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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민정 朴玟貞
1985년 서울 출생.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아내들의 학교』, 장편소설 『미스 플라이트』 등이 있음. dentata05@hanmail.net
나의 사촌 리사
지난겨울, 나는 리사를 만나러 토오꾜오에 갔다. 리사는 나까메구로에 있는 브런치 까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녀가 혼자 사는 2LDK에서 나는 일주일간 머물렀다. 한칸은 다다미, 한칸은 입식 침실로 되어 있는 집에서 나는 오랜만에 휴가를 즐기는 기분이었다. 리사가 홀로 일구어놓은 공간은 쾌적했다. 리사가 출근하고 나면 나는 청소기로 다다미바닥을 열심히 밀었고 빨래건조대에 가득 걸려 있는 손수건을 다리고 개켰다. 집안일을 도와준다는 핑계로 리사의 집 곳곳을 훑어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리사의 화장대와 책상을 구경할 때면 아직도 어린 시절 리사가 내게 주던 선물꾸러미를 볼 때처럼 황홀했다. 몇권 되지 않았지만 작은 문고판 책들, 정갈한 세로쓰기로 제목이 적힌 책등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일본산 세제의 향기를 나는 좋아했다. 섬유유연제를 잔뜩 풀어 빨래를 하고 상큼한 비누거품을 충분히 내어 설거지를 한 후 리사가 일하는 까페로 가곤 했다.
리사는 내게 여러가지 음식을 서빙해주었다. 팬케이크, 오믈렛, 함박스테이크, 샐러드. 나는 냅킨과 접시의 무늬를 꼼꼼하게 관찰하며 음식을 천천히 먹었다. 창밖에 보이는 교각의 철근과 나뭇가지들이 앙상했다. 봄이면 벚꽃이 활짝 피는 동네라고 했다. 리사의 한국말은 갈수록 서툴러졌다. 리사는 ‘만발한다’거나 ‘만개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리사는 쉬지 않고 까페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서빙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 리사를 관찰했다. 리사에 대해 쓰려고 마음먹고 토오꾜오까지 갔는데, 정작 리사를 만나자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한 이틀간 나는 한줄도 쓰지 못하고 까페에 앉아만 있었다. 리사는 첫날 재킷을 걸치며 내게 다가와 물었다. 오늘은 일 좀 했어? 다음 날 리사는 다시 똑같은 질문을 했다. 리사가 재촉하는 것 같은 상황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리사는 한줄도 쓰지 못했다고 말하는 내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떡하냐, 일본까지 왔는데.
리사는 내가 쓰려는 글이 어떤 건지 몰랐다. 그런 리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글은 한줄도 못 썼지만, 스케치 노트에 연필로 리사의 모습을 그리기는 했다. 얼굴에 기미가 끼고 머리카락도 많이 빠진 서른여섯의 리사. 내가 그려내는 리사의 모습은 한결같이 무기력하고, 실패한 사람 같아 보였다. 대학교 2학년 때 제출한 소설에 리사를 본뜬 ‘유미’를 등장시킨 적이 있었다. 리사의 삶을 조금 베껴 넣은 첫번째 캐릭터였다. 그때 창작 세미나 교수는 “이건 우울한 개인의 일상일 뿐이야”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것이었다.
리사는 자기 이야기가 쓸 만한 거냐고 묻곤 했다. 그외에 다른 것들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이십대 초반에 그녀가 고모와 함께 잠깐 한국에 들렀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인터뷰를 시도했다. 나는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언니, 이해해줄 거지? 거듭 말하는 내게 리사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지연이 쓰려고 하는 게 뭔데 그래? 나야 고맙지.
반면 리사의 어머니인 고모는 내가 소설가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부터 성마른 반응을 보였다. 그때 한국에 다니러 온 고모는 내 손을 붙들고 말했다. 우리 이야기는 쓰지 마라. 그녀가 말하는 ‘우리’는 자신과 리사였다. 결코 하나로 퉁칠 수 없는 삶이지만, 결국에는 서로 연관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 나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쓰려던 것인지도 몰랐다. 내겐 고모가 모르는 리사의 비밀이 있다, 오직 그 사실만을 굳게 믿으면서.
