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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천운영 千雲寧
1971년 서울 출생.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바늘』 『명랑』 『그녀의 눈물 사용법』 『엄마도 아시다시피』,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 『생강』 등이 있음.
hangomm@hanmail.net
금연캠프
첫번째 날—모두 매우 그러한 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문서연이었다.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두시간이나 서둘러 왔지만, 운영자들의 준비가 끝나지 않아 입구에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왼편 창가 자리를 선택했다. 채광과 환기, 온풍기와 텔레비전의 위치 등을 고려한 결과였다. 옆자리 침대를 살짝 이동시켜 자리를 확보하고, 모자란 옷걸이는 다른 캐비닛에서 보충해 짐정리를 마쳤다. 그러는 동안 의료진이 들어와 혈압과 체온, 체내 일산화탄소 등을 측정하고 나갔다. 입구에서 받은 셔츠로 갈아입고 명찰까지 목에 걸고 준비를 마쳤을 때 다음 지원자들이 도착했다.
이금순은 이정희와 함께 왔다. 두 사람은 은평구의 한 찜질방에서 종종 마주치던 사이로, 자수정방에 누워 있다 캠프에 관한 정보를 접했다. 마침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였고, 세부사항들이 무척 매력적이었으므로, 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뛰쳐나와 전화를 걸었다. 여성 참가자 일정은 아직 확정된 바가 없어 일단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그로부터 꼭 두달 뒤 일정이 잡혔는데, 그들은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보를 공유했다.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지하철역에서 만났을 때, 벌거벗지 않은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인지라 서로 알아보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문서연은 본능적으로 두 사람을 가깝게 두어야겠다고 판단했다. 자리선점 다음에는 주변구축. 문서연이 이금순의 가방을 받아 들며 자연스레 옆자리로 인도하자 이정희는 저절로 따라왔다. 먼저 도착한 사람답게 캐비닛 사용법 등을 안내해주고 앞자리에서 가져온 옷걸이로 선심도 썼다.
연이어 다음 지원자들이 도착했다. 안녕들 하십니까, 오명잡니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오명자는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에 가방을 던지며 손을 흔들었다. 유세에 나선 정치인 같았다. 염색하지 않은 백발은 숱이 많고 부드러웠다. 부리부리한 눈매 때문인지 그녀에게는 뭔가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김숙희와 서희주는 오른편 가운데 침대를 선택했다. 김숙희는 짐을 한쪽에 밀쳐둔 채 그대로 침대에 올라가 누워버렸는데, 거기까지 오는 데 모든 체력을 다 쓴 사람처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서희주는 바닥에 캐리어를 펼쳐놓고 짐부터 정리했다. 이민가방으로 쓸 만한 큼직한 가방에서 일인용 온열매트가 나왔다. 이미 4월하고도 중순이었다. 그녀는 침대 매트리스 커버를 벗긴 다음 온열매트를 올리고 다시 커버를 덮는 과정을 신속하게 처리했다. 김숙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잠이 들었다.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났다. 어머나, 이분 정말 잠드셨나봐, 피곤하셨나보다. 서희주는 진심으로 감명받은 듯했다.
정확히 열두시 반이 되었을 때 오현주가 들어왔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허둥대다 암센터로 들어갈 뻔했다. 남은 자리는 둘. 문가에 하나, 창가에 하나. 그녀는 주위를 한번 쓱 둘러본 후 입구 자리에 짐을 풀었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않으면서, 나름 방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최선의 자리라 여겼다. 뒤따라온 스태프가 기초 측정부터 서둘렀다. 저혈압에 체온은 정상, 체내 일산화탄소 수치는 11. 수치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시간에 정확히 도착했는데도 어쩐지 부산했고 무언가 소외당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언니야, 셔츠 갈아입고 명찰 달아야 한대. 명찰. 그거 손에 든 거, 목에 걸라고.
오현주를 주목하고 있던 문서연이 명찰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현주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문서연은 한번 더 얘기를 하려다가 마침 병실에 들어온 스태프를 붙들어 세웠다. 여기 와이파이 안 돼요? 표시는 뜨는데 이건 왜 이렇게 빙빙 돌기만 해? 이것 좀 봐줘봐요. 아, 게임은 잘 안 되실 거예요. 파일 다운로드도 어렵고, 여기가 병원이라 보안상 막아놓은 게 많아요, 그냥 데이터로 사용하시는 편이. 아니, 고스톱에 무슨 보안이 필요해? 풀어줘봐요. 내가 일부러 아이패드 챙겨온 건데? 그건 저희 영역이 아니라서요. 아 진짜 짱나게, 4박 5일 동안 고스톱도 없이 어떻게 버텨요? 안 그래요? 문서연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지만 다들 각자 일을 처리하느라 반응이 없었다.
오현주는 고개를 숙인 채 입구에서 받아온 물품들을 살폈다. 흰색 폴로셔츠 두개, 휴대용 물병과 탁상용 달력, 그밖에 안내책자들. 안내문에 따르면 단체복 착용은 권고사항이었다. 권고는 의무가 아니었다. 가방에서 흰색 반팔 티셔츠를 꺼낸 다음 커튼을 쳤다. ㄴ자 연결로 이루어지는 병원 칸막이의 구조상, 옆자리 도움 없이는 완벽한 차단이 불가능했다. 옆 침대의 서희주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건너 침대의 김숙희는 아예 이불까지 덮어썼다. 잠을 자기 위해 온 사람 같았다.
실내에 쿰쿰한 오징어 냄새가 퍼졌다. 마른오징어를 꺼낸 사람은 오명자였다. 시작은 이정희의 사과였고, 문서연의 당근과 인삼이 따라 나왔고, 결국 오명자가 마른오징어를 꺼낸 것이었다. 그보다 먼저 새벽부터 일어나 밑반찬을 해왔으나 입구에서 뺏기고 말았다는 이금순의 넋두리가 발단이었다. 더덕도 무치고 장조림도 하고 멸치도 새로 볶았는데, 어머나 맛있었겠다, 그 말 들으니 배고프네, 그럼 사과 드릴까요? 그건 어떻게 가져왔대? 왜 안 돼요? 음식물은 안 된다더만, 반입금지, 저도 당근 있어요. 그리하여 배에서 말렸다는 진짜 맛있는 오징어에 도달했고, 오명자가 손으로 짝짝 찢어 다리와 몸통을 적당히 섞어 분배하자, 이정희도 깎은 사과를 들고 한바퀴 돌았고, 그렇게 오징어나 사과를 한쪽씩 나눠 먹고 있을 때, 스태프 둘이 뛰어 들어왔다.
