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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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솔뫼

1985년 광주 출생. 200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 『겨울의 눈빛』 『사랑하는 개』, 장편소설 『을』 『백 행을 쓰고 싶다』 『도시의 시간』 『머리부터 천천히』 등이 있음.

songbook1123@gmail.com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

 

 

영우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는 뉴욕 런던 자카르타 토론토 상하이뿐만 아니라 광주 통영 울산 제주 서귀포 전주 광양 보령도 있었다. 종종 어떤 곳은 가보지 않았지만 가보았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영우는 광주에 가게 되었고 후에 전부는 아니지만 다른 장소들도 몇군데 가게 된다. 상문은 순천 사람인데 대학 때부터 서울에서 살았다. 상문은 순천에 살 때 부산에 자주 갔다. 광주에서 대구나 부산을 바로 가는 기차는 없어서 버스를 타야 했지만 순천과 부산은 그래도 가까운 편이었다. 부산에 갈 때 포항과 대구를 들른 적이 있어서 상문은 바다와 바다가 있는 도시와 그외 가보지 못한 많은 도시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버스터미널이 있고 역이 있고 시청이 있고 금은방과 식당이 있었다. 빈 골목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지나갔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차를 타고 지나갔다.

 

녹음기 버튼을 여러번 확인하고 카메라도 챙겼지만 중요한 것은 손으로 적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하고 그러다 모든 도시는 같아. 거기에는 똑같은 것이 있고 똑같지 않지만 다시 만날 수는 없는 것들이 있다, 여러번 걷고 걸어도 그런 방식으로 모든 도시는 같다고 또 생각했다. 시간이 많은 두 사람은 미리 광주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피며 하루를 보냈다. 상문은 친구의 빈 작업실을 소개받아 영우와 짐을 풀었다. 밤에 나가니 주변은 오래된 건물뿐이었다. 다음 날 미리 받은 주소의 한복집으로 가 서명운 감독의 따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다. 한복집 주인은 그 사람은 한복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주인이라고 했다. 한복집 주인이 걸어준 전화로 둘은 딸과 약속을 잡았다. 길을 걷는데 구름이 선명하고 도서관을 향해 심긴 나무들의 잎들이 흔들거렸다. 왜 당신들은 미리 연락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찾아와 전화를 하는 거요? 광주에 오기 전에 연락이 되는 사람도 있고 안 되는 사람도 있어서 연락이 되는 사람과 약속을 하는 김에 여기에 와보기로 하였던 것이다. 한복이 의외로 예쁘다고 생각했어. 상문은 한복집 안 에어컨이 정말 세게 틀어져 있었고 맥심모카골드 대신 오래된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아이들이 만화에서처럼 우르르 뛰어나갔다. 둘은 도서관으로 들어가서 광주 지역 주요인물 자료만 모아둔 곳으로 갔다. 서명운 감독 딸의 이름은 서마리였는데 그분은 내일 만날 예정이고 광주에 가기 전 연락이 닿아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은 조구택 선생이었다. 서명운 감독도 서마리씨도 광주 출신은 아니었고 연고도 없었으나 서마리씨는 이혼 이후 광주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둘은 혹시 모르니 조구택 선생 관련 자료를 더 찾아보았다. 그 구역에는 지방대학의 초대 총장인 조기택에 관한 자료가 많았다. 조기택은 여수 누구누구 댁의 차녀 모씨를 아내로 삼아. 빛이 책장 사이에서도 움직이고 사람들은 앉아 있고 영우는 아내로 삼는다는 말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며칠 뒤 만날 조구택 선생이 아니라 친일파의 자손인 조기택 지역사립대학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에 관한 자료를 열심히 읽었다. 그 사람은 광주 시민단체에서 작성한 반민족 인물 목록에도 포함되어, 한때 대학에서 동상을 철거하는 것이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동상은 철거되지 않았고 대신 그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 안내문이 동상 앞에 세워졌다고 한다.

 

“서마리씨는 이 근처에 자주 와요. 그런데 연락처를 몰라요?”