그러나 오랜 숙제였던 리사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비로소 토오꾜오에 있는 그녀의 맨션까지 찾아가고 나서야, 나는 더없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1991년의 리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리사는 나보다 한해 먼저 태어났지만 만 나이로 나와 동갑이었다. 우린 일곱살이었다.
—서울 사람들 왜 이렇게 못생겼어? 토할 것 같아.
지금의 리사는 그때만큼 생기 넘치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리사를 실패자로 보고 있었다. 내 머릿속의 리사는 어린 시절부터 이십대까지의 리사, 고정된 하나의 이미지였다. 리사가 ‘메가미(メガミ)’를 탈퇴한 후에도 가끔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나는 애써 모른 척했던 것이다. 리사는 오직 메가미의 리드보컬이자 센터로서 팬들이 호명하는 불굴의 ‘여신’님이었다. 이십대 중반쯤엔 아끼하바라의 전자상가 축제에서 관객 다섯명을 앞에 두고 “오따꾸들이여, 부활해!”를 외치던 리사가 있지만 나는 그것을 유튜브로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하고는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리사의 이야기에 맞지 않는 이미지였으므로. 내게 리사는 이십대 초반에 화끈하게 실패해서 거품처럼 날아가버린 ‘왕년의 아이돌’일 뿐이었다.
나까메구로에서 리사를 만났을 때, 나는 리사가 생각보다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에 당황했다. 리사는 고모와 떨어져 자기만의 살림을 알차게 일구고 있었고, 비록 아르바이트생 신분이었으나 주 5일을 까페에서 열심히 일했다. 나는 리사가 아직도 고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채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하루하루를 허비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했는지도 몰랐다. 더욱 심하게는 자신의 공연 포스터가 잔뜩 나붙은 방구석에서 히끼꼬모리로 지내는 모습을.
‘메가미’ 이후에, 리사 모녀가 한번씩 한국에 들를 때 나는 리사를 건성으로 대했다. 그녀들이 할아버지를 뵈러 친정인 우리 집에 온다고 할 때마다 자리를 비우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리사와 깊게 이야기를 나눈 적은 별로 없었다. 내심 다 망한 처지에 뭐하러 한국에 들어오나,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쯤 내 머릿속에 박제된 리사의 이미지는 더이상 예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한물간 아이돌이었다. 내게는 고모가 선물한 메가미의 음반 네장이 있었지만 제대로 들어본 적 없었다. 서랍 한구석에 리사가 한국에 올 때마다 주었던 굿즈, 세일러복을 입은 리사의 얼굴이 담긴 스티커나 엽서 따위가 뒹굴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언젠가 꼭 리사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지연은 왜 내 이야기를 쓰려는 거야?
내가 토오꾜오에 머무른 지 삼일째 되던 밤이었다. 리사는 헤어터번을 두르고 기초화장품을 얼굴에 꼼꼼하게 펴 바르며 무심한 듯 물었다. 나는 낮에 리사가 서빙해준 점심을 먹고 다이깐야마의 백화점에 다녀왔다. 글이 안 써진다는 핑계로 쇼핑을 잔뜩 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텀블러니 찻잔이니 하는 것들을 펼쳐놓고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언젠가 리사가 질문한다면 이렇게 대답해야지, 준비한 말들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막상 질문을 받자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언니는 특별하니까. 이런 사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몇이나 있을까.
내뱉자마자 아차, 싶었다. 리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하긴 그렇지. 자기가 아이도루였다고 착각하는 애들 몇만명을 다 더한대도 그게 얼마나 되겠어.
리사의 말을 듣자 옛날 생각이 났다. 1991년, 리사가 토오꾜오 미키마우스 클럽에 막 입단한 직후였다. 토오꾜오 미키마우스 클럽은 일본 최대의 아역배우 기획사였다. 리사 고모의 사업은 딱 그때까지 번창했다. 친척들 모두 입을 모아 리사네가 가장 잘되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가끔씩 혀를 쯧쯧 차며 욕하기는 했지만. 고모는 한국에 올 때마다 용돈을 넉넉히 줬다. 나는 일년에 두번씩 한국에 오는 리사 언니를 마냥 기다렸고, 그녀는 내게 줄 선물을 한아름 들고 찾아왔다. 리사는 한국말을 잘했기에 나는 당연히 그녀가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고모 차에 실려 종로3가를 지날 때, ‘빠이롯드만년필’ 간판이 보이던 길에서, 그녀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
—외국 애들이 너무 많아. 우리도 힘들어 죽겠는데.