선생님, 음식물 반입은 안 됩니다, 이미 공지해드렸을 텐데요. 이것만 먹고 치워버릴게. 저희한테 주시면 보관했다가 끝나는 날 돌려드리겠습니다. 뭘 그때까지 두고 말고 해, 그냥 지금 먹어버리고 말지. 오징어는 특히나요, 제가 어떻게 알고 왔겠습니까, 복도 끝까지 냄새가, 다른 음식물들도 다 주세요. 사과는 괜찮지 않아요? 아침에 사과가 약이야, 저녁엔 독이고. 안 됩니다, 병실에는 냉장고가 없지 않습니까, 여기가 병원이라 아무래도 위생에 민감해서. 인삼은 하루에 한뿌리씩 먹어야 돼, 내 담당 의사가 그러라고 그랬어. 그럼 가져가서 아침식사 때마다 갖다드릴게요. 아니 의사가 먹으랬다니까? 드시지 말라는 게 아니라, 보관을 해드리겠다는 겁니다.
오징어에서 당근으로 인삼으로 다시 오징어로, 입씨름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왕 입에 넣은 오징어를 씹으면서 딴청을 피우고, 또 누군가는 사과 보따리와 당근 통을 품에 안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 그 병실의 마지막 참가자 윤다영이 도착했다. 공지된 모임시간보다 이십분 늦은 시각이었다.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느릿느릿 걸어 마지막 남은 창가 자리로 이동했다. 그녀의 등장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입구에 있던 오현주만큼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오징어를 압도할 만큼 독한 냄새 때문이었다. 피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담배 연기 입자, 거기에 아주 오랫동안 깊숙이 밴 담뱃진 내까지. 조금 과장하자면, 흡연구역의 재떨이 냄새와 비슷했다. 그녀 자신도 종종 찾는 곳이지만 결코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은,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바로 그 냄새.
윤다영은 창밖을 내다보다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햇살 때문인 것도 같고 어떤 통증 때문인 것도 같았다. 오현주는 윤다영이 낯설지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윤다영에게서 풍겨온 냄새를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을까? 별관 입구에서 걸음을 돌려 병원 밖으로 나갔다 되돌아오길 반복했을까? 그때마다 구석으로 숨어들어가 담배를 피웠을까? 빈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던졌을까? 아니면 그녀처럼 마지막까지 품고 있다가 결국 데스크 위에 놓인 아크릴 통에 넣었을까. 명찰과 셔츠를 받아 안고 카드키로만 개폐되는 문을 통과했을 때, 등 뒤로 삐리릭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을 때, 비로소 현실을 받아들였을까? 어쨌거나 이제부터 4박 5일은 그것 없이 지내야 한다는 것을. 오현주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그들은 자발적으로 이곳에 와 갇혔다. 4박 5일 동안의 자발적 감금상태. 중증 흡연자들을 위한 전문 금연캠프. 중증 흡연자들이란 이십년 이상 흡연을 했거나, 5회 이상 금연에 실패한 사람들을 지칭했다. 흡연은 질병.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표에 명시된 질병. 담배흡연에 의한 정신 및 행동장애. 급성 중독, 정신병적 장애, 기억상실증후군, 금단상태, 만성폐쇄성폐질환 등 무수한 세부질병을 포함한 질병 중의 질병. 타인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범죄 중의 범죄. 악의 근원.
출입구는 잠겼고 서약서는 제출되었다.
금연캠프에 제공되는 진료, 상담, 교육에 성실히 임할 것을 서약합니다. 금연캠프 입소지침을 준수하겠습니다. 담배를 소지하거나 흡연을 할 경우, 타 입소자에게 선동을 하거나 사기저하를 유발할 경우, 금연캠프 수칙을 위반하였을 경우 강제 퇴소당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프로그램 이수를 하지 못할 경우 보증금은 환급되지 않으며, 추가 발생된 진료비 및 약물치료비 등은 추가로 부가됨을 인지하였습니다. 제공하는 모든 건강정보는 치료 및 연구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허락합니다.
전문치료형 금연캠프 7기 참가자는 모두 스물일곱명이었다. 여자가 1실에 여덟명, 남자가 3실에 열아홉명. 상주하는 간호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혈압과 체온, 체내 일산화탄소, 혈당 등을 체크하면서 입소자들의 건강상태를 관리한다. 신경정신과, 가정의학과, 내과, 검진과 상담을 비롯해 여섯개 기관의 전문교육이 포함되어 있다. 여섯명의 스태프들은 잡다한 모든 일들을 처리하며, 이동 시 응급상자를 들고 앞뒤좌우에서 가이드 역할을 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간혹 금단증상이나 혈당저하로 위급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므로 응급대처훈련을 받은 자들이다.
오징어와 인삼의 쟁탈전은 스태프 둘이 더 들어와 반강제로 수거한 후에야 끝이 났다. 괜히 사과를 꺼내서, 오징어만 아니었으면, 괜히 오징어는 받아 들어가지고. 궁싯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잦아들었다. 마침 작성해야 할 각종 서류들이 도착했으므로, 그들은 모두 각자의 침대에 올라앉아 간이 테이블을 내리고 조용히 볼펜을 들었다. 참가신청서, 서약서, 주의사항 확인서, 그리고 열 페이지가 넘는 심리평가 설문지까지.
‘매우 그렇다’에서 ‘매우 그렇지 않다’까지 모두 7단계. 당신의 상태를 체크하시오.
나는 지금 당장 담배를 피우고 싶다.
지금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가능하다면 지금 담배를 피울 것이다.
내가 지금 담배를 피울 수 있다면 지금 일들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담배이다.
나는 지금 담배를 너무 피우고 싶다.
지금 담배를 피우면 담배 맛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지금 담배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나를 덜 우울하게 만든다.
나는 가능하면 당장 담배를 피울 것이다.
……매우 그러하다.
두번째 날—니코틴은 죄가 없다
문서연(56) 저부터요? 언제 처음 피웠냐면, 초등학교 때부터 제가 할머니 담뱃불을 붙여드리고 그랬거든요. 그때부터 주구장창 피웠다는 게 아니라, 잠재력이 있었다는 거죠. 거부감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아무튼 삼십년 가까이 계속 피웠는데, 재작년에 사달이 난 거예요.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신장이 안 좋다는 거예요. 3분의 2를 잘라냈어요. 제가 술은 끊었잖아요. 그 좋아하는 술을. 그런데 담배는 안 되는 거예요. 나름 사업 이십팔년째 하고 있는데, 이게 사실 여자가 할 일이 아니거든. 고객이 다섯살부터 예순살까지 대부분 남자들인데, 별 이상한 놈들이 다 와, 이게 나름 사치품이라, 엑스박스, 플레이스테이션, 스위치. 게임기로 한 우물을 판 거죠. 그래서 제가요, 돈 많이 벌었어요. 명품 이런 거 다 사봤어. 그럼 뭐해, 일곱시간 대수술 받고 신장은 반도 안 남았는데. 그것 말고도 많아요. 무릎도 깨졌죠, 당뇨도 왔죠. 한달에 팔백만원씩 주고 면역력 높이는 약 먹고 치료해서 복귀했잖아요? 그런데 이게 아는 동생이라고 맡겨놨더니 완전 속여먹고 해 처먹고 아주 난리도 아냐. 스트레스 받으니까 또 피우는 거야. 사람들은 다 끊은 줄 알잖아요. 그렇게 아팠으면서 설마 또 피우겠어 그러니까, 숨어서 몰래 피우고. 아우 나 진짜 미친년 아냐? 이러다가 죽는 거 아냐?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그럴수록 더 피우는 거야. 미친년, 그러면서. 그래서 안 되겠다 하고, 여기 전화했는데, 다 찼다는 거야. 올해는 이제 끝이라고. 그래서 누구야, 조빛나 선생님인가, 아무튼 담당자 분한테 꼭 좀 해달라고 부탁 부탁해서, 혹시 안 오는 분 있으면 넣어주겠다고 약속을 받았는데, 어머나, 일주일 전에 취소자가 진짜 나온 거야. 하느님 부처님 베토벤님 감사합니다, 그러고 왔는데. 걱정도 되고 긴장도 되고 아우 막 그냥, 내가 어제 한숨도 못 잤잖아요. 나 진짜 담배 끊어야 돼요. 도와주세요, 네?
