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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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평론집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김행숙 金杏淑

시인. 시집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1914년』 등이 있음. fromtomu@hanmail.net

 

하성란 河成蘭

소설가. 소설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웨하스』 『여름의 맛』, 장편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 『A』 등이 있음. rifleha@hanmail.net

 

 

왼쪽부터 김수이 하성란 김행숙 Ⓒ 김준연

왼쪽부터 김수이 하성란 김행숙 Ⓒ 김준연

 

 

하성란 지난호에 이어 김수이 평론가와 함께 문학초점을 맡은 소설가 하성란입니다. 오늘은 김행숙 시인이 함께 자리해주셨습니다. 여름호 준비를 하는 지금이 4월이어서인지 4월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마침 오늘 대화 나눌 작품들에서도 세월호참사에 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느 때보다 남다른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자리에 왔습니다.

 

김수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는 이제 세월호의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4월들이 ‘떠오르는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진실’의 시간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김행숙 여섯권의 책을 가방에 넣어 오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묵직함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지 가방의 물리적인 무게 때문만은 아니었겠죠. 혼자 읽은 책이 이 자리를 통과하면서 더 두툼해질 것 같습니다.

 

 

김희선 『골든 에이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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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김희선 소설집 『골든 에이지』부터 얘기 나눠볼까요. 김희선은 예전부터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왔어요. 수록작인 「공의 기원」을 읽고 ‘사실적인 뻥’이라고 말한 작가도 있는데요, 허무맹랑할 수 있는 전개를 통해서도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는 점에서 이 시대를 향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월호참사(「골든 에이지」)와 아동 노동착취(「공의 기원」)는 물론 노벨문학상의 스웨덴 한림원(「18인의 노인들」)까지 시야가 넓습니다. 무엇보다 역사 속 무명의 삶을 살다 간 인물들을 이야기로 되살려내는 점이 좋았습니다. 이제 김희선에게 이야기가 되지 않을 이야기는 없어 보입니다.

 

김행숙 앞서 이미 두권의 책을 낸 작가인데, 저로서는 한국문학사에서 희귀하고 독자적인 방법론을 가진 한명의 소설가를 뒤늦게 발견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들을 가로지르면서 이렇게 송곳처럼 현실의 폐부를 찌르다니,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그의 ‘방법론’에서 ‘기술’이라기보다는 작가적 ‘역량’에 가까운 어떤 것을 느꼈습니다. 김희선의 서사는 사방으로 ‘샛길들’을 발명합니다. 여러개의 버전으로 이야기는 증식하고 가지를 뻗어나가요. 그에게 진실은 하나의 ‘믿음’에 닻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믿음들’을 상대화하고 불투명하게 하면서 그 사이사이에서 감춰지는 듯 드러나는 방식으로 설핏 스쳐갑니다. 그는 기억을 통해 망각의 지층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망각의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지위를 가진 고정된 기억의 못을 뽑아 출렁이게 하고 흐르게 합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기억, 말하자면 상징계라는 것이 실은 얼마나 허약한지를 「골든 에이지」는 잘 보여주지요. 여기에 나오는 “참 이상하지? 망각이라는 놈의 정체 말이야”(257면)라는 문장의 행간은, 기억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기억이 아니라 망각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김수이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소설의 재미와 상상력, 독특한 서사 미학, 장르물과 SF의 감각, 사회적·역사적 문제의식 등을 고루 갖춘 작품이어서 즐겁게 빠져들어 읽었습니다. 홀로그램 우주, 과떼말라시티의 쓰레기산, 버뮤다 삼각지대의 공간이동 통로 등 소재들이 다양한데, 이것들이 단순히 소재가 아닌 알레고리로 기능하면서 소설의 층을 두텁게 합니다. 가령 「조각공원」의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냉동인간들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죠. 김희선은 세월호와 같은 한국사회의 비극적인 문제와 함께 자본주의, 지구환경, 난민, 미래의 기술과 인간의 운명 등을 포괄한 인류 공동의 거대한 문제를 다채로운 알레고리로 농축하면서, 생존과 생계의 감각에서 대중적인 흥미까지 아우릅니다. 여러겹의 속살을 지닌 페이스트리처럼 풍성하고도 바삭한 느낌이에요. 젊은 작가들이 써나가는 새로운 서사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커졌습니다.

 

하성란

하성란

하성란 첫 소설집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그 집요함에 놀라게 됩니다. 한번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만도 한데, 납득이 되는 방법을 찾기보단 어떤 방법으로든 납득시키려 해왔다고 할까요. 「골든 에이지」를 발표 당시에 읽었을 때는 그 비극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과학적인 이론들이 엉성하고 터무니없지 않나 생각했어요. 이번에 찬찬히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들었던 의심이 사라졌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납득이 되고 만 거죠. 이 작가는 이런 시도를 통해 위로와 애도의 과정을 거쳐야 했구나, 느꼈습니다. 「골든 에이지」의 노인은 어느 한 시기를 되풀이해서 살게 되는데, 그날이 바로 4월 15일이에요. 그전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노인은 그 날짜를 택할 수밖에 없죠. 수학여행을 떠나면서 들뜨고 즐거워하는 손주의 시간도 중요하니까요. 그러면서 매일매일 선체험한 듯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비극 앞에서 이야기의 구성을 위해 가져온 과학적 장치들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했고요. 김희선의 소설에 믿음을 가지게 된 건 이 소설, 특히 작가가 선택한 4월 15일이라는 날짜였습니다.

 

김행숙 작가는 「골든 에이지」의 연도를 2028년으로 설정했어요. SF적인 시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2014년 4월 16일’이 망각의 지층으로 가라앉은 시간입니다. 그 망각의 연도를 찢고 ‘2014년 4월 16일’이 솟아날 때, 내가 사는 ‘지금 여기’의 기억과 망각의 지층이 강렬하게 진동한다고 느꼈어요.