“그게, 주변에 물어봐도 잘 모르시더라고요.”

“커피 한잔 드세요. 물어보고 알려드릴게요.”

 

한복집 안은 시원했고 주인은 한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몸에 붙는 짙은 연두색의 여름 니트와 검정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상문은 실제로 조구택의 자료를 찾는지 아니면 다른 뭔가를 하는지 도서관 안에서 열심히 자료를 찾고 있었고 영우는 조기택이 대학을 설립한 이야기를 읽었다. 눈으로는 조기택의 개인사를 읽으며 머릿속으로는 조구택의 일화를 떠올렸다. 이름이 비슷한 두 사람은 집안 환경과 교육받은 정도는 달랐고 아마 성격도 무척 달랐을 듯하지만 광주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나이 차는 스무살을 넘지 않았다. 부자였고 정말 둘 다 꽤 부자였다. 당시 조구택 선생은 현금부자였고 영화 제작과 상영에, 특히 상영에 돈을 많이 댔다고 한다. 조구택 선생을 만나려고 왔지만 둘이 아는 것은 그 정도였다. 그때 조구택이 알고 지내던 영화인 중 한명이 서명운 감독이었는데 그는 두어달 전 세상을 떠났다. 상문은 서명운 감독의 영화를 실제로 극장에서 본 적은 없었다. 상문은 서명운 감독의 친구인 이두현 감독의 영화들은 극장에서 본 적이 있다. 상문이 어릴 때 아버지가 일을 보기 위해 극장에 상문을 앉혀놓고 나간 적이 있었다. 상문이 어릴 때 개봉작을 본 것이니 이두현은 그러고 보면 그럭저럭 오랫동안 영화를 만든 셈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다는 생각, 떨린다는 생각, 나이 든 사람이 무섭고 앞으로 할 일이 의심스럽고 그런 식으로 자신이 하려고 마음먹은 일을 생각하다가 이두현 감독에 관해 쓰려다가 왜 초대 총장이자 대학 설립자인 조기택에 관해까지 읽고 있는가 생각하다가 커피를 마시며 서마리의 전화를 기다리고 연두색과 검정색은 어울리는가 생각하고 어쩌면 한복집도 처음 와본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영우는 이두현의 영화를 뒤늦게 보았지만 이전부터 보아온 것 같다고 줄곧 생각했다. 조기택에 관해 읽다가 어쩌다 이걸 읽고 있는지에 대해 매 순간 생각하다가 두시간쯤 지나서 둘은 도서관을 나왔다. 이두현 감독은 예순이 넘어 일본으로 이민을 갔다고 전해지고 이후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원래 연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이민이 쉬운 일인가 궁금해졌고 이두현은 이후 일본에서도 회고전을 했다고는 하는데 그 사람이 실제 어떻게 지내는지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가 비밀스러워서라기보다 그에게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상문은 서명운 감독의 특집 원고를 쓸 것이라고 했고 영우는 이두현 감독을 주제로 한 논문을 쓸 것이라고 했는데 그들 모두가 한때 만나서 모여 놀고 어울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왜 한복집에까지 갔나 왜 조기택의 일생을 읽고 있나 정말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끼어들었다. 영우는 재작년부터 후꾸오까 미술관의 필름 아키비스트와 메일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한번도 한국에 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서울도 부산도 가본 적이 없고 토오꾜오도 스무살이 넘어서 가보았다고 했다. 오끼나와도 삿뽀로도 가본 적이 없고 아오모리도 하꼬다떼도 가본 적이 없고 니이가따도 못 가봤습니다. 그런데 오하이오에서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지낸 적이 있다고 하였다. 왜 이두현 감독의 영화를 늦게 보았으면서도 줄곧 그의 영화를 보았다고 생각했을까 더듬어 생각해보니 그에 관한 몇편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중 한편은 그 아키비스트가 쓴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썼다.

