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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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탄소가 아니라 사회를 바꿔라

 

 

한재각 韓在珏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소장. 공저 『시민 참여 에너지 시나리오』 『사회·기술시스템 전환』 등이 있음. hanclk@hanmail.net

 

 

청소년, 정치권을 질타하다

 

작년 10월 3일, 인천 송도의 박람회장 앞에 수십명의 청소년들이 모여들었다. 청소년들은 노란 우산을 들어 ‘1.5도’라는 글씨를 만들었다. 그들이 만들어 온 피켓에는 “봄과 가을을 돌려줘요” “우리는 제대로 된 기후정책을 원한다” “지구 온난화를 막아라” 같은 문구들이 씌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전세계 기후변화 국제협상의 과학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평가받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 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기후변화를 우려하는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IPCC 참가자들, 나아가 전세계 사람들에게 직접 들려주고자 모인 것이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거리에 나선 것이 한국의 청소년들만은 아니다. 작년 11월 30일 호주의 청소년은 더 과감했다. 만오천여명의 학생들이 ‘학교 파업’(School Strike)을 선언하고 등교를 거부하면서 시위에 나섰다. 스콧 모리슨(Scott Morrison) 총리의 ‘학생들은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경고 속에서도 감행된 시위였다. 시드니, 멜버른 등 24개 도시와 마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 시위에서 학생들은 석탄광산 개발 계획을 중단하고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생산을 전체 에너지의 100%로 하라고 요구했다. 호주 자원부 장관 맷 카나반(Matt Canavan)은 시위 참가 학생들이 “훗날 실업수당 행렬에 합류하는 방법만 배우게 될 것”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모두의 장래와 직결된 문제임에도 정치인들이 기후변화 대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좌절감을 느낀다”며 “기후변화로부터 우리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잠시 학업을 중단하는” 것뿐이라고 응수했다.1 이 대열에 벨기에 브뤼셀의 고등학생들도 합류했다. 올해 1월 10일, ‘기후를 위한 낙제’(Flunk school for the Climate)라는 슬로건을 내건 3천여명의 학생들은 차기 입법부가 기후변화 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도로를 점거한 채 EU 본부로 향했다. 이러한 청소년 행진은 독일과 스위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작년 12월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린 제24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4) 한복판에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주 금요일마다 학교 수업을 빠지고 스웨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는 15살의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가 COP24에 초대받아 190여개 국가 대표들을 향해 연설했다. 툰베리는 각국의 정치인들이 지지를 잃을까봐 말로만 ‘녹색의 영속적 경제성장’(green eternal economic growth)을 외치고 실제로는 “당신 자녀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고 직격하면서, “내가 걱정하는 것은 기후정의(climate justice)와 살아 있는 지구뿐”이라고 말했다.

이 연설은 기후변화를 자본주의체제가 야기한 문제로 인식하는 국제 기후정의 네트워크(Climate Justice Now)를 대표해서 이뤄진 것이었다. 툰베리는 지구 생물권(biosphere)이 자기 나라 같은 선진 산업국의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서 착취당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화석연료 채굴을 중단하고 평등을 위해 노력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기후정의운동의 오랜 구호인 “기후가 아니라 체제(system)를 바꾸자”고 외쳤다. 마지막으로 툰베리는 세계 지도자들에게 보살펴달라고 애원하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좋든 싫든 상관없이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곳에 왔”으며 “진짜 힘은 민중에게 있다”고 선언했다.2 그 민중은 이제 청소년의 얼굴을 하고 오는 중인지도 모른다.

 

 

목표는 1.5도, 현실은 3~4도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한국, 호주, 벨기에를 포함한 전세계 청소년들과 함께 살아내야 할 지구의 기후는 어떻게 변해갈까? 2015년 체결된 빠리협약에 따라서 세계 각국이 제출한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분석한 결과, 2030년 지구의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에 비해서 3도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다. 빠리협약에서 결의한 목표는 기온 상승을 2도 이내로, 가능하다면 1.5도 이내로 머물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각국의 목표를 하향식으로 결정했던 쿄오또의정서와 다르게 자발적으로 목표를 설정하여 제출하도록 한 방식에 따른 결과였다. 5년에 한번씩 진전된 새로운 감축목표를 제출하도록 정한 빠리협약에 따라 각국은 2020년에 감축목표를 다시 내놓아야 한다. 이때 2도 이내 상승이 가능한 감축목표를 다 함께 내놓을 수 있을까? 한국은 작년에 온실가스 감축 로드맵을 수정·보완했지만, 2030년 배출전망치(BAU) 대비 37%를 감축한 5억 3600만 톤만 배출하겠다는 기존 목표는 그대로 유지했다. 이 중 해외 탄소시장에서 배출권을 사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던 국외감축분 11.3%를 국내에서 감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변화가 일부 있었다. 그러나 2도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매우 불충분하다’는 국제기구들의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수세적인 변화일 뿐이다.