이금순(62) 우리 남편이 참 착해. 돈 착실히 벌어오고, 가족들 위하고, 또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지금까지 큰소리 한번 낸 적 없고, 아주 신사 중에 신사야. 그런데 그걸 내가 식당 한다고 싹 말아먹고, 또 뭐 한다고 싹 말아먹고, 대출까지 받아줬는데 사기당해서 홀라당 날려먹고, 얼마나 억울하고 미안한지, 안 되겠다 싶어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왔어. 찾지 마소. 미안해서 내가 살 수가 없소. 잊어버리소. 진짜 그렇게 썼다니까? 그러고는 춘천 어딘가로 갔어.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숙식 제공되는 식당에 들어갔지. 유명한 닭갈비집이었는데, 조선족 여자랑 방을 같이 썼어. 그런데 이 여자가 맨날 징징 펑펑 울면서 담배를 피우는 거야. 고향 그립다고. 그러면 나도 눈물이 나고 같이 담배도 피우고. 그때 시작했네, 담배를. 괜찮더라고? 그런데 신랑이 어찌 알고 거기까지 찾아왔네? 모르지, 어떻게 찾아왔는지. 안 물어봤응게. 신랑이 담배 한대 피워 물고는 나한테 그래. 다 잊어버리고 그만 돌아갑시다, 돈은 또 벌면 되제. 그래서 내 그랬지. 그 담배 하나 줘보라고. 보란 듯이 후우, 했어. 그럼 정떨어져서 돌아갈 줄 알았어. 그런데 남편이 그러데? 젖 줄 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맘껏 피우소, 피우고 잡은 대로 맘껏 피우소. 그때부턴 둘이 같이 피웠어. 차에서도 피우고 집에서도 피우고 놀러 다니면서 피우고. 아주 재미졌지. 담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어. 그런데 얼마 전에 신랑이 폐부종인가 뭔가로 병원 신세 지고는 담배를 딱 끊어뿌네. 정말 하루아침에 딱 끊어. 사이좋게 같이 피우다가 혼자 피우려니까 얼마나 심심해. 미안하기도 하고. 신랑은 괜찮다 그러는데, 에잇 나도 이참에 끊어보자 하고 왔지. 데려다주면서 그러더라고,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고. 그래도 끊겠다, 약속했으니 끊어야지.
이정희(57) 서초동에서 온 이정희예요. 우리 아버지가 술은 음식이니까 맘껏 즐기고, 돈은 빌리지도 꿔주지도 말고, 담배는 절대 가까이하지 마라, 늘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냥 한번 해볼까 하다 배우게 된 건데, 결혼하고 한동안은 안 피우다가 직장 다니면서 스트레스 받고 그러다보니까 다시 피우게 됐는데, 내가 누구한테 하소연하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몰래 담배 피우는 걸로 혼자 해결을 하는데, 그런데 이게 완전히 중독은 아닌 거 같은 게 뭐냐면, 밖에 나가면 한대도 안 피우거든요? 일할 때는 정말 거짓말처럼 담배 생각이 안 나고 집에 딱 들어서면 그때부터 피우는데, 저 담배 피우는 거 아무도 몰라요, 신랑도 직장이 지방이라 한달에 한번 오니까, 그래서 제가 담배가 급해요, 몰아서 피우고 숨어서 피우니까, 아주 빨라요, 빨리 빨고 빨리 끄고 빨리 냄새 빼고, 잠자기 전에 한대 피우고 와야 잠이 잘 오는데, 또 잠자리에 누워선 내가 왜 자꾸 이러나 후회하고, 내일부터는 절대로 안 피운다 해놓고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피우고, 새 담배를 변기에 다 버리고 나서는 금세 또 담배 사러 나가고, 그렇게 끊었다 피웠다 끊었다 피웠다, 시도도 많이 해봤는데, 구청, 보건소, 병원 이런 데 프로그램 다 해보고, 니코틴 패치도 붙여보고 니코틴 껌도 씹어보고 다 했는데, 길어야 일주일? 아무래도 담배를 끊으려고 피우는 게 아닌가, 이게 중독은 아닌 거 같은데, 또 아무 생각 없이 담뱃불을 붙이고는, 피우면서는 그만 피워야지, 이거만 피우고 끊어야지, 한대만 더 피우고 끊어야지, 내일부터 끊어야지,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오명자(74) 아니 나는 뭐, 지금 이 나이에 뭐 얼마나 더 오래 살겠다고, 담배를 끊니 마니, 그냥 피우다 죽지. 내 목소리가 원래는 안 이래. 아주 하늘하늘 예뻤다고, 정말이야. 성대결절 수술받고 이래. 그런데도 담배 안 끊었어. 수술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담배 피웠다고. 이게, 친구 같고 남편 같고 애인 같고 그런데 뭐하러 끊어. 이만한 게 어딨다고. 옛날에는 우리 할머니들 처마 밑에 주르르 앉아 담배들 피우고 그랬다고. 쪽 찐 노인네들이 주욱 앉아서 뻐끔뻐끔, 얼마나 이뻐, 응? 여자들은 몰라도 할머니들은 봐줬다고, 담배 피우는 거. 할머니는 여자가 아니야, 신선이지 신선. 내 말에 토 달지 말라고. 내가 남대문 큰손이야. 하루에 조물닥거리는 돈이 얼만 줄 알아? 한국은행이 ‘누님’ 하고 가. 나는 아쉬울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거든. 게다가 이렇게 머리 허연 신선이 됐으니까, 실컷 피우고 죽자 그랬는데. 아, 얼마 전에 손자애가 유치원에서 금연교육을 받고 온 모양이야. 담배 피우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도 죽는다고, 요상하게 배워와가지고서는, 멀리서 빙빙 돌면서 내 눈치만 봐. 그래서 내가 걔를 끌어다가 뽀뽀를 좀 했더니, 얘가 울고불고 할머니가 자기 죽이려고 한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제 할머니도 죽고 자기도 죽는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생난리를 치는데, 아이고 살면서 내 그런 꼴은 처음 당해봤다. 내가 자식이 늦어서 이제야 손주 보고 얼마나 물고 빨고 하는데, 이 며느리란 년이 이참에 담배 끊으라면서 발을 딱 끊어. 돈은 요래조래 다 뜯어가면서. 영어유치원이야 뭐야 그 돈이 어느 주머니에서 나가는데. 분하고 괘씸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내가 작정하고 왔잖아, 말도 안 하고. 여기 왔는지 몰라. 아까도 전화 왔는데 내 안 받아. 나갈 때까지 안 받을 거야. 그건 그렇고 내가 복지부에다 전화해서 따지려고 했어. 가르치려면 똑바로 가르치라고. 세상 이간질이나 하고 말야. 할머니가 손주새끼도 못 안고,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래서 담배 안 끊을 거냐고? 몰라. 생각 좀 해보고. 손주새끼 보려면 끊어야 되나.
