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대화

 

새로운 작가들의 젠더·노동·세대감각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강지희 姜知希

문학평론가.

 

서영인 徐榮裀

문학평론가.

 

이철주 李哲周

문학평론가.

 

왼쪽부터 강경석 서영인 강지희 이철주 © 강민구

왼쪽부터 강경석 서영인 강지희 이철주 © 강민구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강경석 (姜敬錫)

강경석(사회) 이번호 대화에서는 서영인 강지희 이철주 세분의 문학평론가를 모시고 최근 몇년 사이 두각을 드러낸 신진 소설가들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려 합니다. 대강의 지형을 스케치하면서 평가와 전망도 빼놓을 순 없겠지요. 공교롭게도 주로 데뷔 5년 이내 작가들의 최근 1~2년 내 발표작들을 중심으로 대화가 진행될 텐데, 빠진 작가와 작품도 많겠습니다만 효율을 기하기 위해 오늘의 토론주제를 중심으로 한정했다는 점 미리 밝혀둡니다. 이번 대화를 계기로 더 풍성한 논의가 이어진다면 바랄 나위 없겠지요. 돌이켜보면 지난 몇해 사이 우리 사회가 많은 변화를 겪은 만큼 새로운 작가들도 거기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사회변화 차원의 주요의제들인 젠더의식이나 노동에 대한 감각, 세대인식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펴보는 게 이번 대화의 중요한 주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서영인 말씀하시는 변화라는 것이 한 방향으로 묶이지는 않는다는 점을 전제하고 제 인상을 말하자면 개별화된 자기주장과 자기발화가 뚜렷해졌다는 게 느껴졌어요. 사회적 구조의 문제를 체감하면서도 ‘연대의 공동체’가 느슨해진 세상이니까 그럴수록 자기의식이 부각되는 것 같아요.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나는 어떤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가 같은 생각이 첨예해지는 거죠. 그리고 이런 개별적 발화들이 사실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가 더 견고하게 체계화되는 만큼 개인은 개별화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 ‘개인’을 천착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 더 적실한 리얼리티가 될 수 있겠죠.

 

강지희 최근의 소설들을 읽으며 제가 느낀 바는 감정에 침잠하지 않는 방식의 소설이 등장했다는 거였습니다. 이는 시대에 조응해서 소설의 전략이 변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한국문학의 우세종이던 많은 작품이 자학·모멸 같은 자기부정의 감정을 표출해왔죠. 이 감정은 더 큰 악을 방조하거나 가끔은 직접 악행을 저지르는 방식으로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순도 높은 치열한 자기반성 때문에 문학적으로 인정받아온 것 같습니다. 근래에는 자기반성과 성(性)적인 악행이 연결되는 지점이 많이 타파되었어요. 최근의 경향은 사회적 맥락과 정보들이 직접적인 인용을 통해 작품에 기입되면서 이성의 벽을 구축하거나, 아니면 명랑하고 경쾌하게 풍자성을 강화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전 소설보다 훨씬 사회에 밀착된 것 같아요. 또, 다양한 젠더적 삶의 양상이 드러나는 것도 눈에 띄어요. 성소수자의 삶과 고민이 이전보다 구체적으로 또 섬세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젠더를 공적인 지평에서 바라보려는 새로운 시선의 등장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해요.

 

이철주 신자유주의를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해온 이른바 ‘밀레니얼세대’는 그 이전 세대들이 지녔던 희망과 자신감을 대부분 상실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게 결정돼 있다는 인식이 이들 세대의 뿌리 깊은 기본 태도가 되었죠. 물론 그 수용과정 자체가 결코 평탄치는 않았을 겁니다. 자본의 바깥에 서서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의 상처와 울분에 대해 토해내고 싶은 갈망은 있지만 그걸 현실화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죠. 그래서인지 최근 작가들에게는 다변(多辯)이 잦은 것 같아요. 물론 감정을 신파로 빠뜨리지 않고 풀어내는 효율성도 지니고 있고요. 삶의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 인물들의 상처를 풍부하고 강렬하게 그려내되 그 상처가 포함하고 있는 자기모순이랄까 끝끝내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집마저도 날카롭게 되찌르는 균형감각이 있습니다. 사회의 실상을 단순 해명하는 방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인을 위로해주는 것도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젠더라는 ‘기본값’

 

강경석 이제 첫번째 주제로 들어가보겠습니다. 강지희 평론가께서 언급해주신 젠더의식의 변화부터 시작해볼까요. 페미니즘문학이 근래 큰 각광을 받고 있는데, 다만 이게 완전히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얘기하는 분위기는 약간의 조정이 필요할 듯합니다. 1990년대 이래 ‘여성문학’은 내내 우리 소설의 주류였으니까요. 가시성이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는 측면은 분명히 있지만요. 퀴어문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젠더의식의 변화와 관련해 짚어볼 대목입니다. 사전모임에서 서영인 평론가가 얘기한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젠더의식이 일종의 ‘기본값’이 된 사회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는 듯도 합니다.

 

강지희 (姜知希) 문학평론가.

강지희 (姜知希)

강지희 여성작가가 썼다고 해서 모두 여성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말씀하신 것처럼 젠더의식의 변화와 함께 근래 페미니즘문학의 부상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띱니다. 사소한 지적입니다만 최근 한국문학에서는 ‘퀴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는데 ‘퀴어=동성애’가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랬을 때 비이성애로 포괄되는 다양한 정체성 가운데 바이섹슈얼 같은 경계의 존재는 누락되거나 부차적으로 취급될 수 있으니까요. 퀴어를 외부의 범주로 둘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퀴어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식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소설을 독해하는 면에서도 작중인물의 뚜렷한 퀴어 정체성을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지 않더라도 소설 전반에 깔린 젠더적 문제의식을 읽어내는 게 중요한 작업이라고 봐요. 예컨대 김지연의 「작정기」(『문학동네』 2018년 가을호)에서 화자와 친구 ‘원진’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감과 수치는 표면에는 두드러지지 않지만 기실 성적 지향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잖아요. 장류진의 「잘 살겠습니다」(『현대문학』 2018년 12월호)에서 ‘빛나 언니’에 대한 불편함이 직장 안에서의 남녀차별 문제와 계속 만나면서 더 증폭되거나 수그러드는 지점도 있고요. 더불어 제가 주목하는 작가는 SF소설을 쓰는 김초엽입니다. 과학자인 할머니가 과거를 회상하는 소설들이 좋았어요. 나이 든 여성이 과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현자로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거든요. 이런 설정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죠. 「관내분실」(『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허블 2018)은 도서관이 죽은 이의 영혼과 직접 접속하는 통로가 되는 미래에 대한 상상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출산과 육아에 따르는 여성의 정신적 고립 문제나 경력단절 같은 현재의 사회적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요. 아이를 키우도록 프로젝트에서 빼주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배려와 배제가 교착된 관성화된 사고를 우회적으로 비판합니다. ‘엄마’라는 개별적인 존재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추적하는 방식도 매력적이죠.

