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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뉴노멀’ 시대의 소설
김세희와 김봉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지만: 임현론」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 등이 있음. jwhyi@naver.com
* 이 글은 김세희 소설집 『가만한 나날』(민음사 2019)과 김봉곤의 소설집 『여름, 스피드』(문학동네 2018)와 단편 「그런 생활」(『문학과사회』 2019년 여름호)을 다룬다. 이후 인용 시 작품명과 면수만 표기한다.
1. ‘소확행’: ‘뉴노멀’ 시대의 테크놀로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소유냐 존재냐』(한국어판 까치 1996)에서 근대 산업사회가 내걸었던 ‘위대한 약속’의 핵심으로 “만인에게 해당되는 부르주아적 삶이라는 이상(理想)”을 꼽은 바 있다. “무제한의 생산, 절대적 자유, 무한한 행복이라는 삼위일체”는 근대 산업사회가 고안해낸 새로운 정치적 복음의 핵심 교리였으니 이는 누구든지 자본의 번영을 믿는 자로 하여금 지상에서 미증유의 행복을 누리게 해주리라는 달콤한 언약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약속을 곧이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편적 부르주아라는 이상”(12면)은 계층적 양극 분해 속에서 용해되어버렸으며 우리의 삶은 만성화된 불황과 경제위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형국이다.
‘뉴노멀’은 이와 같이 일상화된 경제적 위기 상황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주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이 직면한 침체 상태를 지칭하는” ‘뉴노멀’은 단순히 거시경제적 성과의 부진을 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발전모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는 구조적 위기 요인을 의미한다.1)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저성장과 불평등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뉴노멀’이 고도성장의 혜택을 누려보지 못한 청년 세대들에게 커다란 좌절과 불만을 안겨주는 동시에 작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삶의 여러 중요한 변화들을 초래하는 동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의 경우 현재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축적이 미래의 개인적 번영을 낳으리라는 믿음이 흔들리면서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감각하는 일의 중요성에 눈을 떠가는 모양새다.
관련해 ‘소확행’은 ‘뉴노멀’ 시대에 변화한 사회의 일면을 드러내는 유행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의미하는 ‘소확행(小確幸)’은 무라까미 하루끼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한국어판 백암 1994)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 알려져 있지만 김난도 서울대 교수팀이 『트렌드 코리아 2018』(미래의창 2017)에서 한국사회의 새로운 트렌드로 지목하면서 일약 오늘날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유행어로 떠올랐다. 하지만 현재 ‘소확행’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박한 편이다. ‘소확행’이 “정치가 퇴보하거나 정체됐을 때 되풀이해 등장하는 징후”이며 인간을 “배불리 먹여주고 소소한 취미 활동에 몰두하게 해주면 정치고 자유고 관심 없는 존재”로 격하시키는 통치술의 일환이라거나2) 애초에 ‘소확행’의 정신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현재 소비주의적 마케팅 용어에 불과하다는 냉소적 반응이 대표적이다. 이런 비판의 근저에는 ‘소확행’이 부르주아-중산층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꺾여버린 주체가 현실에서 취하는 체념적이고 수동적인 대응에 불과하다는 판단이 자리 잡은 듯하다. 자조적인 맥락에서 ‘소확행’을 입에 올리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작고 확실한 행복’을 적극적으로 추구한다기보다 내게 주어진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푸념과 원망의 정서가 강하게 묻어 있다. 확실히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유통되는 사회적 맥락을 보았을 때 그 단어에서 모종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추출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소확행’이 단지 저성장과 불평등의 ‘뉴노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당히 현실에 만족하고 살라는 세뇌에 불과한 걸까. ‘소확행’에는 변화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주체의 실천이 자리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일까. ‘소확행’의 기본정신이 욕망의 통제를 통해 삶의 만족을 획득하려는 데 있다면 거기에는 자신의 욕망을 반성하고 적정한 삶의 형식을 스스로 정립하려는 능동적인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지 않는가. 