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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조국사태, 대학입시 그리고 교육불평등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 『연대와 열광』 『에밀 뒤르켐을 위하여』 『분단체제와 87년체제』, 편서 『87년체제론』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1980년대』 등이 있음.

jykim@hs.ac.kr

 

 

1

 

‘조국사태’는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하나의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폭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국사태의 첫번째 변곡점, 즉 그런 폭주의 시작 지점은 검찰의 ‘공식적’ 개입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조국 딸의 입시와 관련된 각종 의혹 제기였다. 그 이전의 이런저런 의혹들, 그러니까 조국의 시국사건 전력이나 그의 부모가 이사장이었던 사학재단 웅동학원 문제, 조국 동생 전처와 관련된 부동산 증여 문제 등은 조국도 여느 장관 후보자들과 크게 다른 사람은 못 된다는 실망을 주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평판이 형성되진 않았다. 하지만 딸의 대학입시와 관련된 의혹이 다수 터져나오자, 부정적 평판이 급속히 강화되었다. 이 평판 악화가 그후 불거진 사모펀드 문제를 해석하는 프레임이 된 것은 물론이고, 그 전에 제기된 의혹들도 부정적 프레임 속에 재편입시켰다. 그리고 검찰이 ‘자신감’을 가지고 개입할 수 있게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통상 어떤 프레임이 수용되면, 수용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강화적 속성을 띤다. 프레임을 일단 수용하고 나면, 사람들은 그 프레임 유지에 도움이 되는 정보는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기피한다. 왜냐하면 프레임을 정정하려면 자신이 판단력이 모자라거나 성급하게 판단 내리는 사람이라는 불편한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용한 프레임에 어긋나는 정보만 계속 접하면 그 프레임은 의심받고 버려질 것이다. 하지만 경합하는 정보들이 공급되면, 최초에 수용된 프레임은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조국사태는 대단히 복잡한 현상이지만, 그것이 몇달간 우리 사회를 뒤덮게 된 계기는 조국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의 형성과 정착이었고, 그것의 핵심에는 입시 문제와 교육불평등이 놓여 있다. 이런 의제가 그토록 인화성이 높은 사회, 그것이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각자의 경험, 이기심, 자기정당화 욕구, 전략적 계산은 물론이고 공적 대의를 향한 열정마저 한꺼번에 불러들이고 소용돌이치게 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 사회이다. 조국사태는 조국의 사태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사태이기도 한 것이다.

 

 

2

 

지난 8월 중순경 나온 기사 가운데 「외고 → 고려대 → 의전원… 조국 딸, 필기시험은 한 번도 안 봤다」1가 있다. 그것은 자유한국당의 김진태 의원이 2019년 8월 20일 기자회견에서 처음 했던 말인데, 거의 같은 따옴표 제목 기사가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다. 김진태가 생각한 시험이 뭔지 모르겠지만, 정해진 시간 동안 문제를 풀고 그것에 따라 성적을 받는다는 의미라면 조국 딸이 한번도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다. 하지만 진위와 무관하게 이런 기사가 선동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그런 말을 듣는 즉시 우리는 자신이 겪었던 중요한 시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그것을 준비하며 애썼던 힘겨운 시간과 시험의 결과로 겪은 영광 또는 비참을 되살려낸다. 그리고 그런 시험 없이 명문대와 의전원 입학을 거머쥐었다는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그 말을 한 김진태 의원이나 그 말을 받아쓴 여러 신문의 기자들이 대중을 선동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그런 인식에 그들 자신이 이미 설득되고 분노한 상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무릇 뭔가 좋은 것을 가지려면, 시험을 잘 봐야 한다, 그런데 시험도 보지 않다니, 그것이 대학입시와 사법고시라는 두개의 시험으로 승승장구해온 국회의원과, 대학입시와 언론‘고시’ 잘 본 것이 그가 인생에서 이룬 많은 것의 토대였을 기자의 심리일 수 있다.

이렇게 대학입시는 우리 사회에서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 깊은 곳에 파고들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우리 사회성원들은 입시와 관련된 일련의 인지적 편향을 갖게 된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자신이 치른 입시를 정당화하려는 심리이다. 입시가 자원배분에 큰 영향을 발휘하는 사회에서 그것에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받는 보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치른 입시를 ‘좋은’ 제도, 적어도 나름의 장점을 가진 제도로 기억한다. 예컨대 필자 세대가 치른 학력고사는 지금 주입식 교육의 원흉으로 비난받는 수능보다 훨씬 더 주입식 교육과 ‘잘 어울리는’ 시험이었다. 하지만 학력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서 좋다는 대학에 간 사람들은 주입식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다는 것은 인정할지언정(그것도 쉽지 않은 정직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사고력이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험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기능 면에서 큰 문제가 없었다고 믿는다. 이런 자기정당화 심리는 자녀의 입시에 과몰입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당연히 자식이 치른 입시에 대해서도 생겨날 것이다.

