프라인 만남(번개)으로 연결되던 때. 익명의 존재가 곧잘 관계로 이어지기도 하던 때다. 초고속 무선인터넷으로 언제 어디서나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는 지금까지도 그들은 형태와 방식을 달리하며 사람들과 연결망을 통해 이어지거나 연대를 이룬다. 작가 김금희는 때로 현실세계보다 온라인에서 존재하는 이들, 그들의 자아정체성을 두고 골똘해지는 것 같다.

 

SNS는 늘 화두예요. 닫을까 말까 고민하기도 하고. 인터넷이 아예 없던 시절과 밀접하게 들어와 있는 시절을 비교하면 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생각하게 되죠. 익명성을 빌미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접근하는 일이 손쉽다는 데서 오는 맹점도 잘 압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 담긴 어떤 ‘토닥임’ 같은 것에 연연하게 돼요. 토닥임.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쌓이게 되는 거요. 익명의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해요. 타인에게 접근할 때 그에 대해 알지 못해 생기는 불안, 위험요소가 있는데도 그렇게 하는 것은 역으로 자신감과 확신이 있어서라고 볼 수 있거든요. 물론 가식적으로 자신을 꾸미는 사람, 있겠죠.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편집한 상태로 웹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제 소설에서 상수조차도 자신이 ‘언니’ ‘진짜 여성’이 아니라는 점 이외에는, 특별히 자신을 각색하진 않았거든요. 오히려 그 세계에서 보이는 모습이 진짜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지에서 상수는 존재들을 보듬는 역할을 하니, 언니가 되기에 충분하죠. 상수는 보듬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인데 가정환경이 적막하잖아요. 보듬을 대상이 없는 환경에서 마음을 투사할 대상을 찾게 되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익명의 존재들을 향해 가게 된 거죠.

 

Ⓒ강민구

Ⓒ강민구

 

내겐 소설을 다 읽고 맨 앞으로 돌아가 한두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는 버릇이 있는데, 읽으며 좀 놀랐다. 상수가 이토록 ‘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 상수는 “대부분 소설과 영화에서 만나고 헤어진” 여자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 지난밤 ‘제인 에어’가 “경험했을 통증이 어땠을까 헤아리면서 슬퍼”하는 사람이다. “사랑을 두고 한없이 도망치는 이들에게” “어렵지 않게 감정 이입”(9면)하는 상수는 자신이 운영하는 페이지에서 여인들이 익명의 목소리로 쏟아내는 고통에 귀 기울이며, 상처에 자신을 대입하고, 그들에게 용기와 위로, 때론 잔소리를 건네며 삶을 꾸리는 언니였던 것이다. 그런 그를 언니가 아니면 달리 무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때로 우리는 숨어 있을 때,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 ‘안심하며’ 진정한 내가 되지 않는가? 나는 ‘오히려 가면을 벗는 측면에서의 인터넷’을 바라보는 작가 김금희의 시선에 동의할 수 있었다.

 

저는 제때 머리 감고 제때 세수하고 나와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인 일, 나를 씻기는 일도 못하는 마음 상태일 때가 있거든요. 저도 일주일 동안 씻지 못할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땐 문지방을 넘는 일 하나도 정말 어려운 일로 느껴지거든요. 무기력하게 있던 어느날, SNS에서 어떤 유저가 바깥 사진을 찍어 보내주면서, ‘밖에 날씨가 이렇게 좋아요’ 하고 메시지를 남겼어요. 그 순간 나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죠. 친구나 가족이 아닌 모르는 사람 때문에, 밖으로 나올 용기를 낸 거죠.

 

그이는 모르는 이의 순수한 선의에 용기를 얻고 밖으로 나와 버스로 몇 정거장을 갔다고 한다. 일주일 만에 바깥공기를 마시고, 사람들 사이를 씩씩하게 헤쳐 걸어가 빵집에서 빵을 사 먹기까지, ‘용기’가 필요했다고 했다. “트위터에 존재하는 제 모습은 작가 김금희가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들과 평등한 관계로 존재하는 사람이에요. 그게 마음에 들어요”라고 말하는 작가는 자의식이 가득 찬 상태로 SNS를 장악하려는 자들과는 달랐다. 그이에게 SNS는 사람이 사람을 ‘토닥이며’ 만나는 작은 방, 대문 밖, 좁은 골목, 마음을 드러내도 괜찮은 세상이다.