미키마우스 클럽에는 서양 아이들도 많고 오끼나와 아이들도 많다고 했다. 그 애들을 통틀어 리사는 ‘다른 데서 온 애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말하는 리사가 조금 무서워서 나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었다. 리사가 일본 사람이라는 걸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고등학생쯤 되어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의 사촌 리사는 어머니는 한국인이지만 아버지는 일본인이고,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랐기에 일본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이미 ‘고모부’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고 했다. 리사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얼마 없으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지연, 사실 나보다는 내 친구였던 하루미상을 쓰는 게 훨씬 좋을 거야. 걔는 AV였거든.
나는 리사의 말에 적잖이 놀랐다. 리사의 말이 놀라웠던 건, 내게는 AV가 특정 영상물을 뜻할 뿐 아니라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는 일본식 어법이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리사에 대해 생각할 때, 언제나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JR東労組…… 언젠가 리사의 책장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던 편지봉투에 인장처럼 새겨진 글자였다. 리사에 관해 쓰려고 생각할 때마다, 도대체 내가 리사 인생의 어떤 부분을 서사화하고 싶은 것인지 의문이 들 때마다 번번이 떠올린 글자이기도 했다. 그게 마치 열쇠라도 되어주는 것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요꼬하마에 있는 고모 댁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나는 그 편지를 발견했다. 리사는 그때도 아끼하바라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외면하려 했지만. 나는 핸드폰 메모장에 글자를 메모했다. 검색창에 넣어보니 ‘동노조’, 동일본노조라는 설명이 떴다. 처음 검색했던 당시에는 동노조와 리사의 관계를 조금도 짐작하지 못해서 금세 검색창을 닫고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다 핸드폰을 바꿀 무렵에 그 메모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고, 메모는 클라우드로 저장되어 내가 핸드폰을 바꿀 때마다 따라왔으며 나는 일년에 한번씩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 자리를 잡고 앉아 그것에 대해 검색했고, 나는 불현듯 메가미가 오래전 일본 최대의 노조인 JR철도노조의 집회에 따라다니며 공연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메가미의 브로마이드에 적혀 있었던 문구를 기억해낸 것이다. ‘메가미, JR동노조와 함께!’ 영어로 적혀 있지 않았다면 기억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동노조는 끈질기게 내게 리사의 이야기를 쓰도록 종용하기도 한 단어였지만, 이야기가 풀리지 않는 까닭이기도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트레이닝을 받은 아이돌인 메가미가, 전성기에는 토오꾜오돔에서 합동공연을 할 만큼 인기를 끌었던 메가미가 왜 노조의 집회에 동반했는지 궁금했다. 정작 고교생이었던 당시 나는 그 시절 리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고, 뒤늦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넷째 날, 리사는 출근을 했고 나는 용기 내 리사의 책장을 조금 뒤져보았다. 동노조에 관련한 무엇이 더 있는지 막연하게 알고 싶었다. 그러나 몇권의 문고판 도서와 스케줄러 외에 별다른 것이 나오지 않았다. 죄책감을 무릅쓰고 그녀의 서랍 깊숙한 곳까지 손을 넣어보아도 동노조에서 온 편지는 더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동노조와 리사의 관계를 생각하다보면, 실제로는 한번도 목격하지 않은 장면이 추억처럼 떠오르곤 했다. 오래전 JR철도노조 전국투쟁을 스케치한 뉴스에서 본 철도노동자들의 현장. 그들과 함께한다고 수없이 외치며 무대를 누비는 세일러복의 리사. 자신들의 히트곡을 열창하며 무대 밑으로 내려가 노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리드보컬 리사. 아직도 인터넷에는 메가미에 관한 한글 정보가 두세 페이지쯤 남아 있었는데, ‘일본 최초의 개념 아이돌’이라는 한국어 사용자의 평가가 달려 있었다. 그런 코멘트를 보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전성기의 리사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내게도 대학 시절, 전국의 투쟁 현장을 누비던 친구들이 있었다. 춤과 노래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던 문선대 친구들은 그 특유의 재능으로 현장에 활기를 더하곤 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멀리 있는 사촌 리사를 떠올리며, 내게도 그런 재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던 순간이 제법 있었다. 리사가 문선대 친구들이 가졌던 진지함을 가지고 철도노동자들의 현장에 함께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이 내게는 있었다. 그럴 때도 문득 1991년의 리사가 떠오르긴 했지만.