 

「강의 사람들」은 오래된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제사 풍경은 영화가 끝날 때쯤 한번 더 등장한다. 중요한 장면인 듯하지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이두현은 단지 과거에 죽은 이들이 있고 현재 그것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는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러한 장면을 넣었을지 모른다. 그는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영화를 찍으러 가니 이웃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기에 보이는 것을 찍었다고 말한다. 이와 비슷하게 영화에서는 큰 어른이 닭을 잡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는 화면 밖에서 닭을 잡는다. 산책하는 사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닭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고 큰 어른의 손이 무언가를 잠시 움켜쥐는 것 같은 동작이 있고 그리고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강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두현의 영화에서는 무척 인상적이게 찍힐 것이 분명하고 중요해 보일 법한 장면들이 프레임 밖에서 벌어지는 경우를 자주 본다. 가끔 프레임 밖에 또다른 카메라가 있다면, 그 카메라에 찍힌 발버둥치는 닭과 흰 한복을 입고 앉아 묵묵히 닭을 잡는 나이 든 남자의 얼굴을 찍은 장면들이 포함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영화는 없다. 이러한 생각을 전개시켜나간다면 이두현은 찍어 마땅한 것을 찍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한 선택에 그의 의지가 보이기도 하고 이두현은 뭔가를 하는 것이 지겨워 보이기도 한다. 무언가를 중요해 보이게 만들고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일을 이 영화감독은 지겨워하는 것이다.

 

영우는 이 글 때문인지 「강의 사람들」을 줄곧 봤다고 생각했다. 흰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흑백 화면이 기억에 있었고 쭈그리고 앉아 닭을 잡는 중년 남자를 봤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서 그것이 글을 읽고 나서 만들어낸 이미지임을 알았지만 영화에 대한 감상은 보기 전과 다른 것이 거의 없었다. 아키비스트는 영우가 조구택과 서명운 감독의 딸인 서마리를 만난다고 하자 본인도 가겠다고 하였다. 마침 그때 광주의 극장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발표자로 섭외가 되었다고 하였다. 서울도 부산도 가본 적이 없지만 광주에 갑니다. 도서관을 나온 둘은 근처에서 커피를 마셨다. 한복집에서는 잠깐이었지만 커피포트로 내린 커피를 잔에 담아 과자와 함께 주었다. 여기서도 커피와 쿠키를 같이 주었는데 상문은 내일 서마리를 만나러 갈 때 과자 같은 것을 사가야 할까 생각했다. 해는 서서히 지고 물기가 없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까페에서 나와 근처 대학으로 향했다. 정문에서 한참을 걸어야 조기택의 동상이 있는 도서관이 나왔다. 방학이 시작된 대학 근처에는 사람들이 드물었고 저녁 시간이라서인지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도 산책하는 동네 사람으로 보였다. 도서관은 아직 열려 있었고 건물 안에서 이야기하고 책을 읽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도서관에서 본 자료와는 달리 조기택의 동상은 철거되어 있었고 그보다 작고 낮은 흉상이 있었다. 그는 지방 유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구택은 그보다 십오년 뒤 태어났고 장사로 돈을 벌었다. 도서관 옆 본관 건물을 들어가자 긴 복도가 보였다. 상문은 광주에서 인터뷰를 마치면 순천으로 가서 며칠 쉬다 올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갇히면 어떡하지?”

“소리를 쳐야지.”

“나는 여기가 추리소설에 어울리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그런 거.”

“네가 사라지면 여기에서 시작해야겠네. 나는 인제 너를 한참 찾다가 결국 여기에 도착한 착한 친구 역할이겠네.”

 

근처에 문을 연 식당이 없어서 숙소 근처에서 국밥을 먹었다. 서마리가 가진 또다른 건물 1층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생각해보니 그곳은 까페이니 뭘 안 사가도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것과 상관없이 뭘 사가는 것이 맞는가 생각했다. 좁은 화장실에서 간단히 씻은 둘은 서마리에게 물을 것들을 체크하고 각각 소파와 간이침대에서 잤다.