 

김수이 4월 15일로 돌아가는 방식은 김행숙 시인의 시 「1914년 4월 16일」(『1914년』, 현대문학 2018)을 떠올리게 했어요. 그 시에서 얘기하는 방식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두 작품이 말하는 것도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정동이나 기억일 수 있고 실존의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것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시간개념이 우리가 애도하는 최상의 방식이 아닌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시간의 공동체’ 같은 것요.

 

김행숙 「공의 기원」은 김희선의 특장이 압축돼 있는 소설로 읽혔습니다. 미시사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소설은 ‘사실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사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영국인 기자 앤더슨은 흥미로운 인물이지요. 난무하는 듯 보이지만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배치된 ‘이야기들’을 통해 개인과 국가, 한국사와 세계사,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어떻게 서로의 깨진 거울이 되는지를 순간적으로 ‘감지’한 듯한 기분, 저는 이 ‘기분’에 독자를 빠뜨리는 데 이 소설의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에 독자는 뭔가를 정말 알게 된 자가 아니라, 드디어 의문에 빠진 자, 뭔가 질문이 생긴 자가 됩니다.

 

하성란 「공의 기원」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장소뿐 아니라 시대까지도 건너뛰는 축구공의 이야기 아래 아동 노동착취를 다루고 있어요. 맨 처음 공을 발로 한번 툭 차본 소년의 설렘이 근현대사를 거쳐 힘있게 굴러오는데요, 하잘것없는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 작은 손으로 공을 만들지만 그 공을 가질 수는 없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얼굴과 겹쳐지면서 아프게 다가옵니다. 아까 했던 말을 조금 바꾸자면 사실적인 뻥이 아니라 뻥처럼 믿기지 않는 사실이랄까요.

 

김수이 김희선의 소설에서는 ‘아주 먼’ 만남들이 뜻밖에도 자주 이루어지는데요, 그 만남의 지점은 우리의 역사가 타자들의 역사와 얼마나 미세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일깨웁니다. 「공의 기원」에서는 한국인 소년과 영국인 기자가 조선에서 만나고, 「해변의 묘지」에서는 한국인 선원과 과떼말라인 형제가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죠. 김희선은 그동안 우리 문학이 근현대사를 다루어온 방식이, 세계사에서 타자의 맥락을 분절하고 도려내는 것은 아니었나 질문합니다. 그 이야기들이 황당해 보이는 것은 그동안 한국문학의 문법이 이러한 범주를 ‘낯선 것’으로 만들어온 탓도 있어요.

 

김행숙 「18인의 노인들」은 문학제도 속에서 문학이라는 것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기묘하고도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일례로, 한림원의 원탁 중앙에 놓여 있는 항아리는(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이 안에 든 제비를 뽑는 것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되니까 꽤 중요한 오브제일 텐데) “판에게 강간당하는 님프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포도덩굴이 그 위와 아래를 빙 둘러싸고 있는 고풍스러운 모양”(89면)으로 묘사됩니다. 그 부분을 작가는 크로키처럼 재빠르게 쓱 그려놓고 지나가지만, 유구한 문학 전통 안에 흐르는 기울어진 젠더의식을 풍자하는 거죠.

 

김수이 문학의 위기와 노벨문학상의 허상이라는 담론 자체가 편협하고 분절된 사고의 산물일 수 있음을 이야기하죠. 김희선은 황당함을 무릅쓰고 다양한 소재와 시공간, 인물들을 연결하면서 서사를 이어나가는데, 무리한 느낌이 별로 없어요. 소설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시도해보려는 꿈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승은 『오늘 밤에 어울리는』(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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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오늘 밤에 어울리는』은 상당히 개성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는 이승은의 첫 소설집입니다.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한데,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소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의 연극을, 아니 연극을 위한 대본을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셨을지도 모르겠고요. 한편의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인물들이 연극적이지는 않아요. 그 점이 무척 새롭고 개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읽어나가면서 점점 이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김행숙 김희선과 이승은은 시공간의 관점에서 보면 극적인 대조를 보이지요. 김희선의 서사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고 국경선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면서 때때로 지구 바깥까지 오간다면, 이승은의 인물들은 좁은 실내공간에서 최소한의 동선으로 움직입니다. 소설에서 흐르는 시간도 대개 하루의 절반을 잘 넘기지 않아요. 그런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예외적이거나 극적인 서사의 굴곡을 형성하는 것도 아니죠. 어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하루의 일상적인 동선을 따라 이야기가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누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다가 테이블을 건드렸는데, 테이블 위의 투명한 유리잔이 부르르 떨리고 그 안에 든 물이 진동하는 것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그런 이상한 불안감으로 진땀을 흘리게 되는 소설이었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스릴러’ 같았다고나 할까요. ‘일어난 일이 무엇일까’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일은 무엇일까’라는 이면의 질문에 닿게 하는 이승은의 세계는 새로운 미니멀리즘 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하성란 일상의 파동을 다루는데, 그 진동이 바로 오는 게 아니라 읽고 난 뒤에 여파처럼 뒤늦게 찾아오는 소설들이었어요. 아까 밝힌 바 있지만 그래서 첫 독서에서는 의아하게 느껴진 점도 있었고요. 배경의 대부분이 식탁이 있는 실내이고 그릇들이 달그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평범한 일상이니까요. 당연히 인물들의 대화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지요. 희곡의 경우에는 공간의 한계가 있고 그걸 극복하려고 노력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이승은의 소설들은 오히려 제한적인 공간을 가져와서 그 한계를 이용한다고 할까요. 새로운 소설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느껴졌어요. 마치 작가가 제시된 공간과 인물을 정해놓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창작과정 자체도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었어요.