이런 질문들을 따라가다보면 의외로 근대 산업사회가 제시한 ‘위대한 약속’이 (거짓으로 탄로 났음에도) 아직 우리에게 뿌리깊게 남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프롬이 말한 보편적 부르주아에의 이상은 그 불가능성이 폭로된 지금에도 여전히 모두가 도달해야 할 사회적 욕망으로 기능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소확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사는 건 그것이 만인이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상승의 욕망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소확행’은 보편적 부르주아-중산층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이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만큼 ‘소확행’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소확행’에서 중요한 건 주체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지 ‘포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소확행’은 그 점에 있어 ‘욕망의 포기’가 아니라 ‘욕망의 통제’를 역설하는 고대 그리스의 ‘엔크라테이아’(Enkrateia) 정신과 통하는 면이 있다. 미셸 푸꼬(Michel Foucault)에 따르면 ‘엔크라테이아’는 “욕망과 쾌락의 영역에서 저항하거나 싸울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그것들을 확실히 지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자기지배의 능동적 형태”이며3) 이는 “단순히 욕망을 가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맞게 욕망하는 것을 의미”4)한다. 물론 이제까지 ‘소확행’이 한국사회에서 자기지배의 능동적 테크놀로지로 기능해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작고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내재된 자기지배의 능동적 가능성을 새롭게 창안하고 전유함으로써 이제까지와는 다른 ‘소확행’의 정치적 가능성을 탐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고 확실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건 (‘소확행’에 대한 흔한 오해와 달리) 즉물적인 만족을 주는 쾌락에 탐닉한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소확행’을 위해서는 자신을 만족시켜줄 ‘작고 확실한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과연 내 삶에 있어 ‘적절한 욕망’의 크기와 형태가 무엇인지를 거듭 묻는 일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확행’은 에리히 프롬이 제시한 이분법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가령 프롬이 비판하는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행복은 최대치의 쾌락으로 정의되며 이때의 행복= 쾌락은 무한히 증식하는 것을 본령으로 삼는 자본처럼 결코 그 만족을 모르는 것으로 상정된다. 하지만 ‘소확행’은 행복= 쾌락의 자기증식 운동이 결코 영원할 수 없으며 그것이 약속하는 미래의 행복이란 반드시 현재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반성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축적과 재생산의 논리에 일정한 거리를 둔다.
한편 축적의 논리가 지배적이던 한국사회에서 현재는 미래를 위한 예비적 자산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구조화된 저성장 국면에서는 시점 간 선택(intertemporal choice)에 있어 현재에 대한 시간 선호(time preference)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원근법적 구상력이 파괴됨으로써 현재는 커다란 의미의 공백으로 떠오르게 된다. ‘소확행’은 그 결핍을 ‘작고 확실한 무언가’로 채우려는 시도이며 이는 개별적 주체만큼이나 다양한 ‘자아의 테크놀로지’를 요구한다. 이때 글쓰기가 ‘자아의 테크놀로지’와 맺어왔던 밀접한 관련을 염두에 둔다면 ‘소확행’ 시대의 소설 쓰기가 이전과는 다른 결을 지니리라는 예측도 충분히 가능하다.5) 현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필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강조로 나타나게 마련이므로, 최근 한국소설에 “무시무시한 ‘돌파력’을 갖는” “‘나’에 관한” 이야기와 “철저한 단독자적 자기 긍정”6)이 범람하는 이유의 일단 역시 여기서 찾을 수 있겠다. 관련해 오늘날의 “문학은 표면적이고 얄팍한 세계로, 허영심과 속물들 주변의 현실로, 그리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과 ‘소확행’ 사이에서 방황하는 너무나도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인 삶들에게로 향해 가는 중”7)이라는 견해도 있거니와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 ‘뉴노멀’ 시대의 소설들은 프롬의 이분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소유와 존재를 둘러싼 삶의 양태를 공히 변경하면서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2. ‘소확행’의 (불)가능성: 김세희의 소설
김세희의 소설에는 ‘소확행’ 시대를 통과하는 인물이 마주하는 공포와 슬픔을 민감하게 다루는 장면이 여럿 등장한다.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가 대표적인데, 이 소설은 오랜 연인인 진아와 연승이 연승의 학과 선배인 소중한의 집에 방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연승보다 앞서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진아는 스스로를 “현실적이고 앞가림을 잘하”며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해 실제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있”는(11~12면) 존재로 여기지만 두살 연하의 남자친구 연승은 그녀와 상의도 없이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 사표를 내놓은 상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속으로만 품고 한없이 지연시키”지 않고 “더 늦기 전에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12면)며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감독에 도전하는 연승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기를 거부하는 ‘소확행’적 가치관을 보여주는 인물처럼 보인다. 