 

다음 날 영우는 일찍 일어나 근처를 걸었다. 광주천을 가로질러 선교사 사택까지 걸었다. 새벽이었지만 광주천 아래 뛰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후꾸오까 공항에서 광주 공항까지 직항이 있나 생각하다가 이 사람은 이미 서울을 가보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보거나 읽고. 이만희의 영화라든가 88서울올림픽 다큐멘터리라든가. 내가 본 것이 지금 보는 것과 아주 다른 것일까. 어떤 상이 조정되고 맞춰져 하나의 모습이 될 일은 아니다. 서울은 보는 것이 좋은가 서울에 있는 것이 좋은가. 광주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여기서 뭔가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80년 5월의 기억을 길을 걷는 중간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우는 흔적이라는 말과 증거, 자취라는 말을 생각해보았지만 모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후꾸오까가 배경인 영화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우는 재작년에 간 토오꾜오에서 묵은 호텔 근처를 생각했다. 근처에는 출판사 건물이 몇개 있었는데 그런 건물에서 나오는 아키비스트를 생각하다가 아니지 그는 미술관에서 일하므로 오래된 벽돌 건물이나 아니면 반대로 나선형으로 설계된 회색 건물을 떠올렸다. 아키비스트는 아카이브 사례 연구를 발표하러 온다고 하였다. 그가 근무하는 곳에는 서명운과 이두현의 작품은 없다. 조구택이 실제로 크게 도움을 준 감독 중 한명은 이만희 감독의 「휴일」에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했던 김성순 감독이라고 한다. 그는 십대였던 60년대 후반부터 영화 관련 일을 하지만 80년대 중반에야 연출을 맡게 된다. 김성순과 이두현의 개인적 친분은 알 수 없지만 김성순은 이두현처럼 지금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같았다. 90년대 들어 사업이 기운 뒤로 조구택은 크게 줄어든 재산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지냈기 때문인지 이후 영화계와의 연은 서서히 사라진다. 김성순의 작품은 실험적이고 난해하다고 하는데 몇몇 해외 영화제에 초청된 적이 있다고 한다. 아키비스트가 일하는 미술관에는 김성순의 필름이 소장되어 있다. 김성순이 사채를 쓰고 도망 다니다 미국으로 가 조카가 하는 일을 돕는다는 소문을 알려준 것도 아키비스트였다. 혼자 국밥을 먹어도 될까? 선교사 사택 앞 벤치에 앉아 지나가다 본 식당에서 아침을 먹어도 될까 잠시 생각했다. 영우는 국밥을 어제저녁에 이어 또 먹고 천천히 걸어서 숙소로 되돌아갔다.

 

아무도 서명운의 특집 기사를 쓰라고 한 사람은 없었는데 상문은 길고 긴 글을 썼다. 기사는 아니고 리뷰도 아니고 아무튼 길고 긴 글이었다. 서명운 감독의 본명은 서명훈으로 베트남전쟁에서 돌아온 군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 데뷔하였다. 군인과 국가를 칭송하기도 그렇다고 마음대로 만들 수도 없어서였는지 군인의 여동생과 부인이 힘을 합하여 방앗간을 운영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는데 마지막에 군인은 두 여자를 도와 열심히 일을 한다. 여러모로 애매하다는 평이 많았으나 상문은 이 영화를 연구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 같다고 줄곧 생각했다. 서명운 감독은 이두현 감독처럼 작품이 높게 평가받는 쪽도 아니었고 한두편 흥행 성공작은 있으나 사람들이 기억할 만큼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인품이 뛰어나다는 언급이 많았다. 또한 권위의식이 적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열살 이상 어렸던 이두현 감독과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상문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의 성격이 좋았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상문은 서명운의 장례식장에서 밥을 먹으며 나이 든 영화인들이 그가 참 신사였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다가 왠지 그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로 신사였는가. 그는 친절하고 다정하였는가. 서명운과 관련된 기사는 의외로 많았는데 그가 몇몇 단체에서 협회장을 맡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서명운의 장례를 돕는 이들은 가족들 같아 보였고 그 역시 상문은 좋게 보였다. 무언가를 오래 한 사람들의 장례에는 그가 속한 어딘가의 직원들이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문이 대학원을 다닐 때 명예교수의 죽음이 예고된 후 장례와 기념 문집을 준비해야 했는데 평소에 별다른 감정이 없던 교수가 제발 오래 사시면 좋겠다 매일매일 학교 운동장을 걸으며 선생님이 오래 사시면 좋겠다 선생님이 오래 사시면 좋겠다 선생님이 오래 사시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러다 일년 후 그를 기리는 행사를 준비해야 했을 때는 아 선생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생님이 살아 계시면 좋겠다 선생님이 살아 계시면 좋겠다 선생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운동장을 돌고 또 돌며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가 가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 정리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정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눈을 떴을 때 영우가 없어서 상문은 모자를 눌러쓰고 나가 근처 까페로 갔다. 핫케이크를 세장 먹고 커피를 마셔도 잠이 깨지 않았다. 서마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였고 광주에 온 것이 일주일은 된 일처럼 느껴졌다.