 

강경석 SF로 ‘모성’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정소현의 단편 「양장 제본서 전기」(『실수하는 인간』, 문학과지성사 2012)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SF 장치가 주는 남다른 효과가 있겠지요?

 

서영인 (徐榮裀) 문학평론가.

서영인 (徐榮裀)

서영인 SF소설이기 때문에 생략할 수 있는 면도 있다고 봐요. 이를테면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려냈다면 극심해졌을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 같은 거요. 사실 딸은 아버지를 ‘당신’이라 부를 만큼 아버지에 대해서 적대적이죠. 그러나 엄마와 딸의 이야기가 중심이라 ‘여성’ 과학자인 딸과, 일하는 ‘여성’이었을 엄마 사이의 관계를 찾아가는 서사에서 아버지는 미워할 존재도 아니고 문제의 원인도 아닌, 구체성의 차원에서는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 내 아버지의 성역할이 없을 수는 없는데, 아버지는 엄마를 엄마이게 하는 인덱스를 지우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의 상징 같은 거죠. 성차나 가족 내 역할 등을 설명이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솜씨가 흥미로웠습니다.

 

이철주 (李哲周) 문학평론가.

이철주 (李哲周)

이철주 인덱스를 상실한다는 설정 자체가 굉장히 상징적이죠. ‘김은하’라는 개인을 설명해왔고 앞으로도 설명해줄 기존의 온갖 인덱스가 지워졌기 때문에, 비로소 ‘어머니’가 아니라 한명의 여성으로서 김은하를 추적하게 되잖아요. 현실에서 겪는 첨예한 젠더적 문제의식을 매끄러운 상징적 장치들로 형상화한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초엽의 소설들에서 이러한 설정을 뒷받침하고 있는 ‘물질언어’라는 모티프도 중요해 보입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SF라는 가상의 설정 속에서라면 언어에 대한 어떤 원형적 심상 같은 것도 구체적인 장치로 대상화할 수 있잖아요. 물론 그 반대편에는 ‘시간의 빈틈’ ‘논리의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 남성적인 과학·지식의 언어가 있습니다. 물질언어는 이와 대비되는 여성적 언어라며 이분법적으로 단정 지을 필요는 없겠지만, 단순히 현실차원에서의 젠더 문제뿐만 아니라 ‘남성적’ 언어와 논리의 세계에 대한 명확한 대립의식 속에서 김초엽의 SF 세계관이 형성돼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강경석 SF장르와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결합한 김초엽과 조금 다른 차원에서 퀴어 문제를 일종의 세태소설적으로 다룬 김봉곤이나 박상영의 몇몇 작품도 젠더의식의 차원에서 흥미로운 토론거리를 안겨주는 듯합니다.

 

퀴어서사의 보편성

강지희 그간 박상영 소설에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말한 ‘캠프 미학’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해왔어요. 엄숙함에 반대하면서 연극적이고 과장된 감수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희극적 세계관에 가까운 캠프 미학의 핵심은 ‘역할 수행자’로서의 존재 방식에 있습니다. 박상영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을 적극적으로 연출하고 연기하며 자기 패러디적으로 삶을 구성해나가죠. 넘쳐나는 감정에 푹 젖으며 가볍게 자신을 연출하고 너절한 인생을 환멸하면서도, 일순간 찾아드는 순도 높은 눈물 한 자락을 보여줘요. 그걸 보다보면 퀴어한 삶의 양식이 특정 인물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겹쳐진다는 생각도 듭니다. 근작 「우럭 한점 우주의 맛」(『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에서는 진정성의 세계를 살아가는 ‘형’과 캠프적 감수성이 충돌하면서도, 눈물의 중력이 좀더 느껴져요. 시대착오적으로 과거 운동권의 세계를 살아가는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하기에 끌어안고 깊이 상처받으면서, 기독교인이자 암환자인 어머니와의 극복할 수 없던 관계에도 변화가 찾아드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철주 박상영은 물론 퀴어서사로 주목받은 작가이지만, 단순히 소재 차원에서만 논의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퀴어에 대해 끊임없이 토해내는 중심인물의 발언 자체에 휘둘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가령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문학동네 2018)를 보면 이성애자들이 대상화한 퀴어영화가 아니라 진짜 퀴어영화를 찍겠다던, 한때는 야심에 불타올랐던 ‘나’가 등장하는데 이 ‘나’의 목소리를 근거로 박상영의 퀴어서사가 지향하는 바를 진단하는 것은 조금 성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히려 작품을 읽고 나면 ‘나’ 역시도 퀴어를 대상화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까요. ‘나’는 퀴어의 자리에, 현실에 타협하여 자본에 예속된 지금의 ‘나’와는 정반대되는 어떤 순수성을 위치시켜놓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정상성의 영역에서 보면 지극히 난잡하고 깊이도 없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더라도 말이죠. 그러나 박상영의 서사는 그런 순수성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순수성이 처절하게 무너지고, 들키고 싶지 않았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리에서 멈추죠. 달변으로 토해냈던 욕망들마저 무참히 무너져내리는 실패의 과정이 박상영 소설의 퀴어서사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로 끝나는 냉정한 자기응시에 도달하기 위해 ‘퀴어적’ 설정들을 활용한다는 느낌이 강하죠. 물론 박상영이 늘 퀴어적 소재를 선택하는 것도 아니지만요.

 

강경석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는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작품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인생에 대한 복합적인 시선이 반영된 것 같아요. 우주라는 말도 처음에는 뜬금없는 관념에서 시작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세상과 삶 자체가 지닌, 해명하기 어렵지만 감지되는 것으로서 어떤 차원을 말한다고 생각되고요.