 

김수이

김수이

김수이 어떤 면에서는 심심하고 단조롭고 건조한 이야기들이잖아요. 작가가 바라보는 우리의 삶은 지나치게 많은 사건 속에서 ‘사건이 없는 것’이 유일한 ‘사건’이 되어버린 상황, 혹은 사건으로 구성되기에는 타자와 ‘더불어 존재함’과 ‘더불어 살아감’이 너무나 결핍된 상태가 아닐까 해요. 이 소설집에서 시간과 공간을 잘라내 특정 인물들만을 링 위에 올려놓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방식이 저는 고통스러웠는데요, 한편 읽고 쉬기를 거듭하면서 한권을 읽는 동안 작가가 겨냥하고 있는 그 미시적인 부분들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김행숙 이승은의 소설은 ‘사건’이 아니라 ‘일상’에 그물처럼 얽혀 있는 신경세포를 건드리면서 기이하고 섬뜩한 질감을 기어이 만지게 하는 것 같아요. “가장 문명적인 공간에서 가장 원시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정영수의 추천사가 짚었던 그 감각이겠죠. 언젠가 가장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스러운 공간으로 ‘방’을, 카버의 동물적인 감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으로 ‘대화’를 꼽아본 일이 있는데요, 이승은의 소설에 옮겨서 말해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소파」와 「왈츠」가 제일 인상적이었어요. 굳이 그 이유를 찾자면 가장 이승은‘스러운’ 소설이기 때문일 거예요. 그만큼 이 소설가의 세계에 매력을 느꼈다는 거겠죠. 특히 작품들의 후반부에 나오는 대화들이 소설의 이상한 불안감과 긴장감을 조성해가는 방식은 놀라웠어요. “그들에게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별일 아닌 것 같기도 했다”(51면)는 문장은 대화 사이에 흐르는 심리적인 리듬을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또한 작가가 소설의 결말을 처리할 때 주로 취하는 포즈이기도 해요.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뭔가를 지그시 누르듯이 입을 다물고 베일을 덮어버리죠. 하지만 그 베일은 얇은 얼음장 같아서, 저걸 밟고 서 있으면 깨질 거야, 그리고 그 아래는 헤어날 수 없는 심연일 거야,라고 느끼게 만듭니다.

 

하성란 이승은의 소설을 읽고 베란다 너머 수많은 아파트 창을 바라봤어요. 빼곡한 창에 불들이 켜져 있었죠. 그 창 안에는 누가 있나, 무엇을 하고 있나, 짐작이 가능하지만 누군가는 다투고 누군가가 불에 올려놓고 깜빡 잊은 냄비의 국물은 졸아들고 있겠죠. 그러나 큰일이 없다면 오늘은 그냥 평온했던 하루가 되죠. 그렇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요? 작가가 물어보는 느낌이었어요. 오늘도 내일도 늘 비슷한 하루, 그렇지만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하루. 누군가는 모르고 지나갈 파동. 참, 데뷔작인 「소파」에서 말인데요, 도둑이 들었다고 윗집 여자가 동수의 집으로 오고, 그사이 동수가 잠깐 윗집 여자의 집으로 가잖아요. 그 집에서 동수가 뭔가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돌아와 마지막에 그걸 먹는 걸로 끝이 나는데, 저는 그게 뭘까 계속 신경이 쓰였어요.(웃음)

 

김행숙 수면제일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저는.

 

하성란 뭔가 더 이상한 것일 수도 있어요. 이들이 몰린 곤궁한 사정에 몰입하다보니 그게 뭘까 계속해서 생각하게 돼요. 저는 「찰나의 얼굴」도 흥미롭게 읽었어요. 작가가 서사에 큰 무게를 두지 않으니 인물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는데, 이 소설에서는 다른 소설보다 인물들이 많이 나와요. 그 인물들의 사정이랄까,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복잡해지는 갈등도 그렇고요. 이 소설의 배경은 실내가 아니라 해변인데, 이상하게도 저는 여전히 실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연극의 경우 배경의 이해를 돕기 위해 뒤에 그림판을 세워두잖아요. 해변이나 숲속 같은.

 

김수이 그러나 소설의 프레임을 넓히고 다양한 형태로 시도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첫 소설집만 읽고 너무 많은 요구를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설정한 프레임이 역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운 걱정도 들었습니다.

 

하성란 한편 첫 소설집만으로 어떤 작가인지를 충분히 보여줬다는 생각이에요. 제한된 공간이고 인물들 또한 많지 않다보니 반복되는 점이 있다고 느낄 수는 있고요. 아까부터 계속 파동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보일 듯 말 듯 인물들은 모두 흔들리고 있고 점점 파동은 커지는데 마지막 그 파동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뻔하고 익숙하지 않아 좋았어요. 작가의 인물들이 밖으로 나온다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이 세계가 좀더 확장될 수 있을까 궁금해지고 작가의 다음 소설이 무척 기대됩니다.

 

 

권여선 『레몬』(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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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레몬』은 『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에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중편을 개고한 작품입니다. 당시에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데, 새로 읽으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언니 해언을 잃은 다언, 그리고 해언의 사망과 연루된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다양하게 진행되는데요, ‘레몬’은 꿈을 가지고 있던 시절을 떠올리는 장치이기도 하면서 다언이 언니를 죽인 범인을 찾아 복수를 결심할 때 중얼거리는 “복수의 주문”(97면)이기도 합니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부터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레몬의 노란색으로 상징되는 것들을 계속 떠올리게도 해요. 이 안에는 일부러 노란색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다언이 입고 있던 원피스를 비롯해서 참외, 계란 노른자 등의 소재도 그렇고요.

 

김행숙

김행숙

김행숙 『레몬』은 성폭력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어요. 살인으로 이어진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법’적인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죠. 법은 무능하거나 간교했고, 응징은 ‘개인’의 몫으로 남게 됩니다. 이 소설은 해언의 죽음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예요.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글쓰기’라는 차원이었어요. 해언의 죽음으로 결정적인 상처를 받게 된 다언은 시를 못 쓰게 되죠. 반면 시와 무관한 삶을 살았던 윤태림은 시를 쓰면서 치유받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윤태림은 종교와 시를 통해 ‘자기 문제’를 해소해버리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책임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제외시키고자 하지만 그녀의 무의식은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원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시를 쓰는 자’가 아니라 ‘시를 차마 쓰지 못하는 자’가 윤리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시를 쓰지 못하는 자리가 역설적으로 진정한 시의 자리인 것이죠. 다언은 문예반 시절에 마음을 나누었던 선배 상희를 십오년 만에 만난 자리에서 “시는 도저히 쓸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대신 “참회록 비슷한”(177면) 걸 쓴다고 털어놓지요. 그래서 이 작품 전체가 다언의 참회록으로도 읽힐 수 있어요. 다언의 글쓰기는 ‘살아남은 자의 삶’을 인식론적으로 변모시켜요. ‘진실’로부터 떠나지 않는 괴로움을 그녀는 선택합니다.

