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민족예술의 등불, 김윤수 선생의 삶에 대한 증언
유홍준 兪弘濬
미술평론가, 명지대 석좌교수. 문화재청장,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역임.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전14권)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전3권) 『추사 김정희』 등이 있음. hjyou1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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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9일, 김윤수(金潤洙)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언론 매체들은 부음을 전하면서 한결같이 “민중미술운동의 대부” “민족예술 이론의 지주”라고 선생님의 사회적·예술적 삶을 정의 내렸다. 선생님의 여든 평생을 되돌아보면 영남대 교수, 국립현대미술관장, 창작과비평사 대표 등 많은 이력이 뒤따르지만 역시 장례식을 주관한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가장 상징적이다. 확실히 김윤수 선생은 민족예술이라는 공동체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연륜 깊은 느티나무였고 등불 같은 존재였다.
2019년 1월 17일은 고(故) 김윤수 선생의 사십구재 되는 날이었다. 사십구재는 불교에서 나온 장례의식이지만 전통적으로 우리가 고인과 이별하는 수순의 하나이다. 그런데 마침 나는 그날 ‘교사들을 위한 한국미술사 원격강의’를 녹화하는 날이어서 마석 묘소로 찾아뵙지 못하고 박불똥 민예총 이사장이 홀로 다녀왔지만 마음속으로 선생님이 저 피안의 세계로 무사히 건너가 영원한 안식에 드셨기를 조용히 빌었다.
선생님은 종교가 없으셨다. 그러나 모든 무신론자가 그렇듯이 종교가 없다고 해서 삶을 지탱하는 신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인간 존재의 가치를 규정하고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는 믿음은 있다. 내가 아는 한 김윤수 선생이 타계하는 순간까지도 놓지 않은 믿음은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이다.
1971년 3월 어느날이었다. 내가 갑자기 군에 입대하여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한창 고된 훈련을 받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 반가움과 고마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훈련 기간 내내 나는 취침에 들기 전에 기독교인이 성경을 읽듯이 이 편지를 꺼내 읽다 잠들곤 하였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유군에게! (…) 나는 수용연대에 잠시 있었던 것이 군대에 대한 경험의 전부지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인간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기를 개조하고 나아가서 사회를 개조해 나아가는 자기실현(self-realization)에 있다고 한다면 자네는 군 생활에 적응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계기가 될 줄로 믿네.
인간의 본성을 잃지 않고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는 진정한 휴머니즘의 정신이 그렇게 들어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한 사람의 성실한 인간으로서 택한 사회적 삶은 민족의 길, 예술의 길이었고 당신이 지향하는 미학의 신념은 리얼리즘이었다. 선생님이 매체를 통해 김윤수라는 이름 석자를 활자로 드러내고 자신을 사회화한 첫 글인 「리얼리즘 소고」(『대학신문』 1970.10.19)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술은 인간정신의 한 표현이다. (…) 인간의 모든 지적, 정서적 활동은 현실에 대한 반응을 토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넘어선다. 현실을 넘어선다는 것은 현실로부터의 탈출일 수도 있으며 반대로 새로운 현실에로의 지향일 수도 있다.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다. (…) 인간이 현실적으로 반응하는바 생활의 구체성이며 생의 유기적 질서로 인간의 총체성(이성과 감성 통합)을 확립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얼리즘은 다음의 몇가지 기본적인 문제—현실에 대한 예술상의 인식, 예술의 사회적 기능, 예술가의 자세 등이 아울러 규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는 선생님의 모든 예술적 활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신조였고 당신의 삶을 이 방향에서 일관되게 영위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선생님의 삶을 ‘진정한 리얼리스트로 살다 간 민족미학의 선구’라고 규정하고 싶다.
나는 누구보다 가까이서 선생님과 한생을 같이 산 것으로 세상에 비쳐져 있고 또 사실이 그러하여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학부시절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제자였고, 민예총과 민미협에서 미술평론가로서 함께 활동했고, 영남대 미술대학에서 같이 교편을 잡았다. 그래서 2001년 선생님의 정년을 맞이하여 후배 제자들이 펴낸 『민족의 길, 예술의 길』(창작과비평사)에 「살아있는 미학을 향한 한평생: 김윤수 선생님과 35년」이라는 글을 기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고인이 된 선생님의 삶을 회고하는 글을 쓰자니 내가 아는 선생님의 이력엔 공백이 꽤 있다. 특히 선생님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다. 선생님은 워낙 말수가 적고 조용한 분이었으며 생전에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서 호쾌하게 털어놓은 일이 거의 없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이 무언가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이기에 나는 적극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역사 속의 인물로 남게 된 김윤수 선생을 우리가, 그리고 후대인들이 올바로 기리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연보와 누군가에 의해 쓰일 ‘김윤수 평전(評傳)’을 위한 동시대인의 증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나는 김윤수 선생의 가족과 동료교수, 제자 몇몇 분들에게 말로써, 혹은 메모로써 내게 증언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그중 부인 김정업 여사와 큰아우인 조각가 김익수 선생이 메모 이상의 글로 보내주신 것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또 알고 싶었던 가정적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박현수 정지창 등 영남대 동료 교수의 인상적인 회고는 군사독재 시절 교수로서 선생님이 자기를 실현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으며, 영남대 미술대학과 미술사학과 대학원 제자들의 회고는 선생님의 교육자로서의 면면과 인간적 체취를 절절히 느끼게 해준다. 나는 이를 종합하여 김윤수 선생이 민족미학의 선구로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여 선생님의 삶을 추모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는 ‘김윤수 소전(小傳)’의 앞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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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수 선생의 호적상 생년월일은 1936년 2월 11일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정확한 출생일자는 1935년 10월 23일(음력 9월 26일)이라고 한다. 선친께서 앞에 출산한 두 아이가 모두 태어나자마자 죽자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가서 백일기도를 하고 김윤수 선생을 얻고는 백일을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출생신고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생님의 부친은 김해김씨 김응룡(金鷹龍), 어머니는 의성김씨 김위현(金渭賢)이고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소동리 388번지이다. 청하(淸河)는 오늘날 포항시에 편입되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현청이 설치된 유서깊은 고을로 내연산(內延山) 보경사(寶鏡寺)라는 명승지가 있다. 미술사적으로 말하면 진경산수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환갑 무렵에 이곳 청하 현감을 지내면서 「내연산 폭포」와 그 유명한 「금강전도」를 그린 곳이니 그것이 선생님과 미술의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에게는 세살 터울로 남동생 둘이 있고 일찍 세상을 떠난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바로 아래 큰동생인 김익수는 서울대 미대 출신의 조각가로 영남대 교수로 오랫동안 선생님과 같은 대학에서 근무하였고, 작은동생 김두해는 한양대 음대를 졸업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에 있다가 도미하여 신학을 한 목회자이다. 삼형제 모두 예술을 전공한 것을 보면 선생님의 예술적 자질은 부모님으로부터 내려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시절에 아들 모두가 예술을 공부하게 한 것을 보면 선친께서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교육관을 가졌던 분으로 짐작된다.