1991년의 리사는 밝고 명랑했고 예뻤다. 그때 나는 부채춤도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는 유치원생이었지만 리사는 이미 일본의 어린이방송에 종종 출연해 뛰어난 율동 솜씨를 보여주던 소녀 탤런트였다. 고모는 한국에 올 때마다 일본 방송의 녹화 테이프를 보여줬는데, 모여 앉은 친척들의 환호와 칭찬은 또래인 나를 기죽게도 만들었지만 그런 사촌을 가졌다는 자부심 역시 못지않게 안겨주었다. 리사는 가끔 할아버지 앞에서도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리사에게 외할아버지인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리사는 그저 행방을 모르는 일본놈의 자식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아동학대에 가까운 잔인한 장면이었다. 리사가 일본어로 노래를 부르며 정수리와 엉덩이에 손날을 세워 버섯 모양을 만들어 보일 때, 할아버지가 얼굴을 돌리던 모습을 기억한다. 할아버지 눈에는 리사가 영원히 애물단지일 뿐이라고 어른들은 내가 듣는 데서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리사가 불쌍해 보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리사는 그 무렵의 내가 보기에 언제나 ‘꿈을 이룬 아이’였으니까.
그런 리사가 내게 비밀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땐 고모의 사업이 잘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에 들어오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디즈니스토어와 산리오에서 사다주던 화려한 팬시상품 보따리는 더이상 없었다. 리사는 내게 말했다.
—선물 사다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런데……
마치 비밀을 털어놓는 까닭이, 선물을 사다주지 못한 데 대한 나름의 보상이라는 듯 리사는 속삭였다. 나 사랑 고백을 받았어. 나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미키마우스 친구에게서? 리사는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카메라상에게서……
나는 ‘카메라상’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것이 카메라를 들고 찍던 청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지금이나 그때나 불편한 건 매한가지였다.
내가 리사에 대해 쓰기를 망설이는 까닭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던 다섯째 날 저녁, 리사는 시부야에 놀러 가자고 했다. 리사가 일하는 나까메구로의 까페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그 유명한 시부야 거리에 도착한다고 했다. 나는 리사의 까페에서 그녀가 일과를 끝내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버스를 타고 시부야에 갔다. 리사는 모처럼 놀러 왔는데 일만 하느라 토오꾜오를 제대로 관광시켜주지 못했다며 미안해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환한 낮에 놀러 가서 두루 둘러보자며 다짐하기도 했다.
도착했을 땐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명동이나 홍대 앞 골목들처럼 늦은 밤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리사는 내게 어디를 가보고 싶었느냐고 물었다. 그때 어릴 적에나 맛보았던 ‘웬디스 버거’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곳을 가리켰다. 리사와 나는 베이컨 버거를 반으로 쪼개 나누어 먹었다. 오래전 어른들을 따라 반포 뉴코아백화점과 웬디스에 놀러 갔던 기억이 났다. 리사와 나는 풍선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리사가 들고 있던 핑크색 풍선이 탐났던 일도 기억났다. 그때를 생각하니 조금 쓸쓸해졌다. 그때의 리사는 이젠 없었다.