 

강지희 2000년대 소설과는 다르다고 느끼게끔 하는 건 박상영 자신이 ‘천진난잡’이라 표현하는 행동양식과 절제하지 않은 일상적 언어예요. 극도로 정제된 감성이 ‘오그라들어서’ 못 견디겠으니 발랄하고 경쾌하게 가겠다는 거죠. 피상적인 세계에 거리를 두고 심문하는 것은 오히려 쉬울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가는 대신 피상적인 세계에 적극적으로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그런 자신을 메타적으로 인식하는 순간들을 횡단하며 활기가 생겨나는 것 같아요. 2000년대 후반에 등장해 십년 가까이 이어져온 청년세대론에서 파급된 루저 감성이나 힙스터로서의 존재방식과 겹쳐지면서도 거리감각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다르죠.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서 마지막 순간에 엄마와의 관계가 기존의 화해 또는 이해와는 결이 달라지는 것도 이런 맥락 아닐까요.

 

서영인 수다스럽고 과장된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서 또 공감을 유발하는 리얼리티가 생겨나더라고요. 한국문학에서 적나라한 게이들의 세계가 포장 없이 드러나기가 쉽지 않았죠. 그럼에도 이 소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안에서 삶의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기 때문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단절의식은 확실히 있는 게, 지금까지 대변된 적 없는 ‘나’의 삶을 내가 직접 말하겠다는 의식입니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 “단 한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또한 구질구질하고 지질한 게 삶의 질서인 줄은 알지만 거기에 함몰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아요. 사과받고 싶다는 구절이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어요. ‘나 원래 엉망진창인 인간이야, 그렇지만 이런 나에게도 사과해줘, 너의 편견과 집착과 그 무례함을…’처럼 읽혔거든요.

 

강경석 김봉곤 소설 얘기가 아직 안 나왔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강지희 평론가가 언급한 ‘캠프 미학’에 더 적실한 사례라는 느낌도 받아요.

 

이철주 김봉곤은 박상영보다 퀴어라는 문제의식에 훨씬 더 밀착해 있죠. 거리감의 문제인데, 박상영 소설은 퀴어라는 시선을 경유하여 무엇을 말하려는가가 초점이라면, 김봉곤 소설에서는 퀴어로서의 삶 자체, 퀴어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해 보입니다. 모멸감과 사랑의 가치 사이에서 고민하다 마지막에는 사랑으로 가죠. 지금의 내가 싫지 않고, 당신으로 인해 내가 겪고 있는 모든 혼란과 뒤엉킴과 열패감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지금 이 순간이 좋다는 식으로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인정하지 못했던 시절을 지워버린 느낌이 좋다는 이야기도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김봉곤의 서사는 자신이 ‘선택한’ 퀴어의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성해왔던 순간들을 기록하고 증언하려는 것 같아요. 스스로를 긍정하려는 어떤 열망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강경석 김봉곤 소설이 좀더 ‘고고한’ 면이 있습니다.(웃음)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결말에 유행가를 틀어놓고 막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그럴듯하죠. 논리적으로는 풀리지 않는 모든 갈등을 마치 주사(酒邪)처럼 그야말로 ‘우주적으로’ 해소해버리는 장면이에요. 그에 비해 김봉곤의 인물은 「시절과 기분」(『21세기문학』 2018 봄호)의 마지막 기차 타는 장면에서 이어폰을 끼고 일본 포크가수의 음악을 들으며 사색에 들죠. 「디스코 멜랑콜리아」(『여름, 스피드』 문학동네 2018) 같은 작품하고 연결해보면 김봉곤 소설에는 중요한 두 축이 있어요. 지방과 서울, 게이 정체성을 깨닫기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가 거기에 겹쳐 있죠. 그게 핵심인 것 같아요. 그 양자 사이에는 단절이 전제되어 있는데, 그 단절 이전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 구조인 거죠. 「시절과 기분」에 등장하는 ‘구여친’ 혜인이 사실 ‘훌리건천국’이라는, 정치적으로는 전혀 ‘올바르지 못한’ 웹사이트의 열혈 회원이고, 거기다가 반수에 재수, 삼수까지 불사하는 세속적 학벌 맹신이 있는 사람이니 현실에서는 보기에 따라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있어요. 그런데 소설적으로는 매력적인 형상이잖아요? 세속적 욕망에 대한 수긍과 이해가 동반되니까 인물의 실감이 살아나고 바로 그런 시선의 확보를 통해 오히려 세속의 패턴에 휘말리지 않은 채 작품이 고양되는 면이 있지요.

 

강지희 ‘단절’이라고 지적해주신 미묘한 위계질서가 건드려지는 지점들이 중요해 보여요. 「디스코 멜랑콜리아」에서는 지방과 서울의 격차만이 아니라, 신체적 차이로 몸을 거부당하는 순간의 두려움과 수치심도 잘 드러나 있죠. 근래 김봉곤 소설은 지금의 ‘나’를 규정하는 정체성과 불화하는 관계들을 회상해나가면서 더 농도가 짙어지고 있어요. 첫 소설집을 낸 뒤 변화 지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김봉곤은 「시절과 기분」이고 박상영은 「재희」(『자음과모음』 2018년 가을호)라고 생각해요. 두 작가 모두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벌어지는 사랑 혹은 그 문화적 특이성을 넘어서서, 헤테로 여성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따뜻한 고심을 보여줘요. 김봉곤은 ‘엑스-헤테로’ 시절이라 표현하면서, 그 시절에 만난 이성친구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순순히 수긍하며 다시 관계를 새롭게 이어나가요. 「재희」의 화자는, 성관계 없는 친밀한 동거인인 여자친구의 임신중절수술을 위해 산부인과에 동행했을 때 겪은 수치와 자신이 비뇨기과에 갔을 때 게이로서 경험한 모욕을 겹쳐봅니다. 박상영은 이런 식으로 헤테로 여성과 게이 남성 사이에 가능한 공감과 연대를 그렸죠. 연대의 관계망이 느슨하지만 새롭고 넓게 형성되면서, 이들의 소설이 또 한 차원 깊어졌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영인 김봉곤과 박상영의 소설집이 2018년의 화제작이었죠. 그래서 통칭 게이소설이 젠더 문제의 스펙트럼을 본의 아니게 덮고 가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해요. 이 작품들이 현재의 문학에서 지니는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어서 ‘본의 아니게’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최근 한국문학에서 드러난 날카로운 젠더의식과 함께 읽힐 때 이 작품들의 의미가 더 풍부해지리라 생각하는데, 이들을 자꾸 페미니즘서사와 분리하려는 경향도 있거든요. 박상영의 등단작인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와 작년에 발표된 「부산국제영화제」(같은 책)는 특정한 입장에서 봤을 때 한 존재가 어떻게 이해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소라’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경박한 ‘관종’으로 보는 전 남친의 눈에 비칠 때와 스스로 화자로 등장할 때 다른 서사를 가집니다. 어떤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인간이 되고 다른 서사가 되는 거죠. 김봉곤의 「시절과 기분」에서 ‘혜인’ 같은 인물이 가진 생생함이나 설득력도 그런 맥락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주류의, 충족할 수 없는 욕망과 그것을 발산하면 할수록 못나지는 삶들도 가질 수 있고, 가져야만 하는 자기서사. 그 전체의 기반이 되는 성차별이나 인간에 대한 편견 등에 대한 현실적 인식체계에 주목해야 할 것 같아요. 문제의식이 거기서 출발하니까요.