한국 청소년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인천 송도의 IPCC 총회에서는 ‘1.5도 특별보고서’가 결의됐다. 청소년들이 노란 우산으로 ‘1.5도’ 글자를 만드는 시위를 한 이유이기도 하다. 강력한 온실가스 감축목표가 자국의 경제를 위축시킬 것이라고 여긴 선진산업국들은 빠리에서 2도 목표로 타협하기를 원했지만, 땅이 해수면에 잠길 위험에 처한 나라들과 기후정의를 주장하는 많은 NGO들의 지속적인 요구가 이어졌다. 그 결과 가능한 한 1.5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당사국 총회는 IPCC에게 1.5도 목표가 2도 목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를 분석하여 제출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제출된 1.5도 특별보고서에 의하면,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기온이 1.5도로 상승할 경우에도 해수면 상승, 폭염, 가뭄과 홍수 등의 극단적인 기상 이변, 식량 생산 저감, 생물종의 감소 등 자연적·사회적 피해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2도로 상승하는 경우와 대비해보면 그 피해는 의미있게 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예컨대 전지구 평균기온이 2도 상승할 경우 북극해 얼음이 모두 녹을 가능성은 10년에 1번으로 높아지지만, 1.5도 상승의 경우 그 가능성이 100년에 1번으로 줄어든다. 또한 산호초는 1.5도 상승에서 70~80% 피해를 입지만, 2도 상승에서는 거의 전멸할 것으로 예측됐다. 자연 생태계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존하는 인간사회가 감내해야 할 피해도 줄어든다. 예를 들어 전지구 어업 수확량은 2도 상승의 경우 300만 톤 이상 감소하는 반면, 1.5도 상승에서는 그 절반인 150만 톤 정도로 줄어든다. 전지구 해수면 높이의 상승폭도 0.1미터 낮아지게 될 것인데, 해수면 상승으로 위험에 처할 인구수 역시 최대 천만명 줄어들 것으로 분석됐다. 기후 관련 위험에 노출되는 인구와 빈곤에 취약한 인구수 모두 2050년까지 최대 수억명 줄어들며, 물 부족에 노출된 세계 인구의 비율 역시 50%까지 감소한다.

물론 2도 이내로 기온 상승을 막는 것보다 1.5도 목표가 지구적 차원에서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2도 상승을 막기 위해서는 전지구적으로 인위적 이산화탄소의 순배출을 2075년까지 제로로 만들어야 하지만, 1.5도 목표에서는 제로 시점을 2050년으로 당겨야 한다. 이를 위해서 2050년 전력 생산 가운데 재생에너지의 비중은 70~85%에 도달해야 하며, 산업 부문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010년 대비 75~90%까지 줄여야 한다. 이런 노력은 에너지, 토지, 도시, 그리고 수송과 건물을 포함한 기반시설과 산업 시스템에서 이루어져야 할 빠르고 광범위한 전환의 일부일 뿐이다. IPCC는 이러한 전환이 “속도 측면에서 반드시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규모 측면에서는 전례가 없다”고 평가했다. 가능한 모든 감축 수단을 동원하는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상당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1.5도 목표를 위해서 전지구적으로 2015~2050년 연평균 약 9천억 달러의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2도에 비해 1.5도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에너지 관련 총 투자가 약 12% 이상 증가해야 하며, 한계감축비용은 서너배 높게 나타나는 것으로 분석됐다. 과연 이런 투자는 어떻게 가능할까.

 

 

탄소, 새로운 주인공이 길을 잃고 헤매다

 

마치 1.5도 특별보고서를 뒷받침하듯이 2019년 1월 18일, 북반구 러시아의 어느 지역은 영하 60도에 가깝게 얼어붙었고 남반구 호주의 한 지역은 50도 부근까지 끓어올랐다. 그 차이가 무려 110도 가까이 된다. 그러나 이 기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신될지도 모른다. 2008~2009년 세계 경제위기 때나 잠시 주춤했을 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처럼, 기온과 기상 이변의 최고 기록이 매년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IPCC 등이 지속적으로 예측해온 일들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후변화의 심각성이 점차 가시화되니—트럼프류의 ‘기후변화 부정론’이나 ‘회의론’과 계속 싸워가면서—문제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논의와 담론이 다양하게 자라나고 있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것이 ‘탄소’ 담론이다. 여기서 탄소란, 이미 많이 알고 있듯이, 과학자들이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원인으로 지목하는 대표적인 온실가스를 지칭한다. 하지만 원소로서의 탄소는 과학 문헌을 넘어 정책과 언론에서 기후변화를 설명하고 처방을 제시하는 상징으로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탄소경제, 탄소시장, 탄소유출, 탄소고착 같은 용어들이 그렇다.