 

김수이 말씀하셨듯이 이 소설은 글쓰기, 특히 시쓰기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죠.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145면)가고, “어떤 삶에도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고 생각”(12면)하는데 “어떻게 신을 믿을 수 있”(185면)는지, “신은 안 믿어도 시는”(188면) 믿는지 다언은 묻습니다. 발음이 같은 ‘신(神)은’과 ‘시(詩)는’은, 폭력에 찢긴 인간이 갈 수 있는 두개의 윤리적인 길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그런데 ‘시쓰기(글쓰기)’는 ‘신을 믿기’와 어떻게 같거나 다를까요. 이 소설의 문제의식도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다언은 먼저 ‘神은’을 주어로 언니의 가엾은 죽음을 ‘처리’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요. 하지만 폭력과 삶의 의미에 대한 대답을 신에게서 들을 수는 없었죠. ‘신’으로 수렴되는 인간세계의 (무)질서를 견딜 수 없을 때 다언은 ‘시’로 향하지만 시도 제대로 쓸 수 없어요. ‘神은’과 ‘詩는’의 같은 발음이 다시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대목입니다. 다언이 참회록 비슷한 것을 쓰는 것은 신과 시가 견딜 수 없는 자리를 감당하는 것이 산문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해요. 권여선이 쓴 이 소설 역시 그 역할을 하고 있고요.

 

하성란 ‘신의 섭리’를 얘기하면서 다언이 직접적으로 거론한 게 용산참사와 세월호참사예요. 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쓰레기를 뒤지면서 살다 강간당하고 바로 그 쓰레기장에 다시 버려지는 열두살 아이의 이야기도 하지요. 다언은 언니의 사건으로 자신도 희생당했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또 가해자가 되고요. 연재 당시의 제목인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와 겹쳐지면서 다언이 이건 신의 “섭리가 아니라 무지”(187면)라고 외치는 장면이 참 아팠습니다. 다언은 신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스스로 잠깐 신의 역할을 맡으려 한 것 같아요. 언니를 대신해서 복수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죠. 그 복수의 방법이 자신이 평생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운명론적인 부분을 외모에 담아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만 해언의 버릇이 살해의 단초가 되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부분은 조금 걸렸어요.

 

김수이 그 부분은 작가의 이중적인 전략이 아닐까요. 절대적 아름다움을 지닌 해언이 속옷을 입지 않고 다리를 벌리고 앉는 것은 원초적이고 무심한 행동이죠. 사회화가 덜 되었거나 사회화를 거부하는 해언의 성격이 투영되어 있어요. 엄마가 질색하는 해언의 옷 입는 습관과 앉는 자세에 관한 설정은 남성 폭력의 피해자인 여성들에게 자주 덮어씌워지는 야만적 프레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뒤집는 측면이 있어요. 해언의 이런 습관과 행동이 그녀가 당한 폭력을 조금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역으로 보여주는 거죠.

 

김행숙 해언이라는 인물을 만들면서는 작가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작가가 몰랐을 리 없을 텐데요, 해언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46면)과 “머리가 텅 빈 백치”(109면) 같은 자기방기적인 모습은 분명 그 자체로는 무구(無垢)하겠지만, 남성의 성폭력을 합리화하고 오히려 피해자 여성을 힐난하게 만드는 불투명한 ‘여성 이미지’라는 것을요. 다언 또한 언니의 상투적인 이미지 안에 아이러니하게 연루되어 있지요. 소설이 보여주는 다언의 내적 싸움에는 “과거형이라 이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것”(72면)이 되어버린 언니 해언을 그 속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미의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199면)으로 구출해내는 문제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다언이 쓰는 ‘언니’라는 호명에는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담긴 것 같아요. 다언은 윤태림을 언니라고 부르길 거부합니다. 다언, 해언, 상희, 한만구의 여동생으로 이루어지는 ‘언니 공동체’가 이 소설의 한 축을 이루고 있지요.

 

김수이 이 작품은 폭력의 내력에는 하나의 절대악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욕망이 얽혀 있음을 이야기해요. 다언이 죽은 언니를 대신할 아이를 키우는 대목에서는 권여선의 두번째 장편 『레가토』(창비 2012)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성폭행을 당해 낳은 딸을 동생으로 기르는 ‘정연’이라는 인물이 떠올랐어요. 저는 사실 다언의 복수를 한번에 읽어내지 못했는데요, 『레가토』의 ‘회복 서사’의 잔상과, 특히 피해자 측의 여성이 범죄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방어기제로 작동했던 듯해요. 『레가토』에서 남성이 저지른 폭력을 여성이 극복하고 새로 태어난 생명이 정화하는 데 비해, 『레몬』은 폭력의 더 복잡한 연쇄를 암시하죠.

 

하성란 『레몬』은 인물들 사이의 관계나 개개인의 사정이 생생하게 그려져요. 특히 한만우라는 인물은 범죄자로 낙인찍힌 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게 돼죠. 그를 범죄자로 몬 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 대한 그릇된 편견이에요. 열심히 살려 해도 결국 병에 걸리고 그런 상황에도 일을 놓지 못하는 한만우의 일터로 찾아간 다언의 눈에 비친 세탁공장의 풍경은 정말 눈앞에 그대로 그려지는 듯했어요. 그런 그에게 레몬처럼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다면, 바로 사건 당시 윤태림을 배달 스쿠터 뒤에 태우고 달려가는 그때뿐인 거죠.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제게 이 소설은 여전히 처음 제목인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로 남아 있어요. 누구나의 머리 위에 있다고 하는 신, 그러니 신의 부재가 아니라 신의 태만이고, 직무 유기예요.