서희주(58) 제가 결혼하고 바로 유학을 갔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게 바로 임신이 된 거예요. 학교는 잠시 멈추고 신랑 뒷바라지하고 애 키웠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게 우울증이 찾아온 거예요. 애 젖 먹이면서 막 울고 그랬어요. 멍하니 앉아 있고 하니까 친구가 담배를 권해요, 피울 줄도 모르고 그냥 뻐끔담배였는데, 그게 그렇게 위안이 되더라고요. 신랑도 뭐 그냥 귀엽게 봐주고. 한국 돌아와서는 안 피웠어요. 안 피웠는데 이제, 지금 제가 친정엄마랑 같이 살거든요? 사실 가깝고도 불편한 게 친정엄마잖아요. 게다가 치매 초긴데, 아주 죽겠어요. 엉뚱한 얘기를 하고 어거지를 쓰고, 나한테만 그래요, 다른 사람한텐 아주 친절하고 멀쩡하게 굴면서. 이제 팔십육센데,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우렁우렁하고 겉으론 정말 건장하세요. 그래서 이제 제가 감당이 안 돼요. 같이 화를 낼 순 없으니까, 심호흡이라도 하려고 담배를 피우는 건데, 가슴이 뻥 뚫려요. 애 아빠하고 얘기해서 요양원, 아니 실버타운에 모시자고 얘기 중이에요. 분당에, 시설이 꽤 괜찮은 곳이 있는데, 그게 훨씬 현명한 생각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집에서 지지고 볶고 하느라 진 빼지 말고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좋다구. 어머니만 아니면 담배 끊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제가 몸도 약하고 혈압도 낮고, 먹는 약이 참 많거든요. 이제 담배까지 피우니까 몸이 감당이 안 돼요. 저도 살아야 하잖아요. 정말 못 살겠어요. 피가 말라서.
김숙희(59) 난 담배 피우면 안 되는데. 후두에 용종이 생겨서 세개 떼어냈고, 갑상선 수술도 했고, 후두염도 있고, 뇌가 뭐 어쩌구저쩌구 해가지고서는 평생 약을 먹어야 된다고. 혈압 당기는 일이 하도 많아서 고혈압도 있어. 성질 급하면 그렇잖아. 내가 그냥 들이받어. 이렇게 말랐어도 힘이 아주 세다고. 그런데 인하대 교수님이, 내 목 봐주시는 분인데, 그분이 약 처방전 내주면서 이게 마지막이래. 담배 안 끊으면 앞으로 찾아오지 마세요, 이래. 안 끊을 수가 없는 거지. 목 댕가당 안 하려면 끊어야지. 내가 애기 가졌을 때 속이 매스꺼워서 피우기 시작한 거거든. 뭘 먹어도 다 토해. 이러다 내가 먼저 죽겠다 싶어서 애를 떼러 갔어, 산부인과에. 접수까지 다 하고 기다리는데, 옆에서 누가 담배를 피워보래. 그래서 피워봤더니, 어라? 매스꺼운 게 딱 멈추네? 담배 아니었으면 우리 아들,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어. 그날 저세상 갔지, 켁. 그러니 얼마나 고마워, 담배가. 우리 아들이 지금 서른다섯이야. 그러니까 삼십오년을 계속 피웠다는 건데, 교수님이 끊으라니까 끊어야지. 그런데 이게 또 혈압 당기는 일이 생기면 안 피울 수가 없잖아? 사람 사는 일이 뭐 다 그렇겠지만. 그게 문제야. 사느냐 죽느냐, 응? 그거 있잖아 문제로다, 응? 끊느냐, 죽느냐. 당신들도 살고 싶으면 담배 피우지 마.
오현주(49) 저는 지금까지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처음부터 담배가 좋았고, 지금도 좋아요. 특별히 아픈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피우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 입학식날 선배들한테 가르쳐달라고 졸랐는데, 정말 기침 한번 안 하고 배웠잖아요. 그땐 담배를 피우는 게 당연해 보였는데. 대학 교정, 담배, 낭만, 해방, 청춘. 그런 게 다 하나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 한잔에 담배 한모금이면 기분이 참 좋잖아요. 뇌가 쫙 오그라들면서 몸이 팽팽해지는 느낌이랄까?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 애연가예요. 까뮈가 피웠다는 골루아즈 구하려고 첫 해외여행을 빠리로 갔잖아요? 골루아즈요. 담배의 여신이죠. 저희 할머니는 열네살부터 담배를 피웠다는데 칠십년을 피우고 가셨거든요? 아주 정정하셨어요. 욕실에서 미끄러지지만 않았으면 백수 하셨을 거예요. 엉치뼈가 바스라져 수술하다가 돌아가셨어요. 제가 할머니 닮아서 폐가 튼튼해요. 술 담배 안 하고 살아도 암에 걸릴 사람은 다 걸리게 되어 있어요. 내력이 그렇게 중요하다니까요. 제가 뭐 대단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게 아니라, 우리 집안에 암은 없으니까. 아무튼 흡연도 그냥 좀 자연스럽게 놔두면 좋겠어요. 요즘엔 정말 너무들 한다 싶어요. 국가가 나서서 왜 이렇게 토끼몰이를 하는지. 앗, 저 이러다 여기서 쫓겨나나요? 선동죄로? 아무튼 제가 약간 반동기질이 있어서. 그럴수록 안 끊는다, 목숨 다 바쳐 담배를 지킨다, 뭐 그런 생각이었거든요. 금연 생각은 단 한번도 안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내년에 오십이 되는데, 뭔가 인생이 허무해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러는데, 갑자기 지긋지긋해졌어요.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을 계속 좋아할 수가 있지? 삼십년씩이나? 갑자기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래서 헤어지기로 했어요. 네에, 담배하고요. 일단 일년만 끊어보고 그다음에. 담배 없이도 살 수 있는 걸 보여주고 괜찮다 싶으면 계속 안 피우고. 그래서 신청을 했어요. 그런데 전 딱 끊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처음 시작할 때처럼. 멋있게. 멋진 게 중요하니까요.