연승이 “자기 일을 하는 선배”(16면)라며 존경심을 표하는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 소중한이나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소중한의 아내 역시 현재 자신이 느끼는 만족을 삶의 우선순위에 놓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소확행’ 시대의 주체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진아의 시선은 그리 탐탁지 않다. 김세희는 여기서 소중한 내외가 “보통 사람들”(48면)과 얼마나 동떨어진 존재인지를 진아의 시선을 경유해 경쾌하면서도 날카롭게 스케치한다. 소중한의 아내가 “바짓단이 곡선을 그리며 발목에서 좁아지는 개량 한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25면)는 묘사에서부터 벌써 심상치 않지만—일찍이 박민규는 「?」의 결말에서 개량한복 입는 사람을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에 대해 탁월하게 형상화한 바 있다8)—산부인과에서 겪는 수치스러운 검진과정과 죽염을 섭취함으로써 맑아진 생리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 이르면 진아가 소중한 내외에게 느끼는 ‘언캐니’(uncanny)한 감정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 때나 죽염을 먹는다거나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스스럼없이 생리혈의 농담(濃淡)을 화제로 삼는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다. 경우에 따라 그건 얼마든지 귀여운 주책이나 건강에 대한 풍부한 관심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만약 소중한 내외가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박사장네 집 같은 곳에 살면서 죽염을 먹거나 맑아진 생리혈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 귀가 솔깃할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죽염 한통을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진아가 소중한 내외의 삶에서 느끼는 당혹과 공포의 출처는 다분히 물질적이다. 소중한이 몰고 다니는 “낡은 회색 봉고”(19면)나 “거실이라고 할 만한 공간이 없”(24면)고 “적나라한 살림살이”(27면)를 숨길 수 없을 만큼 비좁으며 “추운 날 세탁기를 돌리면 왜 아랫집에 물이 새는지 이해”(41면)할 수 없는 소중한 내외의 남루한 거처는 진아로 하여금 연승이 소중한과 같은 길을 걸어간다면 그녀의 미래 역시 이 변두리 동네의 낡은 집에 갇히게 되리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비감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고, 서울 어딘가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아이를 단지 내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리라고 예상해 왔”(41~42면)던 진아를 앞서 프롬이 언급했던 “보편적 부르주아라는 이상”에 젖은 존재로 보는 건 물론 과도하리라. 하지만 이 소설이 계층적 하강의 위기와 상승에의 욕망이 강하게 부딪히면서 서사적 긴장감을 생성해내고 있는 건 분명하다. 중산층의 삶에 편입될 것이냐 아니면 소중한 내외처럼 ‘소확행’을 실천하며 도시 변두리 거주민의 삶을 살 것이냐. 현실적이고 자기 앞가림 잘하는 진아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명확해 보인다. 그녀가 연승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와 관계없이 그녀는 결코 변두리 주변부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소확행’은 ‘경제적 하류지향(下流志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아의 태도를 “소유에 대한 부르주아적 강박”9)에 침윤된 속물의 그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성급한 답변을 내놓기에 앞서 「현기증」을 살펴볼 차례다. 이 소설에는 부모 몰래 원룸에서 함께 살고 있는 원희와 상률 커플이 등장한다. 다니던 은행을 그만둔 원희는 반영구 화장을 배우는 학원에 다니며 상률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상률은 지금 사는 원룸은 둘이 살기엔 너무 비좁다며 이사를 추진하고 결국 둘은 “작은방과 주방, 그리고 큰방이 기차처럼 일렬로 배치된”(60면) 낡고 오래된 집 하나를 구하게 된다. 하지만 그 집엔 아무런 가구와 가전이 딸려 있지 않았고 결국 원희는 상률의 강권에 못 이겨 중고 가전제품을 취급하는 곳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이 “신혼부부인데 혼수를 장만할 돈도 없어서 이런 캄캄한 지하에서 중고 가전제품을 둘러보고 있는 처지”(76~77면)로 비칠 거란 사실에 급속도로 우울해지고 만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결혼은 이런 게 아니었다. 언젠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된다면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보러 다니고, 성가시지만 행복한 고심 끝에 가구를 결정하리라고 생각했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 이런 식은 아니었다. 돈도 없고 소속된 직장도 없는 처지에서 이런 일을 치를 거라고는, 이렇게 참담한 심정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81면)
어릴 적 텔레비전을 통해 결혼과 신혼생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키워왔으며 타인의 시선을 경유해 스스로의 비참함을 증폭시키는 원희는 ‘소확행’ 시대의 엠마 보바리이다. 하지만 보바리가 화려한 빠리의 부르주아적 삶을 동경했던 것에 비해 ‘소확행’ 시대의 보바리가 꿈꾸는 건 기껏해야 아름다운 결혼식, 반듯한 집, 깔끔하고 새것인 가전제품 정도로 그 욕망의 크기가 볼품없이 쪼그라들어 있다. 그렇지만 보바리가 지금까지 허영과 사치의 상징으로 회자되듯 원희 역시 상률에게 “사람이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82면) 따위의 힐난을 듣게 되고 마침내 참아왔던 설움이 터져버리고 만다.
