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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가토 요코 『왜 전쟁까지』, 사계절 2018
태평양전쟁을 결정한 세번의 선택과 ‘전후’ 70년
이정숙 李貞淑
현대문학 연구자 punky525@hanmail.net
라디오로 전파된 쇼오와 ‘천황’ 히로히또의 ‘대동아전쟁 종결의 조서’를 분석한 코모리 요오이찌(小森陽一)는, 패전 후의 역사인식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800자로 이루어진 이 문장들을 분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옥음방송을 기획한 사람은 히로히또 자신이었고 알다시피 매카서(D. MacArthur)와의 협상은 비밀에 부쳐진 채 1946년 전범재판에서 천황은 면책됐다. ‘패전’과 ‘전쟁 책임’에 대한 언급이 없는 조서는 ‘국체수호’를 위한 전파의 스펙터클로 활용됐고 이때부터 상징천황제가 시작되었다. 이 조서를 분석하던 2003년 무렵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보면서 코모리 요오이찌는 ‘전후체제’가 임계에 달했다고 인식했다. 더는 패권국가가 아닌 ‘불량국가’로 전락한 미국에, 역사교과서 우경화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일본사회가 거울처럼 겹쳐 보였던 것이다.(고모리 요이치 『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뿌리와이파리 2004 참조) 이때 그가 떠올린 지식인은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郎)였다.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오에는 ‘모호한 일본의 나’라는 제목의 소감문을 통해 제국주의 헌법을 지탱하던 시민감정이 패전 후 전쟁의 영구적 포기와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모럴로 대체되었지만, 모럴을 감당하는 자의 내면에 아시아 침략자로서 낙인찍힌 개인과 사회의 분열상이 ‘모호한’(ambiguous) 형상으로 서려 있다는 아픔을 들려주었다. ‘종전’이 아니라 ‘패전’이라는 명확한 감각을 오오에가 윤리적 출발점으로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코모리는 이 ‘모호’의 기원을 옥음방송 조서에서 찾았던 것이다.
『왜 전쟁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와 ‘세계의 길’ 사이에서』(양지연 옮김)는 ‘전후’에 대한 지식인들의 윤리적 고뇌를 대중의 차원으로 옮겨 집합적으로 사유해보려는 기획이다. 저자 카또오 요오꼬(加藤陽子)는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1년 진주만공습까지 10년간 세차례의 국제적 교섭을 결렬시키면서 전쟁으로 나아간 일본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이 작성한 리튼보고서, 1940년 9월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삼국동맹조약, 1941년 미일교섭의 협상조약과 비교해서 설명하고 추후 이 선택에 대해 위정자나 언론이 국민에게 설명한 내용이 정당한지를 짚는다. 지나간 시대가 현재에 대해 갖는 규정력에 주목할 때 후자 쪽을 다룬 점이 이 책의 중요한 성과로 보인다. 일례로, 전후 70년의 회고를 담은 2015년 8월 15일 아베 신조오(安倍晋三)의 담화문 중 일본의 식민지 침략전은 경제블록화로 조여오는 서구 열강의 압박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당대 일본의 경제력이 세계 공황으로 타격받은 유럽을 훨씬 능가했다는 경제사 분야의 실증 연구를 제시하면서 아베의 설명 방식은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악화된 이후 언론에서 꾸며낸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구체적으로 반박한다.
이 책의 장점은 이렇게 국가와 국민 사이의 사회계약에 대한 신뢰 문제로써 전쟁사를 소환한다는 점이다. 교섭과 개전, 전쟁에 대한 사후 평가에 대해서까지 사료를 통해 “정직한 교육”(368면)이 이루어졌다면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민중이 이끄는 달라진 사회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하면 원저의 부제인 ‘역사를 결정한 교섭과 일본의 실패’가 더 적합해 보인다. 번역서 부제에 나오는 ‘세계의 길’을 제시한 주체들도 협상의 한편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던 제국의 일원이었기에 대동아를 겨냥했던 제국주의의 방향성에 비해 저쪽이 제시한 길이 선험적으로 옳다는 식의 비교우위를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E. H. 카가 『20년의 위기』(Nationalism and after, 한국어판 녹문당 2014)에서 비판했듯 1919년 빠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이 결의한 베르사유조약이 20년밖에 지속하지 못하고 차대전 발발로 전화한 원인은 독일의 재건을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의 불합리한 경제제한 때문이었고, 그 이익을 이해당사국들이 분할 취득한 것을 볼 때도 국제조약이 평화유지를 심급으로 운용되지만은 않는다.