한영외고 졸업자(아니 모든 외고 졸업자)에게도, 고려대생(서울대생이나 연세대생)에게도, 그들의 학부모에게도, 조국 딸의 입시 의혹은 그들이 당연하게 느껴온 자부심의 원천이 함께 매도당하지 않을까 두려움을 자극하는 일이다. 필자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조국 딸 입시가 화젯거리가 될 때마다 “우리 딸은 정시로 대학에 갔지만”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 않아도 될 말로 밑자락을 깔았던 동기는 뻔하다. 조국사태에 대한 내 논평이 내적인 정당화 동기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음을 청자에게 환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니 “논문 제1저자는 심했어”라거나 “강남 아줌마가 하는 건 다 했네”라는 비아냥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조국 딸의 입시의혹에서 자신과는 다른 어떤 과잉의 지표를 찾으려는 심리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대학입시가 자아 정체성에까지 침투하는 사회에서는 자아-이미지 또는 자기 이익 같은 동기에 의해 편향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런 동기 없이도 단순히 자기 경험과 사회적 위치에 속박됨으로써 생기는 편향도 강력하다. 대입을 겪은 이들은 모두 자기가 겪은 입시제도를 잘 기억한다. 하지만 다른 시기의 입시제도는 잘 모른다. 물론 이러한 무지의 원인은 입시제도가 자주 변경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어떤 해는 수능을 두번 치르기도 했다는 것을 아느냐고 물어보면 해당년도 또는 그 어간에 대입을 치르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적이 있었느냐고 되묻는다.2 자기가 치른 해의 입시에 대한 강렬한 기억과 그외 다른 해의 입시에 대한 무지라는 비대칭적 인지 경향은 우리 사회 성원들의 일반적 특성이다.

이런 편향 때문에 웃음거리가 된 대표적 예가 자유한국당의 주광덕 의원이다. 그는 불법적으로 취득한 조국 딸의 학생부를 공개해서라도 그녀의 영어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한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하지만 외고에서 영어 내신성적 6등급일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 영어실력이 형편없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는 외고 내신성적 실태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특목고 없던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닌 자기 경험에 속박되면, 국회의원쯤 되는 사람도 얼마나 우스꽝스러워지는지 잘 보여준 예이다.

같은 유형의 인지적 편형이지만, 그 속내가 잘 드러나지 않은 것도 있다. 조국 딸의 입시와 관련해서 일부 서울대생이나 고려대생이 집회를 통해 격렬하게 비판한 일이 그것이다. 그들의 집회는 전략적인 면도 있고, 앞서 지적한 정당화 욕구에서 비롯되기도 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집회 참여자 상당수가 심한 분노를 드러냈는데, 이를 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대나 고려대의 경우 현재 입학생의 대략 75%가 수시전형으로 합격했고, 수시전형의 대부분은 특기자전형이나 학생부종합전형이므로 그들도 조국 딸처럼 이런저런 스펙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을 텐데, 그렇게 분노하는 이유를 얼핏 봐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시기의 입시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 무지를 생각하면, 그들의 태도를 일부 이해할 수 있다. 조국 딸은 2010학번이고, 군대를 다녀와서 더 나이 많은 학부생도 있겠지만, 현재 재학 중인 학생들은 대체로 2016~19학번이다. 그런데 이들과 조국 딸 시기의 입시 사이에는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 나중에는 학생부종합전형(이하 학종)으로 명칭이 바뀐 입학사정관전형은 2008년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몇년 운영해보니 이런저런 문제가 불거졌다. 대입전형의 종류가 너무 많고 복잡해서 학부모의 불만이 컸고, 학생부에 어떤 내용을 얼마나 기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규정이 명료하지 않아 학교나 학생별로 기록의 내용과 분량의 차이가 극심했다. 스펙에 제한이 없다보니 고교생이 정식 학술저널에 게재된 논문에 이름을 올리거나 저서나 역서를 발간하고 해외 봉사활동 등에도 참여했는데, 그런 스펙을 쌓을 기회와 조건 면에서도 학교 및 학생 간 차이가 너무 심했다.

교육부는 이런 문제가 불러올 사회적 파장을 걱정하며, 2013년에 ‘대입전형 간소화 및 대입제도 발전방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것에 입각해 대학별 전형 유형의 개수를 제한하고, 고등학교 외부에서 쌓은 스펙의 학생부 기재를 금지하고, 학생부 기록분량(글자수)을 통제하고 항목을 정돈했다. 그러므로 이런 제도 변경이 제대로 적용된 2015년 이후 입시를 치른 서울대나 고려대 학생들은 조국 딸의 단국대 의대 논문 제1저자 등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보일 것이다. 그들도 ‘소논문’을 쓰고 그 과정에서 외부 전문가의 조력을 받기도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학교의 정규 프로그램을 경유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런 시스템을 경유한 이들에게 조국 딸의 스펙은 이상하고, 어떤 과잉과 불공정의 징후로 보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2008년에서 2015년까지의 입학사정관전형은 용납하기 어려운 ‘부정’으로 가득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제도가 또 한번 바뀐다면, 현재 학생부 기재 원칙에 맞춰 서울대나 고려대 학생들이 잔뜩 쌓아올렸던 교내 스펙들 또한 괴상한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아니 그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들이 본다면, 지금도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많다. 2019년 서울대 입학생의 평균 봉사시간은 139시간이고 가장 사회봉사 시간이 많은 신입생은 489시간이라고 한다. 하루 4.89시간씩 100일을 했다는 얘기다. 신입생 평균 교내상 수상은 30개이고, 가장 상을 많이 받은 이는 108개에 이른다.3 이런 실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상당수 고등학교는 연간 40회 이상의 교내 경시대회를 치른다. 방학을 제외하면 매주 하나꼴이다.4 그런 경시대회 수상실적 하나하나에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을까? 조국 딸과 이들 사이에 제도적 세팅의 차이 말고 어떤 것이 더 있는 것일까? 30개의 수상실적을 위해서 기울였던 ‘노오력’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권능을 부여하는지는 의문이다.