윤다영(35) 담배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피웠어요. 처음엔 할아버지 거 훔쳐 피웠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담배를 구할 데가 없었어요. 친구들하고 돈 모아서 아저씨들한테 사달라고 했어요. 잘될 때도 있었는데 나쁜 아저씨들도 있었어요. 쓰레기통 뒤지기 시작했어요. 재떨이도 뒤지고. 길바닥도 뒤지고. 정말 더러웠어요. 가래침도 막 묻어 있고. 쓰레기년이 된 것 같았어요. 걸으면서도 담배꽁초밖에 안 보였어요. 장초를 주우면 모아뒀다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몰아서 피웠어요. 어떻게 하면 담배를 구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했어요. 구걸을 하기 시작했어요. 주로 편의점이나 마을버스 내리는 데에 서 있었어요. 버스에서 내리면 일단 담배부터 무니까. 처음엔 괜찮았어요. 한갑씩 사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다들 저를 알아보는 거예요. 담배 구걸하는 계집애라고. 담배하나만. 제 별명이에요. 저기 담배하나만 지나간다. 꼬마들이 그래요. 엄마가 동네 창피하다고 못 나가게 했어요.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옷, 가방 다 뒤져서 담배, 라이터 찾아내요. 쓰레기통 뒤지면 짜증 나요. 제가 더 싫어요. 정말 쓰레기거지 같아요. 그런데 뽄드 빠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뽄드는 정말 무서운 거니까. 친구들 뽄드도 많이 했는데, 전 한번도 안 했어요. 직장이요? 저 같은 쓰레기년을 누가 채용해요. 편의점 알바 한번 했었는데, 담배 때문에, 자꾸 왔다 갔다 하니까, 사흘 만에 나가라고.
여러분은 잘못이 없어요. 담당의가 사람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온화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냥 잘못 배웠던 것뿐이에요.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스트레스 회복 능력, 자기조절 능력, 문제대처 능력, 이런 건 그냥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발달시켜야 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여러분은 담배한테 다 맡기셨어요. 담배만큼 쉬운 게 없으니까. 그것 말고는 다른 걸 할 줄 몰랐으니까. 니코틴이 뇌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7초예요. 정말 빠르죠. 그보다 빠른 건 마약 말고 없어요. 담배 회사들은 엄청난 돈을 들여서 연구해왔어요.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을 더 줄일 수 있을까. 단맛을 가미하면 1초가 준다는 사실을 알아냈죠. 또 어떤 맛을 가미할까, 어떤 향이 좋을까, 어떤 성분을 넣을까. 커피? 박하? 살균제? 표백제? 그렇게 0.1초씩 줄여가면서 계속 진화해왔어요. 그래야 고객을 늘릴 수 있으니까. 늘리기만 하면 붙잡고 안 놔주는 건 뇌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걸 어떻게 이겨요. 못 이겨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담배, 네 좋은 친구였죠. 애인이었죠, 자식 같았죠. 맞아요, 담배가 그 기능들을 해왔어요. 스트레스 받을 때, 심심할 때, 즐거울 때, 그 옆에는 언제나 담배가 있었어요. 이걸 대체할 만한 걸 만들어두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요. 참는 걸로 안 돼요.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 인정하세요. 억압할수록 나를 속여요. 이렇게까지 참았는데 한대만 피우자. 결국엔 내가 나를 속여서 피우는 거예요. 이제부터 하실 거는 그 양가감정을 인정하시는 거예요. 좋은 친구였어. 그런데 이제는 다른 친구를 좀 만나볼까 해. 담배 피우고 싶다, 딱 3분이에요. 3분만 다른 걸 해보시는 거예요. 그냥 숨만 쉬세요. 지나갈 거예요. 한두시간 후에 또 오겠죠? 그럼 또 3분 스트레칭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3분씩 쌓아간다고 생각해보세요. 감각이 살아나고 미각이 돌아오고 간이 싱싱해지고 건강해지고 고혈압이 없어져요. 담배를 안 피우니까 이런 보상이 와요. 우리 뇌는 보상에 움직여요. 보상을 생각해두세요. 담배를 안 피우면 이런 좋은 점이 있어.
여러분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오셨겠지만, 제 목표는 여러분들의 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보는 거예요. 이 기회에 내 생활을 돌아보고, 금연을 수단으로 해서 여러분 삶의 질을 다르게 만들고 싶은 거예요. 사실 니코틴은 죄가 없어요. 그냥 자기 일을 했던 것뿐이에요. 여러분도 죄가 없어요. 방법을 몰랐을 뿐이에요. 지금까지 어땠는지는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 차근차근 배워갈 거예요. 조급해하지 마세요. 하실 수 있어요. 본인에게 관대하세요. 남들은 잘하는데 비교하지 마세요. 못할 수 있어요. 고작 며칠 만에 수십년 해온 걸 끊는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잖아요? 이제부터 어린애가 되셔야 해요. 어린애들은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워가잖아요? 배워야 다시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어린애처럼 다시 배워가시는 거예요. 여태까지 오해하고 있었던 것,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그걸 배우고 외우는 거예요. 단어 외우듯이.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세번째 날—니코틴의 자리
잠에서 깨어난 서희주는 몸이 아주 가볍게 느껴졌다. 어린애처럼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뒤척임도 없이 푹 자고 일어난 것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손싸개도 잊어버리고 잤다. 살펴보니 새로 물어뜯은 상처도 없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손톱 주변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었다. 베갯잇이 피범벅일 때도 있었다. 자는 동안에만 그랬다. 평상시에는 괜찮았다. 밤에는 뜯고 낮에는 치료했다. 무의식은 그렇게나 힘이 셌다. 이제 더이상 손싸개가 필요 없을지도 몰랐다. 희망찬 아침이었다.
어이구 이제 사람 얼굴이 좀 나오네. 오명자가 실실 웃으며 서희주 쪽으로 다가갔다. 머리 세팅에서 마스카라까지 완벽하게 마친 상태였다. 보라색 원피스 실내복에 호박 귀걸이까지. 서희주의 눈에는 좀 과하다 싶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머나 일찍 일어나셨나봐요, 벌써 준비를 다 하시고. 일찍이 아니라 밤새 변소 가느라 못 잤잖아, 애기엄마는 아주 죽은 듯이 자더만, 코를 쌕쌕 골면서. 어머나, 제가 코를 골아요? 저 코 안 고는데? 그쪽은 쌕쌕, 저쪽은 푸푸, 이쪽은 드렁드렁, 아주 재미지더라구. 진짜 세상모르고 잤어요. 병원 체질인가봐? 이틀 만에 얼굴이 아주 뽀얘졌어? 처음에 들어올 때는 시커머니 귀신 같더니.
