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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남상욱 南相旭
일본문학 연구자. 공저 『지금, 여기 극우주의』 『일본, 상실의 시대를 넘어서』 등이 있음.
indimina@hotmail.com
이영광 李永光
시인.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 『끝없는 사람』 등이 있음.
leeglor@hanmail.net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저서 『개념 비평의 인문학』,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황정아 더운 날씨에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2018년 하반기 문학초점을 이영광 시인과 함께 진행하게 된 문학평론가 황정아입니다. 가을호에는 일본문학 연구자이신 남상욱 교수를 초대손님으로 모셔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지난호에 비하면 진행자들의 평균 연령이 ‘다소’ 올라간 것 때문에라도 좌담 분위기에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이영광 반갑습니다. 한꺼번에 여러권을 읽어서 공부가 많이 됐습니다. 독서 중에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들을 털어놓고, 또 배우고 가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상욱 일본 문학과 문화를 연구하는 저에게 본격적으로 한국문학을 읽고 두분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동시대 한국문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처음이라 설레면서도 두렵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정영선 『생각하는 사람들』(산지니)
황정아 소설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볼까요. 이번호에는 유난히 다양한 성격의 세권을 고르게 되었는데요, 먼저 정영선 장편소설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1997년에 등단해서 주로 부산을 기반으로 꾸준히 활동 중인 작가예요. 이번 작품은 ‘탈북자’ 서사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죠. 작가가 하나원(통일부 소속의 북한이탈주민 교육기관. 정식 명칭은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사무소’)의 교사로 자원해서 직접 취재했다는 인터뷰를 읽었어요. 그간 탈북자 소설은 대체로 국경을 넘나드는 월경서사나, 난민 혹은 디아스포라 같은 범주에 속했죠. 이제는 탈북자들의 자전적 서사까지 더해져 다양한 ‘탈북문학’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들』은 탈북자들의 북한에서의 삶, 탈북 경위 등 과거를 구구절절 들여오지 않고 탈북자들의 현재 삶만으로도 장편서사가 가능해졌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영광 탈북자들이 한국이라는 낯선 체제에 힘겹게 적응해가는 과정에 더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 또한 잘 짚어낸 작품이에요. 한국사회에 비판적 시각을 지닌 인물인 병욱을 통해 경제적 불평등이나 황금만능주의 등 남한사회의 부패상을 드러내는 데서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주영의 가족사가 곧 분단의 비극적 현재인 만큼 결말에서 암시된 분단극복의 실마리 또한 인상적이었고요. 체제에 소속된 기관원인 ‘코’ 같은 인물을 통해 과도한 민족주의적 접근을 자제하고 탈북자들의 실태를 개연성 있게 그려보려 한 점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남상욱 뭔가 꿈틀대면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요. “남조선은 공화국에 비하면 천국이긴 했다. 그런데 불쑥불쑥 화가 났다. 왕궁 같은 백화점과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가게를 지나갈 때마다 그랬다. 공화국에 있을 때와는 다른 공포였다. (…) 한국은 사람을 쓸쓸하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67면) 같은 대목을 읽으면 ‘탈북자를 어떻게 관리할까’만 생각하는 한국사회를 돌아보게 됩니다. 탈북자들도 우리를 보고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서울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지하철이었다. 어디를 가든 한 시간 안에 닿을 수 있었다. (…) 미로였다. 남조선은 이 교통망만큼 미로였다. 무질서하다 싶다가도, 질서가 있고 다들 돈독이 올라 눈이 뒤집혔다고 생각되는데 또 자본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다”(119면) 같은 대목도 ‘그들’ 눈에 비친 한국사회를 생각하게 합니다. 탈북자들이 ‘이 체제에 적응할지’ ‘다시 돌아갈지’라는 선택지에서 늘 고민한다는 게 정말인지 궁금하네요.
황정아 기본적으로 탈북자를 이해하고, 편견과 차별을 완화하려는 문제의식이 담긴 소설로 보입니다. 최근 남북관계가 호전되면서 북한혐오 정서도 표면적으로는 줄어드는 듯하지만, 그 변화가 얼마나 실제적인지 보여주는 시금석이 탈북자들의 한국생활이겠지요. 이 소설은 그들의 삶이 여전히 어떤 틀에 갇혀 있고 탈북자라는 분류가 하나의 계층처럼 작용한다는 걸 일러줍니다. 그런데 탈북자들의 삶을 리얼하게 그려내려는 의도가 다소 단면적인 서사로 흘러버린 감이 있습니다. 인물 개개인에 대한 섬세하고 분석적인 접근이 안 된 것 같아요. 물론 개별 고통을 천착하는 것도 그것대로 상투화될 가능성이 있지만요. 이만큼 촘촘한 스토리를 구성해낸 건 돋보이지만 아쉬운 묘사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수지 같은 캐릭터요.
이영광 수지는 북한사회의 눈으로 보면 체제를 부정한 배신자죠. 북한체제에 강한 반발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미숙하고 순진합니다. 병욱이 한국사회와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꿰뚫어 보는 반면에, 수지는 그 자본주의를 자유로 착각하는 상태죠. 인물을 단순화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자꾸 울게 만드는 데 그친 것 같아 아쉬웠어요. 입체성이 떨어지는 것은 코나 주영도 비슷해요. 개연성 측면에서 코는 좀더 악랄해야 할 것 같고, 주영도 좀더 영악해야 할 것 같아요. 코와 주영은 애정선이 흐르는 관계인데, 주영이 코와의 관계에서 그렇게 수동적일 이유가 있을까요. 유니원(탈북자 교육시설) 소속이면서 탈북자들한테 보이는 일방적인 연민도 좀 걸리는 대목입니다.
황정아 국정원 댓글알바까지 했던 주영이 마지막에는 정말 선생님다운 면모를 보여주죠. 코가 간첩으로 엮으려는 수지를 지켜주려고 하고요. 그 변모가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았어요. 수지와는 코를 매개로 한 일종의 삼각관계였으니까 더 복합적인 감정을 느낄 법도 한데, 대뜸 “말을 찾아 날아온 한 마리 파랑새”(216면)라며 선생이자 언니 자세로 바뀌는 게 좀 어색했어요. 수지는 씩씩하고 강단있지만 또 순종적이고 ‘여성적’이기도 하다는, 북한 여성에 대한 기본 이미지를 응축해놓은 느낌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순진한 팜므파탈’인데다 애초에 출신을 숨기고 심사를 통과할 정도로 대담한데 그런 면모를 세밀하게 조명하지는 않았어요. 반면에 유니원 안에서의 몇가지 에피소드들은 굉장히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남상욱 두분께서는 이 작품의 인물에 불만이 많은 듯하지만 저는 하나원이라는 수용소의 안팎을 이런 형태로라도 연결 지었다는 것을 좋게 평가합니다. 무라까미 류우(村上龍)가 『반도에서 나가라』(2005)를 쓸 때 100회 이상 탈북자 인터뷰를 했다고 해요. 경제적 위기를 겪는 북한이 일본의 일부를 점령한다는 내용의 미래소설인데요, 일본을 점령하러 온 군인들의 내면 묘사에 탈북자 인터뷰를 이용한 거죠. 다양한 탈북서사를 참조하기도 했고요. 사실 그 이야기들에는 전형성이 있죠. ‘고난의 행군’ 시절에 자기 아이를 잡아먹었다든가 하는 괴담까지 포함해서요. 그런 이야기와 비교해보면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일보한 측면이 있습니다.