난 대단한 걸 꿈꾼 게 아닌데. 대단한 것들은 언감생심 꿈꿔 본 적도 없는데. 내가 바란 건, 아주 작은 것이야. 그게 그렇게 허황된 바람인가? 내가 이 정도도 바라지 못해? 이걸 바란다고 이렇게 분수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당해야 해?(83면)
‘소확행’이 빠른 시간 안에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유행어가 될 수 있었던 건 “아주 작은 것”에 대한 욕망조차 청년들에게는 거대하고 충족 불가능한 것으로 체감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작고 평범한 것’에 대한 욕망에 통제를 가하는 힘이 주체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강제로 인식될 때 주체가 그것을 일종의 폭력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데 있다. 타인의 욕망을—특히 여성의 욕망을—손쉽게 사치나 허영으로 규정하는 순간 ‘소확행’은 내적인 충만함을 표방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에서 타인의 욕망을 함부로 규제하려는 폭력으로 전환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현기증」은 욕망을 통제함으로써 스스로를 통치하는 자아의 주인이 될 것을 주문하는 ‘소확행’이 타인의 정당한 사회적 욕구에 대한 ‘가스라이팅’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으며 청년 세대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는 데 실패한 기성질서가 기만적으로 취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될 위험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한편 처음부터 ‘소확행’에 대해 냉담한 거리를 유지하는 진아와 달리 원희는 경제적 궁핍을 대면하면서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안이하고 낭만적인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행복의 대상이 될 작고 확실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며 그 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작고 확실한 것에 만족하는 삶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깨달음의 골자다. 진아와 원희 모두에게 세상은 잠시라도 멈추면 굴러 떨어지고 마는 컨베이어 같은 곳이며 그 세계에서는 벨트 위에서 부지런히 달리는 것만이 생존을 위한 유일한 정언명령으로 작동한다. 그 세계는 또한 커다란 비율의 감가상각이 적용되는 곳이어서 현재에 만족하다간 결국 그 현재조차 지킬 수 없게 된다.
「가만한 나날」 「드림팀」 「감정 연습」 등에서 사무실이 주된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세계 인식과 무관치 않다. 사무실은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위치한 유닛(unit)이며 그 유닛의 일차적인 목표는 그 자신의 생존이다. 「가만한 나날」에서는 포털 사이트의 정책에 따라 블로그 홍보 대행업체가 하루아침에 통째로 사라짐으로써 자신이 발 디딘 근거지가 얼마나 취약한지가 폭로되며, 두명의 인턴 중 한명만 살아남아 정직원이 되는 「감정 연습」의 세계는 생존하지 못하는 존재에게는 삶의 무대가 애초부터 할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렇게 존재가 순식간에 삭제되거나 애초에 기입조차 될 수 없으리란 공포가 압도적인 삶의 규정력으로 군림하는 곳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설 자리는 없다.
그런데 김세희의 소설에서 ‘소확행’이 불가능한 이상이자 철없는 소리로 그려지는 건 단지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가 제기하는 물음은 좀더 근본적이다. ‘소유적 실존양식’에 흠뻑 젖어 살던 우리가 갑자기 ‘소확행’을 통해 충분한 정신적 만족을 느끼는 게 가능할까? 어쩌면 그건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으려는 사람이 내세우는 자기기만적 술책은 아닐까? 기존 세계의 욕망을 내면화하고 있는 우리가 ‘소확행’이라는 단어 하나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연승은 가끔 자기 과 선배들, 동기들과 후배들에 대해 말했다. 선배들 중에 제일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 누구인지, 누가 제일 유명하다든지 또는 누가 제일 돈을 많이 번다든지. 그러고는 장학금 때문에 우리 학교에 입학한 것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라고 했다. 시골에서 내가 뭘 알았어야지. (…) 내가 수리 영역만 빼고 수능 성적이 전부 1등급이었어. 말했나? 나중에 보여 줄게, 고향 집에 아직도 수능 성적표 안 버리고 있어.(38~39면)
성적, 학벌, 직위, 연봉 같은 지위재의 소유 여부로 사람을 판단하는 연승의 태도는 기성사회가 설계해놓은 욕망의 틀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스스로의 내적 만족을 추구하는 ‘소확행’의 이념과 모순된다. 푸꼬식으로 말하자면 거기에는 예속화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를 구축해가는 주체의 능동적인 실천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연승은 자신이 내린 ‘소확행’적 선택과 자신의 실제 욕망 사이에 내재한 모순을 극복해내는 데 있어 어떠한 진정성도 보여주지 못한다. 극복은커녕 그 간극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진아가 연승이 “세상에 원한을 품”고 “일그러져 가는 모습”(52면)을 떠올리며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건 단지 경제적 하강의 위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진솔하게 대면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원하는 걸 좇으려 하는 연승의 모순에서 비롯한다.