선친은 일찍이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해방 후에는 교장)를 지내셨는데 민족주의 사상이 투철하여 부임하는 학교마다 일본인 교장과 마찰을 일으키셨고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이런저런 일로 재판, 수감, 실직 등을 되풀이하는 바람에 집안 살림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이로 인해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고 1970년대에 김선생님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을 때는 선친의 과거사를 들먹이며 집요하게 추궁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들은 적이 있다. 선생님의 강직함과 민족주의 사상 역시 선친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은 아버지가 근무하던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 입구에 있는 문명(文明)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 지방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운 사립학교였는데 일제 말 총독부령에 의해 접수되자 선친께서는 이에 저항하다가 도피생활에 들어갔고 남은 가족들은 먹을 것이 없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막내 여동생을 잃었고 김윤수 선생은 영일군 흥해읍에서 농사를 짓는 비교적 넉넉한 이모 집으로 보내져 그곳 흥해국민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그러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아버지가 복직되어 문명국민학교 교장으로 발령받게 되므로 선생은 다시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문명국민학교에 다니다 1948년에 졸업했다.
내가 선생님께 한번 그 시절의 추억을 물으니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없고 8·15 해방되던 날 밖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매미가 떼를 지어 천지가 진동하게 울어대는 바람에 무서워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얼른 집으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왔다고 했다. 훗날 영남대 박현수 교수는 김선생님과 운문사 근처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 집 주인이 옛 동창이어서 밤새 회포를 푸는 것을 곁에서 보았다고 한다.
1948년, 김윤수 선생은 대구중학교에 입학하여 대구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선생님의 아버지 5형제 중 대구시청에 근무하는 작은삼촌이 학교 가까이 비교적 큰 집을 갖고 있어 여기에서 하숙하며 중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6·25동란 중인 1951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2학년 때는 중학교에 다니던 큰동생 김익수와 함께 셋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하였다.
고교시절 선생님은 야구에 취미가 있어 야구부에 입단하여 선수로서 방과 후 연습을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타자석에서 투수가 던진 공에 정통으로 허리척추를 맞고 쓰러졌다. 이때 얻은 허리골절 상해는 심각한 것이어서 선생님은 몇개월간 반듯하게 누워서 치료를 받아야 했고 또 재활치료를 몇개월 하게 되어 1년간 휴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재주가 많아 결국 조각가로 된 큰동생 김익수는 이때 책을 좋아하는 형님을 위해 뒤로 누운 채 책을 읽을 수 있는 서가를 만들어주어 긴 치료 기간 중에도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우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형의 건강회복을 위해 매일 새벽기도에 나갔고 선생님은 동생의 권유로 성경도 읽게 되어 성경통독을 세번이나 하였고 많은 성경구절을 암송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생은 교회에 나가기를 강권했지만 형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선생은 이래저래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 무렵 읽은 책은 주로 문학서적이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영남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첫번째 제자 중 한명인 김영동이 타계 보름 전에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 평소에는 잘 말씀하지 않으시던 학창시절 야구하던 얘기도 하시고 아버님의 서가에서 꺼내 읽은 막심 고리끼의 소설 『유년 시절』 이야기를 평소와 달리 아주 감상적으로 회상하시어 공연히 눈물이 났다고 했다.
내가 언젠가 선생님께 어떻게 미학과를 지원하게 되셨느냐고 여쭈었더니 고등학교 시절 한창 독서에 빠져 있었을 때 고유섭의 『송도고적』과 『조선탑파의 연구』 그리고 일본인 미학자 오오니시 노보루(大西昇)의 『미학 및 예술학사〔美學及藝術學史〕』 등을 읽었는데, 다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흥미로웠고 이것이 나중에 미학을 택하게 된 하나의 동기가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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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김윤수 선생은 서울대 미술대학 미학과에 입학하였다. 미학과가 문리과대학으로 옮겨온 것은 4·19혁명을 지난 1961년에 와서이고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군정법령 제102호)이 공포되고 초대 총장에 해리 앤스테드(Harry B. Ansted)라는 해군 대위가 임명되어 종합대학을 만들면서 미학과가 미술대학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
본래 경성제국대학은 독일식 학제를 따라 법문학부에 여러 전공 교실이 있어 ‘미학 및 미술사교실’이 있었다. 이 교실의 제1회 입학생이 우현(又玄) 고유섭 선생이다. 그런데 국립 서울대학교로 전환하면서 미국식 학과제로 개편될 때 문학부의 여러 교실들이 학과로 독립하였는데 ‘미학 및 미술사교실’은 문리과대학에 설치되지 않고 미학과라는 이름으로 미술대학에 소속하게 된 것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초대 총장이 해군 대위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국립대학안을 만든 실무자들이 미학과 미술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미술대학으로 보냈다는 설이 있고, 또 미술대학 초대 학장인 장발이 미술대학의 힘을 키우려고 미학과를 적극 유치해왔다는 설도 있다. 장발 학장은 장면 총리의 친형인데 독선적인 학교 운영으로 유명하여 능히 그렇게 했으리라고 많이들 믿고 있다.
아무튼 김윤수 선생은 대학 5년(1년 휴학했음)을 미술대학에서 다녔다. 김윤수 선생의 대학시절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거의 없고 누가 증언해주는 것을 들은 적도 없다. 누가 동기인지도 모른다. 미술대학 동창이었을 최경환 이만익 최관도 선생 등 화가들과는 친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본 적은 없다. 다만 선생님의 장례식 때 화가 박한진 선생이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고인을 추모하였다. 장례가 끝나고 인사동 전시장에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한국화가 우현(牛玄) 송영방 선생은 나를 보면서 “김윤수 선생이 돌아가셨다며, 대학시절부터 내내 조용하시고 결이 고운 분이었는데” 하고는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러나 선생의 미학과 후배들은 달랐다. 5년 후배로 영남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의 교수를 지낸 우리나라 둔황 연구의 선구자 권영필 교수는 학창시절 자신이 롤모델로 삼은 선배가 김윤수 선생이었다며 선생님의 정릉 댁에도 자주 놀러 갔다고 했다. 1972년 내가 군에서 잠시 휴가 나왔을 때 선생님을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시대 회화 500년전’을 관람하러 갔는데 그때 박물관 학예사로 있던 권영필 선생이 아주 깍듯이 모시는 것을 곁에서 보고 두분 사이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중 김윤수 선생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른 후배는 김지하 시인이었다. 장례식 때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의 정성헌 선배가 문상 와서 내게 원주에 있는 김지하 시인이 꼭 전해달라고 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윤수 형이 돌아가셨다는데 내가 마땅히 문상을 가야겠건만 지금 나도 병이 심하여 병원에 다니는 신세라 갈 수가 없다. 홍준이가 장례위원장이라고 하니 내 마음을 유족과 주위 분들에게 꼭 전하게 해다오.