황정아 인육 먹는 이야기가 주영의 하나원 수업시간에도 등장하는데 인상적인 장면이었어요. 실은 탈북자들한테도 도시괴담 같은 풍문인 거죠.
이영광 할머니의 삶에서 나아가 그 후손들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서사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과 북을 잇는 고리라는 생각이 들고, 현실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유의미한 상상을 하게 해요. 물론 이 부분에 대한 서술도 좀더 실감나게 이루어졌으면 좋았겠지요. 후손들이 만나는 과정이 다소 치밀하지 못한 느낌이에요. 소설의 제목이 ‘생각하는 사람’인 것도 흥미로워요. 국적도 감정도 다 인간의 증거지만, ‘생각’을 가장 전면에 내세운 거잖아요. 탈북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인간으로서 어떤 반응을 하며 사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암시적인 제목이었어요. ‘같은 인간’이라는 주제를 담아내고자 한 듯합니다.
황정아 저는 가족서사로 흘러버린 게 못내 아쉽습니다. 할머니의 남아선호도 그렇고, 결국 또 가족에 의지해서 풀어가야만 하는 걸까요. 이때의 가족이 ‘민족’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겠고, 혈연적 관계를 포함해 민족이라는 범주가 그간 너무 억압되어온 면이 있기는 합니다. 남북의 새로운 미래를 전망하게 되는 요즘에는 민족이라는 개념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이 소설이 가족서사로 수렴되는 양상은 익숙한 것의 반복으로 느껴졌습니다.
남상욱 결말이 아쉽기는 하죠. 다른 대안들을 조금 열어놨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수지나 창주의 미래를 좀더 그려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병욱이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이 아닌 진짜 혁명을 어떻게 할지 한번만 더 고민해봤다면 정말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고요. 저는 그 인물들과 조금 더 함께 고민하고 갈등하고 싶거든요.
김봉곤 『여름, 스피드』(문학동네)
황정아 김봉곤의 첫 소설집 『여름, 스피드』는 퀴어서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처음부터 작품의 성격을 규정해버리면 독서 방식이 제한될 우려가 있지만, 그럼에도 최근 퀴어서사가 부쩍 많이 창작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봐야 할 것 같아요. 등단작이면서 자전소설을 표방한 「Auto」를 보면 김봉곤은 퀴어적 주체성을 글쓰기의 중심에 놓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는 듯 보입니다. ‘여름, 스피드’라는 제목은 해당 작품만이 아니라 소설집 전체를 잘 압축해줍니다. 속도감과 리듬감을 실은 문장과도 어울리지만,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지속하면서 앙금이 남는 ‘감정’보다는 순간순간 달라지는 ‘감각’을 포착하고 있다는 면에서 제목과 잘 조응하는 것 같아요.
이영광 사랑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특징을 연관 짓는 점도 보이더라고요. “—형이랑 자는 꿈을 꿨어요./내가 그 문자를 보낸 오후엔 비가 내렸고, 긴소매를 입기에 조금은 더운 계절의 끝이자 초입 무렵이었다”(「라스트 러브 송」 125면) 같은 식으로요.
남상욱 「컬리지 포크」는 쿄오또조형예술대학이 무대라서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소설집 전체에서 일본적인 것이 적잖게 등장하는데, 어떻게 봐야 하나 고민이 되었어요. 예컨대 「디스코 멜랑콜리아」에서 주인공이 테드를 진해로 데려가는 이유를 “<와타라세 다리(渡良瀬橋)>의 노래 가사 때문”(116면)이라 하거나, 「Auto」에서 “일본 레코드 대상은 나카모리 아키나”(233면)라며 시상식 장면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대목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것 같습니다. 작가에게는 진해가 일본의 80년대적 정서를 환기하는 곳으로 표상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일본적인 것이 어느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 내면화되었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마치 일본적인 것이 한국의 퀴어 감수성의 일부인 것처럼 신비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황정아 우리나라보다 퀴어 감성에 좀더 개방된 주변국이 일본이니까, 그 문화 자체가 퀴어성을 드러내는 자원이 되는 면이 있지 않을까요.
남상욱 그렇다면 더욱 의외인 것이, 예를 들면 토오꾜오에는 신주꾸산쪼오메(新宿三丁目)에 게이들이 모이는 까페가 쫙 늘어서 있어요. 서울의 종로5가처럼요. 쿄오또에도 물론 그런 곳이 있지요. 그런데 김봉곤은 퀴어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장소나 문화를 자기 퀴어서사와 연결 짓는 시도를 하지 않아요. 오히려 무언가 내밀하고 좁은 세계로 연결되는 일본어 고유명사 그 자체가 퀴어적인 것을 환기시킵니다. 그런데 그런 고유명사의 효과를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를 것 같습니다. 예컨대 나까모리 아끼나(中森明菜) 같은 80년대 여가수를 퀴어 코드로서 수용하는 문화 같은 거요. 저 역시 구글로 검색하고 나서야 국민적 아이돌 가수였던 그녀가 일본에서 일종의 게이 아이콘이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황정아 저는 연애관계라는 큰 틀에 집중했어요. 그 관계가 노출하는 취약성이 있잖아요. 거절당할 수도 있고, 관계가 파탄 나고 상처 입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안고 있죠. 그럼에도 그런 상황에 번번이 자기를 개방하는 모험이 일어납니다. 그런 모험으로서의 연애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면서 변주된 작품들이 묶인 것 같아요. 화자들이 대체로 유사한데 수줍음 많고 약자인 척 굴지만 사실은 대담하고 적극적으로 관계를 주도합니다. 그런 상반된 면이 한 인물 안에 있어서 사랑스럽달지요. 남성이 성적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으로 나타나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이영광 동성애에 대한 차별과 경멸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에서 퀴어서사로만 채운 첫 소설집을 출간한 것은 굉장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웠지만 읽으면서 동성애에 대한 내적인 고민 과정이나 괴로움을 보여주는 인물이 왜 없을까 궁금증이 생겼어요.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사실과 사정과 사건이 내가 게이라는 걸 지시하거나 게이가 아님이 아님을 지시했으니까. 나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 사고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건 좋았다. 정말 좋았다. 그게 내 기쁨이었다”(「라스트 러브 송」 132면) 같은 문장이 인상적이었는데도 그런 의문은 떠오르더라고요. 좋다 나쁘다는 차원은 아니고, 한편으로는 이 작가가 언젠가 다른 식으로 동성애를 다룬 작품들을 내놓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황정아 동성애를 둘러싼 사회적 압력이 두드러지지 않는 건 의식적인 선택 같아요. 대체로 그 연애는 ‘순수한’ 관계로 묘사되잖아요. 돈이나 권력, 계층 같은 맥락은 고려되지 않은, 순전히 육체적인 끌림으로 성립하는 연애처럼 그려지죠. 물론 상당히 ‘문화적인’ 육체이긴 하지만요. 그런데 육체라든가 육체적인 매력, 성애 그 자체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죠. 그 점에 대한 탐구도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미셸 우엘베끄(Michel Houellebecq)의 소설 『소립자』(1998)는 육체적인 것과 성(性)의 ‘자유로운’ 추구가 실은 불평등과 직접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잖아요. 육체는 또 폭력의 가능성을 늘 가까이 두고 있죠. 이 소설집에도 폭력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육체적인 것을 포함해 폭력이 실제로 들어오지는 않지요.