 

강지희 김봉곤, 박상영의 등장 자체가 고마운 면이 있습니다. 한국문단에서 퀴어서사가 지금처럼 활발하게 읽히고 논의된 적이 없으니까요. 작년 말 두 사람이 함께한 인터뷰에서 “게이는 성소수자 가운데 가시화가 제일 먼저 되는 정체성이며,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다양한 성소수자의 이야기가 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경향신문 2018.12.23)는 이야기도 했더라고요.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김혜진이나 황정은의 소설들에 나타난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의 양식도 더 주목되면 좋겠습니다. 성소수자를 사랑하는 대상만 다를 뿐인 무해하고 선량한 이미지로 그려내야 한다는 편견 너머로 끌고 가는 좋은 서사들이에요. 또 드러내놓고 혐오와 위해를 가하는 방식이 아니라, 진심 어린 배려라 생각하는 호의가 어떤 구분선을 그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고요.

 

이철주 소재로서의 퀴어 자체가 대중들에게 이제는 좀더 친숙한 방식으로, 그러나 여전히 호기심의 영역 속에서 주목받는 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작 김봉곤, 박상영 소설의 매력은 개방적이고 때로는 난잡해 보이기까지 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지금 세대들의 감각에 맞는 연애담의 화법을 발굴해낸 데 있는 것 같아요.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절제되고 균형 잡힌 연애담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에 의해 매순간 돌출하고 동시에 잘려나가는 내면의 풍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죠. 우리 안의 퀴어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 젠더에 대한 논의로서 일차적으로 중요하겠지만, 퀴어로 굴절되어 들려오는 우리 모두의, 별로 대단할 것 없는, 그렇기에 너무도 중요한 보편적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으로 논의가 전환되었으면 좋겠어요.

 

노동의 자리는 어떻게 감각되는가?

강경석 이제 주제를 바꿔볼 텐데요, 박상영이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서 “사랑이 아름다운가”라고 자꾸 묻잖아요?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 게, 새로운 현실에 대한 일종의 근본적인 성찰 방식일 텐데, 젊은 세대의 직장과 취업 문제 그러니까 포괄적인 의미에서 노동에 대한 달라진 감각을 보여주는 작품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이 얘길 좀 나눠보죠.

 

서영인 요즘 유행하는 ‘워라밸’이라는 단어에서 시작을 해보면, 워크(노동)와 라이프(생활)가 분리되어 있다는 게 기본값이잖아요. 노동이 자기 삶을 영위하는 기본조건인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분리와 균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지금의 세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설에서도 불과 얼마 전까지 ‘취업난’ ‘청년실업’ 같은 현실의 어려움이 많이 토로됐다면, 지금은 취업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미 이 삶은 망했다는 인식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아요. 이걸 현실의 새로운 변화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예전부터 있어온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취업전선에서 밀려났다든지, 그럴듯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는 소외감과 박탈감, 또는 경쟁의 비정함 같은 것이 더이상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세희의 「가만한 나날」(『창작과비평』 2017년 겨울호) 같은 작품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일을 하고, 거기서 보람을 찾는다는 노동의 과정이 사실은 얼마나 살벌하게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죠. 나는 성실하게 일만 했을 뿐인데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상황이 오잖아요. 그 안에서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일해야 하고,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요. 「가만한 나날」이 시스템 안에서 노동의 가치가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김세희의 다른 소설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21세기문학』 2017년 가을호)는 풍자적으로 우스꽝스럽게 현실을 드러냅니다. 개량한복을 입고 자연식을 먹는 선배의 삶 자체가 생경한 이유는 ‘시스템 밖의 삶’이 배제된 곳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겠죠. 더이상 수용될 수 없는 삶이기 때문에 기괴하다 싶을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어색해요. 학창시절에 빛나는 사람이던 선배가 자기의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시스템 밖의 삶’을 나름대로 성실히 살아가는데, 스스로 자꾸 왜곡되어가고 있고, 자기 일을 하고 싶다는 ‘연승’의 기대와 희망은 시도하기도 전에 길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지죠. 거기에서 우리의 노동과 삶을 어떻게 견디면서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됩니다.

 

이철주 부끄러움과 경쾌함이라는 두가지 상반된 감정으로 노동에 대한 태도나 입장이 드러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어떻게든 경쟁에서 살아남았지만 생존했다는 사실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부끄러움에 집중하거나, 그것조차 현실로 받아들이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노동의 폭력성을 경쾌하게 굴절해내더라고요. 후자는 세태소설 같은 느낌을 주지만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 같은 작품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도 없습니다. 노동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집요하게 드러내는 것도, 명확한 풍자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미묘한 거리감이 인물의 내면을 지탱하고 있죠.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가 인사말이 되어버린 현실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도 명백히 거부하지도 않는 ‘나’는 단순하게 말하면 주눅 들지 않는 인간이에요. 조성진 해외 공연을 보기 위해 생각보다 큰 지출을 하며 “오늘은 월급날이니까 괜찮아”라고 되뇌는 ‘나’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하고 속된 인물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노동의 무게에 짓눌려 자기 삶의 가치를 포기하거나 눈치를 보는 인물은 아니죠. 하지만 비율로 따져본다면 김세희의 「가만한 나날」같이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과 부채감을 다루는 전자의 유형이 더 두드러집니다. 살아남기 위해 배제하고 잘라낼 수밖에 없었던, 때 묻지 않은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기록한 김유담의 「탬버린」(『21세기문학』 2017년 여름호)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죠. 모든 게 가능할 줄 알았던 20대 시절과 결별하며 처음부터 모든 게 결정되어 있었다는 자조적 인식에 이르는 박상영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젊은 세대가 처한 노동현실을 첨예하게 보여주려는 세밀한 관찰과 지금껏 이런 삶을 견디며 응어리진 마음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려는 통찰이 지금 노동의 자리를 날카롭게 되묻고 있었습니다.