나는 김지하 형의 이 말을 영결식에서 그대로 전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너나들이를 하는 친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1957년 선생이 대학 2학년 때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막냇동생 김두해가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서울로 올라오고 이듬해에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큰동생 김익수가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함으로써 삼형제가 함께 셋방살이 자취를 하게 되었다.
김익수 선생은 내가 영남대에서 함께 근무하며 본 바로는 교육자로서 대단히 정확한 분이셨다. 그리고 박현수 교수가 김익수 선생과 대구의 같은 아파트에 살 때 들은 거라며 전해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집이나 흔히 그렇듯이 이 집 형제도 데면데면한 사이인데 한번은 김윤수 선생이 문경군 점촌 옆 산양중학교 여선생을 좋아하여 그곳에 몇번 찾아갔는데 그 동네 나쁜 놈들이 김선생님을 협박하며 방해를 놓아 동생 김익수가 사람을 동원하여 혼을 내준 일이 있다고 한다. 김익수 선생은 조각가로서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형님 못지않게 반듯한 분이었다. 1978년 중앙일보·동양방송이 신설한 제1회 중앙미술대전에 초대작가로 초청되었는데 형님이 공모전 심사위원이라고 출품을 사양하셨다. 무심한 형님은 아우를 위하여 아무런 도움을 준 일이 없었어도 아우로서 도리를 다하고 사셨다.
그렇게 삼형제가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니던 1959년 영일군 장기국민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아버지가 위암치료를 위해 서울로 상경해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지만 곧 별세하셨다. 그래서 삼형제는 어머니와 함께 한방에 살면서 생활비뿐만 아니라 부친의 병원비로 진 빚을 갚기 위해 각각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등록금이 없어 선생님은 한해 휴학을 하게 되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데모의 격랑이 소용돌이칠 때 선생님은 4학년으로 과회장이었다. 미술대학생들이 들고일어나 독선적이었던 장발도 물러나게 하고 미학과는 마침내 문리과대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 데모를 주동한 것은 2학년생 김지하 시인이었고 뒤에는 김윤수 선생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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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김윤수 선생은 대학을 마치자마자 생계를 위한 직장으로 동아출판사 편집부에 입사하였다. 여기에서 선생님은 영한사전과 독한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미학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아 이듬해인 1961년에는 직장에 다니면서 미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셨다. 이때 출판사에서 쪼그리고 앉아 작은 글자들을 교정하고, 또 작은 글씨의 원서를 읽으면서 마침내 목디스크를 앓기 시작했다. 허리디스크에 이은 또다른 고질병이 되어 평생 병약한 몸으로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대학원에 입학한 지 오년 후에야 졸업하셨다. 석사학위 논문은 「칸트의 미(美) 분석론에 관한 연구」였다. 나는 이 논문을 아직껏 읽어보지 못했다. 한번은 선생님이 칸트에 주목한 것은 혹시 칸트의 이른바 ‘미적 자율성’에 대해서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논문을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읽어볼 필요가 없다’며 졸업하려고 학위 형식에 맞추어 썼을 뿐이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이 책을 구해 읽어보라’며 보여주신 것이 에른스트 피셔(Ernst Fischer)의 『예술은 왜 필요한가』의 일본어 번역본이었다. 나는 그날로 무교동 큰길가에 있는 ‘해외서적’에 가서 이 책을 사서 보았고 나 또한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리얼리즘을 신봉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후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선생님은 미학보다도 예술학에 관심이 많으셨고 책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여 당시 종각과 세종로 네거리 사이에 있던 영어 전문서점인 범문사와 범한서적, 일본어 전문서점인 해외서적 등 여러 서점, 독일어 전문서점인 충무로의 소피아서점을 무시로 드나드셨다. 이 서점들이 다 문을 닫고 선생님이 대구로 내려간 다음에는 아마존을 통해 원서를 구입하셨다. 영남대 미술사학과 마지막 제자 중 한명인 오현미는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말하면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연구실 열쇠를 주면서 마음껏 공부하게 했는데 방 한쪽에 아마존에서 온 책상자가 가득했고 캐비닛 안에는 서양미술 비디오테이프와 대니시 버터쿠키 통이 있었던 것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1966년 선생님은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출판사를 나와 대학강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와 효성여대 등에서 미학과 미술사 강의를 하셨고, 1968년에는 서울대 미학과의 시간강사를 맡으셨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창립한 ‘한국미학회’의 간사 및 편집위원을 맡아 초창기 미학회지는 거의 다 선생님이 도맡아 만드셨다고 한다. 이때부터 선생님의 인생은 본격적으로 미학의 길을 걷게 된다.
미학과에 처음 출강하신 선생님은 3·4학년 과목을 가르쳤기 때문에 나는 수업은 들을 수 없었지만 김기주(전 인천가톨릭대 교수), 고 강준혁(전 메타기획 대표) 등 3학년 선배들로부터 좋은 선배 분이 새로 강의를 맡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미학과는 한 학년 정원이 10명이어서 선생이고 학생이고 누가 누구인지 바로 아는 아주 작은 집단이었다. 김윤수 선생님이 미학과에 출강하자마자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철학으로서의 미학, 특히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의 미학을 비롯한 관념미학을 반강제적으로 주입하는 바람에 미학 자체에 흥미를 잃어가던 학생들에게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학문으로서 예술학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1969년 봄, 나는 3학년 때 ‘예술학 특강’을 수강 신청하면서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강의교재는 파사르게(W. Passarge)의 『현대예술사의 철학』(1930)이었다. 이 책은 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미술사의 여러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해설한 최고의 입문서라 할 만한 것이었다.
선생님의 강의는 중요한 사항을 노트에 받아쓰도록 불러주고 그것을 보충해 설명하는 식이었는데 그 내용이 워낙 충실했기 때문에 모두들 만족했고, 그때 받아쓰고 메모한 노트는 지금도 내 책꽂이에 꽂혀 있다. 이 강의를 통하여 나는 서양의 미술사학은 단순히 연대기적 역사나 문화사의 한 분야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방법론과 철학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뵐플린(H. Wölfflin)과 부르크하르트(J. Burchhardt)의 형식사로서의 미술사, 드보르자끄(M. Dvořák)의 정신사로의 미술사, 파노프스키(E. Panofsky)의 해석학으로서의 미술사, 하우저(A. Hauser)의 사회사로서의 미술사 등을 들으면서 나와 동창생들은 처음으로 살아 있는 예술학을 배우는 감동을 받았다. 이 강의에는 타과생도 한명 있었는데 그가 당시 국문과 2학년이던 최원식(인하대 명예교수)으로 질문도 잘하면서 예술사에 관심이 많았다.