그 사용법과 함의가 좀 혼란스러운 점이 있다. ‘탄소경제’라는 용어는 석유와 석탄 같은 화석연료를 에너지 기반으로 하여 운영되는 경제가 장기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는 점을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여기에서 ‘탄소’는 기후변화와 지속 불가능성을 야기하는 범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탄소시장’이나 ‘탄소거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제라는 적극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다. ‘탄소시장’은 기후변화를 비용효과적으로 대응한다는 목적으로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가스의 배출권을 설정하여 적절히 배분한 후 이를 거래하도록 하는 시장을 뜻한다. 배출자들은 매년 줄어드는 배출권 총량 안에서 기술 혁신과 효율적 경영을 통해서 탄소 배출을 줄이고 잉여 배출권을 거래하여 이익을 추구한다. 돈 냄새에 민감한 금융자본들은 이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에서 새로운 이윤 추구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이들에 의해 ‘탄소경제’가 창출된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면서 기후변화의 주범인 탄소가 시장에 들어서자 갑자기 대접이 달라지고 몸값이 치솟는 묘한 상황이 된다.

‘탄소유출’(carbon leakage)이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이는 전세계가 지구화된 상황과도 관련된다. 한 나라가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해서 배출권 거래제 혹은 탄소세를 도입했다고 가정해보자. 탄소 배출에 가격을 부과하면 그 나라에서 생산되는 물품과 서비스 가격이 상승하게 된다. 이런 조치가 모든 나라에서 이루어진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국제 경쟁력 측면에서 탄소 배출에 가격을 부과한 국가는 불리해진다. 이명박정부 때 배출권 거래제의 도입을 논의하던 중, 기업들은 이런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반대하고 나섰다. 한국을 떠나 기후 규제가 없는 나라로 생산시설을 옮기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때 기후 규제를 피하거나 무력화하기 위해서, 생산시설을 해외로 옮기거나 옮기려는 현상 혹은 협박을 ‘탄소유출’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 저감이냐 아니면 산업과 일자리 감소냐라는 반갑지 않은 이분법을 정부에게 강요하여 기후 규제를 무력화하려는 기업들의 전략에 범인 탄소가 숨어들어간 셈이다.

‘탄소고착’(carbon lock-in)이라는 말도 있다. 이는 기술이 여러 선택지 중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되어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 잡은 뒤 변화에 저항한다는 설명에서 나온 개념이다. 근대 국가에서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이 경제와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지만, 그 기술 의존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비판하기 위한 용어다. 그 이유는 단지 화석연료가 재생에너지 같은 다른 에너지원에 비해서 값싸기 때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비용편익 분석에서 현행 법제도 탓에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환경적·사회적 비용을 누락시킬 수 있으며, 연구개발 투자 등의 지원도 간과되기 일쑤다. 결국 석탄발전소는 발전단가가 낮다는 이유로 건설되고, 투자비용 회수를 넘어 최대 수익을 뽑아내려는 자본은 석탄발전소를 최소 30년 이상 가동하려고 시도한다. 반대로 기회를 잃은 재생에너지 기술은 시장에서 저개발된 상태에서 밀려나고 에너지 시스템은 화석연료에 고착된다. 지난 수십년간 작동된 메커니즘이지만, 기후변화 위기를 맞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6차 전력수급계획에 반영된 삼척 석탄발전소를 포함한 다수의 신규 발전소가 건설된다면 기존 감축목표 달성을 무산시킬지도 모를 막대한 이산화탄소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게 된다.

 

 

탄소에 매달리다 엉뚱한 동아줄을 잡을까

 

탄소는 기후변화의 원인으로 또 국제기구와 정부 해결책, 그를 회피하려는 기업의 책략, 에너지 전환의 어려움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위한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상징화는 여러 복잡한 이야기를 간명하게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간혹 맥락이 삭제된 채 무심코 언급되거나 심지어 악의적으로 다루어지는 이 상징들은 기후변화의 원인 진단, 책임의 배분 그리고 해결책의 선택 등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도 있다.

