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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2018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김중미 金重美

작가 mansu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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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생존은 모두가 잘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를 상상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자들, 즉 구조 바깥에 존재하는 아웃사이더들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생존은 우리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벼리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178면)

 

1980년대 말 빈민지역에 들어가 공부방을 열었다. 가난한 아이들 뒤에는 하루하루의 삶이 지옥인 엄마들이 있었다. 도시에서 자라 빈민이 되었든, 충청도나 전라도에서 이농을 했든 빈민여성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밤새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고도 아침이면 밥을 지어놓고 공장에 나가던 그들은 대개 스무살 전후에 만난 남자와 강압적인 성관계를 갖고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공부방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심리상담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간 상담기관에서 엄마들이 받는 첫 질문은 늘 “원하는 아이였습니까?”였다. 그 질문을 받으면 엄마들이 무너져내렸다. 나는 그때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들이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다시 세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부를 같이하고, 여성노동자대회에도 같이 가고, 경제공동체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늘 제자리였다. 엄마들은 억압을 내면화해 스스로를 열등하고 힘없는 존재로 규정했고 몸을 낮췄다. 그래도 십년쯤 지나자 용기 내 이혼을 하는 엄마들이 생겼다. 그때마다 우리는 가정을 파탄냈다는 비난과 원망을 받았다.

나 역시 그 십년 동안 주부로, 엄마로, 활동가로 전사의 삶을 살아야 했다. 다른 남자들에 비해 집안일과 육아를 많이 ‘돕는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집안일과 육아가 아내를 돕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이라고 인식하기까지는 투쟁이 필요했다. 공부방 자원교사로 와서 공동체를 선택한 여자 후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엄마들이 살아온 삶이 우리보다 더 열악하고 척박하고 폭력적이었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고충을 겪는 여성들이었다.

 

저는 대학에서 일하기 때문에 자식을 제때 잘 먹일 수 있는 유색 여성 레즈비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아이를 잘 먹이지 못하는 유색 여성이나 집에서 낙태와 불임시술을 받아 뱃속이 망가져서 아이가 없는 유색 여성과 저 사이의 공통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면, 자식 없이 살기로 한 레즈비언, 동성애를 혐오하는 공동체가 자신이 지지받을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기에 커밍아웃하지 않고 살아가는 여성, 죽음 대신 침묵을 선택한 여성, 저의 분노가 방아쇠가 되어 자신의 분노를 폭발시킬까 봐 잔뜩 겁먹은 여성을 제가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 여성들이 바로 저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저는 그녀들이 받는 억압뿐만 아니라 저 자신이 받는 억압에도 기여하는 셈입니다.(228면)

 

1997년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 1995)을 보았다. 나는 그 영화를 통해 우리 공동체가 가야 할 길을 보았지만, 함께 공동체를 준비하던 남자 후배들은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때만 해도 나는 페미니즘을 특정 계급 여성들의 것이라 여겼다. 부끄럽게도 페미니스트란 우리 같은 아웃사이더가 아닌 전문직 중산층 여성들을 일컫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속한 기찻길옆작은학교가 삼십년 넘게 이어온 것은 우리가 자매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라고 믿는 모순투성이로 살았다. 지난 삼십년 동안 우리 공동체가 겪은 몇번의 위기는 남성들의 방식이 우위에 있을 때였다. 그것이 남성 구성원에 의한 것이든 남성을 내면화한 우리 여성들에 의한 것이든 말이다. 결국 그 위기를 이겨낸 것도 자매애였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온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페미니즘 관점으로 통합하게 된 것은 불과 삼년여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일천한 페미니즘 독서에서 『시스터 아웃사이더』(Sister Outsider, 주해연 박미선 옮김)의 오드리 로드(Audre Lorde)에게 가장 강한 유대감을 느낀 이유는 내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의 자리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은 우리나라의 혐오문화가 사회 곳곳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사건들이 쏟아진 해였다. 동성애자에 대한 과도한 혐오와 공격, 장애인 휠체어 출근 투쟁에 쏟아진 비난들, 제주에 온 예멘 난민을 향한 공포와 혐오, 고양저유소 화재사건을 다루는 경찰의 태도에서 드러난 이주민에 대한 차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인정에 대한 남성들의 위기감, 그리고 멈출 줄 모르는 여성 살해. 나는 그 혐오와 폭력에 대항하는 길은 아웃사이더들의 연대라고 믿는다. 오드리 로드는 흑인이자 여성이며 레즈비언이었다. 미국에서 흑인여성으로 산다는 건 그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로 산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나라에서 백인이 아닌 여성의 경우 유방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80퍼센트, 자궁 절제술 및 불임 시술 같은 불필요한 의료 시술의 빈도는 백인 여성의 세 배, 강간·살인·폭행의 피해자가 될 확률 또한 백인 여성에 비해 세 배 더 높습니다.(100면)

 

미국의 빈곤문제를 다룬 책을 보면 흑인여성의 열악한 삶을 드러내는 통계들이 차고 넘친다. 미국사회에서 법원으로부터 퇴거명령을 받는 흑인여성 세입자는 남성의 두배, 가난한 백인여성에 비해 열배 가까이 높다고 한다. 흑인 동네의 여성들은 소수임에도 퇴거당하는 세입자의 3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오드리 로드는 그런 악조건에 무릎을 꿇는 대신 약자들을 억압하는 낡은 권력에 저항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서로의 자녀를 키워주며, 서로의 전투에 나서주고, 서로의 땅을 경작해주던 흑인여성의 포용력과 생명력을 전해 받았다.

올 가을 「성매매집결지 100년 아카이빙」 특별전에 참여하면서 만난 2018년의 기지촌 현실은 오드리 로드를 더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어렸을 때 내가 동두천에서 만난 언니들이 기지촌에 온 이유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사오십년이 지나 F6 비자로 한국에 온 필리핀, 러시아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여성들도 다르지 않았다. 삼십년간 만석동에서 만나온 여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성들은 국가, 민족, 종교를 초월해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는 그들의 연대를 가로막고 서로를 두려워하고 혐오하게 조장해왔다. 정부의 다문화정책은 그들의 차이를 ‘균질화된 초콜릿 우유처럼 구별 불가능한 입자의 혼합물’로 만들 뿐 그들이 같은 여성으로, 노동자로, 엄마로 만나는 길은 가로막았다. 또한 같은 처지이면서 남성인 노동자, 장애인, 난민, 성소수자들과 연대할 길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그 길을 뚫고 새로 내는 것이 바로 여성의 일이라고 믿는다. 오드리 로드는 그 길을 일굴 힘을,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성애’(「성애의 활용」 69~ 80면 참조)를 일깨웠다.

 

차이는 단순히 관용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차이는 우리의 창의성이 불꽃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극성(polarities)과도 같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성들이 상호 의존의 필요성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동등한 것으로 인정받는 서로 다른 힘들 사이의 상호 의존 속에서만, 우리는 그 어떤 지침이 없는 곳에서도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자양분, 그리고 이 세상에서 새로운 존재 방식을 추구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176~ 77면)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되풀이해 읽을 때마다 보이지 않던 길이 새로 보인다. 쉰이 훨씬 넘은 나이에 만난 오드리 로드는 가난한 여성, 이주민, 난민, 장애인, 성소수자, 평화활동가, 그리고 그 누구보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우리를 가로막는 울타리를 부술 용기를 주었다.

 

내 안에서 당신을 발견하듯 당신도 당신 안에서 내 모습을 환기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내 모습을 새겨 넣는 조각칼이 바로 나이다.(28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