이 인상적인 장면을 통해 김세희는 ‘소확행’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조건을 동시에 타진한다. 앞서 강조했듯 ‘소확행’은 기존의 가치관과 규범, 혹은 지배적인 생산양식과의 급격한 단절을 선언하는 혁명의 언술이 아니라 일상에서 자아를 돌보고 배려하는 스스로의 힘을 조금씩 키워가는 점진적인 살림의 기법(art)에 가깝다. 주체를 급격하게 기존의 체계로부터 탈주체화하는 단절의 도입이 아니라 이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자기 내부에서 조금씩 화해시키는 힘을 기르게 만드는 실천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여전히 기성사회가 제시하는 우승열패의 도식을 반성하지 않고 살아가는 연승 같은 인물은 ‘소확행’의 포즈를 취할 뿐 진정한 ‘소확행’적 주체가 되기는 난망하다. 거기에는 주체의 실존을 변화시켜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부단한 실천적 노력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른바 ‘소확행’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 자신은 과연 연승과 얼마나 다른가. ‘소확행’이라 해도 좋고 ‘욜로’라고 해도 상관없을 그 유행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욕망을 가진 존재이며 어떤 욕망을 포기할 수 있고 어떤 욕망을 끝내 놓을 수 없는지에 대해 얼마나 근본적으로 되물으며 살아가는가. 일견 ‘소확행’과 무관하거나 그에 냉소하는 것처럼 보이는 김세희의 소설이 역설적으로 ‘소확행’ 시대의 탁월한 소설적 성취일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를 이와 같은 정직한 물음 앞에 거듭 닦아세우기 때문일 것이다.
3. ‘탕진의 에티카’: 김봉곤의 소설
푸꼬는 그의 이력 후반기에 주체의 실존양식과 관련해 에리히 프롬의 이분법(소유나 존재냐)에 비견될 만한 인상적인 이분법을 제시한다. 그건 주체가 진리와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것으로 거칠게 요약하면 고대 그리스-헬레니즘-로마 문화 전반을 지배하던 ‘자기 배려’와 ‘데카르트의 순간’ 이후 나타난 근대적 태도인 ‘자기 인식’ 사이의 구분이다.10) ‘자기 인식’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머리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로 거기서는 앎 자체가, 즉 인식이 특권화된다. 그에 반해 ‘자기 배려’는 “진실에 도달할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주체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변형하며 이동하고 어느 정도와 한도까지는 현재의 자기 자신과는 다르게 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전제”11)한다는 점에서 ‘자기 인식’에 비해 훨씬 실천적이며 관계적이다.
이와 같은 ‘자기 배려’의 전통을 따라 진실이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거는 대가로만 주체에게 부여”12)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김봉곤의 소설 속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사랑에 빠지는 남자들’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사랑이라는 불확실한 내기에 아낌없이 걺으로써 주체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김봉곤의 인물들에게 사랑은 삶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중 하나가 아니라 삶을 추동하는 근원적 에너지(리비도)여서 사랑하지 않는 인물은 삶의 생기를 잃고 잔뜩 시든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나는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실은 나를 자격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힘이 없다.”〔「컬리지 포크」 13면〕) 김봉곤의 소설은 흡사 리비도의 왕성한 활동을 서사의 추동력으로 삼아 사랑의 생로병사를 종횡무진 탐구하는 기계와 같다.
그런데 『여름, 스피드』에 등장하는 김봉곤의 사랑은 너무 빨리 태어나 금방 늙고 항상 아프다가 끝내 죽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너무 빨리 사랑이 탄생하는 장면들, 가령 낡은 포니 픽업트럭에 앉아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리거나(「디스코 멜랑콜리아」) 스치듯 만난 이후 평소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을 다시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리거나(「라스트 러브 송」) 상대를 처음 보자마자 홀딱 빠져버렸다고 고백하는(「Auto」) 인물들의 과도함은 어떤가? 사랑의 대상보다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대상 없는 의지’가 선행하는 것 같은 이 인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푸꼬는 ‘자기 배려’를 일러 욕망의 “과도함을 방지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쾌락을 활용하고 조율하는 것을 목적”13)으로 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렇게 ‘무절제하게’ 사랑에 빠져버리는 김봉곤의 인물들은 ‘자기 배려’와는 딴판으로 거리가 먼 것 아닐까?
이쯤에서 ‘소확행’ 시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유행어인 ‘탕진잼’을 소환해야겠다. ‘탕진잼’은 재물 따위를 흥청망청 다 써서 없앤다는 뜻의 ‘탕진’과 재미를 뜻하는 ‘잼’을 합친 신조어인데 ‘소확행’ 시대의 청년들에게 ‘탕진’씩이나 할 가산(家産)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점에서 이 유행어는 전형적인 반어이다. 실제로 그들은 문구점에서 천원짜리 볼펜을 마구 사재끼거나 인형뽑기 기계에 아낌없이 오백원짜리 주화를 넣으면서 ‘탕진’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한다. 김봉곤의 소설에도 이러한 ‘탕진’의 기운이 넘실거린다. 그의 소설에서는 무엇이 탕진되는가? 그건 주체가 지닌 사랑하는 능력이다. 김봉곤의 인물들은 마치 텅 비워버려야 비로소 다시 채워질 수 있을 것처럼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강박적으로 탕진한다.(“세상을 여태까지와 다르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강박, 눈으로 주워 담은 새 세계의 에너지를 모-든-것에 대한 사랑으로 옮겨가기, 그걸 다시 남자에게 집중시키기.”〔「라스트 러브 송」 132면〕) 그렇다고 이 탕진이 과도할지언정 방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어떤 대상에 존재의 모든 것을 걸어본 사람에게만 발견할 수 있는, 이를테면 ‘탕진의 에티카’라 할 만한 것이 담겨 있다.