 

김수이 윤태림에 대한 한만우의 절대적인 동경에 가까운 사랑이 안타까웠어요. 한만우는 윤태림이 얘기한 걸 경찰에 끝까지 얘기하지 않지만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범인이 명시적으로 나와 있진 않은데, 이 소설은 한 폭력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싶은 듯해요. 악이 악으로만 발현되지 않는다는 것, 선의와 아름다움과 순진무구와 동경과 사랑 등 ‘좋은 것’들이 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야말로 악이 인간에게 가하는 최대의 폭력이며 비극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면서요.

 

김행숙 ‘죄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또한 이 소설의 묵직한 질문이겠죠. 다언은 이렇게 말해요. “나는 이런 삶을 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살고 있으니, 이 삶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이 삶을 원한 적은 없지만 그러나, 선택한 적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35면) 내가 선택한 지점을 직시하고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을 받아들이는 자가 참회록을 쓰는 주체가 되겠죠.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을 자기 안에서 감당하는 방식의 차이가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면에서 영화로 만들어져도 좋을 것 같아요.(웃음)

 

 

박서영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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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소설에 대한 깊이있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제 근간 시집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박서영 시인의 유고시집입니다.

 

김행숙 ‘시인의 말’에 “죽음을 정교하게 들여다보는 장의사의 심정을 이해한 적 있다”고 쓴 시인은 단 한편의 시도 죽어가는 자신을 연민하고 절망하는 데 쓰지 않았어요. 마지막까지 이토록 뜨겁고 간절한 사랑의 시편을 써내려간 한 시인의 영혼이 놀랍고 감동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는 끝까지 누구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었어요.

 

하성란 저는 목련이나 눈송이처럼 금방 만개해서 사그라지거나 녹아버리는 이미지들이 많이 나와서 시인이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사물을 찾았던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보자면 관념적인 단어가 꽤 많이 눈에 띄었는데, 그 단어들이 단지 관념에 그치지 않고 체화된 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시에 잘 녹아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어색하지 않은 관념어를 만난 것은 오랜만이었습니다.

 

김수이 일반적으로 유고시집이 지니는 비극성과 아우라를 한층 넘어서는 감동이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공포와 슬픔이 엄청났을 텐데, 시인은 극한의 상황을 감정적인 시어로 표현하기보다는 이미지나 상황으로 바꾸어내요. 그 힘이 무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슬픈치, 슬픈」에는 시인의 처절한 실존이 가혹한 말이지만 참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요. “나는 달아나는 사람의 자세로 묶여 있다”는 대목에서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사이에서 내가 어느 쪽으로 달아나는 것이고, 어느 쪽에 묶여 있는지는 구별하기 힘들어요. 물론 둘 다일 텐데요, “나는 여전히 당신의 절벽에 매달려 있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보듯, 내가 묶이고 매달려 있는 절벽은 ‘당신’이에요. 삶이나 죽음의 절벽이 아닌, 당신의 절벽에 매달려 삶을 끝까지 살아내요. 시인은 죽음 직전의 시간을 열렬한 사랑의 시간으로 살아내고 누립니다. 온통 불안과 두려움이고 평안과 기쁨이기도 할 이 사랑의 시간에 관한 놀라운 기록을 읽으면서 전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울고 있지 않아도 눈물이 흐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김행숙 요즘 연애는 ‘오늘부터 1일이야’라고 말하면서 시작하죠. 사랑의 시작점과 종료 시점을 명확히 선언하는데, 그렇게 애매성을 지우면 사랑이 좀더 쿨해지고 쉬워질까요? 오늘날 사랑의 감수성은 권력과 관습과 혐오와 피로에 의해 훼손되어 어쩐지 미심쩍은 것으로 전락한 듯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시인은, 사랑이 가장 첨예한 존재의 시간을 살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없는 타자의 극한까지 내 존재를 밀어붙이는 동력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치열한 사랑의 시를 써내려갑니다. 그 치열함이 사랑을 새롭게 하고 유일무이한 시적 이미지를 생산하게 하고요. 진부한 것을 새롭게 만드는 발명의 동력이 사랑임을 증명하는 것 같아요. 그가 쓰는 사랑의 시편들이 사랑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갱신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잡히지 않고 규정되는 않는 것, 어떤 사회적 표상이나 통념에 결코 장악되지 않는 특이점을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무한히 발생시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사랑이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사건이며 이야기이고 시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비극의 한복판에서 인생을 사랑하는 기적을 기어이 피워 올립니다.

 

하성란 말씀을 듣고 나니 「하얀 흑인 소녀」에 나오는 “다시 손목이 자라는 환상에 시달”리는 소녀의 이야기가 더욱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저는 이 시집에서 사라지는 것들의 격렬한 이미지를 보았는데요, “작년에 얼어죽은 목련”(「참새」)이나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는”(「눈사람의 봄날」) 눈사람에서 소멸과 죽음을 보는 시인의 상반되면서도 일맥상통하는 자세가 색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김행숙 「숲속의 집」에서 “시간이든 마음이든 커지면 아프게 된다” “커지면 밖을 그리워하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가장 먼 곳으로 가보아야 심장이 산산조각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사랑이 나를 나의 한계 바깥으로 데려가는 폭력적인 힘이라는 것을 선연히 드러내요. 그것은 황홀한 월경(越境)이기도 하고 자아의 폭파이기도 하지만, 그는 깨짐을 자기 존재의 창문이 열리는 계기로 아프게 기입하고 수긍합니다. 사실 사랑의 고통은 한 존재를 끝없이 위축시키고 상하게 만들기 쉽지요. 그러나 그는 그 통증의 자리에서 가장 크고 붉은 심장 소리를 들으며 이를 생의 감각으로 겪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다시, 나의 바깥을 향해, 타자를 향해 존재를 던지려고 하는 이 무모한 열정과 시도 속에서 그는 살아버립니다. “심장이 뛰어요. 반사회적입니다”(「꿈속의 비행」)라는 구절이 내내 맴돕니다. ‘낭만주의적 열정’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 시집의 호흡과 온도는 ‘리얼’해요.