 

서영인 장류진의 「잘 살겠습니다」에 나오는 ‘빛나 언니’는 인정투쟁과 경쟁시스템으로 짜여진 인간관계에 적응하지 못하고(않고) 무지한 척 그러한 세계와 자기를 차단하는 유형인데, 이 또한 어디로도 갈 곳 없는 현실을 잘 표상하는 것 같아요. 이 세계에서 소모되거나 소비되지 않고 삶과 노동을 어떻게 지킬지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그렇지만 움직일 수 없는 이곳에 우리 모두가 있다는 인식이 역설적으로 상호이해와 희미한 연대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에서도 선배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지만 마지막에 “함부로 웃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잖아요. 죽을힘을 다해 인정받으려 노력해도 입사동기인 남편과 연봉이 천만원 차이 나는 현실(「잘 살겠습니다」)에서 정말 자기 일을 통해 성공한다는 게 꿈 같아지죠.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배제되는 이 사회에서 모두가 같은 구조 위에 서 있는 개인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게 되고 이 ‘적막한 살벌’이 소설적 해결 방식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임솔아의 「다시 하자고」(문장웹진 2018.6.1)에서 ‘수희’는 소비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소비를 기획하는 ‘지은’과 “하루하루가 너무 달랐”지만, 지은이 “나 자신보다 내 마음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지금 젊은 세대가 각각 다른 위치에서 같은 방식으로 소모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강지희 「탬버린」을 보며 박솔뫼의 「안 해」(『그럼 무얼 부르지』, 자음과모음 2014)가 생각났어요. 최선을 요구하는 기성세대와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답답함이 노래방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게 비슷하죠. 그런데 「탬버린」에서 ‘송’의 말을 따라 탬버린의 존재를 확인시키듯 힘껏 흔들 때는 어떻게 해도 백점을 받을 수 없고, 결국 탬버린 없이 절절하게 목소리를 쥐어짠 끝에 겨우 백점을 받게 되죠. 소설 속에서 탬버린은 세계의 질서와 어긋나 있는 자유로운 유희의 욕망을 상징하는데, 결국 화자는 탬버린을 내려놓음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 승인받게 됩니다. 박솔뫼의 소설에서처럼 ‘필경사 바틀비’ 식으로 행하는 ‘무위’의 저항방식이 이 시스템하에서 더이상 통용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듯했어요. 이름을 계속해서 바꾸는 정도의 ‘리셋’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임솔아의 「다시 하자고」의 현실이나, 시스템에 어떻게 길들여지는지를 보여주는 「신체 적출물」(『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도 비슷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것 같고요. 「신체 적출물」에서 ‘은하’가 자신의 잘린 발가락을 가져가려 할 때, 언니인 ‘은지’는 그 행위의 기회비용을 구체적으로 계산해주지요. 그런데 소설은 은지의 방식이 잔인하다고 일방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아요. 그 구체적인 금액의 내역을 세세하게 듣다보면 독자로서는 은지의 방식이 합리적이라는 느낌을 받으며 끌려가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자연히 인간성이나 품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가 불가능해지는 지점까지 내려간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압도적인 학살이나 재난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했지만, 신체의 단속이 교묘해진 시스템하에서는 이미 쓸모없이 적출된 신체의 일부를 위한 슬픔과 욕망에 시간을 내어주는 건 비합리적으로 인식되는 상황이 오는 거죠. 이 또한 노동현실과 연결해 독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경쟁사회 안의 ‘이상한’ 활기

강경석 김유담의 「탬버린」이나 김세희의 「가만한 나날」에서 노동과 관련해 생각할 거리 중 하나는 ‘경쟁’ 같아요. 그런데 이 경쟁의 규칙이라는 게 자주 불합리하지만 다른 한편 개인의 입장에선 압도적이잖아요. 시스템의 꼭두각시가 돼버리기 십상인데 그렇다고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고 그렇게 살 수만은 없다는 점을 이 작품들이 잘 보여줍니다. 「신체 적출물」의 동생도 「탬버린」의 ‘송’도 그렇죠.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만한 나날」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노동에 대한 몰입인 듯합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월급 나오고 똑같이 살 텐데 무언가 더 높은 성취를 이루려 하는 거죠. 그런 힘은 오히려 자본주의가 경쟁논리 일색이라는 지점을 초과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려는 욕망 때문에 그러는 것처럼 볼 수만은 없잖아요?

 

강지희 맞아요, 「가만한 나날」에 윤리적인 반성이 나오지만 거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는 않습니다. 윤리적인 지점을 초과하는 미묘한 활기가 있어요.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에도 그런 게 잘 드러나고요. 그 활기는 현실에 저항하는 방식에서 오는 게 아니라 현실에 순응하는 와중에 터져나옵니다. 이들의 직장생활을 보면 노동 자체의 고단함이 문제는 아니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상급자의 포즈가 은밀한 권위주의와 결합하며 절묘한 모욕감과 차별이 발생해요. 이런 억압하에서도 인물들은 어떻게든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성공하고, 심지어는 누군가의 모욕감으로 달성된 성과물을 그 바깥에서 소비자가 되어 누리기도 하죠. 시스템에 편입하며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최대한 소거하면서 마이너스의 방식으로 과잉 발생하는 이상한 활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강경석 저는 그런 게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노동과 체제에만 매몰되지 않고 거기를 초과하는 어떤 측면이 생기는데, 그게 문학적인 재현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모종의 주체적 감각 없이는 나오기가 힘든 것 같아요. 과거의 노동문학이 각성된 노동자의 연대를 통해 거기에 도달한다면 지금 소설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오늘날의 주인공들은 이미 다 알고 있죠.

 

강지희 마크 피셔(Mark Fisher)가 『자본주의 리얼리즘』(한국어판 리시올 2018)에서 이야기한 ‘반성적 무기력’(reflexive impotence)이 떠오르네요. 사태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또한 너무 잘 알기에,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함에 빠져 있는 상태 말이에요. 어떤 직장도 나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나의 사적인 생활을 따로 지키지 못한다면, 일이 말 그대로 기쁨과 슬픔의 모든 것이 된다면 삶이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세대의 감각이랄까요.