 

 

3

 

조국 딸의 입시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된 이유는 그것이 계층과 세습 문제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예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국사태를 묘사할 때 그렇게 자주 ‘민낯’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일 텐데, 표창장이나 자기소개서 또는 학생부 성적을 본 것으로 누군가의 민낯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언론매체가 선별해서 특정한 방식으로 서술한 사실이며, 우리는 우리대로 각자 자기 관심과 전망에 따라 전해진 사실들 가운데 어떤 것을 무시하거나 주목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다소간이라도 성찰적인 태도를 갖는다면, 헤겔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악은 도처에서 악을 보는 그 눈길 속에 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를 일반화하면, 무엇에 주목하고 무엇을 무시하는가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주체의 관점이고, 주체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낯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드러나는 지점은 시선이 머문 곳이 아니라 시선의 자리일 것이다. 같은 관점에서 박권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의 요구는 ‘조국 딸에 대한 전면조사와 조국 후보 사퇴’였다. (2) 경북대 학생들의 요구는 달랐다. “이건 조국 후보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위공직자 전수조사하고 입시제도 전면 재검토하라!” (3) 한편 ‘청년 전태일’ 대담회서 발언한 청년들의 목소리는 이들 두 집단과도 또 달랐다. “대학을 일찌감치 포기한 채 19살 때부터 노동을 해야만 했던 우리에게는 논문이니 입시제도 같은 것조차 딴 세상 이야기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출발선에 청년들은 분노한다.5

 

세 집단의 요구는 각기 자신의 계층적 지위로부터 사태를 본다는 것, 분노의 내용이 꽤 다르다는 것, 그리고 다른 계층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드러내준다. 다소 자의적이지만 계층을 상·중·하로 나눈다면 위에서 (1)은 상층 (2)는 중층 (3)은 하층의 반응을 대변하며, (1)은 조국 딸과의 차별화를 추구하고, (2)는 (1)에 대해서 공정성을 요구하고, (3)은 (1)과 (2)에 대해서 불평등 문제를 제기한다. 내부적 차별성을 시도하는 (1)에게는 조국 딸의 불법성 여부가 중요하지만, 상층의 입시전략과 사회자본의 강력함을 들여다볼 기회를 가진 (2)와 (3)에게는 불공정성과 박탈감이 문제이지 불법성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조국 딸 사례가 합법이라면 분노는 더 커질 것이고, 정당성 요구는 일탈적 개인 비판을 넘어서 체제 비판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

그런데 제기된 것 가운데 공정만이 지배적인 초점을 획득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미 지적했듯이, ⑴은 자신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이 치른 절차가 공정한 것으로 여겨지길 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정한 절차를 치렀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조국 딸을 일탈적 사례로 모는데, 그것은 그들이 공정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2)는 자신의 ‘불운한’ 상태의 원인을 제도의 불공정성에서 찾을 것이다. 그것이 사실과 부합할 수도 있지만, 심리적으로 편리한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그들은 ‘더 많은’ 공정(그것이 무엇인지는 따져볼 문제지만)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1)과 (2)는 요구 수위와 방향이 다를지라도 무엇이 의제가 되어야 하는지는 합의된 상태이다.

(3)은 어떤가? 그들은 분노하지만, 이 분노를 규범적 요구로 전환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절차의 개선이 아니라 삶의 제 조건의 평등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요구는 어떤 사회적 지원을 바라는 ‘비굴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빈자가 전체 사회성원을 향해 부자가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빈자가 자신은 빈자이니 세금을 더 적게 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평등이나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넘어서는 조건들의 평등 요구는 오직 시민적 권리로서의 복지개념 속으로 들어올 때만 도덕적 자기훼손 없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국민적인 사회복지적 기획을 경유할 때만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물론 조건의 평등 요구를 교육영역에 직접 투입할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제화 측면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서 대략 상층 20%의 관심거리가 아닌 것을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리기란 무척 어렵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고통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백일 이상의 고공농성이 필요한 사회이며, 그렇게 된 이유는 전체 사회의 관점에서 사회적 의제를 발굴하고 제기할 집단인 교수와 지식인, 기자, 정치인 모두가 대략 상위 20%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집단이 주도하는 담론 속에서 공정은 x를 투입하면 y를 산출하는 기계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조건의 평등과 그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열정의 원천인 사회적 연대성과의 접촉을 상실한 채, 과정을 규율하는 규범으로서 인식되는 공정은 결과의 차등적 배분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된 듯하다.

 

 

4

 

조국 딸의 입시의혹에 의해 불붙은 교육불평등 문제에 대한 현 정부의 명시적인 정책적 반응은 2019년 10월 22일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서 드러났다. 대통령은 국민의 요구를 “제도에 내재된 합법적인 불공정과 특권까지 근본적으로 바꿔내”라는 것으로 읽었고, “학생부종합전형 전면 실태조사를 엄정하게 추진하고, 고교서열화 해소를 위한 방안”을 강구할 것을 약속했다. 10월 25일 교육개혁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2022년 입시부터 수능 중심의 정시를 확대하고 2025년에는 특목고와 자사고를 폐지할 것임을 예고했다. 공정의 요구에 대해 정시확대로, 평등의 요구에 대해 특목고와 자사고 폐지로 대응한 셈이다.