웬디스를 나와 리사는 “신기한 걸 보여줄게”라고 말하며 나를 골목으로 끌고 갔다. 거기에 간판도 없는 점포가 있었다. 리사는 앨리스의 토끼 굴에 데려가듯 내 손을 붙들고 계단을 한참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사방에 홍등이 켜져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지하 4층에 이르러서야 점포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여태껏 그랬듯 홍등이 입구를 쨍하게 밝히고 있었다. 리사는 “여긴 오따꾸들의 천국이야”라고 말하며 앞장섰는데, 그때 나는 아끼하바라에서 노래하던 리사가 떠올라 흠칫했다. 리사를 따라 점포 안으로 들어가니 맞아주는 직원도 없었고, 조도가 낮은 가게 내부에는 좌판처럼 물건들이 질서 없이 쌓여 있었다.
물건은 다종다양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인형과 소품 따위가 사오백만원을 호가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내게 리사는 “이거 전부 중고야”라고 말했다. 오래전 한국에 다니러 가던 고모가 거실에 한바탕 부려놓곤 하던 기념품들이 떠올랐다. 작은 불상들과 풍경, ‘에로 그로 넌센스’ 시절의 포스터와 엽서까지. 기모노를 입고 웃고 있는 부인의 초상이 한국 돈 삼백만원을 호가하는 걸 나는 어안이 벙벙해 구경했다. 리사는 나를 떼어놓고 어디론가 가더니 씨디 한장을 들고 왔다. 메가미의 1집 앨범이었다.
—알아? 이건…… 우리 음반이야.
그 앨범은 나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빨간 바탕에 번개가 그려진 배경에, 멤버 세명이 세일러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그룹 이름은 ‘여신’이었으나 조금도 멋 부리지 않은 고교생 세명이 자연스러운 차림으로 무대에 서곤 했다. 물론 리사가 짧은 치마에 반스타킹을 신고 하루 종일 무대에 서느라 탈진 직전에까지 이르곤 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입던 세일러복이 아저씨들에게 높은 가격으로 팔렸다고 했다. 가게에 있는 꼬질꼬질한 인형들이 사오백만원을 호가하듯. 리사는 자신의 왼쪽에 서 있는 양갈래 머리의 멤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하루미상. 얼마 전에 말했던……
나는 리사의 입을 막았다.
—알아, 언니. 기억하고 있어.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돼.
리사는 앨범을 다시 가져다두겠다며 돌아섰다. 리사는 동료였던 하루미가 AV 일을 한다는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은가, 의문이 들었다.
‘나는 AV만 보잖아, 당당하게……’ 리사가 앨범을 가져다놓으러 간 사이 문득 한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동시에 자꾸 하루미의 이야기를 꺼내는 리사가 불편해졌다. 한국에서는 ‘국산몰카’ 따위의 영상을 소비하는 사람들 때문에 연일 말썽이었다. ‘국산몰카’란 이른바 ‘비동의 유포 성적 촬영물’, 범죄 증거물이었다. 그런 것을 업로드하고 매개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애인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자기도 모르는 새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토오꾜오 여행 얼마 전 만난 선배는 자신은 국산몰카 따위는 결코 손대본 적 없으며, 당당하게 일본산 AV만 본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날 밤, 다다미방에 누워 나는 리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방 곳곳을 더듬었다. 리사의 방에는 리사의 옛 시절을 알려주는 포스터나 엽서 따위 한장도 붙어 있지 않았다. 아이돌을 그만두고 삼십대 중반의 프리터로 살아가는 리사, 토오꾜오에서 소득의 반 이상을 월세로 내고 살아가는 리사. 그런 리사를 그리고 싶은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를 막아섰다. 결국 소녀들의 워너비였으나 짜릿한 실패를 맛보고 소시민으로 겨우 살아가는 리사를 내 소설의 강렬한 인물로 등장시키고 싶을 뿐이었나. 내 스케치 속에 등장하는 리사, 앞치마를 입고 기운 빠진 얼굴로 서빙하는 리사가 생각났다. 나는 토오꾜오에 올 때부터 그런 리사만을 상상하고 왔다. 그렇다면 리사를 만나 굳이 그녀의 일상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지 않았나 싶었다.