서희주는 오명자의 말에 가시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딱 친정엄마 말투였다. 무언가 들킨 기분이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잠시 떠나 있기를 권했다. 마음이 자꾸 오락가락하니 내린 방도였다. 캠프 신청을 먼저 하고 엄마의 입원 날짜를 맞췄다. 바로 오늘이었다. 그녀가 없는 사이 남편이 알아서 할 것이었다. 그녀는 손대지 않아도 되었다. 분당에서 제일 좋은 요양원이었다. 시설은 넘치게 완벽했다. 갑자기 이가 근질거렸다. 이가 나기 시작한 갓난쟁이처럼. 그녀는 손으로 얼른 입을 가렸다. 오명자가 놓치지 않고 물었다. 손이 왜 그래? 아 이거, 제가 밤새 물어뜯는대요, 평상시에는 안 그러는데. 자면서? 네. 스트레스 땜에? 네. 애도 아니고? 네. 이빨로? 네. 차라리 남편을 물어, 자기 몸 뜯지 말고. 서희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오명자는 혀를 쯧쯧 차고는 리모컨을 가지고 침대로 돌아와 앉았다. 채널을 찾아 고정하고 볼륨을 높였다. 일단은 「아현동 마님」, 끝나면 「용왕님 보우하사」, 그다음은 「강남스캔들」. 「강남스캔들」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재미가 덜해졌지만, 그래도 아직 들통 날 악행이 남아 있었다. 출생의 비밀이고 암투고 음모고 계략이고를 떠나서, 부유한 회장님을 둘러싼 쟁탈전은 언제 봐도 흥미진진했다. 돈을 쥐고 있어야 자식들에게 무시를 안 당하지. 오명자는 거의 모든 지혜를 드라마에서 얻었다. 텔레비전 소리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진과 함께 공식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혈압, 혈당, 일산화탄소 측정. 체내 일산화탄소 측정은 금연의 바로미터였다. 첫날 10~20 정도였던 수치는 하루 만에 한자리수로 내려갔고, 거기서 반으로 내려가 2~5를 오갔다. 그것은 폐가 깨끗해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보십시오. 담배를 며칠 끊은 것만으로도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연탄가스를 마시다가 솔숲에 들어선 것과 같았다. 회진이 끝나면 아침식사가 배달되고 이어서 개인별 투약 여부를 확인했다. 대부분 당뇨, 고혈압, 신장, 류머티즘 중의 한두가지의 조합으로 병을 앓고 있었다. 그밖에 각종 비타민과 영양제들. 그리고 모두의 챔픽스. 챔픽스는 금연보조약이었다. 니코틴이 들어왔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니코틴은 아니지만 니코틴의 역할을 대신 하는, 현재로선 가장 성공률이 높은 금연보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사흘 동안 담배 생각이 나지 않은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챔픽스 덕분인지도 몰랐다.
뭐가 그렇게 많아요? 나도 약 많은데 이 언니는 진짜 많으시다. 문서연이 김숙희의 약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나도 몰라, 먹으라니까 먹는 건데, 이건 목에 먹는 거고 이건 고혈압, 항산화제, 비타민D, 이건 비타민 뭐냐, 암튼 그렇고 이건 머리 영양제. 머리 좋아지는 약이에요? 무슨 오일 같은 거예요? 이정희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갔다.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이게 사연이 있어. 어머, 재밌겠다. 문서연이 김숙희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작년에 내가 손님하고 대판 싸운 적이 있거든? 그거 있잖아, 맥주병 담아 놓는 플라스틱 박스. 그걸로 맞았다고 머리를. 나도 욕 디지게 해줬으니까 쌤쌤이긴 한데. 다음 날 머리가 진짜 아픈 거야. 뭐가 문제가 있구나 했지. 이거 친 놈이 돈 많은 놈인 걸 내가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이놈 어디 당해봐라 하고 병원에 갔지. 아무 이상 없대. 그런데 잘 오셨대. 뭔 말이냐 그랬더니, 원래 내 뇌가 이상하게 생겨먹었다는 거야. 호두로 치면 바싹 말라서 곧 바스라지게 생긴 거라나?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바로 시술받았어, 전신 마취하고 무슨 관을 심어서 넓히고. 그러고도 뇌 영양제는 계속 먹어. 좋은 약이라고 이게. 아무나 처방받을 수 있는 게 아냐. 대뇌동맥류. 시술 이력이 딱 나오니까.
어머나, 다행인 거네. 그놈한테 돈 좀 뜯어냈어요? 뜯긴 뭘 뜯어. 내가 장어 샀는데. 엥? 왜에? 돈을 왕창 뜯어냈어야지, 돈 많은 놈이라며, 이 언니 진짜 머리 돈 거 아냐? 진단비, 치료비 해서 2천 나왔는데 실손보험에서 2,740 받았어. 지네들이 알아서 그렇게 책정하더라고. 돈이 남잖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야 이눔아 네가 나를 살렸구나, 그래서 내가 전화해서 나와, 그랬지. 그러고 강화까지 가서 장어에다 술도 아주 비싼 거 샀다고 내가.
어머나 웬일이래, 돈을 뜯어야지 장어까지 사? 미쳤어 미쳤어. 문서연은 한몫 챙길 기회를 놓쳤다며 아쉬워했다. 오현주는 뇌 영양제를 처방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이금순과 이정희는 실손보험으로 받을 수 있는 것과 받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했다. 오명자는 변함없이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옆 사람의 쪼그라든 뇌보다는 회장님의 뇌출혈이 더 중요했다. 서희주는 환기를 하기 위해 창가로 갔다가 윤다영의 손을 보았다. 윤다영은 엄지손톱 주변의 거스러미를 떼고 있었다. 아주 느린 동작으로 세심하고도 집요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보지도 않고 손의 촉감만으로 정확하게. 윤다영의 손은 이미 다른 생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손톱은 물론 손가락 마디마디 손등 손목 할 것 없이 상처와 흉터로 뒤범벅이었다. 그녀는 밤새 자신이 해왔던 일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것 같았다. 서희주는 불쾌했다. 저런 쓰레기 같은 애랑 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니. 그녀는 도망치듯 병실 밖으로 나갔다.