저자는 전쟁의 본질은 상대국의 기본을 이루는 질서인 헌법을 바꾸어놓는 데 있다는 루소의 전쟁론을 천착한 헌법학자 하세베 야스오(長谷部恭男)를 오마주하면서 전쟁의 사상사에 기댄다. 이 책의 기획 강연이 시작된 2015년은 ‘전후 70년=전후 일본국 헌법하의 70년’이라는 의미에서 ‘전후’의 성찰이 자연스럽게 환기될 수밖에 없는 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가능법안이라고 할 수 있는 안보법개정안이 통과되는 것을 목도한 해이기도 하다. 책의 1장은 전후 70주년 기념으로 천황이 낭독한 전국전몰자추모식의 추모사와 아베의 담화문 그리고 유일하게 대규모 지상전이 벌어진 오끼나와의 전몰자추모사를 각각 담론적으로 상세하게 분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왜일까. 코모리 요오이찌가 종전조서를 분석한 방식과 닮은 듯하지만 문제의식은 희석된 느낌이다. 저자도 표명했지만 일본정부가 사고하는 ‘전후’란 “어디까지나 ‘전후 70년이 된 시점에서 돌아보는 전전’”(46면)에 집중되어 있을 뿐 전후 평화헌법을 기축으로 진보적으로 노력해온 70년간의 역사는 그다지 조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칫 ‘전전’을 신화화하는 무의식적 표출일 수 있다.
전쟁으로 고쳐 쓰인 헌법의 민주주의적 조항이 전쟁의 참화를 가장 극심하게 겪은 오끼나와에서 지켜지지 않는 현실이나, 안보법 개정의 폐해를 의식한 듯 천황이 평화를 염원하는 문장을 추모사에 넣자 정치적 중립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일본사회의 단면이 ‘전후’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과 통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그것은 일본과 세계가 어떤 헌법원리를 가지고 제국주의 전쟁을 벌였는지 사료를 가지고 ‘선택’을 말하는 이 책의 미온함에도 조금은 탓이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1965년 한일조약을 떠올린다. 검은색 라이방을 벗지도 않은 작은 체구의 박정희가 케네디 대통령과 소파에 마주 앉아 한일조약을 선약함으로써 번복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었다.(리영희 『역정: 나의 청년시대』, 개정판 창비 2012 참조) 1952년 4월 패전국 일본을 독립시킨 쌘프란시스코조약에 따라 전승국이 아닌 한국은 식민독립에 따른 재산관계 정리권한 정도를 인정받은 채였다. 한일조약 조항 중 종전 이전에 발생한 인적 피해로 인한 청구권 문제는 일소한다는 문구 때문에 최근 국가가 관여한 비인도적 범죄행위에 따른 개인청구권 문제가 다시 부상하는 중이다. 한국도 일본처럼 역사과목은 사유하는 게 아니라 그저 연대기를 외우는 실정인 것은 마찬가지다. 또 한국 언론은 일본의 우경화된 면모를 과잉 대표해서 적대감을 조장하기 일쑤다. 평화를 위한 ‘최적해(最適解)’를 찾는 길은 곧잘 방해받는다. 그러니 저자의 조언대로 과거를 펼쳐놓고, 솅겐협정(Schengen agreement)으로 시리아 난민이 유럽으로 집단 이동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고 인간집단의 이동을 거시적으로 너그러이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최소한 이 책은 그러한 안목의 지평을 맛보여주는 데는 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