 

아키비스트는 극장에 미리 양해를 구해 비행기 티켓을 행사 사흘 전으로 끊었다. 서울에서 하루 묵으며 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를 보았다. 동대문 토요코인에서 묵으며 충무로까지 걸어 다녔다. 저녁에 백숙을 먹고 다음 날 점심에는 함흥냉면을 먹었다. 함흥냉면을 먹고 나와 맞은편 건어물 시장에서 찹쌀도넛을 사 먹었다. 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을 때 땀 냄새가 났다. 다음 날 기차를 타고 광주에 갔다. 서울에 가보고 광주에 가보고 습하지 않은 초여름의 날씨였다. 그는 극장에 부탁해 미리 예약해둔 호텔로 가 짐을 맡기고 가톨릭센터 자리에 생긴 5·18자료관에 갔다. 내일모레 행사에서 이곳에 들른 이야기를 하며 발표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관 안에 유난히 작은 창이 있어 설명을 보니 80년 당시 그때는 가톨릭센터인 이곳에서 주교가 당시의 상황을 보았다고 적혀 있었다. 상황인지 참상인지 엄청난 분노와 압박감과 슬픔이며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면서 본 것인지 관찰인지 살핀 것인지 숨을 죽이며 혹은 떨리는 가슴으로 공포에 질려서인가. 그는 설명을 본 순간 그 상황을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다 완전히 착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본인이 무언가를 착각하면서 그 착각 속에 한동안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그는 작은 창 아래로 광주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아키비스트는 아카이브된 자료를 앉아서 천천히 보고 한국어를 몰라서 모르는 자료들을 살피며 그런데 이 자료들을 이전에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모르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사진과 글씨들을 보았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있다. 기억에 없지만 기억에 있을 것 같은 자료를 앉아서 보았다. 자료관에서 나와 오후에는 간단히 빵과 커피를 먹었다. 저녁에는 떡갈비를 먹었다.

 

서마리는 아버지 관련 자료는 서울에 많이 있고 지금 집에는 가지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넓은 까페 안에는 애매한 시간이어서인지 사람들이 몇 없었다.

 

“저는 아버지가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다른 분들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는 어머니와도 사이가 좋고 이웃들에게도 친절하셨어요. 아이들을 좋아하고 개 고양이도 정말 좋아하셨어요. 정말 신사셨어요.”

“서명운 감독님 영화 중에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아버지는 집에서 영화 이야기를 안 하셨어요. 저에게 보라는 말도 안 하셨고 저는 그래서 나이 들어서까지 감독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어요. 몇시간 일하고 오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다른 아버지들 출장 가는 것처럼 출장 비슷한 것을 갔다 오시나보다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상문은 점점 서명운 감독의 성격에 관해 개인적 일화에 관해 묻게 되었다. 감독과 같이 일한 사람을 인터뷰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영화에 관해 물어본다고 해도 알기 힘들었고 점점 찾아볼수록 서명운 감독의 뛰어난 점은 그의 품성 인품 성격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서마리는 조구택 아저씨가 어릴 때 전가복을 자주 사주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만나러 갈 때 함께 가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저는 사실 영화를 잘 모르고 영화도 안 보거든요. 마음에 걸리고 불편한 것을 싫어해서요. 집에서도 뭘 잘 안 틀어놔요. 음악도 잘 안 듣고 가끔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걸 보기는 하는데 아버지 자료도 협회에 다 맡기고 만년필이랑 모자 정도만 놔뒀어요.”