 

 

4. 사랑을 경험한 자가 손에 쥐는 것

 

모든 걸 녹여버리는 용광로같이 뜨거운 사랑도 있지만, 나뭇잎이 자라는 속도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사랑도 있다. 작가 김금희는 사랑의 밀도보다 그것이 진행하는 과정, 사랑이 들고나는 시간의 결에 더 관심이 있다. 경애와 상수. 이들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단정하기엔 섣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사랑이라고 확언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며 나아가는 사랑’이랄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뚜렷한 형태의 사랑 도식을 유예하면서, 자기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것! 아주 천천히. 그들이 하는 사랑의 모습이다.

 

저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한번에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그의 ‘하나하나하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 측면이 레이어가 쌓이듯 겹쳐지는 것을 보며 좋아했던 것 같아요. 평소에 그가 보여주는 태도와 좋은 점들이 충분히 쌓였을 때 사랑이 피어오르는 느낌을 가져요. 세심한 관찰이 모여 이루어지는 사랑, 들여다보는 눈과 관심에서 사랑이 비롯되는 거죠. 소설에서 인물들이 서로를 들여다보는 과정에 관심을 갖는 이유죠. 제가 연애에 대해 많이 쓰지만 연애의 밀도에 대해 쓰는 건 아니거든요. 판이 벌어지고, 두 남녀가 들어가서 서로를 관찰하고, 레이어를 쌓아가면서, 최종적으로 이 관계에서 뭘 가지고 나오는지에 관심이 있어요. 개인의 성장을 이야기하기 위해 연애를 가져오는 것이지, 연애의 다양한 면모를 전달하려는 것이 목적은 아닌 거죠. 제겐 인물들이 어떤 성장을 했는지가 가장 궁금합니다. 사랑이 어떤 형태였든 아무 상관 없이, 그것을 통해 인물이 어떤 성장을 했는지가 가장 중요하죠. 소설 뒷부분에 상수와 경애도 서로 연락하지 않는 시간 동안, 각자 어떻게 살아갈지 숙제하듯 풀어나가는 시간을 가지잖아요.

 

모든 연애는 사랑이자 성장 과정이다! 하찮은 연애라도, 그 경험을 통해 상대를 알아가고 제 안의 심연과 마주친다. 상수와 경애는 직장 동료였다가, 서로 삐걱대며 맞춰가는 팀원 관계였다가,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사이트에서 한쪽은 고민을 토로하고 한쪽은 들어주는 내밀한 관계였다가, 둘은 알지 못하는 사이 과거의 시공에서 여러가지를 ‘겪고 나눈’ 특별한 사이로 나아간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이 들듯 ‘정(애정)’이 든다. 작가는 이 ‘느린 전진’을, 켜켜이 쌓이는 사랑의 기록을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독자들이 그 시간을 고스란히 함께 겪을 수 있도록.

상수와 경애는 여러가지를 나눠 갖지만 대부분 지나간 것이며 스러진 것들이다. 은총과의 추억, 친구들의 죽음, 은총이 만든 「마음」이라는 영화, 그 영화를 만들던 때의 풍경, 시간, 소소한 경험,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지, 도무지 이익을 낼 것 같지 않은 회사 일까지. 많은 것이 둘 사이에 놓여 있다. 베트남 파견지에서 경애와 상수는 더 돈독해진다. 서로의 일상, 과거, 상처, 현재 당면한 문제를 생각하며 상대방 때문에 마음이 진동함을 깨닫는다. 기억하기로 상수와 경애 사이에 스킨십은 딱 한번(소소하게 한번이 더 있지만) 일어난다. 그 장면은 내게 이상할 만큼 ‘격정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평소에 전혀 가져보지 못한 극강의 다정함이라서 상수는 자기도 모르게 경애의 손을 잡고 말았다. (…) 경애는 정말 수고가 많았으니까. 가끔 누군가의 인생을 생각하면 그 수고로움에 왈칵 감정이 올라오는 때가 있고 상수의 경우에는 주로 자신의 인생이었지만 적어도 오늘만은 달랐다. 상수는 경애 손을 잡고도 얼이 빠져 실감을 못하다가 경애가 손을 마주 잡았을 때에야 상황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상수가 경애의 손을 덮듯이 잡았지만 이번에는 경애가 손을 위로 올려 상수의 손을 눌러서 잡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상수는 생각했다. 이렇게 손을 번갈아 올려가며 잡고 있는 지금은 머릿속이 완전히 비워져 아무 번뇌도 없지 않은가. 아니, 지금 아무 생각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절대적 없음은 아니고 무언가 아주 고요하게, 마치 우주에 퍼지는 단파음처럼 삐— 하면서 없다—고만 인식되고 있지 않은가. (…) 둘은 손을 놓았지만 손만 그랬을 뿐 테이블의 공기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에 사랑이 있었다. 이 베이지색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자 상수는 눈물이 어렸는데 사랑이 있다는 느낌이 가져오는 의외의 헛헛함 때문이었다. 사랑이 있다고 하면 대개 차오른다거나 벅찬다거나 하는데 지금 상수는 무언가가 급하게 빠져나가 완연히 달라진 바깥의 온도와 내면의 온도를 느꼈다. (258~60면)