리사에 대해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가 만드는 인물들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날 밤 하염없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나는 그것을 인정했다. 내가 만든 인물들은 언제나 ‘작가의 목소리’를 담지하고 있어 작위적이라는 평을 받곤 했다. 작가의 피씨한 주제의식에 맞게 움직이는 마리오네뜨, 괴뢰인형 같다는 평도 받은 적이 있다. 그런 평을 접할 때마다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은 작위적일 수밖에 없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이니까!’라고 웃어넘기곤 했지만, 최근 발표한 작품의 ‘유미’에 대한 평을 두고는 다소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소설을 습작하며 수십명의 유미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전부 리사를 생각하고 만든 인물이었다. 유미는 1991년의 리사의 겉모습을 조금 닮기도 했고, 일본에서 태어난 혼혈 사생아인 리사의 출생을 닮기도 했다. 일본 아이돌이었던 리사는 한국 연예계의 실패한 걸그룹 멤버 유미가 되었고 인디 씬에서 재기를 꿈꾸기도 했다. 처음으로 리사의 출생 비화에서 아이돌 시절의 에피소드까지 그녀를 적극적으로 베낀 최근의 유미로 나는 매서운 악평을 받았다. 내 작품을 꾸준히 따라 읽었다는 한 독자는 “이제 이 작가에게 최종적으로 실망했다, 그녀의 답답한 캐릭터 유미를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일갈했다. 그후로 한동안 나는 유미가 나오지 않는 작품마저도 완성할 수 없었다. 내가 납득할 만한 유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인물도 만들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오꾜오에 와서 리사를 만나면 어느 정도 해갈되리라는 나의 기대가 헛된 것만 같아서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났다. 리사는 다다미방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지연이 자고 있지 않을 것 같았어.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내가 리사에 대해 쓰지 못하는 까닭이, 리사와 충분히 대화하지 못해서인 것은 아니었다. 리사가 미안해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리사가 물어보면 언제든 한줄도 쓰지 못했다고 대답해서인지 리사는 그런 나를 줄곧 걱정한 것 같았다.
—지연, 사실 하루미상에 대해 할 말이 있어.
메가미의 서브보컬 출신으로 지금은 AV 배우를 하고 있다는 하루미였다. 다시금 불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리사는 꼭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다는 기세로 말끝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사실 AV가 아니야. 소송 중이야. 오랫동안. 이건 아마 내 잘못인 것 같아.
나는 흠칫 놀랐고, 리사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04년 소속사와의 계약해지 후 메가미의 세 멤버는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리사는 디자인전문학교에 입학했고, 하루미는 배우가 되겠다며 연예계에 남겠다고 했고, 또다른 멤버인 마나는 결혼을 했다. 이때쯤 고모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던 걸로 기억한다. 메가미의 존속 여부는 멤버와 그 가족들이 결정할 수 없었다. 소학생 시절부터 아이돌 트레이닝을 밟은 이들에게 계약기간 만료는 끝을 의미했다. 메가미의 마지막 음반인 3집 앨범은 히트하지 못했다. 리사와 마나가 연예계를 떠나고자 할 때 하루미는 배우가 되기를 원했고, 리사는 그것을 적극 추천했다고 했다. 리사는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추고 ‘그랬기 때문에’ 하루미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역설했다. 잠시 화제를 돌리는가 싶더니 리사는 분노에 찬 듯 말했다.
—출생률이 제로에 가까워질 거라고 말해, 다들. 다행이지. 아이 낳아봐야 어차피 AV 될 테니까.
리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루미는 예전 같았다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이름 없는 소속사로 적을 옮기고, 그곳에서 영업위탁계약서를 작성했다. 하루미는 그라비아 모델을 겸하는 탤런트로 계약을 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것은 그녀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현장에서의 일체의 성행위를 녹화하는 일, 즉 AV 출연에 관련한 계약이었다. 하루미는 계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소속사에는 미성년자 시절 영업위탁계약서를 강제로 쓰고 들어온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공동으로 소송을 준비했다. 리사 역시 이 사실을 알고 그녀를 돕기 위해 노력했다. 리사는 내게 처음으로, 이십대 중반에 아끼하바라 등지에서 노래를 했던 까닭을 이야기했다. 하루미의 소송에 제출할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나에게는 오따꾸를 미워할 이유가 없어.