 

서마리는 서명운이 연출을 그만둔 후로는 극장에도 잘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무렴 인품이 좋은 옛날 어른은 정말 드물지. 영화를 보거나 안 보거나 무슨 상관인가 영우도 이야기를 듣다보니 점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우는 일본에서 필름 아키비스트인 분이 함께 가도 되느냐고 다시 여쭤보고 서마리는 상관없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몰두하셨던 일은…… 재산관리랑 어머니랑 운동 다니는 거였는데 아무튼 영화를 그래도 오래 만드시긴 했는데 모르겠네요. 영우와 상문은 거듭 감사를 표하고 녹음기와 카메라를 챙겨 숙소로 돌아왔다. 한시간만 잠을 자고 일어나 지나가다 본 오래된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 먹었다. 탕수육을 먹으며 그래도 서명운의 영화에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것으로 수료 상태인 대학원으로 돌아가 논문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한복집 주인도 서마리도 모두 갑자기 찾아온 둘의 사정을 배려해주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는데 이곳의 누구도 서명운 감독의 영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복집 주인은 당연하지만 딸인데 아버지의 영화에 관심이 없을 수가 있나 생각하다가 그런데 아버지가 하는 일에 꼭 관심이 있어야 하나 사이가 좋아도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을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자주 자신을 찾아오는 과거의 장면들을 굳이 중요한 일인 것처럼 설명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탕수육 정말 맛있네. 진짜 맛있다. 둘은 커피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키비스트는 둘의 숙소로 와 인사를 하였다. 셋은 근처 식당에서 제육볶음과 전을 포장해 와서 막걸리를 마셨다. 셋은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말했다. 조구택 선생과의 미팅에는 극장에서 섭외해준 통역사와 함께 간다고 하였다.

 

영우는 여섯시에 눈을 떠 광주천을 따라 걷다가 어제 들른 선교사 사택을 향해 걸었다. 부자들이 어떻게 부자로 남는가 잠깐 생각했다. 그래도 조구택은 여전히 부자이기는 했다. 어마어마하지는 않지만 건물을 몇채 가지고 있으면 부자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른 아침 골목에 사람들은 몇 없고 집 앞에 나와 있는 할머니가 학생은 뭐를 찾소 물었다. 뭐를 찾는데? 시끄러워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해. 영우는 고개를 숙이고 산책을 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아키비스트가 일하는 미술관에 가서 만나면 어떨까. 아무래도 일하는 곳으로 가는 것은 조금 불편한 일일까. 의외로 막상 만나면 별로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슨 필름을 아카이브하는 것일까 그 미술관은 돈이 그래도 있는 곳일까. 또 국밥을 먹으면서 조구택이 무서운 어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다로운 사람일 것 같다. 하지만 영화에 돈을 많이 쓴 사람이다. 한때는 극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지금은 주차장이 되었지만 그 사람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서마리에게는 어릴 때 전가복을 자주 사주었다고 하니 너그러운 사람일 수도 있다.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 정도로 나이 든 어른을 대하는 것은 긴장이 되었다. 영우는 아직 자고 있는 상문을 깨우고 둘은 간단히 씻고 나와 근처 까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날씨는 비가 올 듯 구름이 무거워 보였고 그런데 비는 오지 않았다. 영우는 이전에 극장이었던 주차장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 주차장이 조구택의 것인가? 아닌가? 상문은 들어가서 쉬다가 다시 나오겠다고 하였고 영우는 무거운 구름 아래를 걸었다. 오르막길을 따라 사직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벽돌 건물로 된 도서관에는 조용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하로 내려가니 보관실이 있었다. 여기에서 오래된 책을 꺼내서 주는 것일까 영우는 어제 대학 도서관 복도에서 여기에 갇히는 사람이 생기면? 그렇다면? 도서관 보관실에 갇히는 사람들은 오래된 종이 냄새에 숨쉬기 힘들 것이다. 머리 위에는 창이 있고 무거운 구름과 흐린 하늘이 보였다. 책보다 오래된 사람 책보다 나이 든 사람 조기택은 죽었고 조구택은 곧 만나고 이대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지 여기서 갇혀버리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지 그대로 나가버리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지. 영우는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쉬다가 도서관을 나왔다. 도서관 옆에는 테니스코트가 보였고 짝이 없는 짧은 머리 여자가 선생님과 파트너가 되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사이 비가 잠깐 떨어지다 말았고 사람들은 비네 손으로 머리를 가리거나 걸음을 빨리했지만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계속 테니스를 쳤다.