김봉곤이 구축하는 ‘탕진의 에티카’는 마음을 아낌없이 비워내는 탕진의 실천을 통해 사랑의 진실에 가닿으려는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그의 소설에서 글쓰기는 그 의지를 현실화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자아의 테크놀로지’로 등장한다.14) 김봉곤에게 글쓰기는 지나간 사랑의 끝에서 과거를 최대한 진실되게 기억하려는 윤리적 행위나 다름없다. 기억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서사적 능력이며 기억을 통해 “사물을 소멸시키는 죽음의 폭력과 화해”15)할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김봉곤에게 글쓰기는 자신의 온 마음을 탕진시키며 수행해온 사랑을 무화시키는 시간의 풍화작용에 맞서 자신이 투신했던 사랑의 실천을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기억하려는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행위가 이제는 삶을 살아가는 한 수행 방식”(「Auto」 208면)이 되었다는 소설 속 인물의 말은 그래서 단순히 흘려들을 수 없다. 김봉곤에게 사랑과 글쓰기는 주체의 진실에 접근하는 동일한 차원의 통로임을 드러내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봉곤의 ‘탕진의 에티카’에는 (당연하게도) 경제적 합리성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 마치 세속의 타산이 사랑의 순수성을 부패시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로지 순수한 탕진만이 사랑의 윤리를 담보할 수 있는 것처럼, 김봉곤의 인물들은 앞뒤 재지 않고 사랑의 심연으로 갈급하게 투신한다.
주인만을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개가 주인을 따지지 않듯 별 볼 일 없는 남자에서부터 꼴값하는 남자에 이르기까지 좋아할 구석을 어떻게든 찾아내 듬뿍 사랑했다. 그렇다고 내게 돌아오는 사랑이 있었느냐?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수지가 터무니없이 맞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라스트 러브 송」 132~33면)
글쓰기에 있어 거리감의 상실이 언젠가 나를 완전히 소진시키고 말 것이란 두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정념에 휩싸이지 않고서는 글을 썼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고, 정염 없이는 시작할 수조차 없었다. 헤퍼지지 않고서는 도무지 버티질 못했다.
나는 하나도 미니멀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나는 경제적 인물이 아니며, 아무런 재화를 창출하지 못한다.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지 못하고, 내 감정도 절제하지 못한다. 이 글을 쓰며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에 대해 생각하고, 기억하고, 떠올리고 그것을 잇는 것이 거의 다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는 진짜였다.(「Auto」 217면)
터무니없이 밑지는 사랑만 하는 사람. 마구 헤퍼짐으로써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탕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 우리는 이 인물들의 ‘무절제함’에서 조르주 바따유(Georges Bataille)를 떠올리게 된다. 바따유는 『저주의 몫』(한국어판 문학동네 2000)에서 인간의 소비를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개인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생산활동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표시되는 소비이며 다른 하나는 원시사회에서 나타났던 것으로 생산과 관련없는 사치, 장례, 전쟁, 도박, 예술 등에 관련된 소비이다. 바따유는 후자의 소비를 ‘소모’라고 부르는데 그는 ‘소모’야말로 인간의 ‘자기의식’을 진정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 주장한다.
제한 없는 소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소모는 고립된 존재들을 소통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격렬하게 소모하는 사람들끼리는 모든 것이 투명하고, 모든 것이 열려 있고, 그리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16)
바따유가 말한 투명함은 김봉곤의 인물들이 사랑할 때 가닿고자 하는 궁극의 지향이기도 하다.(“좀더 과격해지라고, 드러내어달라고, 천박해지라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달라고도 말하고 싶었다.”〔「컬리지 포크」 33면〕) 그의 인물들이 품는 알고 싶다는 욕망은(“—나는 모르겠다.—나는 알고 싶다.”〔「컬리지 포크」 50면〕) 단지 상대방의 속마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모든 것으로, 존재 자체를 격렬하게 소모하는 탕진의 행위를 통해 획득되는 투명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투명함을 위한 격렬한 소모는 항상 ‘나’만의 것이기에, 상대는 결코 그 격렬한 소모의 윤리적 탕진에 동참하지 않기에, 김봉곤의 사랑은 때로 일방적이고 자주 아프다. 「여름, 스피드」의 ‘나’는 결국 영우로부터 자신에게 친구가 되어달라는 말을 하는 진짜 이유에 대해 듣지 못하며 「그런 생활」의 연인은 ‘나’를 속인 채 “불특정 다수와 섹스 약속을 잡”(192면)는 등 바람을 피운다.