이런 정책 대응은 대단히 빈약한 동시에 매우 논쟁적인 것이다. 공정이나 평등 같은 의제가 정시확대와 특목고 등의 폐지라는 두 정책으로 지나치게 좁혀졌다는 점에서 빈약하고, 둘 다 이미 사회적 논란과 갈등이 심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논쟁적이다. 어쨌든 현명한 정책적 개입은 아닌 셈이다. 강력해 보이는 특목고류 학교의 폐지도 생각해보면 조건들의 평등에는 미치지 못하고 기회의 평등 확보 시도에 그친 것이지만,6 그조차 논의의 중심에 들어서지 못하고 오직 정시확대만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제도 도입 시기와 관련이 있다. 정시확대는 2022년 시행이라 하더라도 당장 내년 고교 신입생들의 학업과 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특목고류의 폐지 정책이 2025년에 실현되기 위해서는 더불어민주당이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모두 승리해야 가능하리라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정부 대응에 대해 심상정 의원은 곧장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대입제도 개선의 핵심 쟁점은 정시 수능비율 확대라는 블랙홀에 빠져버렸다”며 강한 불만을 표했다. ‘블랙홀’이라는 말 속에는 절차에 대한 불만과 개혁내용에 대한 불만 모두가 스며 있다. 정부가 정책의 근거를 2018년에 이뤄진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위원회의 보고서에 둔 만큼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비판의 타당성은 제한적이다. 요점은 역시 정시확대가 타당한 개혁 방향인가에 있다. 심상정은 정시가 주입식 학습을 강화하고 교육불평등을 심화한다고 판단한다.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정시보다는 학종 중심의 수시가 더 낫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그런데 이런 판단이 그의 격한 반응을 정당화할 정도로 타당한지 의문이다.

수능이 나쁘다거나 학종이 나쁘다는 주장, 그리고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낫다는 주장을 증명할 ‘인과적으로 그럴듯한’ 데이터나 ‘규범적으로 그럴듯한’ 이론은 충분히 많다. 그것을 적절히 끌어오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무능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교육부가 최근 발표한 서울 소재 13개 대학 감사 결과에 대한 해석도 그렇다. 어떤 언론사는 학교 유형별 합격률에 주목한다. 예상할 수 있듯이, 합격률은 수능과 마찬가지로 학종에서도 과학고(26.1%), 외고 및 국제고(13.9%), 자사고(10.2%), 일반고(9.1%) 순이며, 그것을 두고 고교서열화를 확인했다고 보도한다.7 하지만 또다른 언론사는 이번 발표에서 소득수준 8분위 이하만 신청 가능한 국가장학금 신청통계에 주목한다. 해당 통계는 기회균형 선발을 제외해도 학종 합격자가 정시 합격자보다 8분위 이하 비중이 높다(6.2%)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학종의 교육불평등 완화 기능을 보여주는 근거라는 것이다.8 전혀 상반된 해석이지만 모두 각자의 근거를 들어 자기 주장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수능이든 학종이든 그것의 도입 맥락은 모두 사고력 또는 창의성이나 잠재력 같은 교육적 가치와 관련된 것이지 계층 불평등 완화 기능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수능과 학종은 모두 계층 불평등을 재생산하거나 심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서는 수능이든 학종이든 약 70% 이상의 합격자가 소득분위 9, 10이라는 것, 그리고 전체 고교생 가운데 5% 미만인 특목고류의 학교 졸업생이 그런 대학진학자의 약 50%를 차지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종과 수능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불평등 완화에 도움이 되는가 논쟁하는 것은 가소로운 데가 있다. 입시제도가 계층 불평등을 완화해주길 바란다면, 곧장 그렇게 기능할 제도를 도입하면 된다. 예컨대 전체 학종의 50% 정도를 ‘계층균형전형’에 할당하고, 그 정원을 다시 소득분위 1~4에 일정 부분, 그리고 소득분위 5~8에 일정 부분 할당하는 식으로 말이다.9

논쟁의 선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탓에 정부의 정시확대 정책에 대한 사회적 반발에 우려할 점과 우스꽝스러운 점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우려할 점은 정부의 정시확대가 우리 사회의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모두에게서 공격받고 있다는 것이다. 조국사태가 야기한 ‘진보개혁진영의 내부 분열’ 운운하는 논의가 이 영역에서도 재연될 가능성이 큰 셈이다. 물론 정부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선명하면, 진영논리에 구애되지 않는 비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 심상정으로 대변되는 집단 내지 분파의 반응은 부적절해 보인다.

정부의 정시확대는 기본적으로 여론에 부응하는 것이다. 2019년 10월 28일 리얼미터 조사에 의하면 63.3%의 국민이 수능 중심 정시확대에 찬성한다. 이런 여론에 부응하는 것은 정부로서 당연한 일이다. 굳이 비판한다면, 여론을 받아들인 정부가 아니라 그런 여론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그러기 전에 왜 대중이 정시를 훨씬 더 선호하는가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학종을 선호하는 진보진영의 정치인이나 학자는 현재 여론조사 결과가 상층은 자신에게 유리한 수능선호를 표하고 중하층은 자신에게 어떤 제도가 유리한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학종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중하층이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그것에 반대할 수 있다. 그들은 감내할 정도의 불리함이라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패배하기를 원할 수 있다. 그들이 보기에 수능이 ‘저들의 승리와 나의 패배’를 더 마음 편히 받아들이게 하는 제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종이 수능보다 낫다는 (논쟁의 여지가 큰 몇몇 연구에 기초한) 명제에 입각해, 대중에 대해 후견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긴 어렵다.