남상욱 사실 동성애에 관한 문학작품이 일본에 많기는 합니다. BL(Boys’ Love, 남성 간의 연애 및 성관계를 소재로 한 장르)이라는 하위문화도 활성화돼 있고요. BL은 여성 독자들이 남성의 동성애를 성적으로 소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중요한 건 ‘소비’라는 점입니다. 독자가 원하는 연애서사만 쥐여주다보면 ‘소비’에서 끝나기 쉽죠. ‘이건 순수한 사랑 같아’라고 느껴지는 이면에서 괄호 안에 묶인 문제들을 도외시하다보면요. 앞으로 인물들이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생각해보는 게 그 괄호를 푸는 첫 단계일 테고요.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라는 만화가 있어요. 남성 둘이 동거하는 이야긴데, 누가 밥하고 빨래할지를 정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연애에서 중요하지 않던 것들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 접어드는 거죠. 나이를 먹고, 동네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가야 할지도 문제가 될 테고요. 김봉곤의 소설 역시 ‘연애하는 몸과 마음’을 넘어 이런 문제를 건드릴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작가로서의 과제라는 게 아니라, 제가 독자로서 궁금한 거예요.(웃음)
이영광 「Auto」는 점프컷이라는 기법을 활용한 형식이 독특했어요. 특별한 사건은 눈에 잘 띄지 않고, 만남과 이별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아무래도 서술자가 생각이나 정념을 드러내는 데 역점을 둔 것 같아요. 김봉곤 소설의 주제는 사랑과 글쓰기인데, 이 작품의 “글을 쓴다. 그를 쓴다”(212면)라는 문장에 그게 압축돼 있습니다. 몇몇 의문점도 있습니다. 「컬리지 포크」에서는 두 사람이 호감을 갖고 만나 정사를 하는 과정까지가 납득이 되었어요.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만남과 정사가 급격하게 이뤄지더라고요. 「디스코 멜랑콜리아」가 특히 그렇죠. 이런 게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지, 아니면 캐릭터 설정이 그러한 것인지 의문이 남았습니다.
남상욱 사회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아요. “당신과 내가 만난 건 기적이에요. 거기에다 당신과 내가 게이일 확률을 곱해버리면 그 기적은 무한대가 되어버렸다”(「라스트 러브 송」 146면)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요.
황정아 「라스트 러브 송」에는 “세계를 여태까지와 다르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강박, 눈으로 주워 담은 새 세계의 에너지를 모-든-것에 대한 사랑으로 옮겨가기, 그걸 다시 남자에게 집중시키기”(132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이런 발언이 작품의 밀도를 높여주진 않지만, 작가가 밀고 나가는 글쓰기의 성격은 잘 보여줍니다. 로런스(D. H. Lawrence)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언뜻 떠올렸는데요, 그 소설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육체적인 접촉을 얼마나 싫어하고 또 얼마나 못하는지를 보여줘요. 서구문명의 정신주의적인 성격을 드러내면서, 부드럽고 따뜻한 육체적인 접촉의 중요성을 ‘선전선동’하는 작품이죠. 이 소설집에도 비슷한 지향이 있는 것 같아요. 퀴어적 성애가 내 삶만이 아니라 지금 시대에 왜 중요한지 독자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의제를 담은 듯해요.
남상욱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의 『가면의 고백』(1949)이 일본의 대표적인 퀴어소설이에요. 작가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면서, 아까 이영광 시인께서 말씀하신 여러가지 갈등도 언급되고 있어요. 동성애가 정신적인 게 아니라 육체적인 것임을 깨닫는 데서 오는 갈등, 그래서 내 신체가 내 뜻대로 안 된다면 그것을 자연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드러나요.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이너리티의 자기서사는 정치투쟁이 됩니다. 김봉곤의 다음 소설들이 어떤 투쟁을 보여줄지 기대돼요.
편혜영 『죽은 자로 하여금』(현대문학)
황정아 편혜영의 『죽은 자로 하여금』은 전통적인 사회소설 서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편혜영이기 때문에 조금 다른 분위기의 사회소설을 써낸 것 같아요. 쇠락한 도시의 부패한 병원을 다루는데, 의료 공공성이 실종되고 사고와 부정이 은폐되는 등등 병원 소재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부조리가 나와요. 이런 것들을 어떤 압도적인 퇴락의 분위기, 거의 디스토피아적 전망 속에 담아냅니다. 출구 없는 곳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짙게 깔려 있죠.
남상욱 저는 완성도 면에서는 오늘 다룬 세권 가운데 이 작품이 가장 높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말씀하신 ‘출구가 없다’는 느낌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이 됐습니다. 한국사회의 문제, 부정부패와 부조리 문제가 비슷하게 반복돼요.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는 실패해버리고요. 그래서 ‘이걸 언제까지 봐야 하지’ 하는 답답함이 느껴졌어요. “유령 같은 도시를 배회하느니 아픈 사람이 가득 들어찬 병원 창구에 앉아 있는 게 나았다. 적어도 병원은 바깥 거리처럼 황량하거나 적막하지 않았다”(117~18면)에는 묘한 비극적 인식이 보이죠. 고도성장기가 지나 적막한 도시지만, 그래도 아픈 사람이라도 있는 게 나에게는 낫다는 인식. 그런데 이런 게 돌파되는 지점이 없이 비관으로 일관해서 아쉬워요. 심지어 아내까지 주인공을 그렇게 고립시키는 이유가 뭔지도 잘 모르겠고요.