선생님은 당시 시간강사에 불과했지만 제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여느 전임교수보다 컸다. 학생들 개개인의 성향과 관심분야를 일일이 파악하고 있었고 그 학생의 장단점은 물론 장래에 대한 걱정까지 같이해주셨다. 이 점은 교육자로서 선생님의 남다른 모습이었고 선생님은 정년퇴임 때까지 그 자세를 잃지 않았다. 영남대 교수로 같이 재직하면서 선생님이 논문지도 학생의 글을 꼼꼼히 읽고 고쳐주고 참고문헌을 계속 제시하며 지도하시는 것을 곁에서 보면서, 나는 항시 그 반의반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왔다. 선생님이 격의없이 제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영남대 대학원 제자인 남진아가 보내준 회상에 잘 나타나 있다.
1995년 가을학기 답사는 안동과 영주 지역이었다. 첫날 영주 부석사 아래 민박집에서 저녁을 먹고는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이어졌는데, 답사 인솔자인 유홍준 선생님이 새벽 종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일찍 자라고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윤수 선생님을 모신 술자리는 점점 열기를 더해갔다. 술잔이 몇순배 돌고 나자 노래 좋아하시는 선생님은 애창곡 「사랑의 미로」를 시작으로 몇곡을 부르시고 러시아 민요를 부르실 때면 팔을 흔드시거나 낭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시곤 했다. 결국 우리는 밤을 꼬박 새워 유홍준 선생님의 타박을 들으며 억지로 이끌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길을 올라 부석사 돌계단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희뿌옇게 밝아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말없이 타종소리를 들었다.
선생님의 그런 자상함과 제자 사랑에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1969년 봄 어느날 강의가 끝나고 선생님은 학림다방 아래층에 있던 대학다방으로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자네는 미학을 포기했다며?”라고 말머리를 꺼내셨다. 내가 미학에 흥미를 잃었다고 대답하였더니, 미학에는 여러 분야가 있으니 예술학 분야를 공부하면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셨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범문사에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은 내게 이딸리아 르네상스시대에 바사리(G. Vasari)가 쓴 『미술가 열전』(영문 축약판)을 권해주셨다. 그것이 결국 나를 미술사의 길로 들어서게 했고, 나는 우리나라 화가들의 삶을 복원한 『화인열전(畵人列傳)』에 나의 학문적 일차목표를 두게 되었다.
김윤수 선생님과 이렇게 맺은 인연은 방학 중이나 수업이 없을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나는 선생님의 정릉 댁에 자주 놀러 갔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에게는 우리 미학과에 김윤수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심을 자랑하고 또 자랑했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 중에 우봉 조희룡이라는 분이 있다. 우봉은 그 자신이 뛰어난 서화가였지만 그가 미술사에 세운 큰 공은 추사 선생을 중인사회와 화원세계에 ‘우리 선생님이 최고’라고 널리 선전하고 끌어들여 마침내 문인화풍의 추사일파를 형성케 한 것이었다. 김선생님에게 나의 존재가 우봉 같았다고 한다면 나로서는 영광이다.
나는 문리대 학생들이 펴내던 『형성(形成)』지의 편집을 맡고 있던 사회학과의 고 최재현, 고고인류학과의 유영표에게 선생님의 글을 받아 싣게 했는데 그 글은 제들마이어(H. Sedlmayr)의 『중심의 상실』(1948)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또 『대학신문』 학생편집장으로 있던 정치학과 심지연(경남대 명예교수)에게 당시 한창 벌어지고 있던 문학계의 순수-참여논쟁에 대한 미학자로서의 논평을 받아 싣게 했다. 그것이 앞서 소개한 「리얼리즘 소고」라는 글이다.
이 글은 비록 짧지만 대단히 명쾌한 논리로 참여문학을 지지하는 리얼리즘론이었다. 염무웅 선생은 김윤수 선생과의 교유기로 쓴 「견수(肩隨) 30년」(『민족의 길, 예술의 길』)에서 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아 『창작과비평』에 원고를 청탁하여 실은 것이 1971년 봄호에 실린 「예술과 소외」라고 했다. 그때 염무웅 선생이 김지하 시인에게 김윤수씨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당분간 숨겨두려던 귀중한 알맹이가 드러나 아쉽다는 듯, 그러나 기왕 드러난 바에야 자랑 좀 해야겠다는 듯 싱긋이 웃으며 (…) ‘윤수 형님 말이야? 너 그 형님 어떻게 알았어?’”(「견수 30년」 325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글로 김윤수 선생은 문화예술계에 확실히 커밍아웃되었던 것이다. 이후 선생님의 본격적인 글쓰기와 비평활동이 『창작과비평』에 근대미술 작가론을 게재하는 것으로 본격화되었다. 「춘곡(春谷) 고희동(高犧東)과 신미술운동」 「좌절과 극복의 논리: 이인성(李仁星)·이중섭(李仲燮)을 중심으로」 「김환기론(金煥基論)」 등 연이어 발표한 근대미술 작가론은 근대미술을 민족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한 것으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론에 목말라하던 민중예술 제1세대의 젊은이들이 직간접으로 선생님을 따르는 계기로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이 글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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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1971년 봄호에는 김윤수 선생의 「예술과 소외」와 함께 에른스트 피셔의 「오늘의 예술적 상황」, 그리고 황석영의 「객지」가 함께 실려 있어 염무웅 선생은 이론과 작품 모두 명확히 리얼리즘 미학을 가리키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같은호에 실린 화가 강명희의 「서양화의 수용과 정착」 또한 대단히 신선한 논문이었다. 강명희는 영화배우 신성일(강신영)의 여동생으로 1981년에 구기동 서울미술관을 개관한 임세택의 부인이다. 김윤수 선생이 서울미술관 관장을 맡았던 것은 이들과의 깊은 인연 때문이었다.