우스꽝스러운 점을 보자. 정부의 정시확대는 아주 소극적인 것이며, 이런 정책적 소극성이야말로 진짜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정부는 전체 대학의 입시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종 입시 비중이 너무 높은 대학에 대해 수능 비중을 40%선으로 올리는 방안(‘파격적’일 경우 50%로 올리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그럴 경우 아마도 그 대상은 서울 소재 상위 15개 대학에 집중될 것이고,10 그렇게 되면 정시로 뽑는 인원은 지금보다 고작 4,000명 늘어날 뿐이다.11 이 정도 숫자도 상층에게는 충격이 작지 않다. 상층 가족은 입시전략을 재구성해야 하고, 강남 학원들도 운영방향을 새로 설정해야 한다. 하지만 정의당이 얼굴을 붉히며 반대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슬픈 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서 상위 20%의 관심거리만 의제로 떠오른다는 것, 그 점을 사회적 소수자 편에 서겠다는 정당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학종을 불신하는데, 왜 학종에 대해 많은 지식인, 심지어 대중의 여론에 부응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인 정치인까지 옹호하고 나서는 것일까? 그 이유는 대중의 여론과는 다르게 교육과 관련된 중요 집단의 이해관심이 학종으로 수렴했기 때문이다. 우선 대학이 이 제도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입시에서 막대한 재량권 행사와 불투명성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2009년경 고려대는 고교등급제를 실행했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대법원 판결로 혐의를 벗었지만, 그것을 도덕적 의미에서 무죄로 받아들이는 순진한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지금은 ‘사실상’ 고교등급제를 실시한다 해도 그 모든 과정이 학종이 함축하는 재량권 속으로 녹아 사라져버린다. 교육부가 13개 대학의 감사를 통해 고교등급제를 입증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입증할 수 없도록 설계된 제도가 학종이니 말이다.

학종은 대학에 충성도가 높고 이탈률이 두배쯤 낮은 합격생을 데려다준다. 통상 정시 합격자는 그루초 맑스(Groucho Marx)의 유명한 농담, “나는 나를 회원으로 받아주는 클럽에는 가입하고 싶지 않아요”와 같은 심리상태에 젖는다. 그런데 학종은 그런 심리를 “나를 회원으로 받아주는 클럽이 고마워요”로 바꾸는 ‘마술적’ 능력을 발휘한다. 학종 지원자는 입시에 성공하기 위해서 해당 대학 특정 학과에 맞춰진 교과 및 비교과 활동을 미리 수행해야 한다. 학생부의 ‘교과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이른바 ‘세특’)의 한줄한줄이 살얼음판 걷는 것처럼 느껴지고, 자기소개서를 통해 자신이 그 대학 그 학과에 맞는 학생임을 잘 표현해야 한다. 그 과정이 전적으로 자기기만적일 수는 없다. 자신이 그 학과에 맞는 학생이라는 자소서를 쓰는 과정은 어느 정도는 정말 그런 내면을 창출하는 과정이며, 그만큼 지원학과에 심리적 충성도를 갖게 된다.12

교사들도 학생부 위주 전형이 마음에 든다. 학생부 위주 전형은 교사들의 수업에 대한 주도권과 평가권한을 대폭 강화해주기 때문이다.13 특목고와 자사고도 이 제도가 반갑다. 이들은 이런 입시제도에 학생들을 잘 준비시킬 자신이 있다. 그래서 이런 학교 학생부는 일반고와 두께부터 다르다. 교과발달상황에 적을 문장을 하나 만들어 여러 학생에게 똑같이 복사해 넣는 따위의 무성의함도 없다.14 수능 중심의 인터넷 강의 학원을 제외한 다양한 입시학원들도 찬성이다. 수시전형이 엄청나게 복잡한 것 자체가 이들에겐 영업기회를 넓혀준다. 마지막으로 교육전문가도 이 제도에 찬성한다. 수시전형 대신 객관식 선다형 시험문제와 주입식 교육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도무지 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런저런 연구결과에 기초해서 수능보다는 학종이 교육불평등을 줄여주는 제도라고 확신한다. 교육부는 이런 전문가 집단의 의견을 근거로 학종 확대를 지휘해왔다. 2008년 입학사정관제 도입과 더불어 그들의 임금에 예산을 지원했고, 2014년부터는 ‘고교교육 정상화 기여대학 지원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매년 500억 내외의 예산을 학종전형을 늘리는 대학에 지원해왔다.15 대학은 자신들이 원하는 전형을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입시제도 결정에 영향력 있는 집단들이 각자 ‘달콤한’ 이유로 학생부 위주 전형에 찬성하기 때문에, 아주 소극적인 수준에 머문 현 정부의 정시확대 정책조차 이런저런 공세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5

 

공정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공정이 정의의 원칙으로 심화되거나 넓게 확장되지 못하고 빈약하고 납작한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공정이 우리를 매번 같은 멜로디로 돌려보내는 도돌이표처럼 되어버린 현 상황에서는 평등이라는 단어를 좀더 동원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대략 가족의 불평등, 학교의 불평등, 그리고 직업과 경제생활의 불평등으로 구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영역의 불평등을 치유할 정책들이 없지는 않다. 가족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재산세, 상속세 그리고 증여세를 강화하고 엄격히 시행하면 된다. 직업과 경제생활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를 엄격히 징벌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없애면 된다. 그리고 교육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교 간 서열을 완화하거나 없애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학교 간 차이를 줄여야 한다.