이영광 저도 한국사회의 알레고리로 읽었습니다. 사회의 축소판을 미래 버전으로 보여주는데, 워낙에 작가의 필력이 좋아서 설득력이 있어요. 구성도 탄탄하고 인물도 뚜렷하죠. 인물의 생각이나 심리를 세심하게 표현했어요. 그럼에도 의문 남는 점이 있어요. 아내가 뜻밖의 임신을 하는 것을 계기로 자기 도덕성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된 ‘무주’가 ‘이석’의 비리를 고심 끝에 드러내는데요. 그 과정에 쉽게 설득이 되진 않았어요. 이후 아내와의 관계에 균열이 가는 과정도 비슷한 느낌이에요. 인물의 심리와 행동을 상황이 과하게 결정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소설의 인물이라는 게 원래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황정아 인물 형상화의 치밀함은 전체 분위기에 못 미치는 감이 있습니다. 무주와 이석이 중심인물인데, 이석의 경우 무주의 시선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건너뛰고 서술된 면이 있다고 쳐도 생생하게 와닿지 않아요. 서두에는 이석이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일 거라 기대하게 만들잖아요. 고용인이지만 주인처럼 이곳저곳 활보하면서 온갖 일에 간섭하고 아예 병원에 살다시피 하는데다 외모나 가정사도 그렇고, 씨니컬한 농담도 그렇고, 어떤 음모의 중심인물 같은 인상을 조성해놓죠. 뭔가 속을 알 수 없고 섬뜩한 데도 있을 것 같고요. 이 정도면 서사 전체의 긴장을 좌우할 강한 캐릭터로 이어져야 마땅한데 그런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이영광 ‘사무장’과 캐릭터가 나뉘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황정아 그런 면도 있겠네요. 전반부에 깔린 암시들이 착실하게 발전되기보다 마지막에 드라마틱하고 알레고리적인 대사들이 집중되죠. 무주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무주가 한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 여러번 나오고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근거가 제시되는데 저한테는 그 과정에서 오히려 캐릭터 구축의 틈이 드러나는 듯했어요. “확실히 무주는 순도 높은 정의감과 도덕심에 홀려 있었다. 다시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신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받는 게 두려웠다”(43면) 같은 대목은 더 아이러니가 있어야 했을 것 같고요. 부정부패를 다룬 이야기들이 많다보니 뭔가 다른 걸 보고 싶었던 나머지 더 아쉬운 것 같기도 해요.
남상욱 배경에 인물들이 압도당해 있어요. 그래서 블랙홀처럼 인물들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요. 경기불황으로 인해 지방도시가 활력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병자는 아닐 텐데, 마치 경제가 모든 인간의 정서와 행동을 결정한다는 식의 전제가 강고하게 깔려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과, 이 소설의 배경이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비슷한 것 같아요.
황정아 신자유주의라면 좀더 쥐어짜서 이윤을 내야 할 텐데, 여기는 그냥 몰락하고 있잖아요. 병원을 신축해서 요양병원을 짓자는 이야기가 사기인 것처럼, 신자유주의적인 세계도 아닌 거죠. 배경으로 설정된 이인시(里仁市)는 지역경제를 떠받치던 조선소가 문을 닫으면서 급속히 쇠락한 곳으로 그려져요. 우리는 지금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삶, 발전하는 사회를 알게 모르게 당연시해왔잖아요. 그런 전제가 깨어질 때 생기는 일들을 잘 보여주는 이런 문제적인 공간을 포착한 점은 의의가 크다고 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상황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에요.
남상욱 어떤 면에서 더 알레고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까뮈(A. Camus)의 『페스트』(1947)를 보면 마지막에 설득이 되잖아요, 페스트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정의를 실현하려는 마음이.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병원에서 사람이 아프고 의식을 잃고 죽을 뻔한 게 이상합니까.”(67면)라는 사무장의 논리를 이겨내는 장치가 부족해요. 모든 사람은 죽지만, 모두가 죽어도 이 한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정의가 소설 안에서 희미한 거죠. 그리고 좀더 유머러스했어도 좋았을 것 같아요. 유머가 개입될 여지가 많아 보이거든요. 희극적인 요소를 썼다면 비극성도 함께 강해졌을 것 같아요.
이영광 사무장이 싫어서 퇴사했다는, 무주의 전임자 ‘양수’라는 인물이 있죠. 그런 캐릭터가 확대됐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작품해설(황종연)을 보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시스템과 병원 운영을 동형적으로 파악해 비극이 희망에 관여한다고 했지만, 저는 오히려 희망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컸습니다. 결말부분도 의아해요. 사무장이 도망갈 때 이석은 무엇을 한 걸까요. 이석은 숨겨진 ‘끝판왕’ 같은 느낌이었는데, 너무 쉽게 사무장한테 버려진 것 같아요.
남상욱 그래도 이석과 사무장이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병원서사와는 다른 부분을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황정아 사회소설이라 치면 벌어지는 사건의 구체성이 중요한데 그 점은 잘 살렸다고 생각해요. 전체적인 느낌은 『재와 빨강』(창비 2010)의 좀더 사실적인 버전이랄까요. 작가 특유의 어떤 ‘하드보일드함’을 유지하면서 그런 방식의 재난서사에서 이쪽으로 옮겨온 점은 지지하고 싶습니다. 분량이 좀더 길었다면 더 세밀한 조율이 이루어졌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제 시로 넘어가볼까요.
김명수 『언제나 다가서는 질문같이』(창비)
이영광 김명수 시인이 오랜만에 신작을 선보였습니다. 1977년에 등단한 이후 『월식』(민음사 1980) 『하급반 교과서』(창작과비평사 1983) 같은 인상적인 시집을 펴냈죠. 이후엔 한국사회의 모순과 분단극복 의지를 강하게 그려냈는데, 이 시집의 바탕에도 그러한 문제의식은 녹아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 생태위기 등에 대한 폭넓은 관심의 형태로요. 동시에 상상력과 언어표현 면에서는 대가의 풍모가 느껴졌어요. 기본적으로 자연표상을 활용하고 자연친화적인 가치관을 추구하지만 그 안에서 터지는 예기치 않은 발화들이 인상적입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지우기도 하고, 자연물에 덧씌워진 인간의 인식을 벗기려는 시도도 하고 있어요.
황정아 자연, 전쟁, 회상 같은 키워드들이 떠오르는데 자연이 확실히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자연에 대한 태도가 때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를 닮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자연을 직접적으로 호명하지만, 동시에 사유의 지평을 열어주는 매개로 활용하는 거죠. 특히 「금성과 더불어」라는 긴 시는 「틴턴 애비」(Tintern abbey)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자연과의 일치와 거리를 동시에 되새기면서도 결국 어떤 고양된 상태로 이르는 궤적을 그린다는 점에서요. 소박하고 천진한 매력이 있는가 하면 이따금 서늘한 현실 환기도 있습니다.