강명희의 글은 서울대 미술대학 석사학위 논문을 요약한 것인데 김윤수 선생의 간접적인 지도를 많이 받았다. 근대미술 자료로 절대적이라 할 도록 『조선미술전람회』(전20권)는 쉽게 구해볼 수 없었고 아직 복사기가 일반화되지 않았는데 강명희는 이 자료를 사진으로 찍어 인화하여 선생님께 보여드리며 작품 분석을 지도받곤 했다. 그로 인해 김윤수 선생은 고희동 이중섭 이인성 박수근 김환기 등 근대미술 작가론을 쓸 수 있는 기본 자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윤수 선생과 이들과의 인연은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술대생이었던 오윤 임세택 오경환 3인이 기획한 ‘현실동인’전은 비록 불발로 끝났지만 팸플릿에 실린 「현실동인 제1선언」은 한국현대미술사에 길이 남을 희대의 명문이었다. 이 글은 미술학도 3인과 김지하, 김윤수 등의 토론을 김지하 시인이 대표 집필한 것이었다. 특히 오윤은 선생님과 각별한 사이였다. 김윤수 선생님은 오윤과 그의 누님인 오숙희, 그리고 시인 최민과 미학과 민혜숙과 자주 어울렸고 나도 그 자리에 끼어 한때를 지낸 적이 있다.
1969년은 선생님과 나에게 큰 상처와 아픔을 주었다. 나는 삼선개헌 반대 데모를 주동한 혐의로 무기정학을 받았다. 삼선개헌이 통과되고 정학이 풀려 가을학기에 다시 복학했는데 느닷없이 삼과폐합(三科廢合)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다. 철학과·미학과·종교학과를 통폐합하고 정원을 줄인다는 것이었다. 이에 미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반대데모가 일어났다. 본4(본관 제4)강의실에서 농성을 하면서 삼과폐합 철회를 요구하는 데모가 연일 계속되었고 타과생들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김윤수 선생님은 이때 농성장에 김지하 시인과 함께 나타나 학생들의 저항에 힘을 실어주었다. 김지하 시인은 선배로서 그렇다 쳐도 강사 신분으로 학생들 데모에 함께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있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이 농성은 학생운동세력과 결합하여 총장실 침입이라는 당시로서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감행했지만 결국 미학과는 철학과 안의 미학 전공으로 정원이 5명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농성에 가담한 서중석(성균관대 명예교수), 안병욱(가톨릭대 명예교수) 등 5명은 제적되어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피해 당사자라고 처벌을 받지 않아 제적당한 친구들에게 죄지은 마음이 평생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당시 미학과의 유력한 전임 후보였는데 이 사건으로 기회를 잃고 몇년 후 이화여대로 가시게 되었다. 당시 미학과에는 서양미학의 박의현 교수와 동양미학의 김정록 교수 두분이 계셨다. 특히 김정록 선생님은 김윤수 선생님을 끔찍이 아끼시어 김선생님이 디스크로 고생한다는 것을 알고는 당신이 직접 약방문을 지어 대학원생인 김기주에게 돈을 주며 종로5가 건재약국에 가보라고 해서 내가 함께 따라가 한약을 지어다 드린 적도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윤수 선생님은 사회학과 유인태(국회사무총장) 같은 운동권 타과생으로부터도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었다. 정통적인 강단의 사제관계로 김윤수 선생님의 제자를 든다면 김기주, 박정기(조선대 교수), 민혜숙(전 그림마당 ‘민’ 대표), 채희완(부산대 교수) 그리고 필자 등을 꼽겠지만 사실상 김선생님의 제자가 학생운동권과 문화운동계 전반에 걸쳐 있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1971년 3월 나는 갑자기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휴가를 나와보면 김선생님은 여전히 학생들에게 깊은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채희완, 이상우(연우무대 연출가) 등 미학과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교학과의 임진택(연출가), 홍세화(저술가), 고고인류학과의 장선우(영화감독) 심지어는 미술대학의 김민기(가수), 사범대학의 이애주(서울대 교수) 등도 선생님을 따르고 있었다. 어느 겨울날 전화도 드리지 않고 임진택과 정릉 댁에 갔는데 선생님은 안 계셨다. 그냥 돌아갈까 하는데 선생님 어머니께서 들어오라고 해서 아랫목에 깔린 담요를 덮고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선생님께서 약간 술에 취해 들어오셔서는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셨다. 임진택이 요새 연극을 연출하고 있다고 하니까 스따니슬랍스끼의 『배우수업』(1936)이 인간 몸동작의 심리를 잘 설명한 ‘감성의 변증법’ 같은 저서라고 하고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찰리 채플린의 몸동작을 흉내 내시어 우리는 한참 웃었다. 그리고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텐킨」(1925)의 시나리오 중 앉아 있던 사자 조각상이 일어나 포효하는 극적인 장면과 계단을 내려오는 군중의 표현 같은 것을 실제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신나게 얘기해주어 우리는 신기하게 들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김민기가 다녀갔다며 그의 「아침이슬」이 상당한 수준의 노래라고 하시고는 민기의 다른 노래 「꽃 피우는 아이」는 “무궁화 꽃을 피우는 아이”라는 대목에서 ‘무’를 길게, ‘궁’을 낮고 묵직하게, 그리고 ‘화’를 높고 크게 불러 마치 꽃이 피는 것 같은 멜로디라고 칭찬하셨다. 이처럼 선생님은 연극 영화 음악에까지 관심의 폭이 넓었고, 구체적으로 실작품에 즉해서 평하곤 하셨다. 훗날 민중예술 제1세대로 성장한 이들은 모두 김윤수 선생의 등불 아래 모였던 것이다.
선생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렇게 많았지만 당시 선생님은 한낱 시간강사로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정릉 버스종점 가까이에 있던 일제강점기 영단주택이라 불린 작고 어두운 적산가옥에서 노모를 모시며 박봉의 강사료로 생활하였다. 우리들이 선생님을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댁으로 놀러 갔는데 그럴 때면 밥상도 술상도 쓸쓸했다. 어떤 때는 모두 밖으로 나와 짜장면을 먹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선생님 댁에 얼마나 자주 찾아갔던지 나는 옛날 우리 집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는지 다 잊어버렸지만 선생님 댁 전화는 0452였고 국번이 바뀌면서 9국에 0452, 914국에 0452로, 그리고 나중엔 010에도 0452였던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
내가 군에서 제대해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는 모친께서 돌아가시고 은향이라는 친척 동생이 생활을 도와주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어머니에 대한 정을 따로 얘기한 적은 없지만 콩잎절임을 보면 어머니 생각을 하곤 하셨다. 선생님 영남대 제자들 이야기이다.
한번은 학교 뒤에 있는 식당에서 같이 식사하는데 콩잎절임이 상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식사하시다 말고 이를 유심히 보시고 무심히 말씀하셨다. 콩잎절임은 경상도에서는 자주 먹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음식인데 나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해서 가족과 떨어져 다른 친척집에 맡겨져 지낸 적이 있는데 그때 어렸지만 외롭고 서러움을 알게 되었고, 콩잎 반찬은 어린 시절과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그리운 음식이라고.
