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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선우 朴善友
1986년 서울 출생. 2018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shuduririrara@gmail.com
휘는 빛
연휴를 맞아 한갓진 대로를 달리는 기분이 좋았어. 셔터를 내린 고즈넉한 상점가를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데, 마치 내가 이 도시의 주인이라도 된 것 같았지. 바람은 서늘하고 볕은 뜨거운 날씨였어. 그렇게 7212번 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아 종로3가 교차로를 지나칠 때였다. 무심코 왼쪽 창밖을 건너다보는데 중앙버스정류장 벤치에 네가 앉아 있었어. 찰나에 불과했지만 네가 확실했다. 챙 달린 검은색 모자를 눌러쓴 채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더라. 버스를 기다리는 중인지 버스에서 내릴 누구를 기다리는 중인지는 알 수 없었어. 순간 너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는 충동이 내 마음의 밑바닥 어딘가에서 분수처럼 터져나왔다. 나는 허둥대며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고 연락처에서 너의 이름을 검색했어. 아마 오초도 걸리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대체 뭐라고 말을 꺼내야 좋을까 싶더라.
거기서 뭐 해. 종로3가에는 왜 있어. 어디를 가려는 거야. 혹시 누구를 기다리고 있어? 설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냐고 장난스레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바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오랜만에 너와 웃는 얼굴로 인사한 뒤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까지 상상했지만 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다. 그대로 세 정거장을 지나쳐 원래 내리려던 경복궁역에 이르러서야 하차벨을 눌렀지. 창가에 부착된 버튼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STOP’이라고 적힌 글자 아래로 연보랏빛 램프에 불이 들어왔어. 그제야 알았다. 이 세상에는 누를 수 있는 버튼들과 그 순서가 정해져 있는데, 멋대로 하나를 건너뛰어버리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 그 버튼을 누를 수 없다는 걸 말이야.
물론 헛소리지.
나는 경복궁역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스타벅스 적선점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내내 너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한 다음 쿨라임피지오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픽업대 근처를 서성이는 동안에도 트위터 타임라인을 새로고침하는 대신 너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어. 음료를 받아 창가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을 꺼내고,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창밖의 플라타너스들이 햇빛을 잔뜩 머금은 채 노랗게 익어가는 풍경을 지켜보는 와중에도 너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고, 이건 못했다기보다 하지 않은 것이지만, 나는 못하는 것처럼 하지 않았고, 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쭉.
왜 이렇게 살까.
종종 그런 의문이 든다. 내 방에서 스탠드의 주홍빛 조명 아래 앉아 꾸벅꾸벅 졸아가며 책을 읽는 밤이면, 정신을 차리려고 침대 쿠션에 기댄 자세로 천장의 한구석을 멍하니 올려다볼 때면, 눈이 시큰거려서 질끈 감았다 뜨고 다시 질끈 감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눈자위에 물기가 어리는 것을 느낄 때면, 나는 스스로가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이 쾌활한 사람이 되기를, 그런 사람인 척하기를, 척하다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기를, 누구에게든 스스럼없이 다가가 한바탕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람이기를, 마치 나의 부모가 나를 낳아 기르는 내내 소망했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온 힘을 다해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그런 질문을 가만히 공글리는 밤이면, 나는 금세 기진맥진하여 침대 쿠션에 미끄러지듯 누워버리고, 거기에 머리를 뉘인 채 잠시 눈을 붙이고, 잠이 들 뻔하고, 설핏한 꿈속에서 다시금 너를 떠올리고 만다. 버스정류장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무언가를 기다리며 유난히 뜨거운 햇살을 견디고 있던 너를. 그날 네가 무릎께에 올려둔 에코백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뒤늦게 일어난다. 둥그스름한 모양으로 불룩 튀어나와 있던 그 가방에는 누구를 위한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그날 주저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너를 만났더라면 그것에 대해 넌지시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잠들기 직전에 너의 모습을, 네가 지니고 있던 무엇을 막연히 그리며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하지 않았지.
하지 못할 것이고, 그럼에도 나는 궁금하다. 달리는 버스 뒷자리에서 우연히 너를 발견한 순간, 네가 지금 내 앞에 있고 여전히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대체 내 마음 밑바닥 어디에서 너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는 열망이 불쑥 튀어나온 것일까. 육년 넘게 한번도 연락하지 않고 지냈으면서, 네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지낸 주제에 말이야.