남상욱 일단 전반적으로 매우 따뜻하고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연친화적인 가치관이 지나치게 강해서 과도한 문명비판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문명에 보이지 않게 된 자연을 어떻게든 드러내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컨대 「라기보다」라는 시에서 고리·월성의 원자력발전소를 굳이 부정적으로 표상하기보다, 그것이 없었던 시절의 해변을 드러내는 식으로요. 반전과 관련해서도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보다 연민과 걱정이 훨씬 잘 느껴졌습니다. 아이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면 이런 것일까 싶었어요.
이영광 확실히 천진난만한 동시적인 느낌이 있어요. 이분이 동시도 쓰셨더라고요. 자연과 인간, 사물과 사물을 익숙한 유비의 그물로 엮으려 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에요. 자연과 인간 사이엔 규모나 속성의 차이 같은 게 있을 텐데, 때때로 그런 걸 뛰어넘어요. 상상력의 비거리가 멀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익숙한 자연 서정시와는 달라 보입니다. 그런데 그래서인지 조금 모호하고 관념적이기도 해요. 시상의 중심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 때가 있어요. 이런 게 긍정적으로 발현될 때는 ‘무지의 지’, 혹은 ‘인식을 내려놓는 인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독자의 사고를 중지시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요. “화단에 피어 있는 백일홍처럼/여름 모를 백일홍처럼/그러나 피어 있는 백일홍처럼”(「포도주잔」 부분) 같은 문장들은 신비스러워요.
황정아 「현(弦)」 같은 시도 단순하지 않죠. “오얏꽃은 오얏꽃이 되고 싶었지만/오얏꽃은 자두가 되었습니다”라는 첫 연만 봤을 때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전진에 대한 반감을 말하나보다 생각했어요. 내가 나면 되지 왜 자꾸 뭐가 되어야 하나 이런 것 말이죠. 그런데 읽다보니 자두는 자두나무로, 또 자두나무도 “자두나무 되고 싶었지만/자두나무는 오얏꽃을” 피우게 되더니, “오얏은 자두의 옛말입니다/자두는 오얏의 요즘 말이지요”라고 하면서 시가 순환해요. 이 전체적인 순환의 이미지 중간에 “기차가 철길로 달려갑니다”라며 직선의 이미지가 가로지르고 있어요. 이런 복합적인 면모가 흥미로웠어요.
남상욱 “오리가 두루미가 되었고/두루미는 물고기가 되었고/물고기가 다시 오리가 되기 전”(「그때 가만히 두었더라면」) 같은 대목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 시도 한 존재들이 다른 존재로 차례로 순환하는 가운데, “사람은 유독 사람이었다”라는 구절에서처럼 사람만이 이질적인 존재로서 가로누워 있습니다. 순환하는 존재들 사이에서 사람만 유독 순환의 고리를 끊을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순환의 고리를 끊는 ‘이름’을 부르곤 합니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과연 ‘가만히 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황정아 태풍이 잦아든 포구의 느낌을 드러낸 「아는 이름들이」도 좋았습니다. 태풍이 잦아들면서 드러나는 사물을 두고 “아는 이름들이 한아름 다가왔다”라고 하잖아요. 그 순간 이 풍경이 굉장히 색다르게 여겨지더라고요. 거기다 “바다에겐 모두 차별 없는 이름이다”라고 끝나니까 다시 한번 전환이 일어나는 셈이죠. 「언제나 다가서는 질문같이」에서는 “물결은 뭍으로만 치지 않”고 “바다에 출렁이는 물결”도 있지만 기슭에 와서 부딪히고 되밀려가는 파도 같은 것이 “언제나 다가서는 질문”이죠. 우리에게 다가서는 질문이란 항상 이런 식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파도처럼 쉼 없이 휩쓸려 와서 부서지는 거지요. 물론 이 시에서 파도 같은 질문의 실체는 “병사들”이지만요.
이영광 그 비슷한 주제를 「병사들 병사들」이라는 시에서는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대조적으로 읽혀요. 이 둘을 비교해보면, 시집 전체의 주제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평등과 평화라는 과제에 수렴되는 것 같아요. 무해한 시선이 이 세계를 이루어내는 힘이 되죠. 물론 몇몇 작품은 단순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가령 “빨강에게 물어라//무얼 잃은 게 있습니까?/아뇨”로 시작하면서 비슷한 구절이 반복되는 「빨강에게 물어라」가 그 예지요. 재미있기는 하지만 평이한 감이 있죠. 「작은 마을」도 따사로운 소품인데 조금 동시풍이어서 색조가 단순합니다. 시공간의 경계들을 타넘으면서 이루어내는 마음의 풍경이 곧 자연의 어우러짐일 텐데, 그것이 어그러진 삶에 대한 대안적 지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았습니다.
황정아 「탄환」은, 그 탄환이 장전된 탄환이 아니라 누군가를 맞히고 떨어져 잊힌 탄환 같은데요. 처절한 현장을 지나온 후의 어떤 평화 안에서 전쟁을 떠올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추상적이고, 저로서는 이 시세계를 다 따라가기가 쉽지 않네요. “나는 수평선 너머로 가고 싶소”라는 구절도 ‘격발되어’ 날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이미 시인은 어느 지점에 도달해 있고, 그 도달한 시선으로 세계를 보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독자인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괴리가 생기고요.