서울대의 우수함이나 대원외고의 우수함이 교육효과보다는 선발효과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확실히 그런 면이 크다. 하지만 진실에 더 가까운 그림은 선발효과에 입각해서 더 좋은 학생을 유치한 학교는 더 많은 사회적 자원을 획득하고, 그럼으로써 더 좋은 교육효과를 만들어내며, 그것이 다시 더 좋은 선발효과를 만들어내는 순환과정이다. 두드러진 차별이 없을 때조차 이런 자기강화적 과정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는 간단한 사고실험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어떤 농구팀의 A선수는 슛 성공률이 60%이고, B선수는 40%라고 해보자. 팀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A에게 슛 기회를 더 많이 주는 편이 유리할 것이다. 만일 A가 B보다 2배 더 패스를 많이 받고 그만큼 슛 찬스를 가진다면, 두 선수의 실력의 비율은 6:4였지만 경기 후에 득점의 비율은 12:4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두 선수의 실력 차이를 실제보다 더 크게 지각하고 그것에 따른 보상과 지원을 거듭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수행성 차이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만일 A선수의 실력이 부모의 재력이나 사회적 네트워크 덕에 뛰어난 코치에게서 따로 훈련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면, 이 가상적 예는 우리 사회의 실상과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런 코치의 존재에 대해 우리는 깊은 우려를 표해왔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패스, 즉 선발된 학생에게 주어지는 더 나은 교육조건, 그러니까 학교 간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은 관심을 보내지 않았다.

실제로 몇몇 데이터는 이런 패스의 실태에 대해 말해준다. 예컨대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의원의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자율동아리 활동 참여학생 비율은 일반고에 비해 영재고는 10.8배, 과학고는 3.6배, 자사고(전국)는 2.7배, 국제고는 2.6배 높게 나타났다. 영재고 학생의 경우 1인당 평균 5개 이상의 자율동아리 활동을 하는 반면, 일반고 학생의 경우 2명당 1개꼴로 자율동아리 활동을 하는 셈이다. 자율동아리 활동을 하는 학생들에게 지원되는 금액도 고교유형별로 격차가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율동아리 활동에서 학생 1명에게 지원되는 예산도 일반고에 비해 영재고는 17.4배, 국제고는 5.4배, 과학고는 4.8배 많이 지원되고 있다.16 일반고보다 좋다는 학교들은 그저 똑똑한 아이를 모아놓아서 ‘동료 효과’(peer group effect)의 이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훨씬 더 많은 지원을 받는다. 이런 불평등 상황에서 비교과 활동이 중요한 전형자료가 되는 학종은 상위권 대학을 중심으로 그 비중이 75%에 이르렀다. 공정성을 가능하게 해줄 전제인 평등의 확보 없이 학종이 지나치게 확장된 것이다.

대학 단계에서의 불평등은 더 심각하다. 이른바 ‘SKY’ 대학의 국비지원액 규모는 전체 대학 총지원액의 10.2%에 이르며, 상위권 8개 사립대의 재정지원액이 전체 대학 지원액의 20%에 이른다.17 이런 재정지원의 차이는 대학생 1인당 교육비와 교수당 학생 비율을 통해서도 나타나거니와, 그것의 순위는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대학서열과 일치한다. ‘대학알리미’(www.academyinfo. go. kr)가 제공하는 정보에 의하면, 서울대의 1인당 학생교육비가 약 4,300만원이라면 연세대는 약 3,000만원이고 한양대는 약 2,100만원이며, 전임교수 1인당 학생수는 서울대가 7.4명이고, 연세대는 11.3명, 그리고 한양대는 15.2명이다.18

왜 중앙정부나 교육청은 이렇게 불평등한 방식으로 예산을 지원하는 것일까? 심층적 조사가 없어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몇가지 가설을 제시해볼 수는 있다. 우선 재정 분배의 원리를 규율하는 사회적 담론의 영향이 상당히 클 것이다. 오랫동안 교육재정을 배분하는 원리는 ‘선택과 집중’이었다. 교육재정은 모자라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성과가 높고 노력하는 학생과 학교를 선택해 그들에게 사회적 지원을 몰아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발전주의 뒤에는 가족영역에서는 장남에게, 교육영역에서는 몇개의 대학에, 경제영역에서는 몇개의 대기업/재벌에 지원을 집중하는 관행이 있었다. 하지만 장남과 명문대학과 대기업/재벌이 그렇게 해서 이룬 성과를 동생, 군소대학 그리고 중소기업과 나누었는지 의문이다. 선택과 집중은 배제와 차별로 귀결되었고, “있는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기”(「마태복음」 25장 29절)는 과정이 거듭되었을 뿐이다.

다른 한편 선택과 집중 담론은 예산 지원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 대학은 교육부가 주도하는 BK21, PRIME, CORE, WE-UP, ACE, LINC, CK 같은 영문 이니셜로 만들어진 재정지원사업에 시달리고 있다(이런 사업명은 정부 부처도—좀 역겹게 느껴지지만—무슨 취향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정규적인 교부금 형태가 아닌 이런 사업 중심의 재정지원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칙을 구현하기 좋은 형태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이뤄진 사업은 세가지 효과를 발휘했을 뿐이다.

첫째, ‘마태 효과’를 강화했다. 사업예산을 따기 위한 경쟁에서는 여건이 좋은 대학이 유리하고, 그렇게 해서 더 많은 지원을 받은 대학은 다음 재정지원 사업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서울 소재 사립대학에 대한 지원이 국공립대학에 대한 지원을 앞지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대학 서열화가 더욱 서울 중심으로 강화되었다.