하지만 김봉곤은 격렬하게 소모함으로써 투명해지고자 하는 ‘나’와 자신을 속임으로써 상대까지 속이고 마는 불투명한 타자 사이에 놓인 심연에 가까운 불일치를 이제 단순한 분노나 사랑에 대한 환멸로 봉합하지 않으려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분노와 환멸의 감정을 통과하는 동안 그 감정들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끝내 거기에서 빠져나온다. 근작 「그런 생활」에서 ‘나’가 바람을 피운 연인을 (혼신의 힘을 다해) 용서한 끝에 남기는 이런 편지에서 이 점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먼저 형이 한 잘못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 우리의 관계를 중점으로 두되,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분석할 필요도 있는 것 같아.
(…) 그러니까 정말정말 무엇이 문제였던 것인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그리고 그 문제는 하나가 아닐 수도 있는 거고. 보는 눈이 없다면 괜찮을 거라는 안일함, 나약함, 자신감 없음, 외로움, 친구 없음 등등등. 이런 것들이 모두 진짜 문제이자 이유이기도 할 테고, 그저 표면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형, 그리고 내가 계속해서 더 말해줄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그런 형의 밑바닥까지 확인하고 그것까지 감당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내게 진실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하겠다는 거야. 그런 것이 있다면 꼭 말해줬으면 좋겠어. (…)
형이 그렇게 하게 된 이유, 그것을 떠나서 원래 본인이 가지고 있는 단점이나 나약함을 하나하나 적고 분석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 또 그것을 공유하고 함께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아. (…) 언젠가는 우리도 정말 사랑하는 기운이 쇠해서 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동시에 평생 사랑하고 함께할 사람이라고도 생각해야 하고. 우리 좋은 답을 찾고, 함께 잘 이겨내보자 형.(196~99면)
이 편지에서 ‘나’가 연인에게 주문하는 내용은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자신의 욕망과 그 욕망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인식할 것. 둘째,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바탕으로 상대에게 언제나 진실하겠다는 의지를 가질 것. 여기서 김봉곤은 “형은 그런 사람이야”(193면)라는 말로 자기 자신의 어쩔 수 없음을 정당화하는 바람피운 연인의 회피적 태도에 맞서 “그런 사람”이라는 고정된 주체성의 형태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울 만큼 자기 스스로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역설한다.17)
연인의 외도로 인한 마음의 부서짐과 지난한 용서의 과정을 통해 김봉곤이 다다른 지점이 사랑에 대한 냉소나 부정이 아니라 “사랑 역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모습일 수 있지 않겠느냐”(214면)는 담담한 깨달음이라는 사실은 이제까지 그의 소설을 조금은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읽어왔을 독자들에게 안도 섞인 울림을 안겨준다. 어쩌면 김봉곤의 사랑 이야기에서 일종의 변곡점으로 삼을 수 있을 법한 이 사려깊음은 그러나 그가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소모와 탕진의 리비도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자신의 마음을 탕진함으로써 도달하는 투명함과 그 투명함을 근거로 사랑의 진실에 부단히 접근해온 그의 용기가 이제 막 이뤄낸 작은 결실인지도 모른다.