남상욱 저는 「시멘트」라는 시를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지평선은 외로워졌다/영원불멸함을 섬겼다”라고 할 때 쉽게 ‘불멸’의 이미지를 떠올렸는데요, 뒤에서 “인간의 건축물은 대답하지 않았다/정념에 사로잡힌 시인에게 물어도/10월의 방황 속에/당신 또한 방황하는 10월이었다” 하고 끝나요. 그래서 ‘지평선’ ‘영혼’ ‘불멸’까지도 모두 사라지는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 시인이 말하는 불멸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영광 김명수 시인도 이전엔 당위적인 문제를 당위적인 언어로 제시할 때가 있었습니다. 현실의 모순과 정치의식에 강하게 견인되었던 게 이분만의 사정은 아니지만요.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김명수 시인은 초기에는 쓰고 싶은 시를, 80~90년대에는 써야 하는 시를 썼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시집을 읽고 나니 어쩌면 이 둘을 한꺼번에 놓아버린 듯한 자유로움이 느껴졌습니다. 활달한 상상력, 시어의 경쾌하고 발랄한 리듬을 볼 때 특히 그렇습니다. 물론 잘못 짚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웃음)
김해자 『해자네 점집』(걷는사람)
이영광 김해자는 노동현장에서 오래 활동했습니다. 이번 시집에는 자신의 생활과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를 펼쳐놓았어요. 현장에서 배양된, 혹은 체화된 리얼리즘으로 시를 써오신 분인데 그 깊이가 훨씬 더해진 것 같아요. 한국사회의 계급 문제나 소외된 노동 문제뿐 아니라 버려지고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 연대의식이 깊이 느껴졌어요. 그러면서도 첨예한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서 작품으로 개입하며 드러내는 실천적 목소리가 살아 있습니다. 또, 불확실하고 어두운 문명의 앞날에 대한 예측과 경고에까지 관심사가 넓어졌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황정아 앞서 읽은 김명수 시집과는 톤이 대조적이에요. 물질성이라고나 할까, 삶의 다양성이 생생하게 육박합니다. 그리고 말을 아끼지 않고 풀어내죠. 말의 향연이라 해야 할지, 삶의 향연이라 해야 할지. 그 입담이 하나같이 생기와 힘이 있어요. 이번에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을 연상했습니다. 휘트먼은 ‘미국 민주주의의 시인’으로 불리는데요, 그도 굉장히 다양한 인간군상과 삶의 파노라마를 다뤘어요. 그러면서도 저는 김해자 시집에서 긴장감이 더 있고 다소 어두운 느낌을 주는 시들을 좋게 읽었습니다. 「불구의 말」이나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시간을 알약처럼 삼키며」같이 고단한 삶을 환기하는 시편들이 강하게 다가왔어요. “불구의 말, 떠듬떠듬 네게 기울어지던 말들”(「불구의 말」) 같은 대목이요.
남상욱 인간이 노동한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게 되었어요. 노동현장이라는 물적 조건에서 느끼는 인간의 감정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고요. “몇 번이나 죽어봤을까”(「여신의 저울」)라는 시구가 나오잖아요. 그리고 “살았다기엔 너무 많이 죽었고 죽었다기엔/너무 생생하던 내가 어느 날 죽어버렸네”(「어느 날 내가 죽었다」)라는 구절도 있죠. 이 시인은 도대체 죽음을 몇번이나 경험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노동이라는 게, 죽을 만큼의 생생한 고통을 수반한 삶의 조건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것마저 느낄 수 없게 될 때 정말로 죽어버리는 것이겠죠. 노동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열망과, 노동에서 소외될까 하는 두려움이 시인 내부에 얽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영광 자기 고통에 대해서도 쓰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힘들여 적고 있어요. 함께 고생하고 고통받은 인물들 이야기요. 한동네에 사는 할머니, 성주에서 시위하는 할머니, 그리고 노숙자, 알코올중독자 같은 다양한 인물을 관찰하고 묘사합니다. 민중시의 전형적인 인물 묘사가 이 시인에게서 상당히 극복되었고 새로운 면모로 창조되었어요. 뚜렷한 의식에서 좋은 문장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황정아 평론가께서 어두운 시편들이 좋았다고 했듯이, 자기의식을 무방비로 두고 나아간 시들이 더 좋은 문장들을 불러오는 것 같아요. 이건 소에 대한 이야기지만, “시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살아 있으면 된다 어쨌든/도축되기 전까지만 살아 있으면 된다”(「어쨌든 살아 있으면 된다」)에서 보이듯 삶이 죽음보다 못하다는 독한 아이러니나, “온통 나뿐인 세계로 도망친다 그제서야/나는 그 모든 사람이 되어 나온다”(「다른 사람」)같이 삶의 원초적 지점을 압축해놓은 듯한 문장들이 심금에 깊이 얹힙니다.
황정아 휘트먼의 대표작으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가 있는데 거기서도 ‘나’는 사실 모든 사람이지요. “나는 그 모든 사람이 되어 나온다”라는 건 휘트먼적인 선언인 것 같지만, 직관적인 동일시나 팽창의 움직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철저히 ‘나’가 되어본 다음의 일이라는 차이가 있네요.
이영광 인간적 연민에 근거한 평등의식이어서 더 뚜렷한 느낌을 주는 듯해요. 이 시집에 보이는 화자의 특징 중 하나는 사제나 샤먼을 닮아 있다는 점입니다. 제목도 ‘해자네 점집’이고요. 원래 무당이 자기 고통을 치료하고 남의 고통을 돌보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면서 신과 인간을 매개하거나 신을 대리하기도 하고요. 그런 사제 같은 풍모는 전작들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이번 시집에서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심청이 세 송이」 「어매」 「칼 든 남자 바늘 든 여자」 등에 타인의 고통을 대리하고 대속하는 목소리가 들어 있어서 가락이 내용을 압도합니다. 그리고 표현 면에서는 방언의 사용이 눈에 띄죠. 대단한 입심인데, 이런 게 결국 현장성을 더 강화해요. 이런 입말에 충실한 발화가 민중예술의 전통에 닿는 것이겠지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방언이 다 등장해서 방언의 향연장 같은 느낌을 줍니다.
남상욱 타인의 고통을 대리표상하는 화자는 무엇보다도 일단 그것을 듣는 청자랄까, 최초의 독자이기도 하잖아요. 타인의 내밀한 고통은 어지간한 신뢰관계가 쌓이지 않고서는 접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설사 털어놓으려 하더라도 들어줄 여력이 없어 애써 외면하는 경우도 적지 않죠. 이영광 시인께서 말씀하셨듯이 무당이나 사제 같은 풍모가 강해졌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들어주고 공감할 수 있는 작가의 품이 더욱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죠.
황정아 「형제여」 같은 시는 어떻게 보셨을까요. “고구마처럼 부둥켜안고 서로의 품 파고들던 구들장 식어가던 새벽이 있었다. 형제여, 이 얼마나 가난하고 갸륵하고 가슴 저미어오는 말인가”라는 구절이 들어가니까, 팔레스타인의 시장과 난민촌을 이야기하는 첫 두 연의 거리감이 확 좁혀지면서 인류애가 아니라 ‘형제’애라는 실감이 확 다가왔어요. 「밤의 명령」도 죽음에 대한 증언이라는 무거운 주제인데, 이 엄중한 명령을 명령으로서 발화할 수 있는 시인의 힘이 느껴졌어요. “소름 돋을 줄 아는 맨살의 정직함으로 말하라”라는 대목이야말로 여기 실린 시들에 대한 묘사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럼에도 아쉬운 게 있다면, 여성의 삶을 다룬 시편들에서 드러나는 일말의 상투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여자들이 ‘점집’에서 털어놓는 이야기의 다른 버전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점집에서 남김없이 풀어놓는 것 같은 이야기도 사실 엄밀히 주어진 형식이라는 게 있고 그 형식이 내용을 한정하죠. 그 한 많은 사연이 그녀들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해도 또 삶의 전부는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사연을 듣고 전하는 입장에서는 ‘너의 인생과 너의 고민을 다 알고 있다’는 태도가 생길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의미로 오히려 좀더 ‘타자화’됐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때로 대상이 쉽게 요약되는 느낌이 들어서요.