 

이철주 「가만한 나날」의 주인공은 문학에 대해 조금 복잡한 감정을 지닌 인물입니다.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내 자리’를 찾으려 했지만 번번이 ‘타고난 실용적인 목소리’에 가로막혔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나’에게 돈도 벌고 인정도 받는 방식으로 자아를 실현할 기회가 처음으로 “운이 좋게도 한방에” 주어진 겁니다. 강지희 평론가께서 말씀하신 ‘이상한 활기’는 그렇기 때문에 이미 생각보다 깊은 내상을 경유한 활기인 거죠. 주인공이 ‘최적화 블로그 리뷰’ 업무에 빠져들면서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예린에 대해 묘한 적대감을 보이는 것을 단순히 회사의 경쟁 시스템 때문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물이 문학의 세계로부터 느꼈던 소외감과, 자본시스템의 부적응자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그 역상으로 꼭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이 기회에 집착하면서 또다른 자아인 ‘채털리 부인’을 만듭니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낸 자아가 허깨비에 불과했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환멸에 휩싸이고 결국엔 “나는 어디에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고백으로 끝이 나지만요. 노동현장이 제시하는 선택적 배제의 폭력성이 오히려 수용할 만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상한 지금의 노동 현실을 꼬집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서영인 무기력 속의 활기이든, 내상이 깊은 활기이든 그런 활기조차 끊임없이 죽이는 방식으로 시스템이 만들어지죠. 「가만한 나날」에서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도 대기업의 홍보를 대행해주는 하청업체로 그려져요. 거기서 영혼을 갈아 넣어서 거짓 포스팅을 올리는 일을 하죠. 그 피라미드를 생각해보면 자기가 열심히 일하는 것 자체가 너무 짜증 나는 일일 테고, 그걸 깨닫는 순간 활기는 거품처럼 꺼져버려요. 이런 디테일을 잘 살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식상해지는 측면도 있어요. 일종의 패턴화인데, 사실 삶이 다 그래요. 「신체 적출물」에서도 동생과 언니가 갈등하지만 정작 문제는 입국 심사대에서 너무나 간단하게 그 ‘신체 적출물’이 폐기되어버리는 것으로 끝나잖아요. 이 또한 어떤 열정이 순간적으로 꺼져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는 내가 끝끝내 버려서는 안 될 존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복해서 좌절당하는 서사 속에도 무언가를 지키고 몰두하는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까지 상쇄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게다가 열심히 살면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공동체적 기대가 이미 다 무너졌잖아요. 반복된 경험을 통해 구조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나를 바꾸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노동착취의 구조라는 기반을 인식하는 주체들 사이에는 경쟁의식이 아니라 동료애 같은 게 생깁니다. 저 다양한 방식들과 공존하지 않는다면 나의 삶도 위태롭다는 의식 같은 거랄까요.

 

강경석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에 등장하는 선배의 이른바 ‘대안적’ 삶도 실은 지금 말씀하신 시스템 안에 포섭돼 있죠. 이른바 대안적 삶에 대한 위화감이 작품 문면에 가득한데 그렇다고 마냥 냉소만은 아니라는 점이 새로운 것 같아요.

 

강지희 네, 냉소나 조롱은 없지만 선배의 대안적 삶이 결국엔 어떤 탈출구도 되지 못하는 걸 확인한 실망감이 보여요. 2000년대 소설 가운데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냉소적 주체’를 잘 보여준 작가가 정이현입니다. 정이현 소설 속 인물들은 속악한 방식으로 시스템에 합류해서 자신만은 살아남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지만 결국 그 기대가 배반당하는 지점을 보여줬어요. 이런 주체의 반대편에는 시스템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박솔뫼 소설의 주체들도 있었고요. 이 두가지 형태가 대립되는 양상을 보였다면, 2010년대에 들어서는 전체적인 시스템에서 개인이 그 틀을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게 더 강력해진 흐름 같아요. 「신체 적출물」에서 마지막 순간에 시스템에 의해 두 사람의 대립된 욕망이 가볍게 정리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처럼요.

 

서영인 그래서 입국 시스템에서 차단당하는 순간 언니와 내가 결코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신체 적출물」) ‘공통성’이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언니가 보여주는 ‘계산의 세계’와 동생이 보여주는 ‘자기존엄의 세계’가 끝까지 대립하는 듯하지만 결국 시스템 안에서 같이 마모되고 같이 관리되며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니까요. 그래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주체들의 싸움은 좀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이야기될 만한 단서일 것 같습니다.

 

강경석 예전에는 세계를 이기겠다는 의식과 세계를 거부하겠다는 의식이 분리돼 있었다면 요즘 작가들은 그 둘을 모두 떠안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과 작품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면, 작품을 현실적인 문제에 착목해서 파고드는 방식이 있고 아니면 작품이 지향하는 상징과 알레고리가 우세한 작품이 있는데, 임솔아의 작품은 후자의 성격이 강한 듯해요. 현실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탐색하기보다는 거꾸로 작가의 세계관을 효율적으로 투영하는 장치가 된다는 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철주 「신체 적출물」에서 동생이 처한 상황이 이해는 되지만, 이후의 전개나 사건의 구성이 개연성 있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아요. 실제로 있을 것 같은 사건이라기보다는 알레고리에 가깝죠. 발가락을 잃었다는 것도 마음껏 도로를 질주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던 청춘에 대한 상징적 단죄로 읽히잖아요. 그 적출물을 언니는 두려워하고 동생은 계속 가까이 두려는 것도, 이런 알레고리 차원에서 바라보면 쉽게 이해되죠. 그런데 적출물이 정말로 동생에게 의미있는 거라면 방부처리를 하면 될 텐데 그러지도 않고 그냥 갖고만 있어요. 부패하고 훼손될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갖고는 있겠다는 거죠. 마지막에 공항에서 방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적출물을 뺏겨버리는 장면은 당혹스럽거나 허탈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당연한 귀결로 읽혔습니다. 이미 적출되어버린 청춘은 부패되어 폐기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동생은 어쩌면 그 부패의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있고 싶어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처음부터 이 인물은 정해진 귀결을 향해 초연히 달려온 것 같았고, 이는 자본의 시스템 속에 길들여지며 잘려나간 무구성, 혹은 뜨거웠던 열정의 순간들을 떠나보내려는 젊은 세대들의 상징적 제의처럼 느껴지기도 했죠.