 

조구택은 이제 요양원에 들어갈 계획이라 곧 큰 집을 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지내는 곳은 첫날 들른 도서관 근처 주택이었다. 상문과 영우는 롤케이크와 요구르트를 사갔다. 서마리는 가끔 조구택과 연락을 하는지 둘은 편하게 인사를 하였다. 아키비스트와 통역사는 상문과 영우보다 능숙하게 조구택과 서마리에게 인사를 하고 일본에서 가져온 술을 선물하였다. 서마리는 어제 집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니 문득 서명운이 죽기 전 녹음기에 대고 그날그날 생각나는 것들을 남겼던 것이 기억나서 하나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서명운의 자서전이라고 해야 할지 인생사를 담은 책은 작업 중이라며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서마리가 가져온 테이프재생기는 서명운 감독이 쓰던 것을 그대로 들고 온 것 같았다. 아키비스트는 그것이 소니에서 만든 80년대 제품인데 무척 좋은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개가 좋고 이제 와서 생각하니 영화 같은 것은 잊었습니다. 왜 영화 같은 허무한 일에 매달렸는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가족들과 시간을 더 보냈을 것이고 그 돈으로 사업을 하고 집을 사고 어려운 사람을 도왔을 것입니다. 나의 인생은 굽이굽이 한국의 역사와 함께하였고 그것을 참 말로 다 못합니다.”

 

개가 좋다고 할 때 개가 옆에 있는 소리가 났다. 서마리는 서명운은 늘 개를 키웠고 고양이 밥을 주었는데 죽기 전에 옆에 있던 개는 잠보라는 시추라고 했다. 처음 조구택과 서마리에게 연락한 상문과 영우는 점점 테이블에서 밀려나 조용히 조구택의 조카며느리인지 손자며느리인지가 가져온 보리차만 마시고 있었다. 영우는 이두현 감독에 관해 논문을 쓸 예정이라고 자신을 다시 소개하며 이전까지 이 이야기를 입 밖에 내본 적이 없었는데 고작 논문을 쓰려는 의지 가지고 여기서 발언권을 얻고자 하는가 생각하다가 아니 그런데 내가 정말 논문을 쓰려고 하기는 하는 것인가.

 

“이두현이의 영화는 우스갯소리야. 나는 서명운이를 인정하고. 사람으로 인정하고. 왜 나도 그렇게 돈을 참 영화에 많이 썼어.”

 