이영광 화자의 위치가 대상보다 높게 설정돼 있다는 건데, 원래 사제가 높은 사람이니까요.(웃음)
남상욱 “시 같은 거짓말과 허구가 필요했다/사람들은 그것을 상상력이라고 불렀다”(「늙은 꼬마」)라는 구절을 보면, ‘타자성의 없음’이 어쩌면 세상을 이해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느껴졌습니다. 보통 소설을 두고 ‘잘 짜인 허구’라고 이야기하는데, 시에서 “허구가 필요했다”라고 말한다는 게 색다르게 다가왔어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노동이나 가난이 쉽게 상상조차 안 되잖아요. 그런 것들까지 시가 허구를 격려하는 방식으로 전달해요. 「염무웅 선생의 눈물」이 다루는 동백림사건은 우리가 익히 아는 일인데 그 슬픔을 처리하는 방식이 남달라요. “사람 죽여놓고 이제 와서 무죄라니, 돈 몇 푼 얻었지만 내 인생은 어딨냐고, 우리 아버지 인생은 어떡하냐고, 서럽게 서럽게 울더라는데, 그 말 전하시면서 염무웅 선생이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그 점잖으신 양반이 진짜 막 우시더라니까”라고 나오는데, 이런 게 관성을 깨려는 시도처럼 보였어요. 점잖은 염무웅 선생이 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같은 일로 한번 슬퍼했고 분노했던 독자가 새로운 방식으로 슬픔을 환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영광 『해자네 점집』은 한국시의 전통에서도 의미있는 자리를 차지할 만한 시집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작품들의 언어가 범상치 않은 몸부림의 흔적을 담고 있어요. 체험을 시의 진실로 변모시키는 감각과 사유가 개성적이에요. 더 가라앉고 벼려진 시들에 깊은 호감을 느낍니다. 물론 조금 급하게 발표된 시도 보이지만요. 분명한 메시지를 염두에 두다보니 쉰 목소리가 된 경우랄까요. 계몽의 도식성은 클리셰를 낳습니다. 그럼에도 계몽을 자기 언어로 변형해내는 과정은 새로운 리얼리즘을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겠지요.
정한아 『울프 노트』(문학과지성사)
남상욱 『어른스런 입맞춤』(문학동네 2011) 이후에 나온 정한아의 두번째 시집입니다. 우선 ‘시인의 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내 동생을 괴롭히는 자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라는 말은 일면 유머러스하면서도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 이들”을 생각하면 섬뜩했어요. 그래서 이 시집의 수신자가 누군가를 괴롭혀본 적 있는 가해자들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이건 혹시 내 이야긴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인지 시의 해설(조재룡)에서 이 시인을 ‘항상 고민하는 이성의 힘’으로 무장한 “‘지식인’ 시인”으로 평가하는 데에는 조금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표면적인 정치적·윤리적인 태도를 반성케 하는 동력은 회의하는 이성보다는 이를 수상쩍어하는 감각 아닐까 싶거든요. “물어뜯고 싶은 것들이 세상에 이토록 가득한데” “거리를 활보”하는 “기특”한(「고양이의 교양」) 사람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다고 봤어요.
황정아 랑시에르(J. Rancière)가 정치란 불화에 관한 것이라 했는데, 이 시집에서는 불화를 향한 의지, 급진성을 향한 욕망이 느껴져요. 불화에 대해 쓴 시가 아니라, 불화하고 싶은 의지를 담은 시라고 할까요. 제목인 ‘울프 노트’(wolf note)는 중의적이겠지요. 시에선 울프라는 인물이 남긴 노트를 뜻하지만, 첼로나 바이올린 연주에서 불규칙한 진동 때문에 늑대 울음처럼 정해진 음을 빗나간 소리가 나는 경우를 울프 노트라고 하죠. 의중을 벗어난 배음으로 시집을 채우려는 시인의 의지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사납고 전투적이면서도 종종 그 급진성 이면의 피로나 반성의 흔적이 보이기도 하고요. 「봄, 태업」이나 「성聖 토요일 밤의 세마포」 같은 시가 대표적이죠. “과녁 없이 조준점만 난무하는 곳”(「무연고無緣故」)이라고 개탄하지만 시인 자신도 조준점을 분명히 가지려는 태도가 보여요. ‘론 울프’는 대개 테러리스트를 지칭하는데, 그같은 자세라고나 할까요.
이영광 불화에 대한 의지라면, 아마 해설에서 언급한 ‘부정성의 태도’와도 연결되겠죠. ‘영구 부정’이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굉장히 진지하고 날카로우면서 또 유쾌한 시집이라고 생각했어요. 문학적인가 하면 정치적이고, 철학적인가 하면 종교적입니다. 사유의 밀도와 상상력의 활달함이 돋보이고, 에너지도 많아요. 생각을 열심히 하고 쓴 문장이 있는가 하면, 의식을 꿈꾸는 듯한 상태에 둔 채 쓴 문장도 있는 것 같아요. 사유에 충실한 문장과 직관에 충실한 문장이 적절히 잘 구사돼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모호하고 독해가 힘든 곳들이 그저 ‘막히는 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한 비약의 지점이 되기도 해요. 앞서 이야기한 김해자 시인과 여러면에서 견줘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해자가 현장체험을 짊어지고 시를 쓴다면, 정한아는 지식인의 처지에서 자기 정치의식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 저는 ‘울프’와 ‘크루소 씨’가 동일인물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아까 ‘배음’이라고 하셨는데, ‘울프 씨’의 톤은 하나의 음으로 듣기에는 힘들잖아요. 어떤 때는 환자 같기도 하고(「크루소 씨의 가정생활」), 「만화방창萬化方暢」이나 「나는 왜 당신을 선택했는가」 「편도선염을 앓는 벙어리 신神의 산책로」에서는 신 같기도 하죠. 물론 이 신들도 병들어 있거나 죽거나 해서 자기 역할을 못하지만요.