 

‘나’들의 세대감각

강경석 아무래도 신진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다루다보니 아까부터 심심치 않게 세대감각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 것 같습니다. 세대론적 구획을 해보자는 것으로 오해될 여지도 있지만 신진 작가들이 느끼는 시대감각 또는 자기 세대에 대한 이해방식을 점검해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이철주 세대를 인식하는 차원에서 보자면 진정성이라는 가치가 붕괴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세대를 어떻게 긍정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김봉곤은 기존의 문학에서라면 문학적이지 않다고 여겨온 부분들까지 전부 가지고 들어와 자신의 정체성, 자기 세대의 정체성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설명하죠. 적극적인 단절의 방식을 사용합니다. 물론 친절하진 않습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은 배려하지 않는 배타성, 그 배타적임으로 생기는 내밀함”(「Auto」, 『여름, 스피드』)을 철저히 주장하기도 했으니까요. 자기 세대를 구성하는 기존의 정체성을 거부하다보니 사실 여부도 무시됩니다. “찾을 수 없는 과거를 기원하는 대신, 나는 일본으로 떠나버렸”다며 80년대 일본 대중문화들로 자기 세대의 풍경을 사후적으로 만들어내기도 하죠. 정체성의 재구성이 중요한 퀴어서사이기에 두드러져 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자기 세대만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고유성 자체가 상실된 상황에서 자기 세대에 대해 발언하는 중요한 한 방식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경석 진정성이 붕괴했다는 명제는 단정하고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작품에서 진정성을 많이 보거든요.(웃음) 굉장히 우세했던 진정성의 문학세계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게 붕괴됐다거나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다만 진정성이라는 게 좋은 문학의 필수요건인 것처럼 여겨지던 분위기가 많이 바뀌긴 했습니다.

 

이철주 물론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소설 텍스트 자체에 진정성이 없다기보다는 추구해야 할 삶의 지표나 모델이 없다는 다소 일반적인 맥락에서 말씀드렸어요. 논의된 작품들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조건을 더 핍진하게 드러내는 발화가 무엇일지 고민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런 면에서 충분히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지희 이철주 평론가 말씀대로 우리 세대는 너무 많은 문화들이 펼쳐진 상황에서 개별 취향들을 존중받으며 자라왔으니까요. 1990년대 김경욱, 김연수, 김영하가 엑스세대를 표방하는 방식으로 공통된 하위문화를 구성했는데 지금은 그런 방식이 불가능할 것 같아요. 오히려 노동에 짓눌린 현실에서 자아를 외부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있고, SNS를 비롯해 자아표현의 매체가 많아졌지만 포장된 나를 세련되게 전시하는 방식을 골몰할 때 발생하는 괴리감이 지금의 공통적 세대감각이라고 봅니다.

 

서영인 실제로 박상영 소설에는 인스타그램이 정말 많이 나오죠. 포장되고 전시된 것들을 내세우고 싶지만 그럼에도 그게 자기가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아는 거예요. 이른바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집착하는 ‘자아 과잉’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게 진짜 내가 아니라는 걸 그들도 알아요. 전시되는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간극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그걸 만들어내는 과정을 소설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겉보기에 명랑하고 경쾌한 ‘세팅’의 이면에 온갖 너절한 감정이 도사린 그 간극 자체가 자기인식 아닐까 싶어요. ‘우리 세대에는 공통된 문화가 없다’고 강지희 평론가께서 말씀하셨죠. 윗세대 입장에서 말씀드리면(웃음),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 나오는 연인인 ‘형’을 보면서 실제로 이전의 세대가 그랬다는 리얼리티 또한 느끼기는 힘들었어요. 90년대 중반 학번쯤 되는 그가 그 세대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거든요. 강지희 평론가께서 말씀하셨듯 세대적 공통성이 없다는 것이 세대적 특징이라 할까요. 그 ‘형’ 역시 세대를 대표한다는 세대성은 없어요. 다들 ‘올바른 지성’ ‘올바른 인식’을 추구하는 삶은 이전에만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우리 세대는 대변된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감각이 작용하죠. 그래서 우리 세대의 언어를 찾고자 하는 것 자체가 무척 중요해 보입니다. 젠더감수성은 기본값이라고 말했듯이 차이와 차별이 무엇을 소외시키는지를 섬세하게 알아차려요. 그에 대한 감각이 기본적으로 소설에 장착된 것 같습니다. 박상영과 김봉곤의 소설이 자유분방하고 ‘반듯하지 않은’ 이야기를 펼쳐놓지만 누군가를 불쾌하게 한다거나 누군가를 배제한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 것도 그 예시입니다.

 

이철주 윤리적 감수성이 요즘 젊은 작가들의 공통감각이 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윤리적 문제의식이 요즘 세대 작가들만의 특징은 아니죠. 다만 그 윤리적 감각들을 형상화하는 서술자의 위치에는 차이가 있어요. 가령 박솔뫼의 소설에는 ‘아니다. 나는 바깥에 있다’라는 의식이 뚜렷하죠. 문제적 상황을 냉정하게 꿰뚫어보는 외부적 시선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박상영의 소설에서 이런 외부적 시선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그 상황에 완전히 연루돼 있음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죠. 김세희나 김유담의 소설들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아닌 것은 분명히 아닌데 그럼에도 이미 너무 깊숙이 들어와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지점을,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삶과 노동의 공간에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서영인 세계에 대한 자기인식이라는 차원에서 지금 세대의 특징을 좀더 생각해 보고 싶은데요, 속악한 세계를 넘어서는 성찰의 주체인 ‘자아’가 고전적 개념이라면 1990년대에는 이를 ‘내면’이라는 말이 대체합니다. 세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내면이 존재한다는 거죠. 2000년대 이후에는 세계와 대척되는 지점에 있는 내면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로 내가 포함되어 있고, 그 세계의 상처가 나를 통해 경험되고 극복된다는 밀착감이 있어요. 이를테면 ‘마음’ 같은 단어가 ‘내면’이라는 말을 대체했죠. 「시절과 기분」에서 빌려와 ‘기분’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분이라는 건 명확히 규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주관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뭐라 꼬집어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감각을 함께 눈치 챌 수는 있잖아요.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미주알고주알 따져 묻지 않아도 어떤 기분 안에는 이미 그 기분을 만드는 공통적 전제가 있고, 그 기반 위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자기의 언어를 찾는 그런 공통성과 개별성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강경석 ‘개별성에 기반한 공통성’이라는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어떤 길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는 없더라도 이게 아닌 건 확실히 알겠다는 마음이죠. 그럼에도 아무것도 바꿀 수 있는 게 없다고 단정하는 세계가 있을 것 같고, 반대로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열어놓고 그것을 추구하는 세계가 또 있을 것 같습니다.

 

강지희 인스타그램 감수성에 대해 덧붙이자면, 박상영뿐만 아니라 김세희나 장류진의 소설 역시 그 자장에서 탄생한 것 같아요. 세계의 지배적 규율과 개인의 욕망이 충돌하고 대결한다는 느낌보다는, 속물성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방식들의 미묘한 차이가 더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더 세련된 화법과 상식적인 규율의 수행을 능숙하게 익힌 화자 안에 미약하게 남아 있는 윤리적 분열이, 서툰 인물을 만나 증폭된달까요.