 

김수이 “이야기를 짓는 것은 남겨진 자의 몫” “무엇이든 쓸 수 있는 밤이 왔다/남은 이야기를 쓰는 것은 남겨진 자의 몫”(「잉여들」)이라는 대목은 남겨진 자에 대한 사랑을 품은 시인의 유언 같아요. 『레몬』처럼 소설이 주로 타인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장르라면, 시는 나의 죽음을 노래하는 장르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시인은 죽음 앞에서 죽음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만큼 삶을 간절히 원했을 텐데, 이렇게 극렬한 상황에서 터뜨리는 말들이 담담하고 나지막해서 오히려 지극한 슬픔을 자아냅니다.

 

김행숙 「꿈속의 비행」에 “임산부 미라처럼 새근새근 잠자는 죽음을 품은 것 같아요” “뭔가를 생산해야 한다면 ‘사랑’을 만들고 싶어요”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죽음’을 품어서 ‘사랑’을 낳는다는 것이 단지 역설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이 시집은 말해주는 듯해요.

 

김수이 “어떻게 녹아내려야 하고 멈춰야 하고/사라져야 하는가//어떻게 이별하고 잊어야 하고 퇴장해야 하는지”(「미행」)라는 대목은 사랑의 대상에 대해 생각하게 해요. 내가 미행한 적 있는 ‘당신’은 실체가 있는 특정한 누군가일 수도 있고, 포괄적인 무언가일 수도 있어요. 죽음에 다가갈 수밖에 없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로 볼 수도 있겠어요.

 

하성란 시인에게 죽음은 “그다지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문 뒤에 영원히 기대 있는 것”(「의자」)이었다고 생각해요. 시인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해야 했고, 그런 밤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렸습니다.

 

 

송재학 『슬프다 풀 끗혜 이슬』(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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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송재학 시집을 읽으면서 맨 처음 느낀 것은 ‘나’가 정말 드러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며 나의 감상을 덜 드러내는 시편들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4월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참척慘慽, 4월의 글자」는 감정을 시각화하는 시어를 찾아내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 상태에서 써내려간 시입니다. “낯설고 빽빽한 획”들에서 “뼈의 글꼴”이라는 시어를 찾아내는 시인의 시선에 놀라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너는 바다로 들어갔다/그때 너는 무엇이었느냐」 역시 4월의 바다를 그린 시인데요, 그날을 연상케 하는 실마리는 찾아볼 수 없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애틋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김행숙 말씀하신 대로 문자의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감각(물질성) 자체로부터 전언을 환기하는 시편들, 이를테면 「눈썹 씨의 하루」 「드므라는 말」 「참척慘慽, 4월의 글자」 등은 이 시집에서 시인이 탐색한 언어의 새로운 지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집의 색깔을 ‘기획’적으로 보여주는 3부, 1920~30년대 딱지본소설에서 그 당시의 표기법 그대로 ‘발췌, 인용, 첨삭’하여 쓴 시편들 또한 그러한 관심사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한편으로 이 시집의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는 3부의 시들은 그 ‘서사(敍事)’를 따라 읽게 되는데, 이 서사(이야기)가 왜, 지금, 여기에 호출되는지를 질문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1930년대 텍스트가 2019년에 당도했을 때 발생하는 효과 말이지요. 보르헤스( J. Borges)의 단편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픽션들』 민음사 1994)가 우리에게 던져준 질문이기도 한 것처럼요.

 

김수이 시인은 그동안 고고학적 상상력을 많이 발휘해 왔는데, 실제로 고대 상형문자와 문물에 관심과 조예가 상당히 깊죠. 송재학 시(인)의 내부에는 수천수만년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어요. 시인은 저 아득한 시간의 세계를 유유히 오가면서 ‘나’를 지우는 작업을 해온 게 아닐까 합니다. 여기 딱지본소설의 이야기들은 거대역사가 아니라 식민지시대에 대중이 삶에서 실제로 겪은 억압과 고통에 관한 이야기들이거나, 혹은 그들이 읽고 향유했던 허구의 작은 이야기들이죠.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잔인한 4월과 여러 갈등을 겪고 있는 것처럼, 시인은 식민지 사람들이 겪은 문제들을 대중적으로 유행한 딱지본소설을 통해 읽어내려 한 듯해요. 딱지본 특유의 선정성과 황당무계함도 일부러 각색하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식민지시대의 정동과 미적 감각을 복원하려 한 것 같아요. 역사의 유물이 된 딱지본소설에 담긴 한세기 전의 삶의 목소리들을 오늘의 삶의 공간에 작게나마 울려 퍼지게 하면서요.

 