그리고 1980년 여름날 한낮에 선생님과 박현수 교수 등 몇몇이 학교 옆 갑제못 주변을 산책한 뒤 허름한 주막집에 들러 점심을 먹는데 반찬으로 나온 콩잎절임을 보고는 “아, 이거 지린내 나는 경상도 반찬이지. 고향 떠나 25년 만에 이것을 보니 귀향을 실감하겠네”라고 하자 그 모습에 감격한 주막집 주인은 잔뜩 만들어드릴 테니 며칠 후 다시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것을 찾으러 가기 전 해직되어 다시 대구를 떠나야 했다.
6
1973년 선생님은 나이 37세에 이화여대 미술대학 교수가 되어 처음으로 안정된 직장을 얻었다. 그러나 박정희 독재정권은 선생님을 편하게 놓아주지 않았다. 1972년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연일 독재체제가 강고히 구축되어갈 무렵이었다. 서슬 푸른 군사독재에 모두 숨죽이던 1973년 12월 24일 장준하 백기완 선생의 주도하에 ‘개헌청원 30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30인 중에 김윤수 선생님이 들어 있었고 이때부터 선생님은 당국의 요시찰인물로 주목받게 되었다. 1974년에는 백낙청 교수, 홍성우 변호사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하였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4호가 발동되었다. 나는 당시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복역하고 1년 뒤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기 때문에 그사이 선생님이 밖에서 하신 일은 잘 알지 못했으나 백낙청 교수 파면취소 서명운동, 김지하 시인 구명운동, 구속학생 석방운동 등에 열심이셨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다시 발동되었다. 이때 수감 중이던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 한부가 선생님을 거쳐 대학사회에 뿌려지게 되었다. 또 독재타도를 외치며 자결한 서울대 농과대학 김상진 열사의 장례식을 벌인 5·22사건으로 도피 중이던 유영표가 선생님 정릉 집에 피신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9월 27일 결혼을 앞두고 아내 될 사람과 인사차 선생님 댁에 갔다가 유영표가 거기 숨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고 한편으로는 영표보다 선생님이 더 걱정이 되었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어 쓸쓸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결국 김지하 양심선언 배포와 수배자 은닉 혐의로 선생님은 1975년 11월 정보부에 연행되고 몇달 후 긴급조치 9호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구속되어 10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때 나도 수사기관에 불려 갔는데 결혼한다고 선생님을 찾아갔을 뿐이라고 해명하여 바로 풀려났다. 그래서 경찰서를 나오면서 ‘신혼부부는 교통신호 위반만이 아니라 시국사범도 봐주는구나’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사건은 2017년 10월 검찰이 직권으로 재심청구하여 김윤수 선생이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인 2018년 11월 21일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때 법정에 모시고 간 민미협의 화가 김영중에게 선생님은 ‘이제 와서 무죄를 받은들 무엇하나’라며 허탈해하셨다고 한다. 선생님이 출소한 것은 구속 10개월 뒤인 1976년 8월이었다. 그사이 재직 중이시던 이화여대에서 당국의 강압에 의해 해직되었다.
선생님이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다. 나는 김윤수 선생님의 미술평론집이 빨리 나오기를 누구보다 기다리고 소망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예의 완벽주의 때문에 계속 미룰 뿐 책을 펴낼 생각이 없으셨다. 그러나 일을 만들기 잘하는 나는 당시 한국일보사 기획실에서 ‘춘추문고’를 펴내던 문리대 철학과 선배인 허현 형을 찾아가 김윤수 선생이 『창작과비평』에 연재한 근대작가론과 ‘광복30년 미술계’를 묶으면 좋은 책이 된다고 권하였다. 허현 선배는 국문학자 조동일 교수와 처남매부 지간으로 김윤수 선생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님의 유일한 저서인 『한국현대회화사』가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이 나오기 전에 선생님은 감옥에 수감되었다. 나는 허현 선배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선인세를 달라고 했다. 얼마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이를 대리로 받아 삼선교에 살던 선생님의 작은동생 김두해에게 전해드렸다.
그런 어느날 친척 여동생인 은향씨가 내게 전화했다. 선생님을 면회 갔더니 “홍준이한테 연락해서 『풍속의 역사』를 매달 한권씩 넣어달라는데 이게 무슨 잡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에두아르트 푹스(Eduard Fuchs)의 『풍속의 역사』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도 그 책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이 책의 일본어 문고본이 모두 10권이기 때문에 매달 넣어달라고 한 것이었다.
1976년 9월 김선생님이 영등포구치소에서 석방되던 날 고은 신경림 백낙청 등 선생님의 친구분들과 동생 김익수 교수 그리고 나 등 십여명이 교도소 앞에서 기다렸다. 초췌한 모습으로 교도소 문을 나오는 선생님을 모두들 반가움과 안쓰러운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김선생님을 쓸쓸히 비어 있을 그 집에 홀로 보내기 싫은 마음이 다같이 일어났던지 모두들 차에 나누어 타고 정릉 선생님 댁으로 가 긴 시간을 같이 보내다 헤어졌다.
출소하여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계신 선생님이었지만 우리들은 신정 설날이면 세배 드리러 정릉집으로 모여들었다. 돌이켜보건대 유신말기 70년대 재야사회의 세배 풍속도는 암울한 시절에 가졌던 연례 축제였다. 세배꾼들은 무리 지어 다녔다. 우리 팀은 유인태 서중석 백영서 나 4명이 고정멤버이고 그때마다 두세명이 한짝으로 되어 아침 11시쯤 장충동의 백기완 선생 댁으로 가면 거기서 방배추(동규), 강민 시인 등 백선생님 친구들과 떡국 한상을 받았다. 그러면 다른 세배꾼이 밀려와 자리를 내주고 우리는 정릉 김윤수 선생 댁으로 갔다. 거기서 담소를 나누다보면 채희완 정희섭 유인택 박인배 박우섭 등 한패거리가 들어와 자리를 내주고 우리는 화양동 박형규 목사님 댁으로 갔다. 여기서 세배를 올리고 잠시 앉아 있다보면 기독교 인사들이 줄지어 들어온다.
그러면 우리는 리영희 선생 댁으로 갔다. 처음에는 제기동이었다가 나중에는 이사한 화양동 댁으로 갔는데 여기에서 저녁상을 받아 떡국을 먹었다. 그러다보면 동아투위 조선투위의 정태기 백기범 신홍범 김종철 등 해직 언론인들이 몰려와 자연히 합석하게 되는데 마지막에는 어디를 다녀오시는지 느지막이 백낙청 황석영 최민 송기원 등 문학인들이 함께 자리를 한다. 내가 백낙청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도 설날 제기동 리영희 선생 댁이었다. 리영희 선생이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도 세배꾼들은 여전히 선생님 댁으로 모여들었다. 술상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서로를 위로한다. 캄캄한 시절이었지만 이날만은 웃음꽃이 핀다. 그리고 10시쯤이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어른들을 그렇게 뵙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유인태 말을 빌리자면 마치 지리산 반야봉을 등산할 때 느끼는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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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암울한 가운데 ‘자기를 실현’하던 김윤수 선생님의 생애 전반부 모습이다. 이후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등장하면서 영남대 복직과 해직, 그리고 재복직 과정, 『창작과비평』이 폐간되고 출판사를 창작사로 재등록할 때의 고난에 대해서는 이미 세상에 밝히 드러나 있고 또 나보다도 더 정확히 기록할 수 있는 분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민미협과 민예총에서 김윤수 선생님은 그 자리에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민족예술 공동체마을의 큰어른 같은 분이었다는 말로 갈음하고자 한다. 다만 내게 보내온 증언 중에서 외유내강의 김윤수 선생이 단호할 때의 모습 두가지를 전하고 싶다. 하나는 정지창 선생의 증언이다.