방 안 대부분의 사람들도 서희주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룹 상담 후 참가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동지애가 형성되었다. 고백을 한 것만으로도 서로 위안받은 느낌이었다. 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합심해서 역경을 헤치고, 어려움을 극복하여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와 믿음. 그것이 바로 모든 캠프의 존재 의미였다. 서로 보듬고 응원해주는 아군들의 야영. 하지만 윤다영은 거기 포함되지 않았다. 윤다영은 외면하고 싶은 어떤 것이었다. 오현주는 윤다영이 입구를 지나갈 때마다 자기 몸 냄새를 확인했다. 입고 왔던 외투에 남은 담배 냄새가 역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동안 자신에게서 윤다영과 비슷한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래서 오현주는 반드시 담배를 끊기로 다짐했다.
이금순은 윤다영과 동갑인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그녀가 식당을 하느라 집안일을 돌보지 못한 동안, 딸은 망원동 시장 골목에서 본드를 빨았다. 본드며 담배며 사내새끼들이며. 결국 본드에 취해 해롱거리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고시원으로 내쫓아버렸다. 네 맘대로 하고 살아라. 그 꼴을 보며 속을 끓이느니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게 나았다. 그나마 얼굴도 반반하고 귀염성도 있어 지금은 남자 잘 만나 예쁨받으며 잘 살고 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졌다. ‘뽄드는 정말 무서운 거니까.’ 저런 쓰레기년도 무서워한 본드를 내 딸년이. 누가 알까 두려웠다.
이정희는 버린 담배를 찾아내느라 골몰하던 순간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담배가 떨어지면 재떨이에서 장초를 찾아 피우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건 자기 것이었다. 제 침이 묻고 제 가래 속에 묻혀 있던 것. 생각해보니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린 담배를 꺼내 드라이기로 말린 적도 있었다. 쓰레기년. 윤다영이 그 말을 내뱉었을 때, 이정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젠가 그녀도 자신에게 비슷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난 쓰레기야,라고. 오명자 역시 윤다영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처음 볼 때부터 낯빛이 음침하고 눈 밑이 어두운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듣자 하니 부모 피나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이 분명했다. 그렇게 혀를 차다보면 자기 자식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늦게 본 외동아들은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돈으로 말아먹은 사업만 두 손 두 발 다 꼽아도 모자랐다. 오명자는 가래를 끌어올려 뱉어버리고, 다음 회장님의 잃어버린 자식을 보기 위해 채널을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다영은 하염없이 손톱 살을 쥐어뜯으며 테이블 위 일정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9시 운동 프로그램(지하1층 피트니스센터) 11시 담배의 해로움과 흡연 갈망(별관 프로그램실) 12시 중식(금연캠프 숙소) 1~5시 건강검진(본관 4층) 5시 금연과 구강관리(별관 프로그램실) 6시 석식(별관 1층 푸드미셸) 7시 금연을 위한 미술치료(별관 프로그램실). 오늘은 정말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네번째 날—니코틴의 일
제일 먼저 금단현상이 나타난 사람은 오명자였다. 기미는 전날부터 있었다. 미술치료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중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밤 9시까지 이어지는 일정을 소화하기에 체력적으로 무리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챔픽스의 부작용일지도. 하지만 문서연이 ‘금단이야 금단, 금단이라고’ 몸서리치며 말했을 때, 오명자의 그것은 금단현상으로 확정 지어졌다. 악마를 지목하는 듯한 말투였다. 문서연은 진심으로 걱정했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찾아올지 모를, 어쩌면 반드시 올 것이 분명한 수난이었으므로.
다음 날 아침 오명자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몸을 덜덜 떨며 일어나지 못했다. 평소라면 밤새 말고 자던 헤어롤을 떼어내고 화장까지 완벽하게 마쳤을 그녀였다. 옆자리의 이금순은 자신도 어쩐지 머리가 어찔어찔하며 귀울음이 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명자는 오전 내내 구역질을 하며 가래를 뱉어냈다. 우엑 우에엑 웩. 그 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매스꺼움을 느꼈다. 오현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얼마나 오래갈까요? 글쎄, 사람마다 달라서. 몸이 쇼하는 거야. 늘 주던 걸 안 주니까. 금단으로는 일가견이 있는 이정희가 대답했다. 금단으로는 안 죽어, 간혹 쇼크가 오기도 하는데, 그건 당뇨니 뭐니 다른 병이 있어서 그런 거야. 니코틴이 참 무섭네요. 니코틴은 사흘이면 없어져, 그니까 삼일 만에 다시 피우는 거잖아. 작심삼일.
오전에 예정되어 있던 서래마을로의 산책은 비 때문에 취소되었다. 운영진에서는 산책 일정을 금연영상 시청으로 대체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보건복지부 금연광고에, 「생로병사의 비밀」에, 유아흡연예방교육지침 인포그래픽에, 담배규제기본협약 모션그래픽에, 지긋지긋하게 들어왔던 얘기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하는 것이 좋은 영향을 미칠 리가 없었다. 숯검댕이처럼 까매진 폐와 쭈글쭈글한 뇌는 더이상 경각심을 주지 못했다. 담배 케이스에 적힌 뻔한 경고 문구와도 같았다. 그것은 오히려 감금된 상황을 부각시킬 뿐이었다.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병실에서 화장실까지 스무걸음 남짓한 복도뿐. 다들 침대에 누워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무료함을 견뎠다.
점심식사 후엔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오후 일정은 건강검진과 심리테스트를 기초로 한 개인 면담이었다. 의사는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면담을 하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리는 대로, 면담을 마친 사람은 마친 대로 지루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김숙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잤고, 서희주도 두 손을 꼭 모은 채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나마 컬러링북을 가져다 색칠을 시작한 이금순만이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서연은 끊임없이 짜증 나,를 연발하며 이곳저곳 배회하고 다녔다. 게임기를 쓸 수 없어서 짜증이 났고, 누군가 답답하게 커튼을 치고 있어서 짜증이 났고, 금단현상이 올까봐 두려워서 짜증이 났다. 짜증도 전염이 되는지 이정희는 문서연의 목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났다. 금연영상은 여전히 반복재생 중이었다.
개인 면담을 다녀온 오현주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유전자가 어떻고 타고난 폐가 어떻고 하며 자신했었는데, 폐 CT촬영 결과가 좋지 않았다. 칠순이 넘은 오명자도 폐는 아주 깨끗하게 나왔다며 자랑했는데 혼자 이상 징후가 나왔다. 오현주는 의사의 설명을 복기해보았다. 기도 부분에 염증이 있는데, 큰 문제는 아니구요. 폐로 가다보면 여기 표시를 해놨잖아요, 여기 흰 부분. 이게 문제인데. 이렇게 이어지는 게 혈관이고, 이건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지죠. 염증인지 흉터인지 결절인지, 지금으로선 결절 같아요. 어쨌든 이상 징후는 이상 징후예요. 크기가 1센티 이하 두개니까, 이럴 땐 예후를 본다고 해요. 육개월 뒤에 사진 찍어보고, 변화를 보고 판단할 거예요. 기고만장. 사필귀정. 오현주는 캠프에 참가한 뒤 처음으로 담배가 몹시 그리웠다. 딱 한대만 피우고 나면 진정이 좀 될 텐데. 오현주는 담배 연기를 내뿜듯 입술을 모으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우.
