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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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1955년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로 등단.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등이 있음. imagine49@hanmail.net

 

 

 

빈집

 

 

빈집을 보면 사람들이 쑤군거리지

사람 떠난 집은 금방 허물어지거든

멀쩡하다가도 비워두면 곧 기울어지지

그건 말이야 사람이 독해서야

 

벽과 기둥을 파먹는 것들

돌을 갉아먹는 이빨 날카로운 시간들

사람 사는 걸 보면 질려 달아나지

삶이 독해서야 그건

 

그랬지 내가 허물어지던 때마다

내게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였지 그땐

나를 구원하러 온 것마저 나를 허물었지

타인의 욕망이 나를 버티게 하는 나의 욕망에 대해 무지했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념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풍요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사람이 빠져나가고 이상만 남은 마을을 본 적이 있지

 

삶의 하찮은 몸짓들 하찮은 욕망들 하찮은 구원들

그 비루하고 모진 기득권들이 빠져나가면 곧 허물어지지

 

나는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수십년째 집을 떠나려고만 했지

굼벵이처럼 비루한 것이 싫어서 그랬고

슬퍼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

사람의 모진 것들이 자꾸 슬퍼서

 

 

 

꽃이 나를 선택한다

 

 

빌딩숲 그늘에 갑자기 화사한 꽃이 있어

두근거리고 몸이 쏠려 다가갔을 때

플라스틱 꽃이다

하지만 속을 다 본 뒤에도 두근거림을 멈출 수 없다

꽃은 여전히 어여쁘다

 

플라스틱 꽃아 너도 꽃이다

네가 꽃이기에 부족한 것이 무어냐

꽃과 꽃 아닌 것의 구분이 이 도시에서 무슨 의미냐

사람들의 기대만큼만 피는 너는 왜 꽃이 아니겠느냐

 

폐기물을 위장하기 위해 피어야 하는 꽃

씨를 맺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꽃

유전자 조작으로 씨를 맺을 수 없는 꽃

벌도 흙도 없는 곳에 가둔 꽃

그들이 너를 낳았다

 

너는 공장의 기계에서 찍혀 나온 것 아니다

저 꽃들의 무정란에서 태어난 것이다

비애와 치욕의 유전자를 말끔히 제거한,

아니 비애와 치욕의 유전자만 남기고 모든 유전자를

말끔히 제거한 무정란에서 태어난 너도 꽃이다

치욕으로 환한 꽃이다

 

나의 두근거림을 내가 선택할 수 없다

저 꽃들이 나를 선택한다

저 꽃들이 나의 유전자를 조작하고 있다

저 꽃들은 내가 씨를 맺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뽑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