1988년 영남대에서는 입시부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박근혜씨가 재단에서 물러나고 교수들의 투표를 통해 김기동 총장이 당선되었다. 1989년 3월에 정식 출범한 민선총장 체제에서 김윤수 선생은 교무처장으로 발탁되어 교과과정 개편에 착수했고 김선생의 소신에 따라 특히 자유교양과목에 다른 대학에서는 볼 수 없는 진보적인 학과목들이 개설되었다. ‘문학과 사회’ ‘민중문화론’ ‘민족연희’ 등 8개 과목이 1990년 1학기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제국주의의 이해’와 ‘북한의 정치와 사회’ 같은 과목도 포함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정치외교학과 이수인 교수와 김선생의 합작품인 것 같다.
김윤수 선생은 강의 담당자를 미리 염두에 두고 과목을 신설한 듯하다. ‘문학과 사회’는 영문과의 김종철, ‘민중문화론’은 독문과의 정지창, 그리고 ‘민족연희’의 강사로는 파격적으로 서울대 미학과 출신에 영산줄다리기 전수자이자 대구한살림의 초대 대표인 천규석 선생이었다. 이때 천규석 선생이 대학 강의를 맡을 수 없다고 고사하자 김선생은 강의일람표에 이미 이름이 올라갔으니 무조건 맡으라고 평소답지 않게 단호한 어조로 입을 막아버렸다.
덧붙이자면 사실 그 당시 대학사회는 교수와 학생 사이가 정상이 아니었다. 특히 교무처장이라는 직책은 학생들이 공격하는 주적의 하나였다. 그러나 장례식 때 선생님을 운구한 이들이 모두 그 당시 학생회 간부를 지낸 운동권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은 선생의 덕성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추모식에서 백낙청 선생이 간단히 언급하신 1985년 12월, 당국(서울시)으로부터 창작과비평사의 출판사 등록취소 처분을 통보받았을 때 사장으로 있던 김윤수 선생님의 당당한 모습이다. 이때 상황은 『한결같되 날로 새롭게: 창비 50년사』(창비 2016)에 실린 고 김이구와의 인터뷰에 이렇게 나와 있다.
문공부 매체국으로 삼사일에 한번씩 들어갔어요. 상당한 시일이 지났을 때 국장을 만나니까 창비 등록허가는 할 텐데 내부 정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백낙청은 손떼라, 염무웅도 손떼라, 이시영 주간과 고세현 부장도 내보내라. 임재경도 관여하지 마라. 그런 조건을 걸었어요. (이에 못 받아들이겠다.) 그러면 나도 그만둘 수밖에 없다 그랬어요. (…) 그렇게 밀고 당기기를 반년 정도 했지요. 결국 백낙청 임재경은 손을 떼고 이시영은 업무국장으로 발령하는 (고세현은 그대로 두고) 선에서 합의를 했는데, 막판에 창비가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를 하라는 거예요.(221~22면)
이때의 상황을 백낙청 선생께 자세히 들어보니 내용인즉 ‘문제있는 책’은 안 낸다는 안이어서 그렇게 매듭을 지으려고 다시 만났더니 그쪽에서 제시하는 게 창비(당시는 구멍가게 규모!)를 주식회사로 만들고 자기네가 경영에 동참할 출자자를 구해주겠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김선생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셨다고 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김선생을 만만히 봐서 백낙청 선생을 제치고 김윤수 선생을 구슬려 목표를 달성하려고 생각했다가 김선생이 단호하게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백낙청 선생에게 김윤수 선생을 달래달라는 부탁을 해왔다는 것이다.
결국 창작과비평사에서 ‘과비평’을 빼고 ‘창작사’라는 이름으로 등록을 받아주기로 합의했는데 그들에게 마지막 꼼수가 하나가 더 있었으니 대표인 선생님이 텔레비전에 나와 사과성 입장표명을 하라는 거였다. 이 대목에서 사모님 김정업 여사의 증언을 들어보면 선생은 엄청 고민하셨다.
당시 김선생님은 목동 아파트를 구입해놓고 남의 집 2층에서 세를 살고 있었는데 밤이면 잠을 거의 주무시지 못하였고, 몸을 긁어서 부풀어 올라 떡이 되고 피가 나는 곳을 또 긁어 찬 수건과 더운 수건을 번갈아가면서 온몸 가려운 곳을 찜질하면서 며칠을 밤샘했습니다. 그때 김선생님의 고민은 자신이 전두환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창비가 죽을 것이고, 굴복하면 이제까지 살아온 삶과 자존심을 송두리째 내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민주진영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김윤수 선생은 일단 창비를 살려놓고 보자고 그들의 요구대로 매체국에서 기자들을 불러놓고 MBC 카메라 앞에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앞으로는 우량도서 출판에만 매진하겠다”(222면)는 발표를 했다. 이때의 상황을 다시 백낙청 선생께 들어보니 다음과 같이 담담히 말씀하셨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젊은 후배들 중 욕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네. 그러나 최종적으로 김선생과 나, 그리고 고은 선생 같은 선배들이 내린 결론은 창작사 등록 자체가 우리의 승리였고 당시 창작과비평사 등록취소에 대한 국내외의 폭넓은 항의운동의 성과였다는 거였네. 지금도 물론 그런 생각이고, 그 과정에서 대표자의 짐을 지고 욕을 보신 선생의 공덕을 내가 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네. 다른 은혜도 많지만……
8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고 한달이 조금 못된 2018년 12월 22일, 선생님이 관장으로 근무하셨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전’이 개막하였다.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공동개최로 진행된 이 전시는 뒤샹의 사후 50년을 기념하며 한국에서는 최초로 그의 주요 작품이 선보이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선구를 이루는 다다이스트로 20세기 개념미술의 창시자인 뒤샹의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해 평일에도 수많은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메우고 있다.