그래서 오초밖에 지속되지 않았던 걸까.
내 기억에 그 열망은 어떤 판단과 감정에 의해 순식간에 제압당해 끌려나갔다. 너에게 닿고자 하는 마음은 마치 한낮의 탈주범처럼 뛰쳐나왔다가 제대로 한번 활개쳐보지도 못하고 구속되었어. 지금은 어느 밑바닥에서, 어떠한 형태로 머물러 있을까. 다시 뛰쳐나올 수 있기는 할까. 이따금 그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는 밤이면, 이제는 내 안에 그런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다.
*
새로 산 노트북에 백업해둔 문서들을 옮기던 중 이경은 오래전에 자신이 쓴 글을 하나 발견했다. 그걸 읽는 내내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꼈다. 문서 작성일을 확인해보니 작년 구월 말이었다. 당시 이경은 추석 연휴 기간에 연차까지 덧붙여 열흘을 내리 쉬었다. 잇따른 대외행사와 프로젝트를 마감한 직후여서 묵직한 피로감과 무기력증에 시달린 탓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회사를 때려치웠을 것이다. 업무 스트레스가 일상을 해치고 몸의 균형을 뒤흔들어놓는다고 느낄 때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사직서를 내민 횟수만 다섯번이 넘으니까. 하지만 업무강도와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찾아올 때마다 자리를 박차고 나서기에 그녀는 이제 스스로가 너무 늙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더는 떠돌이처럼, 고독한 용병처럼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 노쇠했다는 증거라는 건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때 이경은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사흘간 집 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오를 넘겨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고, 허기가 느껴지면 그릇에 흰 우유와 콘플레이크를 담아 먹었다. 그러다가 나흘째 무슨 비장한 각오라도 한 사람처럼 그녀는 가방에 노트북을 챙겨 들었다. 무턱대고 집 앞의 버스정류장으로 나가 반쯤 조는 듯한 얼굴로 서서 볕을 쬐었다. 오래지 않아 동네를 통과하는 유일한 지선버스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문을 열었다. 이경은 그걸 타고 남은 연휴 동안 경복궁역 근처의 스타벅스를 드나들었다. 서른셋. 생의 진로를 변경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 같았다. 이경은 딱히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없었던 그 시기의 공허와 메마른 감정, 그 한복판을 통과하는 자신의 면면을 조금이라도 기록해두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세시간씩 까페 창가 자리에 앉아 막연히 떠오르는 상념들을 적어내려갔고, 다음 날 맑은 정신으로 그걸 천천히 읽어보았다. 뭔가를 쓰다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이미지와 마음들이 튀어나왔는데, 그걸 마치 남의 속사정인 양 읽어내려가는 과정은 확실히 어떤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연휴 마지막 날 저녁, 이경은 그 글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차분하게 읽어보았다. 그리고 모조리 휴지통에 넣어 삭제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글은 왜 남아 있나.
이경은 문서 삭제 버튼에 마우스 커서를 옮겨놓고는 망설였다. 작년과 달리 지금 그 글을 지우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더이상 자신이 쓴 글 같지 않아서였다. 고작 한해가 지났을 뿐인데 그녀는 과거의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조금도 기억해낼 수 없었다. 어떤 심정으로 이런 글을 썼고 의식과 회로의 사각지대에 몰래 남겨두기까지 했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이경은 그 글을 새로운 노트북에 옮겨 담았다. 부엌으로 가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반쯤 채우고, 캐모마일 티백이 우러나는 동안 욕실에서 칫솔질을 했다. 그런 다음 책상 앞으로 돌아와 메일함을 열었다. 이경은 그 글을 지수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이경이 기억하는 지수의 메일 주소는 그녀가 회사에서 사용하던 인트라넷 주소뿐이었다. 여태 그 메일을 사용하고 있을지,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을지는 불분명했다. 그렇지만 발송하기로 결심하고 나니 그 글이 수신자에게 무사히 가닿을지 말지는 순전히 운명의 소관처럼 느껴졌다. 이경은 지수가 자신의 메일을 받게 된다면, 내일 아침 다른 업무 메일들을 처리하는 와중에 그 글을 읽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종로3가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도 알은체하지 않았던 이경의 과거에 대해 이제야 알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걸까.