나는 리사의 그 말을 기억해두었다가 이야기를 마친 리사가 떠난 후 노트에 옮겨 적었다.
다음 날 나는 출근하려는 리사에게 하루미의 근황을 물었다. 하루미는 십억 가까운 손해배상을 청구받았고, 여전히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저명한 AV 배우가 말기암 선고를 받은 후 자서전을 출간해, 자신 역시 AV 출연을 강요당해서 일을 시작했음을 밝혔고 일본사회가 충격에 휩싸였는데도 법은 ‘당연히’ 그녀의 편이 아니라고 했다. 리사는 구두를 신으며 무심한 듯 말했다.
—하루미가 내게는 중요한 친구야. 메가미가 오오사까 덴덴타운에서 공연할 때, 노래하는 내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쳤던 남자에 맞서 싸워준 친구이기도 해.
나는 그 말을 듣고 내가 리사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리사는 나의 사촌이었고 한국인 어머니를 두었다. 고모가 오래전 영주권을 획득했으며 일본 아버지를 둔 리사 역시 일본 국적을 가졌다는 사실과 별개로. 일본 연예계에 혼혈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도 많다는 사실은 나도 들은 바 있었다. 정작 리사가 한국인 어머니를 두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녀에게 쏟아졌을 일부의 경멸과 비난을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내게 리사는 고모의 자랑스러운 딸, 당대 최고의 아이돌 메가미의 멤버였을 뿐이므로.
나는 그날 소설의 첫 문장을 썼다. ‘나에게는 오따꾸를 미워할 필요가 없다.’ 써놓고도 내용이 와닿지 않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내게는 와닿지 않으나 어쩐지 첫 문장에 위치해야 할 것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서빙하는 리사를 지켜보았다. 리사가 먼저 나서서 내게 하루미의 일을 말해주었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문득 리사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자기 이야기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리사에게 그녀 자신을 캐릭터로 쓰고자 한다고 말했을 뿐, 그녀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다. 사실 말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이야기의 신이며 인물을 만드는 창조주이므로. 나는 리사에게 그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자기 인생을 어떻게 회고하고 있는지, 더불어 오늘은 용기를 내서 JR동노조와 연대하던 시기의 일들에 대해서도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훔쳐보거나 뒤져보지 않고, 당사자에게 정정당당하게 물어보기로.
그날 나는 퇴근하는 리사에게 천천히 걷자고 말했다. 우리는 함께 나까메구로 강변을 걸었다. 봄이면 벚꽃이 만개해 멀리서부터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라던데, 겨울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들뿐이었다. 서로 침묵하며 강변의 반쯤 걸었을 무렵, 리사가 하루미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하루미상이 한국에 놀러 갔을 때, 거리에서 한국 남자가 그녈 알아보고 말을 걸었던 적이 있대. 아는 사이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하더니 대뜸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 촬영을 요구했다는 거야. 정말 마치 아는 사이처럼.
나는 찌푸린 얼굴로 리사를 돌아봤다. 리사는 참담하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계약을 한 사람은 하루미상이 맞지. 자기가 계약서에 서명을 했고. 미성년일 때 계약을 했던 친구들도 성년이 되어서야 계약 내용을 이행했다니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나는 아니, 그들이 틀렸지,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리사는 말마디마다 한숨을 쉬었다.
그날 밤 리사는 마트에 들러 장을 봐다가 요리를 해주었다. 퇴근하는 리사와 함께 외식을 하거나 편의점 음식으로 때우던 여행 일정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리사는 정갈하게 담아둔 밑반찬을 꺼내고, 코따쯔에 앉아 샤부샤부를 요리했다. 거실 조명등에 비친 리사의 얼굴이 어린 시절처럼 예뻤다. 리사는 접시에 고기를 덜어주며 내게 물었다.
—지연은 소설 쓰는 거, 재미있어?
나는 언제나 그렇다고 대답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리사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리사를 만난 그즈음의 소설 쓰기란 결코 재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황망한 심정이 되어 잠자코 있었다.