4. ‘확실한 행복’은 없다
김세희와 김봉곤의 소설을 경유해 ‘소확행’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보려는 짧은 여정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깨닫게 된다. 먼저 김세희의 소설이 보여주듯 “세상의 이치”를 충분히 통과하지 않은 ‘소확행’은 낭만적 댄디즘이나 기만적인 자기만족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라는 것. 그렇지만 김세희의 소설에서 충분히 개진되지 않은 것은 “세상의 이치”와 맞서는 가운데 ‘자기 배려’의 양식을 정립하기 위해 애쓰는 주체의 선택과 실천의 가능성이다. 김세희의 세계에서 인물들은 자주 수레 앞에 선 사마귀나 바위로 돌진하는 계란 같은 것이어서 그 세계에 맞서 대안적인 삶을 구축하려는 가능성은 꺼져가는 불빛처럼 희미하게만 존재한다. 이는 압도적인 현실의 힘에 짓눌려 있는 우리들의 처지를 핍진하게 제시하는 미덕을 갖지만 동시에 현실을 주체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명하고 견고한 것으로 고정시키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김세희의 소설이 계속해서 현실에 짓눌린 인물들이 짓는 미간의 주름에 갇혀 있지 않을 거란 예감은 그런 고정조차도 유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가령 『가만한 나날』에 실린 소설들의 결말은 대부분 작중 인물이 어느 순간 사로잡히는 감정이나 생각, 상태 등으로 맺어지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 순간 이후 펼쳐질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끔 한다. 물론 그 이후의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후의 인물들은 “세상의 이치”를 이미 온몸으로 통과한 이들이기에 현실 앞에서 단지 “경이로움과 체념”(「가만한 나날」 107면)의 태도만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18)
한편 경제적 타산이 제거된 순수한 사랑에의 몰입에 바탕하고 있는 김봉곤의 세계는 ‘소확행’ 시대의 주체에게 요구되는 ‘자기 배려’의 면모를 탐색하는 데 맞춤한 무대를 제공한다. 그는 「Auto」에서 스스로를 “아주 저렴한 비용에 행복해질 방법을 아는 사람”(208면)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런 생활」에서 보여주었듯 사랑-행복은 자기 자신 전부를 사랑이라는 내기에 걸고서도 확보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확실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소확행’을 모종의 반어적 실천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소확행’이 즉물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을 얼마나 즉각적으로 확보하느냐에 달린 것처럼 여겨지는 지금, 주체를 비워냄으로써 투명한 사랑의 진실에 다가가려 하는 김봉곤의 실존적 모험은 우리로 하여금 ‘작고 확실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그가 썼듯 그러고도 행복은 ‘수면 위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모습’으로만 순간순간 우리 곁에 선물처럼 찾아오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스스로의 심연과 마주하는 고통의 시간 없이는 결코 어떤 행복도 확실한 것으로 그냥 거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소확행’은 언제나 이 힘겨운 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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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관련해 구체적인 설명은 이일영 「뉴노멀 경제와 한국형 뉴딜」, 『뉴노멀 시대의 한반도경제』, 창비 2019 참조. ↩
- 「‘소확행’의 시대는 불온하다」, 『주간동아』 1174호(2019.1.25), 6~7면. ↩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문경자·신은영 옮김, 나남 1990, 83면. ↩
- 안현수 「푸코의 주체와 자기 생성의 문제」, 『문화와 융합』 41권 2호 2019, 1060면. ↩
- 글쓰기와 ‘자아의 테크놀로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심세관 옮김, 동문선 2007, 381~96면 참조. ↩
- 노태훈 「‘나’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문학사」, 『문학들』 2018년 가을호 44~45면. ↩
- 박인성 「얄팍하고 한갓된 세계로의 귀환」,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8년 겨울호 43~44면. 물론 여기서 박인성이 말하는 ‘소확행’은 “표면적이고 얄팍한 세계”에 거하는 주체의 피상적인 반응이라는 점에서 내가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소확행’과는 다르다. ↩
- 박민규 「?」, 『더블 side B』, 창비 2010. ↩
- 에리히 프롬, 앞의 책 103면. ↩
-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39~63면 참조. ↩
- 같은 책 59면. ↩
- 같은 곳. ↩
- 도승연 「철학의 역할, 진실의 모습: 푸코의 자기-배려 논의를 중심으로」, 『한국여성철학』 18권 2012, 157면. ↩
- 관련해 푸꼬는 글쓰기가 인간이 지니고 있던 진실과 로고스를 자기화하는 준신체적 훈련의 일환이라고 말한 바 있다(『주체의 해석학』 386면). ↩
-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비평동인회 크리티카 엮음 『소설을 생각한다』, 문예출판사 2018, 162면. ↩
- 이영석 「바타유의 『저주의 몫』에 나타난 증여와 존재의식」(『프랑스문화예술연구』 28집 2009)에서 재인용. ↩
- ‘나’의 편지는 푸꼬가 대항품행의 방편으로 언급했던 ‘파르헤지아’(parrhesia)라는 개념과도 맞닿는다. 파르헤지아란 ‘자기 배려’와 관련해 고대 그리스 문학 전반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로 타자에게 숨김없이 모든 것을 진실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진솔함이라는 덕목 이외에 진실을 발설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칠 불리함을 감수하는 용기가 요구된다(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398면). ↩
- 김세희는 근작 『항구의 사랑』(민음사 2019)을 통해 그 세계 이후가 아니라 그 세계로 들어가기 직전의 시기를 조명한다. 그 점에서 『항구의 사랑』은 『가만한 나날』의 ‘프리퀄’(prequel)이라 할 수 있다. 거기서 주목할 건 주인공 ‘나’가 민선 언니와의 관계에 있어 순수한 몰입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 사랑은 서울에 오면서 망각되고 삭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한 나날』 이후에 그때의 기억이 복원되어 제시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 ‘사랑’은 『가만한 나날』에서 보여주는 생존의 명령이 지배적인 세계에서 갈구하는 복고적 향수인 동시에 미래에의 가능성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