다소 겸연쩍기는 했다. 이경은 이런 글을 쓰고 굳이 남겨둔 과거의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이걸 지수에게 보내려는 지금의 자신도 거의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궁금했다. 제 글을 읽고 지수가 보일 반응이, 답장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자신을 위로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밤 이경은 메일 보내기 버튼을 눌렀고, 이번에는 제 앞에 놓인 버튼을 적시에 눌렀다는 근거 없는 만족감에 빠져 잠자리에 들었다.
*
이경이 지수를 만난 건 모두가 만류하던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진학한 무렵이었다. 섬유공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운 좋게 바로 입사한 무역회사를 일년 팔개월 만에 때려치우며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 이경의 통장에는 천만원 남짓한 돈이 들어 있었는데, 그걸로 상경하면 겨우 첫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도 될까 말까였다. 퇴사 소식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던 부모님은 네가 내린 결정이니 알아서 감당해보라는 말로 일축했고, 하나뿐인 오빠는 일곱살 연하인 애인과 결혼을 앞두고 반쯤 미쳐 있어서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러한 정황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경이 가족에게 기대한 바는 그리 크지 않았다. 가까운 이들에게는 가혹하리만치 냉정하게 굴면서, 아무 상관 없는 이들에게는 쉽사리 다정하고 헤프게 구는 게 집안 내력이었으니까. 그런 이들 틈에서 자라난 이경도 스스로가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입학 즈음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내가 원해서 시작한 공부니까,라는 식의 열의로 버틸 수 있었으나 이경은 한 학기를 마치기도 전에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만신창이가 되었다. 난생처음으로 자살이라는 단어가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느꼈다. 언제든 자살해버리면 그만,이라는 각오가 아니면—대학원 동기들의 말버릇이기도 했다—그토록 누추하고 암담한 학생 신분을 견뎌낼 수도, 자신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고 얼마만큼 더 수행해야 할지 도통 측정이란 걸 할 수 없는 학문의 심연을 버텨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나중에서야 이경은 깨달았다. 그토록 죽음과 곤궁함을 가까이에서 느끼던 시절만이 가장 사는 것처럼 살던 시절로 기억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말이다.
학교 근로장학과의 도움으로 방학 동안 인턴으로 근무하게 된 출판사에서 이경은 지수를 처음 만났다. 지수는 세계문학팀 소속의 막내 편집자로, 이경이 대학원 졸업장을 활용하여 고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로 중 하나를 앞서 겪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경은 인문교양팀 소속으로 배정되었기에 업무상은 물론이고 사적으로도 지수와 교류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게 바로 지수가 이경과 가까워지려고 한 이유였다는 걸 이경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인턴으로서 이경이 맡은 업무는 간단했다. 이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만큼 오래된 책자의 내용을 그대로 타이핑하거나, 계간지를 일일이 스캔하여 파일로 저장해두거나,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게시할 신간 홍보 문안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누가 해도 상관없지만 누구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고, 열과 성을 다할수록 본인만 초라해지는 잡무들이었다. 한나절을 쏟아부은 결과물에서 일말의 성취감도 돌려받을 수 없다는 걸 확인했을 즈음, 이경은 회사 직원들이 나이 어린 여자 인턴에게 바라는 특유의 명랑함이랄까 애교스러운 태도를 자신이 전혀 수행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런 감정적인 서비스야말로 인턴의 주요한 업무였다는 걸 뒤늦게야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사교성을 꾸며낼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다소 어눌하고 까칠한 이미지로만 평가받던 이경에게 선뜻 먼저 다가와준 사람이 지수였다.
“이경씨라고 했죠.” 지수는 파티션에 팔꿈치를 기대어 선 채 말을 건네왔다. “우리 사촌 언니랑 이름이 똑같네요. 우리 이경 언니, 내가 완전 좋아하는데.”
“아, 네.”
“편하게 해요. 들어보니까 우리 동갑이더라고. 요즘 점심은 누구랑 먹어요?”
“그냥, 혼자서요.”
“아.” 지수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까닥거리더니 상체를 낮추며 속삭였다. “인문교양팀 분위기가 좀 칙칙하죠? 원래 그러니까 이해해요. 내가 요 근처에 맛집 하나 아는데, 이경씨 파스타 좋아해요?”