둘째, 교육부의 대학 통제력을 높였다. 언제나 교육부가 부여하는 경쟁규칙에 순응하고 그것에서 성과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교육부 퇴직관료와 재정지원 사업을 따내려는 대학 사이에 의심스러운 유착을 발전시키기도 했다.19

마지막으로 의도한 결과는 아니겠지만, 사업 중심의 재정지원은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사립대학에 지원하면서도 여전히 부실과 비리에 젖은 우리나라 사립대학 재정의 건전화와 투명화 그리고 사립대학 운영의 민주화를 위해서 개입할 사회적 지렛대를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요점은 교육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정부가 할 일차적 과제는 재정지원의 불평등을 시정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재정지원의 불평등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도적 편성을 바꾸는 것이다. 뭐라고 해도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고, 그 서열화로 인해 대학입시가 과열되었으며, 그 서열화된 대학이라는 벽 때문에 평준화를 향해 나가던 중등교육 또한 재서열화된 것이므로, 우리 사회가 성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학 서열화를 돌파하는 제도적 모색이 필요하다. 관련해서 현 정부도 신중하게 고려했던 것이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 논의이다. 그리고 필자 또한 기존의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 논의의 실행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서열구조 타파에 대한 사회적 열망을 충족하기 위한 몇가지 제안을 제출한 바 있다.20 그런 제안들이 실제로 구체화된다면, 상당한 성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하지만 현임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을 돈 시점에서 제도적 편성을 크게 바꾸는 정책들은 그 초석을 마련하는 수준까지는 몰라도 완연한 성과를 이루는 지점까지 나아가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재정지원의 불평등을 고치는 일은 지금도 정부가 충분히 주도권을 쥐고 해나갈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개혁이 입시제도를 손보는 수준으로 오그라든 현 상황에서 벗어나 교육개혁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작업은 촛불혁명의 뜻을 이어받는다는 면에서나 조국사태로부터 얻은 교훈을 실천한다는 면에서나 지체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6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향학열과의 연결이 희미해진 지 오래이다. 지금 우리의 교육은 상속의 열정과 점점 더 깊은 관련을 맺어가고 있다.21 상속의 열정은 사회가 저성장시대로 진입하면서 기대와 열망의 간극이 커지고, 지위상승보다 지위하강의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더 강렬해진다. 저성장시대에 만일 상층이 자신이 누리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들의 지위 방어에 그들이 가진 권력자원을 강도 높게 쏟아붓게 되면, 상층과 하층의 차이는 더욱 벌어질 것이고, 이로 인해 심화된 불평등은 상속의 열정을 더욱 강화한다.

이런 과정은 입시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상층의 자녀들에게도 심리적 댓가 없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격화된 경쟁으로 인해 예민해진 주체는 수능 점수 몇점을 올리기 위해서, 혹은 학종용 ‘소논문’ 작성을 위해서 무언가 자신의 소중한 것을 희생했다는 심리를 갖게 된다. 노력이 보상받지 못하면, 사람은 낙담한다. 하지만 ‘노오력’이 보상받지 못하면, 사람은 원한 감정(ressentiment)을 갖게 된다. 사회가 ‘노오력’에 대해 보상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기-피해자화(self-victimization)의 감정적 뿌리는 이런 것에 닿아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자신이 한 것이 노력에 그치지 않고 ‘노오력’의 반열에 올랐음을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는가? 합격 이외에 무엇이 그런 기준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사회에서 합격 그리고 자신의 합격 루트는 정체성 속에 침투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가진 것에 자기와 다른 루트로 도달하는 것조차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왜 ‘지균충’이라는 말이 생겼고, 왜 기간제교사의 정규직화에 임용고시 통과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겠는가? 이렇게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사회에서 이미 납작해진 공정 개념은 위를 향한 시기와 아래를 향한 거만함을 감추는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어떤 정책과 경로를 거쳐야 이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속을 향한 열정의 동기가 자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을 지나친 경쟁으로 내모는 우리의 생활양식이 실질적 합리성(substantive rationality)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구체적 경로가 무엇이 되든 상속의 열정 밑에 있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우리가 우선 갖춰야 할 것은 필라델피아 연방의회에서 조지 메이슨(George Mason)이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 깃든 태도, 성숙하고 계몽된 자기이해일 것이다.

 

우리는 인민을 구성하는 모든 계급의 권리를 돌봐야 한다. 사람들은 사회 내의 우월한 계급이 이런 인간다움에 기초한 정책적 명령에 무관심할까봐 노심초사해왔다. 지금은 처지가 풍요롭고 고상하다고 해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우월한 계급의 후손마저 사회의 최하층계급의 처지에 놓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을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높은 지위의 시민 못지않게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시민의 권리와 행복을 세심하게 도모하는 그런 정책 체계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모든 이기적 동기, 그 모든 가족적 애착에 있다.22

 

 