 

강경석 그들의 작품이 고전적이랄까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외양을 띠고 있어서 잘 안 드러났던 면모 같아요.

 

강지희 시대에 잘 적응하지 못한 주변 인물을 이질감을 가지고 묘사해나가면서 세계와의 접촉면은 더 넓어지고 밀착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기존의 세태소설을 상기시키면서도 좀 다르게 화자의 감정 자체는 축소되는 방향으로 재현방식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독자로서 감정이입도 훨씬 용이하고요.

 

서영인 다변의 박상영과는 반대 경우로 김지연의 소설에 대해 말해보고 싶어요. 김지연의 「내가 울기 시작했을 때」(『현대문학』 2018년 12월호)는 결말에서 ‘나’가 돌연 죽어버리잖아요. 등단작인 「작정기」에서도 죽음이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합니다. 설명될 수 없어서 죽어버리는 건데, 이 죽음이 자기의 말을 찾을 수 없어서 좌절했다기보다는 나를 설명할 언어는 없지만 그럼에도 언어가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읽혀요. 「내가 울기 시작했을 때」의 죽어버린 ‘나’의 애인은 은행의 추심과에서 일하며 매일 빚 독촉을 하다가 집에 와서 현미경을 보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일견 도피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심과 현미경 사이의 간극을 부정하지도 않아요. 설명될 수는 없지만 엄연한 현실인 거예요. 「작정기」에서 ‘원진’의 죽음도 모두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죽은 사람의 자기 항변이나 한탄이나 원망도 발화되지 않으니까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느낌이 더 강해집니다. 그렇게 현실 속의 자신을 표현해줄 언어를 계속 찾는 한, 세계와의 관계는 계속될 수밖에 없겠죠.

 

이철주 전망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전망 없이도 견딜 수 있는 어떤 단단한 자기응시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의 정체성을 속물성과 분리해 이해할 수 없는 요즘 세대들의 명징한 자기인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속물성이 있으니까 자기모멸도 하는데 과거처럼 나를 완전히 부수거나 기존의 가치를 갈아엎는 방식이 아니라, 풍부한 레퍼토리를 통해 내가 꿈꿨던 모든 것들이 속물적이었으며 나 또한 특별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객관화가 이루어지고 있어요. 숱한 자기모멸이 깔려 있지만, 그럼에도 배반당할 게 뻔한 이 세계에 왜 희망 내지 미련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 거리를 두고 바라보죠. 전망이 부재함에도 인물들이 어떤 불안감에 휩싸이기보다는 오히려 선명한 태도와 입장을 견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강경석 바로 그 태도와 입장이라는 게 전망일 수 있겠습니다. 소설에서 전망이 유토피아의 청사진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은데 아쉽게도 벌써 마쳐야 할 시간입니다. 신진 작가들의 최근작들에서 느낀 아쉬운 점들도 마무리 삼아 하나씩 짚어보죠.

 

이철주 악한 인물보다는 귀여운 인물이 많아진 것도 특징 같아요. 「우럭 한점 우주의 맛」에 등장하는 시대착오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윤리관에 사로잡힌 ‘그’나, 편견에 가득 찬 그의 선배 부부도 악한 인물은 아니잖아요.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의 동아리 선배 부부도 “우주의 기운” 운운하며 번번이 가르치려 드는 ‘꼰대’의 모습을 보이지만 그 궁핍한 모습 때문에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죠. 일상의 미시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폭력들에 민감해진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악인’ 역시 세속화된 것 같아요. 사회적 윤리의식이 그만큼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표현의 차원에서 어떤 한계를 스스로 긋는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극단적인 게 좋은 건 아니더라도 현재의 윤리적 인식이나 지평 전체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실험적인 상황을 소설이 현실보다 먼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많은 부담을 작가 본인이 안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물들이 얌전해졌습니다. 어쩌면 그편이 지금 현재의 문제를 더 적실하게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소설의 문제의식을 그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도 됩니다.

 

강지희 강한 흡인력을 지닌 최근 몇몇 소설은 독자들이 이미 감지하고 있는 시스템의 일면을 날렵하게 잘 포착해서 그려내는데, 그 틀에서 벗어나는 무언가를 찾아내 제시하는 상상력의 영역까지는 쉽게 이어지지 않는 듯해요. 소설의 배경이 현실적이고 공간적으로 좁혀져 있는 만큼, 소설과 세계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런데 이런 한계 자체가 사실 대안적인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지금의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사소한 최선들이 어떻게 거대한 구조의 문제를 덮어버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김세희의 소설, 주체의 병리화가 어떻게 사회 체계에 대한 물음과 정치화의 가능성을 배제하는지 보여주는 임솔아의 소설, 기술의 발전 속에서 오히려 소외당하는 인물을 놓치지 않는 김초엽의 소설 등 아직 소설집을 내지 않은 젊은 작가들로부터도 새로운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어 기뻤습니다.

 

서영인 소설만이 가능한 사유나 방향성이 있는데, 이런 게 시대와 행복하게 조우하면서 공감과 화해를 얻기를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일 수도 있어요. 지금의 소설은 독자의 욕망과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적 요구에 따라 쓰이고 있다고 할까요. 그 지점에 대한 고려나 해석이 아직 부족한데, 아마도 지금의 비평이 해야 할 일 중 하나겠죠. 그와 별도로 이번에 소설을 읽으며 ‘개별적 개인들의 연대’에 관한 주제들과 자주 만났고 그래서 연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꼭 확실한 위로를 주고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지는 못하더라도 너무나 공허한 이 시대의 개인은 어쩌면 연대 말고 할 게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 연대에 대한 감각이 소설 안에서 예민하게 다듬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실 독자에게 적대감에 대한 피로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작은 연대와 위로가 시대적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 연대의 지점이 세밀하게 탐구되어서 우리 시대 소설을 낙관하는 근거가 되어주면 좋겠어요.

 

강경석 이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놓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무엇보다 세분 참석자와 작품을 함께 읽는 과정이 기억에 남을 듯합니다. 훌륭한 작품은 복합적인데다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세상의 여러 측면을 보여주는데, 그런 미결정 상태의 실마리들을 찾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모두가 개별화된 듯 보이면서도 단순히 분산적이지만은 않고,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내걸지 않으면서도 체념적이지만은 않은 요즘 소설들에서 드물지 않게 단단하고 힘있는 표정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작품을 통해 한편으로 세상의 변화를 실감합니다. 긴 시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2019.1.31.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