—지연은 꿈을 이룬 사람이니까.
리사는 다시 말했다. 그 말 한마디에 어린 시절의 풍경이 전부 몰려오는 것 같았다. 1991년의 미키마우스 클럽 단원인 리사, 어른들이 노래를 시키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코이비또요」 한곡 부르겠습니다” 말하던 깜찍한 소녀 리사. 머릿속에 메가미가 가장 높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스쳤다. 단결투쟁의 조끼를 맞춰 입은 노동자들의 머리 위에서.
—언니, 동노조에서 온 편지는 뭐야?
나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된다.
집게를 든 리사의 손이 멈추고, 나베에서 더운 김이 솟아올랐다. 고개를 든 나와 눈이 마주친 리사는 웃었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나는 그 순간 리사가 나의 질문에 자못 놀라기를 기대했는지도 몰랐다. 리사가 아, 그거, 하고 태연하게 대꾸하자 오히려 내 얼굴이 붉어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나. 동노조는 내 소설의 실마리가 되어줄 키워드였다. 나는 막연히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저씨, 야스꼬상.
—야스꼬상?
—동노조 조합원인데, 언제나 많이 외로우셔……
나는 ‘외롭다’라는 말의 여러가지 의미를 떠올려보았다. 리사의 말에는 조금도 비하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지 않았다. 리사는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측은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2004년 상반기에 춘투의 무대에서 노래하는 메가미에게 테러가 있었어. 악질적인 놈이 무대에 뛰어올라와 하루미상의 몸을 더듬은 거야. 우린 그후로 동노조 집회에 나가지 않았어. 물론 그놈 역시 조합원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아저씨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야스꼬상은 그때 우릴 지켜준 분들 중 하나야.
나는 리사에게 물었다.
—메가미는 왜 동노조 집회에서 공연을 했던 거야?
리사는 짧게 대답했다.
—우리는 노조의 아이돌이었으니까. 그분들이 원했으니까.
마지막 날 아침, 놀랍게도 리사에게 더이상 어떤 종류의 사실관계든 캐묻고 싶다는 욕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전날 밤 싸둔 짐을 떠들어보며, 이 여행의 의의를 생각했다. 여행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역시 있었으나, 그런다고 리사에 관해, 실존인물에 관해 좀더 정직하게 서사화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내가 줄곧 원해왔던 것이 주인공을 ‘대상화’하지 않는 정직한 서사였던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우에노역에서 나는 노트북을 꺼내 들고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일본에 가기 전 썼던 초고에는 리사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었다. 인생은 종이비행기. 소원을 싣고 날아가. 바람 속을 힘이 닿는 만큼 그저 날아갈 뿐이야. 그 거리를 경쟁하기보다는 어떻게 어디를 날았는지가 중요해……1 메가미의 1집 수록곡이었다. 나는 다다미방에 정물처럼 앉아 멍한 얼굴로 그 노래를 부르는 리사를 쓴 적이 있다. 기차에서 나는 예전 초고를 불러와 그 장면을 모두 지워버렸다. 나는 동노조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아저씨, 야스꼬상. 나는 아저씨가 리사에게 보낸 편지를 상상했다. 내가 읽을 수 없었던 일본어를 대신해서 서두를 시작했다. 리사에게 그 편지 내용을 들려달라고 할 필요는 없었다.
유미상, 건강하니. 이번 춘투는 대체로 무력감과 패배감이 가득했다. 노조에는 젊은이들이 없다. 원래의 인원도 대개 빠져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오래전 무대에서 노조와 함께하던 메가미의 활기가 그립구나. 너희들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었다. 우리를 응원해주던 건강한 여동생들의 열기,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진짜 연인이 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유미상은 내게 연인이나 마찬가지다……
이 대목을 쓸 때 우에노역 개찰구에서 나를 배웅하던 리사의 모습이 생각났다. 리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실제의 리사를 빼닮은 모습이든 아니든, 나는 리사를 핍진하게 그려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려면 언제나 리사에게 미안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리사에 대해 쓰려고 할 때, 그렇게밖에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몹시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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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KB48의 노래 「365日の紙飛行機(365일의 종이비행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