이후로 둘은 몇차례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업무시간 중 메신저를 통해 연예인 스캔들이나 쇼핑 정보도 주고받았고, 영화 취향이 비슷하여 퇴근 후 같이 극장에 가기도 했다. 이경은 지수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출판사 업무 전반에 대해, 향후 가능성이나 취업을 위해 갖춰야 할 능력은 무엇일지도 상세히 듣고 싶었다. 그런데 지수는 출판업이라는 것 자체에 거의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점심시간마다 자신이 수행하는 업무의 공허함과 소외감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한마디로 좆같아요.”
지수는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동기들 중에서 자신의 연봉이 제일 형편없고 미래도 가장 불투명하다고 투덜거렸다. “아시겠지만 출판은 사양산업이에요. 결국에는 모든 게 웹진 형태로, 전자책으로 변하고 말 거예요. 번역이나 교정교열 능력도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거고요. 사실 맞춤법 따위 알 게 뭐람. 국립국어원부터 폭파해야 해요. 국가가 뭔데 언어 사용을 규제하고 난리야. 그래도 대형출판사와 일인출판사는 살아남겠죠? 일본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요. 일본이 한국의 십년 후라면서요. 어우, 세상에. 십년 후라니. 그때 가면 대체 내가 뭘 해 먹고살지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에요.”
“십년 후를 왜 벌써 걱정해요.” 이경은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지수의 옷깃에 붙은 실오라기를 떼어주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불만을 쏟아내는 지수가 마치 무역회사를 다니던 시절의 자신처럼 느껴졌다.
“이경씨는 걱정 안 돼요?” 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나는 내가 겨우 이렇게 살다가 죽을까봐 걱정돼 죽겠어.”
“아, 제발 죽는 소리 좀.” 이경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종업원이 다가와 두 사람이 주문한 알리오올리오와 명란크림파스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죽는 소리를 해야 스트레스가 풀리나봐요.”
“맞아요, 내가 좀 이래. 회사 욕을 한바가지 해야 겨우 회사에 붙어 있을 수 있거든요.”
“오래된 부부처럼요.”
“아니, 아니.” 그 대목에서 지수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진심으로 미워해요. 회사도, 나를 둘러싼 이 세계도. 그래서 회사 책상 서랍 맨 밑에 수면제를 오십알인가 구해놨어요. 언제든 먹고 콱 죽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각오로 버티는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뒤 지수는 문득 정신을 차린 듯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또 오버했네.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 하면 절대 안 돼요. 선배들은 내가 회사에 뼈를 묻을 사람인 줄 알거든. 아, 파스타 식겠다. 어서 들어요.”
그러던 어느 일요일 낮, 침대에 누워 따분하게 책을 읽던 이경에게 갑자기 지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만 아는 디저트숍을 소개해줄 테니 지금 당장 삼청동의 까페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케이크를 먹자는 것이지, 뭔가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듯했다. 이경은 다소 부담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나 싶어 승낙했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모자만 눌러쓴 채 급히 집을 나섰고, 철창과 알전구가 콘셉트인 까페 테라스에 앉아 지수가 영업부의 강부장과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들었다.
“세상에, 강부장님이랑요?” 이경은 그 정도의 비밀을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입을 쩍 벌렸다.
“네, 그 허우대만 멀쩡한 한량이랑요.”
이경은 두 사람의 관계보다 지수처럼 젊고 영민한 여자가 어째서 아침드라마 속 철부지들처럼 아버지뻘인 남자에게 걸려들었는지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게 혹시 자신처럼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탓인지 아니면 그저 반사회적 기질 탓인지 뭔지 궁금했다.
“의외로 야성적인 면이 있거든요.” 지수는 심상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둘만 있을 때에는 회사에서 보여주는 모습이랑 사뭇 달라요. 그래, 어쩌면 그 사람이 아니라 그런 면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어.”
야성적이라니. 그러기에 강부장은 훌쩍 큰 키에 깡마른 몸, 진작에 빛바랜 외모를 지닌 늙은이에 불과했다. 병약한 기린 같았고, 무해하다기보다 무력하다는 인상을 주었기에 이경은 지수의 말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이경씨는 예술 공부하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좀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았어. 내 마음, 이게 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말로 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쨌든 털어놓고는 싶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누구한테 하겠어. 응? 이경씨, 지금 내 말, 아니 내 마음을 이해는 하겠어요?”