남상욱 테러리스트, 혹은 제2의 예수 같은 느낌이 있죠. 김해자 시인이라면 그런 인물을 복원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할 텐데, 『울프 노트』는 그런 존재를 추문으로 만들어요. 울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는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지고, 그를 처리하는 친구들과 의사, 그리고 “정한아 기자”(「(단독) ‘울프 노트’의 잃어버린 페이지」 「(단독) 아마도, 울프 씨?」)에 의해서 작성된 기사와 밑에 달린 댓글이 그 자리를 대신하죠. 울프와 관련된 주된 관심사는, 온전한 복원과 애도가 아니라, 그러한 존재를 우리는 지금 어떻게 ‘처리’ 혹은 ‘신비화’하고 있는가를 전경화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저는 ‘울프’와 ‘크루소’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크루소’는 ‘울프’처럼 대상화되거나 ‘처리’되고 있지 않으니까요. 이와 관련해 저는 이 시집의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냄새에 특히 관심이 갔어요. 뒤표지에도 “유대인들의 죄책감 때문에 예수는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같다”고 나오잖아요. 이 시인이 종교적인 부분을 소환해 죄의식을 건드리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불화에 대한 욕망, 불편함에 대한 욕구가 누군가에게 줄지도 모르는 상처를 의식할 때 생겨나는 죄책감일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황정아 저는 종교성도 종교 그 자체라기보다는 정치성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들어와 있다고 생각했어요. 종교라는 게 절반만 믿어도 되는 게 아니라 어떤 투신과 전념을 요구하잖아요. 이런 면을 ‘급진성에 대한 의지’라고 생각했는데, 그처럼 화두를 붙잡고 가는 방식이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하는 것 같아요. 문학의 정치를 지적인 과제로 삼아 의식적으로 벼려내고 추구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시인 자신도 “용의선상에서 제외하지 않으려”는(「성聖 토요일 밤의 세마포」) 날카로운 자의식으로 자주 표현되는 것 같아요.
남상욱 자기에게 향하는 자의식을 저는 「미모사와 창백한 죄인」에서 찾았어요. “미모사/순식간에 나는 난폭한 사람이 되어/사랑해서 미안한 폭력배가 되어/젠장, 알았다고, 너 혼자 푸르르라고/공주병 걸린 년, 누가 죽이기라도 한다니?”같이 쉬운 입말로 쓰인 시인데, 미모사라는 화분을 다시 상종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연약한 주제에 까다로운 년/나는 나를 만나지 말기를/부디 네가 나를 마주치지 말기를”이라면서 자기가 한 말을 돌려받아요. 데이트폭력을 발생시킬지도 모를 첨예하고 예민한 언어가 어쩌면 자기 안에 시한폭탄처럼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황정아 저에게는 「겨울 달」 같은 시가 전체적인 인상을 좌우했어요. 겨울 달에 새겨진 검은 얼룩에서 “로르샤흐 테스트”를 연상하고 “너는 얼룩진 얼굴을 두 손에 담을까/해석할 수 없는 밤이 새어 나올까”라고 했는데 시 자체도 인상적이거니와 세계의 얼룩에서 불길함을 읽고 어떤 해석할 수 없는 밤을 풀어놓고자 하는 이 시집의 수행성을 환기하는 듯했습니다.
이영광 이야기에 대한 욕구가 느껴지는데, 그래서겠지만 어떤 시들은 알레고리로 읽히기도 합니다. 일종의 연작 같은 방식으로 쓴 다음 의도적으로 시집 속에 배치한 것 같아요. 울프 씨를 등장시키는 방식은 꼴라주인데 기법의 선택에 공을 들였어요. 알레고리 속에서도 시편을 빛나게 하는 건 역설과 아이러니예요. 말이 안 되는 문장 속에 말이 더 되게 하려는 시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돌림노래」는 의미심장하죠. “비유 속으로 풍자 속으로 환상 속으로/이제 더는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라고 정신적 지향의 세 꼭짓점을 이야기해요. 시집 후반부는 김수영의 태도와 발성법이 느껴졌고, 수사나 어조에서는 황지우의 영향이 느껴졌습니다. 센 시인들과 오래 싸우면 뭐가 남아도 남습니다.
남상욱 패러독스와 아이러니와 유머가 나오는데 섬뜩했어요. 예컨대 “만두 가게 청년들”에 의해 동네의 “웃지 않는 여자 거지”가 한국을 대표하는 미녀 “김태희”로 호명되고 그녀의 동선으로 한국의 뒷골목이 전경화되는 「샬롬2」가 그런데,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김태희의 동선에 의해 한국사회의 폭력성이 세련된 형태로 미러링되는 느낌에, 그저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지요. 「PMS」도 인상적이었는데, “성상은 여러 형상을 하고 있지만 결국 자기 얼굴과 흡사하다/자기 도덕을 자기에게 증명하려고 끊임없이 혼자 자책하는 사람/—사과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만 죽어버려라(울프 씨, 당신 말이야, 하긴, 당신은 실종됐지)” 같은 부분이 특히 그랬어요. 우리 사회의 도덕성 부재와 이에 따른 도덕성에 대한 강박이 우리의 윤리를 더욱 이상하게 만들고, 그 일그러진 윤리에 구속되는 악순환적인 현실세계를 그린 것 같아요.
이영광 분열적인 화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방법적인 선택일 텐데, 이런 상태에서 나온 문장들이 매력적이에요. 가령 “구멍 난 양말을 그 구멍으로 뒤집는 것”(「무연고無緣故」)이라든가 “오래전에 병리가 윤리를 대체한 것을, 당신은 정말 몰랐습니까?”(「만화방창萬化方暢」) 같은 문장들이요. 병리와 윤리를 구분하지 않고 병리적 상태의 위험을 자기 개방의 방식으로 실험해요. 윤리의 자리에 진리를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태도로 문장을 밀고 나가는 것 같습니다.
황정아 병리적인 것이 방법적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시인의 노고와 분투가 명징하게 느껴져요. 긴장을 끌고 가면서 어느 한편 허투루 쓰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에도 병리적인 것이 진짜 정치적인 것에는 못 미친다는 느낌이에요. 메타적인 방식으로 추구되는 정치라고 할까요, 그건 결국 정치를 윤리로 대체할 공산이 크다고 봅니다.
남상욱 정치적으로 좀더 밀고 나갔더라면 어땠을까요? 장전까지는 했는데, 왜 발사하지 않지? 하는 느낌이에요. 발사하지 않고, 윤리적인 태도로 자리를 옮기는 거죠.
이영광 내파의 방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병리적인 것은 근원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고, 발사 직전의 장전에도 긴장과 전율이 인다고 생각해요. 과녁은 없는데 조준점만 난무하는 모순적 사태 속에서 성실히 앓고 있는 시인의 태도를 높이 사고 싶습니다.
황정아 네, 그런 방식이 갖는 특별한 예리함은 느껴집니다. 이번호 문학초점은 여기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 여러 작품의 다채로운 성취를 음미하는 즐거운 시간이었고, 두분의 논평에서 제가 놓친 것들을 많이 배웠습니다.
남상욱 좋은 작품들을 함께 읽으면서, 동시대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어지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영광 내가 더위에 지쳐 쉴 때도 누군가는 이렇게 공들여 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글쓰기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두 노작들이어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읽기에 수월치는 않았습니다만.(웃음) (2018. 8. 2.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