김행숙 ‘시인의 말’에서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시인 진명의 이야기는/(…) 역대 딱지본 중에서/가장 아름다운 제목”,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을 만들었으며, “그 이름에 기대어 열번째 시집을 궁리했으니/내 식민지 감정을 조금이나마 다독인 셈”이라고 말합니다. 한 인터뷰에선 3부에 대해 “모든 시인에게 잠재된 감정의 의무”로서 “고통을 확대하는 자세”(매일경제 2019.3.28)라고 했고요. 시인이 식민지 풍경으로 가져온 딱지본소설들은 일차적으로는 대중 서사의 통속성에서 기인하겠지만, 그 당시 새롭게 개발된 연애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스캔들, ‘유행병’이라고도 했던 ‘정사(情死)’를 모티프로 한 것이 유독 많아요. 이 시집의 제목을 제공한 ‘진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서사에서는 한 기생이 진명의 성공을 기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후로 또다른 기생이 그의 정사 파트너로 지목되고 기꺼이 동참합니다. 한 시대의 풍속사의 일면을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는 서사임에는 분명하지만, ‘식민지’의 비참이나 부조리에서 몸을 피한 자리에 있는 서사물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저는 이 시집에서 말하는 ‘식민지 감정’의 의무와 고통의 윤리학이 비추는 자리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성란 딱지본소설의 퇴폐성과 과잉, 신파가 송재학의 시와 만난다니 오히려 흥미가 생겼어요. 옛말 자체가 메타포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 싶었고요. 다만 저도 ‘시인의 말’을 읽으면서는 좀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 찾아서 읽어볼 수 있는 딱지본소설을 시로 옮겨왔을 때에는 시인만의 의도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의도가 좀더 또렷하게 드러났으면 좋았겠다, 더불어 그 시대상을 재해석한 시인만의 새로운 시각이 돋보였다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수이 3부에 실린 딱지본의 변주들은 세월호, 익사체, 도축되는 돼지, 개 사육장, 질병 등 지금-여기를 노래한 1, 2부와 분리해서 읽을 수 없다고 봐요. 3부의 시들은 현재와 과거의 텍스트가 지닌 백년의 시차를 마주하게 하는데, 시인이 노린 것이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불행과 죽음을 언어로 처리하는 방식(문학)에 대한 언어학적·고고학적 탐구인 셈이죠. 시집 제목이 당시 텍스트에서 가져온 표기 그대로 ‘슬프다 풀 끗혜 이슬’인 점도 이를 반영하죠. 백년 전에 살았던 누군가의 불행한 삶의 조각이 비록 각색된 텍스트이지만 제 앞에 이물스럽게 떠올라 있는 불편함이 있었어요. 저는 딱지본소설의 이야기들이 당대 민중의 보편적인 삶의 비극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딱지본소설이 유행한 것은 비록 극적이고 과장된 형태일지라도 그 속에 당대의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일 테니까요. 자신의 이야기를 쓸 능력과 여력이 없었던 사람들의 삶을, 지금 우리는 딱지본소설이라는 대중성 위주의 텍스트를 통해 옹색하게나마 대면하고 있는 거죠.

 

김행숙 사실 저는 이 시집에서 발굴한 딱지본소설들의 서사에 익숙한 편이에요. 박사논문을 쓴답시고 1920년대 신문, 잡지에 몇년간 파묻혀 있었는데, 그 시절의 텍스트에서 자유연애와 정사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문학’의 근대적 감수성과 ‘연애’의 감수성, ‘젠더’ 감수성이 교착되고 연루되는 지점을 흥미롭게 들여다보게도 되었고요. 그런데 2019년에 출간된 시집에서 그 시절의 서사를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보르헤스가 17세기 세르반떼스의 『돈 끼호떼』와 20세기 삐에르 메나르의 『돈 끼호떼』는 완벽하게 똑같지만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죠. 이 시집에서도 분명 이 ‘다른 차원들’이 ‘문제적’이고 ‘논쟁적’이겠지요. 우리의 20세기와 21세기는 전혀 다른 얼굴처럼 보이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피부를 한겹 벗기면 그 안에는 백년의 근현대사가 난마처럼 착종되어 있으니 더 그렇지 않을까요.

 

하성란 “맞춤법은 대체로 출간 당시의 표기를 따랐”다는 각주가 자주 나오는데, 백년 전의 한글을 읽으려니 속도가 느렸어요. 그 당시의 풍속이든 신파든, 당대의 글자로 기록된 당대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나 「목판화로 듣는 개의 울음소리」처럼 낯설게 만들기 위한 형식적인 장치에서 시인이 뭔가를 가져오고 싶어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김행숙 어쩌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것이 많은 시집일지도 모르겠어요. 20세기 초반의 서사물을 21세기 초반의 시집에서 읽는 독자들은 여러가지 표정을 짓게 되겠지요. 근 백년의 지층을 뚫고 ‘페미니즘 리부트’(손희정)의 시대에 불쑥 나타난 이 이야기들, 이를테면 “앞산 뒷산 쑥국새들”이 “춘향이 수절”을 “지지쑥꾹 되풀이하”고(「딱지본 언문 춘향전」), 한 여자가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계집의 태도는 머리가 중심이랍니다 이제 제가 살아도 장씨 댁 사람이요 죽어도 장씨 댁 사람이오”라 외치며 단발을 감행하고 결국 자결하고(「강명화의 죽엄」), 당신을 따라 죽는 것은 “광영이라 생각”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조흔 각오”라고 칭송을 하는(「슬프다 풀 끗혜 이슬」), 이런 유의 장면들이 저는 일단 불편하고 난감했습니다. 저의 일차적인 독서에서 오는 ‘불편함’이 시인의 의도 안에 있는 것이라면 좋겠는데요, 어쨌든 직접 나타나지는 않아도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 시인의 자리를 자꾸 묻게 됩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시인’으로 호명된 ‘진명’에 대한 작가의 ‘감수성’을 되묻는 것이기도 하지요.

 

김수이 그렇게 보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대사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확히 반대로, 비판적으로 읽히잖아요. 시인이 만약 각색을 하고 싶었다면 한두줄 인용하거나 모티프를 따오는 방식을 취했을 텐데, 원문을 대부분 옮겨온 것 같은 형식을 취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의 텍스트를 최대한 즉물적인 상태로 가져와서 현재와 다른 언어와 미학으로 구현된 사람들의 삶의 고통에 어떻게 다가설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거죠. 지금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은 백년 전의 시대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측면을 같이 보여주려는 것이기도 하고요. 시인이 그동안 구축해온, 일인칭 ‘나’를 버리고 풍경 자체를 보여주려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조해주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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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그럼 이제 우리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웃음) 조해주의 첫 시집인데요, 저는 이 나이 또래의 시인들이 자신들이 고민하는 바를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아주 산뜻하게, 그렇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적절히 잘 끌어냈다는 인상을 받아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김수이 사실 이런 화법이 아주 낯설거나 새로운 건 아닐 텐데, 그런 점에서 바로 앞선 세대 시인들이 구사한 화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그걸 자기 식으로 변주해내는 능력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작은 이야기들인데, 자의식이 과잉하거나 지나치게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식 없이 겸손하고 차분하게 써내고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김행숙 이 시집은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느낌’에 예민합니다. 시적 정황은 반복적으로 ‘모임’과 ‘만남’을 통해 주어져요. ‘나’는 인간관계에서 다치기 쉬운 사람이며 계속 다치는 사람입니다. 관계 속에 구체적인 갈등이나 적대적인 전선이 만들어져서 그런 것은 아닌 듯해요. 오히려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느 정도의 호의와 예의 같은 것을 외투처럼 두르고 있지만 그 외투 안에서도 다치는 사람인 거죠. ‘나’는 눈치를 살피고 눈치를 챕니다. 흔히 ‘어색함’이라고 말해질 분위기와 기분, 어떤 어긋남의 징조를 몸짓, 말투, 눈빛 같은 것으로 포착하여 드러내는 일이라면, 이 시인은 누구보다도 섬세한 감각적 분할 능력과 조합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시가 감정적으로 쓰이진 않았지만 감정에 대해 말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정을 감각으로 말한다고 할까요.