이 전시에 출품된 대부분의 작품은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품이지만 그중에서 딱 한점 ‘세상에서 가장 작은 전시’라고 일컬어지는 「여행용 가방」만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다. 한 미술관의 위상은 전시의 기획력과 소장품으로 자리매김된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중요한 작가의 작품은 2005년도에 김윤수 관장의 안목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것이다. 그리고 꼭 십년 전, 김윤수 관장은 이 작품을 중심으로 뒤샹 사후 40년전을 개최하고자 하였으나 그 전시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 작품 때문에 임기 1년을 앞둔 2008년 11월 이명박정부에 의해 쫓겨났다.
뒤샹의 「여행용 가방」은 가방 속에 여러 작품을 미니어처로 제작한 후 각 칸에 디스플레이하여 이동식 미술관처럼 손에 들고 다닐 수 있게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A부터 E까지 등급이 나뉘어 있고 300여점의 에디션이 존재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SC-0552’라는 등록번호가 붙어 있는 이 작품은 1941년 작으로 최초의 에디션 두가지 변용 중 하나이며 단 20개의 멀티플로만 제작되었다. 작품의 케이스는 카드보드로 제작되었고, 그 안에 「샘」을 포함하여 69점의 미니어처와 레디메이드 복제물들, 사진으로 찍은 기존 작품들이 들어 있어 뒤샹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소장품은 이보다 20여년 뒤에 제작된 1966년 에디션이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참여정부에서 임명한 김정헌 문예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문화예술 기관장들을 임기와 관계없이 갖은 이유로 해임시킬 때 김윤수 관장에 대해서는 이 뒤샹의 「여행용 가방」을 빌미로 삼았다. 복제품에 불과한 것을 과도한 비용을 들여 구입했다며 뒤샹 작품의 가치를 폄하하고 기관 감사를 실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뒤샹이 이름도 없던 시절 미술잡지 『뷰』(View)에 처음으로 소개되어 유명해지면서 뒤샹이 감사 표현으로 직접 제작하여 『뷰』 사장에게 기증한 작품으로, 다른 에디션에는 없는 「물레방아」라는 작품이 하나 더 있다. 김윤수 관장은 뒤샹의 양녀이자 법적 상속자인 자끌린 마띠스모니에(Jacqueline Matisse-Monier) 여사에게 진품확인서와 작품의 내력을 다시 받아오면서 대응하였다. 그러자 이명박정부는 다시 김윤수 관장에게 관세법위반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고소하여 4개월간 관세청과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었다. 결국 이 혐의는 기소유예로 결정되고 김윤수 관장은 해임되었다.
이후 이년 뒤 법원이 해임 무효 판결을 내려 김윤수 관장의 명예는 회복되었지만 이 일을 겪으면서 압박감을 못 이겨 폭탄주를 자주 마시다가 뇌경색으로 입원하였고 뇌졸중으로 이어져 이것이 결국 김윤수 선생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전시회는 금년 4월 7일까지 열린다. 전통적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은 사십구재라고 하니 김윤수 선생은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기 전에 하늘에서 당신이 열고자 했던 뒤샹 회고전을 보고 떠나셨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저승에서 김윤수 선생을 맞이한 마르셀 뒤샹이 일그러진 서구문명을 과감히 때려 부수던 다다이스트의 기개로 선생님께 폭탄주 한잔을 권했을지도 모른다.
9
이제 나는 김윤수 선생님에 대한 추모의 염을 담은 회상을 여기서 끝내며 선생님께서 2001년 2월, 영남대 정년퇴임식 자리에서 모두들 앞에서 하신 당신의 삶에 대한 신념을 전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사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을 몰랐습니다. 또 워낙 세월이 수상하여 대학을 들락거리는 통에 정년퇴임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거친 역사의 격랑을 살면서 사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렵고 고단한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내가 일생을 살아가는 데 목표와 이상이 있었다면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것과 실천적 학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지만 미학을 위한 미학이나 미술사를 위한 미술사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살아 있는 미학, 살아 있는 미술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미학과 미술사 연구의 바탕을 이루는 정신은 언제나 민족주의였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데서 출발하며 결코 편협한 내셔널리즘이 아닌, 세계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 얼마나 살지는 모르지만 사는 동안 그런 점들을 목표로 하여 글로 남기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 다짐을 하고 강단을 떠나 글쓰기에 전념하겠다고 하시고 십팔년을 더 사셨지만 선생님의 건강이 이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창비에서는 그동안 써오신 글들을 모아 『김윤수 저작집』을 펴낼 준비를 해왔는데 일년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훌쩍 떠나셨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심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돌아가시기 일년 좀 못되어 어느날 선생님이 갑자기 내게 전화를 걸어 “자네 지금도 문화재청장 하고 있나?”라고 묻는 것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혹 내가 광화문시대 자문위원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그러셨는가 사모님께 알아보니 2017년 여름부터 선생님은 뇌졸중 후유증을 앓아 지속적인 약 복용으로 ‘알츠하이머’라는 일종의 치매증상이 서서히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생을 접으신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시던 그날 선생님은 따뜻한 욕조에서 목욕하고 누운 상태에서 눈을 감으셨다. 이처럼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조용히 이승을 떠나신 것은 평생 쌓아온 선생님의 덕행에 하늘이 내린 은총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선생님의 장례위원장을 내게 부탁하며 사모님 김정업 여사께서는 몇가지 부탁의 말씀을 하셨다. 첫째는 모든 뒤처리를 선생님의 깨끗한 삶에 걸맞게 하고 싶다며 우선 조의금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리고 삼우재 날에는 여러 사람 앞에서 선생님이 갖고 계신 창비 주식은 당신은 일절 손대지 않을 터이니 선생님이 생전에 하시던 일을 위해 사용하게 해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상속세 문제, 증여 문제 등 복잡한 세무처리가 끝나면 ‘김윤수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운영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선생님 책의 처분을 나에게 맡긴다고도 하셨다. 이에 나는 백낙청 선생님과 의논한 뒤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에 기증하도록 권하여 선생님의 제자이기도 한 강수정 학예사가 이를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에는 민예총 기금마련전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선생님이 갖고 계신 신학철의 ‘꼴라주’ 작품을 내놓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판매하여 사무실 운영비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에는 장례식에 애쓰신 분들과 저녁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지난 2월 1일 여럿이 모여 저녁을 함께하며 선생님을 회고하는 자리를 가졌다. 사모님은 이처럼 우리와의 끈을 결코 놓고 싶지 않으신 것이었다. 사모님에게 김윤수 선생님은 남편을 넘어 신앙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나는 사모님께 이렇게 말했다.
“사모님이 우리를 잊지 않듯이 우리도 사모님을 잊지 않을 테니 우리들이 만드는 자리에 사모님은 김윤수 선생님을 대신해서 꼭 참석해주십시오.”
이에 사모님 김정업 여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