이경은 우리가 이럴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나 싶었다. 그렇지만 지수의 말대로 치명적인 비밀일수록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결코 털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오래지 않아 회사를 떠날 것이고 이후에도 딱히 회사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이 바로 그녀에게 안성맞춤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자기 속 편하자고 나한테 접근했던 거구나. 순간 이경은 배신감에 목덜미가 뜨거워졌으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와중에도 좀처럼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고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지수의 심중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애써 그녀를 이해하는 척했다.
“뭐, 어때요. 어차피 결혼이란 건 사회적인 약속일 뿐인데요. 그럴싸한 허상이죠. 사랑이 제일 귀한 가치예요.”
“사랑? 나는 이게 사랑인지도 모르겠어.” 지수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나 몰라. 내가 지금 왜 이러는지 알아요? 어제 병원에 다녀왔거든요. 나 임신했어요.”
일순 이경의 마음속에서 뒤틀린 희열이 차올랐다. 그녀는 임신 소식보다 자신의 그런 감정이 낯설고 놀라워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지수를 질투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동갑의 그녀가 자기보다 행복해지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자기만큼 불행해져야 한다고는 몇번이나 생각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파탄. 지수의 고백을 듣고 이경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문구는 바로 ‘사랑의 파탄’이었다. 수업 중에 그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사랑이 지닌 특성 중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자기파괴성이다.
“남들이 다 뜯어말리는 일인데 멈출 수가 없으면, 못 먹어도 고면, 그게 사랑이죠, 뭐.” 그렇게 말하면서 이경은 자신이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던 어느 여름날의 새벽을 기억해냈다. 딱 한번 사는 인생인데 하고 싶은 건 해보고 죽어야지.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몸부림이 지금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거야.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이경은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붙들고 있던 소설의 한 구절을 꺼내놓으며 말을 이었다. “응원할게요. 누가 뭐라 하든 나는 지수씨를 지지한다고요.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게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본인만을 위한 선택이기를 바랄게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이경은 방금 뱉은 말이 한동안 망각하고 지냈던 자신의 오랜 결심처럼 느껴졌다. 마치 녹음기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 사람처럼 겸연쩍은 기분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 뜯어말리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을까.
사달은 몇주 후에 일어났다. 인턴 기간이 종료된 기념으로 이경과 인문교양팀 팀원들이 함께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들 손에 쥔 테이크아웃 커피를 홀짝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였다.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 오른편에 인쇄소에서 막 도착한 신간 도서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얼마 전에 지수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마감한, 나쯔메 소오세끼의 소설 『산시로』였다.
“잘됐네. 마지막 날에 나온 책이니 기념으로 꼭 챙겨 가요.”
그건 400쪽 남짓한 두께의 묵직한 양장본이었다. 기존에 번역되어 나온 책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일러스트를 잔뜩 삽입하고 판형과 글자도 큼직하게 한 소장본 시리즈였다. 황금색 띠지에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청춘의 빛을 위한 교양소설’이라는 추천사가 적혀 있었다. 이경은 책을 한권 집어 들어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그때 사무실 안쪽에서 둔중한 파열음 같은 것이 연이어 들려왔다. 뭐지. 수런거리는 사람들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떤 중년 여자가 『산시로』를 양손으로 움켜쥔 채 누군가의 정수리를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라서 말리고 보니 바닥에 주저앉아 제 머리를 감싸쥔 사람은 지수였다.
“이게 니들이 말하는 청춘이고 교양이니? 이게 네 교양이야?”
그날로 회사 사람들 전부가 지수와 강부장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이경이 보고 들은 것은 거기까지였다. 차마 괜찮으냐고 물어볼 수도 없을 정도로 당시 지수의 몰골은 처참했다. 근무시간에 늘 착용하던 은테 안경은 휘어진 채 바닥에 나뒹굴었고, 책 모서리에 긁힌 이마와 뺨에서는 피가 묻어났다. 검은색 스타킹은 종아리 부근의 올이 나가 맨살을 드러낸 채 벌어져 있었고, 신고 있던 에나멜 구두의 한쪽 리본은 어디론가 떨어져나가 찾을 수 없었다.