 

하성란 「참석」에서 한명이 오지 않은 채로 모임이 시작되는데, 오지 않은 사람을 뒤집어져 있는 유리컵의 이미지로 보여줘요.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바로 시인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거기에서 적극적으로 나아가 타자와의 관계도 조금 건드려보려고 하는 시가 「이것, 하나」 아닐까 싶었습니다. 히끼꼬모리처럼 방에만 있던 사람이 밖으로 나가보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오지 않은 사람이 오지 않은 채로”(「참석」) 끝나게 되지만요.

 

김행숙 나와 타인 ‘사이’의 기류에 지극히 예민하고 과민한 시적 촉수는, 대개는 ‘별일 없었다’고 할 일상적인 장면에서 미세한 균열을 포착하여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크레바스를 예감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더 크게 신경 쓰이는 것은 타자에게 ‘보이는 나’ 같아요. ‘보이는 나’의 관점에서 타자는 거울이며, 어디서든 나타나는 벗어날 수 없는 거울인 거죠. ‘타자성’은 ‘보이는 나’를 경유하여 비스듬히 드러나지만, 내가 타자성 속으로 들어가 위태롭게 휩쓸리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나의 테두리”(「놀이터」)를 지키는 파수꾼의 자세를 애써 견지하지요. 그래서 더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이 시집은 결국 ‘나’라는 주체에 바쳐지는 것 같아요. 타인(거울)에 의해 분열되는 나‘들’, 나의 의식 속에서, 또 무의식 속에서 떠오르는 나‘들’, 얼룩과 흠집투성이의, 출렁이고 깨지는 거울들에 둘러싸인 나‘들’. 어떻게 보면 그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다치는 사람이라기보다 이 삐죽빼죽한 ‘나들’에 치이고 다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부록으로 실린 「자술 연보」에 “나의 불행이 너무 평범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대목이나, “다른 사람은 지루하다고 말하는 영화를/나는 좋아해,/그렇게 말할 때 기분이 좋다//다른 사람보다도 더 먼 사람이 된 것 같아서”(「아는 사람」)와 같은 구절에서는 전도된 나르시시즘 같은 것이 묻어나기도 해요. ‘나’에 붙들려 있는 시간을 시적으로 어떻게 겪어내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시집이었어요. 시인이 이 시간을 몸으로, 시로 겪으면서 다음 시집에서는 정말 ‘다른 이야기’를 보여줄 거란 기대도 해봅니다.

 

김수이 「눈 깜빡할 사이에」에서 “소설은 언제까지 쓸 거니? 누군가가 묻는다/못 쓰지만 계속 쓸 거야/못생겼지만 사는 것처럼, 나는 대답한다”는 대목이 재밌었어요. 이 시에서도 자의식이 보이고 나르시시즘적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 이 시 마지막의 “오래된 테이프가 거꾸로 돌아가고/코트 입은 타인과 다시 달라붙듯이”라는 구절에서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 침잠할 수 없으면서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 수도 없는, 내면의 혼재된 지점을 보여줍니다. 타인에 대한 의식은 계속해서 일어나 생동하고 있지만, 억지스러운 의지의 표현 같은 게 없어서 좋았어요.

 

김행숙 「낭독회」의 “우기를 견디는 나무가 다 뽑혀 나가지 않은 것을 일종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면”이라는 구절이 인상적으로 남았어요. 뽑혀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그 자리를 가만히 지키고 서 있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어떤 지난하고 격렬한 ‘운동’이 있어야만 함을 환기시킵니다. 숨겨진 내적 ‘투쟁’일 텐데, 시인의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해주는 대목 같았어요.

 

하성란 전반적으로 시들이 솔직하고 쉬워서 일기 같기도 했어요. 자칫 시와 시가 아닌 것의 경계선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첫 시집에서 이만큼의 시를 써냈다는 것이 저로서는 놀라웠어요.

 

김행숙 독자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시적 요구도 다양해져서 어느 때보다도 시가 독자를 만나기에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다만, 그 안에 시가 다소 안전하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수이 쓸쓸하고 답답하고 무기력한 ‘나’의 이야기를 따뜻하고 부드럽게 써내는 재능이 있는 시인이라는 건 분명해 보여요. 사태를 단순화하거나 외면하지 않으면서 말이죠. 지금 젊은 세대는 현실의 갖은 압박 속에 ‘나’의 자존감과 무능의 감각이 동시에 폭발하는 기이한 내면의 시간을 살고 있는 듯해요. 조해주의 시를 포함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가 이러한 현실을 돌파하는 방법을 계속 찾아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성란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레몬』의 다언이 이제 시는 쓸 수 없다,고 한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다시 시를 쓸 수 있는 날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고 싶습니다.

 

김행숙 배가 고픈 걸 보니 오늘 제가 말을 많이 했나봅니다.(웃음) 말보다 생각을 더 많이 했어야 했는데, 돌아가는 길은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지겠죠.

 

김수이 두분 덕분에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4.19.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