십여년 전에 겪은 일이다. 정부, 기업 그리고 노동조합이 참여하여 기후변화 문제를 다루었던 희귀한 회의 자리에서 기업계의 기후변화 정책을 대변하는 이가 말했다. “이산화탄소가 위험하다고 하는데 하나도 안 위험하다. 지금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대략 350ppm 정도인데, 여러분들이 타고 온 지하철 안의 이산화탄소는 1000ppm이 넘는다.” (이산화)탄소 이야기가 맥락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이제는 상식이(라 믿)지만,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문제 삼는 것은 코나 입으로 들이마셨을 때 위험한 오염물질이기 때문은 아니다. 대기 중에 쌓여서 우주공간으로 방출해야 할 태양에너지를 품으면서 기온을 상승시키는 온실효과 때문이다. 기업 측의 이런 창의적 주장은 기본 상식이 없기 때문인지, 기후 담론에 익숙지 않은 노동조합 측을 비롯한 참석자를 기만하여 기업의 부담을 회피하려는 전략 때문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러한 경험을 하다보면 우리가 기후변화의 원인과 해결책 논의에서 온실가스 배출, 특히 이산화탄소 배출의 문제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가 기후변화의 원인이 아니라는 거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기후변화의 심리학』(Don’t Even Think About It, 한국어판 갈마바람 2018)의 저자인 조지 마셜(George Marshall)은 이와 관련하여 한가지 답을 주고 있다.

난데없다 느낄 수 있겠지만 그는 마약 정책을 들어 설명한다. 마약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이를 판매하거나 소비하는 이들만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되며, 이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이들까지 감시하고 처벌해야 한다. 국경 너머의 생산·공급자인 마약 카르텔을 찾아내 제거하려는 정책도 필요하다는 것이다(물론 이 비유 속에 남미 국가들의 주권과 인권을 위협하는 미국의 불법적 행위까지 포함될 필요는 없겠다). 비슷한 맥락에서 발전소 굴뚝 혹은 자동차 배기관 끝의 이산화탄소 배출만을 문제 삼지 말고 석유나 천연가스를 퍼내는 유정이나 석탄을 채굴하는 광산까지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까지 기후변화 국제협상들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축하는 문제만 다뤄왔을 뿐, 채굴하는 화석연료의 상한을 정하거나 금지하려는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근 ‘땅 아래에 그대로 두라’(Keep it in the ground)라는 슬로건으로 석유와 석탄 채굴을 반대하는 운동이 시작됐으며, 그 한 방법으로 화석연료 채굴에 대한 투자 철회(Divestment)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이 캠페인에 참여하는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석탄발전에 의존하는 한국전력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협상의 의제는 여전히 배출 감축에만 국한되어 있으며, 한국사회에서도 석유 등의 화석연료 수입 상한선에 대한 논의는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탄소 환원주의를 넘어서

 

또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다음의 두 진술을 살펴보자. “기후변화의 원인은 온실가스 때문이다”와 “기후변화의 원인은 생태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는 대량 생산·소비·폐기 체제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후자에 대해 쉽게 공감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특히 기후변화를 단지 탄소 배출에 적절한 가격을 부여하여 바로잡을 수 있다는 ‘시장 실패’의 문제로 여기는 이들이라면 더 조심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엘마 알트파터(Elmar Altvater)가 『자본주의의 종말』(Das Ende des Kapitalismus, wie wir ihn kennen, 한국어판 동녘 2007)에서 이야기하듯이, 지금 같은 대량생산·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했던 자본주의 경제는 석유·석탄 같은 화석에너지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탄생하고 또 유지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경제학에서의 가격 부여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적 한계를 넘어선 역사적 체제의 교정에 관한 문제일 수 있다. 한편에서는 석유 자원의 고갈 그리고 다른 편에서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배출에 따른 ‘성장의 한계’에 직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진술은 이런 방식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기후변화의 원인에 대한 두 진술 중에서 첫번째는 타당하다고 쉽게 받아들이는 반면, 두번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외면하는 경향을 ‘탄소 환원주의’라고 이름 붙여보자. 그 경향은 주로 시장주의적이고 과학기술 중심주의적인 모습을 띤다. 시장주의적 모습은 앞서 언급한 탄소시장 혹은 탄소거래 분야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기후변화의 원인을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로 환원한 후에, 그 자체(정확히는 배출 권리)를 시장거래의 대상으로 상품화하여 비용효과적인 방법으로 감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는 시장 메커니즘 자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비판과 환경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시장에 대한 좀더 민주적인 통제가 필요하다는 성찰이 이루어질 공간을 사라지게 한다.