 

당신을 생각하느라 만들어진 “극강의 다정함”은 손과 손을 맞잡게 한다. 마음에 변동이 생겼을 때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신체 부위는 손이다. 이 손잡음은 육체적인 몸짓을 넘어선 마음의 격동을 드러낸다. 손이 손을 찾고, 그 손을 손이 피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부여잡는다. 그곳에 사랑이 있다. 덩치가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사랑,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지만(없음) 마음의 위치와 온도를 “완연히” 달라지게 했으므로(있음) 상수를 울고 싶게 만든 것.

 

이성애로 한정하기엔, 어쩌면 경애와 상수의 감정이 너무 넓었던 것 같아요.

 

상수가 경애의 이름을 두고 “경애하는 경애”라며 말장난을 할 때 경애는 방금 “들이댄 거”냐며 이렇게 응수한다. “경애한다면서요, 그거 사랑하고 공경한다는 뜻인데, 그래요,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까지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뭐 인류애적으로라도요.”(262~63면) 인류애적 사랑이든, 이성애적 사랑이든, 동료 간의 사랑이든, 사랑을 그 성분에 따라 분류하고 밀도와 순도를 재는 일은 이 소설에서는 의미가 없다. 그저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의 일’이 진행되고 있음이 중요하다. 상수는 벌써,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란 그렇게 함께 떨어져내리는 것”(208면)이라는, 사랑의 비밀을 알고 있다.

 

 

5. 불행의 지도를 가지는 일

 

마음이란 대보라고 있는 게 아닐까? 당신 마음을 그려보고, 그 크기와 형상에 맞춰 내 마음을 딱 그 정도, 그만큼이 되게 늘이고 줄여보려 애쓰는 것. 딱 맞출 수 없을 테지만 어쨌든 애써보는 것. ‘감정이입’은 사랑의 성장에 따라 세지거나 약해진다. 그이는 마음을 생각하고, 마음을 쓰고, 마음을 대보고, 마음을 보여주는 일에 공을 들인다. 서사를 좇지 않고, 인물의 ‘마음의 결’을 따라가는 글쓰기.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서술. 이는 매 장면을 하이라이트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잡아 그려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견디며 써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이의 소설에서 이야기는 흐르다가도 자주 멈춰 해부되거나, 빛 속에서 크게 부각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는 당신이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그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1

 

그이의 작업은 상수가 되었다가, 경애가 되었다가, 이리저리 마음을 옮겨보며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진동을 겪어내는 일이다. 이런 쓰기가 힘들지 않았는지, 디테일이 질릴 정도로 살아 있는 쓰기는 어떻게 가능했는지 물었다.

 

Ⓒ강민구

Ⓒ강민구

 

인물의 내면을 그릴 때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껴요. 연재를 끝내고 뒷부분을 이어서 쓸 때 뭔가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더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했는데, 결국 제가 쓰고 싶은 대로 쓰게 되었어요. 기억을 재현하고, 마음을 보여주는 것. 독자들이 그것을 읽고, 나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 그게 제가 하고 싶은 거예요. 디테일에 관해서라면, 인상적인 장면은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머릿속에 넣고, 자주 떠올리는 편입니다. 글을 쓸 때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그걸 잘 전달하고 싶어서 정말 많이 노력해요.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옮겨놓는 작업에 관심이 많거든요. 저에겐 그게 이미지지만 그것을 다시 언어로 번안하는 작업인 거죠. 그렇다고 단순히 묘사는 아니에요. 어떤 상황을 묘사하는 게 소설의 역할은 아니거든요. 상황의 분위기, 감정과 톤을 전달하는 것이 언어를 부리는 사람의 성실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 김금희는 “매일 성실히, 약속이 있는 것처럼” 나가서 소설을 쓴다. 지독한 성실함이다.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않다는 작가는 “완성도가 허상이란 것을 알면서도 작업하면서 늘 갈구”한다. 본인은 쩔쩔매며 작업을 하는 것 같은데, 주위에선 그이가 누구보다 이 일을 즐거워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무도 없는 까페에 나가 글을 시작해요. 이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어릴 때 끈기가 없는 아이였는데, 유일하게 끈기를 가지고 하고 있는 일이 글쓰기예요. 소설 작업을 하는 동안만 느낄 수 있는, 어떤 희열이 있어요.