조구택 선생은 요구르트를 흘리며 간신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고는 기침을 하다 다시 쉬었다. 우스갯소리 우스갯소리? 통역사는 우스갯소리를 일본어로 자세히 설명하려 애썼다. 아키비스트는 사전에서 검색해달라고 하여 우스갯소리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검색 결과를 집중하여 읽었다. 영우는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이두현 감독의 「강의 사람들」의 중요한 점에 대해서 웃으며 이야기를 했고 서마리씨는 가끔 웃으며 아 그래요? 말했다. 상문은 점점 서명운과 조구택이 실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을 일단 후회를 하잖아? 이 정도로 뭔가를 했는데 자기가 한 일이 후회스럽다고 말한 어른은 처음 본다. 조구택 선생은 임권택 감독 이야기를 잠깐 하다가 그때 자기가 한 것은 뭘 몰라서 한 일이었고 재밌어서 했을 뿐이라고 했다. 바보 같은 짓이었지. 아키비스트와 통역자는 서마리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 테이프를 다시 듣고 영우는 어른들을 뭔가를 했던 사람들을 이제 더 만나기 싫다고 생각하다가 조구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구택은 흘리며 닦으며 어렵게 요구르트 한병을 다 먹었다. 그래도 상문은 서명운이 더 좋아졌다. 조구택은 무심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보다가 아무 이야기나 조금씩 하다가 피곤하니 나가보라고 하였다. 아키비스트는 서마리에게 여러 부탁을 하고 꼭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연락처를 받았다. 서마리는 조구택에게 각별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나와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하였다. 미리 예약을 해두었다고 하였다. 우리는 서마리가 사준 전가복과 누룽지탕과 깐풍기를 먹었다. 그리고 크리스 마커의 영화 「La Jetée」에서 이름을 딴 건지 같은 이름의 바로 가 위스키를 마셨다. 간판에는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 아키비스트는 극장에서 돈을 많이 받았다며 술을 샀다. 그 사람은 뿌듯해 보였다. 영우와 상문은 중요한 사람들에게 밀려난 기분이 들었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지만 역시나 집에 가고 싶어졌다. 서명운이 영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이 든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도 크게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조구택이 이두현의 영화를 여러번이나 무시한 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영우는 그것을 확실히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 것이 내내 괴로웠다. 조구택의 말은 입 안에서 우물거리고 있어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고 그의 눈은 또렷했지만 힘이 없고 야윈 사람이었다. 어쩌면 조구택의 말들은 애정의 다른 표현일지도 몰라. 그래도 영우는 이두현이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길가의 술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이두현이 걷고 또 걷고 돌아와 그들을 스쳐가고 술집 안 어두운 테이블에 이두현은 앉아 있고 나의 영화는 우스갯소리 우스갯소리 슬프게 주정을 하는 이두현.

 

조구택은 영우가 인터뷰를 한 이후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년 뒤 죽었다. 영우는 ‘영화 투자자 조구택의 역할과 영향’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고 우수논문상도 받았다. 내내 왜 그 자리에서 이두현의 영화를 변호하지 못하였는가 그것이 그에게 너무나 중요한 문제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인지 영우는 이두현의 영화를 주제로 논문을 쓰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키비스트는 이듬해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포럼에서 서명운 감독의 녹음테이프와 관련된 발표를 하였다. 그가 가보지 못한 곳은 빠리와 런던 로테르담 토론토 등이 있으나 서울과 부산 광주를 여러번 가보았다. 가보지 못한 곳을 간 곳처럼 너무나 깊이 이해하는 경우, 어떤 면에서 빠리에 사는 사람들보다 아키비스트는 빠리를 깊이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키비스트는 그곳들에 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영화로 보는 것만을 이해하고 싶은 것인가 그렇기도 아니기도 했다. 근무한 지 십년이 되어 긴 휴가를 받았을 때 그는 리스본에 가서 그곳의 씨네마떼끄에서 이주간 영화를 보다가 뽀르뚜로 가 열흘 동안 와인만 마시다가 왔다. 영우는 논문을 마친 뒤 후꾸오까로 여행을 가 미술관에서 아키비스트를 만나고 그가 꽤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임을 알고 놀라지만 모두 일을 하는 사람 당신은 일을 오래 한 사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두 사람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고 어느새 일본어를 배운 혹은 통역을 대동한 영우가 아키비스트에게 준비한 질문을 던지는 모습. 나는 한동안 이두현의 영화들을 보았다고 생각하였으나 단지 나는 당신의 글을 읽었을 뿐이더군요.

 

보관실에 갇힌 사람은 죽지 않고 잘 살아가고 짝이 없는 사람은 벽에 대고 테니스를 치다 어느새 테니스장에서 가장 잘 치는 사람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쉬지 않습니다. 한복집에서 커피를 마시던 주인은 맞아 그래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영원하지 않지만 때때로 놀랄 정도로 반복되는 일이야. 그리고 그 사람은 여전히 한복을 입고 있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