  1. 조선일보 2019.8.20.
  2. 수능은 처음 실시되었던 1993년에만 8월과 11월에 두차례 치러졌다.
  3. 「서울대 수시합격생 스펙 보니… 상장 108개, 봉사활동 489시간」, 동아일보 2019.9.15.
  4. 이기정 엮음 『입시의 몰락』, 창비교육 2018, 87면.
  5. 박권일 「조국 사태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 뉴스민 2019.9.9. 괄호 안의 숫자는 논의를 편의를 위해서 인용자가 붙인 것이다.
  6. 특권적 교육재화 파괴로서 특목고 폐지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는 졸고 「우리에게 해체할 평준화가 남아 있는가」,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비 2017, 264~81면 참조.
  7. 「13개大 학종서도 특목·자사고 더 뽑아… 교육부 “고교서열화 확인”」, 동아일보 2019.11.5.
  8. 「‘저소득층 합격’은 학종이 수능보다 많아」, 한겨레 2019.11.5. 참고로 한국장학재단이 지급하는 국가장학금 1유형의 기준이 되는 소득분위는 1~10까지로 나뉘며, 숫자가 높을수록 부유한 가정이다.
  9. 대학입시를 통한 불평등 완화에 관심을 기울인 글로는 장덕진의 「공정성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경향신문 2019.11.4)가 있다. 그는 서울대의 지역균형선발 같은 것에 정원을 더 많이 할당하는 것이 공정성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타당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회적 주체로서 취하는 입장은 놀라울 정도로 무책임하다는 점은 지적해두고 싶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속한 서울대의 전형 방식은 학종과 정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대학에는 없는 지역균형선발 제도가 있고 도입 당시의 우려와는 달리 지역균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잘 해내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입학에서 졸업까지 꾸준히 성과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교육의 효과 아니던가. 서울대에 정시를 확대하라고 요구하기보다 지역균형을 확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떨까.” 그가 보기에 서울대의 지역균형선발이 좋은 제도라면, 그것의 확대를 위해서 우선 노력해야 하고 그런 노력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바로 서울대 교수인 그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누구에게 “서울대에 정시를 확대하라고 요구하기보다 지역균형을 확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떨까”라고 묻고 있는 것일까?
  10. 실제로 이런 상위권 대학이 아니면 학종의 비중은 그렇게 높지 않다. 전체 대학 평균 전형 비중은 학생부교과전형이 대략 50%를 차지하며, 학종은 25% 수준이다.
  11. 「SKY 등 주요 15개大, 정시비중 40% 땐 수능으로 4000명 더 뽑아」, 한국경제 2019.10.25.
  12. 송지은·이광호 「학생부종합전형 입학 신입생의 대학생활 적응경험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 K대학교 학생부종합전형 입학생을 중심으로」, 『청소년학연구』 24권 2호(2017) 221~50면 참조.
  13. 이 문제를 교사들은 교사의 권력 강화 문제로 보지 않을 것이다. 교사들은 학종 덕분에 주입식이 아닌 매우 의미있는 교육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면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교교육이 황폐해지는 이유는 수능 때문만은 아니다. 고교 교과성적 시스템도 중요한 장애이다. 9등급제로 운영되는 내신은 수능보다 엄청나게 적은 수의 학생을 한줄로 세우는 체제이다. 대학이 고교 교과성적의 표준편차까지 면밀하게 살피기 때문에, 교사는 자기 학교의 교과성적 우수자의 대학 진학을 돕기 위해서는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를 출제해야 한다. 하지만 교사들은 수능 확대의 경우와 달리 이런 문제에 대해 강력히 도전한 적이 거의 없다. 학생부교과전형이나 학종전형이 모두 교사의 권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교사들이 수능을 비판하는 동기를 권력 문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4. 대학입시 실무자들이 보기에 학종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교사 역량에 따른 학생부 기록능력의 차이이다. 이것은 학종이 교사와 학생의 2인3각 경주라는 것을 뜻한다. 류성창·이윤옥 「고등학교 유형별 교육과정 분석 및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한 대학 입시전형 실무자들의 인식: K대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교육문제연구』 제36권 제3호(2018) 133~59면 참조.
  15. 하지만 최근 교육부는 학종 비중의 지나친 증가에 대한 사회적 반발 그리고 문재인정부의 정책 기조 변화 때문에 이미 2019년 사업에서 정시확대를 요구했다. 이런 사업 선정기준에 반발한 고려대와 성균관대 포함 10개 대학이 탈락했다. 교육부와 대학의 이해관심의 일치가 끝난 것이다.
  16. 「신경민 의원, “학생부 비교과 활동 지원금 일반고 대비 국제고 8.8배, 영재·과학고 6배로 격차 심각”」, 영등포신문 2019.9.30.
  17. 박정원 「고질화된 교육불평등: 대학입시에서 대학재정까지」, 『2019년 한국대학학회 심포지움 자료집: 사회불평등구조와 대학정책 방향』, 36면.
  18. 1인당 교육비는 대학원생을 포함한 수치이고, 전임교수 1인당 학생수는 학부재학생 기준 수치이다.
  19. 「무소불위 ‘교피아’… 행정학 학위로 경호과 거쳐 유아교육 교수로」, 매일경제 2019.4.21 참조.
  20.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론의 최초 구상에 대해서는 정진상의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책세상 2004)와 졸고 「지구적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교육개혁의 길」(『창작과비평』 2016년 가을호 96~121면) 참조. 필자의 글은 정진상의 논의를 두가지 면에서 갱신하고자 했다. 하나는 서울대가 국립대학체제에서 벗어나 법인화된 국면에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는 어떻게 구상되어야 할지 답하고자 했으며, 다른 하나는 정진상의 논의에서 빠진 통합네트워크의 지리적 통합성 문제에 답하고자 했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서울대 없는 국립대 통합네트워크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논증했고, 후자와 관련해서는 세종시를 중심으로 통합네트워크를 구성하면 지리적 통합도를 높여서 단순히 공동선발 및 공동학위 운영을 넘어서는 시너지 효과를 연구와 교육 양면에서 거둘 수 있음을 주장했다.
  21. 이와 관련해서는 김종엽·정민승 『입시는 우리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 교육과학사 2019 참조.
  22. Jon Elster, Explaining Social Behavior (Revised Edi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68면에서 재인용.