 

소설을 쓰는 동안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이라! 나도 조금은 알 것 같다. 문학의 자리가 점점 누추하고 비좁아지는 시대에 당신은 왜 문학을, 하필 소설을 쓰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문자로 하는 작업, 그러니까 시나 소설을 쓰는 일은 정말 내밀하지 않은가요? 내밀하게, 뭘 불어넣는 장르잖아요. 그런데 읽는 사람의 행위 자체도 내밀해요. 영화를 볼 땐 같이 보기도 하지만, 책을 두고 누군가와 같이 읽진 않잖아요.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 내밀한 작업을 하는 둘이 만날 때, 그 순간 폭발적인 힘이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삶을 폭발적으로, 순식간에 바꿀 수 있잖아요. 저 역시 어린 시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그런 느낌을 받았고요. 내밀하게 다가와서 굳어가는 것을 풀고,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 문학의 힘이죠. 예전보다 소설을 읽는 독자가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저는 문학이 내밀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뒤로 물러나면 좀 어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뒤로 물러나도 여전히 읽는 사람이 있어요. 내밀함을 찾는 사람들, 우리끼리 모여서 계속 이 세계를 유지하는 건 어때? 여전히 서점에 서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고르는 독자들이 있고,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잖아요. 이미 있는 것에 회의를 갖기보다, 그것을 좀더 알아주고 생각하는 게 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나라

Ⓒ신나라

 

컵 속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보았다. 테이블 위에 무심히 ‘있는’ 우리의 마음을. 파손된 적은 있지만, 폐기한 적은 없는 이인분의 마음이 거기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마음이 얼마나 쉽게 금이 가는지, 상처 입는지, 그것을 모른 척하지 않고 들여다보고 파헤쳐 기록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친 마음은 물론 파손되기 전으로 돌아갈 순 없을 거예요. 그렇더라도 그것이 가치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손상되어 실금을 가진 채로 우리는 계속 살아야 하니까요. 어렵지만 ‘인정’하고, 그것을 안고 가는 게 중요하죠. 상처를 보고 인정하는 순간은 어렵지만 인정해야 해요. 인정한다는 것은 작가에겐 곧 쓰는 일과 연결되니까요. 쓰는 자는 ‘불행의 지도’를 세밀하게 그려서 들여다보는 자죠. 그 순간은 앞이 잘 안 보이고, 슬픔에 빠지기도 하지만 일단 불행의 지도를 얻으면 그 길은 피해서 갈 수 있잖아요. 더이상 그 일이 우리를 위협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마음을 폐기하지 않는 것은 삶에서도 필요하지만, 작가가 글을 쓰는 데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마주 보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버지니아 울프가 쓴 문장에 대해 말했다.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 여기서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갈라진 조각을 하나로 묶어 내는 일이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2 쓰는 사람은 자기 속에 엉켜 있는 덩어리, 다치게 할 위험이 있는 덩어리를 말로 바꿔놓고,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불행의 지도를 아니까, 지도 위에서는 또다시 불행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

 

이야기를 끝내고 보니 ‘자기 몸짓보다 더 크고 투명한 껍질’을 벗어둔 작가 김금희가 내 앞에 있다. 그 커다란 껍질 안에서 우글우글한 이야기가 파닥이는 것을 보았다. 그 속에선 아직도 상수가 경애하고 걸어간다. 작가는 그 풍경에서 한걸음 벗어나 ‘혼자’가 되었다. 상수와 경애는 성큼성큼 걸어, 좀더 건강해진 다리로 독자들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상수와 경애는 걱정이 안 되는데,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가벼워진 채 앉아 있는 작가가 잠시 걱정됐다. 마음이 뭉클했다. 그이는 홀가분해 보였지만, 언제라도 울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이가 또다른 세계를 일구고, 그 속에서 다른 인물들과 다른 이야기 속에 빠져 더 아름답게 변신할 것을 알기에 냉큼 걱정을 거두었다. 그이와 나눈 이야기 중 지금까지, 내내 마음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말. “아침에 눈을 뜨면 아무도 없는 까페에 나가 글을 시작해요.” 이 한 문장이 내겐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녀는 내일도 까페에 나가,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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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김현우 옮김, 반비 2016, 13면.
  2. 같은 책 350~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