아니 나한테 왜 자꾸 전화질이야. 엄마가 알아서 하라고. 그걸 꼭 나한테 전화를 해서 일일이 보고를 해야겠어? 전화를 받던 문서연이 갑자기 소리를 질러댔다. 복도 끝까지 전해질 정도로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아 짜증 나 진짜. 알아서 하라고, 구워 먹든 삶아 먹든. 그렇게 짜증 나면 망치 들고 가서 머리통을 부숴버리든가. 칼로 쑤셔버리든가. 엄마 맘대로 해. 깜빵은 내가 대신 가줄 테니까. 엄마 한탄 듣고 있으면 내가 돌아버리겠어. 나 지금 병원이거든? 그만 짜증 나게 하고, 전화 끊어. 아픈 거 아니고, 알 거 없어, 끊어, 끊으라고 그냥. 끊어엇!
모두가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천박하기가, 오명자가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문서연이 뒤늦게 목소리 톤을 바꿔 사건의 내력을 주절거렸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게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무기력하게 조용했다. 내내 잠을 자던 김숙희가 불쑥 일어나더니 가방을 뒤졌다. 으하하하 자 이것들 먹읍시다, 내 깜빡 잊고 있었네. 김숙희는 손님들에게 나눠주는 거라며 홍삼 맛 젤리를 꺼냈다. 이제 금연들 하시면 이 맛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응? 담배 맛 젤리라고 생각들 하셔. 김숙희가 건들건들 병실을 돌았다. 다들 거절하지 않고 젤리를 받아 씹었다.
비가 계속 오네요, 비 오는 날 담배가 참 맛있는데. 오현주가 창가 쪽으로 가며 말했다. 약간 커피 냄새 비슷하기도 하고. 오현주의 목소리가 촉촉했다. 저 언니 왜 저래 커피 마시고 싶잖아. 커피는 출소하면 마셔. 저 언니는 꼭 출소라고 그런다, 여기가 감방도 아니고. 난 쨍한 날 담배가 더 좋던데. 그래서 일부러 겉을 살짝 구우면 그 맛이 나잖아, 파삭파삭 쨍한 맛. 담배는 다 맛있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가 뜨나. 울면서 피워보셨어요? 당연하지, 눈물 젖은 빵이지, 울면서 담배 피워본 적 없는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안 그래? 그렇죠. 해가 쨍한 날의 담배가 대마초 같은 거라면 비 오는 날의 담배는 히로뽕 같은 거지. 대마초 해보셨어요? 내가 뭘 안 해봤겠어.
아우 자꾸 담배 얘기 하지 마요. 나 정말 금연해야 해요. 진짜 꿈에서도 금연 금연 그런다니까? 어제 이주일도 나왔어. 나와가지고 담배 피우지 말라고. 자기처럼 된다고. 막 기침하면서. 기분 드러워 죽는 줄 알았잖아. 좀 잘생긴 사람 나와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 현빈 같은 애가 부드럽게 누님 몸에 해로워요. 아니, 언제 적 현빈이야. 그럼 누가 좋아? 저 류준열이요. 그 못생긴 애? 얼마나 귀여운데요. 그런데 정말 끊으실 거예요? 나? 끊어야지. 끊으러 온 거잖아. 내일부터가 걱정이에요, 지금이야 뭐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생각도 안 나고 그러는데. 술을 끊어야 돼. 술 먹으면 도로 아미타불이야. 끊으실 수 있겠어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오십년을 피웠는데. 전 삼십년요. 나 삼십오년. 우리 다 합치면 한 삼백년 되려나? 이백년은 넘을걸요? 저 옆방까지 합치면 한 오백년이다 그지? 한오백년…… 참 징하게들 피워댔다. 그러니까 이제 끊을 때도 됐어. 정말 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저는요! 갑자기 뚫고 들어오는 윤다영의 목소리.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병실 안이 고요해졌다. 그룹 상담 때를 제외하고는 입을 뗀 적이 없던 그녀였다.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열리듯 모두의 눈이 한곳을 향했다.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윤다영이 천천히 말을 했다.
저는요, 내일이면 담배를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행복해요.
아, 저 씨발년.
마지막 날—아무도 모를 일
퇴소식은 오전 아홉시였다. 마지막 날의 일정은 아침식사와 퇴소식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이미 식사 전부터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떠날 준비를 했다. 몇몇 사람들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가방을 들고 복도로 나와 있기도 했다. 중도 퇴소 없이 전원 목적을 달성한 성공적인 캠프였다. 스태프로 활동했던 임시직들은 각자 학교나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파견 나온 운영진들은 보건복지부 산하 금연지원센터 제 책상을 찾아갈 것이다. 암연구센터와 층을 나눠 쓰는 베이스캠프는 다음 캠프가 시작될 때까지 잠겨 있을 것이다.
각자 이름이 적힌 수료증을 받았다. 앞으로 24주를 금연에 성공할 경우, 그날까지 든 진료비와 약값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증서이기도 했다. 금연캠프 성공 기념으로 함께 점심을 먹고 헤어지자고 했던 문서연 이금순 이정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음 기회에 만나 금연을 확인하자며 약속을 변경했다. 서희주는 캠프에 도착할 때와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 앞에서 남편이 보낸 기사에게 캐리어를 건넸다. 오명자는 손주 얼굴에 입술을 부빌 생각을 하니 모든 금단증상이 사라졌다. 김숙희는 아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고양시에 있는 숯가마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오현주는 자기 자신에게 상을 주는 의미로 일산까지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모두 서로의 안녕을 빌었지만,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육지에 도착한 뱃사람들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제 갈 길을 갔다. 그들이 금연에 성공할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윤다영은 갈 바를 정하지 못하고 병원 입구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상처투성이 손에는 전날 제출하지 않은 설문지 한장이 들려 있었다. 매일 저녁, ‘매우 그렇다’에서 ‘매우 그렇지 않다’까지 7단계로 자신의 상태를 표시해오던 바로 그것. 윤다영은 설문지 질문 하나하나를 오래오래 곱씹었다. 윤다영에게 그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이었다.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가능하다면 지금, 가능하면 당장, 지금 가장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또한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매우와 매우 사이 어디쯤일지.
나는 지금 당장 담배를 피우고 싶다.
지금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가능하다면 지금 담배를 피울 것이다.
내가 지금 담배를 피울 수 있다면 지금 일들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은 담배이다.
나는 지금 담배를 너무 피우고 싶다.
지금 담배를 피우면 담배 맛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지금 담배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나를 덜 우울하게 만든다.
나는 가능하면 당장 담배를 피울 것이다.
확실한 한가지는, 담배 맛이 좋았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
윤다영은 아직 담배 맛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