그날 이경은 지수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회사를 빠져나왔다.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을 취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대체 뭐라고 한단 말인가. 괜찮아요? 강부장은 뭐라고 하던가요. 회사 사람들은 또 어떻고. 그렇게 얻어맞았는데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신고를 해도 되나. 아기는 괜찮나요. 이상은 없죠? 지금 기분은 어때요? 아직도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 지경을 당했는데도 사랑 같아야 사랑일 텐데. 그거야말로 진짜일 텐데.
그렇게 한달 가까이 지났을 무렵, 이경은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게 된 학교 도서관에서 서가를 정리하던 중 이것이 자신과 지수가 나눌 수 있는 관계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탈 없을 ‘대나무숲’이라는 역할까지가 분명 지수가 자신에게 기대한 몫이었을 거라고, 이경은 결론을 내렸다. 현재의 자신은 누구한테 위로를 건넬 처지가 못 된다고, 당장 다음 학기 등록금이랑 생활비가 부족해 아등바등하지 않느냐고, 그런데 사랑 타령—심지어 불륜이라니—을 들어줄 여유가 어디 있느냐고, 어차피 지금은 무슨 말을 건네도 당사자에게는 칼날처럼 느껴질 뿐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러면서 더는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응원한다는 말이, 네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하라고 부추기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얼마만큼의 책임감으로 건네야 하는 말인지 난생처음 알게 된 기분이었다.
*
지수는 메일을 읽지 않았다. 수신확인함을 열어볼 때마다 ‘읽지 않음’이라는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경은 일주일을 기다린 뒤 깔끔하게 포기했다. 애당초 그 회사에 계속 다니고 있으리란 기대가 적었고, 설령 그 글을 읽게 된다고 해도 지수가 답장을 쓰지 않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귀결이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끊어진 관계였다. 친구나 동료조차 아니었다. 그러나 친구나 동료가 아니었기에 가까스로 접점을 이룰 수 있는 관계였다. 그러므로 이경은 자신이 지수가 잉태한 아이의 대모 같은 것이 되어줄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좀처럼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원 입원실에서 유일하게 침대 머리맡을 지키며 그녀의 손을 맞잡아줄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식판을 가져다 나르고, 헐렁한 환자복을 입은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을 오가고, 원무과와 검사실에서 보호자 노릇을 해줄 수도 있었으리라고. 그런 식으로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도 있었으리라고. 친구나 동료는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가능한 다른 관계를 맺어볼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하지만 그 다정한 이미지들은 매번 머릿속에서만 재현되었고, 한순간도 이경의 눈앞에 실제로 펼쳐지지 못했다. 그녀가 아무것도 시도해보지 않은 탓이었다. 먼저 연락을 취하지도, 회사에 찾아가보지도, 훗날 교대역 6번 출구 앞에서 다른 회사로 이직한 인문교양팀 팀장님과 마주쳤을 때조차 차마 지수에 관한 질문을 건네지 않은 탓이었다. 유산했다던데. 그런 말을 흘려들은 순간 이경은 서둘러 인사를 마친 뒤 자리를 벗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듯이 걸어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그때 계단을 한칸 한칸 내디디며 온몸으로 느꼈던 수치심을 이경은 기억했다. 양어깨와 등허리를 지그시 내리누르던 압력, 그로 인해 벌어진 마음의 틈새로 스며나오던 부끄러움을 이경은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다.
어째서 부끄러운가.
아무도 이경을 나무라지 않았다. 누구도 이경에게 잘못이 있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경은 그 일을 기점으로 자신이 조금씩 변해간다고 느꼈고, 변했다기보다 원래의 소심한 자신으로 돌아왔고, 더는 인생의 선택에 있어서 마음이 움찔거리는 쪽으로 나아가지 못했으며, 안락만을 찾아 쥐었다. 때로, 아주 가끔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떤 갈망이 들끓어 모두가 말리는 짓을 기어코 저질러버리기도 했지만 그 빈도는 점차 줄었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적당히 억누르거나 모르는 체할 수 있었기에, 그런 마음은 종내 사라져버렸다. 다시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마치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청춘의 빛처럼.