또한 탄소 환원적 경향은 과학기술중심주의적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탄소포집저장(Carbon Capture and Storage, CCS) 기술 혹은 이산화탄소 제거(Carbon Dioxide Removal, CDR) 기술이다.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경제활동은 계속 유지하면서도 대기 중에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만을 잡아낼 수 있다면, 혹은 이미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에서 제거할 수 있다면 기후변화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3 그러니까 발전소의 굴뚝에서 이산화탄소만을 잡아내(포집) 지하공간이나 해저 등 격리된 곳에 모아둔다는 것이다. 핵폐기물처럼 지질 구조 아래에 장기간 저장하는 것이 어렵다거나 그 양이 너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면, 우주 공간에 쏘아 올린다는 ‘대담한’ 구상까지도 포함된다. 이런 접근은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말단(end of pipe) 기술로 문제를 보완하여 오히려 ‘탄소고착’을 심화시키는 것이라 평할 수 있다. 실제 이산화탄소 저장 아이디어는 시추 후 남겨진 석유를 끄집어내기 위해 유정(油井) 안으로 이산화탄소를 밀어 넣는 기존의 ‘석유 회수 증진’(Enhanced Oil Recovery) 기법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비유적으로 종합해보자면 이러한 구상은 범인인 ‘탄소’를 잡아서 가두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단순화된 논리이며, 대체 범죄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사회구조적 진단과 처방은 사라지게 한다.

 

 

어떤 에너지전환인가, 성장을 되돌아보자

 

탄소고착에서 벗어나 태양광과 풍력과 같은 재생에너지 경제로 넘어서는 것도 쉽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할 점이 많다. 예컨대 사하라사막이나 고비사막에 대규모 태양광·풍력 발전단지를 건설한 다음 국경을 넘는 장거리 초고압 송전선로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 각국에 공급한다는 데저테크(desertech)나 아시아 슈퍼그리드(supergrid) 구상과 각 지역별로 소규모 재생에너지 시설을 통해서 에너지를 자급하려는 구상은 단지 기술적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재생에너지 기술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초국적 기업을 위시한 지구적 차원의 행위자가 주도하는 비전과 지자체나 지역사회가 중심 역할을 하는 비전의 차이가 지니는 정치사회적 의미도 심대하다. 에너지 생산·공급·배분을 어떤 사회적 방식으로 조직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다.

좀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에너지를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는지 혹은 사용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문제도 있다. 재생에너지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인류(특히 북반구 산업국 사람들)가 지금껏 사용해온 만큼의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에 따라 다르지만 일부 재생에너지(예를 들어 바이오연료)는 식량 생산을 잠식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산지와 농지에 대한 태양광 발전시설 입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고 있다. EU 집행위가 내놓은 2050년 장기저탄소발전전략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뿐만 아니라, 에너지 사용량의 획기적인 저감도 요청하고 있다.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재생에너지라도 환경에 주는 부담과 회귀 원소 사용의 한계 등을 고려할 때 에너지 소비 자체를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의 지속가능발전위원인 팀 잭슨(Tim Jackson)이 『성장 없는 번영』(Prosperity Without Growth, 한국어판 착한책가게 2013)에서 이야기하듯, 생태적으로 지탱 가능하며 지구적 차원의 경제적 평등까지 추구하는 지속적인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주장과도 연결된다.

탄소 배출을 어떻게 비용효율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줄일지에 집중하기보다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와 사회관계, 그리고 정치권력의 배분과 운영이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를 해소하고 생태적 한계 내에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끊임없이 물질적 욕망을 불러일으켜 맹목적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대중매체의 상업적 이미지,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한 귀결로서 나타나는 극단적인 사치적 소비, 관료와 기업들에 의해서 과도하게 예측되는 전력 수요와 공급시설 과잉의 악순환 구조 등 탄소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때는 쉽게 문제로 인식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가 많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질문하고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어도 이런 시각과 균형을 잡을 때만이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노력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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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주 학생 수천명 수업거부 ‘기후변화’ 대응 촉구 시위」, SBS/AAP 2015.11.30.
  2. 그레타 툰베리의 연설은 다음을 참고(https://www.lifegate.com/people/news/greta-thunberg-speech-cop24).
  3. 이외에도 좀더 논쟁적인 지구공학적 접근도 있다. 간단한 개괄과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한재각 「로켓 쏘아올려 온난화 막는다?」, 『이코노미인사이트』 9호(2011.1.1).

한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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