그러던 어느날, 이경이 업무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새로고침 버튼을 연달아 눌렀을 때, 수신함 맨 위 칸에 지수의 답장이 도착했다. ‘잘 지내니?’라는 제목에 ‘RE:’만 붙은 회신 메일이었다. 발신인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이경이 글을 발송했던 지수의 인트라넷 주소, 그대로였다.
어쩌면 수신인을 찾을 수 없다는, 휴면계정 메일함을 정리하던 관리자가 보낸 뒤늦은 메시지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수가 보낸 답장일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은, 어쩌면 무사히 아이를 낳은, 보란 듯이 승진하고 세계문학팀 팀장이 된, 원하는 삶을 끝까지 밀어붙인 지수의 답신일 수도 있었다. 잘 지내니? 나는 잘 지내. 그 일이 있은 후로 서로 연락한 적이 한번도 없네. 마지막으로 보여준 모습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을까. 도무지 내가 먼저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어. 아마 너도 마찬가지였겠지. 생각해보니 그때 우리 참 어렸다. 스물여섯이었나 일곱이었나. 그때는 우리가 다 큰 줄만 알고, 남아 있는 선택지가 몇개 없는 줄만 알고, 겁먹은 짐승들처럼 매일 불안하고 초조해했던 것 같아. 사실 지금도 비슷하지. 그렇지만 예전과 똑같지는 않은 것 같다. 얼마 전에 교정보던 원고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 하늘에는 달이 태양을 가리는 순간에만 볼 수 있는 별들이 있다고 말이야. 개기일식이 일어나면 중력장에 의해 빛이 휘면서 태양 뒤편에 가려져 있던 별들을 볼 수 있다고 했지. 지구에서 태어난 생명체인 이상 결코 볼 수 없었을 존재들인데, 몇십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천체 현상으로 인해 잠깐이나마 볼 수 있다는 게 좀 신기하더라. 어쩌면 우리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어.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도 모를 것 같지만…… 뭐, 이거 하나는 확실해. 나는 이제 정말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려고. 내키는 대로 해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매사에 미련이 남지 않는 선택을 하고 싶다는 뜻이야. 아쉬움 없이, 원 없이 살아보고 싶어. 매 순간, 앞으로도 쭉. 그래서 지금 이 답장도 쓰는 거야. 네가 보내온 마음을 도무지 외면할 수 없어서. 팔년쯤 됐을까. 오래도 걸렸다. 그렇지만 긴 휴지기를 거쳐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관계도 있는 법이겠지. 아무도 이런 식으로 시작해보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최초야. 너는 늘 뭔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싶어했지. 새로운 글을 쓰고 싶어했던 것 같아. 글은 아직 쓰니? 죽도록 하고 있는 거야? 죽을 각오로 살아보자고 점심시간마다 마주 앉아 으르렁거리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아닌가. 그냥 같이 약 나눠 먹고 콱 죽어버리자고 했던가. 뭐, 아무튼. 한번은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달이 태양과 맞닿는 일식처럼. 지금이 그때일까. 편할 때 답장해줘.
이경은 수신함에 도착한 메일을 클릭했다. 거기에 적힌 글귀를 읽어내려갔고, 스크롤을 움직이는 내내 조금씩 먹먹해지는 가슴께를 눌렀다. 눈길이 마지막 문장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이경은 숨을 한번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동안 창밖을 내다보았다. 맑은 하늘 아래 가파른 비탈길을 뛰어내려가는 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남매 같았는데, 오빠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분홍색 털모자를 쓴 여자아이의 옷소매를 꼭 붙잡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도 놓치지 않았다.
이윽고 주전자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김을 뿜어냈다. 이경은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웠다. 티백에서 우러나는 황금빛 너울을 지켜보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에 새로운 화면을 띄우고 천장의 한구석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눈앞에 두개의 원이 어른거렸다. 몇십년 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라니. 낮인데 밤처럼 어두워지는 순간에만 볼 수 있는 별들이라니. 하나의 중심으로 두 원이 겹치는 순간 대기에 이는 파문이 제 살갗에 와닿는 듯했다. 이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고 다시 질끈 감았다.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한가운데를 가만 응시했다. 그러자 시야의 먼 곳으로부터 환한 빛들이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